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유정의 작품이다. 정유정의 이름 석자는 이제 이야기에 대한 신뢰를 나타낸다. 책이든 어떤 것이든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조건들을 따져 본다. 그럴 때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름 자체만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는 소설가 정유정이 그렇다.

 

베스트셀러, 남들이 많이 입는 옷, 쉽게 접하는 흔한 것들보다 우리는 나만의 독특함을 원한다. 넘쳐나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나의 취향을 찾아서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내고, 남들이 잘 입지 않는 브랜드를 탐하고, 항상 새로운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본질과 가치를 그 속에서 찾으려 한다. 나 역시 나만의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 남들이 많이 따르기에 나는 좀 거리끼는게 생기더라도 나 역시 좋아서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정유정의 소설이 그렇다.

 

<7년의 밤>, <28>, 그리고 접한 책이 <내 심장을 쏴라> 이다.

처음에 접한 책이 <7년의 밤> 이었다. 댐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어두운 분위기의 사건들과 치밀하고 치열하게 얽히는 사건의 얼개 속에서 헤어나오는 게 쉽지 않았고, 그 여운은 한 동안 지속되었었다.

아직까지도 <7년의 밤>은 나에게는 국내소설 중 가장 큰 보물로 뽑는다.

 

이번에는 그 전의 작품인 <내 심장을 쏴라> 이다.

예전에 정이현 작가가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그 속에서 사건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이야기거리를 찾는다고 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살인사건이 났다고 하면, 그 살인사건의 당사자들 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영향을 받는 가족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궁금증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의문의 사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건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얼개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내 심장을 쏴라> 도 신문의 사회면의 기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정신질환자 2명, 차량을 탈취해 탈출. 1명 검거 - 강원일보, 2004년 9월 18일자 사회면]

[시신 없는 정황상 자살, 자살 방조죄 성립될까? - 강원매일, 2004년 10월 18일자 사회면]

이 두 기사가 바로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분명 우리는 실제로 어떤 이유 때문에 그랬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상상과 이야기라는 게 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속으로 들어가본다.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갇힌 두 남자의 탈출기를 그린 것이다. 수명과 승민 동갑내기 두 남자는 끊임없이 탈출에 시도하고 실패하고 또 시도한다. 두 인물의 배경인물로는 의사를 비롯해 동료환자 특히 재밌는 케릭터인 만식, 그리고 한이와 지은이, 그리고 병원 측인 최기훈, 점박이등이 등장하면서 정신병원의 모습을 묘사한다. 작가는 실제 정신병원을 방문하면서 그 배경을 작품에 담았다고 한다. 소설이 허구의 이야기라 하지만 읽을 수록 빠져드는 이유 중 하나가 실제 있음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직업이나 장소에 대해 표현하기 위해 인터뷰 및 사전 조사등을 통해서 이야기에 철저히 녹아낸다는 점이다.

 

수명은 어머니의 죽음이후에 귓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 온다. 수명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수명은 귓속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결국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승민은 한 재벌의 혼외 자식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남기고 가고 이것을 계기로 해서 다른 배 다른 형제들과 갈등을 겪게 되고 강제로 정신병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점점 눈이 안보이기 시작한다. 수명은 그저 갇혔다는 생각 때문에 나가고 싶어하고 승민은 날고 싶다는 의지로 정신병원을 탈출하려고 한다.

 

p286

"날고 있는 동안 나는 온전히 나야. 어쩌다 태어난 누구누구의 혼외자도 아니고, 불의 충동에 시달리는 미치광이도 아닌,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

"난 잘 모르겠다. 너로 존재하는 순간이 남은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건지."

"넌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는데? 삶은? 죽음은?"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수명과 승민이 탈출한 후, 승민이 떠나기전에 서로 대화를 나눈다

수명은 항상 얽매여서 살아왔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억 속에서, 그리고 그로 인해 귓속의 누군가에게 얽매여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만의 무엇인가는 없었다.

 

수명은 특별히 병원을 나가서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것이 없다. 그저 병원에 들어오면 병원밖으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p291

꿈을 꿔요. 창문은 통로죠. 희망은 아편이고요."

"해석하면 이런 말이었다.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퇴원을 꿈꾸고, 퇴원하는 날부터 퇴원을 굼꿀 수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은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고 많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그냥 아팠다. 퇴원을 꿈꾸고 나갔으나 막상 나가고 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꿈꿀 수 있다는 것 조차 없다는 게 너무 아팠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발생하거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그 순간만을 생각한다. 이것만 해결되면, 지금 순간만 지나가면 모든 게 나아질 거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오히려 더 허무하고 더 안타깝고 아쉬울 수도 있는 법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 버리고 주저앉는다.

 

방법은 없는 듯 하다. 그런 아쉬움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절망 속에서 다시금 뛰어 들고 다시금 판도라상자의 마지막 남은 희망에 기대 볼 뿐이다.

 

p327

"잘 가라고 안 해?"

승민이 물었다. 나는 조명탄을 꺼내 쥐고 절벽 끝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할게. 불빛을 보고 곧장 달려와."

승민은 손을 내밀었다. 머뭇머뭇 맞잡았다. 손을 떼자 손바닥에 승민의 시계가 놓여 있었다.

"이제 빼앗기지 마."

승민의 눈이 고글 속에서 웃고 있었다.

"네 시간은 네 거야.

 

승민은 그렇게 떠난다. "네 시간은 네 거야."라는 마지막을 말을 남기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비행을 한다. 이제는 수명도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까? 아니 그동안 얽매였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에 그 동안 가위의 공포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이발도 몇 번이나 했다라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아프더라도 마주하기를 바란다.

항상 생각해오던 말이 있다. 이제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르쳐주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일이 닥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일이 닥친 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법이다.

삶에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온전히 나와 마주할 수 있도록 내면의 탄탄한 근육을 만들수 밖에 없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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