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적으로 새로운 분야에 대해 학습해야 할 경우가 많이 있으며, 최근 뒤늦게 새로운 공부를 시작 중이어서 어떻게 하면 공부를 효과적이며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는 중이다. 내가 학습한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자산화되면서 가능한 밀도 있게 성과를 나타낼 수 없을까? 이런 고민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답을 제시해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내게 딱 필요한 시점의 적합한 책이었다.
우리가 회사에서 보통 어떤 일의 개선을 할 때 많이 쓰는 방법 중에 하나는 선진사에 대한 Benchmarking 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공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부법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다. 이제는 그들이 알려주는 수많은 방법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나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방법이 무엇이지 확인해보고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리된 방법으로 나의 일상을 관리해보려고 한다.
1. Purpose - '왜 공부를 하는지 목적을 잊지 말라.' ▷ 단순히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바로 이 공부를 통해 내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기반을 다지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지금 내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2. Initiative - '일단 사소한 것이라도 먼저 즉시 시작하라.'
▷ '시작이 반이다', 'Just Do It!' 이런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만큼 처음 발을 내딛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운동을 위한 목표를 '팔굽혀펴기 1개'로 하라고 조언한다. 부담스럽지 않아서 누구나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팔굽혀펴기 1개로 끝나지 않는다. 뉴턴의 제1법칙 대로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고자 한다' 처럼 금방 목표를 향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시작하려는 일이 너무 부담스러운가? 그러면 그 일을 아주 잘게 작아서 그 중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그냥 하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모든 일은 끝나는 법이다.
3. Challenge - '바람직한 어려움을 경험하라.'
▷ 어렸을 때 즐거웠던 것보다 고생했던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떤 원리인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 뇌는 어렵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에 가산점을 주는 듯 하다. 공부를 할 때도 노트북에 적는 것보다 직접 필기를 해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하는 것이 더 기억에 오래 남게 된다. 예전에 노트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나만의 블로그에 일기를 가끔씩 남긴다. 하지만 그 때 볼펜으로 눌러 쓴 그 글들이 여전히 내 뇌리 속에 남아있다.
4. Passion - '즐겁고, 치열하고, 체계적으로 공부하라.'
▷ 내가 관심있어 하고 해야 하는 주제에 대해서 열심히 읽고, 닥치는 대로 읽고, 끊임없이 읽어 나가자.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어떠한 질문을 할 수 있을지 질문을 만들어 나간다. 살다 보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하느냐가 나를 새로운 수준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짜임새 있게 구조화하여 조금씩 내 삶의 격자 무늬를 맞추어 나가도록 해야 겠다.
5. Curiosity - '생활 속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라.'
▷ 결국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많은 아이디어는 서로 다른 분야의 요소들이 서로 섞이면서 나타난다. 어떻게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연결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고민하던 문제가 풀리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통찰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져보자. 우리 주변의 건축물, 동식물과 먹는 음식과 의복, 교통 수단 및 각종 상품 속에서도 이것 저것 새로운 원리와 방법론들을 찾아보자.
6. Organization - '나만의 자산으로 분류하고 정리하라.'
▷ 최근에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수집하고 정리하고 학습한 내용을 자산화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재활용해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현재는 구글 클라우드와 에버노트 그리고 블로그를 활용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구조화 부분과 컨텐츠 정리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지금은 하나의 분류 속에 들어 있는 지식들을 1:N의 구조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 찾아보자.
7. Resilience - '슬럼프를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라.'
▷ 공부는 결국 삶의 일부분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준비하고 꾸준히 진행해야 한다. 삶에서 공부해야 하는 여러 가지 주제들을 생각해보고 그것들을 천천히 학습해나가도록 하자. 그리고 슬럼프에 빠졌을 때 회복하기 위한 산책, 운동, 명상, 일기 등과 적절히 연계해서 조금씩 극복해 나가자. 삶은 치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혼자만에 도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보자.
공부의 대가들을 엿보고, 나에게 어울릴 것 같은 PICPCOR (Pupose - Initiative - Challenge - Passion - Curiosity - Organization - Resilience) 방법론도 조금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도록 하자. 공부를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다듬고, 다시 나에게 적용해보면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가치를 만들어 나가 보려 한다.
30대를 온전히 보냈던,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몸 담았던 첫 번째 직장을 떠나게 되었다. 수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40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것은 항상 설레고, 때로는 걱정과 두려움이 따른다. 지금은 그 두가지 마음으로 하루하루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생각하는 시기이다.
예전부터 시간적 여유와 금전적 여유가 있다면,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소위 스펙을 올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논문에 쓸 주제를 찾아내는 방식과 그것을 통해 실험하고 논리적 사고를 풀어내는 방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한 Ph. D. 는 과연 어떠한 사고 훈련과 접근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최고의 학위라고 하는가, 과연 어떠한 임계점을 넘어서고, 어떠한 생각의 확장과 변화를 갖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과 가지 못한 길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에게 시간적 여유와 금전적 여유가 동시에 생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 기약은 잠시 시기를 늦춰두기로 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예전부터 독서를 통해서 무언가를 알아가고 연관되는 분야로 확장하고 심화해서 읽는 과정들을 좋아라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러한 내 성향을 이용해 나만의 석사과정, 내가 생각하는 영역에 대한 나만의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심화시켜갈 예정이다. 그런 시기에 야마구치 슈의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저자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책은 독학에 대해서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①전략→②인풋→③추상화 및 구조화→④축적) 이 네 가지 단계로 어떻게 독학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지 제시하고 있다. 각 단계별로 저자가 생각하는 주요한 부분 혹은 독자로서 읽으면서 마음을 움직였던 부분을 정리해 보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두가지 였다. 하나는 독학을 할 때 장르(역사, 경영 등)를 선택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닌 테마 곧 질문(예: 조직의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중심으로 한다는 부분이었다. 나머지는 추상화와 구조화였다.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그것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개별적인 독서나 정보등을 추상화하여 나름의 모델을 만들어서 타 분야에 적용할 수 있도록 생각해봐야 한다는 부분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역시 반복되는 Why가 필요하다.
위의 두 가지 부분을 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노력이라 함은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언젠가 부터 어떤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독학에 대해서도 그런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
1. 전략: 어떤 테마에 대해 지적 전투력을 높일 것인지를 결정한다.
º 테마가 주가 되고, 장르가 이를 따르는 형태
º 테마란 곧 질문이다. 그 질문을 찾는 것이 전략
º 테마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융합해서 접근
º 장르의 선택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심에서 확장
2. 인풋: 책과 기타 정보 소스로부터 정보를 효과적으로 획득한다.
º 목적하지 않은 단기적 생각의 인풋도 중요
º 불편한 부분도 받아들여서 인풋
º 각 분야의 주요 고전을 독서
º 책들 사이의 형성된 네트워크를 파악
º 독학의 자원 중 '사람'은 특별히 유효한 독학 자원
º 떠오르는 질문을 순간 잡아서 저장하고 인풋 요소를 찾음
3. 추상화 및 구조화: 지식을 추상화하고, 다른 것들과 조합해서 자신의 관점을 갖도록 한다.
º 추상화: 개별적으로 공부한 사상에서 인간/조직/사회 등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추출 - 공리화(근본원리)를 추출
º 구조화: 가설(공리)을 다른 분야와 연결 지음으로써 공리로서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
4. 축적: 획득한 지식과 통찰력을 세트로 저장하고,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도록 정리한다.
º 아이디어는 이미 축적한 것들의 조합이다. 그 조합의 수의 최대값은 인풋 값에 의존
º 끊임없이 상식에 대해서 왜?라고 질문하며 통찰력을 발견
º 아이디어의 질은 결국 아이디어의 양에 의해 결정
º 독서, 메모 등에 대해서 비즈니스/실생활에 활용 시사점을 정리
º 태그 정리, 책의 플레이리스트화
º 다양한 교양을 축적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은 후의 변화되는 점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나만의 대학원 과정을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배우려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장르가 아닌 테마를 통해서 질문을 만들어보고, 관련된 강의와 독서 목록을 찾아보고 나름의 계획을 세워봐야 하겠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자산화시켜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도록 체화하고 시스템화해야 하겠다. 생각하고 생각하자. 고민하고 고민하자. 이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김민식 작가의 <매일 아침 써봤니?>라는 책을 골랐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는 한참 책읽기와 서평 쓰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단순히 제가 읽은 책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것을 계기로 좋은 일들이 저에게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제 삶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큰 축으로 자리 잡았죠. 한 동안은 책읽기와 글쓰기를 소홀히 해왔습니다. 다시 몇 년 전으로 돌아가보려고 합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새로운 모습으로 블로그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민식 작가'는 새로운 목표나 관심이 생기게 되면 블로그의 카테고리를 추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공부를 합니다. 정보와 자료는 이제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런 자료들을 모아서 자신만의 생각으로 녹여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그렇게 새로운 카테고리에 글들이 채워집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질문을 쏟아내게 됩니다. 그렇게 새롭게 배워가고 준전문가가 됩니다. 선순환적으로 그 분야에 대해서 원고 요청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원고 요청이 들어오는게 제가 꿈꾸는 일입니다.)
팀 페리스의 <타이탄의 도구들>에서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넷스케이프의 창업자 마크 앤드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한 CEO들 가운데 상위 25퍼센트에 속하는 기술을 3가지 이상 갖추지 못한 사람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천재가 되기란 어렵다. 하지만 천재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가장 큰 매력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관련된 책을 읽고, 영상들을 보면서 지식을 쌓아가고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대학이나 교육기관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이제는 가능한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서 최고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흔히들 말하는 '덕후', '매니아' 는 아니더라도 '준 덕후', '준 매니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때 부터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생겨납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파고들면서 자연스럽게 이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경험과 다른 지식들과 융합이 이루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납니다. 제가 좋아하는 단어인 '통찰'의 재료들이 자연스럽게 화학반응을 합니다. 그렇게 지적으로 풍부해지고, 삶이 다채로워 집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저만의 카테고리를 하나씩 늘려나가고, 카테고리들 속의 주제들이 그물처럼 엮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한 동안 잊어버린 글쓰는 방법도 다시 한 번 찾아봐야 될거 같네요.
<매일 아침 써봤니?>는 마중물의 역할을 제대로 했네요. 이렇게 오랜 만에 블로그에 제 생각을 정리해서 올리게 되었으니까요. 책의 표지에는 '7년을 매일같이 쓰면서 시작된 능동태 라이프' 의 부제가 적혀 있네요.
"다시 써보겠습니다" = "다시 제 삶을 계획하고 살아보겠습니다" 삶의 변화가 다시 기대됩니다. 그 기쁨을 알거든요.
책을 읽는 진정한 가치를 좀 다르게 표현하면, 책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거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읽을 때 저자의 세계 전체와 상대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독서 행위의 정말 중요한 가치는 '이 사람이 한 권의 책에서 구현해낸 엄청난 세계를 내가 어떻게 빨리 습득하느냐'가 아니죠. '이 책은 저렇게 말하는데 나는 이렇지' 하고 자기반성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핵심이 아니죠. 그 둘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두 세계 사이의 교직에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는 것 같거든요.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기 성찰과 반성을 위해서라는 말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깊은 방식일 수 있지만 그 역시 핵심은 아닌 것 같아요. 핵심은 그 둘 사이 어디에 있다는 거죠. 그러면 둘 사이에서 만나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을 함께 흘려 보내는 식으로 만나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한다면 좋은 삶은 뭐겠어요. 시간을 흘려 보내는 삶, 시간 속에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잘 선택하는 삶, 그것이 좋은 삶이잖아요. 그래서 앞에서 말한 습관이라는 것도 시간을 경영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면, 시간을 흘려 보내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검증된, 유쾌한, 훌륭한 방식 중 하나가 책 읽기라는 거죠
p151
독서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쌓는 독서와 허무는 독서라고 할 수 있겠죠. 쌓는 독서라고 하면 내가 내 세계를 만들어가는, 내 관심사에 맞는 책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책을 읽을 것 같고요. 허무는 독서는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거나 다른 생각을 받아들에게 하는 경우일텐데요. 쌓는 독서를 게을리하면 '내 것'이 안 생기고, 허무는 독서를 안 하면 내 세계가 좁아지거든요.
■ 목차 읽어보기
1부.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 실패한 독서가
. 그런데 왜 책을 읽으세요?
.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 넓이의 독서
. 문학을 왜 읽어야 하나요?
.꼭 완독해야 하나요?
.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 지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은 무엇입니까?
. 이토록 편하고 행복한 시간을
. 읽고 쓰고 말하고
.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 느리게 읽어도 상관없다
. 책을 숭배하지 말아요
. 한 번에 열 권 읽기
. 때로는 도전도 필요하다
. 나만의 서재, 나만의 전당
. 책을 고르는 세 가지 방법
. 그래서, 좋은 독서란 무엇일까
2부. 대화 (읽었고, 읽고, 읽을 것이다.)
. 어린 시절의 책 읽기
. 넓이의 탐색
. 책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 이야기의 특별함
. 성공적인 실패
. 습관이 행복한 사람
. 두 세계의 교차
. 읽는 것과 쓰는 것
. 독자의 시작
. 앞으로 써야 할 것들
p146
책을 읽는 진정한 가치를 좀 다르게 표현하면, 책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거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읽을 때 저자의 세계 전체와 상대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독서 행위의 정말 중요한 가치는 '이 사람이 한 권의 책에서 구현해낸 엄청난 세계를 내가 어떻게 빨리 습득하느냐'가 아니죠. '이 책은 저렇게 말하는데 나는 이렇지' 하고 자기반성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핵심이 아니죠. 그 둘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두 세계 사이의 교직에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는 것 같거든요.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기 성찰과 반성을 위해서라는 말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깊은 방식일 수 있지만 그 역시 핵심은 아닌 것 같아요. 핵심은 그 둘 사이 어디에 있다는 거죠. 그러면 둘 사이에서 만나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을 함께 흘려 보내는 식으로 만나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한다면 좋은 삶은 뭐겠어요. 시간을 흘려 보내는 삶, 시간 속에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잘 선택하는 삶, 그것이 좋은 삶이잖아요. 그래서 앞에서 말한 습관이라는 것도 시간을 경영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면, 시간을 흘려 보내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검증된, 유쾌한, 훌륭한 방식 중 하나가 책 읽기라는 거죠
p151
독서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쌓는 독서와 허무는 독서라고 할 수 있겠죠. 쌓는 독서라고 하면 내가 내 세계를 만들어가는, 내 관심사에 맞는 책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책을 읽을 것 같고요. 허무는 독서는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거나 다른 생각을 받아들에게 하는 경우일텐데요. 쌓는 독서를 게을리하면 '내 것'이 안 생기고, 허무는 독서를 안 하면 내 세계가 좁아지거든요.
지은이가 두 명이다. 그런데 조합이 평범하지 않다. 한 명은 경영자이고, 다른 한 명은 시인이란다. 낯선 조합이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책의 부제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가장 쉬운 창조법'이다. 더불어 '위대한 창조의 시작,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를 덧붙인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시인들의 눈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직접 어떤 물체가 되어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들은 세상에 보이는 것만 보지 않는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같지 않다.
강신장, 황인원의 『감성의 끝에 서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한 손쉬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바로 오감법, 오관법, 오연법, 오역법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책'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 중에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은 '한석봉' 이었다. 아직도 얼핏 기억나는게 한석봉이 마른 바위를 종이 삼아, 시냇물의 물을 먹으로 삼아 글을 쓰고, 땅 위에 나뭇가지로 글을 쓰는 그림들이 생각나는 듯 하다. 그리고 제목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러 분야를 만화로 설명해주던 전집이 있었다. 중학교 때는 돈이 조금씩 생길때 마다 당시 조금 거리가 있었던 서점으로 달려가 한 권 한 권 모은 책이 있었다. 지금도 이 책은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나면 꼭 다시 찾아오는 책이다. 어렸을 때의 그 기억에 꼭 간직하고 싶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문열의 '삼국지' 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부터 책을 좋아하긴 했었던 거 같다. 그 재미는 한참 동안 끊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쉬우면서도 다행스럽게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끊어진 끈을 다시 엮을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책의 맛을 알게 되었고, <아라비안 나이트> 페르시아의 왕 샤리아르가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하루 하루를 지내듯이 소설 속의 이야기 속에 흠뻑 젖어들곤 했다. 출퇴근 버스에서 "독서등 좀 켜 주세요!' 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휴대용 독서등도 사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몇 장이 너무 궁금해서 화장실에서 나머지를 읽고 회사로 들어가기도 했다. 어떤 책은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손에 잡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지나왔다. 그리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는 재미를 위해 읽었던 책에서 나름의 열매를 맺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피상적인 것을 바라보았던 그 동안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의 공부가 되기를 바래 본다.
얼마 전에 한 일 년 정도 책장에 묵혀두었던 켄 베인의 『최고의 공부』를 읽었다. 그리고 나서 '앞으로 내 삶을 위한 '최고의 공부'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노트 위에 '최고의 공부'라고 적고 내가 생각하는 '공부', 앞으로 어떻게 책을 읽어나갈지를 생각해보았다.
'인성함양', '재미있게', '통합적으로', '연결,융합,확장', '다양하게', '체계적,계획적,방법론적', '성과있게' 라는 말들이 떠올랐고 선으로 연결해 둔다.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할까?' 이 말은 곧 '어떻게 살아갈까?'로 이어진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첫번째는 무엇보다도 '재미'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라고 하지 않던가.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내가 좋아하는 목록들을 하나씩 적어두고 거기서 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내가 흥미가 떨어졌을 때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찾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아침마다 듣는 음악이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이다. 그런데 나는 클래식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예전에 박웅현의 『여덟 단어』를 통해 알고 처음으로 들었는데 다른 음악들이 아무리 좋아도 어느 정도 반복해서 들으면 지겨워지는데 이 곡은 들을 때 마다 감동이고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눈을 감게 된다. 그런데 나는 어떤 소리가 어떤 악기에서 나오는지, 각 악장의 의미, 구성 정보같은 것들은 하나도 모른다. 단지 소리가 좋아서 듣는다. 이런데서 부터 파생해야 할 거다. 차이코프스키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가 살던 러시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협주곡은 무엇인지, 이 음악이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라던지 부터 하나씩 알아갈 생각이다. 그렇게 시작해볼 생각이다.
두번째는 '인성함양' 이다. 모든 것의 기본은 인성으로 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과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항상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중용'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하지만 '중용'을 회색분자로 잘 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만의 의지는 분명히 반영되어야 한다. 부드럽지만 강인하게, 매섭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번째는 '다양하게 연결, 융합, 확장' 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정보를 얻어 왔고 재미를 찾았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더 그 매개를 넓혀서 오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음악을 듣고 기사를 찾고 다큐멘터리도 보고, 마음에 드는 영화감독을 찾으면 그 감독의 전작을 탐해 보기도 하자. 장르에 상관없이 매체에 상관없이 다가가고, 경험하자. 그리고 하나씩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 좋아하는 영화들의 목록들을 쌓아가자. 그렇게 하나씩 다른 분야에도 매니아가 되는 거다. 나중에는 내가 서평이 아닌 음악평과 영화감상평을 쓰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네번째는 '통합적으로' 다. 세번째와 맥을 같이 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생각하는 공부의 궁극의 목표이기도 하다. 통합적으로 공부해서 통찰력을 얻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공부이다. 조선후기 박지원의 <허생전>에 보면 집 안에서 10년 공부를 목표로 글만 읽던 허생이 가난에 찌들고, 아내의 등살에 밀려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장안의 한 부자를 찾아가 돈을 빌려 그 밑천으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된다. 허생이 누가 보면 배포있는 장사꾼 기질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얻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통찰력을 얻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통합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까?
책을 읽더라도, 무엇을 하더라도 단편적으로 지나가서는 안 된다. 궁금한 단어가 있으면 찾아보고,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연계되는 것들을 찾아보자. 항상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가 하는 말이 타당한가?', '내 생각은 어떤가?' 와 같은 질문을 품으면서 비판적인 자세를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의 주제에 대한 파장이 생겨나고, 다른 주제를 공부하게 되면 또 다시 다른 파장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 두 파장이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다섯번째는 '체계적, 계획적, 방법론적' 이다. 내가 어떤 공부를 통해서 얻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나에게 상기시켜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더불어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을 때 듣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쉽고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분명 '감동, 재미, 지식' 중에 하나는 포함되어 있어야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일종의 Tool 이나 방법론을 스스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책을 읽어보면서 접한 '심리테스트' 혹은 '개인 역량 강화'를 위한 계획표 같은 것도 상관없다. 이런 것들을 하나씩 모아 보고, 나에게 맞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활용가능하게 관리, 보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여섯번째는 '성과있게' 다. 스스로를 위한 공부든, 회사 업무를 위한 공부든 어떤 가시적인 보상이 있어야 더 재미를 느끼게 된다. '보상'에 얽매여서는 안되지만, 사람의 특성 상 어쩔 수 없이 중요한 부분이다.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려두고 늘어나는 '좋아요'를 바라보며 무흣하게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심리일 것이다. 블로그에 적어두고 사람들이 읽어주는 재미가 그 보상이 될 수도 있다. '개인 책 출판', '업무에 관련된 자격 취득' 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간 중간에 스스로 보상받을 수 있는 작은 성과들을 배치하고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각개격파하면서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
이 방법들이 '최고의 공부'를 위한 방법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씩 켜켜이 쌓아나가고, 내 몸에 맞는 방법들을 하나씩 찾아보자. 그러다 보면 최고의 공부는 되지 못하더라도 나에게 맞는 공부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자문해본다.
지금처럼 블로그에 서평을 남기거나, 눈에 보였던 것들을 묘사하거나, 아니면 하루 동안 변해왔던 내 감정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글로 적어내려 갈 때가 있다. 그런데 왜 내가 메모지, 다이어리,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있을까?
항상 대답은 정해져 있다. 손이 가기 전에 먼저 마음이 먼저 앞선다. 무언가 하루 동안 겪었던 기억들이 휘발되어 날아가지 않게 담아두고 싶고, 책을 읽으면서 그 순간에 느꼈던 진한 감동과 감탄스러웠던 순간들을 그대로 아로 새겨서 간직하기를 원한다.
글을 쓸 때 느끼는 쾌감 중에 하나는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마지막을 마치는 순간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아~! 끝났다' 하는 시원함과 동시에 '어떻게 글을 써내려왔지?' 하는 궁금증이 겹친다. 그리고 글을 처음부터 혼자 읽어 본다. 문맥의 흐름은 맞는지, 어색한 표현은 없는지 살펴본다. 너무나 식상한 단어를 보면 어휘력의 한계에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평소에 잘하지 않았던 마음에 드는 표현이 나왔을 때는 스스로 대견해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기억을 하기 위해서다. 서평, 일기, 생각나는 무언가에 대한 기록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유산으로 남는다. 순간순간 남기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중요하거나 가치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한 때는 지금처럼 현재였던 그 순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 당시의 내 모습과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 순간에는 너무나도 중요했던 일들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니 그렇지 않았구나! 깨닫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평범한 순간이 정말 기회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게 개인적인 글들이 늘어나면 나만의 자서전, 역사책이 만들어진다. 가능하면 내가 느끼는 세세한 감정들,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자세히 적어두고 싶다. 그렇게 나를 한 번 더 깊이 관찰하고 싶다.
마지막은 생각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난 다음에 해야하는 것이 성찰과 사색이다. 성찰과 사색의 시간을 거쳐야만 배움과 지식이 그 사람의 몫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성찰과 사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자에 앉아서 '나 이제부터 생각할꺼야?' 라고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이다. 예전부터 이 방법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이제는 그 방법을 조금은 찾은 듯 하다.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은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무언가가 실체적인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글로 변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이루어져야 하고, 조금 더 나은 글을 풀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게 되고,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과연 맞는지,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서 곱씹어 보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자연스럽게 성찰과 사색이 된다.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책과 글쓰기에 관련된 책은 항상 내용은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언제나 나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공감하는 부분을 잠시 소개한다.
첫째. 취행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이 세 가지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에는 철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화려한 문장을 쓴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가서야 훌륭한 글이다.
무엇보다 뜻이 두루뭉수리 불분명해서 아무 곳에나 넣어도 되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단어를 자꾸 쓰면 어휘 구사 능력이 퇴화한다. 생각을 감추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곧바도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어휘가 너무 적어서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탓이라면 단기 해결책이 없다. 근본 대책은 독서량을 늘리는 것 뿐이어서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글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실용적인 면에서든 윤리적인 면에서든, 읽는 사람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주는 글은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 수 없다. 타인에게 텍스트를 내놓을 때는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글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려면 지식과 전문성을 내보이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작가 유시민은 본인이 읽었던 교양서(학자들이 보통 사람을 위해 쓴 책) 중에서 '글쓰기를 위한 전략적 독서' 목록을 만들어서 소개하고 있다. 이 책들은 앞으로의 내가 읽을 책에도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책 목록을 보니 분명 소화해내기 쉬운 책이 아님은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읽는 힘이 아직은 부족하기에 올해에는 차근 차근 한 권씩 곱씹어 읽어가면서 어느 정도의 책력은 키워야겠다. 분명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독서,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가능하게 될 거라 확신한다.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로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승산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다락원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우물이있는집
◎ 스티븐 핑거 외, 존 브록만 엮음, <마음의 과학>, 와이즈베리
◎ 스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바오
◎ 신영복, <강의>, 돌베개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한국경제신문
◎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은 아름답다>, 문예출판사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흥신문화사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문학사상
◎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어크로스
◎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갈라파고스
◎ 존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흥신문화사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책세상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 이후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서해문집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은행나무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 글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람이 변하면 글이 변한다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면 속이 후련할 때가 있다. 이와 비슷하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글로 뱉어내면 마음이 편안해질 때도 있다. 어떤 글을 쓸 때 잘 써진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보통 내가 진심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쓸 때다.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 아니고, 직접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풀어낼 때는 글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도가 높아진다. 평소에 갑자기 욱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속상하게 할 때가 있는데, 이런 모습을 내가 알고 글로 몇 번을 적다 보니 점점 그런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현실적이지 않은 소망과 이상적인 것을 계속 글로 남기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글로 남긴 것이 내 생각으로 자리가 잡혀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글로 적어두었던 것 중에 많은 부분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그렇게 내가 쓴 글이 어느 순간 내 모습이 되어 버리고, 변화된 내 모습에서 새로운 글이 나온다. 그렇게 글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소개하며 나를 변화시키는 글쓰기를 마친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김형수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장강화, 이태준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의 <한겨레>에 연재하는 칼럼 '현대를 만든 물건들'
http://www.hani.co.kr/arti/SERIES/606/home01.html
유시민, <항소이유서>
논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다면 무엇보다 생각을 바르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먼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 기준을 바꾸고 감정에 휘둘려 논리의 일관성을 깨뜨리면 산문을 멋지게 쓸 수 없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을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이 세 가지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
우리는 언어로 소통하고 교감해서 자신과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말이든 글이든 원리는 같다. 언어로 감정을 건드리거나 이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 능력에 기대어 소통하려면 논리적으로 말하고 논리적으로 써야 한다. 그러려면 논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효과적으로 논증하면 생각이 달라도 소통할 수 있고 남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내 생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미적 취향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타인의 미적 취향을 '미친 짓'이라고 욕하거나 '비정상'이라고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미적 취향을 표현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단순한 취향 고백과 논증해야 할 주장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이것이 논증의 미학을 구현하는 첫 번째 규칙이다.
논리학이나 수학에는 공리라는 것이 있다. 증명하지 않고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명제가 공리다. 유클리드기하학의 평행선 공리가 널리 알려진 사례다. 글을 쓸 때는 사실을 수학의 공리처럼 대해야 한다.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은 반드시 그 타당성을 논증해야 한다.
개혁이 '고친다'는 뜻을 가진 중립적 단어라면, 개선을 고쳐서 더 좋게 만드는 것이고, 개악은 고쳐서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논증의 미학이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사실과 주장을 구별하고 논증 없는 주장을 배척해야 하며 논리의 오류를 명학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미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논증의 미학을 애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엄격한 논증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논증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논증의 미학을 실현하기 위해 지켜야 할 세 번째 규칙이다. 말과 글로 논증하고 토론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 규칙을 지키면서 글을 쓰는 것은 훨씬 어렵다. 이해는 생각만 해도 할 수 있지만 실천은 삶으로 몸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더 많다 .글쓰기도 그런 것이다.
시나 소설을 쓰고 싶은 독자라면 앞에서 소개한 김형수 시인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 같은 책을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살아 있는 고전으로 인정받는 이태준 선생의 <문장강화>도 나쁘지 않다.
글쓰기에는 철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스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든느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무슨 주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논리적, 실증적 근거를 신속하게 탐색하는 습관이 생겼다.
연구 논문, 보도자료 같은 글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을 정할 수 있다. 나는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쉽게 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의할 근거가 있는 글이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다음 네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제가 분명해야 한다.
둘째,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꼭 필요한 사실과 중요한 정보를 담아야 한다.
셋째, 그 사실과 정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넷째, 주제와 정보와 논리를 적절한 어휘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잘 알려져 있다. 첫째는 텍스트 독해, 둘째는 텍스트 요약, 셋째는 사유와 토론이다.
논리 글쓰기의 첫걸음은 텍스트 요약이다. 그런데 이 첫걸음을 똑바로 내딛으려면 텍스트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싶으면 먼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텍스트를 읽지 않고 독해력을 키우는 방법은 없다. 글스기의 첫번째 철칙은 바로 이 단순한 사실에서 나온다.
많이 읽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읽을수록 더 잘 쓸 수 있다.
텍스트를 독해하고 요약하는데 능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그러면 글을 잘 쓸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그래서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독서광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 쓰는 기술만 공부해서 잘 쓰는 사람도 물론 없다.
논리적 글쓰기의 두 번째 철칙이 나온다.
쓰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화려한 문장을 쓴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가서야 훌륭한 글이다.
글을 썼으면 남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혹평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혹평도 반갑게 듣고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해야 글이 는다. 남몰래 쓴 글을 혼자 끌어안고만 있으면 글이 늘 수 없다.
독해는 단순히 문자를 알고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다. 독해는 어떤 텍스트가 담고 있는 정보를 파악하고 논리를 이해하며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정보와 논리와 감정을 특정한 맥락에서 분석하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작업이다 .독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같은 시간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텍스트를 읽고 더 넓고 깊게 이해하며 때로는 남들과 다르게 텍스트를 해석한다. 독해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텍스트를 더 정확하게 더 개성 있게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독해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훌륭한 글은 뚜렷한 주제 의식, 의미 있는 정보, 명료한 논리, 적절한 어휘와 문장이라는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이 네가지 미덕을 갖추는 데 각각 서로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면 글쓰기는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다행히 그렇지가 않다. 이 네 가지는 따로따로 배우고 익히는 게 아니다. 넷 모두 한꺼번에 얻거나, 하나도 얻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인간의 모든 지적,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활동을 총괄하는 신체 기관은 뇌다. 3층 구조로 된 이 1.4킬로그램짜리 살덩어리는 수십억 년에 걸친 생물의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언어 구사를 포함한 정신적, 지적활동은 대뇌피질이 관장한다. 글쓰기가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뉴런)가 있다. 뇌신경 세포는 저마다 수십 개에서 수천 개의 돌기(시냅스)를 만들어 다른 신경세포와 전기적, 화학적 신호를 교환한다. 뇌는 여러 신체 기관이 전해준 정보를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분석 처리하며 각각의 신체 기관이 상황에 맞는 운동을 하도록 명령한다. 우리가 자아를 인식하고 의식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뇌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나 '지성''의식'은 물질이 아니라 뇌신경세포가 주고받는 전기적, 화학적 신호의 집합일 뿐이다. 언어 구사는 뇌가 수행하는 여러 기능 중 하나다. 대뇌피질은 영역마다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언어를 관장하는 영역도 물론 따로 있다. 이 영역은 뇌가 성장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는 영역과 함께 형성된다. 뇌는 태내에서느 만들어지기 시작해 태어난 후 3년 정도 폭발적으로 자라며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성장기의 뇌에서는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부위 사이에 더 많은 신경세포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래서 이 시기에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어떤 자극과 과제를 받느냐에 따라 뇌의 구조와 기능이 적지 않게 달라진다. 형성기의 뇌는 만지기에 따라 모양이 잘라지는 점토와 비슷한 것이다.
뇌는 유전자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다. 환경도 뇌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의 뇌는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뇌는 평생 두 요인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 발전, 퇴화한다. 사람의 언어 구사 능력도 유전자와 환경이 어울려 결정한다. 사람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하드웨어를 지니고 태어나며,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모국어라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한다. 부모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풍부한 언어적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아이의 뇌가 이 과제를 순조롭게 완수하도록 도울 수 있다.
사람의 뇌도 같은 원리에 따라 형성된다. 뇌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에 적절한 언어적 자극에 노출된 아이들은, 언어를 담당하는 뇌 역역에 충분히 많은 신경세포를 확보하고 원활한 교신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말 못하는 아기한테도 자주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아기는 부모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부모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 때 아기의 뇌에서는 행복한 비상사사태가 일어난다. 청각신경이 포착한 음성 정보를 해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 아기의 뇌는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에 더 많은 뉴런을 배치하고 교신을 더욱 강화한다. 따라서 반쪽짜리 말을 하는 아이라도 완전한 문장을 대화해야 한다. 따라서 반쪽짜리 말을 하는 아이라도 완전한 문장으로 대화해야 한다. '찌찌', '때때', '응가' 같은 반쪽짜리 말을 가르치고,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부모도 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아이의 뇌는 쉬운 숙제를 받은 학생처럼 느긋해진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배치하고 더 많은 시냅스를 만들어 더 효율적으로 교신하려는 노력을 덜하게 된다.
아이가 언어 능력을 온전하게 발전시키도록 하려면 부모가 우리말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부모가 우리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말 공부를 새로 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말을 바르고 예쁘게 쓴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부모가 완전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책을 친숙한 목소리로 읽어줄 때, 아이의 뇌는 그 음성 정보를 해독하기 위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모든 아이가 동화책 듣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은 확실하다.
말을 시작한 뒤에는 무엇이든 본인 의사를 말할 기회를 주었다
어린이 독서는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독서를 생활 습관으로 만들고 자신이 읽은 것을 활용해 무엇이든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된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독서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재미를 붙이기만 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나름의 독서 이력을 만들어간다. 만화, 판타지소설, 무협소설, 추리소설, 역사소설, 잡지, 그 무엇이든 괜찮다.
독해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려운 글은 밑줄을 긋고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가면서 읽어야 한다. 독서량이 늘어 아는 게 많아지고 생각이 깊어져야 텍스트를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비판적, 창의적으로 독해할 능력이 생긴다. 글을 잘 쓰려면 먼저 높은 수준의 독해 능력을 길러야 한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고르는 기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 사회, 문화, 역사, 생명, 자연, 우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지식을 담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글을 쓰는 데 꼭 필요한 지식과 어휘를 배울 수 있으며 독해력을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둘째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을 구사한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자기의 생각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장 구사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인이 쓴 것이든 외국 도서를 번역한 것이든 다르지 않다.
셋째는 지적 긴장과 흥미를 일으키는 책이다. 이런 책이라야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논리의 힘과 멋을 느낄 수 있다. 좋은 문장에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으면 지식과 어휘와 문장과 논리 구사 능력을 한꺼번에 얻게 된다.
이런 책은 친구로 만드는 게 좋다. 친구는 오랜 세월 좋은 일은 함께 즐기고 아픔은 서로 나누며 자주 어울려야 친구다운 친구다. 어떤 책과 친구가 되려면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시간이 들지만 손으로 베껴 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런 책 목록을 제안하기에 앞서 우선 세 권을 소개한다. <토지>와 <자유론> 그리고 <코스모스>다. 이 책들은 두세 번이 아니라 열 번 정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자유론>에서 밀은 단 하나의 질문을 다루었다. 어떤 경우에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가? <자유론>은 놀라운 책이다. 우선 내용이 놀라울 만큼 훌륭하다. 개인의 자유와 관련한 중대한 쟁점을 철학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해명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그 훌륭한 내용을 사회에 대한 기초 지식과 평범한 수준의 독해력만 있으면 누구나 어려움 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섰다는 것이다. 밀은 아무리 심오한 철학이라도 지극히 평범한 어휘와 읽기 쉬운 문장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칼 세이건 박사는 <코스모스>에 1980년대까지 인간과 생명, 지구와 우주에 대해서 인류가 알아낸 거의 모든 것을 압축해서 담았다. 나는 밤하늘의 별과 내 몸이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위로를 받았다.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삶이 덜 외롭고 덜 허무해 보였다. 우주의 질서와 운행 법칙을 예전보다 더 명료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의식과 지성을 가진 생명체로 세상에 온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깨달았다. 나는 이 책에 이끌려 예전에는 관심도 없고 어렵게만 느꼈던 생물학과 뇌과학, 물리학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전략적 독서 목록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 모든 집단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가? 구성원들이 개별적으로는 이타적인데도 집단으로 뭉치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권계급의 집단적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불의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정의를 함께 실현할 수 있을까?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로
화학살충제와 제초제로 '해충'과 '잡초'를 박멸할 수 있는가? 만약 성공해서 곤충과 잡초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좋은 일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가? 생태계의 다양성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해충과 잡초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우주와 생명은 누가 만들었나, 스스로 태어났나?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종교의 도움 없이도 삶에 필요한 도덕을 세울 수 있는가? 신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다윈의 진화론은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을 주장한다. 자연선택과 생존경쟁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가? 집단인가, 개체인가, 유전자인가? 인간을 유전자가 창조한 생존기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이론인가? 인간의 자유의지로 유전자의 독재에 저항할 수 있는가?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기계인 인간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승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는 무엇이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원자에서 거대한 은하에 이르기까지 물질세계의 모든 운동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은 있는가?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은 인간의 세계관과 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 마이클 샌텍,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정의는 무엇이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철학적, 도덕적 원리에 의지해야 하는가? 사유재산제도와 징병제, 누진소득세, 낙태와 성매매 금지 같은 국가의 법과 제도가 정의의 원칙을 어떻게 또는 얼마나 잘 실현하거나 침해하고 있는가? 상이한 철학적, 도덕적 원리가 대립, 경쟁하는 상황에서 최대한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다락원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우물이있는집
■ 스티븐 핑거 외, 존 브록만 엮음, <마음의 과학>, 와이즈베리
■ 스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바오
■ 신영복, <강의>, 돌베개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한국경제신문
■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은 아름답다>, 문예출판사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흥신문화사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문학사상
■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어크로스
■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갈라파고스
■ 존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흥신문화사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책세상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 이후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서해문집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은행나무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어떻게 하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로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못 쓴 긋이다. 못나고 흉한 글이다. 이런 글을 읽기 쉽고 듣기 좋고 뜻이 분명해지도록 고치면 좋은 글이 된다.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소리 내어 읽어봄으로써 못난 글을 알아보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한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언어는 말과 글이다. 생각과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이 된다. 말과 글 중에는 말이 먼저다. 말로 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을 쓸 때는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 쓴 글을 알아보지 못하면 자기가 잘못 쓴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잘못 쓴 문장을 알아보는 진단법은 이미 소개했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귀로 듣고 뜻을 새겨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한 방법을 외면한다. 좋은 글, 훌륭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면서도 잘못 쓴 글, 못난 문장과 결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글쓰기도 면역력이 있어야 잘할 수 있다. 우리는 못난 말과 글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산다. 책, 신문, 방송을 보면 병든 말과 글이 널려 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을수록 문장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반면 면역력이 센 사람은 글이 엉망인 책을 읽어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좋은 문장을 쓴다.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못난 글과 나쁜 문장에 대한 면역력이 저절로 생긴다. 하지만 '백신' 예방접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효과가 좋은 백신이 이미 수십 년 전 서점에 나왔다. 앞에서 말한 이오덕 선생의 책 <우리말 바로쓰기>다.
'으로의' '에로의' '에서의' '으로부터의' '에 있어서의' 와 같아 '의'를 겹쳐 쓴 토씨도 모두 우리말법에 어긋난다. 이것은 일본말 조사를 옮긴 것이다. 우리말은 그런 식으로 토씨를 쓰지 않는다. 일본말처럼 토씨를 쓰면 글이 늘어지고 운율이 죽으며 문장의 힘이 빠진다. 읽기도 나쁘고 듣기도 좋지 않다.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이 '나는 나의 집의 뒤의 나의 집의 밭의 나의 집의 복숭아를 따 먹었습니다'와 다르지 않은 문장을 쓴다. 못난 글에 대한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피동형 문장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말에는 피동문이 드물다. 반드시 피동문을 써야 정확하게 뜻을 전달 할 수 있을 때만 예외로 쓴다.
'보여지다' '되어지다''키워지다''다뤄지다''모여지다''두어지다''보아지다' 같은 것은 글뿐만 아니라 방송에도 출몰한다. 타동사를 피동형으로 쓰는 것만으로 모자라는지 자동사까지 억지로 피동형으로 만들어 쓴 문장은 우리말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단문을 써야 인물의 행위와 사건 전개 상황을 속도감 있게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만 그런 게 아니라 에세이를 쓸 때도 단문이 좋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무엇보다 뜻이 두루뭉수리 불분명해서 아무 곳에나 넣어도 되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단어를 자꾸 쓰면 어휘 구사 능력이 퇴화한다. 생각을 감추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곧바로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어휘가 너무 적어서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탓이라면 단기 해결책이 없다. 근본 대책은 독서량을 늘리는 것뿐이어서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아무리 어려운 텍스트라도 문맥을 파악하면 그런 대로 독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에게 신묘한 독해력을 요구하는 글은 잘 쓴 글이 아니다. 맥락을 잘 모른 채 텍스트를 읽어도 뜻을 아는 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써야 한다.
생각은 자유롭고 상념은 스쳐간다. 생각하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 버스 안에서든 샤워 꼭지 아래서든, 아니면 횡단보도 위에서든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아, 이건 중요한 생각이네. 꼭 기억해놔야겠다. 그런 생각도 적어두지 않으면 금방 사라진다. 이건 중요하니까 잊지 말아야지! 그렇게 결심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도 정작 그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생각과 느낌은 붙잡아 두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우리 뇌는 엄청난 용량을 지녔지만 모든 정보를 다 저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자투리 시간 글쓰기의 주제와 내용은 정하기 나름이다. 출근길 버스나 지하철 풍경을 그려도 좋고 단골 카페 인테리어를 묘사해도 괜찮다. 거리에서 진한 스킨십을 하는 젊은 연인을 부러워해도 된다. '키도 큰' 친구에 대한 시기심을 토로해도 무방하다. 트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이론에 관한 생각, 70미터 굴뚝 위에서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 드라마 <미생> 시청 소감을 적어도 된다. 어제 읽은 책 독후감도 나쁘지 않다. 뭐가 되었든 많이 쓰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방법도 있다. 창조의 시작은 모방이다. 인간의 표현 행위는 자연을 모사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고구려 고분벽화 모두 자연과 인간의 겉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사람의 몸을 비틀고 찢고 조합한 <게르니카>로 유명한 화가 피카소가 세 살 때 처음 그린 것은 비둘기 발이었다. 그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연필로 그린 말은 금방 종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실감이 난다.
긴 글보다는 짧은 글쓰기가 어렵다. 짧은 글을 쓰려면 정보와 논리를 압축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압축 기술은 두 가지다.
첫째, 문장을 되도록 짧고 간단하게 쓴다.
둘째, 군더더기를 없앤다.
문장을 짧게 쓰려면 복문을 피하고 단문을 써야 한다. 여기서 복문은 주술 관계가 둘 이상 있는 모든 형태의 문장이다. 복수의 문장을 대등하게 연결하는 '중문',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의 성분이 되는 '좁은 의미의 복문', 중문과 복문을 모두 가진 '혼성문'을 한데 묶어 복문이라고 하자. 글을 압축하려면 단문을 기본으로 하고 특별한 경우에 복문을 쓴다느 ㄴ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뜻과 느낌을 강하고 확실하게 깊게 전하려면 복문을 써야 한다는 판단이 들 때만 복문을 쓰는 것이다. 간단한 원칙이지만 해보면 금방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다. 문장의 군더더기란 무엇이며 군더더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없애버려도 뜻을 전하는 데 큰 지장이 없으면 군더더기다. 문장의 군더더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접속사(문장부사), 둘째는 형용사와 부사, 셋째는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형용사나 부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문장 요소다.
굳이 없어도 좋은 접속사는 과감하게 삭제해야 한다. 단문으로 글을 이어나갈 때 문장 사이에 매번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그런데' '그렇지만' 같은 접속사를 넣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문장은 뜻을 담고 있다. 그 뜻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접속사가 없어도 된다. 단문을 기본으로 쓰고 불필요한 접속사를 생략하기만 해도 글을 조금은 압축할 수 있다.
다른 정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쓰려면 철저하게 독자를 존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문용어나 이론을 끌어올 때는 문맥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도록 적당한 방법으로 설명을 붙여야 한다.
글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실용적인 면에서든 윤리적인 면에서든, 읽는 사람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주는 글은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 수 없다. 타인에게 텍스트를 내놓을 때는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글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려면 지식과 전문성을 내보이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형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멋진 문장을 구사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다.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써야 잘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표현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을 내면에 쌓아야 하고, 그것을 실감 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문장을 멋지게 쓰면 '글재주'를 인정받을 수 있다. '글재주' 가 있으면 '써야 해서 쓰는 글'을 어느 정도 잘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글재주'만으로 공감을 일으키거나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
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이나 서평을 쓰고, 가끔 하루 일과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어떤 때는 그냥 어떤 단어 하나를 가지고 혼자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내려가기도 했다. 나는 작가나 기자처럼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물론 그들처럼 글을 쓰지도 못한다. 그런데 왜 나는 혼자 이렇게 글을 쓰는 걸까? 어떤 이유 때문에 내가 이렇게 글을 남겨두는 것일까?
하루를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항상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서 일을 하거나, 개인적인 업무 처리 그리고 홀로 생각할 시간은 스마트폰에 빼앗긴지 오래되었다. 잠시 생각해보니 어떤 날은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깊이 한 적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사는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생긴다. 이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그리고 동시에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면 내용에 따라 자연스럽게 예전에 내가 경험했던 내용이나 관련된 삶의 흔적들이 내면에 감춰진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오고, 어린 시절로도 가보고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공감할 수 있는 요소에서 함께 감응하기도 한다. 그런데 글쓰기는 그 퍼져나가는 정도가 더 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이가 더 깊숙하다. 그래서 글쓰기는 세속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수양의 길이요, 성찰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P22
작가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원래부터 작가라서 지식인의 본분으로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작가라는 뜻으로. 그래서 작가가 되기는 쉬워도 작가로 살기는 어렵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가라는 말은 명사의 꼴을 한 동사다. 작가는 행하는 자, 느끼는 자, 쓰는 자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세공하고 두루 나누면서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사람이다. 세상과 많이 부딪치고 아파하고 교감할수록 자기가 거느리는 정서와 감각과 지혜가 많아지는 법이니, 그렇게 글쓰기는 존재의 풍요에 기여한다.
p199
한 사람의 독특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를 가늠한다. 직업과 취향, 인생관을 파악한다. 긍정적으로 사는지, 부정적으로 사는지를 단어와 말투로 짐작한다. 그러니 어떤 단어를 주로 쓰는지, 욕설을 자주 하는지, 간결한 화법을 좋아하는지, 말끝마다 부연설명을 붙이는지, 심지어 문법적으로 수동형을 좋아하는지, 능동형을 좋아하는지, 사투리를 쓰는지, 말끝을 흐리는지 그대로 전하는 게 좋다. 또한 무의식적인 몸짓과 행동마저도 성격을 보여주는 단서다. 말을 하면서 헛기침을 해대는지, 여럿이 걸을 때 앞서 걷는지. 뒤로 처지는지, 아시다시피나 사실, 가령 같이 자주 사용하는 말버릇이 있는지 그러한 디테일을 살리면 글의 생생함을 더할 수 있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유쾌한 농담에서 진지한 토론까지 하나도 놓칠 게 없다.
글을 쓰다 보면 항상 생각하게 되는 것이 글의 재료이다. 글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내용들을 적어내려가야 한다. 바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스펙트럼이 글의 재료가 된다. 그러다보니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세상을 좀 더 자세히, 남들이 보지 못하는 숨은 부분까지도 바라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관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 더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는 항상 휴머니즘의 전제가 필요하다.
책을 읽고 남기는 개인적인 독후감을 쓰고 나서 어떨 때는 홀로 뿌듯할 때가 있다. 무언가 내 글에 대한 자아도취의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는 대부분 형식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내가 경험했던 내용, 개인적으로 고민했던 내용을 풀어내는 경우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거나, 대중매체를 통해서 접한 정보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에는 어쩐지 글을 쓸 때 감정이 제대로 스며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내가 내 이야기를 쏟아낼 때는 그 만큼 힘이 생기고 글에도 탄력이 붙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p62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문학은 저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글쓰기는 용기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소설가 김연수는 글 쓰는 일이 "아랫도리 벗고 남들 앞에서 서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용기가 충만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글을 써내는 과정에서 문제에 직면하면서 용기가 솟아난다는 말일 것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다 보면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고 했다.' 라는 말이 나온다. 글을 쓰다 보니 색다른 시선으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사람, 다정하게 이야기하듯이 읽는 내내 마음도 차분해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부러웠다.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을까. 시기심이 발동한다. 그런데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잘 쓸 수 없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상처가 되는 말이지만 반대로 내가 한 만큼은 보상해준다하니 위로가 되기도 한다.
글이 '자기 능력' 보다 잘 쓸 수 없다고 할 때, 그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다시 독서와 사색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기르고, 만나지 못하는 인물들의 내면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삶의 직간접 경험을 되새김질 하듯이 끊임없이 곱씹으면서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능력이 살아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p81
대학교 3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의 어머니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스물여덟 살에 청상이 되어 삯바느질로 삼형제를 키우던 어머니가 순천 시내 서점 주인에게 "우리 아들이 읽고 싶은 책은 마음대로 읽게 하고, 사고 싶은 책은 그냥 가져가게 하면 월말에 들러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승옥은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책이란 책은 거의 다 읽었고 그것들이 글을 쓰는 바탕이 되었다며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독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글쓰기에 대한 많은 책이 내 책꽂이에 서로 기대어 꽂혀있다. 잘 쓰고 싶은 욕심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그들이 특별한 해답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그저 써야 한다'가 진리임을 알게 된다.
『글쓰기 최전선』의 표지의 윗 부분에 쓰인 짧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P9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
P17
사보 일의 유일한 낙은 인물 인터뷰. 연인과의 만남처럼 늘 설렌다. 그동안 보아온 삶의 유형을 벗어난 다양한 얼굴들. 세상의 척도가 아닌 제 '멋'에 취하거나 '흥'에 겨워 사는 사람들. 일상이 예술인 다양한 직업의 세계.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넓어지는 기쁨이 컸다. 혼자만 알기 너무 아까웠다. 인터뷰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는데 그게 매번 반복되니 하루는 친구가 지청구를 주었다. 도대체 안 멋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P18
나는 인터뷰만이 아니라 영화나 책에서 감동을 받으면 잠이 잘 안 왔다. 가슴에서 퍼내야 홀가분했다. 이 주옥같은 이야기, 이 놓치기 쉬운 생의 진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서 마음 편히 살고 긍정적 변화를 이루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시켜서라면 하지 못할 선천적인 오지랖인데 그것이 귀찮고 피곤해도 글을 쓰게 했다.
P19
감응하면 행동하게 되고 행동하면 관계가 바뀐다. 내 안에 머무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언어를 통한 '함께-있음'. 그리고 '나눔-변용'이다.
P20
글쓰기도 요리와 다르지 않다. 우선 내 생각을 글로 나타내면 남의 말을 잘 알아듣게 된다. 신문, 책, 블로그 등 무수한 텍스트를 접할 때, 글쓰기 전에는 단순한 '활자 읽기'라면 글쓰기 후에는 글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로 독해가 비약한다. 글쓴이의 처지가 헤아려지며 문제 의식과 깊게 공명할 수 있다. 글쓴이가 자료를 찾기 위해 얼마나 발품을 팔았는지, 적합한 단어 선택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글쓰기는 글 보는 눈을 길러주며, 글 보는 안목은 곧 세상을 보는 관점을 길러준다. 아울러 남의 말을 알아듣는 만큼 타인의 삶에 대해 구체적 감각이 생긴다. 이 감각, 마음 쏠림이 또 다른 글쓰기를 자극한다.
P22
작가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원래부터 작가라서 지식인의 본분으로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작가라는 뜻으로. 그래서 작가가 되기는 쉬워도 작가로 살기는 어렵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가라는 말은 명사의 꼴을 한 동사다. 작가는 행하는 자, 느끼는 자, 쓰는 자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세공하고 두루 나누면서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사람이다. 세상과 많이 부딪치고 아파하고 교감할수록 자기가 거느리는 정서와 감각과 지혜가 많아지는 법이니, 그렇게 글쓰기는 존재의 풍요에 기여한다.
p31
기존의 글쓰기 강좌가 '기자가 되기 위한' 또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또는 '자서전을 쓰기 위한'등 목적이 뚜렷했다면 <글쓰기 최전선>은 목적에 갇히지 않는 글쓰기 수업이었다. 자기 삶을 자기 시대 안에서 읽어내고 사유하고 시도하는 '삶의 방편이자 기예'로서 글쓰기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표방했다. 그렇다고 요즘 이슈인 힐링이나 치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구조적인 매트릭스에서 자신을 분리시킨 채 성급한 반성과 화해, 자기 정당성 확보의 글쓰기로 잠시 위안받고 산뜻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그 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조금낏 불편해지며 깨어있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다. 그러니까 다른 강좌가 잘 살기 위한 방향과 목표를 이미 결정한 이들이게 글쓰기의 실용적인 기법을 전수하는 방식이라면, <글쓰기의 최전선>은 왜 그 직업을 욕망하는지, 밤이고 낮이고 쓰는 글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잘 산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등등 자기 생각과 욕망을 글로 풀어내며 나를 알아가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p42
작가와 독자의 분리,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분리, 선생과 학생의 분리, 지식인과 대중의 분리, 정신노동과 육체노ㄴ동의 분리라는 치안적 질서는 각 개인의 능력과 재미를 제한한다. 한 사람이 직업의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존재로 변신할 때, 자기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있고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
p43
자기 이해를 전문가에게 의탁하기보다 스스로 성찰하고 풀어가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중 가장 손쉬운 하나가 내 생각에는 글쓰기다. 글쓰기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공업으로, 부단한 연마가 필요하다. 자기 안에 솟구치는 그것에 대해 알아채는 감각, 자기 욕망과 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감성적 역량, 세상을 읽어나가는 지식과 시선 등을 갖춰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삶의 장인이 될 수도 있고 아니될 수도 있지만 더 망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다. '망가지지 안는다'는 말이 얼핏 소극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무척 섬세한 감수성과 인지성이 들어 있다.
p47
'여럿이 함께' 쓰기 위해 모였다는 점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한국사회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낯선 사람들과 무작위로 섞이는 기회가 극히 적다. 비슷한 가방을 들고 비슷한 메뉴를 고르며 비슷한 드라마를 보는 사람끼리 어울린다. 그런데 동류 집단을 벗어나 낯선 배치에 놓이는 기회가 글쓰기 수업에서 주어진다. 저마다 다른 사람의 이력을 갖고 있으며 고단한 삶에 쉼표를 찍고자 떠나온 사람들과 마주하는 시간, 젊은 농부와 프로그래머가 만나고 공무원과 예술가가 벗한다. 다른 감각 다른 경험 다른 문화를 접한다. 이런 외부 자극과 내적 감응은 우리의 세포를 글 쓰는 신체로 활성화시켜준다. 멋진 여행이나 사랑, 혹은 곡절을 경험한 사람들이 넘치는 정서와 감성, 이전과는 다른 느낌과 생각에 겨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p48
이제껏 내가 살아온 것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글쓰기 수업은 여행하고 참 비슷해요. 서로 호기심을 갖고 깊은 대화를 나누고 좋은 자극 주고받으세요. 내 안에 수다가 많으면 글쓰기에 유리하거든요."
p50
글쓰기는 삶의 지속적 흐름에서 절단면을 만들어 그 생의 장면을 글감으로 채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p52
이처럼 열 편 남짓 글을 쓰고 나서 예외 없이 글감의 고갈에 직면하는 이유는 삶 혹은 나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어쩌면 글감의 빈곤은 존재의 빈곤이고, 존재의 빈곤은 존재의 외면일지 모른다.
p53
글쓰기는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자아냈던 대소사의 나열은 삶의 극힐 일부분이다. '나'의 범위 역시 피와 살이 도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총체이기도 하며 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내가 쓰는 언어를 보자. 그간 읽었던 책, 접했던 언론, 살았던 가족, 만났던 애인, 놀았던 친구의 말의 총합이다.
p54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경험의 코뮨적 구성 원리를 인식한다면, '경험의 고갈'이라는 난감한 사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p57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문장을 쓰고 그걸 다듬어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의 힘으로 한 페이지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서 영감을 기다리고 지적 자극을 위해 벤야민을 읽고 벤야민을 읽다보면 마르크스가 궁금하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려면 [자본론]을 펴야 하고 ..., 무능력에서 출발하면 글은 영원히 쓸 수 없다.
p58
글쓰기 초기 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일본 메이지대 문학부 교수 사이토 다카시는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이라는 책에서 "질보다는 양"이 문장력 향상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고지 열 장을 쓰는 생활 습관을 기르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좋은 글을 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백지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말하려는 내용을 완벽하게 써내야 한다는 부담을 버리고 글을 써내려가면 그 과정에서 좋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
p62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문학은 저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글쓰기는 용기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소설가 김연수는 글 쓰는 일이 "아랫도리 벗고 남들 앞에서 서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용기가 충만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글을 써내는 과정에서 문제에 직면하면서 용기가 솟아난다는 말일 것이다.
p68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p74
글쓰기 치유 워크숍이 끝나고 나면 참가자도 나도 조금씩 달라져 있기를,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재확인이 아니라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고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희망했다.
p76
타인의 경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 리뷰를 마치고 나서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굿'을 한 것처럼 몇 시간씩 앓기도 했다. 그건 아마 성장기에 뼈가 자라듯이 사유의 회로와 감각의 형질이 변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p81
대학교 3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의 어머니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스물여덟 살에 청상이 되어 삯바느질로 삼형제를 키우던 어머니가 순천 시내 서점 주인에게 "우리 아들이 읽고 싶은 책은 마음대로 읽게 하고, 사고 싶은 책은 그냥 가져가게 하면 월말에 들러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승옥은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책이란 책은 거의 다 읽었고 그것들이 글을 쓰는 바탕이 되었다며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독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p81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세계문학전집 뒤에 있는 자료 등을 보고 나름 세계 문학사 연표를 만들어서 연도순으로 읽어 나갔어요. 고대부터 1960~70년대 작품, 밀란 쿤데라까지 듬성듬성하긴 해도 꽤 많이 읽었는데 그때 독서가 자산이 됐어요.
p82
글쓰기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한 사람이 그간 읽은 책, 들은 말, 본 것, 접한 역사와 당대 이념등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그것이 풍부할수록 더 힘 있고 좋은 글이 나온다. 내가 글쓰기 수업에 책을 넣는 이유다.
p83
카프카의 말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나는 학인들에게 책을 읽되 '진실한 독해'를 당부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사실에 부합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곧 책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저자의 의도에 맞추려 낑낑대지 말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떠올리고 접목시키면서 '주관적'으로 읽어달라고 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다. 지식 따로 생활 따로의 교육 풍토 탓일 게다. 사회학자 조한혜정은 <글 읽기와 삶 일기1>에서 이렇게 썼다.
"학생들은 추상화 수준이 높으면 그 나름대로 쉽게 소화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구태여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볼 필요없이 공식을 외우듯 머릿속에서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p86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한된 삶의 조건에서 한정된 독서를 한다. 만나는 사람을 계속 만나듯이 읽던 책들을 주로 읽는다. 그간 읽어왔던 이물감 없이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책들 위주로 본다. 그것이 참다운 독서일까. 앞서 카프카가 말한 내면의 얼음 바다를 더 단단히 만드는 책 읽기. 자아가 유연해지기보다 고집스러워질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그건 약일까 독일까
p92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시는 패배자의 기록
p94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시 암송을 통해 '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그동안 오직 쓸모를 챙기기 위해 이루어진 지식의 축적에 물음표를 남겼다. 이것이 문학평론가 김현이 말한 문학의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으로의 이행이 아닐까. 잘 알려졌다시피, 김현은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p96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니체는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없다며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사적 독서가 아무래도 아는 지식을 재차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공고히 할 위험이 있다면, 함께 읽기는 이를 피해갈 기회가 주어진다. 자기 경험이 놓친 부분을 다른 동료의 경험으로 발견할 수 있다. 예기치 못한 느낌의 자장에, 의미의 풍요에 겹겹이 포위된다.
p97
시집은 나의 변화를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때는 도저히 감각의 주파수가 안 맞던 시가 계절이 바뀌고 나면 읽힐 때가 있다. 매번 읽을 때마다 새 책같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 사이 나는 살았고 뭐라도 겪었고 변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시집은 나에게 너무 어려워" 혹은 "이 책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제쳐두는 것은 자신을 고정된 사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절대 변하지 않고 화석처럼 살겠다는 이상한 다짐이다. 그 해 여름에 나를 밀어내던 시가 이듬해 겨울에 조금씩 스며들고 문장들이 마음에 감겨오면 그 기쁨은 무척 크다.
p100
김수영 시는 고약한 구석이 있다. 시어는 생활어이지만 의미를 흔들고 뒤집는다. 시의 난해함은 삶의 난폭함에서 유래한다. 삶이 종잡을 수 없다면 삶을 받아낸 시도 그럴 수밖에. 한 학인은 시가 도저히 안 읽혀 집 근처 도서관에서 김수영 관련 도서를 일곱 권이나 빌렸다고 했다. 이미 유명한 철학자가 진행한 김수영 시 강연을 듣고 온 이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럴 땐 난감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안 읽히는 ' 김수영의 시-삶이지, 김수영의 시-삶을 이론의 형틀로 찍어낸 '잘 읽히는' 지식인의 해석이 아니다. 소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느낌과 생각으로 시를 읽어내고 해설하느라 낑낑대는 것이 공부다. 독서의 참맛이다. (학자의) 권위에 복종하지 말고 (나만의) 느낌에 집중하기. 시의 본령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삶의 결을 무한히 펼치는 데 있다. 시가 아무리 어려워도 처음 읽을 때는 참고도서를 들춰보지 말자고 당부했다.
p102
내 마음도 꼭 그와 같았다. 평소에 쓰지 않던 언어를 사용하면 색다른 느낌이 사르르 피어난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천석꾼 부럽지 않게 든든하다. 어쩌면 우리는 안다는 것보다 느낀다는 것에 굶주린 존재인지 모른다.
p103
책은 기호품이거나 의약품이다. 배경지식, 관심분야, 자기욕망, 독서습관 등에 따라 또 현재 당면 과제와 자기 아픔에 따라 읽히는 책도 필요한 책도 다르다. 나의 좋음이 남의 좋음과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
p105
취향을 만드는 일은 탈취향을 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 말이다.
p106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둔,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만 돌리면 들어오는 광고가 정보를 제공해주는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래도 먹고사는 건 바쁘고 문화생활은 해야겠으니 가까운 데에, 익숙한 것에 손이 간다. 영화는 흥행 영화로 책은 베스트셀러로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일찍이 일침을 가했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어. 상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는 거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어."
대다수 사람들이 보는 책, 인구의 사분의 일이 선택하는 영화라는게 얼마나 자기모순적인가.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경제의 법칙이다.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모든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건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다.
p107
고유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적 서정이 높아지고, 타자를 이해하는 감수성이 길러지지 않을까. 그러면 온갖 끔찍하고 야만적인 갑질 사건이 잦아드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p115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p116
사람이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제도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축적된 정보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슬프게도 한 인간의 우주가 미디어를 통해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 상식, 통념이라 부르는 가치 체계는 워낙 당대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 알려고 해야 한다. 언론매체에서 떠드는 상식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 TV에서 커트된 무수한 삶을 '감히 알려고' 하는 자가 작가다.
P118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작가는 그것을 촉발해야 한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내가 쓴 글이 숨 막히는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막을 옥토로 만들 물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왜라고 묻는 글,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하도록 등 떠미는 글, 도덕 위에서 춤추도록 깨달음의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글, 모든 글(책)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P124
글쓰기는 이미 정해진 상식, 이미 드러난 세계의 받아쓰기가 아니라 자기의 입장에서 구성한 상식, 내가 본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갈, 그 사람만 쓸 수 있는 고유한 글이 나온다.
P127
김기덕의 영화나 디앤 아버스의 사진처러 좋은 작품은 물음을 던진다. 자기 시대가 떠받드는 가치 체계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서 자기 삶을 ,주변 사람을, 이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철학자도 마찬가지. 철학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려고 하는 것이라고 푸코는 말했다.
P128
작가든 기자든 글 쓰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대상에서 비범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 안목,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에세이, 칼럼, 논문 등 모든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질문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문제의식이 없는 글은 요란한 빈수레와 다름엇다. 메시지가 없는 미사여구의 나열은 공허하다. 지식은 넘치고 지혜가 빈곤한 글은 무료하다. 전문적 지식과 현란한 수사로 빼곡하지만 정작 다 읽고 나도 필자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글은 일간지에서도 눈에 띈다. 이는 독백이다. 글이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는 대화와 소통 수단이어야 한다. 울림이 없는 글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어야 좋은 글이다. 그러니 글쓰기 전에 스스로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두툼한 책이든 한 페이지 글이든 한 줄로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글에 대한 예의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요약하면 이것이다. '관습적 해석에 저항하는 글을 재미있게 쓰자.'
P131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것은 창작자의 임무이다. 창작 분야 종사자 중 '대체 가능한 존재'는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아니어도 남이 할 수 있으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나만 쓸 수 있어야 한다. 박완서의 글은 김훈이 흉내 낼 수 없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고 했다. 내가 글을 쓸 때 꼭 염두에 두는 말이고 학인들에게도 자주 당부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P132
이 세상에 컵 자체는 없다. 노란 컵, 플라스틱 컵, 종이컵, 깨진 컵만 있을 뿐이다.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만이 존재한다. 내가 만약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보편적 관섬을 변화시키고, 알고 있는 것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내 진짜 느낌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글을 참신하게 한다. 어떤 글이 읽힌다면, 독자의 눈길을 붙들었다면 그것은 진부하지 않다는 뜻이다.
P135
글에는 적어도 세 가지 중 하나는 담겨야 한다. 인식적 가치, 정서적 가치, 미적 가치. 곧 새로운 지식을 주거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거나 감정을 건드리거나
P136
사는 이유가 별거 없듯 대수롭지 않은 소소한 이유이다. 그런데 그 별거 없는 삶, 시시한 욕망을 밀도 있게 찬찬히 담아내면 특별한 글, 진솔한 글이 된다.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나는 왜 언제부터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갖게 되었는지, 일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일에 대한 환상이 어떤 지점에서 깨졌는지, 이 일을 계속 할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P137
사회적으로 소위 '성공'한 이들의 정보는 차고 넘치는 반면, 영화 스태프나 장애인 야학교사나 비전향 장기수, 경비원 등 수입이 높지 않은 이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집단적으로 무시한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제의식이란 거창하지도 까다롭지도 않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의문이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놓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세상의 풍경들. 예를 들면 엄마가 매일 일어나 밥하는 일, 마트 종업원이 기계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일, 괜히 싫은 감정이 드는 것 등 상황과 감정에 집중하고 관찰하고 질문하는 일이다.
P141
어떤 완벽한 인격체라는 뜻이 아니라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도와 모험을 행하는 자가 채택하는 삶의 원리와 태도가 위버멘쉬라고
P143
자기 욕망과 능력을 알아가면서 자기만의 행복을 만들어가기보다 행복이라고 이미 규정된 사회적 모델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 크나큼 피로가 덮친다. 그런 의욕-하기, 곧 노예적 의욕 하기라면 아주 멀리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무작정 행복만 원하지, 정작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는 것이다. 랭보의 시구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환, 나의 벌레였다." 행복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행복만을 바랄 때 벌레처럼 삶을 파먹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P144
(장정일) "학교에서 세상을 배우고 있을 때 /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P149
끊어치기가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며 하는 말이, 같이 일하는 동료가 공문을 작성했는데 문장이 길게 늘어져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단다. 끊어쳐서 다시 써보라고 충고했더니 한결 낫더라는 것이다. 끊어쳐라. 단문을 써라. 간결한 문장을 써라. 한 문장에 한 가지 사실만 담아라. 일문일사. 거의 같은 의미, 다른 표현이다.
P151
주어와 동사는 연인이다. 가까이 있게 하라, 는 말이 있다. 문장이 길수록 주술 관계가 어긋나기 쉽다. 문장이 간소해야 내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갔는지, 빠진 부분은 무엇인지, 부연할 요소는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P152
"지금은 삶이 내것인지 두렵다" "사람을 만날수록 외로워졌다" 같은 경우처럼 "~했다""~이다"라는 문장이 잇달아 나오는 글은 흐름이 탁탁 끊겨 이야기가 흩어진다. 복잡한 문장과 마찬가지로 앙상한 문장도 메시지 수용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P153
문장이 길든 짧든 나는 이런 글이 좋다. 사유가 촘촘해서 문장이 흐름을 타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며 인식의 틀을 흔들어 놓은 글. 하나의 메시지나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라도 남으면 그건 좋은 글이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단문쓰기가 글쓰기를 여는 문이다.
p154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지 않은 것에 사랑을 느끼는 법이 없다. 모든 사랑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출발한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나온구절이다.
p155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어록이다.
p156
"모방은 물듦이다. 진정한 모방의 힘은 충실하고 충실해서 마침내 그 모방을 뚫어내는 길 속에 있다. 그러나 착실하게 모방의 길을 걸어 보지 못한 자라면 냉소마저 허영일 뿐이다. 가령 프로이트에 충실한 라캉의 생산성이 그러하고 라캉에 충실한 지젝의 생산성이 그러하지 않던가."
p159
글쓰기는 파편처럼 흩어진 정보와 감정에 일종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주제'를 부각하는 행위다. 단계가 있다. 마음에 걸리는 것 일단 쓰기, 어지러운 생각들을 자유롭게 마구잡이로 풀어놓는다. 그리고 편집하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판단해서 덜어내고 보완한다. 행동 표정 대화를 떠올리고 그대로 묘사하여 글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차분히 앉아서 하나씩 써나가는 거다. 내가 쓰고자 하는 화제에 대한 사전적이고 교훈적인 정의를 내리기, 가령 여자에게 커피심부름 시키지 맙시다가 아니라 '나에게 그 화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나의 경험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글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p162
필자의 개성과 글의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으며, 신문 사설용 언어와 차별성도 없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어라'는 내러티브 제1원칙에 해당하는 말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갈 수 있는 좋은 팁이다.
p164
내 글을 들려주고 싶은 구체적 대상을 정하고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살아있는 이야기가 풀려 나온다.
p165
버스나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사연이 재미있는 이유는 반대다. 깨알 같은 상황 묘사와 인물묘사와 대사가 살아 있어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다.
p166
글을 쓰면서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다. 내 글이 누구에게 가닿길 바라는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먼저 걸어가고 느낀 자로서 무슨 이야기를 건넬까. 그런 물음에 대한 응답 장치가 사진 한 장 붙여놓고 글을 쓰는 일이다. 좋은 사연을 들려주고 좋은 음악을 틀어주는 디제이처럼 글쓰기도 나와 닮은 영혼에 말 걸고 위로를 건네는 일이다.
p171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고 했다.
p173
내가 편했다면 남이 힘들었단 뜻인데 몰랐다. 삶이란 누군가의 노동에 빚지고 살아가는 것이구나 싶고, 아무튼 그날 하루 내가 의젓해지는 기분이었다.
p174
계몽, 공 도덕적 마무리는 위험하다. 상황을 단순화 시켜버린다. 감정을 평준화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깨소금을 치듯 글도 기어코 '교훈'으로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 하루도 참 알차게 보냈다. 오늘도 참 재미있었다. 같은 '그림일기형' 엔딩 처리인데 글이 식상해지는 지름길이다. 기껏 자기 경험과 생각에 근거해 잘 써놓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글이 평범해진다.
p176
글은 삶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것이 글 쓰는 사람에게는 좌절의 지점이기도 하고 희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p180
르포르나주는 기록이라는 뜻의 불어다. 구체적인 현장에서 구체적인 사람과 대면하며 쓰는 기록 문학을 뜻한다. 사실에 근거한 취재에 배경지식과 비판의식을 더한 글이다. 그런 점에서 르포르타주는 글쓰기의 한 장르가 아니라 글쓰기의 기본 준칙이자 윤리에 가깝게 느껴졌다. 현장, 사람, 기록, 이것은 늘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세 가지가 아닌가
p183
조지 오웰은 "글쓰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의 주제, 곧 마땅히 표현해야 될 바를 표현하는 일인데 그건 경험하지 않으면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오웰은 또한 표현의 방식과 스타일 등 넓은 의미의 작품성은 그 다음에 따라오며 그건 고통스러운 반복작업과 훈련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p199
한 사람의 독특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를 가늠한다. 직업과 취향, 인생관을 파악한다. 긍정적으로 사는지, 부정적으로 사는지를 단어와 말투로 짐작한다. 그러니 어떤 단어를 주로 쓰는지, 욕설을 자주 하는지, 간결한 화법을 좋아하는지, 말끝마다 부연설명을 붙이는지, 심지어 문법적으로 수동형을 좋아하는지, 능동형을 좋아하는지, 사투리를 쓰는지, 말끝을 흐리는지 그대로 전하는 게 좋다. 또한 무의식적인 몸짓과 행동마저도 성격을 보여주는 단서다. 말을 하면서 헛기침을 해대는지, 여럿이 걸을 때 앞서 걷는지. 뒤로 처지는지, 아시다시피나 사실, 가령 같이 자주 사용하는 말버릇이 있는지 그러한 디테일을 살리면 글의 생생함을 더할 수 있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유쾌한 농담에서 진지한 토론까지 하나도 놓칠 게 없다.
p205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느낀다. 가장 큰 가난은 관계의 빈곤이다. 관계가 줄어들면 자아도 쪼그라들고 관계가 끊어지면 자아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