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카뮈가 말하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삶의 반복' 에 대처하는 나름의 처방을 가지고 있다.
만약,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본래 외롭다고 하지만,
무언가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군가로 하여금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들마다 받아들여지는 삶의 무게는 다르기에,
아쉽게도 그 방법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술에 빠져 들기도 하고,
누적되는 삶의 피로에 허우적되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그 방법을 한 가지는 찾은 것 같다.
'사람들의 삶을 엿보기',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할 수 있는 재미'
'한참 동안 마음 졸이다, 긴 한 숨을 내 쉴 수 있는 감정의 경험'
'혼자 한 없이 외로워져서 눈물을 흘리다 조그만 위로에 위로 받을 수 있는 약한 감정'
나에게 이런 삶의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는 것은 '소설', 바로 '이야기' 다.
소설을 너무 좋아한다고 하지만,
항상 아쉬움이 있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분명히 수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작품 속에 등장시킬 인물들에게 각자 어울리는 성격을 만들어주고,
독자들이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있도록
긴장의 끈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숨은 요소들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런 작가들이 숨겨놓은 것들을 찾아보고 싶었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의 재미 뿐만 아니라,
그렇게 숨겨진 보물을 하나씩 찾아내듯 '소설' 을 읽을 수 있다면,
작은 방에서 '책 한 권' 읽는 재미로 남 부럽지 않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 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2980.01.05 움베르트 에코
'소설' 에 대해서 그 기법과 형식들을 한 번 쯤 알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이론을 설명하는 책이라면,
쉽게 몰입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그러던 중에 '정여울' 작가의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최근에 『공부할 권리』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글을 이끌어 가는 감성에 매료되어서,
이 분의 책이라면 기꺼이 선택해도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제목이 '문학멘토링'이다. 딱딱하지 않다.
작가는 '문학'을 정말 좋아하고, 자기가 발견한 것들을
후배들에게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듯 하다.
문학의 미로를 헤치는 18개의 열쇠를 준비하고,
하나씩 독자들에게 설명해준다.
말하는 이도 즐겁고, 듣는 이도 즐거운 대화같이 들린다.
각각의 열쇠에 해당하는 소설의 한 부분을 소개시켜준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소설의 경우는 궁금해져서
별도의 목록으로 정리를 하기도 하고,
읽어 본 책의 구절이면, 입가에 미소가 생기면서 반가움이 앞선다.
정여울 작가가 소개해주는 문학의 미로를 헤치는 18개의 열쇠는
지금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열쇠이기에 잘 보관해 둔다.
01. 패러디 - 고전은 왜 끊임없이 패러디되는가?
02. 시점 - 여섯 살 옥희의 눈에 비친 세상
03. 의인화 - 인간의 탈을 쓴 동물
04. 은유 - 하늘의 별이 튀밥 같다고?
05. 상징 - 그들은 왜 걸핏하면 방앗간을 찾을까?
06. 아이러니 - 어쩐지 너무 운수가 좋다 했더니
07. 알레고리 - 소인국은 그저 소인국이 아니다
08. 트릭스터 - 방자, 골룸, 동키, 큐피드의 공통점은?
09. 안타고니스트 - 저 녀석만 없으면 주인공이 행복할 텐데
10. 시간 - 또 기억 상실증
11. 공간 - 그곳이 평사리여야만 하는 이유
12. 음식 - 어떻게 먹을 것인가, 누구에게 먹일 것인가?
13. 판타지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거꾸로 흐른 까닭은?
14. 트라우마 - 견딜 수 없는 슬픔의 역할
15. 통과의례 - 영웅은 왜 과도한 시련을 겪는가?
16. 정체성 - 위대한 '가출'의 주인공들
17. 대재앙 - 세상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18. 사랑 - 사랑의 혁명적 힘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라는 작품이다.
아직 초반부를 읽고 있는데,
이번에는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조금씩 주변을 둘러볼 예정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을 보고 있어서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지금은 제인 에어가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부터,
외숙모와 외사촌들에게 심한 구박을 받는 것 부터 나온다.
과연 제인 에어는 이런 통과의례를 잘 겪어낼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제인 에어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보는 이야기를,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시선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새롭다. 신선하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진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문학을 조금 더 파고 들어야 겠다.
갑자기 서재에 꽂혀 있는,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라는 책이 생각난다.
소설을 쓰는 법에 대해서 나온 책인데,
이 책을 만날 시기를 만났다.
앞에 몇 페이지만 들춰보고 고이 꽂혀있는 책인데
이제는 내가 조금 더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길 바란다.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처럼
사람들 가슴을 딷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함민복, 『긍정적인 밥』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좋아져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정보와 서비스를 먹고는 못산다
이 몸의 진리를 건너뛰면 끝장이다
첨단 정보와 지식과 컴퓨터가
이 시대를 이끌어간다 해도
누군가는 비바람치고 불볕 쬐는 논밭을 기며
하루 세 끼 밥을 길러 식탁에 올려야 한다
누군가는 지하 막장과 매캐한 공장에서
쇠를 캐고 달구고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선가 나 대신 누군가가
더럽고 위험한 일을 몸으로 때워야만 한다
정보다 문화다 서비스다 하면서 너나없이
논밭에서 공장에서 손털고 일어서는
바로 그때가 인류 파멸의 시간이다
앞서간다고 착각하지 마라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다!
- 박노해, 『몸의 진리』
영웅의 영웅다움은 재능이나 신묘한 능력으로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참여하는 '공감'의 능력에서 나온다. 타인의 고통이 인간에게 어떻게 새로운 삶의 '영감'을 주게 될까?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질문한다. "나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내가 상관할 것도 아닌 고통이 마치 나 자신의 것인 양 내게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며, 나로 하여금 행동에 몰입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타인의 고통이 내게 말을 거는 순간, 그 순간이 우리가 운명의 갈림길에 서는 순간이다. 타인의 슬픔에 함께 엉엉 우는 '마음'만으로는 그를 구할 수 없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익사 위기에서 구하려고 할 경우, 자칫하면 그 사람이 여러분을 무작정 잡아당겨 같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것처럼 생각하는 상태를 넘어, 내가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실질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p218)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에서
수천 권의 책을 읽어도, 아무리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도, 진정한 교양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교양의 뉘앙스에는 '꼭 알아두어야 할 것' 이라는 의무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내 안의 진정한 교양이 깨어나는 순간, 그 순간은 '알아 두면 좋은 것'이라는 실용성, 남들에게 무지가 탄로날까 봐 두려워하는 '불안' 때문이 아니라, 정말 '내 삶에 필요한 공부는 무엇인가', '내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산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이다. 교양이 깨어나는 순간은 바로 내 꿈이 정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p224)
사랑은 해일처럼 덮쳐 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돈키호테는 말한다.
"사랑은 맞붙어 싸워 이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줄행랑 칠 수 밖에 없다."
사랑 때문에 아무리 괴롭더라도, 인간은 사랑을 멈출 수가 없다. 사랑하며 아픈 것이 사랑하지 않은 채로 아프지 않은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리하여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말한다.
"사랑을 고치는 약은 없다. 만약 있다면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학교이기도 하다. 사랑을ㅇ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자기 자신을 탐구한다. 그리하여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한다.
"우주를 단 하나의 사람으로 줄이고 그 살마을 신에 이르게까지 확대하는 것, 그것이 곧 연애이다."
문학은 사회문제, 철학, 역사, 경제, 정치,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문학이란 삶에 관한 것입니다. 그 점은 다른 학문과 같습니다. 철학이나 경제, 역사 모두는 삶을 기초로 논리를 세우고 제도를 만들며 진실을, 혹은 사실을 기록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모든 학문은 삶이 현장이며, 삶은 모든 학문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삶의 총괄적인 것을 다루어야 하는 문학은 어떠한 부분, 어떠한 분야도 수용해야 하지만 그 것은 실체가 아니며 사실도 아니라는 점, 그러면서도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해서 소설을 창작이라 한다는 것을 먼저 말해 두고자 한다.
- 박경리,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中
문학은 삶의 총괄적인 것을 다뤄야 합니다. 하지만 실체도 사실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문학 중에 특히 소설을 좋아합니다. 여러 소설을 읽다 보면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소설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갑니다.
허구라는 그 속에서 허구적이지 않은 삶들을 살아갑니다. 이런 인물들의 삶을 천천히 지켜봅니다.
그러다 보면 감수성이 생겨납니다. 그들의 삶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의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게 많았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하나씩 생겼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작품에 놀라고 매료되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나온 그의 책들을 모두 읽어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작가의 전작을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게 무라카미 하루키와 박범신 두 명이 지금까지의 전부인 듯 하다.
지금까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작품들의 작가를 열거해 보면 김진명, 황석영, 정유정, 천명관, 황정은, 김민규, 조정래, 박범신 정도였다. 물론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아직은 만날 계기가 되지 않아서 접하지 못한 것은 너무 많아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박범신 작가의 작품이 너무 진하게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본성의 미세한 지점까지 파고드는 부분은 너무 예리해서 아프기도 하다. 사람들이 누구나 알지만 표현할 수 없는 그것들을 어쩌면 그는 과감히 표현할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금》을 읽으면서는 몇 번이나 혼자 책을 읽으며 눈물을 떨구었는지 모른다. 그냥 많이 아프고 쓰렸다.
그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며 그들의 내면 속에 떨어진 작은 나뭇잎 하나의 자그마한 움직임도 민감하게 잡아낸다.
p198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에서
이런 박범신 작가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제목은 《산다는 것은》 이다.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부제를 담고 있는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서 박범신이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다소는 풀리는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삶, 산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를 사랑하는 삶, 항상 젊은 낙지, 문어(?) 한마리를 가슴 속에 안고 사는 삶, 봄꽃에 홀로 기뻐하며 소주 한 잔을 하는 그의 삶이 글을 통해 다가왔다.
p68
그러나 젊은 날, 자기 지향을 오지게 쫓아갈 수 있는 동력은 안정감보다 필연적으로 불균형하게 드러나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나는 아직 수정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매사 상대적인 관계로써 안정감을 확보한 '젊은 그들' 보다 여전히 내부적 불균형 때문에 불편하게 살고 있는 '늙은' 내가 오히려 덜 권태롭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p172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평생 남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앉아 원고지와 한사코 마주앉아 있겠는가. 밤새워 원고를 쓰고 난 아침에 아내는 곧잘 '당신 일하는 데 혼자 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미안하네. 왜냐하면 당신 재워놓고 밤새 내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하고 있었거든."
그는 무엇보다도 뼛 속까지 작가이다. 그가 절필선언을 하고 글을 쓰지 않았던 시절이 그는 편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밤새워 원고를 쓰며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를 한다는 그는 분명 이별의 슬픔에 만나지 못하는 아픔에 많이 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이제는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사회의 어른에게 깊은 조언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
노새를 보며 슬퍼하고 봄꽃을 보고 너무 기뻐하던 그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날 선 예리함을 드러내며 사람들이 말하기 망설여하는 것에서도 작가답게 글로써 담아낸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글은 아마도 우리들의 진심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너무 드러내버리니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p210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편차가 심한 민족이다.
심장엔 노무현의 '지향'을 두고 머리로는 이명박의 실용적인 '보따리'를 넘보면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 누구인가. 자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자심의 손이 알아듣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를 버린 것이 누군인가. 그는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남아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미워하는 것으로 양다리를 걸쳤던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명목적인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을 각각 딴 주머니에 넣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마는 우리의 부정직한 이중성, 혹은 과실을 핑계로 한 비겁한 삶의 전략에 그 연유가 있다. 혹시 나는, 우리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할 '짐
꾼'을 잃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아직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네 편의 작품 《소금》,《은교》, 《촐라체》,《산다는 것은》을 만나면서 이미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마다 가슴 아픈 사연이 등장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기꺼이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 온다. 나 역시 삶이라는 것은 기쁘건, 아프건, 한 번쯤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산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인 동시에,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p174
사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예컨대,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쓰고, 가정생활에 30퍼센트를 쓰고, 취미 활동에 20퍼센트를 쓴다. 그는 직장에서도 쉬엄쉬엄 좀 심심하게 일하고 가정에서도 대충대충 오직 습관에 의존해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는 100퍼세트의 에너지를 쓰고 100이라는 인생을 산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100퍼센트를 쓰고 가정 생활에서 100퍼센트, 또 취미 활동에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 이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따라서 삶의 정체성을 뜨겁게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300퍼센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놀라운 산술로 보면 결국 그도 100퍼센트의 에너지로 100의 인생을 살 뿐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연애다. 전자의 인생엔 연애가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혹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다 해도 권태롭지만, 후자의 스타일은 일상에 늘 연애의 본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연애를 동반한 삶은 최소한 쓸쓸하지 않다. 그는 불황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환경을 핑계로 도덕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는 희망이고 도덕이고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꽃이 제 목숨을 바쳐 그것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미물도 마찬가지고 새들도 마찬가지고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지 꽃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다. 그게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는 그 직위나 빈부나 학벌에 관계없이 똑같이 아름답고 고귀하다. 너무도 뻔하고 쉬운 이것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올봄엔 숲이나 뜰로 나가 대지의 굳은 땅을 뚫고 나오는 어린 싹이 부르짖고 있는 도덕상의 선과 악에 대해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람을 보든 자연을 보든 오로지 그 결과만을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동반하기 쉽다. 당신이 지금 보는 아름다운 꽃은 하나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결과 너머의 생명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p26
산악인들이 고산에 오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는, 이른바 극지법 등반.
히말라야 같은 큰 산을 등반하기 위해 본거지를 설치하고 차례로 캠프를 세우면서 정상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흔히 등정주의 등반이라고 한다. 극지법 등반은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므로 그 목표를 위해 방대한 장비와 물자, 그리고 많은 전문 인력들이 동원된다. 이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등반 과정에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높이 오르는가 하는 최종 목표의 높이 서열에 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곳을 정복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등반법으로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이후 세계 산악계에서 거의 사라져가는 전근대적 등반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알파인 스타일
등로주의 등반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최종 높이가 아니라 등반 과정에 있다. 일반적인 코스보다 더 위험한 새로운 코스를 선택하여 타인이나 장비의 도움을 최소화해서, 오로지 오르는 사람의 고유한 판단과 감각에 의존해 정상에 오르는 실존주의적 등반법이다. 오늘날 세계 클라이밍 추세는 단연 알파인 스타일에 방점이 찍혀 있다.
p29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가는 언제나 자신의 '봉우리'를 찾아 오른다.
p34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지는 숲을 보면서 봄과 여름의 숲을 가리켜 '무섭다'고 말한 이상의 통찰력 넘치는 잠언을 생각해본다. 세상도 숲과 같다. 다만 자연의 숲은 홀홀히 옷을 벗는 가을과 겨울이 있지만 인간 세상의 숲은 절대로 가을과 겨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섭고 숨이 막힌다. 무엇을 쫓아 세상의 숲은 저리도 무섭고 울울창창 뻗어가고 달려가는가? 행복을 좇아서? 어떤 행복? 누구의?
p35
내 후각을 후려치고 달아나는 그것은 분명히 방귀 냄새다.
p56
내부 공사를 하면서 오래되어 상판이 휘어 주저앉은 책상을 바꿀 수 밖에 없어 그걸 버리라고 했더니, 버리기 쉽게 한다고 대뜸 망치질이다. 휘어진 책상의 상판이 망치질에 두 조각나는 순간 마치 내 허리가 조각나는 것 처럼 아프다. 오래 쓴 책상이다. 내가 쓴 소설의 3분의 2는 아마 그 책상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원고를 쓰다 말고 지쳐 거기에 엎드려 잠든 적도 많다. 그 책상으로 작가의 외길을 멈추지 않고 갔고, 그 책상으로 아이들 셋을 먹이고 가르쳣으며, 그 책상으로 지금 고치고 있는 이 집도 지었는데, 망치질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끝장나고 만다. 내 삶의 정체성과 내 삶의 가장 뜨거웠던 추억들도 '책상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쓴 소설 중에 <더러운 책상>이 있다.
글쓰기를 지향하는 한 청년의 내적 분열을 다룬 소설인데, 그 소설에서 가리키는 '더러운 책상'은 오래 쓴 낡은 책상이 아니다. '더러운 책상'은 그 책상에서 공부하고 배운 것을 오직 개인의 영달과 소비적인 자본주의 안락에 매진하고자 사용하는 경우의 책상이다. 어떤 이의 책상은 낡았어도 깨끗하고 어떤 이의 책상은 비록 새것일지라도 더럽다. 내 책상은 더러운 책상이었을따. 깨끗한 책상이었을까.
p57
부서진 소쿠리를 마른 그릇으로 재사용하려고 비료포대 종이로 예쁘게 바르던, 또 몽당연필을 못 쓰는 붓 뚜껑에 박아주던 어머니가 그립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머니는 진실로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구분할 줄 알고 있었으나, 대학까지 보낸 내 아이들에게 나는 그것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첵에 가슴을 치는 '불황'의 봄이다.
p66
사랑은 합리성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감정과 다름없어서, 한번 연애에 돌입하면, 무슨 일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내부에서 끊임없이 추락과 상승이 반복되고, 주관과 객관이 전도되고, 이성적 판단과 감성적 선택의 경계가 무화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내부의 열망으로 모든 감각체계가 풍뎅이처럼 부풀어 올라 매사에 균형과 안정감을 잃게 되는 것이다. 공부라고 뭐 다르겠는가. 특히 창작이란 비정상적인 감정의 반응을 포착하여 그 씨앗으로 얻어내는 과실 같은 것이라서, 심리적 균형은 경우에 따라 언제든 독이 될 수 도 있다.
p68
그러나 젊은 날, 자기 지향을 오지게 쫓아갈 수 있는 동력은 안정감보다 필연적으로 불균형하게 드러나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나는 아직 수정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매사 상대적인 관계로써 안정감을 확보한 '젊은 그들' 보다 여전히 내부적 불균형 때문에 불편하게 살고 있는 '늙은' 내가 오히려 덜 권태롭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p77
인간은 피부 색깔로 줄 세워질 수 없고, 문화엔 서열이 없다는 게 세계화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상식이다. 그러나 개발 이데올리기가 만든 경제제일주의는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강력한 습관을 만들어 우리에게 주입시켰다. 제3세계 사람들에게 유난히 야박하게 구는 심리의 밑바닥엔 분명히 모든 생명 값이나 문화 값조차 재빨리 수직으로 서열화하고 마는 천박한 후천적 습관이 작용하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의 콤플렉스, 혹은 가진 자의 우쭐함에 계속 사로잡혀 산다면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 될 게 뻔하다. 얼마 전, 십팔 년이나 우리 땅에 머물렀던 네팔인 '미누'가 내 생각으로는 이미 한국인이 되고만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추방될 때 남긴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내가 한국에서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사람입니까..... 한국이 너무 슬퍼요."
p86
사람의 영혼은 짐승이 사는 시궁창으로부터 신이 사는 하늘까지 걸쳐져 있을 진대, 어떤 층위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겉으로 보아선 그게 그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지 않다. 깊이 들여다보면 지금 이 순간도 누구는 시궁창 가까이 살고, 누구는 하늘 가까이에서 살고, 또 누구는 지상과 하늘로 추락과 상승을 밥먹듯 하면서 산다. 그것이 모여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p87
필요한 건 그리움이고 그리움이 깊어지는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보는 일이다. 혹은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서' 떠나온 것들 때문에, 혹은 이룰 수 없는 허다한 꿈 때문에 깊은 밤 홀로 앉아 그리운 많은 것들이 내 몸 안에 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때로 들여다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목표는 꿈이 아니다. 목표 너머를 보는 마음이 꿈의 시작이고,그로써 그리움이 깊어지면 우리의 삶은 더욱 향기롭게 깊어질 것이다.
p100
올 설엔 늙어가는 아버지도 보자.
뒷전에 물러앉아 헛기침이나 날리고 있는 아버지가 권위를 부리려고 그렇다고만 단정해선 안 된다. 어쩌면 민망해할지 모를 그들을 따뜻이 불러 함께 차례상 제수를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회가 그들에게 역할을 분배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한때 권세를 누렸지만 그들이 애당초 원해서 누렸던 권세는 아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이로부터 권력자로 '길러졌기'때문에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잘모소딘 가부장제의 일차적 희생자인지 모른다.
p103
누가 새삼 훈계를 해서 변화한 것은 더욱더 아니고, 경험의 축적에 의한 변화도 아니다. 저절로 예까지 오고 만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시간이 나를 태워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비와 불심이라는 게 뭐 따로 있겠는가. 시간은 쫓아 발에 물집이 생길 만큼 걷고 걸었더니, 어떤 날 자비심 같은 것이, 사물에 대한 애달픈 연민 같은 것이 내 안에 들어와 세상만물이 다 예쁘다고, 이를테면 마음의 눈을 띄어준 셈이다.
p104
사람처럼 추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독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불쌍한 것이 없고, 그리고 사람처럼 예쁜 것이 없다. 사람 속엔 무엇보다 사랑의 감정이 깃들어 있으니 그럴 터이고, 사람만이 삶의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이다. 모든 게 영원하다면 무엇이 예쁘고 무엇이 또 눈물겹겠는가
p113
힌두교도들에겐 일반적으로 삶을 운영하는 네 개의 사이클이 있다.
어릴 때는 배우고 익히는 학생기로 살고, 철들면 일, 결혼, 부모 노릇하며 가주기로 살고, 늙으면 모든 걸 자식에게 물려준 뒤 숲으로 들어가 유유자적 임주기로 살고,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순례길로 나서 흘러 다니는 유행기로 사는 게 그것이다. 이 사이클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자연으로 보고 그것에 순응해 보편적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p147
"대지는 우리 자신에게 온갖 책보다도 많은 걸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니까. 인간은 장애물과 더불어 겨룰 때 비로소 제자신을 발견하는 법이다."
p149
책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의 얼굴은 착하고 유익한 것으로서 우리들 영혼을 깊이 발효시켜 향기롭게 하지만, 또 하나의 얼굴은 파괴적이어서 우리들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서는 그런 점에서 유익하면서 동시에 위태롭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위태롭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끝없는 일상의 권태와 무위를 책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뻔하고 뻔한 습관적인 삶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경제적이고 빠른 길은 독서 밖에 없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이미 세계가 너무 섬세하고 조직적으로 짜여 있어 어떤 모험도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152
우리는 매 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적 경쟁심이 부추기는 욕망과 알량한 수준의 안락을 추구할 뿐인 '습관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한마디로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이고, 그래서 거의 평생 우리는 관행과 습관에 의지해 삶을 상투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혹하게 말해서 '나의 삶'이 아니다.
p166
바람이 불었고, 감나무 잎에 머물렀던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나서 다시 보니, 그가 거기 없었다.
p167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한 부분이며,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된 존재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사유와 감정이 주변의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여 일종의 의식이 빚어낸 착시현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미혹이 바로 우리 자신을 가두고, 우리를 개인적인 욕망과 가까운 몇몇 사람에 대한 애정에 집착하게 만든다. 살아 있는 우리의 임무는 모든 살아 있는 목숨들과 자연 전체를 포용하기 위해 자비심의 테두리를 좀더 넓힘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러한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p172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평생 남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앉아 원고지와 한사코 마주앉아 있겠는가. 밤새워 원고를 쓰고 난 아침에 아내는 곧잘 '당신 일하는 데 혼자 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미안하네. 왜냐하면 당신 재워놓고 밤새 내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하고 있었거든."
p174
사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예컨대,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쓰고, 가정생활에 30퍼센트를 쓰고, 취미 활동에 20퍼센트를 쓴다. 그는 직장에서도 쉬엄쉬엄 좀 심심하게 일하고 가정에서도 대충대충 오직 습관에 의존해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는 100퍼세트의 에너지를 쓰고 100이라는 인생을 산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100퍼센트를 쓰고 가정 생활에서 100퍼센트, 또 취미 활동에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 이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따라서 삶의 정체성을 뜨겁게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300퍼센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놀라운 산술로 보면 결국 그도 100퍼센트의 에너지로 100의 인생을 살 뿐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연애다. 전자의 인생엔 연애가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혹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다 해도 권태롭지만, 후자의 스타일은 일상에 늘 연애의 본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연애를 동반한 삶은 최소한 쓸쓸하지 않다. 그는 불황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환경을 핑계로 도덕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는 희망이고 도덕이고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p182
"나는 사랑을 찾아 헤맸다. 첫째는, 그것이 황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황홀은 너무나 찬란해서 몇 시간의 이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남은 생애 전부를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가끔 있었다. 둘째는, 그것이 고독감은, 하나의 떨리는 의식이 차디찬, 불모의 끝없는 심연을 바라보는 무서운 고독감을 덜어주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다녔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랑의 결합 속에서 성자와 시인들이 상상한 천국의 신비로운 축도를 미리 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헤맸다.
p185
나는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 사랑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상기했고, '내게 있어 연애란 유일한 사업이었다'는 스탕달의 고백도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가파른 세계화에 따른 과도한 경쟁 때문에 사랑의 감정조차 재빨리 일상화되고 만다는 식의 보편적 발언들은 너무 일반적인 속단이 아닐까. 삶이 사막처럼 느껴진다면 오히려 사랑에의 갈망이 더 깊어진다는 고전적인 생각은 과연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p185
자본주의적 경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끝없이 이간질해 황폐화시킨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의 갈망이 더 타오르는 것이 인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필요한 것은 타오르는 사랑의 갈망을 자학적으로 억누르거나 일반화하지 않는 정직성의 회복이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랑으로써 존재의 진정한 품위를 높이지 않는 한 행복은 나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p186
나는 "사랑의 결합 속에서 성자와 시인들이 상상한 천국의 신비로운 축도를 미리 보았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아직도 굳세게 믿고 있다.
p187
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 속에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나서 또한 이렇게 썼다.
"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이다.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었다. 황폐한 벌판에서 코스모스를 만나면 나는 또 그것과 똑같은 고독을 느낀다."
p188
"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계절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버려야겠다.
p189
가을이 깊어지면 그러하니, '혼자'가 되자.
p191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하는 모든 것은 어떻게든 곁에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고 이미지뿐이다. 사랑은 영원한 추상명사에 불과하다. 증명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사랑에 의한 헌신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헌신의 주체자에겐 어저며 '자학의 남모르는 축적'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이것은 심한 비유인가.
p198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에서
p210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편차가 심한 민족이다.
심장엔 노무현의 '지향'을 두고 머리로는 이명박의 실용적인 '보따리'를 넘보면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 누구인가. 자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자심의 손이 알아듣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를 버린 것이 누군인가. 그는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남아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미워하는 것으로 양다리를 걸쳤던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명목적인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을 각각 딴 주머니에 넣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마는 우리의 부정직한 이중성, 혹은 과실을 핑계로 한 비겁한 삶의 전략에 그 연유가 있다. 혹시 나는, 우리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할 '짐
꾼'을 잃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p225
<행복론>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알랭은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성공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라고 설파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족하는 지점'
p269
"신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가 한 말이다. 애당초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으므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한 표현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제도적 필요에도, 또는 그 어떤 운명적 우연에도 예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의 지도를 따라 사는 일은 그런 점에서 행복의 지름길이고 존재의 빛나는 증명서다
이번에도 그동안 제목만 알고 있었던 책을 찾아 읽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에 몇 일 동안 푹 빠져 있었다. 글의 여운은 아직까지도 잔잔하게 남아있다.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힌다. 책을 읽자 마자 얼마 후 부터 '아! 드디어 만났구나' 하고 느끼는 보물들이 있는데 <달과 6펜스> 역시 그 중 하나이다. 특히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건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하마터면 뒷부분을 먼저 읽어버릴 뻔했다.
<달과 6펜스>는 등장인물 스트릭랜드를 통해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배경이 있는지 모르고 읽은 책이어서 즐거움은 배가 된다. 실제 인물이 배경이 되는 이야기와 다른 장르와 연결해주는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에 다리를 놓아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마리오를 자연스럽게 시에 대해 이야기듯이 <달과 6펜스> 역시 작품 속 스트릭랜드이자 실제 인물인 폴 고갱을 통해서 미술에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해준다.
예전부터 그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저 관련 책을 읽는 것으로는 흥미가 생기지 않아 쉽게 포기하곤 했다. 이번에는 뜻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책읽기를 마치고 <반고흐, 영혼의 편지>를 찾아 폴 고갱 이후 반 고흐를 만나게 해주었다. 이 소중한 인연이 차곡차곡 조금씩 쌓아지기를 내심 바랄 뿐이다.
이야기 속으로
찰스 스트릭랜드는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을 증권 중개인 일을 하던 부유한 사십대 남자였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홀로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는 가난한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한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더크 스트로브는 그를 지원지만 스트릭랜드는 그에게 냉소적이었으며 그의 아내 블란치 마저 자살에 이르게 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그림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으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심과는 다른 게 있는 듯 했다.
그는 문명의 땅을 뒤로 하고 남태평양의 외딴 섬인 타히티로 떠난다. 타히티라는 원시의 섬에서 그가 생각하는 낙원을 만나고 그림에 열중하고 아타라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문등병에 걸리고 심지어 눈이 멀기까지 한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의 집안에 신비로운 그림을 그린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폴 고갱의 삶을 그대로 재현해두고 있지는 않지만 거의 유사한 삶을 살았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한 예술가의 순수한 열정을 표현해준다. 분명히 자신 밖에 모르는 차디찬 냉소가 깊게 베어나지만, 그 열정이라는게 자연스럽게 다른 부정적 요소를 가려준다. 나 엮시 읽는 내내 안타까우면서도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일에 빠져든 그가 부럽기도 했다.
작가 서머싯 몸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왜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고, 이야기의 중간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로 이야기가 전환된다. 어쩌면 친절하지 않고 부연조차 없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툭 던져 놓으니 확실한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더 극적인 표현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묘미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손에서 놓지못하고 한 번에 읽은 기억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내가 개츠비를 궁금해하고 서로 인연이 닿아가면서 그 궁금증을 조금씩 풀어가는 묘미가 있었다. <달과 6펜스> 역시 소설 속 작가인 내가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는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효과적인 것 같다.
어떤 이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절묘한 조화가 훌륭하다고 하는데 아직은 그 정도를 찾을 수 있지는 못해서 아쉽다.
소설을 읽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책들은 읽고 나면 개운하게 숨을 내쉬며 책을 덮을 수 있다. 읽는 동안 긴장한 것을 놓는 숨이며 아쉬움의 표현이다.
폴 고갱의 작품 속으로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서 고갱에 대해 표현한 부분을 찾아 보았다.
P551
타히티 섬에서 가져온 그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 그의 옛 친구들조차 당황스러워 했다. 그 그림들은 너무 야만적이고 미개해보였다. 그것은 바로 고갱이 원하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야만적'인 색채와 소묘만이 타히티에 머물면서 감탄했던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이들을 올바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중략)
그러나 고갱이 아주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낯설고 이국적인 것은 단지 작품의 주제만이 아니다. 그는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토착민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때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의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그린 원주민의 초상을 그러한 '원시'미술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세잔과 달리 그는 단순화된 형태와 색체의 구성으로 인해 혹시 그의 작품이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연의 아이들이 지닌 순수한 강렬함을 그리는 데 도음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수세기에 걸쳐 씨름해온 유럽 미술의 문제들을 기꺼이 무시해버렸다.
솔직하과 단순함을 이룩하려는 그의 목표가 항상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향한 그의 열의는 새로운 조화를 이룩하려는 세잔이나 새로움을 전달하려는 고흐의 열의만큼 여정적이고 진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욕이 들어있었던 책이다. 거의 일관된 하나의 욕이다. '씨발'이다.
다 읽고 나니 그 말이 빠지면 절대 안된다. 이 작품에서 '씨발'이 빠지면 읽은 후에 절반의 여운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쉽게 표현할 수 없었던 소재인 듯 하다. 주된 흐름은 가정 내에서의 가정폭력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이게 가정에 국한된 폭력이 아님을 알아가게 된다. 결국은 모든 폭력에 대해서 작가는 말하고 있다.
책의 중간 중간에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마 그대는 이걸 읽고 있던 내가 맞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어디까지 왔나' 과연 그 어디는 어디인가? 책을 덮고 나서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내가 어디까지 가야했는지를······
글을 정리하면서 생각한 건, 과연 작가가 말하는 폭력에 대해서 이해를 했느냐? 그 폭력에 당신은 개입되지 않았느냐? 방관하지는 않았느냐? 하고 되묻는거 같아서 불편하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화자는 앨리시어이다. 앨리시어는 동생과 함께 어머니에게 학대받고 아버지는 그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한 대를 더 걸쳐서 올라가면 앨리시어와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의 폭력 속에 살아왔고 그녀의 어머니는 폭력에 무관심한 듯 하다.
P42
그녀는 그보다 어머니가 궁금하다. 어머니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왜 내다보지도 않았을까. 왜 나를 들여보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죽고 싶을 정도로 나는 씨발 추웠는데 왜 나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얼굴로 자고 있나. 식구들이 저녁으로 먹고 남긴 수제비 냄새와 낡은 이불깃과 잠든 인간들의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속에서 아주 조용하게 씨발 년이 발아한다. 씨발 년은 아버지 곁에서 편안하게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중략)
그녀가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일 때는 평화롭고 행복할 때다. 기생들과 즐기고 놀다 돌아온 가장이 신문지에 싸서 가져온 쇠고기나 꿩고기로 고깃국을 끓여 식구들이 모두 앉아 그것을 먹을 때다. 그녀는 배부르고 평온하다.
포스트 씨발 년을 탄생시킨 씨발 년이다.
앨리시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는 그녀에게 폭력을 가한 그녀의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로부터 발아했다는 표현을 한다. 폭력의 되물림이다. 안타깝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정말 현실이 아닐까.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서툴다. 심지어 상대방이 폭력으로 느끼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 작가 황정은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표현하기 쉽지 않은 표현을 뱉어낸다. 그런데 당하는 당사자들은 혹여나 부모라도 그 당시에는 그랬을 거다라는 나 역시 뱉기 힘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정폭력
앨리시어의 동생은 소위 학교에서 왕따를 받는 그런 학생인 듯 하다. 가정에서 어머니에게 폭력을 당한 동생은 학교에서도 폭력과 따돌림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교폭력
p87
너는 병신이 아니라고 엘리시어가 대답한다.
너더러 병신이라고 말하는 새끼가 있다면 그 새끼가 나쁜 거고 진정 병신인 거다. 앨리시어의 동생이 그걸 듣고 고객를 끄덕인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는 어쩌면 국가에 대한 불신과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 국가 역시 폭력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게 한다. 앨리시어와 친구 고미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것을 보고 구청으로 갑니다. 무엇을 물어보려 했느냐. 그건 바로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를 때려도 되는가? 였다. 소설 속의 화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국가에 공권력에 호소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앨리시어가 처음 찾아간 구청의 복지과에서 가정폭력에 대해서 상담하는 곳이 아니고 행정업무를 보는 것이라며, 사설기관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준다. 국가는 외면했다. 다시 사설기관을 찾아간다. 사설기관 왈, 부모를 데리고 오란다. 그리고 예약을 하고 오란다. 이런 정말 '씨발이 발아한다.' 국가폭력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앨리시어의 동생은 폭력과 무관심 속에서 내쳐지고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작가는 또 묻고 묻는다. 처음처럼......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앨리시어는 갤럭시에 대해 말하면서 이런말을 한다.
P63
팽창하고 팽창해서 별들 간 간격이 엄청나게 멀어져버린 갤럭시에서 앨리시어는 한 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점 먼지도 되지 않는 앨리시어의 고통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갤럭시는 좆같다.
앨리시어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갤럭시란 엘리시어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다.
한 개인의 고통은 그 개인만이 알 수 있다. 그 고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갤럭시 속에서의 개인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듯이 타인의 무관심 또한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 그리고 친구 고미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외면해버린다.
앨리시어 같은 이는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 가깝게 존재하고 우리가 아는 어떤 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라는 질문은 이제 그들의 고통을 얼마나 알게 됐는가하고 계속 질문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덧붙이기>
황정은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다. 162쪽 밖에 되지 않는 두껍지 않은 책인데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서사위주의 형식보다는 등장인물의 내면에서의 움직임이 주된 이야기의 흐름을 좌우하는 듯 하다. 익숙하지 않아 쉽지는 않았으나 그러기에 더 남는다. 황정은 작가의 책을 더 읽어봐야 겠다. 색깔이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하다. 어떤 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