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앉아서 짜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에이프런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 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 두끼 먹어서 되는게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 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이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가기 위해 김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에 이른다. 이것을 넘어야 다시 이것을 벌 수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해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거다.


-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中 -



어느 순간 부터 밥벌이가 중요해졌다. 세 아이를 둔 가장이 되고 나서는 이 회사 아니더라도 갈 때는 있을 거야라는 생각은 접었다. 단순히 지금 다니는 회사를 계속 다닐 뿐이다. 무언가 큰 도전을 하기에도 겁부터 덜썩 난다.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밥벌이도 못하면 어떡하나? 그래도 지금은 밥은 벌어 먹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꿈틀거리던 복잡한 생각은 저절로 수그러들어 버린다. 그러면서 김훈 작가가 말하는 '밥벌이의 지겨움' 이 짙게 깔려버린다. 그렇게 끼니를 떼우는 정도로 그치는 밥을 먹는다. 그렇게 밥벌이를 한다. 그리고 집에서 차가운 맥주 한 잔으로 자신을 위로한다. 더 이상도 없다. 내일 또 밥벌이를 하러 나가야 하지 않는가?


이게 삶이다. 왜 이렇게 자신이 없느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지겨움이 몰려오는 것은 막을 수 가 없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그 지겨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