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모두 알베르 카뮈로 부터 비롯되었다. 그와 관련된 것은 조금이라도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에 그가 태어난 '알제리' 에 관심이 생겼다. 카뮈의 작품 『이방인』은 알제, 『페스트』는 오랑이라는 지중해를 마주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가 태어난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과 자연을 그의 작품에 표현해왔다. 그런데 분명히 우리는 알베르 카뮈를 프랑스 작가로 알고 있다. 알제리와 프랑스의 관계, 그리고 카뮈와 알제리의 편치 않은 관계를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제목인 '알제리 전투'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낯설은 알제리라는 나라가 익숙하게 다가온다.


영화, 《알제리 전투》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의 투쟁사를 다룬다. 알제리는 1962년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하는데 그 후 4년 후인 1966년 9월 8일 이 작품이 이탈리아에서 개봉된다. 지나간 기억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시의 시대를 옮긴 작품이라 그 의미는 더 크지 않을까.



■ 알제리-프랑스의 관계


이 영화를 보기 몇 주 전에 한국영화인 《밀정》을 보았다. 마지막 장면은 일제강점기 의열단 단원이 자전거에 폭탄을 싣고 총독부로 향한다. 그들은 그 폭탄을 상해에서부터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여러 명에서 나누어 들여온다. 이 장면이 생각난 이유는 《알제리 전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평소에 히잡을 하고 다니는 알제리 여성들은  히잡을 벗고 화장을 하고 옷을 신경써서 입는다. 그리고 각자 가방에 폭탄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넣고 프랑스 군인들의 눈을 피해 폭탄을 제조하는 사람에게 건넨다. 그 사람은 세 명의 여성에게 받은 재료들로 폭탄을 만들고, 그녀들은 각자 프랑스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들로 떠난다.


▲ 영화장면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정복의 중심을 알제리로 삼았다. 알제리를 북아프리카의 지리적 요충지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의 서단과 동단을 철도로 잇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결국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 북부의 지중해 바르바리 해적소탕을 명분으로 공격을 가해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후 알제리에서는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프랑스 정부의 강압과 회유를 통해 식민지는 유지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수많은 식민지들이 해방되면서 알제리 역시 독립에 대한 갈망은 커져 간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은 항복을 선언한다.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들은 알제리 독립의 목소리를 내던 비무장 시위대와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프랑스 민병대가 시위대에 사격을 하고,  12살이었던 소년 사르 알 부지도가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하면서 알제리인들은 격분하면서 충돌이 격해진다. 프랑스군은 이 상황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무차별 공격에 나서고 알제리인들의 저항운동도 거세진다. 이때 약 1만명의 알제리인들이 학살되었다. (알제리측 추산 4만여명) 하지만 다른 많은 식민지 국가들처럼 1945년에 알제리가 독립하지는 못했다.


그들의 저항운동은 지속되었고 1954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 전을 벌인다. 영화, 《알제리 전투》도 그 게릴라전투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 영화장면


알제리와 프랑스와의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수십만명에 이르는 알제리인과 6천에 이르는 프랑스계들이 사망하고, 어마어마한 병력인 67만 명을 투입한 프랑스 군에서도 9만여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프랑스 여론도 나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1962년 프랑스의 드골 정부와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에 세가지 제안(1.프랑스의 한 주가 되어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음, 2.프랑스의 자치공화국인 됨, 3.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가 됨)을 하였고 알제리인들은 독립을 선택한 것이었다. 


■ 피에 누아르 그리고 아르키(harki)


피에 누아르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럽계 사람들로 알제리 독립 당시까지 약 100만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00년이 넘게 알제리에서 살다보니 프랑스에는 낯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알제리에서 그 전 처럼 살기는 힘들어졌다. 그래서 프랑스로 간 이들도 많았으나 프랑스에서도 이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 양쪽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바로 이런 피에 누아르였다. 그는 알제리와 프랑스를 오가며 살았으며, 프랑스에서 문학적 성과를 이루며 정착해 살아갔다. 그는 알제리 출신이었지만, 프랑스-스페인계 백인 혈통이었다. 이런 그는 알제리의 독립보다는 프랑스 연합 내에서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쪽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카뮈는 알제리의 태양을 기억하지만, 알제리인들에게는 카뮈는 침략자들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알제리에 카뮈가 살던 집들은 거의 부숴지거나 그의 문학기념비도 온전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알제리의 태양과 지중해의 파도들은 작품 속에서는 빛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알제리의 태양과 파도는 카뮈라는 이름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아르키는 알제리계 보조병으로서 프랑스편에 서서 싸운 이들이다. 우리로 치면 친일파와 같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독립이 되자 매국노가 되었고, 알제리 전역에서는 청산 작업이 벌어진다. 아르키들은 광장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고,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죽기 전에 프랑스로 부터 받은 훈장을 삼켜야 했다. 그렇게 청산된 사람들의 수는 3만~8만명에 이른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언제나 끔찍한 일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가 독립 이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6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 때의 재산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볼 때면, 그때의 청산 작업이 아쉬울 뿐이다. 당시 일부 아르키들은 프랑스로 갈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지금의 프랑스 축구 영웅인 지네딘 지단의 아버지였다는 말이 있기도 했다.


120년 가량의 식민지배와 투쟁 그리고 그로 인해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남아있는 갈등의 잔재는 너무나 깊이 남아버렸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지리적, 인구구성적인 조건은 무시되고 마치 긴 자로 그은 듯이 직선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민족 분쟁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피에 누아르 같은 이들은 그들의 선택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그곳에 태어난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프랑스, 내 기억 속에는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 남은 나라이다. 직접 프랑스 파리와 리옹을 여행하기도 했으며, 자유와 박애를 상징하는 나라,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나라라는 기억은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면에 그들은 일제가 우리에게 가했던 수많은 학살과 고문, 강간을 저지른 것처럼 그들의 식민지에 수많은 상처를 남겨 놓았고, 지금도 여전히 깊이 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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