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북섹션은 신간을 소개받고 책을 구매하는데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매주 금요일이나 토요일이 되면 일간지들에서는 신간을 소개하고 주목되는 책들에 대한 서평이 올려온다. 각 일간지들의 책 소개는 베스트셀러만을 홍보한다는 느낌은 그다지 많이 받지는 않았다. 북섹션 담당자의 안목과 주제별로 소개해주는 구성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신문의 북섹션보다는 독서관련 팟캐스트가 책을 선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다.

지금 매주 청취하는 독서관련 팟캐스트만 해도 5개 정도는 된다.

MBC라디오의 <라디오 북클럽 방현주입니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의 <김동진의 빨간책방>, 출판사 창비의 <라디오 책다방>, 출판사 문학동네의 <문학이야기>, 그리고 최근에 덧붙여진 것이 서점인 교보문고의 <낭만서점> 이렇게 다섯종류를 즐겨 듣는다.


<낭만서점>은 정이현 작가와 허희 문학평론가가 진행을 한다. 정이현 작가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책은 아직까지 한 번도 읽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그녀의 책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어떤 책들은 제목만으로 소재만으로 내 관심을 끌어서 쉽게 선택을 했는데 정이현 작가의 책은 지금껏 나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 인연을 팟캐스트가 이어주었다. 목소리를 듣는데 느낌이 너무 좋았고, 방송을 들으면서 정이현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껏 그녀가 출간한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한 권을 선택했다. 바로 <안녕, 내 모든 것>이다.


<안녕, 내 모든 것>은 각자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 친구 세미, 준모, 지혜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미는 복잡한 가정사에 의해서 조부모와 함께 살고, 준모는 틱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틱의 증세는 욕으로 튀어나왔다.

지혜는 부모가 모두 대학교수이고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머리 속에 많은 기억이 그녀를 힘들게 한다.

등장인물들은 어린 나이부터 아픔을 가지고 있고 가슴에 하나씩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주어진 상처로 그들은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그저 살아간다.


세상을 살면서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예를 들면 신은 존재하는가? 와 같은 질문입니다. 과연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도 해본다. 자신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사고로 인해서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고, 선하고 착한 사람이 너무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태어난 것 밖에 없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장애와 같이 아픔을 가지고 태어나는 친구들도 있다.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안녕, 내 모든 것>의 인물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아픔들을 가진 이들이 제 주변에도 있기에 소설이지만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살면서 힘이 들고 버티고 참아야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민의 여지가 남아버리는지 옆에서 간접적으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세 친구는 언제나 함께할 듯 하지만, 준모는 치료를 위해 덴마크로 가기로 하고 지혜와 세미도 서로 자연스럽게 만남이 쉽지 않게 된다. 이런 세 친구는 서로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새로 이사간 세미의 집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낸다. 그 다음 날 아침, 그곳에서 세미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들은 그들만의 비밀을 간직하게 된다.


P228

할머니에게 비밀을 선물한 댓가로, 우리 셋은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우리만의 완벽하게 은폐된 비밀. 아무하고도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는 친구들과 꼭 나누고 싶었는지도,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지켜졌고, 나와 지혜와 준모는 다시 모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준모도 지혜도 어딘가에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우스운 영화를 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면 원래 다 그런 거라고들 말했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른을 며칠 앞둔 어느날,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


여기서 안녕, 내 모든 것을 중얼거린 이는 세미다. 하지만 아마도 준모와 지혜도 함께 말했을 것이다.  그들의 '내 모든 것'은 아마도 과거 기억일 것이다. 기쁨과 행복보다는 아픔과 상실이 더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반가움에 안녕이 아닌, 떠나 보냄의 안녕일 것이다. 떠나 보냄에 대한 후련함도 있을테지만 아픈 기억이라도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는 안녕인 듯 하다. 나는 그 안녕이 너무 아쉽다. 


소설은 처음과 끝은 과거가 아닌 지금의 지혜의 관점에서 시작되고, 이야기의 전개는 세미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세미가 지혜를 찾아온다. 할머니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하지만 지혜는 결국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지혜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기억하지 못함이 다행이다. 그들이 그렇게 안녕하고 싶었던 것이기에......


이 소설은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정리를 하다보니, 가슴에 먹먹함이 많이 남는다. 그들의 아픔을 해소하지 못하고 끝내버리는 거 같아서 불편한 마음마저 든다. 서울 강남 배경으로 해서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을 것 같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해서, 소설 속 이야기지만 어쩌면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인 듯 해서 쉽게 읽힌거와는 다르게 여운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P88

"학생은 꽃이에요, 절벽에 핀 풀꽃. 잊고 잊히며 살아야 해요.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오래 안고 가지 말아요. 무슨 일이더라도."

잔디밭에서 아무 풀도 짓밟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여자는 조심조심 말하고 있었다.

"사무쳐도, 아파도, 다 흘려보내요. 내 것이 아닌 듯, 그러면 꺾어지도 밟히지도 않을 거예요."


P100

나는 갤러리아백화점의 쇼핑백 손잡이를 한쪽 손목에 걸고, 다른 쪽으로 고모의 팔짱을 꼈다. 아무리 애써도 영원히 빼지 못할 것처럼 꼭 꼈다.


P143

"준모야, 내가 잘 생각해봤거든. 그런데 한 사람이 죽어간다는 건 굉장히 특별한 거잖아. 그렇지?"

"글쎄,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건, 다시는 못 보는 거잖아. 평생 사랑했던 사람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을."

"........"

"나라면, 마지막 순간에는, 보고 싶은 사람들만 볼 거야. 같이 있고 싶은 사람들만."

입안에 시큼한 침이 고였다.

"내가 나타나면 할아버지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실 거야. 한 사람의 마지막 기분을 그렇게 뒤죽박죽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세미야."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면 언제고 나는 부풀어질 공간이 남아 있는 노란 풍선처럼 가슴이 두근 거린다.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응?"

"다음에 너 아주 급할 때, 아무도 없으면 나 한 번 불러라."

나는 가까스로 털어놓았다. 세미가 픽 웃었다.

"네버. 넌 삐삐가 없잖아."

"살 거야."

"언제?"

"오늘."

그녀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바보야, 너 멀리 갈 거 잖아."

"안 갈수도 있어."

그녀가 이번 엔 히히히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튼 바보. 얼른 가. 잘 가."

"넌?"

"난 로비에 좀 앉아 있다가 갈게."


P149

실온에 오래 방치해둔 아이스크림처럼 심장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P174

불행은 틈을 주지 않고 들이닥친다. 해석하거나 납득하려 들 필요는 없다. 해석되지도 납득되지도 않는 것, 그것이 불행이 가진 본성이니까.


P238

튀어나오는 대로 다 붙잡고 싶은데, 손의 속도가 기억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손의 속도는, 기억의 속도보다도 말의 속도보다도 느렸다. 그 틈새에 깃든 고요함에 대해 나는 아주 천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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