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공상과학 소설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사회상을 철저하게 풍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약 80여 전에 쓰인 작품이라기 하기엔 너무나 현실성이 있어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과 지금의 현실에도 반영시킬 수 있는 공상과학소설이자 풍자소설이라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던 소설과 영화가 있다. 소설은 얼마 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1984>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이다. 두 소설과 영화는 맥락을 같이 한다. 하나의 체제, 사회가 있고, 이것은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철저한 규칙과 통제하에 운영되어 진다. 처음에 그런 사회와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힘이 들고 많은 갈등이 있었겠지만 어느덧 정착이 되고 세대가 거듭될 수록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집에서 채집용 큰 통에 달팽이를 키운다. 큰 달팽이들은 다른 곳에 있다가 왔으니 변화에 대해 감지를 했을 것이다. 얼마 후 달팽이들의 알에서 새끼 달팽이가 태어났다. 아마도 그 새끼 달팽이에게는 그 좁은 공간이 하나의 세계로 인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끔 나타는 어떤 물체(사람의 손)은 하나의 신이 되어 먹이를 주고 물을 뿌려주는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누군가에 의해 사람들의 삶은 통제되어 진다. 어쩌면 태어날때부터...

<멋진 신세계>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계급이 정해집니다. 마치 음식을 만들 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듯이 각 계급에 따라 투여되는 것이 다르고 이에 따라 몸집의 크기에서 부터 지적역량에 이르기까지 다르게 태어납니다. 엡실론 계급, 감마 계급, 델타 계급, 알파 계급이 이렇게 다른 계급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조건반사적 교육이 진행되어 집니다. 뜨거운 곳에서 일하게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뜨거움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받는다. 이는 나치 시대의 우생학과 어린 아이에게 세뇌교육을 시키는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1984>에서는 곳곳에 붙어 있는 텔레스크린과 곳곳에 숨겨지 있는 사상경찰관에 의해 사람들이 철저하게 감시 당한다. <설국열차>에서도 열차의 뒷칸으로 갈수록 계급이 낮아집니다. 그리고 바퀴벌레로 만든 묵을 식량으로 삼고 있다.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철저하게 나뉘어진 모습, 그들만의 규칙과 통제로  나뉘어진 계급대로 영원히 그 사회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강자, 지배자들의 논리가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베어난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문화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를 통제하고 개인의 주체성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얼마 전에 읽은 <커피는 원래 쓰다>에서 아랍에서 처음 유행한 커피하우스는 술탄 왕조에 의해 금지되었었다고 한다. 이유는 사람들이 그곳에 보여서 사회, 정치이야기를 하고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정치개혁에 대한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커피가 사람들을 생각하게 각성하게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 강자와 지배자들에게 가장 큰 적은 약자와 피지배자들이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그것을 바꾸어보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처음 들어온 계기 중에 하나가 전두환 시절에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정치계에서 큰 이슈를 덮기 위해서 연예인 관련 대형 스캔들을 터뜨린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려고 할 때, 자극적이고 생각하지 않고 관심을 확 끌 수 있는 일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대로 그곳에 매몰되어 버리는 법이다. TV같은 경우도 어쩔 때는 멍하니 보고 있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아무런 개인의 노력없이 시선을 고정해서 생각을 없게 만들기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 사이사이에 흘러나오는 광고는 나도 모르게 세뇌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지만, 절대로 획일성에 빠져버려서는 안된다. 한 예로 명품 가방을 만드는 나라가 아닌 소비하는 나라인 우리나라는 수십, 수백만원에 이르는 가방이 국민 가방이라는 말이 돌기도 한다. 예전에 배낭 여행할 때 프랑스의 루이비통 매장을 가본 적이 있다. 그런데 공사를 한다는 안내가 한국말로 씌어져있고 직원 중 상당 수가 한국인이거나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명품 가방 소비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이들이 걸어 놓은 덫에 생각하지도 않고 빠지지를 않기를 바란다. 여러 이유를 고려해서 선택은 할 수 있지만, 항상 '생각'이라는 필터는 항상 한 번쯤은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멋진 신세계>로 돌아가 본다. 작품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시험관에서 태어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이들의 세계로 온 야만인이 '멋진 신세계'의 총통이 나눈 대화가 등장한다.


p305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스타파 몬드는 어깨를 추슬렀다.

"마음대로 하게"하고 그가 말했다.


작중 야만인은 불편함을 원한다. 유토피아를 가장하는 이들이 사는 디스토피아에서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있을 경우에는 '소마'라는 알 약을 먹는다. 어렸을 때 드래곤볼 만화를 보면 선두콩 한 알만 먹어도 일주일이 배고프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과연 정말 이런 세상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음식이라는 것은 힘든 노동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해줄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과 정성을 담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약속을 잡을 때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한다. 여기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저 허기를 달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유대를 확인해고 함께 살아가는 힘을 서로에게 불어넣어주는 것들이다.


건축가 승효상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전원주택을 원하면서 불편함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전원주택의 경우 잠깐 밖에 나와 신발을 신고 걸을 수도 있는 법이고, 겨울에 따뜻하게 하고 반팔을 입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내복을 입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원 주택에 살면서 아파트의 혜택도 원한다. 


우리는 어쩌면 사회와 체제가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도 모른다. 그저 아무런 노력없이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매체가 아닌 자신이 직접 노력을 기울이는 창작활동과 독서활동 거기에 이은 사람들과의 대화와 토론이 필요한 듯 하다. 어떤 갈등을 겪게 될 경우에는 불편하더라도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잘못됐다고 판단될때까지는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 두 아들을 키운다. '뭐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한 번 말하고 나서 아이들이 정말 항상 다 고치고 내 말을 따른 다면 어쩌면 그게 더 나에게 걱정일지 모른다. 내 아이들이 후에 커서 자신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하듯이 나 역시 이 사회에 매몰되어 있지 않으면서 나만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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