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현상학이라는 단어가 계속 들려왔다. 도대체 현상학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간단하게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에서 '현상학'이라는 세 글자를 입력하고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을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되어진 책이 바로『후설&하이데거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이다.
이 책은 스승과 제자 사이인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각각 설명하며 어떻게 서로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책은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았지만, 책을 덮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그래서 도대체 현상학이 뭔데?'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들었다. 현상학은 무엇일까? 아직 한 권의 책으로는 정의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번에는 단순히 물꼬를 튼 것으로 생각하고,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위주로 글을 정리하려 한다.
우리가 보통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동일한 현상과 사건에 대해서 서로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태도가 객관적인 태도인가? 어떤 방식이 올바른 방식인가?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현상의 의미는 늘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 즉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현상'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설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참된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말한다. 어떤 현상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고, 문제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객관적인 태도라는 것이다.(p72)
'사태 자체'란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보는 것이 가능할까? 비록 우리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말은 하지만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후설 역시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후설 스스로도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포함해서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태가 왜 다른 의미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은 바로 그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 즉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의 의식이 해답의 열쇠를 쥐고 있다.(p73)
어떤 현상을 과연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가?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바라 볼 수 있는가?
분명 쉽지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주관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겠지만 주관적인 시선에 더불어서 다른 이들의 시선에 대해서 항상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자신과 충돌되는 지점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해가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사태가 벌어졌다는 현실은 단지 모든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 현실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문제의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사태가 현실적으로 벌어졌다는 제약에서 우리의 의식을 풀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p84)
현재 내 앞에서 벌어진 상황이라던가 눈 앞에 있는 사물들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동일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실제 일어난 현실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몫이 더 큰 법이다. 사건이 벌어졌다는 현실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여러 가능성의 하나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 세계 속으로 던져진, 혹은 상황에 내맡겨진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단지 혼자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언제나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는 존재자다. 이 '더불어 있음'은 현존재, 즉 실존의 또 다른 존재방식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더불어 있다고 할 때, 그 '더불어 있음'의 주체가 누구인지 물어보자.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나와 타인이 함께'일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만약 우리가 그 점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더불어 있음'의 주체는 제3자를 뜻하는 '그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그들'이라는 익명의 주체를 참된 의미의 실존이 아닌, 일종의 타락한 실존이라고 본다. '타락한 실존'이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한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욱 민감해진다. 그것이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민감해질수록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로써 나는 내 행동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 삶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고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 속에 숨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p109)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박제화된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철학적 사색, 혹은 사유다. 오직 철학적 사색만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삼은 그의 단조로운 삶이 보여주듯 사유함이야말로 철학의 주제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물음을 통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전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문제의식이기도 한 물음은 무엇보다 은폐된 것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한다. 은폐된 것이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것, 즉 '탈은폐'가 바로 하이데거에게는 진리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이른바 '이성'을 통해 세계를 규격화된 틀 속에 집어넣어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일, 즉 은폐를 걷어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론은 존재를 존재자처럼 다룸으로써 은폐해온 종래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역할을 떠맞게 된다.(p122)
하이데거 부분에서 인상적인 두 부분이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는 방법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내면에 집중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물음'이다.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에 부족하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숨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열어젖혀서 탈은폐를 시켜야 한다. 닫힌 부분을 치료하려면 우선 살이 째는 고통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스스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감히 탈은폐 시켜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해야 한다.
이 책만으로는 현상학의 정의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언급한 부분 중에 어떤 부분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고 어떤 부분이 의견의 차이가 있는 부분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똑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가오는 부분이 많았다.
1) 어떤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은 수많은 가능성과 의미를 내포한 현실 중 그 가능성, 의미 하나가 나에게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
2)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주관을 전제로 타자의 주관을 인정하는 태도이며 서로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는 태도라는 점.
3)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삶이라는 것은 스스로 성찰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이 내린 판단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4) 사유의 방식은 감춰두었던 의문, 문제 등을 과감히 탈은폐 시킴으로써 은폐를 시켰던 이유들을 하나씩 벗겨내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점, 이것이 곧 사색이라는 점
특히 하이데거의 관점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아서 그의 저작들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저작 중에 <존재와 시간>, <사유란 무엇인가>이 있는데 과연 내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유란 무엇인가>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니 일단 이건 다음에 미뤄야 겠다. 예전에 니체의 그 책을 읽다가 도무지 이해가 안가서 아직도 먼지가 쌓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하이데거 책을 바탕으로 국내 저자들이 다시 풀어낸 2차 도서를 중심으로 읽어야겠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책이 출판사 김영사의 <지식인마을> 시리즈인데 하나의 주제 대해서 두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체가 40권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이 책 한 권을 보더라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이 책을 통해서 우연히 알게 된 시리즈인데 관심가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권 한 권 책을 채워가는 재미도 기대된다.
p72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현상의 의미는 늘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 즉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 현상'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설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참된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말한다. 어떤 현상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고, 문제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객관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p72
흔히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똑같은 사태를 두고 사람들이 저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라거나, '아니, 넌 나랑 똑같이 보고 왜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거니?'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일상적인 대화에 현상학적 통찰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서로 다름 속에서 어떤 동일성을 전제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서로 다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잠깐만! 한 걸음씩 물러서서 생각해봐! 너희들이 그렇게 다르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걸 다 들추어낸 다음에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해보잔 말이야.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하지 말고" 라며 중재할 때 이 일상적인 대화에 등장하는 객관적인 관점이 바로 현상학적 관점의 중요한 핵심을 뚫고 있다.
p73
'사태 자체'란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비록 우리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말은 하지만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후설 역시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후설 스스로도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포함해서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태가 왜 다른 의미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은 바로 그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 즉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의 의식이 해답의 열쇠를 쥐고 있다.
p79
우리의 의식은 일련의 감각정보를 그저 조각난 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정보가 어떤 통일적인 관점 아래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재구성한다. 의식의 이러한 능동적인 활동이 바로 우리가 이 세계가 '이러저러하다' 고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후설은 이러한 의식의 느동적인 활동성이 바로 의식의 지향적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p80
동일한 꽃이지만 생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예술적 작품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어릴 적 기억을 되살리는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잇다. 이것은 곧 하나의 대상이 동시에 여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각각의 대상적 의미들은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한 송이 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꽃과 관련을 맺고 있는 세 사람의 지향적 의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상응해서 꽃의 대상적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p84
현상학이 개별 학문들의 토대를 제공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고자 한다면, 바꾸어 말해서 '학문들에 관한 학문'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의 대상이 어떻게 서로 다른 대상적 의미를 갖게 되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p90
현상학적 방법의 특징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기술(記述)이고 다른 하나는 환원(還元)이다.
기술은 말 그대로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것이다.
일상적인 의식이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그저 기술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대개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그래서 '환원'이라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환원'은 일종의 거름종이처럼 대상을 순수하게 만드는 장치와 같다. 환원이라는 말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인데 이는 우리가 대상을 순수하게 보는 것은 오염시킨 여러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때문에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기위해서는 '현상학적 환원'을 거쳐야 한다.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을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그 설명의 핵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문제가 되는 우리 의식과 대상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p92
우리의 시선을 자꾸 변경해가는 태도를 후설은 '자유 변경'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변경의 과정 속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일단 여기서 기억해둘 것은 우리가 의자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까닭은 의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현실적인 구속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 즉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여러 종류의 제약들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시선을 변경시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환원의 또 다른 축인 판단 중지는 그야말로 주어진 사태를 중립적인 태도에서 보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태도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그 사태는 이러저러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때의 판단은 대개 주어진 현실에 제약을 받는다. 이를테면, 나의 현재 상황이나 문제가 되는 사태의 이러저러한 조건 따위에 제약되어 있기 마련인 것이다. 판단 중지는 우리의 판단을 이러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약에서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현실적인 제약들로부터 우리의 판단을 풀어내면 무엇이 드러날까? 바로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두 나라 간의 전쟁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그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의 객관적인 상황을 제대로 기술해야 하고, 전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정리해보아야 한다. 이때 조심할 것은 관련 사건들을 조사하는 '나'의 상황이다. 사건을 기술하는 '나'가 특정 이해관계 속에서 그 사건들을 봄으로써 사건의 해석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 달리 말해서 문제가 되는 사건들이 '꼭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다. 이렇게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 바로 판단 중지의 효과다.
p93
실제로 그 사태가 벌어졌다는 현실은 단지 모든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 현실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문제의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사태가 현실적으로 벌어졌다는 제약에서 우리의 의식을 풀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p94
내가 믿는 이런 사태들은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특별한 우선권을 가진 현상이 아니라 그저 의식에 마주해 있는 '의미 현상'중 하나일 뿐이다.
p96
이런 질문들을 일반화시키면 이렇다. '도대체 우리는 이 세계를 어떻게 해서 경험할 수 있는가?' 이 세계를 경험하려면 생각해봐야 할 조건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 모두가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들이다. 분명한 것은 사정이야 어떻든 우리가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선험적 관점이란 그런 경험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지 그 가능 근거들을 밝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가능 근거들을 밝혀내려면 내가 경험하고 있는 그 사실에 매여 있어서는 곤란하다. 창밖의 나비에 집착하기만 하면, 어떻게 내가 나비를 경험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업삳. 달리 말하자면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대상 모두를 볼 수 있는 이른바 제 3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실'의 문제가 아닌 '가능성'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p101
후설은 철학을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이성'의 힘을 믿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앗다. 하이데거에게 근대적 의미의 이성은 모든 것을 규격화시켜 버림으로써 인간을 비인간적이게 만드는 시스템과 같았다. 이는 특히 그가 전통 형이상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p105
실존주의의 사상적 경향은 인간을 오직 이성적 존재자로만 규정하는 전통 철학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 초의 험난한 시대를 산 사람들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는 사실이 우리의 실제 삶에서 얼마나 공허한 이야기인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발현될수록 인간의 도덕성 또한 고양될 것이라는 믿음을 낳았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을 좌절시킨 대공황과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과연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면, 어떻게 세상이 이 모양인가?'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자라고 규정한 채 모든 논의를 시작한 근대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인간 존재의 규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아야 하는 인간이었다. 실존주의는 이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아야 하는 인간이었다. 실존주의는 이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파악되는 인간에게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실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실존주의는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해진 사람들ㅇ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우스갯소리로 전혀 책을 읽지 않던 사람들 조차 지성인처럼 보이기 위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끼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비록 하이데거가 존재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인간, 즉 실존을 문제시했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자신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존재론자라고 했지만 말이다.
p109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 세계 속으로 던져진, 혹은 상황에 내맡겨진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단지 혼자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언제나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는 존재자다. 이 '더불어 있음'은 현존재, 즉 실존의 또 다른 존재방식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더불어 있다고 할 때, 그 '더불어 있음'의 주체가 누굴인지 물어보자.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나와 타인이 함께'일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만약 우리가 그 점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더불어 있음'의 주체는 제3자를 뜻하는 '그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그는 '그들'이라는 익명의 주체를 참된 의미의 실존이 아닌, 일종의 타락한 실존이라고 본다. '타락한 실존'이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함께 있을 때, 나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욱 민감해진다. 그것이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민감해질수록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로써 나는 내 행동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 삶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고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 속에 숨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p112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자. 우리의 삶이 미래를 향해 있을 때, 그 끝은 무엇일까? 바로 죽음이다. 흔히 하는 말처럼 우리의 삶이 시작하는 순간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늘 죽음을 향해 달려가도록 해 놓았다. 더욱이 그 죽음은 약속된 순간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 실존이 처해있는 이러한 상황이 바로 그의 삶을 더욱 소중하고 진지하게 만들어준다.
가령 아주 낯선 어느 곳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 낯섦은 친숙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대가인 동시에 나 자신의 존재를 묻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 낯섦은 내게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킬까? 불안이다. 그 어느 것도 친숙하지 않기에 생기는 기분, 달리 말하면 친숙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부터 유래하는 기분, 하이데거는 이 '불안'을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말한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불안, 두려움, 공포 같은 말들을 함께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들을 곰곰이 따져 보면, 어떤 때는 특정한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을 두고 어떤 기분이 들 때가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대상 없이 막연하게 생기는 기분도 있다. 가령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내 눈앞에 나타나서 눈동자를 번득이며 으르렁댄다고 하자. 왠지 불안할까? 아니다. 이 경우에는 두려움과 공포다. 반면 어느 날 밖에 나가려고 집을 나설 때,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왠지 불안을 느낄 때도 있다. 무언인가 빠진 느낌, 바꾸어 말하면 무엇인가가 없는 느낌, 그 무엇은 호랑이처럼 특별한 대상이 아닌,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그저 '그 무엇'일 뿐이다. 이는 마치 친숙한 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불안을 느끼는 것과 같다. 불안은 '있음'을 통해 느껴지는 기분이 아니라 '없음'을 통해 느껴지는 기분이다. 앞서 책상 위의 인형의 예를 생각해보자. '없음'은 존재가 드러나게 해주는 상황이다. 불안을 통해 인간 실존은 존재를 만난다.
p114
사람들이 흔히 추락에 추락을 거듭해서 바닥에 이르면, 오히려 담대해진다는 말을 하곤 한다. 절망과 희망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오늘이 얼마나 소중해질까? 매 순간 죽음에 직면한 듯한 태도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다. 앞서 이야기했던 '그들'의 목소리에 빠져, 내 실존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한 채, 권태 속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진지함으로 오늘을 사는 태도, 그것은 결코 비관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 실존이 미래를 향한 가능성의 존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인간 실존의 진지함은 매 순간 미래를 햐해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거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도박판에서 모두를 거는 올인과 마찬가지다. 그런 순간순간이 모여 오늘을 살고, 그 오늘이 모여 삶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실존의 삶은 고단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늘 '그들' 속에 숨어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포기하는 무책임한 처사일 것이다.
p115
오이디푸스가 이런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난 것은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 당당하게 맞서 나갔다. 자신이 선택했던 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그저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자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그 한계는 인간을 그저 좌절하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그 도전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 말로 가장 솔직하게 자신의 삶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순간일 것이다.
p122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박제화된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철학적 사색, 혹은 사유다. 오직 철학적 사색만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삼은 그의 단조로운 삶이 보여주듯 사유함이야말로 철학의 주제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는 물음을 통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전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문제의식이기도 한 물음은 무엇보다 은폐된 것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한다. 은폐된 것이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것, 즉 '탈은폐'가 바로 하이데거에게는 진리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이른바 '이성'을 통해 세계를 규격화된 틀 속에 집어넣어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일, 즉 은폐를 걷어내는 일' 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론은 존재를 존재자처럼 다룸으로써 은폐해온 종래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다.
p123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실제적인 삶 자체 안에서 작동하는 인식의 방식이다. 그때그때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 있는 현존재의 실존은 언제나 이미 세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언제나 자신의 '시대'의 철학일 뿐이다.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인류와 그 문화를 염려하고 그에 합당한 대답을 마련해주는 일은 하이데거가 보기에 철학의 임무가 아니다.
p124
후설에게는 실제 '사실'에 매여있는 세속적인 주관성이 아니라, 그런 상황적 조건을 넘어 '사실'이 인간 앞에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해명하는 선험적 주관성이 중요한 문제였다.
후설과 하이데거도 그렇다. 서로 다른 두 모습의 두 철학에는 공교롭게도 두 개의 교차점이 있다. 그 하나는 두 사람의 철학이 모두 '현상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추적해 들어가는 문제의식은 상이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근대 유럽 문명을 철저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후설은 '학문'이라는 문제를 통해 근대 유럽의 문화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직면한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고, 하이데거는 '존재' 문제를 통해 기술 문명이 가진 한계와 위기를 들추어내고자 했다. 결국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철학자는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비판했든지 간에, 그들이 살아간 시대의 문제와 대결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동안 몰아쳐가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아마 한 3년 정도였던 거 같습니다. 서른이 넘어서야 책 읽는 재미에 빠졌고,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읽어야 겠다는 조바심 같은 게 있었습니다.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세계문학전집에서 하나 둘 찾아 읽었습니다. 분명 재미있었고 많은 걸 배웠지만 의무감도 있었습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은 다 읽었던데, 누구는 <데미안>을 백번도 넘게 읽었다더라. 하면서 읽어갔습니다. 그렇게 1년에 백여권 씩을 읽었네요.
처음에는 양적으로 우선 많이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특히 인문학 관련 책을 읽다보면 많은 부분에서 '자기의 삶을 살아라' 로 귀결되는 듯 합니다. 그럴려면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하고, 자기만의 길을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스스로에게 질문도 제대로 던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고, 책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제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집을 지어야 하는데 재료만 많이 사다놓고 결국은 많은 재료를 바라보고, 다 지어진 집을 상상하며 홀로 기뻐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을 쓰고 싶었죠.
중국 송나라 때 문인이자 정치가인 구양수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다문다독다상량(多聞多讀多商量,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라)라고 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어도 제가 쓰는 글은 깊이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답답했습니다. 가끔 다른 이들의 글을 보면, 평소에 보이는 삶을 색다르게 표현한 걸 보기도 하고, 보이는 것의 이면에 담겨진 의미를 절묘하게 해석하는 잡아내는 것에 부러움과 시기를 감출 수 없습니다.
저는 다독이 답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문, 다상량은 그동안 많이 놓쳐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작정 많이 읽는 것에서 조금 벗어나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최근에 회사에서도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고, 가정에서도 아내와 사소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내 모습에 대해서 제대로 바라볼 필요를 느꼈고, 혼자 고민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방안에 둘러보았습니다. 무언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책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 때 망설임 없이 예전에 읽었던 故구본형 선생의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예전에 밑줄 그은 부분도 다시 한 번 곱씹어 읽어보았지요. 자기개발관련 책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분의 글은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에 몇 번을 읽어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 뻔한 말이고, 누구나 아는 말들을 이 책에서도 합니다.
누구나 아는 뻔한 그 말들 다시 한 번 몇 자 적어봅니다.
질문의 힘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익숙해 신기할 것이 없는 것을 낯설게 보는 훈련으로부터 온다. 나는 이것을 '시인의 시선'이라고 부른다. 수십 번 수백 번 보았지만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산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 제대로 보는 순간 우리는 느닷없이 재미있는 세상으로 인도된다. (p33)
"꿈을 꿀 때는 영원히 살 것처럼 불가능한 꿈을 꿔라. 그러나 그 꿈을 실천할 때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라." (p51)
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아 만족을 느끼는 방법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작파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 두번째 방법이다. 그럴 수도 없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 세 번째 방법이다. (p95)
삶은 뜨거운 것이다. 살아봐야 삶이 된다. 사랑은 쳐다만 보는 것이 아니다. 마주 보고 키스하고 안아주고 뒹굴며 섹스하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 헉헉거리며 사랑하라. (p107)
여행은 단순한 놀이나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이상이다. 직장인들이 여행으로 휴가를 쓰지 못하는 것은 그저 얼마쯤의 휴식의 상실이 아니다. 현실에 묶인 것이고, 두려움에 묶인 것이다. 빠듯한 돈에 대한 두려움, 컨베이어벨트에 따라잡아야 하는 종종걸음의 두려움, 바쁨의 고리에서 빗겨난 후 불협화음에 대한 두려움, 휴가의 반납을 열정의 증거로 보는 상사의 눈초리에 대한 두려움, 다시 다른 사람과의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두려움이 삶을 지배한다. 꿈 따위는 두려움에 가려 힘을 쓰지 못한다. 그들은 삶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직 중요한 인물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다. (p158)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스스로 모색하여라.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어라.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 해도 실망하지 말거라. 앞에 다른 길이 나오면 슬퍼하지 말고 새 길로 가라. 어느 길로 가든 훌륭함으로 가는 길은 있는 것이다. (p194)
뻔한 말들 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글입니다. 저 역시 그렇구요. 그런데 어쩔때는 뻔한 글귀하나가 자꾸만 마음을 건드립니다. 사소한 것들이 가슴을 울리기도 합니다. 이 책을 지금 세번째 읽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이 책을 읽으면 저는 위로를 받습니다. 역시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다가옵니다. 여전히 제가 종이책을 고집하고 읽는 책들을 모두 소장하려고 하는 이유가 이렇게 마음이 끌려 책을 선택하고, 예전에 밑줄 그은 것들을 다시 보아가며 지금의 감정과 비교해볼 수 있는 묘한 쾌감이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 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짧은 옷을 입다가 몇 주 사이에 사람들의 옷이 확연히 바뀐 걸 느낍니다. 이런 때는 감기몸살을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절기에 많이 아프죠. 어쩌면 지금 제가 심적으로 약간 환절기가 온 거 같습니다. 이번 환절기도 잘 버텨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몇 번의 심리적 환절기를 겪어왔는데, 이걸 잘 겪어내면 건강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랄 뿐입니다. 혼자 생각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도 해보고, 좋은 책도 읽어야 겠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제가 좋아하는 따뜻한 토마토수프 레시피를 찾아봐야 겠네요.
사전적인 의미로 사회과학은 인간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모든 경험과학을 말한다. 사회학, 정치학, 법학, 행정학, 심리학 등이 사회과학에 포함된다. 우리가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고, 그 틀 안에서 생겨난 문제점을 함께 논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에 사회과학의 인식과 도구가 필요하다. 예전부터 사회학에 대해서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의 한 구성원인 나는 사회로 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현상이 발생하면 단순히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 내부의 시스템의 결함에 의해서 발생했는지도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에 어떤 통로를 통해서 사회과학에 접근해야 할지를 몰랐다.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기에 처음 시작이 힘들었다. 출판잡지《기획회의》를 읽다가 우석훈의 《나와 너의 사회과학》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사회과학 입문자에게 적당하다는 언급이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개인이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리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곤 했다. '내가 먼저 잘해보자.', '내가 먼저 착해지자' 하지만 사회문제는 모든 사람이 착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또한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대신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지식을 전달하고 습득하고 스스로 똑똑해지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문제의 해결에 한 발 다가서는 방법일 것이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사회과학은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지금의 대학 혹은 학문의 체계는 하나의 분야에 특화되어 있는 전문가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고, 전체를 바라보고 지향하고 사회적 담론을 주도할 수 있는 지식인이 부족한 현실이다. 전문가는 많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거장'은 등장하기 쉽지 않은 구조가 된 것이다. 이런 시점일 수록 사회과학을 통해서 전방위적인 백과사전식 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소위 인문학이라고 하는 '문사철'이 자리잡고 있다. 백과사전식 지식을 갖춘 사람이란 다른 말로 기획자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자기가 다 알 필요는 없지만 누가 뭘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지는 않아도 정확하에게 아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제 부터 '사회과학' 에 대한 학습이 시작된다. 이 책이 사회과학의 바른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아직 다음에 어떤 방향으로 사회과학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지 여전히 깜깜하기는 하다. 우선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 부터 알아본다.
◆ 경제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 다른 말로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방법론적 전체주의'로 말할 수도 있다. 개체와 구조의 문제라고도 한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개인주의 측면, 전체주의 측면 에서 바라볼 수 있다. '방법론적 전체주의'는 집단은 개인의 속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자체의 독특한 속성이 있다고 보고, 사회를 단순한 개인의 집합이 아닌 사회 전체를 직접 연구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으로부터 사회학은 본격적으로 출발 된 것이다.
◆ 설명과 이해 (과학철학과 해석학) 과학철학에서 강조하는 점은 과학의 예측능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리 순수한 형태의 법칙을 설정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법을 '사전적 접근'이라고 부르고 '설명'의 방식이라고 한다. 반면에 해석학을 바탕으로 한 접근법은 지금까지의 현상을 맥락을 기초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후적 접근'이라고 부르고 '이해'의 방식이라고 한다. '설명'은 텍스트와 숫자가 중요하지만 '이해'는 저자 혹은 행위자의 의도와 함께 맥락(Context)가 중요해진다. 텍스트가 어떻게 쓰여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의도로 그렇게 쓰여졌으며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느냐가 중요해진다.
◆ 환원주의와 다원론 일원론은 아주 강력한 환원주의를 띠게 되는데 한 가지 요소로 환원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의미를 두지 않고 무시해버린다. 대표적인 예가 중세시대의 기독교의 신을 생각하면 된다. 지나친 환원주의는 경계의 대상이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또한 한 요소가 지나치게 강력해지면 근본주의로 빠지게 되기도 한다. 다원론의 성향이 강한 곳은 그리스, 인도 및 인류문명이 시작된 곳으로 대부분 여러 신을 믿었다. 이때 사회지도층은 신들의 이름과 의미를 다 알아야 했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야 했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다원론의 기반이었다.
경제적인간/사회적인간, 설명/이해, 일원론/다원론은 어떻게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고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해서 인식하는 하나의 틀로 작용되는 것들이다. 다른 사항들도 존재하지만 철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진 부분들은 아직은 내가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사회현상을 바로 보는 인식의 틀이 마련되었다면 이제는 사회에 대한 모델링(Modeling)을 하게 된다. 모델링을 통해서 만들어진 모델을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이 때 모델은 컴퍼넌트(Component) 바로 구성요소가 존재하게 된다.
모델에 넣는 구성요소가 한 종류이면 균질적인 것이고, 두 종류 이상이면 이질적 혹은 비균질적 모델이 되는 것이다. 모델을 만들 때, 균질한 모델로 할 것인지 비균질한 모델로 할 것인지는 분석가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결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분석도구 선정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구성요소는 늘어날 수록 설명력이 높아지고 사실성도 커지는 반면에 설득력과 전달력은 떨어지게 된다. 이 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위에서 만들어진 모델을 분석할 때 수학이 많이 쓰인다. 사회현상 분석에 수학적 사유에 의존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시뮬레이션 방식 등과 같은 것들은 사회현상 분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다. 이 밖에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비가역성, 공간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회적부분을 잠시 언급한다.
◆ 선형과 비선형 모델을 분석할 때 수학에 많이 의존하는 데 많은 부분이 선형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많은데 최적화기법(Optimization)을 통해서 선형으로 바꾸어 주고 선형적인 분석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기계론적 성장주의의 폐해에 대한 사회적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선형적인 접근법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점점 비선형적 현상들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생겼다
◆ 시간을 다루는 법 사회과학에서 시간을 바라볼 때 특별한 목적론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목적론의 대표적인 경우가 진화론인데 인간을 최종 목표로 설정하는 시각이다. 아리안 족이 궁극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나치즘과 사회 진화론의 결합이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는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사회를 바라볼 때 앞으로의 시간의 방향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결정하고 나서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다원주의를 통해서 목적론을 벗어버리고 나서야 진화론이 다시 과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 공간을 다루는 법 공간을 볼 때는 언제나 그 안에 깃들어 살아야 할 사람들의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기의 목적이 아닌 그 곳에서 삶을 꾸려갈 사람,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힐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 그런 눈을 갖고 보아야 한다. 사회과학에서는 인간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닌 말장난에 불과하다.
사회과학의 개론적인 개념에서 《나와 너의 사회과학》을 처음 접했을 때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사회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이론서의 개념이었다. 그리고 그 이론을 설명하는 데 철학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읽는 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그 기반을 마련해주는 책으로는 나에게 훌륭했다.
마지막으로 좋은 사회과학자가 되려면 '맥락'을 잘 파악하고 '공감'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흐름을 인식하고 큰 파도에 몸을 얹는 것이 아닌 사회의 질적 성장과 변화에 손을 뻗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혼자 꾸는 꿈은 허무지만, 같이 꾸는 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겁니다." 라는 작가의 마지막 말을 남긴다.
p213 공감을 얻기 위해 제가 개인적으로 했던 훈련이 '바다의 눈으로 보기'입니다. 멸정 위기에 처한 고래를 연구하면서 고래라면 어떤 심정일까, 만약 내가 바다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그 과제를 통해 해양 사막화 같은 개념들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다. 나쁘다. 이런 잣대만 들이댈 게 아니라 사람이 가진 아주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인 공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는 게 좋습니다.
사람들은 산을 좋아합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점점 산에 가고 싶어하고 가려고 노력합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무릎관절이 많이 좋지 않으셔서 한약, 양약도 먹어보고 하였는데 쉽게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약은 산에 있었습니다. 주말마다 산에 오르시면서 무릎 근처의 근육을 강화시켜주었는지 모르겠으나 등산을 한 이후부터는 신기하게 그동안 아파왔던 무릎이 괜찮아지셨습니다.
사람들의 몸에는 산, 바다 등과 같은 자연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 속의 콘크리트와 각종 석유 화학 제품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쩌면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건강이 좋지 않을 수록 그래서 자연스레 산과 바다로 자연 속으로 우리의 몸이 자연스럽게 끌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귀소본능처럼 자연으로 돌아가 치유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생명, 환경, 공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때로는 알고 있지 못하던 사실을 알게 되고 때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만행에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반대편에서 자연을 살리려는 노력에 희망을 걸어보게도 합니다. 그렇게 자연 속에는 궁금증을 담은 이야기, 아픔에 대한 이야기, 희망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이제 하나씩 그 이야기의 장이 펼쳐집니다.
이 책에서는 크게 여섯가지 이야기 속에 67가지 개별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놀라운 발견', '진화의 수수께끼', '동물도 사람처럼 느낀다.', '사람이 바꾸는 자연', '자연과 더불어 사는 미래', '이야기를 품은 우리나라의 숲'이 여섯가지 큰 이야기입니다.
모기는 왜 배터지게 피를 빨까?
술 찾는 초파리, 꽁초줍는 참새
마다가스카르 동물 표류기
늑대는 왜 개가 되었나?
개는 하품한다. 고로 공감한다.
소주제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의 제목 몇가지입니다. 제목에 대한 궁금증 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을 선택할 가치는 있어보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자연의 일상적인 일인데 너무나 신기합니다.
과연 모기는 왜 배터지게 피를 빨까요?
프랑스 곤충학자들은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얼룩날개모기가 흡혈 도중 꽁무니로 신선한 혈액이 들어있는 액체를 배출하는 현상을 적회선 촬용을 이용해 분석했다. 그랬더니 온혈동물의 피를 빨면서 급상승하던 체온은 꽁무니에 붉은 액체방울을 매달면서 2도가량 떨어졌다. 대조적으로 설탕물을 섭취하도록 한 모기한테서는 이런 체온 감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마신 피를 배설할 만큼 체온조절이 중요한 이유는 뭘까. 변온동물인 모기가 항온동물의 '뜨거운'피를 마시는 것은 치명적 고온 스트레스를 부를 가능성이 있다. 모기 숙주의 체온은 최고 40도에 이른다. 이런 고온상태에서는 곤충의 생리기능이 일부 마비될 수 있다. 특히 흡혈곤충은 열로 먹이를 찾기 때문에, 높은 체온을 유지하면 먹이로 착각한 다른 흡혈곤충의 공격을 부를 위험도 있다.
그렇다면 초파리는 왜 술을 찾고 참새는 꽁초를 주을 까요?
참새와 되새류는 진드기의 감염을 줄이기 위해 담배꽁초를 둥지 재료로 쓴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그러면 꽁초 속에 니코틴이 진드기를 쫓아준다. 놀랍게도 이런 행동은 곤충 가운데도 널리 퍼져있다. 초파리는 기생 말벌을 아주 무서워한다. 자기 새끼가 말벌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에머리 대학 과학자들은 초파리가 주변에 기생 말벌이 얼씬거리는 경우 고농도의 알코올이 있는 곳에 알을 낳는데, 이것이 자식의 안녕을 위한 행동임을 밝혔다. 기생 말벌은 알코올을 싫어하지만 초파리 애벌레는 발효가 진행되는 썩은 과일에서 자라기 때문에 알코올에 잘 견딘다. 따라서 기생 말벌의 습격에 노출된 초파리 알이라도 알코올 농도가 높은 곳이라면 무사히 자라날 수 있다.
이렇게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행동 하나하나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스토리가 숨어져 있습니다. 이런 스토리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바꾸는 자연'이라는 소주제 속에는 샥스핀의 저주, 고래사냥 잔혹사 같은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지막 장은 '이야기를 품은 우리나라의 숲'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부분이었다. 내가 특별히 산을 좋아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모르는 유전자가 내 몸속에서 꿈틀거린 듯 하다. 하나하나 모두 의미있고 나중에 한 번쯤 가보고 싶다. 소주제를 모두 소개할까 한다.
양떼가 만든 지리산 바래봉 산철쭉 군락
대나무의 역설, 부산 기장 아홉산숲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 철원 소이산
보부상 노래 깃듯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황무지를 숲으로 가꾸다. 대관령 특수조림지
540여 년 지켜온 숲의 바다 광릉숲
물길 바람길 다스리는 나무 병품 마을숲
천년숲 제주 비자림, 인간의 보살핌은 약일까 독일까
죽은 왕들이 노니는 종묘숲
300년간 모래바람 막아준 해안솔밭, 관매도 솔숲
이 숲들은 자연의 있는 그대로가 보존되어 있는 곳도 있고, 사람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잘 관리되어 자연환경을 극복한 경우도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사람들의 관심도 건강한 숲을 위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항상 그 관심의 정도가 문제이지요.
숲은 나무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여기서도 저는 나무라고 했습니다. 나무는 수많은 나무 종류들에 대해서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그저 '사람'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무엇인가 서운하고 아쉬울거 같습니다. 저에게는 나름의 이름이 있으니까요. 김춘수의 시 '꽃'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과연 산에 가서 나무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을까? 라는 자문을 해보았습니다. 답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어쩌면 하나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습니다. 은행나무도 그저 은행잎이 달렸을 때 알게 됩니다. 벚꽃나무도 그저 봄에 휘날리는 벚꽃을 봐야지 알 수 있습니다. 동백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 알고있는 나무 종류도 몇가지가 되지 않더군요. 이제는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사람, 인간이지만 그렇게 불리어지기 보다는 제 이름이 좋은 듯이 하나의 몸짓에 지나기 보다는 꽃이되고 싶듯이 그렇게 저도 나무들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가려고 합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길을 걸으면서 나무들의 이름을 알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역사, 전쟁, 인권 관련된 책을 자주 읽었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기분전환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나무에 대해서 조금 알기 위해 책을 한 권 찾았습니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입니다. 기대되네요. 오늘은 주말인데도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습니다. 가까운 광교산에 잠깐 올라야겠습니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김구의 <백범일지> 중에서
문화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 전반에 흐르는 말없는 힘이다.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누군가 만들고 누군가 지켜내고 누군가 다시 배우며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오늘은 우리의 조상들이 만들고 지켜왔던 문화유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한다.우선,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방송이나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낯익은 문화유산을 몇 점 소개한다.
▲<단오풍정>,《혜원 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28.2cm x 35.6cm, 국보 135호
▲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70호, 23.3 x 16.6cm(반곽)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68호
현재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들이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이 유산들은 일제강점기의 다른 수많은 문화유산처럼 해외로 밀반출되고 전쟁 속에서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위의 문화재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을 지켜온 간송 전형필 선생과 그의 문화재 수집이야기를 해 본다.
간송 전형필(1906~1962)과 간송미술관
1906년에 태어난 전형필은 24살의 어린 나이에 논 800만평(4만 마지기)를 상속받았다.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6,000억원 정도이고 그 땅에서 수확하던 곡식이 1년에 400억원이 넘는 막대한 재산이었다. 그는 그 재산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추사 김정희의 제자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을 만났다. 그는 전형필에게 '산골짜기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라는 뜻의 '간송'이라는 아호를 붙여준다. 간송은 해외로 밀반출되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그의 전 재산과 삶을 바친다. 후에는 그동한 수집한 유산들을 지키기위해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짓는다. 그런 그는 1962년 57세의 이른 나이에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채 아쉬운 삶을 정리한다.'보화각'은 후에 '간송미술관'이 되고 간송의 유지에 따라 매년 봄, 가을 두 번 전시관을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현재 12점의 국보와 10점으 보물 그리고 서울시 유형문화재 4점 등 고서화를 많이 소장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간송의 문화유산 수집이야기
간송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지켜왔기에 그가 수집한 문화재들에는 하나같이 사연들이 가득하다. 그 중 인상적인 두 장면을 소개한다.
첫번째 장면은 간송이 1936년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를 구매하는 모습이다.간송은 개스비를 그가 짓는 보화각으로 데려와서 설득한다.
"개스비선생, 나는 귀하가 그동안 힘들여 수집한 고려청자를 이곳에 전시하면서, 조선에도 이런 찬란한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동포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모시고 온 겁니다.
"전 선생, 이곳에 와서 보니 전 선생이 단순한 수집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들이 만든 청자에 대한 자부심으로 다시 찾아오려 한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그것도 아주 가슴 깊이...... 저는 조국의 대영박물관에 돈을 받고 팔려고 했는데, 전 선생은 자신의 돈으로 구입해서 직접 지은 박물관에 진열하겠다니 머리가 숙여집니다. 전 선생, 제가 40만원에 양보하겠습니다.
40만원이라 하면 당시 서울의 기와집 400채 값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1200억원으로 도자기 한 점당 약 60억에 구입한 것이었다. 실로 대단한 결정이었으며, 하마터면 대영박물관의 소장품이 될 수 있었던 아찔한 장면이었다.
두번째 장면은 한글의 창제 목적과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 수집 때의 모습이다.간송은 항상 <훈민정음>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다 마르크스주의 국문학자인 김태준을 매개로 해서 <훈민정음>을 거래하게 되었다. 당시 전형필은 김태준에게 묻는다
"소유주가 얼마를 말씀하셨소""천원을 말했습니다.""<훈민정음> 값으로는 만 원을 쳤습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간송은 이에 더불어 소개비 명목으로 김태준에게 별도로 천원을 준다. 총 만천원이다. 지금 금액으로는 약 35억원정도이다. 간송은 물건을 무조건 싸게 사려는 장사꾼이 아니었다.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과 거래를 할 때도 충분한 가격을 주고 구매를 했다.
<훈민정음>은 구매 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제치하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면 안되었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었다. 외부적으로 자신이 알려지지 않기 위해 거래를 대리인을 통해 하면서 주의를 기울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간송 전형필>을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그의 막대한 재산에 놀랐고, 모든 재산을 오직 해외반출을 막기 위해서 문화재수집에 몰두한 그의 헌신에 감탄했고, 마지막으로 왜 이런 분을 지금까지 몰랐을까? 하는 나의 무지와 세상의 무관심에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지켜낸 유산에 대해서 한 번 더 보고, 읽고, 찾아보고, 느껴보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도리이자 김구 선생이 말하는 문화보국으로 가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 이 책 재미있을 것 같네. 관심있는 역사 관련 책을 집어서 조금 읽다보면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이름을 살펴본다. 이런 또 이덕일 작가가 쓴 글이다. 이제는 그의 책 목록을 살펴보고 하나씩 하나씩 모두 읽어내려 갈 예정이다. 그러면 아마 조선의 중, 후기에 대한 나름의 맥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최선의 역사 공부는 이덕일의 책 속에 빠져드는 것이라 혼자 생각 되었다. 하지만 편협하지 않은 시각으로 항상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려 한다. 작가 이덕일이 새롭게 접근했던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등이 궁금했다. 과연 왜 그들이 그런 것에 집착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300~400년 전의 조선의 정치 현실이 지금의 정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하게 진행되는 것 같은 아쉬움이 무엇보다도 크게 남았다.
잠깐 역사적인 시점과 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 인조반정 -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이모제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폐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 조금 다른 관점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힘들어지고,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상국으로 받들던 명의 국운이 다해가고 새롭게 청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해군으로서는 조선의 운명을 쇠퇴해가는 명나라 만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명과 청 사이에서의 중립외교를 하면서 조선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대응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정치적, 논리적 뿌리인 명나라 만을 붙잡고 있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제1차 예송논쟁 -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뜻에 따라 기년(만1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남인 허목, 윤휴 등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어난 사건. 이들은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나 다름 없으므로 3년(만2년)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비해,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은 인조의 둘째 왕자이므로 장자의 예로 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받아 들여졌다.
◆ 제2차 예송논쟁 - 현종 15년(1674) 효종의 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 복상을 몇 년으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 서인은 대공(8개원) 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라 판단, 이 후 송시열 계의 서인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 예송논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 예송논쟁은 단순히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왕과 사대부들간의 힘싸움이다. 서인들의 주장은 왕도 사대부와 마찬가지의 기중이 적용되어야 하는 입장이고 남인들은 왕은 사대부와는 다른 절대권자로서 그 기준을 뛰어넘는다. 라고 맞서고 있다. 당시, 서인은 그 정치적 세력이 이미 왕권을 능가할 정도라고 여겨질 정도로 그 힘이 대단했다. 그리고 왕권과 남인의 대응 방식이 바로 이 예송논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 예송 논쟁의 두번째 의미는 청에 인질로 살다가 돌아온 장자 소현세자(인조가 사사했다고 의심이되어짐..)가 죽자 그 다음 왕위 계승을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종을 왕권으로 세운 것에 대한 정통성 문제가 달려있다. 바로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