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잘못하면 내 생각에서 벗어나거나 조금이라도 다른 것들을 전혀 표용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다양한 나무가 자란 숲'을 키운 사람은
그 안에 괴테라는 나무도 가지를 뻗고 도스토옙스키 나무, 플라톤 나무도 자라고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와 기독교가 함께 살 수도 있다.
물론 전공이나 취향에 따라 숲의 기반이 되는 주종은 있겠지만
그 외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많이 자라
내면에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하나의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내면에 다양한 나무가 자란 숲을 키운 사람은
자신과 다른 생각도 진지하게 듣고
'그런 사고방식도 있구나. 지금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나와는 다른 생각도 있구나' 하고
자신을 더욱 확대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공부로 받아들인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니체였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생각의 틀을 여러 개 꺼내보면서 이리저리 비교해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애쓴다.
한 분야의 전문가이면서도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겠는가?
- 내가 공부하는 이유 中 -
우리의 목표는 그런 의미의 성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공부를 통해 혼란과 위기가 수시로 등장하는 인생에서 흔들리지 않을 내공을 갖는 것이다.
사람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기억을 조작하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지를 간과한다면 매번 예상치 못한 엉뚱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사소한 실수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회사의 존폐를 좌우할 수 있는 위험한 결정을 내리게 될 수 도 있고, 사람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교육자이자 시인인 사이토 기하쿠는 '공부의 기본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계속 깨뜨려 나가는 것' 이라고 했다. 진정한 공부란 내가 맞다고 의심없이 믿어 온 것이 정말 맞는지를 따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인류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공자와 소크라테스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게 진실임이 확실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공부를 시작했다.
당신이 어떤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 있다면 더더욱 공부를 가까이하길 바란다. 당신이 어떤 실수를 저지를 때 옆에서 정확하게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뿐 더러, 나는 그 누구보다 경험이 많고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을 경계하고 싶을 때 공부는 겸손한 학생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내가 지금 최선의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답은 없을까'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현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유지하는 게 아니라 뒤처지는 것이다. 하던 대로만 해도 중간은 갈 거라는 생각은 크나큰 착각이다.
어떤 기자가 어떻게 그 많은 역의 노래를 외우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너무 많은 역할과 나라를 넘나들며 공연해야 해서 늘 공불르 하고 있다. 주로 비행기 안에서 악보를 읽으며 공부하고 휴가 중일 때도 악보를 펼쳐 놓는다. 공연장에서도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문제점을 고쳐 더 좋은 노래를 하려고 한다."
세상에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없다. 만약 반복된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정형화된 일상에 새로운 변화를 불어놓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배울 것은 반드시 있으며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렸다.
성장하고 싶다면 지금 공부를 시작하라.
"내가 아는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고등학교 때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때와 똑같은 생각, 똑같은 가치관, 똑같은 답, 똑같은 감성과 시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까요. 사실상 전혀 변하지 않았죠."
안주하고 싶어질수록 과감하게 떨쳐 일어나 성장을 위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자기의 분야는 물론이고 관련 업계, 사회의 상황 등 다양한 환경을 종합적으로 읽어 내고 다른 업계의 전문가들과 영역을 넘나들며 협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수 있다.
한 분야에만 능통하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 외의 분야에는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전문가바보' 가 되어 편협한 생각만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세계관이 하나인 사람은 세상을 하나의 방향으로만 이해한다. 그런데 잘못하면 내 생각에서 벗어나거나 조금이라도 다른 것들을 전혀 포용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다양한 나무가 자란 숲'을 키운 사람은 그 안에 괴테라는 나무도 가지를 뻗고 있고 도스토옙스키 나무, 플라톤 나무도 자라고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함께 살 수도 있다. 물론 전공이나 취향에 따라 숲의 기반이 되는 주종은 있겠지만 그 외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많이 자라 내면에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하나의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내면에 다양한 나무가 자란 숲을 키운 사람은 자신과 다른 생각도 진지하게 듣고 '그런 사고방식도 있구나. 지금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나와는 다른 생각도 있구나' 하고 자신을 더욱 확대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공부로 받아들인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니체였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라는 식으로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생각의 틀을 여러 개 꺼내 보면서 이리저리 비교해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애쓴다. 한 분야의 전문가이면서도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겠는가?
'낯설게 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인생의 큰 사건들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반복되는 일상에 충격을 주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낯설게 보기'가 아무 때나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후회 없이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묻는다는 게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나도 모르게 허투루 써 버리고 엉뚱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가 나중에서야 진정으로 내가 원했던 삶을 살지 못했다며 후회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을 낯설게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스스로 내 인생의 의미를 묻고 후회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공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란 문학, 철학, 사학, 물리학, 수학, 음악, 미술 등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학문을 업으로 삼는 연구자나 교수 같은 사람들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공부를 하라는 게 아니다. 공부의 수준과 목표는 각자 자유롭게 정해도 되고, 단지 교양을 쌓는 정도의 공부여도 좋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후회막급으로 여겨질 때가 참으로 많다. 흔들리지 않을 인생의 방향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경영을 할 때 늘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여 그 가설이 맞는지 검증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은 수정을 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공부를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 새로운 사고법을 익히게 된다는 것은 내가 쓸 수 있는 도구가 많아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도 수학이나 과학을 자유롭게 공부해서, 거기에서 배운 사고법을 토대로 더욱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여러 개의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만 가지고 있을 때보다 다각적인 면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창의적인 해결법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의식적으로 내가 자주 사용하는 사고법, 내가 자신 있는 전문 분야와는 동떨어진 분야를 공부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2008년 6월 도쿄아키하바라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갑자기 한 트럭이 돌진해 행인을 치고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흉기로 주변에 있던 사람을 마구 찔러 죽인 것이다. 무려 7명이 죽고 10명이 다친 무차별적 살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벌인 범인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생활고로 시달리던 25살의 젊은이였다. 그는 범행을 저지르기 전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글을 여러 번 올렸으며 범행을 일으킨날에도 아키하바라에서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죽일 것인지를 예고하는 글을 남겼다.
얼 쇼리스는 노숙자, 매춘부, 범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기술도 아니고, 문학과 역사를 배운다는 게 새로운 인생을 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사비를 털어 교수들을 초청했고 노숙자와 약물중독자 등 31명의 학생을 모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읽었을 때 학생들은 가족과 전통이 국가의 법과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이해했다"고 말한다. 처음 1년코스가 끝났을 때 31명 중 17명이 수료증을 받았고 나중에 이들 중 2명은 치과의사가 전과자였던 여성은 약물중독자 재활셑너의 상담실장이 되었다.
2009년에 한 소녀가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화제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디자 윌리엄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집이 없는 홈리스였고,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홈리스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학교를 12번이나 옮기고, 6학년은 건너뛰고 8학년은 다니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홈리스 센터에 머무르는 동안은 학교에 갈 수 있어서 새벽에 일어나 냄새가 나지 않는 옷을 입고 학교에 갔고, 모자라는 잠은 버스 안에서 보충했다. "집도 없는 주제에 무슨 공부냐" 라는 주변의 빈정거림과 핀잔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4~5권 책을 읽는 노력 끝에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심지어 하버드대학의 입학 허가까지 받았다.
공자는 자신을 성장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나, 어떤 사람에게나, 어떤 학문이나 배울 것이 있을 테니 공부의 대상을 한정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안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바람직한 면은 본받아 내 것으로 만들고, 바람직하지 않은 면이 있다면 그것을 경계하여 자신의 잘못을 고쳐 나가면 되니 나에게 의미있는 배움이 될 수 있다.
공자가 제자에게 가르쳐 준 세 가지 공부 원칙
1. 스스로 공부하라
2. 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라
3.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마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대인600만 명을 학살하도록 지휘한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는가?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체포되어 재판이 부쳐졌는데 자신의 행동은 "단지 명령에 따른 것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가 학살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그 일을 자처하지도 않았으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성실한 관료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잘못이 없는 것일까?
그의 잘못은 이것이다. '생각하지 않은 것'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당신은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지혜롭거나 똑똑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나은 점이 있다면 적어도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른다'는 자각이야말로 생각하고 배우는 일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다 알고 있다고 속이지 마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하고 여기까지는 알지만 그 이상은 모르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라."
"지금 이 생각이 정말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야 '자신의 생각'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게 정말 당신의 생각인가?"라고 근거를 파헤쳐야 자신이 기존의 생각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리란 무엇인가' 혹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단지 아무런 의심없이 일상적으로 믿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따져 보고 철학적인 차원으로 다시 생각해 보도록 이끌어 준 것이 전부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배움을 바탕으로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처럼 철학자가 되어 '더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르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를 평생 고민하며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어떨까? 내가 해야 할 일과 이루고 싶은 목표 사이에서 정신없이 살다 보면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따라가게 된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처럼 잠깐씩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하루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소크라테스처럼 생각해보자.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니, 그래서 결론이 뭐야?"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일반적인 대화 양상에 비추어 보면 결론 없이 대화가 끝나 버렸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아포리아'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었다. 즉 우리가 무심코 말하는 생각,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답을 찾든 못 찾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면서 답을 구하려는 '의지'가 더해졌을 때 거기에서부터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다고 보았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게 배움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한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하지만 자네의 이야기하는 태도는 참으로 훌륭했네"라는 말로 의지를 북돋아 주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기를 독려했다.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인 내용에 대해 '과연 그럴까?', '왜 그럴까?' 라는 질문을 한 번씩 던져 보라.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틀에 박힌 사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오늘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라고 한다. 학교에서도 좋은 질문을 하는 학생이 훌륭한 학생으로 평가받고, 학급의 리더가 된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토론과 질문으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며 공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생각하는 법과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유대인이 지혜로운 민족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토론은 누구에게 열려 있는 평등한 활동이다.
이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한다.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먼저 공부 습관부터 들여 놓자. 밥을 먹고 난 뒤에 이를 닦는 것처럼 공부가 자연스러운 습관이 될 때까지 조금만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 두면 그 뒤로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먼저 움직인다.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 빌 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고,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책 읽는 습관이다"라는말을 했다. 그의 '도서관 사랑'은 심지어 시애틀 교외에 있는 저택 안에 개인 도서관을 만들게 했다. 이 저택은 1,000평이 넘는 부지에 세워졌으며 체육관, 수영장, 개인용 극장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여기에 1만 4,000여 권 이상의 책을 보관할 수 있는 개인 도서관을 지은 것이다. 그는 평소 주중에는 매일 1시간, 주말에는 3~4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다고 한다.
책을 읽을 때 겸허함을 갖는 것도 좋지만 동시에 '인을 실천할 때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 역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요한 가치를 실천하거나 진리를 탐구할 때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눈치를 보며 우대하거나 양보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렇게 비판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가 틀릴 수 있다고는 해도 우리보다 해당 분야에 대해 더 많이 공부했고, 깊이 생각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도전하는 자세,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망설이지 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고전을 읽어보자. 아마 그 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저 사람이 말한 영화를 한번 봐야겠다' 거나 '지금 얘기에 나온 책을 다시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지적 자극을 주는 사람이었으며, 그와 나는 창조성이 싹튼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를 만나든, 내가 상대방에게 혹은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지적 자극을 줄 수 있을지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면 대화의 양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 나는 이런 방법을 쓴다. 강연을 듣는 동안 간단하게 필기를 하면서 질문거리를 따로 적어둔다. 그리고 중요도에 따라,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정도에 따라 1부터 3까지 번호를 매겨 둔다. 이렇게 구별을 해 놓으면 강연이 끝난 직후 중요한 질문부터 차례대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혼자 공부를 할 때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은 혼자서 공부를 할 때 굉장히 도움이 된다. 어떤 질문을 던질까 고민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내용이 정리되고, 전체를 보면서 핵심을 한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여러 각도에서 내용을 점검할 수 있다. 즉, 질문은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사고 과정이다. 오늘 계획했던 공부를 다 마쳤을 때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고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시도해 보라. 요점 정리를 하는 것보다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질문을 던져도 될까' 하는 생각에 멈칫하게 된다면 아인슈타인이 남긴 이 말을 잊지 않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공부를 하고 어떤 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맥락을 몰라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나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부분이 보이니 그것을 찾아가는 재미가 점점 커진다. 소설을 읽든, 영화를 보든, 음악을 듣든 마찬가지다. 영화에 숨겨진 상징이나 감독 특유의 기법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똑같은 영화를 봐도 감동과 재미가 다르다. 그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난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공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공부 일기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하루 일정을 적는 스케줄 수첩이든 평범한 노트든 하나를 정해 날짜를 적고 오늘 공부한 것에 대해 3줄 정도로 아주 간단하게 적는다.
첫째, 내가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작은 성과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공부 일기가 한두 달 쌓였을 때 지난 일기들을 쭉 보면 내 공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으며 하다못해 영화 한 편을 본 뒤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 매일 똑같아 보이는 일상에 즐거움이 생겨난다.
공부 일기는 곧 매일 찾아낸 새로운 즐거움을 적은 일기와 같다.
내 삶이 특별한 일도 없이 반복되는 줄 알았는데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뿌듯하지 않겠는가.
삶이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사람에게 의욕을 북돋워 주는 데 공부 일기만큼 빠르고 유용한 약은 없을 것이다.
흔히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을 눈을 돌리면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내 공부와 결합시켰을 때 그 공부는 내 인생을 위한 나만의 공부가 되며 배움의 영역을 무한다로 넓힐 수 있다. 취업이나 시험을 위해서가 아닌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터키어를 공부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제자의 공부가 절대 헛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생의 깊이를 더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