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부모님의 하나 둘 늘어나는 주름에 변화를 실감합니다.
하지만 공간 속의 삶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넓게는 지금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 아시아라는 대륙,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좁게는 집 앞의 거리를 거닐며, 출퇴근 길의 도로를 이용하고, 집 안의 작은 서재와 침실에 이르기까지,
1초, 2초 시간이 끊임없이 지나가듯, 우리도 끊임없이 어떤 공간 속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 속의 삶에 익숙한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10년 후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면서,
하루를 24칸으로 나눈 다이어리에 일정을 체크하고, 일을 하면서도 업무 속도를 개선하기 위해 이런 저런 고민을 합니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는 공간에 대해서 어떤 고민을 할까요?
별다른 생각없이 지나던 길을 다니고, 타던 버스를 타고, 익숙한 풍경을 지나서 집과 회사를 오갑니다.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는 별 다른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주 동안에 공간이라는 것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정착할 공간을 찾으려고 이곳 저곳을 알아보았지요.
저 역시 많은 사람들처럼 수많은 네모진 박스의 한 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런 저런 고민을 합니다.
주변에 쇼핑몰이 가깝고, 공원이 있으며, 학군이 좋고,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통도 편리하다고 추천하는 아파트가 있습니다.
반면에 중심가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주거용으로 지어진 곳이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시설을 이용하려면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 하는 곳입니다.
그 접근성이라는 요소가 네모난 콘크리트 아파트의 작은 한 칸을,
평범한 직장인이 20~30년에 걸쳐서도 사기 힘든 공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와 도시와 동네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 참여시 '어디에 사는 누구'라는 자기 소개가 그걸 말해준다. 이방인은 자리만 바꾸지 않고 자신의 특성까지 바꾼다. 공간은 인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 인간을 변화시킨다.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공간과 분리된 채 자신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본질을 획득" 한다.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p144)
사람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시간은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가지만, 공간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마다 지금 현재도 각기 다른 공간에 있지요.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에서 인상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화가 나혜석에 대한 부분입니다.
제가 사는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 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 거리의 중심에는 나혜석의 동상이 있지요.
하지만 그녀가 화가였다는 사실 말고는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습니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로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공(空)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사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의해 희생된 자 이었더니라" - 나혜석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p171)
화가인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의 신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프랑스 파리에도 다녀옵니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를 경험하고, 그 공간에 매료되었나 봅니다. 190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에는 프랑스의 문화예술인 뿐 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 제럴드 등이 머물렀던 공간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나혜석이 있었네요.
이런 그녀가 프랑스 파리라는 공간 속에서 계속 살아갔다면 분명 다른 삶을 살았겠지요.
공간은 이렇게 사람들을 다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공간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공간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공간이 사람들에게 똑같이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 공간 속에서 얼마나 자기가 느끼고, 그 공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느냐가 중요하지요.
보잘 것 없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위대함 속에서 보잘 것 없음을 찾아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크고 화려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허풍과 허세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스쳐지나가는 작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들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눈도 가지고 있다.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p43)
저도 무언가 새로운 시야를 얻고 싶습니다.
낭만의 도시 프랑스도 가보고,
드높은 마천루를 자랑하는 뉴욕 거리도 걸어보고 싶습니다.
원시림이 살아 있는 아마존 유역도 가보고 싶고,
고대 도시의 흔적을 찾아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를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들 비슷할 겁니다. 시간이 없죠.
시간이 많으시다구요, 그럼 그 때는 돈이라는 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사는 이곳에서라도 새로운 시야를 얻어보는 수 밖에요.
저는 예전에 그냥 지나가면서 간판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메모장에 다 적어 보았습니다.
가로수가 어떤 나무인지도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은 나무가 대부분이어서 알지 못했지요.
그러던 중에 일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새롭게 생각하는 방법을 집 근처 도서관 서가를 어슬렁 거리다가 발견한 거 같습니다.
그 책은 앞서도 몇 번 언급했던 정수복 작가의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라는 책입니다.
우연히 만난 작가이고, 스쳐 지나가면서 고른 책이었는데,
알고 보니 제 서가에도 이 분의 책이 한 권 꽂혀 있네요.
바로 책 읽는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적은 『책인시공』이라는 책입니다.
이 분의 책들을 보니 '공간' 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라는 책의 뒤에 보면 아주 소중한 정보가 있습니다.
저는 이걸 노트에도 적어두고, 별도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도시를 걷는 16가지 방법> 이라는 글입니다.
각각의 방법을 소개하고, 조금 상세하게 방법을 기술해 놓았지요.
상세한 내용을 일상에서 꼭 한 번 활용해봤으면 좋겠네요. 책 한 번 꼭 읽어보세요.
여기서는 짧게 16가지 방법을 소개드립니다.
1. 도시 전체를 보여주는 큰 지도를 벽에 붙이고 매일 다닌 지역을 표시한다.
2. 편안한 보폭으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3. 도로, 자동차와 사람들의 흐름, 가로수, 건물, 상점, 간판, 신호등, 진열창 등을 찬찬히 자세하게 바라본다.
4. 밖에서 보는 건물과 들어가 본 건물은 다르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모조리 다 들어가본다.
5.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먹고 마시고 무엇 하나라도 산다.
6. 안 가본 구역, 낯설고 잘 모르는 동네를 일부러 찾아다닌다.
7. 도시의 역사, 문화에 대한 책, 여행기, 안내 책자 등을 다양하게 읽는다.
8. 책에서 알게 된 장소를 방문하여 사실을 확인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9. 때로 함께 걸을 친구를 만들어 방문한 동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걷는다. 같이 걷는 사람에 따라 새로운 것이 보인다.
10. 지름길, 정해진 길, 상투적인 행로가 아니라 자기만의 다양한 우회로를 만든다.
11. 박물관, 미술관, 식당, 영화관 등을 갈 때 그 장소만이 아니라 그 주변을 걸으며 동네 분위기를 파악하고 인접한 다른 지역과의 이음새에 주의를 기울인다.
12. 마음이 가는 장소나 재미있는 동네는 여러 번 방문한다.
13. 방문하여 걸어본 동네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사진을 찍어 노트에 메모를 남긴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본 것, 한 것, 느낀 것, 생각한 것들을 정리한다.
14. 지금 살면서 걷고 있는 도시를 자신이 잘 아는 다른 도시와 비교해 본다.
15. 자신이 쓴 도시에 대한 기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
16. 걷고 싶은 도시, 살고 싶은 동네를 만들기 위한 작은 일에 참여한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습니다. 그런 여름도 비가 내리고 다음 날은 어김없이 사라집니다.
8월의 막바지가 되면서 끝나지 않을 듯한 더위도 꼬리를 살살 내립니다.
대신에 하늘은 점점 더 드높아지고 있고, 어스름한 저녁이 조금씩 빨리 찾아오네요.
걷기 좋은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어디 한 번 걸어보시죠.
이제는 새로운 것이 보이겠죠?
(p23)
신문 칼럼을 쓰는 사회학자 세 사람의 견해를 들어보자. 먼저 송호근은 "문장은 감성의 높이와 과다를 조절하는 비행체다. 가끔은 높게 날고, 가끔은 급강하해야 할 때도 있다. 호흡조절도, 리듬과 가락도, 정서의 표출도, 이미지의 창출도 모두 문장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썼다. 김호기는 "일반 시민을 독자"로 상정하고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간결한 문체로 글을 쓰는" 대중적 글쓰기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고 김동춘은 "학자들도 때로는 언론인과 문인의 능력을 겸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p24)
지적 교류와 감정적 교류가 함께 이루어지는 관계야말로 진정 깊이 있는 인간관계이다.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관계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것이든, 아니면 단순히 스치는 만남이든, 나는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지적 교류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하는 감정적 교류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p43)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그냥 흘려보내는 작은 풍경들을 찾아내고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미세한 풍경을 발견하고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발견의 나날이다. 그들의 일상에는 권태가 없다.
보잘것없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위대함 속에서 보잘것없음을 찾아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크고 화려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허풍과 허세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스쳐지나가는 작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들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눈도 가지고 있다.
(p67)
파리의 연인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상대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사랑이라는 것이 두 사람이 하나의 존재로 결합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신을 잃지 않는다. 아니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긴다. 그러나 서울의 연인들은 두 사람이 완전한 하나가 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듯 서로의 물건을 상대방에게 믿고 맡겨 버린다.
(p70)
도시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의 형태와 색채는 일상의 미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아름다운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시는 건물과 도로, 가로수와 공원, 자동차와 광장 등 수많은 공간과 사물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색채의 조합을 통해 고유한 분위기를 만든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라는 노랫말을 현실로 만들려면 작은 디테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p102)
북촌이 관광지화되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산책은 한가한 장소에서 여유롭게 이루어져야 사유를 동반한다. 요즈음 나는 둘째, 넷째 월요일 오후에 서촌으로 산책을 간다. 국립중앙도서관이 휴관하는 날이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삼아 궁궐 북쪽에 위치한 북촌이 양반들이 사는 지역이었다면 궁궐 서편의 서촌은 중인이나 예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궁을 나온 나이든 상궁들도 살았다고 한다.
(p116)
파리에 비해 서울 시내에서는 자전거 타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이다. 그는 1896년 미국 체류를 마치고 귀국할 때 자전거 한 대를 가지고 와서 서울 거리에서 타고 다녔다. 그때 자전거는 첨단의 교통수단이었다. 함께 독립협회 운동을 하던 윤치호가 서재필에게 자전거 타기를 배운 다음 미국에 자전거를 주문해서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p132)
게오르크 짐멜은 이방인을 두고 전체를 조망하는 '조감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알프레드 슈츠는 이방인을 '또다른 잣대를 사용하는 자'들이라고 보았으며, 로버트 파크는 이방인을 '탁 트인 시야와 예리한 지성. 그리고 좀더 초연하고 합리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p137)
이방인은 '사회이론가'적 성향을 갖는다. 사회학이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상식적 이해를 넘어서 사회가 유지되고 변동하는 방식에 대한 객관적, 심층적, 체계적 이해라면 사회학자는 이방인의 시선을 가질 때 사회를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가까움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는 이방인의 존재 조건이야말로 사회이론가가 되기에 유리한 조건이다.
(p138)
사회학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며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계'를 낯설게 보는 능력을 개발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학자는 '직업적인 이방인'이다. 유대인 가운데 이론가, 특히 사회이론가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들이 오랜 기간 동안 이방인의 관점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뒤르켕, 짐멜, 비트겐슈타인,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조르주 귀르비치, 레몽 아롱, 루이스 코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어빙 고프먼, 지그문트 바우만,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은 모두 유대인 출신이다.
(p140)
걷는 사람에게 절망은 없다.
그가 정말 걷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과 말싸움을 벌이지 않고,
자신의 불은을 한탄하지 않고,
자신의 세속적 가치를 올리기 위해
뒤돌아서지 않고 계속해서 걷는다면.
- 자크 레다
(p144)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와 도시와 동네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 참여시 '어디에 사는 누구' 라는 자기소개가 그걸 말해준다. 이방인은 자리만 바꾸지 않고 자신의 특성까지 바꾼다. 공간은 인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 인간을 변화시킨다.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공간과 분리된 채 자신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본질을 획득" 한다.
(p145)
이방인이 이방의 도시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도시와 한몸이 되어야 한다. 도시공간 속을 구획하고 이어주는 대로와 골목길, 건축물과 상점 들, 수많은 자극과 소음, 색깔과 움직임, 특정한 분위기와 흔적들, 수많은 기억과 체취, 예기치 않은 타자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도시공간 속을 걸으며 이방인은 자신의 몸에 공간의 기억을 아로새긴다. 도시를 걸으며 손과 발, 눈과 귀, 피부와 코로 도시의 풍경, 소리, 냄새, 질감, 굴곡, 요철, 리듬, 온도와 습기를 감지한다. 서리의 신호등과 횡단보도, 자동차의 흐름과 엔진 소리, 소음과 휘발유 냄새, 타인의 시선과 얼굴 표정, 몸동작, 옷차림, 건물의 외양과 진열창에 전시된 물건들에 대한 감각정보를 입력한다. 도시를 걷는 일은 지도라는 추상적 개념을 감각을 통해 구체적 실체로 변형시키는 작업이다.
(p152)
우리나라의 경우 1900년에 경인선이 개통되고 1905년에는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통됨으로써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미곡, 어류, 목재 등 주요 상품이 철도를 통해 운송되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물길을 이용해 상업활동을 하던 강상과 육로를 활용하던 보부상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몰락했다. 철도 개통 이후 영등포, 대전, 조치원, 천안, 김천, 이리, 송정리, 나주, 사리원, 신갈 등은 상업이 급속히 발달했다. 한반도 전역에 철도망이 깔리면서 1920년대는 일본인과 조선인 상류층을 위한 관광산업이 생겨났다. 철도의 개통이 일으킨 변화 또한 사회학의 공간적 전환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보기가 아닐 수 없다.
(p158)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은 서울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서울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수백 개의 각기 다른 동네의 집합이고 연대다. 각기 다른 동네의 분화와 집합은 서울의 다채로운 지형과 함께 천문학적인 수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길을 만든다. 어느 누구도 다 걸어볼 수 없는 서울의 미로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서울을 만날 것이다."
(p159)
인사동 프로젝트로 널리 알려진 도시계획가 김진애는 전국을 일주하면서 22개의 동네에 대한 탐사기록을 남겼다. 서울에서는 인사동, 정동, 동대문시장, 청담동, 홍대 앞, 대학로, 미사리 카페촌, 성수동, 세운상가, 한강, 광화문 네거리와 시청 앞 광장을 답사했고 부산에서는 남포동, 민락동, 광복로, 구덕로, 영도다리, 용두산,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답사하며 그 공간들이 갖는 장소적 의미를 분석하며 살고 싶은 도시, 정붙일 동네 만들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p161)
공간의 정치경제학자 조명래는 같은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공간 속에서 사람은 공간 형성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공간을 구성하는 객체이기도 하다. 공간은 사람의 의지와 행위로 형성된 것이지만 그 자체 안에 의미, 틀, 색상, 이미지, 시간의 요소를 갖춘 구성물로 기능하면서 그 틀에 진입하는 사람들의 행동거지와 의식을 틀 지운다."
(p168)
프랑스가 좋아 프랑스 사람이 되어 프랑스에 살다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힌 미국 출신 여성작가 거트루드 스타인도 파리 곳곳을 깊게 느끼며 걸었다. 뤽상부르 공원 가까이에 위치한 플뢰리스 거리에 있던 그녀의 집 살롱에는 피카소, 마티스, 헤밍웨이 등의 화가와 작가들이 모여 삶과 예술을 이야기했다. 파리를 걸으며 풍경을 음미할 줄 알았던 그녀는 『파리 프랑스』에서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파리는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모든 것에 천천히 적응한다. 그래서 결국 언젠가는 완전히 바뀌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다."라고 썼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파리가 사람을 "흥분시키면서도 평화로운"도시라고 썼다.
(p169)
1920년대에 들어서 식민지 도시 경성이나 식민지 본국의 도쿄를 거닐던 조선의 신여성들도 변장을 하고 궁성을 빠져나와 도시의 모든 것에 황홀해하는 왕자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작가, 화가, 무용가가 되었다. 그들은 근대 도시를 걸으며 자유를 느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했고 영감을 받았으며 그것을 작품 속에 표현했다. 그들도 조르주 상드나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기분 나는 대로 도시를 걸으며 도시의 풍경에 매료되고 우연히 다가오는 볼거리들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물고기가 바다를 헤매고 새가 하늘을 날듯이 도시를 걸었을 것이다. 무용가 최승희와 화가 나혜석은 식민지 시대에 경성과 도쿄는 물론 파리를 걸었던 신여성들이었다. 아직 여성의 삶을 옥죄는 관습의 굴레가 강하게 작동하던 조선의 여성들 가운데 식민지 치하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그들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p169)
완벽한 산보객은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엇이든 열광적으로 관찰한는 사람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군중 속에 묻혀 있는 익명의 개인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을 관찰하는 세상의 살아 있는 중심이다.
(p170)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로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공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사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의해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 나혜석
회사 내에서 좋은 글을 메일로 보내주시는 분이 계시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메일 한 통이 왔다.
'피터의 법칙' 에 대한 글이었다. '피터의 법칙', 지금까지 수많은 법칙들을 들어왔지만 이런 법칙은 처음 들어 본다.
그리고 28가지의 법칙이 나오는데, 하나 하나 읽어가는 데 혼자 감탄했다. 예측할 수 있는 항목도 있지만, 생각해보지 않은 항목도 등장한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몰스킨 노트에 '피터의 법칙' 에 대해서 하나씩 정성스럽게 적어내려 갔다. 그리고 이렇게 블로그에도 올려 본다. 이 글은 종이로 인쇄를 해서 내 책상에 붙여두어야 겠다.
김한민 감독의 『명량』 은 2014년 여름, 관객 수 1760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대한민국 영화계의 한 획을 그었다.
2014년은 유난히도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던 해였다. 무엇보다 너무나 끔찍한 참사인 세월호 침몰이 4월 16일 발생했으며, 그 사고의 현장에서 국가는 철저히 무능력했고 무책임했다. 그 이후로도 5월 전남 장성 요양병원 화재 사고, 고양터미널 화재 사고가 발생했으며, 8월 청도 오토캠핑장 사고, 10월 판교 환풍구 붕괴사고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국민들은 그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고, 정부에 대한 분노로 치달았으며, 정부는 언제나 처럼 열심히 정치(?)를 했다.
국민은 정부를 믿고 싶었는데, 믿을 수 없었다. 그 때 『명량』이라는 영화가 개봉한 것이다. 명량은 우리 역사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의미는 누구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 결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와 김명민 주연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으로 이미 문학계와 드라마를 통해서 접해온 소재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기댈 곳이 많지 않았다. 무언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을 현실에서 찾을 수 없었다. 역사 속의 영웅이 영화로 재현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댄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 두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을까? 혼자 조용히 상상 속에 빠져 본다. 내가 만약 그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그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해전 이전에 이미 19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경험에서 분명히 열악한 상황에서도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생각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은 너무나 심각했다. 원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 대패하면서 조선군의 전선과 수병들은 전멸하다시피 하고 12척의 배 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적들의 배는 20배에 달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있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어쩌면 붓을 잡는 그 순간까지 수없이 심장이 뛰었을 것이고, 포기하고 싶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강인함 만을 갖추고 있었겠는가.
이순신 장군은 진중에서 일기를 썼다. 『난중일기』에서는 전쟁을 이끄는 장수로서의 모습과 그 뒤에 드러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강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일기를 써내려가면서 스스로를 다 잡았다. 『난중일기』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고,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되었다. 2013년 6월에는 전쟁 중에 지휘관이 기록한 매우 힘든 사례라는 참고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다.
『명량』의 흥행 요소 중 하나는 훌륭한 해상 전투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 영화의 대규모의 전투신 같은 경우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대규모 전투신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극중 긴장감을 올려주며 영화의 절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조선의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 이었다. 지금까지는 이순신 장군 하면 <거북선>이 가장 먼저 떠올랐었는데, 사실 조선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전투를 위해서 만들어진 전투함으로 선체의 길이가 20~30m 에 이를 정도로 컸으며 최대 200명이 승선할 수 있었던 대형 전투함이었다.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판옥선은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들었다. 아래층의 격군은 적군의 공격과 상관없이 노를 저을 수 있었고, 2층에서는 전투에 전념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판옥선의 다른 특징은 선체가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위의 장면처럼 갑판에 나무를 걸치고 들어와 백병전을 벌이는 데 사실 판옥선은 적군보다 배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서 오르기 힘든 구조였다. 당시 조선군은 활과 화약과 같은 원거리 공격은 능했으나, 백병전에서는 일본군이 우세했다. 이런 점까지 고려된 것이 바로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은 2층의 전투병도 실내에 위치하게 만든 구조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모양은 판옥선과 동일하다. 실제 거북선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왜란 중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주력은 판옥선이었다.
『명량』은 최민식이 충무공 이순신 役 을 맡았다. 이름 석자 만으로 신뢰가 가는 배우다. 그리고 왜적으로는 류승룡이 구루지마 役, 조진웅이 와키자카 役을 맡으면서 최민식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류승룡의 연기는 흥미로웠다. 그는 이미 2011년 김한민 감독과 『최종병기 활』을 통해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그때는 청나라의 명장인 쥬신타 役을 맡았었는데, 이번에 일본의 적장 役을 맡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작품의 성격상 『최종병기 활』 만큼의 인물 중심의 내용 전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의 긴장감 높이는 압박을 경험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평소 소설을 많이 보다가 영화를 읽게 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개성있는 조연들의 짧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연기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는 이런 조연들이 빛나기 힘든데, 영화 속에서는 이들도 빛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 눈에 띄는 이는 배우 이정현이었다. 정탐꾼인 임준영 役을 맡은 진구의 아내 役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에서는 남편이 떠날 때 걱정해주는 장면, 시체들이 쏟아져들어올 때 남편이 있는지 확인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배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소리지르며 치마를 흔드는 모습이 등장했는데 그 절규와 표정에서 드러나는 간절함은 관객들의 심장을 파고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중심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정부 산하 단체였던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의 공동주관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위치의 인물 선정을 놓고 고민을 했는데, 세종로와 태평로가 뚫려 있어서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들어오게 되어 이를 막을 필요가 있다던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인 이순신 장군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위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자료를 조사할수록 어떻게 한 사람의 개인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며 수없이 질문해보았다. 우선 전세계 해전 역사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23차례의 전투 승리, 그리고 그 속에서는 명량해전과 같은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은 수많은 병사들과 지휘관 그리고 그 뒤에는 백성들이 있다. 즉,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사정을 어떻게 하나로 모으고 집중하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지휘관의 리더십이 가장 큰 성패를 이끈다.
여전히 이 사회는 믿을 수 있는, 따르고 싶은 리더십을 원한다. 누군가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충분히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부재가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아쉬움 속에 우리는 다시 그의 리더십을 찾는다.
이번에는 정말 충무공 이순신이 내 마음에 깊이 각인 된 것 같다. 그가 남긴 말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내 삶을 다잡아 본다.
#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를 돌았다.
#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느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올 전쟁터에서 열 두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들을 막았다.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말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될 때, 그리하여 한없이 처량하고 무기력해질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충고를 진심으로 따라보는 것도 좋다.
첫째, 학생으로 계속 남아 있어라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폭삭 늙기 시작한다.
둘째, 과거를 자랑하지 마라
옛날 이야기밖에 가진 것이 없을 때 당신은 처량해진다.
삶을 사는 지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셋째, 젊은 사람과 경쟁하지 마라
대신 그들의 성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과 함께 즐겨라.
넷째, 부탁받지 않은 충고는 굳이 하려고 마라.
늙은이의 기우와 잔소리로 오해받는다.
다섯째, 삶을 철학으로 대체하지 마라.
로미오가 한 말을 기억하라.
"철학이 줄리엣을 만들 수 없다면......
그런 철학은 꺼져 버려라."
여섯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겨라.
약간의 심미적 추구를 게을리 하지 마라.
그림과 음악을 사랑하고 책을 즐기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
일곱째, 늙어가는 것을 불평하지 마라.
가엾어 보인다.
몇 번 들어주다 당신을 피하기 시작할 것이다.
여덟째, 젊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다 넘겨주지 마라.
그들에게 다 주는 순간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다.
두 딸에게 배신당한 리어 왕처럼 춥고 배고픈 노년을
보내다가 분노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아홉째, 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지 마라.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인류의 역사상 어떤 예외도 없었다.
확실히 오는 것을 일부러 맞으러 갈 필요는 없다.
그때까지는 삶에 탐닉하라. 우리는 살기 위해 여기에 왔다.
감사하며 살 수 있다면 좋은 인생 아닌가. 마지막 순간에 살 한 점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닳고 닳은 뼈와 질긴 가죽 하나 달랑 남기고, 새털처럼 가볍게, 바람에 날리듯, 편안한 비행을 할 수 있다면 참 괜찮은 인생 아닌가. 먼 길을 가야 하는 저승사자도 그 가벼움에 짐을 덜어 고마워할 것이다.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는 즉위 초반까지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낸 임금이었다. 어머니가 천한 신분 출신이었던 까닭에 주위의 무시를 받으며 성장하였고 본의 아니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에 휩싸이는 바람에 왕위를 올라서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영조는 매사에 조심하였으며 의뢰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종의 강박증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한결같이 탕평을 외쳤지만 근본적으로 노론의 지지 속에 즉위한 왕이라는 정치적 부담이 있었다.
이러한 영조가 첫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사도세자는 더 없이 귀한 아들이었다. 영조는 당연히 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세자는 성격부터 영조의 마음에 차지 못하였다. 세자는 말이 없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여 성격이 세심하고 민첩했던 영조를 늘 답답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또 세자는 커가면서 공부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고 칼싸움이나 말타기와 같은 놀이에만 열중하여 학문에 정진해 주기를 바라는 영조의 기대를 저버렸다. 영조는 자신의 기대와는 어긋나게 나가는 세자를 따뜻하게 타이르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꾸중하거나 흉을 보는 등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영조의 질책이 심해지면서 세자는 부왕에 대해 큰 공포심을 갖게 되었고 주색에 탐닉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발을 하기도 하였다. 영조가 국가에 내린 금주령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술을 마셨으며 여자를 데려다 살림을 차린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영조의 심한 질책이 내려진 것은 당연하였으며, 세자는 그런 영조의 질책에 우물로 뛰어드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맞섰다. 영조의 질책과 세자의 기행이 반복되는 가운데 20세를 넘어가면서 세자에게는 정신적 이상 증세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학증은 세자 스스로 "심화가 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과 같은 짐승을 죽이거나 하여야 마음이 풀린다"고 영조에게 고백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여러 명의 내관들과 나인들이 세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는데 어느날은 내관의 머리를 잘라 들고 들어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제대로 옷을 입지 못하는 의대증이라는 기괴한 증상도 나타났다. 옷을 한 번 입으려면 수 십 벌의 옷을 늘어놓고 귀신에게 기원하며 불을 지르는 등 이상행동을 하였으며, 옷 수발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들을 둘이나 낳은 후궁 빙애를 쳐서 죽이기까지 하였다.
세자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고 영조에게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즈음, 나경언의 고변 사건이 터졌다. 나경언이 세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을 투서하고 아울러 세자의 비행을 10여 조목을 걸쳐 나열한 것이다. 세자가 자기 대신 내관을 방에 앉혀 놓고, 20여 일 동안 평양을 몰래 다녀온 것이 발각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세자는 나경언의 고변이 무함이라며 대질까지 요구하며 극구 부인하였고, 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나경언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지만, 이 사건은 여조와 세자를 영원히 갈라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762년 윤 5월 12일 오후 세자를 창경궁 휘령전으로 나오도록 하라는 영조의 명이 떨어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세자는 혜경궁 홍씨를 둘러보고는 휘령전으로 들어갔다.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홍씨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는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동작을 취했지만 세자 시강원의 관원을 비롯한 신하들이 저지하였다. 세자는 세손과의 이별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영조는 이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부인 홍씨는 뒷 건물에서 후일의 정조가 되는 세손을 부둥켜안고 떨며 이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 날의 사건이 1762년인 임오년에 일어나 흔히 '임오화변'이라고 부른다.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은 가혹하였다. 3~4시 무렵 밧소주방의 뒤주가 들어왔는데 크기가 작아서 쓸 수가 없자, 다시 어영청에서 쓰는 큰 뒤주를 들여왔고 영조는 여기에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히게 되었고,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아들이지만 수명이 왕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던 조선왕조에서 최장수 왕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최대의 정적이기도 했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곧 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긴다는 뜻에서 '사도(思悼)' 라는 시호를 직접 지어주고 묘지문도 친히 지어 주었지만 이 일을 절대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그 만큼 이 사건은 이후의 정국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영조 후반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세력은 정조의 즉위를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위기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부친에 대한 본격적인 추승 작업을 함으로써 반대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 (여기까지의 글은 모두 『조선 후기를 움직인 사건들』 中, <1762년 사도세자의 비극>, 신병주 지음, 새문사) -
최근에 영화에 조금씩 관심을 두면서 한국 영화를 한 편씩 찾아서 보고 있다. 얼마 전에 뒤늦게 본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을 보았는데, 그 때 배우 유아인의 연기에 감탄했다. 왜 그가 앞으로 한국 영화를 이끌 배우인지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출연했던 『사도』를 보았다. 『사도』는 그의 이름 만으로 영화를 선택하게 만드는 송강호와 유아인이 영조와 사도세자 役으로 출연한 작품이다.
이미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시나리오 연습장면이 공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었다.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왕이었던 영조, 자신을 왕으로 만든 신하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영조, 귀한 아들이었기에 기대가 더 컸던 아들 그만큼 실망도 큰 아들에 영조는 분노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송강호는 그런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왕의 냉정함과 한 나라의 지존으로서의 권위감과 불안감을 여실히 표현해 주었다.
유아인은 『베테랑』에서 조태오 役을 하면서 정말 악랄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번 사도세자 役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잔인하게 만들어 버린다. 지금까지 내가 접한 작품은 『베테랑』과 『사도』 뿐이다. 여기서는 모두 악역이고 비극적인 역이다. 감정이 극한으로 몰리는 연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유아인의 다른 연기가 궁금하다. 물론 영화 外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영화를 통해서 나는 그 연기를 보고 싶다.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뒤주에서 꺼내기 전의 장면이 있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더듬으며 만진다. 그리고 이런 말을 뱉어낸다.
'아이고 이놈아, 너는 어찌 이 늙은 애비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느냐.'
마지막 뒤주 속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대화 그리고 이 장면, 그리고 염을 하는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울컥하고 만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자식을 죽일 수 밖에 없었을까? 과연 권력과 정치란 그런 것인가? 하는 물음을 끝까지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세자'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명확하지 않다. 해석에 따라서 여러 갈래의 길이 생기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도 무언가 갈등의 소지가 될 만한 장면은 되도록 만들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신 통설로 알려진 큰 줄기를 던져주고 보는 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듯 하다.
최근에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내부자들』이다. 개봉 당시 누적 관객수 7,072,057명을 기록하며 역대 관객수 36위에 오른 작품이다. 조폭, 검찰, 언론, 대기업이 어떻게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궁금한 점이 있었다. 과연 저럴까? 정말 이 사회의 최상층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과연 이 영화는 현실의 반영일까? 단지 영화일 뿐인가? 라는 의심을 놓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최근에 몇몇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내부자들의 영화 속 상황이 실제로 재현되고 있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넥슨 주식 뇌물' 진경준 검사장 해임 확정... "68년 검찰 역사상 처음 있는일" - 서울신문(2016.08.08)
김정주 "진경준이 '넥슨 주식 그냥 달라' 요구" - KBS뉴스 (2016.07.21)
김정주 불구속 기소, 검찰 넥슨 수사 본격화 - 비즈니스포스트 (2016.07.29)
게임 벤처의 신화를 만든 김정주 넥슨 창립자는 그 동안 기존의 대기업들의 부의 세습이 아닌, 벤처를 통해서 새롭게 대기업 계열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자수성가로 사람들에게 본보기였던 이 사람의 배후에는 냄새조차 숨겨왔던 권력과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검사장 진경준 이었다. 검사장은 차관급이며 '검사'라는 역할 자체가 이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번 파문은 그 충격이 더 크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문제를 만든다면 과연 그 문제는 누가 해결을 해야 한 단 말인가?
이 사건이 수면위로 올라온 것은 2016년 3월,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고위 공직자 재산현황 공개였다. 진경분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장이 156억 원으로 재산 증가액 1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가 보유하고 있던 넥슨 주식 126억 원 어치를 처분했기 때문인데 그 주식이 넥슨이 상장되기 전인 2005년에 매입됐다는 것이 논란이 되었다.
의혹이 제기되자 진경준은 사표를 제출하였고 법무부는 이것을 수리하지 않고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대기발령인 저보를 시켰고, 이금로 인천지검장을 특임검사로 지명해 '진경준 사건'을 배당, 특별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로 체포하여 7월 18일 구속한 사건이다.
조사 과정에서 주식 외에도 추가적으로 밝혀진 사항으로는 진경준이 차량 벤츠를 요구했던 점, 그의 10년 가량의 해외 가족 여행 비용을 김정주가 지불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진경준 지검장이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는 있다. 그렇다면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 그 대가로 넥슨이 받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10년에 가까운 나름의 관계를 유지해온 그들간에는 둘 만의 비밀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영화로 돌아가 보자. 그동안은 영화를 많이 보지도 못했으며, 보고 나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서 영화의 매력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니 영화라는 장르는 대단히 흥미로운 점이 많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연기자들이다. 안상구 役의 이병헌, 우장훈 役의 조승우, 이강희 役의 백윤식의 연기에는 그대로 매료되었다. 최근에 이병헌의 작품을 몇 번 보고나서 느낀 점은 그의 눈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병헌의 눈으로 보여주는 연기는 대단히 탁월하고 저음의 목소리 또한 배역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조승우는 뮤지컬로 유명한 배우이다. 사실 나는 그의 뮤지컬을 한 편도 보지 못했고, 그의 영화 작품도 이번이 첫번째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건 조승우가 연기를 잘해서 그런건지 몰라도 대단히 차갑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부드럽다가 냉정해질 때는 눈빛이 바뀌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영화에서는 시나리오의 진행에 따른 흐름을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각 개성있는 연기자들의 모습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면서 더 풍부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이 평소 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대단히 큰 차이점으로 보였다. 실제 인물이 눈물을 흘릴 때의 모습, 땀이 나고 눈물 콧물이 섞이고, 눈에는 그 감정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연기 이런 연기를 보는 맛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영화와 소설의 다른 점이자, 영화를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은 바로 조연들의 연기이다. 소설에서도 분명히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이 있고, 그들은 그들만의 개성을 표출해낸다. 하지만 쉽게 두각을 나타낼 수가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다른 듯 하다. 영화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이다. 관객들에게 시각적, 청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을 만들어낸다면 보는 이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다.
이번에는 '조상무' 役을 맡은 조우진 이라는 배우가 몇 번의 장면만으로 선명한 씬 스틸러가 되었다.
미래자동차의 조상무는 철저한 오회장의 심복이다. 그는 미래자동차 내의 어둠의 해결사다.
"청소를 시켰으면 청소만 해주면 되지 쓰레기를 훔칠라 카노?"
영화의 주요 장면인 안상구의 손을 자르는 장면에서는
"어이 안상구 사장, 사장 사장 해주니까 다 똑같은 사장으로 보이요? 사이즈가 다르잖아"
안상구의 심복이었던 박종팔 사장을 처리하려고 했을 때는
"여 써리고, 또 여 써리고 ...... 복사뼈 위를 써리야 안되겠나"
이런 몇 마디는 대단히 소름 끼친다. 만약 조폭의 모습으로 그렇게 했다면 이정도 인상은 주지 못했을 것이다. 까끔한 정장 차림에, 단정한 모습, 무테 안경을 끼고 직접 이런 걸 지시하고 행하는 모습은 낯설어서 그런지 몰라도 더 깊게 다가온다. 아마 지금 세상에는 이런 잔인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겉으로는 번지르 하지만 뒤에 숨어서 저지르는 그런 모습들, 그래서 더 역겹다.
영화에서는 이병헌의 재미있는 대사가 나온다. 그리고 이 대사는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 이세진이 잘 살려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줬다. "모히또 가가지고 몰디브나 한잔 할라니까" 언뜻 들으면 자연스러운 말 같지만, 다 듣고 나면 이상한 말,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이 대사는 사실 이병헌이 현장에서 애드리브로 한 대사라고 한다.
영화의 대사를 이렇게 잘 활용하면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개그맨 이세진 처럼 좋은 기회의 발판이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반대로 사용한 사람도 있다.
영화에 논설주간 이강희 役을 맡은 백윤식이 한 대사가 있다. "대중은 개 돼지 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이 영화 속의 대사는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기분이 상당히 나쁜 대사였다. 그런데 정말 이런 말을 입에 담은 사람이 있다.
나향욱 교육부 정책 기획관이다. 교육부 정책 기획관이면 2급 공무원이고, 우리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부의 고위 관리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민중은 개, 돼지다.", "개 돼지로 보고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발언을 했다. '영화 대사를 그렇게 사용하시면 안됩니다.' 몇 번을 봐도 화가 난다. 저 한 사람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교육부에 대해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올바른 사람을 뽑길 바란다. 내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대한민국 교육을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는 현실에 밀접하게 다가가 있는 영화를 봐와서 그런지 몰라도 영화의 사회에 대한 이런 직격타가 반갑다. 이런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 중에 아마 가슴이 따끔거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올바른 길로 선회하시길 바란다.
저술 활동과 강의 등 일 외에 나는 매년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여 3개월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2004년에는 명나라 시대의 중국 미술에 몰두했다. 일본에 관해서는 수묵화를 소장할 정도로 잘 알면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친 중국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3년마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천천히 주의깊게 읽는 것' 같은 일이다. 이는 몇 년 전에 끝마친 일인데, 나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발자크의 대표작인 《인간희극》 시리즈에 몰두했다. 나는 대학교수 혹은 컨설턴트로 불리고, 때로는 경영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경영학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기본은 문필가다. (p15)
한 때 경영자 혹은 직장인, 경영학을 배우는 사람들의 책꽂이에 이 분의 책 한 권 꽂혀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경영학의 아버지' 라 불리며 현대 경영학을 이끌었던 '피터 드러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칭했던 경영학자, 교수로 스스로를 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문필가라 한다. '문필가 피터드러커', 이런 모습이 더 매력있게 다가온다.
『나의 이력서』는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과 같은 책이다. 그의 경영 관련 책은 몇 권 보았지만 실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생소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듯이 그의 삶의 궤적을 차근 차근 따라가며 읽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누군가 뚜렷한 롤모델이 있으면 좋겠지만, 한 사람의 모든 모습을 닮고 싶은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본받고 싶은 부분을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조각으로 가져온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는 책 속의 인물 속에서도 그 조각들을 찾아내곤 한다. 이번에는 문필가 피터 드러커로부터 조금 큰 조각을 발견했다.
예전에 <어느 95세 노인의 수기> 라는 글을 다른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실력을 인정받았고 존경받았습니다.
그 덕에 63세 때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지금 아흔 다섯 번째 생일에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 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30년의 시간은 지금 내 나이 95세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나길 시간입니다.
그때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 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에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항상 망설이고, 시작하기에는 늦었다라고 스스로 핑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그만두어야 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생각 속에서만 머무르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려고 했다. 그러던 중에 '피터 드러커'의 지난 삶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2004년에 명나라 미술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피터드러커는 1909년 11월 19일에 태어나서 2005년 11월 11일에 삶을 정리했다. 그러니 2004년 그가 명나라 미술을 공부를 한 시기는 그의 나이 96세였다.
피터 드러커는 책 속에서 여러 번 일본 미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1930년대 중반의 런던시대, 토요일에 오전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번화가인 피카데리 서커스 앞에서 갑자기 폭우를 만났다. 가까운 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자니 그곳에서는 영국 최초의 일본 회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그림에 금새 매료되었고 그후 줄곧 일본화 중독 상태로 머물러 있다. (P173)
그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섰다. 자신이 직접 미술 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1986년에는 일본에서 자신의 소장품을 '수묵화 명작전'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5년간 일본 미술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가 문제로 부각되면서 '인생 이모작' 에 대한 말이 많이 들린다. 그런데 이모작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나뉘어 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분명 무너지게 되어 있다. 피터 드러커는 자신의 본업이 아닌 일본 미술에 매료되어 강의까지 하게 되었다. 이 정도까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매년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여 3개월 간 집중적으로 공부, 그리고 3년 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이 부분은 조금 신중해서 접근해서 실제로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염두해 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기는 분야에 대해서 정리해두면서 분야를 확장하고, 그 중 조금 더 깊이 관심이 생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3년이라는 기간을 투자해서 집중적으로 파고 든다. 그렇게 1년의 사이클이 수십번 돌고, 3년의 사이클이 돌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통찰' 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을까.
이제 정말 그의 이력서를 펴쳐봐야겠다. 『나의 이력서』의 첫 페이지 서문을 보면 통해 간단히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10대 후반 부터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이력을 살펴보면, 글을 쓰는 문필가의 삶과 경영/경제를 이어주는 직업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업에 자문을 해주는 역할을 해 온다.
문필가의 인생 자체가 주목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단지 저작물이 주목받을 뿐이다. 이는 문필가로서의 내 인생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내가 여러 나라에 살았고 다양한 직업에 종사해 왔다는 면에서 보면 내 인생이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1927년에 그곳을 떠나왔다. 그 후 독일, 영국, 미국으로 이주해서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무역상사의 견습사무원(1927~1928), 증권회사 직원(1929), 경제 및 해외뉴스 담당 신문기자(1930~1933), 펀드 매니저(1934~1936)로도 일했다. 또한 여러 영국 일간지의 미국 주재기자(1937~1939)를 역임했고, 대학교수(1939~1991)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P5)
피터 드러커는 그 자신의 한 분야에 획을 그은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그의 이력의 주변에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마치 영화 속에 유명한 배우들이 카메오로 나오듯이 이 책 속에서도 피터 드러커와 연결된 인물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피터 드러커의 유년기는 특별했다. 당시는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였다. 그의 아버지는 외무성의 장관이었는데 일주일에 수차례씩 홈파티를 열었고, 매주 월요일에는 아버지의 주최로 '정치의 밤'이 열려 정치가나 은행가, 학자들이 모였고, 수요일에는 어머니의 주최로 '의학과 정신분석의 밤'이 열렸다.
그의 부모님은 정신분석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오랫동안 교우를 했다. 그리고 집에 자주 찾아온 손님 중에는 조지프 슘페터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와같은 경제학자 외에도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된 토마시 마사리크도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친구분이 개최한 살롱파티에도 가면서 토마스 만을 만나기도 했다.
피터 드러커는 1939년에 그의 처녀작인 『경제인의 종말』을 출간한다. 그리고 곧 영국의 고급 신문이었던 『런던 타임스』에 하나의 서평이 등장합니다. 서평은 이렇게 적혀있었다. '드러커 씨는 이 사람의 일이라면 뭐든지 용납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문필가의 한 사람이다. 확고한 신념을 지님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발상을 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재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서평은 1년 후에 영국의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의 서평이었다.
마지막으로 '경영 컨설팅', '경영 컨설턴트' 라는 말의 탄생 배경을 알아보자. 이제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피터드러커가 GE과 함께 일할 때 생겨나게 된다.
GE는 특별했다. '경영컨설턴트'의 탄생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GE에서 분권화 등의 조직 개혁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은 부사장인 헤럴드 스미디 였다. 그는 컨설팅회사인 부즈앨련 앤 해밀턴 출신으로 나를 GE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그는 개혁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대량의 보고서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내게 집필과 편집 작업을 위임했다.
어떤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제언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부서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를 고민하다 나와 스미디가 함께 고안한 명칭이 '경영컨설턴트부'였다. 당시는 컨설팅업계가 요람기에 있었던 시대였으며 이것은 새로운 이름이었다.
여기에 근대적인 경영컨설턴트업의 창시자인 마빈 바우어와의 접점이 있다. 2003년 99세의 나이로 타계한 그는 맥킨지를 세계적인 컨설팅회사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나는 바우어와 친한 사이였다. 5~6년 동안 매주 토요일 오전 중에 매킨지로 가 컨설팅업에 관해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맥킨지의 최고경영자가 된 1950년에는 "우리 회사에 오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혼자서 일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협력을 했다.
바우어가 '맥킨지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라고 상담을 청해 왔을 때이다. 나느 주저하지 않고 경영컨설턴트라고 제안했고 그는 그것을 수용했다. 경영컨설턴트라는 말은 스미디와 나를 통해 생겨나 맥킨지에 적용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P152)
『피터드러커 나의 이력서』에서 경영에 관련된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책의 저자를 먼저 알고 나서 그가 어떤 배경에서 성장해왔으며,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은 그의 저작들을 읽을 때 분명히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피터 드러커의 저작을 읽고 싶은 사람들은 먼저 이 책을 펼쳐보기 바란다. 자연스럽게 그가 어떻게 글을 썼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두 문장으로 이 글을 마친다.
드러커 박사는 우리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어떤 인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 (P190)
p53
함부르크에서 사는 동안 나는 의외로 충샐했다. 학생이었으므로 영화관의 무료 입장권을 얻을 수 있어서 일 주일에 세 번은 무성영화를 즐겼다. 게다가 편리하게도 사무실 건너편에 공립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독일어나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나는 그곳에서 진짜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p94
1959년에 일본에 초대되었을 때도 방일의 최대 이유는 일본화 감상이었다. 그 때부터 무로마치, 에도시대를 중심으로 일본 고대미술 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일본에서 자신의 소장품을 '수묵화 명작전'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미술에 관해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5년간 강의하기도 했다.
p102
1938년에 완성한 처녀작 《경제인의 종말》을 출간해 줄 출판사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 책은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를 지킨다고 하는 명확한 목적을 지닌 정치서적으로 결론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치스는 유대인의 말살을 단행할 것이고 더욱이 소련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이기 때문에 양자가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p103
《경제인의 종말》은 이듬해인 1939년 봄에 간행되었고, 곧 영국의 고급 신문인 <런던 타임스>에 서평이 등장했다 .예전부터 존경하던 윈스턴 처칠이 서평을 썼는데 그가 영국 수상에 취임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드러커 씨는 이 사람의 일이라면 뭐든지 용납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문필가의 한 사람이다. 확고한 신념을 지님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극적인 발상을 하도록 만들어버리는 재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서평을 보며 나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서평 덕분이었는지 《경제인의 종말》은 영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엇다. 한편 간행 후 반년이 지나 독일과 소련을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고 곧바로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p105
<타임>은 전국적인 여론 형성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또한 해외뉴스 편집자라는 자리는 젊은 기자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대공황 시대임에도 급여가 상당히 높았다. 반면 나는 29세로 수입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시험삼아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p113
드러커 박사는 <포춘>의 기념호를 편집하기 훨씬 전, 자신이 유럽에 있던 때에 왓슨 씨와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1950년대에는 왓슨의 뒤를 이어 IBM의 총수가 된 왓슨의 아들 토마스 왓슨 주니어의 컨설팅 업부도 맡았다고 한다. IBM의 창업자들과는 오랫동안 교류하게 된 드러커 박사는 자신도 IBM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드러커 박사가 후일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지식노동자', '노동력은 비용이 아니라 자원' 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도 오랫동안 IBM을 관찰했던 것과 관계가 있다.
P115
공산주의자의 적으로 간주되어 주간지 <타임>에 취직하는 것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프리랜서 문필가로서는 마침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잡지사와의 미팅을 위해 뉴욕이나 필라델피아로 다니는 것은 피곤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자극이 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에는 컨설턴트로서 육군성의 일도 맡고 있었다.
P117
원래 그는 대기업의 조직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흥미를 갖고 있는 출판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영에 관한 책이 실질적으로 전혀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18개월에 걸쳐 GM을 철저히 조사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경영 권위자로서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P138
베닝턴 대학은 시골에 있는 조그만 대학이었다. 그렇지만 권위있는 대학이었으며 의도적으로 대규모화를 피하고 있었다. 드러커 박사에 따르면 학생 수의 상한선을 325명으로 하고, 50명의 교수를 확보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대규모 대학보다 높이고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의 교수진은 대부분 기라성 같은 사람이었다. 저명한 모던댄스의 마사 그레이엄,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 건축가인 리하르트 노이트라 등이 있어서 지적인 자극은 부족하지 않았다.
P140
1946년 간행된 《기업의 개념》으로 인해 '분권제' 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분권제란 실질적으로 실본이나 유럽의 사업부제와 같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조사 당사자였던 GM에서는 거부 당했다. 그러나 다른 대기업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GM과의 경쟁에서 져 위기에 처해 있었던 포드자동차를 들 수 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경영 조직을 GM 식 분권제에 바탕을 둔 조직으로 재편성한 최초의 대기업이었다.
당시 포드는 열로한 창업자 헨리 포드의 대를 이어 손자인 헨리 포드 2세가 20대 후반의 나이로 사장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드에서는 경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GM의 간부들을 스카웃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회장으로 초빙되었는데 출판된 지 얼마되지 않은 《기업의 개념》을 포드 재건 교과서로 지정했다.
마찬가지로 경영 부진에 빠져있던 제너럴 일렉트릭도 1950년 GM식 분권제를 도입했다. 역시 《기업의 개념》을 교과서로 삼았고, 나와 컨설팅 계약도 맺었다. 참고로 이때 만든 사내 팀에서 함께 일한 젊은이 두 사람은 후일 모두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P152
한편 GE는 특별했다. '경영컨설턴트'의 탄생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GE에서 분권화 등의 조직 개혁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은 부사장인 헤럴드 스미디 였다. 그는 컨설팅회사인 부즈앨련 앤 해밀턴 출신으로 나를 GE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그는 개혁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대량의 보고서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내게 집필과 편집 작업을 위임했다.
어떤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제언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부서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를 고민하다 나와 스미디가 함께 고안한 명칭이 '경영컨설턴트부'였다. 당시는 컨설팅업계가 요람기에 있었던 시대였으며 이것은 새로운 이름이었다.
여기에 근대적인 경영컨설턴트업의 창시자인 마빈 바우어와의 접점이 있다. 2003년 99세의 나이로 타계한 그는 맥킨지를 세계적인 컨설팅회사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나는 바우어와 친한 사이였다. 5~6년 동안 매주 토요일 오전 중에 매킨지로 가 컨설팅업에 관해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맥킨지의 최고경영자가 된 1950년에는 "우리 회사에 오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혼자서 일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협력을 했다.
바우어가 '맥킨지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라고 상담을 청해 왔을 때이다. 나느 주저하지 않고 경영컨설턴트라고 제안했고 그는 그것을 수용했다. 경영컨설턴트라는 말은 스미디와 나를 통해 생겨나 맥킨지에 적용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P155
1954년 GE등의 컨설팅 경험을 토대로 《경영의 실제》를 출판했다. 30여 권이나 되는 나의 자작 가운데 금자탑으로 자리매김한 책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책으로 인해 '매니지먼트를 발명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P159
나는 뉴욕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매니지먼트학과를 창설하고 학부장에 취임하게 됐다. 정식 과목으로 매니지먼트를 가르치는 대학으로는 하버드 대학, MIT에 이어 세계 세 번째였다. 나는 그곳에서 1971년에 클레어몬트 대학으로 이적할 때 까지 22년간 교단에 섰다. 뉴욕 대학에서 강의하게 된 후 경영대학원에서 경영자 양성을 위한 매니지먼트 학과가 큼 붐을 이루게 된다.
MBA가 대량 생산되는 시대가 막을 올리려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P162
드러커는 경영대학원 내에 신설한 매니지먼트학과의 학부자응로서 학과 교수들의 인사 업무에 관해서도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 부분은 동료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거의 스스로 업무를 진행했다. 그런데 교수진의 면면을 보면 드러커 박사가 인사 업무에서 상당한 역량을 발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밍에 이어 조지프 주란도 매니지먼트학과에 초빙했던 것이다. 데밍과 주란은 품질관리의 세계적인 대가가 되었다.
P173
내가 일본 방문을 흔쾌히 승낙했던 이유는 사실 다른데 있었다. 바로 일본화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1930년대 중반의 런던시대, 토요일에 오전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번화가인 피카데리 서커스 앞에서 갑자기 폭우를 만났다. 가까운 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자니 그곳에서는 영국 최초의 일본 회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그림에 금새 매료되었고 그후 줄곧 일본화 중독 상태로 머물러 있다.
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앉아서 짜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에이프런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 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 두끼 먹어서 되는게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 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이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가기 위해 김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에 이른다. 이것을 넘어야 다시 이것을 벌 수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해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거다.
-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中 -
어느 순간 부터 밥벌이가 중요해졌다. 세 아이를 둔 가장이 되고 나서는 이 회사 아니더라도 갈 때는 있을 거야라는 생각은 접었다. 단순히 지금 다니는 회사를 계속 다닐 뿐이다. 무언가 큰 도전을 하기에도 겁부터 덜썩 난다.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밥벌이도 못하면 어떡하나? 그래도 지금은 밥은 벌어 먹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꿈틀거리던 복잡한 생각은 저절로 수그러들어 버린다. 그러면서 김훈 작가가 말하는 '밥벌이의 지겨움' 이 짙게 깔려버린다. 그렇게 끼니를 떼우는 정도로 그치는 밥을 먹는다. 그렇게 밥벌이를 한다. 그리고 집에서 차가운 맥주 한 잔으로 자신을 위로한다. 더 이상도 없다. 내일 또 밥벌이를 하러 나가야 하지 않는가?
이게 삶이다. 왜 이렇게 자신이 없느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지겨움이 몰려오는 것은 막을 수 가 없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그 지겨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