『82년생 김지영』 은 작년 가을에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출간될 때 부터 계속해서 읽어야지 하면서도 손에 잡지 못한 책이었다. 그런데 출간된지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에도 여전히 서점의 판매 순위는 상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책들은 무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다시 한 번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지난 5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 간의 청와대 오찬이 있었는데,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이 책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로 드린 것이다. 그리고 책의 속지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82년생 김지영』 은 190 페이지 정도로 두껍지 않은 책이다. 그리고 소설도 아주 쉽게 읽혀서 두 세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정도의 분량이다. 그런데 짧은 독서 후에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책을 쉽사리 접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자인 엄마, 여자인 내 아내, 아이들의 엄마인 내 아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인 조남주 작가는 <PD 수첩>, <불만 제로>, <생방송 오늘 아침> 등 시사교향 프로그램의 작가로 10년 동안 일을 해왔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내용들은 남자인 나에게 그대로 비수가 되어 찔러 버린다. 마치 시사 방송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남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잘 모른다. 그냥 평소의 일반적인 행동과 대화였다. 그런데 그것은 여자들에게는 날카로운 칼날로 향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칼날에 상처가 남는다.
결국 면접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깜빡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조바심 내면서 헤매기 싫어 곧바로 택시를 탔다.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기사님은 룸미러로 김지영 씨를 한번 흘끔 보더니 면접 가시나 보네, 했다. 김지영 씨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82년생 김지영』 中, 100p -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택시 기사님은 면접을 보러가는 지영씨에게 마치 인심을 쓰는 듯이 말한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어쩌면 이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손녀 같은 손님을 배려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이 할아버지는 몇 십년 전의 생각에 머물러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인심을 좀 썼네' 하며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선물로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 할아버지 너무 했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그 할아버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82년생 김지영』 中, 144p -
김지영씨가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 부분에서는 마치 나에게 하는 소리 같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방금 전에도 글을 쓰면서 '집안일을 도와준다' 라는 표현을 썼다가 서둘러 지웠다. 어쩌면 이런 게 더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다. 행위자는 스스로 만족하며, 마치 선(善)을 행하는 듯한 감정이 든다. 하지만 그 행위를 당하는 당사자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가하는 언어적, 육체적 폭력에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입장이 되고 만다.
지난 5월 17일에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1주기' 관련된 집회가 강남역에서 있었다. 1년 전 강남역 남여 공용 화장실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사건, 범행 동기는 단지 '여자' 였기 때문이었다. 이유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 무섭고, 사람들의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사건 1주기 그 날 다른 곳에서 역시 남여 공용 화장실에서 한 여자가 성폭행을 당할 뻔 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범인은 바로 잡혔다고 한다. 여성들은 단지 걸어다니는 그 자체로 위협을 받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 여자는 남자들의 어머니, 아내, 누나, 동생 들이다.
이런 사건은 극단적인 예이다. 나를 포함한 다른 남자들은 당연히 그런 놈들을 비난한다. 당연히 이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여자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범한 남자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은 물어 본다. 당신은 어떠시냐고?
나는 항상 평범한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내 관점일 뿐이었다.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김지영 씨가 겪는 일들은 내 아내가 겪은 일들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지금의 삶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우선 내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이 이 작품을 읽은 후기를 읽어보면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읽는다고 한다. 또한 자기가 경험한 일들과 비슷한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읽는 내내 김지영 씨로 변한다고 한다. 가장 가깝고 소중한 이의 아픔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나와 태어난 해가 같은 82년생 김지영씨에게 감사하다.
p 42
"짝, 흑흑, 바꿔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어흐흑, 걔랑, 흑, 짝이 안 되게, 흑흑, 해 주세요."
선생님은 김지영 씨의 어깨를 토닥였다.
"근데 지영아, 선생님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는데 지영이는 모르는 것 같네? 짝꿍이 지영이를 좋아해."
김지영 씨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뚝 멈췄다.
"걔 저 싫어해요. 그동안 괴롭힌 거 다 아신다면서요."
선생님은 웃었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힌다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되짚어 봤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 아이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당해 온 것도 억울한데, 친구를 오해하는 나쁜 아이가 되기까지 했다.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너무너무 싫어요."
다음 날 자리를 다시 정했다. 김지영 씨는 키가 가장 커서 늘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았던 남학생과 짝꿍이 되었고, 둘은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
p 49
일곱 살 막둥이는 절대, 절대, 엄마와 잘 거라고 방 따위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고, 어머니의 계획대로 자매는 자매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매의 방을 꾸며 주려고 아버지 몰래 돈을 따로 모아 두었다고 했다. 새 책상 두 세트를 사서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나란히 놓았고, 옆 벽면에 새 옷장과 책장을 놓았고, 1인용 요, 이불, 베개 세트를 하나씩 새로 사주었다. 그리고 맞은편 벽에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였다.
"여기 서울 좀 봐. 그냥 좀이야, 점.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 점 안에서 복작복작하면서 살고 있다는 거다. 다 가 보진 못하더라도 알고는 살라고. 세상이 이렇게나 넓다."
p 92
"김지영 이제 걔랑 완전히 끝난 것 같던데?"
예전부터 김지영한테 관심 있지 않았느냐,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해 봐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처음에는 꿈인가 했는데 곧 정신이 들면서 방 안에 있는 무리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복학생 선배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이제 잠도 완전히 깼고 좀 덥기도 했는데 본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불을 걷고 나갈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민망한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 ,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함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p 100
결국 면접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깜빡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조바심 내면서 헤매기 싫어 곧바로 택시를 탔다.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기사님은 룸미러로 김지영 씨를 한번 흘끔 보더니 면접 가시나 보네, 했다. 김지영 씨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p 116
밤 12시가 조금 넘자 부장은 김지영 씨의 잔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이 다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대리기사와 통화하고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내 딸이 요 앞 대학에 다니거든.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 집에 간다고 무서우니까 데리러 오라네. 미안한데 나는 먼저 갈테니까, 김지영 씨, 이거 다 마셔야 된다!"
김지영 씨는 겨우 붙잡고 있던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그리고 갑자기 취기가 올라와서 남자치구에게 데리러 와 달라고 문자메시지를 모냈는데 아무 답이 없었다.
p 131
결국 호주제는 폐지되었다. 2005년 2월에 호주제가 헌법상의 양성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는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왔고, 곧 호주제 폐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개정 민법이 공포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제 대한민국에 호적 같은 것은 없고, 사람들은 각자의 등록부를 가지고 잘 살고 있다. 자녀가 반드시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혼인신고를 할 때 부부가 합의했다면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다.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른 경우는 호주제가 폐지된 2008년 65건을 시작으로 매년 200건 안팎에 불과하다.
"아직은 아빠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하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설명하고 정정하고 확인해야 할 일들도 많이 생기겠지."
김지영 씨의 말에 정대현 씨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아니요' 칸에 표시를 하는 김지영 씨의 마음이 왠지 헛헛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김지영 씨는 혼인신고를 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p 138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와,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그럼 너도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임신으로 인해 겪는 모든 불편과 고통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동기의 말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남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사람이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지영 씨가 조용하자 오히려 같이 있던 또 다른 남자 동기가 나무라듯 말했다.
"야 30분 늦게 오신 30분 늦게 퇴근하잖아. 똑같이 일하는데 왜 그래?"
"우리가 칼퇴하는 회사도 아닌데 뭐. 그냥 30분 날로 먹는 거지."
홧김에 김지영 씨는 늦게 출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일할 거라고. 1분도 날로 먹을 생각 없다고. 그리고 미어터지는 지옥철을 견디기 힘들어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하며 내내 섣불리 뱉어 버린 말을 후회했다. 어쩌면 자신이 여자 후배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
p 144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p 163
오랜만에 밖에서 마시는 커피는 맛이 좋았다. 바로 옆 벤치에는 서른 전후로 보이는 직장인들이 모여서 김지영 씨와 같은 카페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피곤하고 답답하고 힘든지 알면서도 왠지 부러워 한참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옆 벤치의 남자 하나가 김지영 씨를 흘끔 보더니 일행에게 뭔가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 하려고......
공부는 읽기와 글쓰기를 넘어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공부는 시인 네루다의 질문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회학자들의 관찰력과 인문학자들의 감수성을 통해 공부를 삶으로 살아야 한다. 『공부할 권리』는 이제 진짜 공부를 시작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제공하는 인문학 선언이 될 것이다.
책의 뒷표지에 적혀있는 글귀다. 정여울 작가가 말하는 공부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 그것도 '인간다운 삶'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공부할 권리』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다.
이 책은 인문학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각각의 장 마다 특정한 주제를 바탕으로 작가의 생각
과 관련된 책을 인용하면서 전개된다. 다양한 소주제를 가진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정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이다. 내 안의 감정을 올바르게 느낄 수 있게 해주고, 때로는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재조명해주는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했다.
특히, 분노, 고독(외로움), 무관심이 명징하게 생각나는 단어들이다.
분노는 폭력과 테러, 살인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정의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감정입니다. 부당함에 대한 영혼의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중추가 망가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에너지도 있지요. 인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회를 파괴시키는 에너지로서의 분노'가 아니라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분노, 그러니까 '정의로운 분노'에 대한 공감대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분노는 통제가 어렵기에 부정적으로 평가받기 쉬운 감정이지만,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발산한다면 분노는 구원의 첫번째 발자국일 수도 있습니다. (p229)
분노하면 일단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된다. 하지만 우리 현대 역사의 중요한 변환점에서는 시민들의 분노로 사회가 변해갔다. 너무 넓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일상 생활을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사건들을 바라보더라도 분노가 필요하다.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해서 대기업들이 소비자 즉 사람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 이에 연계되는 학계의 인사들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기업의 부당함, 사회의 부당함, 권력의 부당함 앞에서 분노는 쉽지 않다. 잘못하면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분노를 참게 되면, 결국은 부정적인 형태로의 분노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p100)
언젠가부터 외로움, 고독이라는 단어는 애잔하게 느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라고 속으로 되뇌일 수도 있다. 특히 한 번쯤 외로움을 지독히 경험해 본 사람은 그 강도가 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로움과 고독은 그 순간은 아플 수 있지만, 그 고독을 잘 극복해낸다면 조금은 성장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결국 자기 삶의 중요한 선택과 판단을 위해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게 되고,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쳐해있는지도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나와 같이 내향적인 성향을 바탕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혼자 만의 시간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언급하는 무관심에 관련된 부분이다. 길지 않은 문장이다. 그런데 그 여운은 결코 짧지 않다.
마틴 루터킹 주니어는 말했지요. 역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짜증나는 아우성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의 오싹한 침묵 때문에 일어난다고. (p187)
얼마 전에 심폐소생술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만약 거리에서 누군가 갑자기 심정지가 일어났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일단 호흡을 확인하고 심폐소생술을 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119에 전화를 해달라고 요청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강사는 말한다. 회사나 서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상관없지만 불특정 다수가 모여 있는 곳에서는 어떤 사람을 지목을 해서 연락을 해달라고 해야 한다. "빨간 색 가방메고 계신 분, 119에 연락 좀 해주세요." 그러면 지목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명확하기 때문에 전화를 건다. 하지만 단순히 "누가 119에 연락좀 해주세요." 하면 누군가는 하겠지 하며 아무도 연락을 하지 않을 수가 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한 사람일 테지만 이런 사회가 안타깝다.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후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잊어버린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라고도 말한다.
'나만 아니면 되지', '누군가는 하겠지', '내가 나서서 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어떨까' 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벗어나자. 왜냐 하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관심이 별로 없듯이 다른 사람들도 당신에게 많은 관심이 없다. 그것을 알고 나면 조금 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같은 시작을 했더라도 살아가면서 각자 겪은 경험들이 이정표가 되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가게 된다. 그 이정표가 꽂혀 있는 지점에서 그들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성격이 조금씩 변해간다. 나 역시 그런 길에서 이정표를 만나는 시점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어떤 길을 가야할 지 결정할 시기가 온 것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아지 뿌옇게 잘 보이지 않지만 생각한 것이 있다.
나는 품위있게 살아갈 것이다.
정여울의 『공부할 권리』의 부제 역시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이다.
부제가 처음에는 다가오지 않는 글귀였지만, 왜 그렇게 적어두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 『공부할 권리』에서 언급된 책들
저는 책을 읽고 나서 세 권의 책을 구입했네요.
『공산당선언』, 『관찰의 인문학』,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 - 밀턴 H. 에릭슨 (지은이), 시드니 로젠 (엮은이), 문희경 (옮긴이) / 어크로스
- 멋진 심세계 - 올더스 헉슬리 (지은이)
-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 오이겐 드레버만 (지은이), 김태희 (옮긴이) / 교양인
- 일리아드 - 호메로스 (지은이)
- 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지은이)
-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 카를 구스타프 융 (지은이)., 김세영 (옮긴이) / 부글북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읽었다. 그의 작품 중에 두번째로 접한 책이다. 처음은 그가 노벨상을 받게 된 작품 《노인과 바다》를 통해 만났다. 그의 후반기 작품을 먼저 읽고 나서 그의 초기작인 책을 읽었다. 한참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났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작품은 상당히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다른 작가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름은 그의 작품보다 더 유명하다. 극적인 삶을 살았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느낌을 준 두 작품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들이 더 궁금해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에 대한 궁금점도 늘어만 간다.
문학 작품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서 읽히지만, 때로는 그 시대와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는 듯 하다. F.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고 나서 재미있게는 읽었지만 왜 이 책이 그렇게 찬사를 받는지 알지 못했다. 작품 해설과 다른 책들을 통해 1920년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해 알고 나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배경적 지식이 없으면 충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배경지식이 아니라 소설 그 자체만을 읽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배경 지식이 중요함을 느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읽고, 다음에는 배경지식을 찾고 다시 곱씹어보는 형식으로 읽게 되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역시 1920년대 미국 소설이다. 당시의 젊은이들을 'Lost Generation' 이라고 칭한다. 과거에서 부터 이어져왔던 많은 사상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이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목적을 상실했고, 그저 술이나 마시고, 소비문화에 젖어 들어갔다.
이 책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라고 하면
"1920년대 미국인들이 프랑스 파리로 와서 그곳의 문화를 즐기고, 술을 마시고, 이성간에는 최근 유행하는 some을 탄다. 그러다가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기로 하고 그곳에서 다시 술 마시고 낚시하고 투우를 즐기는 이야기" 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시의 배경을 모르면 이렇게 거칠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책의 내용보다는 주요등장인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잠시 그들을 소개한다.
제이크 반즈 - 소설 속에서 '나'로 등장하는 화자이다. 1차 세계대전 때의 부상으로 성불구가 되어버린 미국인 신문기자
레이디 애슐리 브렛 - 전쟁 중 특별지원 간호사가 된 영국의 귀족 부인, 제이크 반즈를 사랑하게 되지만 제이크 반즈의 성불구로 육체적인 사랑은 하지 못한다. 후에는 마이크와 결혼을 약속하기도 하고, 로버트 콘과 관계를 맺기도 하며, 어린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도 사랑에 빠진다.
로버트 콘
- 대학시절에는 미들급 챔피언, 대학 졸업후 첫번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 셋이 생겼다. 부유한 아내는 다른 남자와 만나게 되면서 나가고 후에 프랜시스라는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함께 미국에서 유럽으로 한다. 그때 2년 동안 파리에 머물었는데 이 시기에 장편소설을 쓴 작가이다. 후에 브렛을 좋아하게 된다
빌 고턴
- 제이크 반즈의 친구로 작가로 어느 정도 성공을 하여 돈을 벌었다. 여행 차 반즈를 만나고 그와 스페인 여행에 동행한다.
마이크 캠벨
- 브렛과 결혼을 하려는 사내로 사업을 하다가 파산을 하게 된다.
페드로 로메로
- 스페인의 젊은 투우사로 다른 투우사들보다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브렛이 나중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그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자주 들르는 커피숍과 바에서 그들은 어떤 옷차림과 자세로 있었을까? 당시 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책을 읽고 나서 당시의 모습을 잠깐 찾아보기도 했다. 특히 작품 속의 브렛이 궁금했다. 어떤 패션의 여성이었을까? 책에는 그녀에 대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p40
소매 없는 스웨터에 트위드 치마를 입고 머리는 사내아이처럼 빗질하여 뒤로 넘기고 있었다. 이런 유행은 하나같이 그녀가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 경기용 요트의 동체 같은 미끈한 곡선미를 지닌 몸매에 그런 스웨터를 입으니 곡선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트위드 치마에 소매없는 스웨터는 아니지만 당시 미국의 패션을 알아 볼 수 있는 사진을 잠깐 찾아보았다.
▲ 1920년대의 미국 패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여행을 한다. 그들이 여행을 갔던 스페인의 산 페르민 축제는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다른 나라의 축제 소식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자주 등장하던 그 장면이 그려진다. 아마 1920년대도 지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책 속으로 돌아가서 팜플로나의 소몰이 축제 현장에 들어가본다. 그리고 나서 근처 바에서 압생트도 한 잔 해본다.
▲ 스페인 산 페르민 축제
책을 읽다가 책 속의 상황이 너무 부럽고 나 역시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적어둔 부분이 있다. 빌과 제이크가 낚시를 하다가 샘물에 담가놓은 포도주와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장면인데, 나중에 한 번 시원한 계곡이나 개울에 와인을 시원하게 해서 친구들과 함께 먹어 보련다.
p186
나는 샘물로 걸어가서 포도주 두 병을 꺼냈다. 병은 차가웠다. 나무 있는 데로 돌아오는 중에 술병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신문지 위에 도시락을 놓고 포도주 한 병은 마개를 따고 나머지 한 병은 나무에 기대 세워 두었다. 빌은 손을 닦으면서 올라왔는데 그의 광주리가 고사리로 불룩해져 있었다.
"어디 그 병 좀 봐." 그가 말했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뽑은 뒤 병을 기울여 마셨다. "어휴! 두 눈이 다 짜릿해지는걸."
"어디 한 번 마셔 볼까."
포도주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왠지 녹슨 쇠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렇게 형편없는 포도주는 아니야." 빌이 말했다.
"차가워서 그런 거지." 내가 말했다.
우리는 조그마한 점심 꾸러미를 풀었다.
"닭고기군."
"삶은 달걀도 있어."
"소금은?"
책을 읽고 나서 뒷부분에 나오는 <작품해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은 Lost Generation 이지만 무조건적으로 방황하는 것이 아닌 희망이 있다라고 표현한다. 콘, 브렛, 마이크의 경우는 욕망과 알코올에 빠져있지만 제이크와 빌은 자신들의 중심을 잡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브렛이 투우사 청년 로메로를 보내주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p367
"난 이제 서른넷이야. 어린애들을 망치는 그런 화냥년이 될 생각은 없어."
투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거세된 소가 나오는데 거세된 소는 다른 소의 공격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직접 다른 소를 공격하지 않고 사나워진 소를 달랜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런 생소한 부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거세한 소와 성불구가 된 화자 제이크 반즈가 계속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등장인물들은 제이크 반즈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때로는 친하게, 때로는 서로 반목을 하면서 지낸다. 그리고 항상 그 중간에 제이크 반즈가 있다. 이렇게 읽고 나서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지니 곱씹을 거리가 많이 생긴다. 이래서 잠시 떨어져서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p204
"여간 재미있지 않지. 한 번에 한 마리씩 우리에서 내보내는데, 놈들이 울타리에 들어가면 거세한 수소들을 같이 넣어 서로 싸우지 않게 하는 거야. 황소들이 거세한 소들을 향해 덤벼들지만 거세한 소들은 마치 노처녀처럼 놈들 주위를 빙빙 돌면서 달랜단 말이야." 내가 말했다.
"거세한 소들을 떠받지 않아?"
"떠받지. 어떤 때는 곧바로 달려가 죽이는 일도 있어."
"그럼 거세한 소들은 아무 반항도 못한단 말이야?"
"못해. 그저 친구가 되려고 할 뿐이지."
"뭣 때문에 그 안에 넣어 두는 거야?"
"황소들을 달래서 돌담을 들이받아 뿔을 부러뜨리거나, 또는 서로 떠받아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지."
마지막으로 내용을 정리하려고 책을 다시 한 번 훑어보는데 다음에는 이 작품에서 이 친구들이 바와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술이 어떤게 나오는지도 한 번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배경이 술을 먹는 장면이라 어떤 술들이 나오나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이제 문학을 읽을 때 조금 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읽어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건, 장소, 시간, 문화를 연결하고 눈으로 활자를 읽고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모든 감각의 촉수를 바짝 세우고 읽어야 겠다. 예전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도 다시 읽어봐야 겠다.
p81
이 세상에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어떤 말을 하면 금방 세계가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파멸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럼 사람 말이다.
p132
브렛은 나를 쳐다보았다. "한데 말이야. 이번 여행에 로버트 콘도 가나?" 브렛이 말했다.
"그래 그건 왜 물어?"
"그 사람한테 좀 가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구하고 산세바스티안에 간 줄 알아?"
"축하할 일이군." 내가 말했다.
우리는 함께 걷고 있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지?"
"나도 모르겠어. 그럼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어?"
우리는 계속 길을 따라 걸었고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 사람은 그런대로 얌전히 굴었어. 조금 따분해졌지만."
"그래?"
"그 사람한테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지."
"차라리 자선 사업을 시작하는 게 좋겠는걸."
"심술부리지마."
"심술부리는 게 아냐."
"정말 몰랐어?"
"몰랐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는 거 같은데." 내가 말햇다.
p167
그 노인은 우리와 악수를 하고 다시 뒷좌석으로 돌아갔다. 다른 바스크인들은 감동했다. 내가 시골 경치를 구경하느라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편안하게 버티고 앉아서 내게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힘들여 미국 말을 하는 바람에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177
"저렇다니까. 저러고서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건가. 넌 신문장이를 못 면하겠어. 국적을 상실한 신문기자 말이야. 침대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반어적이어야 하는 거야. 입안 가득 연민을 머금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p178
"넌 국적 상실자야. 조극의 땅과 접촉을 잃어버렸단 말이야. 귀하신 몸이 된 거지. 사이비 유럽 기준 때문에 넌 망치고 만거야. 죽도록 술만 퍼마시고, 섹스에 사로잡혀 있고. 넌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지껄이는 데 허비하거든. 넌 국적 상실자야., 알겠어? 카페나 헤매고 다니고 말이야." - 빌이 제이크에게
p294
"미안해, 제이크. 날 용서해 줘."
"용서하라고, 빌어먹을."
"제발 용서해 줘, 제이크."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때 내 기분 어땠는지 너도 알 거야."
"아, 그 소린 집어치워."
"브렛 일을 참을 수가 없었어."
"나를 뚜쟁이라고 했잖아."
중략
"알아. 그 말은 제발 잊어 줘.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브렛 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지옥을 헤매는 기분이었지, 제이크. 그래, 맞아, 지옥이라고밖엔 할 수 없어. 이곳에서 만났을 때 브렛은 나를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대하더군. 난 그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거야. 산세바스티안에서는 함께 지냈거든. 그건 너도 아마 알고 있을 테지. 난 도저히 더는 견딜 수가 없었어."
#1. 플랫폼, 경영을 바꾸다 - 최병삼,김창욱,조원영/삼성경제연구소 -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주목을 받아온 플랫폼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IT업체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산업을 바라보면서 플랫폼에 대해서 설명하고 플랫품 구축 전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플랫폼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논리적인 구조를 잘 갖추고 있어서 논리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라든가 플랫폼에 대한 전략에 대해 접근법을 보기에는 좋은 것 같다.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이 마음에 들었다.
# 2. 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마로니에북스
- 박경리의 <토지>를 읽다가 6권에서 정체되고 있다가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았다. 예전부터 들어왔던 제목인데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김약국과 그의 딸들이 겪게 되는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가 짙게 베어 있다. 읽고 나면 무언가 묵직한 기분이 든다. 읽고 나서 별도로 정리해두지 않고 서평을 쓰지 않은 게 아쉬운 책이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정리해 볼 의미있는 책이다.
# 3. 나의 조선미술 순례 - 서경식/반비
- 여기서 '조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시대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재일동포인 서경식 작가가 큰 그림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가 직접 만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미술에 대해서 더듬어 가는 것이다. 다른 미술 관련 책들과 구별되는 점이라면 작품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작가를 중심으로 접근해가는 방식이다. 그의 작가 본인도 그렇고 디아스포라에 관련된 글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가 예전에 쓴 <나의 서양미술 순례>도 나중에 읽어볼 생각이다.
# 4. 엘론 머스크, 대담한 도전 - 다케우치 가즈마사/비즈니스북스
- 전기자동차 테슬라, 우주산업 스페이스엑스, 태양광산업 솔라리스를 이끌고 있는 엘론 머스크에 관한 책이다. 사내외로 혁신의 아이콘으로 유난히 많이 언급된 인물이다. '인간을 지구 밖으로 보낸다'라는 비전으로 실제 일을 만들어내고 실천해내는 모습이 대단할 뿐이다. 개인적인 목표, 비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책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히 목표를 찾아야 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 5. 식물의 인문학 - 박중환/한길사
- 식물, 나무, 환경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서 관련 분야의 책들을 찾아서 읽고 있다. 처음에 들어가는 말부터 인상적이었다. "식물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은 스트레스다'. 그 외에도 가정 내에서 환기의 필요성과 식물을 기름으로써 얻는 효과등을 유심히 보고 조그마한 화분도 두개 사서 집에 두었다. 올해는 화분의 수를 많이 늘리고 관리법에 대해서 공부해볼 생각이다. 이 책은 식물 뿐만 아니라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분명 좋은 내용이 많이 담긴 책인데,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해서 풀어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 6.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민음사
- 읽으면서 나 역시 수없이 상상했다. 망망대해의 조그만 배위에 낚시대를 들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실제 그런 사진이라도 있으면 하나 구해서 책상 앞에 걸어두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노인이 몸에 낚시 바늘을 두르는 모습, 손에 쥐가 나서 그 손을 보고 대화하는 모습들이 떠오르고, 자꾸만 그 노인이 뇌리에 떠나지 않았다. 그 설명을 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은 올해 안에 한 번 필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노트를 준비했다. 남다른 감동을 받은 건 아닌데 한 번 써보고 싶었던 충동이 일어난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르겠다.
# 7.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 최효찬/예담
# 8. 세계 명문가의 독서교육 - 최효찬/바다출판사
- 독서와 자녀교육에 대한 책이다. 무언가 특별히 남다른 이야기가 있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보통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중간은 간다. 지금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뒤돌아보게 되고, 자녀 교육에 아버지로서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을 준 책이었다.
# 9. 삶의 한 가운데 - 루이저 린저/민음사
- 이 책은 지루하지는 않은 데 읽는 데 오래 걸렸던 것 같다. 작중 몇 년 만에 만난 언니와 동생이 동생의 우편물을 보면서 동생의 지난 삶에 대해서 회고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두 자매는 서로 이해하기도 하고 스스로 깊은 갈등과 고민에 빠지는 모습이 드러난다. 동시에 동생과 한 남자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볼 만하다. 시대적 배경은 나치시대이기에 당시의 시대상도 엿보인다. 읽고 정리하지 않고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작중 인물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안타깝다.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구는 하나도 없는 방안에서 트렁크가 놓여져있고 그곳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두 자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고 그 옆에 위스키 병이 계속 생각났다.
# 10.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 헨리 뢰디거, 마크 맥대니얼, 피터 브라운/와이즈베리
- 제목 그대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 각종 실험과 통계 자료를 기반으로 효과적인 공부법을 소개한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중해서 반복해서 읽고 외우는 것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자주 기억속에서 인출을 자주 함으로써 배운 것을 떠올리라는 것이다.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은 시험이다. 이러한 인출작용을 통해서 뇌를 자극해서 부족한 부분을 알고 뇌 속의 뉴런을 활성화 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반복적으로 읽는 것은 우리가 텍스트에 익숙해져서 이해하지 못함에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외에도 흥미로운 기억법도 소개되었다. 어떤 것을 외울때 자신이 잘가는 카페를 생각하고 카페에 외울 것들을 대입하는 것들 같은거... 무언가 획기적인 공부법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흥미롭게 한 번 읽어볼 만 하다.
# 11.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문예출판사
- 이 책의 첫번째 매력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작중 주인공인 도리언 대신 그의 초상화가 나이를 먹어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인간의 도덕과 쾌락 뿐만 아니라 본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도리언이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추하게 변해가는 초상화를 통해서 과연 나는 어떻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만든다. 환상적인 요소가 들어간 소설이지만 19세기 영국의 귀족문화를 엿볼 수 있었고,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에 대해서도 경험하게 만든다. 한 편의 영화를 본 듯 한 기분이다.
오늘의 소설 속에는 누아르가 아주 진하게 담겨 있다. '누아르'는 흔히 '어두운 분위기의 범죄 영화 장르'를 지칭할 때 쓰이기도 한다.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에는 지금은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 때 어둠의 세계를 주름잡았던 누아르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그와 그의 하수인들이 등장하면서 정말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심지어 창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야기로 끝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현실에 반영시켰다. '누아르'는 영화 속이나 재미있는 것인데 굳이 현실로 끌여들였다. '누아르'의 주인공이 탐난다 보다.
소개합니다. 바로 누아르의 주인공은 영화 <26년>에서 등장인물들이 그렇게 제거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전 두 환' 이다. 그 영화 속에서도 빠질 수 없는 역할을 해내더니 욕심이 있었나 보다. 이렇게 이 소설 속에서도 누아르의 주인공으로 나타나는가 보면...
소설은 분명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방식과 풍자가 곁들여지면서 재미있게 읽힌다. 그런데 그 웃음은 기쁨의 의미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웃프다' 로 다가온다. 정말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가 답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내가 태어나기 3주 전인 1982년 3월 18일에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 사건은 부산 고신대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물어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사건이다.
부산미문화원 사건과 소설 속 택시기사인 나복만이 어이없이 연결되면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버린다. 나복만은 어느날 운전을 하다가 어떤 사람과 접촉사고가 난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냥 가고 나복만은 자기가 나중에 벌을 받을까봐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이야기한다. 나복만이 간 부서는 당시 부산미문화원 사건을 맡았던 부서인데 나복만은 그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담당형사는 이름을 간단히 적어두고 어이없이 나복만은 그 사건에 연루되어 버린다.
형사들과 안기부에서는 나복만이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이용해 방화사건의 주요 인물들을 엮어서 범죄의 스토리라인. 즉, 그 사건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한 빨갱이들이 벌인 방화사건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그 도구는 1980년대 그들이 사용했던 '고문'이라는 끔찍한 방법이었다. 고문을 받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진술서를 적는 것이다. 하지만 나복만은 결정적으로 글을 알지못하는 문맹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고문에서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향하게 된다.
정말 상상하는 대로 만들어진 글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내가 태어날 즈음에 우리의 누아르의 주인공이 통치하던 시기 그리고 그 이전 대통령 때에는 너무나 많이 발생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당시 이 사건에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자던 방에 불을 떼어주었다는 보일러공도 같은 혐의, 즉 빨갱이라는 혐의를 받아서 처벌을 받게 된다. 정말 이쯤되면 막나가자는 이야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정말 당시 안기부(안전기획부)는 기획을 한다. 기획을 하기 위해서는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 이들의 스토리라인은 어설프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서 그들의 말이 맞게 만들어 버린다.
여느 때처럼 물고기를 잡다가 풍랑으로 북한 쪽으로 넘어간 어부들은 북한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남한으로 다시 보내지지만, 남한에서는 이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시설을 염탐하고 스파이 노릇을 한다며 잡아들인다. 그리고 여론은 하나같이 빨갱이에 대한 보도를 내놓는다. 이렇게 또 하나의 사람의 인생을 깊은 수렁에 빠뜨려 버린다. 이렇게 한 번씩 일으켜주는 공포통치가 이들 권력을 지켜나가는 힘이다.
예전에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그리고 이 작품 《차남들의 세계사》에서도 그렇듯이 국가가 국민들을 상대로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며 나온다면 국민은 너무나 쉽게 무너져버린다. 한 개인의 삶이 초토화되고 그의 가족들의 삶 또한 그 연결선상에 놓이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 당사자들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저 무너져버린다. 이러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나오고, 얼마 전 홍콩에서는 우산을 들고 나온다.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하지만, 역사는 말해준다. 큰 흐름 속에서는 결국 작은 힘들이 승리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약자들의 아픔이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한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헌법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헌법의 1조 1항, 2항을 글로 남기며 마무리하고 싶다.
제1조 1항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1조 2항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p49
아, 도로교통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이나리, 괜히 걱정했네 ...... (뭐, 이런 바보가 다 있나 싶지만.) 나복만은 계속 그렇게만 생각했다.
p57
나복만은 잠시 박병철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신문을 읽는 척했다. 거기엔 분명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가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p60
나복만은 담배를 든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아이 나, 이 답답한 새끼 좀 봐요. 그러니까 내가 신문 좀 자세히 보라는 거야, 이 자식아, 여기 이, 이 보일러공은 뭐 걔네들이 누군 줄 알고 이부자리르 펴줬겠냐고? 이건 그냥 걸리면 끝장인 거거든. 모르고 어깨만 툭, 부딪쳐도, 그래도 죄가 되는 거야. 그래서 국가보안법이 도로교통법보다 더 무섭다는 거 아니냐, 이 멍청아. 이건 쌍방 과실이라는 게 아예 없다니까."
p68
하지만 시련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았다. 달이 바뀐 5월 4일엔, 그러니까 우범곤 순경 사건이 좀 잠잠해질 무렵엔, 이런 제기랄, 우리 독재자의 친척이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친척이라고 하기엔 다소 복잡한, 그러니까 우리 독재자의 처삼촌의 처제였던 장영자가 남편 이철희와 함께 벌인 수천억 규모의 약속 어음 사기 사건이었는데, 그 액수가 상상 이상이었다. 장영자와 이철희는 주로 중견 건설업체를 상대로 자금을 대출해 주고(물론 그 자금은 모두 은행에서 무담보 신용 대출로 받은 돈이었다.) 그 자금의 열 배 정도 되는 약속어음을 담보로 받아 두었는데, 그 약속어음을 약속과는 다르게 시중에 직접 할인, 유통시키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사고 금액은 총 7111억 원.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은 4만 4000원 이었고, 도시 근로자의 평균 월소득은 22만원 이었다.) 중견 건설업체 세 곳이 최종 부도 처리되고, 시중 은행장 두 명을 포함한 총 31명을 법정에 서게 만든 이 사건은 건국 이후 최고의 사기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불황에 빠져 있던 국가 경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 버렸다. 실물경제 그래프는 가파르게 내리막으로 치달았고, 제2금융권과 사채 시장은 거의 마비된 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중엔 이 사건의 배후에 우리 전두환 장군이 직접 개입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대통령의 친인척이라고 해도 은행에서 그럼 막대한 자금을 무담보로, 그것도 거의 전화 한 통으로 대출해 주었겠느냐, 하는 것이 일반 시민들의 생각이었다. 무언가 다른, 더 커다란 힘이 있지 않았겠느냐, 시민들은 쉬쉬하면서 그런 말을 하고 돌아다녔다.
p177
1981년부터 1982년 사이, 이 땅의 안기부에선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변화의 내용이란 주로 인사 이동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1981년 1월 1일자로 개정된 '중앙정보부법 개정법률안'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 밑의 수하들이 열심히 잔머리를 맞대고 굴려 가며 만든 '중앙정보부법 개정법률안'의 핵심 내용은 1961년 창설된 '중앙정보부'의 명칭을 '안전기획부'로 바꾸는 것. 그리고 '정보 및 보안 업무의 조정 감독 기능'을 '정보 및 보안 업무의 기획 조정 기능'으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 예전에는 그냥 '감독'만 하던 것을 아예 '기획'부터 하자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주어진 로케이션 안에서만 정보를 캐내려 하지 말고,로케이션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 버리라는 말씀, 정보를 아예 만들어 버리라는 말씀. (더 넓게는 평론을 하지 말고 창작을 해서 교도소를 채우라는 뜻 되겠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수갑과, 더 많은 선글라스와, 더 많은 예산과, 더 많은 각목과, 더 많은 상상력이 필수적인 터. 그냥 '위험'이 아닌, 존재하지도 않는 '위험'으로부터 각하를 '안전'하게 보필한다는데, 뭐. 개정법률안은 그 누구의 이의 제기나 비판 없이 후다닥 국무회의를 통과하게 되었다. (이런 말까지 굳이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개정법률안은 개 같은 수하 새끼들의 '일자리 창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p194
먼저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안기부 청주 분실에 의해 공동 창작된 이 작품은, 우선 스케일과 창작 기간, 조직 면에서 다른 작품들을 압도한다. 무려 116일 동안이나 애꿎은 사람들을 안기부 지하 취조실에 가둬 놓고 전기고문 및 물고문, 몽둥이찜질 등을 하면서 불법감금한 것도 유명하지만, 피의자 28명 전원을 모두 일가친척으로 꾸민 점에서 국가보안법 수사의 새 장을 펼친 것으로 기록됐다. 문제는 이 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다시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되면서부터 벌어졌다. 안기부 요원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대법관 따위들에게 혹평과 질타를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그래서 몇 번 대법관을 직접 찾아가 협박을 일삼다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그냥 간단하게 대법관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교체해 버렸다. 그래서 결국 유죄. 마무리가 조금 거칠어졌지만 어쨌든 작품은 무사이 세상에 내걸리게 되었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들이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전 재산이 사라지고, 죽슨 같던 청춘이 철창 안에서 속절없이 시들어 갔지만 ..... 그건 모두 작품의 운명이었을 뿐이었다. 작품은 언제나 생물처럼 저 혼자 자가 증식하는 법이니, 안기부 요원들은 그런 것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모두 1계급씩 승진했다.
p196
'납북 어부 간첩 사건'은 일종의 해양 어드벤처 액션 스릴러로 기획된 작품인데, 이 작품이 조금 특이한 것은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 이전의 독재자였던 박정희 장군 시절, 이미 한 번 같은 혐의로 구속된 바 있었던 사람들을 1980년대 들어 또 다시 잡아들였다는 점에서 '리바이벌'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데 있었다. 이들 어부들은 1960년대 풍랑을 맞아 북한 해역에서 조난을 당하여 그곳에서 모진 수사를 받고 다시 남쪽으로 귀환한 사람들이었다. 남쪽으로 귀환했지만, 이번엔 박정희 장군의 중앙정보부가 가만 놔두었을 리 만무한 법. 그들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 및 허위 자백을 강요받고 2~3년씩 교도소행.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 뜻하지 않은 전과자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이후 10여 년간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조용히 안강망 어선을 타면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은 ,그러나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이 등장한 이후 다시 '적에게 포섭되어 국가 기밀을 탐지하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온 뒤 각종 국가시설을 탐지했다' 는 혐의로 체포 및 구속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친밀하다는 점. 지적학적 배경이 탄탄하다는 점, 역사학적 근거가 확실하다는 점 등 때문에 안기부와 보안대 수사팀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창작, 발표되었는데, 그로 인해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과, '태영호 사건', '강대광 사건', '서창덕 사건', '임봉택 사건', '백남욱 사건', '정영 사건' 등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p235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요원들은 결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샤워기의 수압을 조절하고, 그날 날씨에 따라 각목 스윙의 세기가 달라지는, 그런 아마추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느 부위부터 각목을 대야 하는지, 몇 초 단위로 노란색 로터리 창립총회 기념 수건에 물을 붓고 멈춰야 하는지, 밧줄의 매듭은 얼마만큼 느슨하게 해 두어야 좀 더 살갗 안으로 파고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허기가 물고문의 효과를 배가시키는지, 라디오 볼륨 크기가 어느 정도일 때 심리적 마지노선에 영향을 미치는지, 3번과 4번 경추 사이가 어느 곳인지, 그곳을 잘못 건드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숙련된 냉장고 AS 기사처럼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레벨1에서 끝나면 좋고, 아니면 2로 넘어가는 것, 프레온가스에 문제가 없으면 전압 밸브를 손보는 것. 레벨 2에서도 계속 버티면 어, 좀 질긴데, 어, 좀 독특한데, 선천적으로 폐활량이 좋은가. 하면서 레벨 3으로 넘어가는 것. 웃으면서 전압 퓨즈를 갈아 끼우는 것. 그것이 그들이 직장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정념의 전부였다.
P257
그 말인즉슨, 그는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하는, 흔치 않은 요원이란 뜻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 속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때때로 사람들은 신과 악마를 동시에 숭배한다는 비밀을 잘 알고 있었다.
P279
보좌신부님은 그때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유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린 모두 형제들이고, 이 세상은 두려운 한 명의 형과,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동생들로, 차남들로, 이루어진 다는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더 큰 문제는 우리 차남들 스스로가 형을 두려워하다가 숭배마저 하게된 상황. 신보다 형을 더 믿게 된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셨지요.
가브리엘 가브리아
마르케스(1927.03.06~2014.04.17)는 지난 4월에 타계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이다. 당시 우리는 세월호 침몰이라는 믿기지 않는
참사로 다른 것들에는 암묵적 합의 하에 침묵했다. 이때는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누구인지 몰랐다.
<백년의 고독>이라는 작품은 제목을 몇 번 들었던 기억은 있었지만 접하지 못했다.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할 때 선정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끌리는 제목으로 <백년의 고독>을 손에 잡았다.
처음에는 책과 작가의 배경적인 지식은 알지
못했다. 이게 내가 읽는 방식이다. 읽으면서 궁금한 사항이라던가 사건들이 어떤게 있는지 읽으면서 하나씩 찾아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계속
읽어나가도 되는 건지 나 자신에게 의심스러웠다. 작중 등장하는 수많은 아르까디오와 아우렐리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사람이 어떤
아우렐리아노인지 그의 부모는 누군인지 책의 첫 페이지에 있는 가족관계도를 수시로 들춰보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게 <백년의
고독>에서 느낄 수 있는 오묘한 매력이다.
마르케스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현대예술 사조의
선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콜롬비아의 역사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콜롬비아 내전인
'1000일 전쟁'에서의 자유파와 보수파의 갈등과 '바나나농장 학살 사건'은 소설 속의 중요한 축이기도 하다.
콜롬비아 바나나농장 학살
사건
1928년 12월 6일 콜롬비아 산타마리아 근처
시에나가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이다. 바나나농장에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요구하면서 노동조합이 벌인 한달 간의 파업을 끝내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가 군대를 보내 진압하기로 결정한 뒤,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최소 47명에서 최대 2000명)이 군당국의 발포에 의해
살해됨. 당시 바나나 회사였던 '돌 푸드 컴퍼니'는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를 압박했고, 콜롬비아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당시
파업의 일환으로 시에네가 시 광장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한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윤회와 마술적
사실주의
약 100여 년 동안 한 집안에 7대에 걸쳐서
마치 과거의 조상들이 살아난 듯이 비슷한 성향의 자손들이 조상들의 삶을 마치 윤회하듯이 살아가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가족
내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 '아르까디오', '아우렐리아노' 라는 이름은 반복해서 이름에 포함된다.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체구가 좋고 과격했으며, 충동적이고 모험적이었다. 반면에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차가워보이는
얇은 입술을 갖고 태어난 명민하고 은둔적인 성격을 보였다.
<백년의 고독>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다. 이번을 계기로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것을 알게되었는데 마술적 사실주의는 사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라고 한다. 이 책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 꼬리 달린 아이' 가 어쩌면 대표적인 하나의 소재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사촌 간인 우르술란과 호세
아르까디오는 근친상간으로 돼지꼬리가 달린 자신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서
'마꼰도'라는 마을을 세운다. 그렇게 한 가족의 역사는 시작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는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대를 거듭해서
6대 째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와 그의 이모인 아마란따 우르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나면서 한 집안은 몰락해 간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전해져내려오는 멜키아데스의 양피지문서에 담겨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미녀 레메디오스가 하늘로
승천한다거나, 레베카가 흙은 먹고, 마꼰도에 처음 온 집시들이 가지고 온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 일반적이지 않은 정말 마술적인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백년의 고독>은 분명 콜롬비아의 역사와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이야기 속에서 사실적으로 나타내지만, 그 방법으로는
환상적이고 허구적이고 마술적인 요소를 가득 담아 표현해내고 있다.
20세기의 세르반테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두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예술의 극치인 동시에 소설의 시대에 보내는 작별 인사"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과
같은 신비한 매력을 가진 책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부모님과 떠어져 외할머니를 비롯해 외가 친척들과 함께 살아왔던 시절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 학살이 일어났던 곳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었으며, 외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전쟁터에서의 모험담과 콜롬비아의 역사는 작중
아우렐리아노 대령에 영향을 미쳤고, 외할머니와 집안 여자들이 들려준 신기한 이야기 또한 그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발판이
되었다.
마르케스는그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에서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가장 좋은 출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내 앞에서 나눈
다화들이다" 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매력
<백년의 고독>의 2편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그 이전에 윤회하듯 반복되던 모든 것이 결말로 수렴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읽은 많은 소설들은 분명 현실에서 있을 듯한
소재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때로는 판타지 소설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이고 때로는 허무한 표현 방식 속에서 그대로 현실을 표현해냈고 민중들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세익스피어라고 칭해지는 세르반테스에 비유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얼마 전에 신문컬럼 <조용호의
문학노트>에서 본 글귀가 눈에 띄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서서히 현실은 내면화하면서 밑바닥에서부터 인간들을 위로하는 치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르케스 역시, 조국 콜롬비아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속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번에도 그동안 제목만 알고 있었던 책을 찾아 읽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에 몇 일 동안 푹 빠져 있었다. 글의 여운은 아직까지도 잔잔하게 남아있다.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힌다. 책을 읽자 마자 얼마 후 부터 '아! 드디어 만났구나' 하고 느끼는 보물들이 있는데 <달과 6펜스> 역시 그 중 하나이다. 특히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건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하마터면 뒷부분을 먼저 읽어버릴 뻔했다.
<달과 6펜스>는 등장인물 스트릭랜드를 통해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배경이 있는지 모르고 읽은 책이어서 즐거움은 배가 된다. 실제 인물이 배경이 되는 이야기와 다른 장르와 연결해주는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에 다리를 놓아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마리오를 자연스럽게 시에 대해 이야기듯이 <달과 6펜스> 역시 작품 속 스트릭랜드이자 실제 인물인 폴 고갱을 통해서 미술에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해준다.
예전부터 그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저 관련 책을 읽는 것으로는 흥미가 생기지 않아 쉽게 포기하곤 했다. 이번에는 뜻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책읽기를 마치고 <반고흐, 영혼의 편지>를 찾아 폴 고갱 이후 반 고흐를 만나게 해주었다. 이 소중한 인연이 차곡차곡 조금씩 쌓아지기를 내심 바랄 뿐이다.
이야기 속으로
찰스 스트릭랜드는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을 증권 중개인 일을 하던 부유한 사십대 남자였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홀로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는 가난한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한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더크 스트로브는 그를 지원지만 스트릭랜드는 그에게 냉소적이었으며 그의 아내 블란치 마저 자살에 이르게 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그림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으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심과는 다른 게 있는 듯 했다.
그는 문명의 땅을 뒤로 하고 남태평양의 외딴 섬인 타히티로 떠난다. 타히티라는 원시의 섬에서 그가 생각하는 낙원을 만나고 그림에 열중하고 아타라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문등병에 걸리고 심지어 눈이 멀기까지 한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의 집안에 신비로운 그림을 그린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폴 고갱의 삶을 그대로 재현해두고 있지는 않지만 거의 유사한 삶을 살았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한 예술가의 순수한 열정을 표현해준다. 분명히 자신 밖에 모르는 차디찬 냉소가 깊게 베어나지만, 그 열정이라는게 자연스럽게 다른 부정적 요소를 가려준다. 나 엮시 읽는 내내 안타까우면서도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일에 빠져든 그가 부럽기도 했다.
작가 서머싯 몸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왜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고, 이야기의 중간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로 이야기가 전환된다. 어쩌면 친절하지 않고 부연조차 없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툭 던져 놓으니 확실한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더 극적인 표현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묘미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손에서 놓지못하고 한 번에 읽은 기억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내가 개츠비를 궁금해하고 서로 인연이 닿아가면서 그 궁금증을 조금씩 풀어가는 묘미가 있었다. <달과 6펜스> 역시 소설 속 작가인 내가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는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효과적인 것 같다.
어떤 이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절묘한 조화가 훌륭하다고 하는데 아직은 그 정도를 찾을 수 있지는 못해서 아쉽다.
소설을 읽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책들은 읽고 나면 개운하게 숨을 내쉬며 책을 덮을 수 있다. 읽는 동안 긴장한 것을 놓는 숨이며 아쉬움의 표현이다.
폴 고갱의 작품 속으로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서 고갱에 대해 표현한 부분을 찾아 보았다.
P551
타히티 섬에서 가져온 그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 그의 옛 친구들조차 당황스러워 했다. 그 그림들은 너무 야만적이고 미개해보였다. 그것은 바로 고갱이 원하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야만적'인 색채와 소묘만이 타히티에 머물면서 감탄했던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이들을 올바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중략)
그러나 고갱이 아주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낯설고 이국적인 것은 단지 작품의 주제만이 아니다. 그는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토착민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때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의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그린 원주민의 초상을 그러한 '원시'미술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세잔과 달리 그는 단순화된 형태와 색체의 구성으로 인해 혹시 그의 작품이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연의 아이들이 지닌 순수한 강렬함을 그리는 데 도음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수세기에 걸쳐 씨름해온 유럽 미술의 문제들을 기꺼이 무시해버렸다.
솔직하과 단순함을 이룩하려는 그의 목표가 항상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향한 그의 열의는 새로운 조화를 이룩하려는 세잔이나 새로움을 전달하려는 고흐의 열의만큼 여정적이고 진지한 것이었다.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몰랐었다. 가끔 이유없이 제목에 끌려 세계문학접집 중 몇 권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눈에 들었다. 어떤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번 <인간실격>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파격적이다.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강하게 다가왔다. 소설 속에는 따뜻함이 없다. 읽는 내내 침울하고 취해있고 무기력하고 안타까웠다. <인간실격> 제목 그대로 주인공 요조가 '인간 실격자'가 되어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책을 읽고 나서 '다자이 오사무'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작가에 대한 소개가 <인간실격>의 내용이었다. 이건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작가의 자전적 삶을 그린 소설이었다.
소설 속 요조의 삶 속에서는 희망의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과연 어떻게 저렇게 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작가가 그랬다. 아마 다자이 오사무의 유일한 삶에서의 탈출구가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삶이자 소설 속 요조의 삶은 어떠했을까?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현 쓰가루군 카나기무라에서 대지주 쓰시마 가문의 11남매 중 10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유모, 숙모, 보모의 손에 자라면서 정서불안을 얻게 된다.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해 귀족원 의원에 올랐던 지방 유지인 아버지로 인해 가문에 대한 경멸을 느끼면서도 유복한 환경을 누리며 독립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순적 태도에 내적 불화를 겪게 된다.
그는 학창시절 전교 1등을 차지하는 우등생이었으며 프랑스 문학에 대한 막연한 동겨으로 도쿄제국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했으니 금세 흥미를 잃고 제적당한다. 대신에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좌익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다자이 오사무(요ㅗ)는 술과 마약에 빠져 여자들과의 문란한 사생활에 자주 구설에 올랐다. 대학 시절에는 술집 종업원 출신 내연녀와 동반자살을 시도하다가 혼자 살아남게 되면서 자살방조 혐의를 받고 기소유예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 후에는 동거녀의 외도에 충격을 받아 시도했던 자살 역시 실패하게 된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점차 염세주의자가 되어갔고 약물중독에도 벗어나지 못해서 강제 수용되기도 했다.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며 4번의 자살시도를 거듭했던 그는 1948년 6월 13일, 도쿄 미타캉의 타마강 상수원지에서 내연녀와 함께 투신자살하여 39살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글로써 무엇인가를 표현하면 글쓴이가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속의 깊은 내면의 부끄럽고 챙피하고 치욕스러운 것을 다 뱉어내어 표현해버리면 응어리진 것들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아마 다자이 오사무의 삶의 유일한 탈출구도 글 쓰는게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비관적인 현실인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무의미함을 표현하는 글귀가 많이 눈에 띈다.
P36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 개 있는데,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일도 있습니다.
P62
저 백치 창녀들 품 안에서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느낌하고는 또 완전히 다르게 이 사기범의 아내하고 보낸 하룻밤은 저한테는 행복하고 (이런 엄청난 말을 아무 주저없이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이 수기 전체에서 두 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P82
저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했지만 '우정'이라는 것을 한번도 실감해 본 적이 없었고 (호리키처럼 놀 때만 어울리는 친구는 별도로 하고) 모든 교제는 그저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어서 그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열심히 익살을 연기하느라 오히려 기진맥진해지곤 했습니다.
남의 집 대문은 저한테는 저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 이상으로 으스스했고 그 문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용 같은 비린내 나는 짐승이 꿈틀거리는 기척을,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느꼈던 것입니다.
P134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요조(남성이지만 자꾸 여성이 떠오르게 된다.) 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가면을 쓴 인격인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세상 사람들 모두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지만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페르소나로 부터 얻게되는 피로함과 고통을 덜게 합니다. 하지만 요조에게, 다자이 오사무에게는 그게 부족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 실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인간 실격자'라고 했지만 요조 자신에게, 다자이 오사무 자신에게 아쉬움이 남고 위로를 해주고 싶어하는 듯 하다.
<인간실격>은 어쩌면 삶이 힘든 사람, 처절하게 아픔을 겪는 사람이 읽으면 오히려 치유가 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픔을 겪는 이에게는 그저 행복만을 내세우는 위로보다는 읽을수록 아프고 안타까운 이런 글을 읽으면서 삶에 대한 질문을 하고 아픔을 모두 드러내고 다시 치료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