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라즐로 네메스 / 헝가리

출연 : 사울 역 (게자 뢰리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다. 최근에 한참 동안 '팔레스타인'에 대한 책을 읽었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었다.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과 고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들의 행위에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이들의 어떻게 신이 선택한 민족이란 말인가? 라고 뱉어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대한 지원과 원조라는 든든한 보호막으로 지금의 행위들을 용인받아 왔다. 또한 그들에게는 민족의 역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자신들은 언제나 박해받아왔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무려 600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마치 동물들이 살처분 되듯이 무차별하게 학살받아온 기억을 몸과 마음의 구석구석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져 놓았을 수도 있다.


지금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모습들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우슈비츠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내릴 수 밖에는 없다. 인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사울의 아들』은 존더 코만도(Sonderkommando)를 처음 다룬 영화라고 한다. '존더 코만도' 그들은 강제 수용소 내에서 특수 수용자 집단을 지칭하던 용어로 "비밀운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학살될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가스실로 유도한다. 그리고 샤워를 하는 것이라며 말한다. 문이 닫힌다. 그리고 가스가 새어나온다. 사람들이 벗어 놓은 옷에서 시계, 반지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서 감독관에게 바친다. 문이 열린다. 수많은 사람들은 샤워실 아니 가스실 내에 모두 알몸인채 서로 뒤엉켜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다시 그 시체들을 소각장에서 불태운다. 그리고 가스실에 있는 수많은 죽음의 흔적들을 고개를 숙여가며 원래의 상태로 청소를 한다.


다른 장소에는 어떤 일들이 있을까? 노역자들은 사람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소각하는 소각장과 시체 소각장의 불을 태우기 위해 석탄을 나른다. 시체 소각장에서 나온 뼛가루를 마치 모래인 양 강가로 버린다. 이런 일이 수 없이 반복된다. 정말 잔인하다. 거의 모든 학살을 독일인들은 유대인 동료들의 손으로 직접 하도록 만든 것이다. 거친 욕을 내뱉을 수 밖에 없다.


『사울의 아들』은 존더 코만더 일원이었던 사울이 어느 날 가스실에서 한 아이가 숨진 것을 본 후의 이야기다. 사울은 말한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작품이 끝날 때 까지 정말 그 아이가 사울의 아들이라는 것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사울의 동료 중 한명은 사울에게 너는 아들이 없다 라고 계속 추궁한다. 그 아이는 아들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사울은 그 아이는 자신의 아들이라며, 다른 사람들이 소각장 속에서 불태워지듯이 보낼 수 없다고 한다. 그는 그 아이의 시체를 몰래 감춰두고, 랍비를 찾아 나선다. 이유는 아이를 소각장이 아닌 땅 속에 묻으려고 했던 것이고, 랍비는 유대인들의 장래절차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전개 된다.


그 아이가 아들이었는가 아니었는가? 그것이 궁금한 이유가 있다. 만약에 아들이었다면 엄청난 환경 속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키려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작품을 관통한다. 하지만 만약 아들이 아니었다면 인간에 대한 인간의 마지막 배려, 판도라 상자의 마지막 남은 희망을 어쩌면 인간의 모습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들 임이 명확하지가 않자, 그 두 가지를 모두 보는 이에게 전달 할 수 있었다. 그 부분이 어쩌면 이 작품의 압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아직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면서 눈에 띄는 두 가지 부분이 있었다. 두 가지인 동시에 하나일 수도 있겠다. 작품을 보면 끔찍한 장면이 곳곳에 나타난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부분을 선명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주로 사울을 중심으로 선명한 영상을 보여주지만 그 외의 부분, 특히 끔찍한 부분에서는 흐리게 표현하면서 사람들을 배려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는 사울의 일인칭 적인 측면을 주로 부각한다. 그러기에 사울의 얼굴이 부각되는 장면이 계속 등장한다. 카메라가 사울의 정면을 끊임없이 따라가는 듯한 모습 또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너무나도 묵직하게 들어온 영화였다. 한 밤 중에 홀로 앉아 두 손으로 올려 세운 무릎을 꽉 잡고, 몸을 움츠리고 짧은 숨을 반복해서 내 쉬며 본 영화였다. 『사울의 아들』이라는 영화에 대한 깊은 인상과 동시에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 간다. 이제는 책과 함께 영화도 같은 흐름 속에 놓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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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습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무언가 갈피[각주:1]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가슴이 유난히 두근 거린다. 이럴 때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가만히 차분해질 때 까지 숨을 고를 수 밖에 없다. 생각이 많아져서이다. 그런데 그럴 때 일수록 역효과가 난다. 무언가 할 것이 많이 있는데 반대로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이런 일은 때에 따라 몇 일이 지속되며 헤어나오기 힘들 때도 있다. 이런 걸 다른 사람들은 슬럼프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살면서 염두해 두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배웠다> 라는 시에 나온 한 대목인데, 마음에 간직해 둔 글귀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것 자체는 더 이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가 중요하다.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우연의 사건을 필연의 사건으로 바꿀 수도 있다. 어떤 일이 나의 잘못에 의해서 벌어졌다면 충분하고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반대로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만큼 그 기쁨을 누려야 하는 동시에 왜 나에게 그런 긍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는지 주변을 살펴야 한다. 나의 기쁨 뒤에는 분명히 다른 이의 그림자와 아픔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해두어야 한다.


이처럼, 유난히 두근 거리는 가슴을 달래기 힘든 슬럼프가 왔다면, 일단은 천천히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아직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무언가 하고 싶은데 능력이 되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로 충돌되는 가치를 모두 지키고 싶은 것은 아닌지, 조용히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서 수 없이 부딪쳐서 나온 말 한 마디가 필요하다.


몰입이란

자신을 새로운 시점, 높은 경지로 들어올려

그곳에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연습이며

군더더기를 버리는 행위다


몰입이란

알게 모르게 편견과 고집으로 굳어버린

자신을 응시하면서 그것을 과감히 유기하는 용기다. (발췌)


이렇게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내 자신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이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나의 강점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응시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담단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시선이 아닌

새롭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진부한 사람은

자신 속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안무를 갖지 못한다. (발췌)


중요한 순간이 다가 온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분명히 자각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찾아가지만, 대부분이 여기까지이다. 나 역시 항상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다이어리에 새로운 목표를 적어내고,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려고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실천이다. 여기서는 실천을 '용기'라고 부르겠다. '용기'로 말미암아 변화가 생기고 삶이 변하게 된다. 지금까지가 어떤 순간을 준비하는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의 수많은 노력이었다면 '용기'로 그 임계점을 넘어설 수 있다. 얼음이 물로 변하고,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그 시점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의 몸에 베어 들기 시작하는 아우라'를 말한다.

'아우라'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진정성'의 표현이다.


"당신은 1년 동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고,

그 운명적인 삶을 자발적으로 실천했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 

자신만의 삶의 문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발췌)


'아우라'는 용기의 결과로 생겨난다.  우리는 '아우라'가 생겨나는 그 지점, 즉 임계점은 알지 못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때로는 지치고 지겨울 수도 있는 그 시간을 참아내는 인내의 시간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몇 발자국을 남겨두고 발 길을 돌린다. 아쉬운 순간이다. 그 시간을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가? 그 때를 위해서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단련이 필요하다. 진리는 항상 복잡하지 않고 어렵지도 않다. 어쩌면 너무 쉬워 모두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차분하고 묵묵하게 한 걸음씩 발을 내딛을 수 밖에 없다. 






  1.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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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모두 알베르 카뮈로 부터 비롯되었다. 그와 관련된 것은 조금이라도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에 그가 태어난 '알제리' 에 관심이 생겼다. 카뮈의 작품 『이방인』은 알제, 『페스트』는 오랑이라는 지중해를 마주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가 태어난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과 자연을 그의 작품에 표현해왔다. 그런데 분명히 우리는 알베르 카뮈를 프랑스 작가로 알고 있다. 알제리와 프랑스의 관계, 그리고 카뮈와 알제리의 편치 않은 관계를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제목인 '알제리 전투'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낯설은 알제리라는 나라가 익숙하게 다가온다.


영화, 《알제리 전투》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의 투쟁사를 다룬다. 알제리는 1962년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하는데 그 후 4년 후인 1966년 9월 8일 이 작품이 이탈리아에서 개봉된다. 지나간 기억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시의 시대를 옮긴 작품이라 그 의미는 더 크지 않을까.



■ 알제리-프랑스의 관계


이 영화를 보기 몇 주 전에 한국영화인 《밀정》을 보았다. 마지막 장면은 일제강점기 의열단 단원이 자전거에 폭탄을 싣고 총독부로 향한다. 그들은 그 폭탄을 상해에서부터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여러 명에서 나누어 들여온다. 이 장면이 생각난 이유는 《알제리 전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평소에 히잡을 하고 다니는 알제리 여성들은  히잡을 벗고 화장을 하고 옷을 신경써서 입는다. 그리고 각자 가방에 폭탄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넣고 프랑스 군인들의 눈을 피해 폭탄을 제조하는 사람에게 건넨다. 그 사람은 세 명의 여성에게 받은 재료들로 폭탄을 만들고, 그녀들은 각자 프랑스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들로 떠난다.


▲ 영화장면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정복의 중심을 알제리로 삼았다. 알제리를 북아프리카의 지리적 요충지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의 서단과 동단을 철도로 잇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결국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 북부의 지중해 바르바리 해적소탕을 명분으로 공격을 가해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후 알제리에서는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프랑스 정부의 강압과 회유를 통해 식민지는 유지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수많은 식민지들이 해방되면서 알제리 역시 독립에 대한 갈망은 커져 간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은 항복을 선언한다.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들은 알제리 독립의 목소리를 내던 비무장 시위대와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프랑스 민병대가 시위대에 사격을 하고,  12살이었던 소년 사르 알 부지도가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하면서 알제리인들은 격분하면서 충돌이 격해진다. 프랑스군은 이 상황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무차별 공격에 나서고 알제리인들의 저항운동도 거세진다. 이때 약 1만명의 알제리인들이 학살되었다. (알제리측 추산 4만여명) 하지만 다른 많은 식민지 국가들처럼 1945년에 알제리가 독립하지는 못했다.


그들의 저항운동은 지속되었고 1954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 전을 벌인다. 영화, 《알제리 전투》도 그 게릴라전투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 영화장면


알제리와 프랑스와의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수십만명에 이르는 알제리인과 6천에 이르는 프랑스계들이 사망하고, 어마어마한 병력인 67만 명을 투입한 프랑스 군에서도 9만여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프랑스 여론도 나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1962년 프랑스의 드골 정부와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에 세가지 제안(1.프랑스의 한 주가 되어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음, 2.프랑스의 자치공화국인 됨, 3.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가 됨)을 하였고 알제리인들은 독립을 선택한 것이었다. 


■ 피에 누아르 그리고 아르키(harki)


피에 누아르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럽계 사람들로 알제리 독립 당시까지 약 100만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00년이 넘게 알제리에서 살다보니 프랑스에는 낯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알제리에서 그 전 처럼 살기는 힘들어졌다. 그래서 프랑스로 간 이들도 많았으나 프랑스에서도 이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 양쪽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바로 이런 피에 누아르였다. 그는 알제리와 프랑스를 오가며 살았으며, 프랑스에서 문학적 성과를 이루며 정착해 살아갔다. 그는 알제리 출신이었지만, 프랑스-스페인계 백인 혈통이었다. 이런 그는 알제리의 독립보다는 프랑스 연합 내에서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쪽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카뮈는 알제리의 태양을 기억하지만, 알제리인들에게는 카뮈는 침략자들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알제리에 카뮈가 살던 집들은 거의 부숴지거나 그의 문학기념비도 온전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알제리의 태양과 지중해의 파도들은 작품 속에서는 빛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알제리의 태양과 파도는 카뮈라는 이름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아르키는 알제리계 보조병으로서 프랑스편에 서서 싸운 이들이다. 우리로 치면 친일파와 같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독립이 되자 매국노가 되었고, 알제리 전역에서는 청산 작업이 벌어진다. 아르키들은 광장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고,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죽기 전에 프랑스로 부터 받은 훈장을 삼켜야 했다. 그렇게 청산된 사람들의 수는 3만~8만명에 이른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언제나 끔찍한 일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가 독립 이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6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 때의 재산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볼 때면, 그때의 청산 작업이 아쉬울 뿐이다. 당시 일부 아르키들은 프랑스로 갈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지금의 프랑스 축구 영웅인 지네딘 지단의 아버지였다는 말이 있기도 했다.


120년 가량의 식민지배와 투쟁 그리고 그로 인해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남아있는 갈등의 잔재는 너무나 깊이 남아버렸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지리적, 인구구성적인 조건은 무시되고 마치 긴 자로 그은 듯이 직선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민족 분쟁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피에 누아르 같은 이들은 그들의 선택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그곳에 태어난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프랑스, 내 기억 속에는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 남은 나라이다. 직접 프랑스 파리와 리옹을 여행하기도 했으며, 자유와 박애를 상징하는 나라,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나라라는 기억은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면에 그들은 일제가 우리에게 가했던 수많은 학살과 고문, 강간을 저지른 것처럼 그들의 식민지에 수많은 상처를 남겨 놓았고, 지금도 여전히 깊이 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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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의 『시대를 훔친 미술』 은 '미술'과 '세계사' 두 분야의 만남이다. 

한 동안 융합(Convergence)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심리학과 문학', '고전과 경영학'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퍼져 나오는 파동의 접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솔직히 이런 종류의 책이 인상적이었던 적은 드물다. 글쓴이들은 대개 어떤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정통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맥락을 이어주는 것으로 그친다. 융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 무언가의 새로움을 기대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미술'과 '세계사' 두 분야를 각각 떼어놓고 읽어보아도 이 책의 깊이와 재미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때 융합이라는 것이 힘을 발휘한다. '세계사'는 '미술'이 만들어지게 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뒷받침해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더 많은 감상의 지점들을 제공해준다. 반대로 '미술'은 어쩌면 살짝 건조할 것 같은 '세계사'의 흐름 속의 단면을 시각적으로 제공해주면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넘겨준다.

 

중세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주요 역사적 사건과 그와 연관된 미술작품을 소개시켜주는 이 책은 다른 책에서 아직 접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숨어있어서 읽고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몇 가지 역사적 사건과 미술 작품들을 소개한다.

 

1488년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판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빠르게 인쇄되어 확산되었다. 필사본으로 책을 만들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책은 이제 부유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게대가 활자본은 필사본과 구전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미덕까지 자랑하며 동일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빠르게 집결했다. 텍스트는 혁명을 가져온다는 논리의 첫 번째 예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르네상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신앙에 대해서도 기존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p107)

 

바티칸은 개신교가 퍼져 나가는 것을 구경만 하지 않았다. 가톨릭 내부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대응한 새로운 운동을 반종교개혁이라고 한다. 교황 식스투스 5세는 반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로마를 새롭게 꾸며줄 건축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예술가들을불러 모은다. 십팔년 간의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를 통해서 가톨릭교의 개혁과 혁신을 다짐하던 시점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 덕분이었다. 개신교가 문자를 선택했다면, 가톨릭은 미술의 강력한 힘을 다시 불러냈다.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은 17세기 바로크미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권위와 영광을 드높이는 화려한 바로크미술이 꽃피게 된 것이었다. (p127)

 

▲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성 베드로의 순교」 (1601)

 

▲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성 베드로 무덤의 덮개 장식(1624)

 

바로크 양식의 회화는 명암대비가 뚜렷하다. 보는 이의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 잡아서 그림 속의 인물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바로크의 예술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얻는 성 베드로의 덮개 장식은 높이가 29미터나 되며 기둥과 덮개는 역동성을 자아낸다. 예전에 배낭여행 중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 간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덮개 장식을 보았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서 부터 압도되었던 나는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는 넋을 잃었다.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티칸의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미술을 앞세운 것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나 보다. 이제는 300년을 뛰어넘어 스페인으로 가보자.

 

▲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1937)

 

피카소는 히틀러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바스크 지역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 습격 사건을 다뤘다. 프랑코의 요청으로 1937년 4월 26일 히틀러 콘도르 군단의 비행대들이 민간인 마을을 기습하면서 감행한 융단 폭격으로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고 마을은 초토화 되었다. 이로써 공화정부군의 퇴로 차단에 성공한 프랑코는 전쟁의 승세를 잡았다. 승리의 대가로 나치는 바스크 지역의 공장과 제강소 대부분을 차지했다. (중략) 나치는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최신 무기의 성능을 아낌없이 실험했고 전쟁의 자신감을 키우며 확대해갔다. 게르니카에서 자행된 참혹한 학살은 국제적인 반파시즘 국제 여론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폈다. 프랑코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여론에 대응하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말 뒤집기에 나선다. 그들은 방어자들이 퇴각하면서 고의로 게르니카 지역을 파괴했다고 거짓 주장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전 세계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스페인에서 자행된 파시트들의 반인륜적인 행위에 분노했다. (p513)

 

『게르니카』는 피카소 생전에는 스페인에 가지 못했다. 1968년 프랑코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가져오고자 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복구될 때 까지 스페인에 자기 작품이 전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었다. 피카소는 프랑코보다 2년 먼저인 1973년에 자기 염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81년 마침내 『게르니카』는 피카소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조국 스페인에 발을 디뎠다. 이후 스페인에 영구 소장되어 타협과 대화라는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지 못해 불행에 빠졌던 역사를 환기하고 있다. (p517)

 

스페인내전은 이념의 격전지였고, 여기에는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네루다, 생텍쥐페리 등 많은 지식인들이 '국제 여단'을 만들어서 파시즘 세력에 대항하기도 했다. 여기서 이들의 작품으로 확장해보면 스페인 내전과 파시즘에 대한 이해를 더 도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위의 두 가지 사례만으로도 '미술'과 '세계사'의 훌륭한 조화, 두 파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신하며 글을 맺는다. 융합은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융합될 요소 개별적인 것들의 성숙 그것이 뒷받침되어야 새로운 빛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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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일  (0) 2016.03.03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읽고 난 다음 문득 든 생각이다.

최근에는 한참 알베르 카뮈에 빠져 있는데 『시지프 신화』의 까만 잉크를 읽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그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떠했을까 다른 블로그들을 찾아보았다. 누군가는 오전 중에 이 책을 읽고 세 번이나 눈물을 참았다고 한다. 지금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눈물을 쏟을 것 같으니 결과는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 안타까움을 충분히 달래준 이가 '밀란 쿤데라'이다. 책 날개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라는 짧은 소개 글이 적혀 있다. ' 아! 멋지지 않은가!' 어쩌면 그냥 '밀란 쿤데라 지음' 이라고 적혀 있었어도 충분한 작가 소개가 아니었을까.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알아보려고 하는 중인데, 이런! 갑자기 밀란 쿤데라가 이렇게 궁금해져 버리니 큰일이 나 버렸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책 제목은 기가 막히게 지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2년 전인가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길지 않은 소설인데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혼자 쇼파에 앉아 환호를 지를 정도였다. 그 때 기분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쿤데라에게 제대로 당했네!' 이다. 


『정체성』은 샹탈과 장마르크 두 연인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노르망디 해변가의 작은 도시의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샹탈이 먼저 도착하고, 하루가 지나 장마르크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샹탈은 해변가 근처로 산책을 하던 중 기분 좋지 않은 경험을 하고, 장마르크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장마르크는 걱정스레 그 이유를 물어보는데, 샹탈은 그 이유가 아닌데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그리고 이 말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간다. 


『정체성』의 정체성은 무언가 깊이 농축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길지 않지만 그 속에 이야기가 한 순간도 질리지 않게 꽉 들어 차 있다.

동시에 이 책의 독특한 매력인 두 주인공 샹탈과 장마르크의 사유가 깊이 새겨나온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세계관이며 동시에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내면의 감정을 쿤데라는 깊이 들여다 본다.



샹탈, 그녀는 일상 속에 있지만 자유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속에...


아들의 무덤 앞에 섰다. 그녀는 거기에 가면 항상 그에게 말을 했고 그날도 자신을 해명하고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낀 듯 아들에게 얘기했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아기를 갖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가 저지르는 바로잡을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내게서 앗아 갔지만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달았단다.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p68)


그녀는 장마르크와 만나기 전에 한 남자와 결혼을 했었고,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먼저 가슴에 묻게 되었고, 지금의 샹탈이 되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아들이 만약 살아있었더라면 아마도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누구나 결국 하나의 삶 만을 살 수 밖에 없다. 다른 삶은 정말 '만약' 이라는 세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모습들은 감춰진 채 살아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대목을 읽는데 이것만으로도 샹탈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샹탈은 유모차를 밀고 동시에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안고 가는 아빠를 유혹하는 상상을 해 본다. 부인이 쇼윈도 앞에 멈춰선 틈을 타 남편 귀에 약속 시간을 속삭여 보는 것이다. 그는 어떤 행동을 할까? (중략) 샹탈은 이런 발상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유쾌해졌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남자들이 결코 더 이상 나에게는 한눈을 팔지 않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 (p19)


그녀 앞의 남자는 거만하게 젊었고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거만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젊은 남자의 시선을 받으니 자신의 육체가 그 시선 아래 환한 세상에서 빠른 속도로 늙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p114)


그녀는 자신이 장미의 향이 되어 남자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보다 어린 장마르크와 살면서 그녀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서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이름 모를 이의 편지를 받으면서 다시 여자로서 설레이기도 하지만 분노에 차기도 한다.



장마르크, 존재와 관계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


장마르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와 관계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 


"다 용서했지.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지난번 그를 더 이상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서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당신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나는 그때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런 내가 흡족하기까지 했어. 그런데 그의 죽음이 이런 감정을 전혀 바꿔놓지 못하는 거야." (p53)


장마르크는 자기가 세계와 맺고 있는 유일한 감정적 관계가 그녀라고 생각했다. 죄수들, 박해받는 자들, 굶주린 자들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그들의 고통에 개인적으로 절실하게 감동받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그는 안다. 샹탈이 그들 입장이 되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란 중 강간당한 여자들이 있다고? 그는 강간당한 샹탈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를 무관심에서 해방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다. 그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라는 매개를 통해서일 뿐이다. (p98)


장마르크는 한 친구와 어떤 이유로 관계를 접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했지만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친구에 대한 애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형식적인 어쩌면 그보다 더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세상에서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어쩌면 샹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이가 더 적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과의 관계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을 생각해보니 전혀 그렇지 않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언젠가는 이방인 혹은 떠돌이로 떨어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학업을 포기한 것은 실패가 아니었어. 그때 내가 포기한 것, 그것은 야심이었어. 나는 어느 날 돌연 야심 없는 남자가 되었던 거고 그 바람에 나는 이 세계의 변두리에 놓인 거였어. 더욱 끔찍한 일은, 내가 그 외 다른 곳에는 있고 싶지 않았다는 거지. 거기에서 떠나고 싶지 않으니 다른 어떤 위협도 무섭지 않았어. 그러나 아무런 야심도 없이 성공하고 인정받고 싶어 안달복달하지 않으면 당신은 몰락의 문지방에 턱하니 걸터앉게 되는 거야. 나는 거기에 정착했고 사실 아주 편했지. 정착하긴 했지만 그곳은 어쩔수 없이 추락 직전의 문턱이었어.  (p95)


그는 무척 피곤했고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시작된느 것이다. 어느 날 벤치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가 해가 떨어지면 잠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느 날 떠돌이 틈에 끼이게 되어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p163)


거리에서 구걸하는 어떤 한 남자를 보면서 그는 그 사람이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자신이 비슷한 길로 갈 때의 느낌을 기억하기에 어쩌면 더 연민이 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추락 직전의 문턱에서 벗어나야 함을 또한 알기에 벤치에 누우려 했다가 허리를 세우고 다시 앉았는지도 모른다.



정체성 그리고 장자의 호접몽


어쩌면 이런 두 인물 간의 갈등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다 보면 장자의 <호접몽>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조금 뜬금 없긴 하지만, 아마도 책을 읽고 나면 생각날지도 모르기에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며 다시 한 번 감상에 젖어 본다.


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버렸더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비인지도 몰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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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

그리고 또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中 -


불안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매몰되어 버릴까봐 

답답하다. 내가 하는 일이 '밥벌이의 지겨움'으로만 남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초조하다. 언젠가 나도 교체되어 버릴 부속품으로 전락되어 버릴 수도 있을 테니

간절하다. 이 생각들에서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무언과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어쩌면 '왜?' 가 솟아오르는 지점이 아닐까.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 이게 부조리를 인식하는 접점이다.

이것에 매달리자. 이게 삶을 바꾸게 만들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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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너무 젊은데······."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또렷한 발음으로 그녀가 한 말은 이 세 마디뿐이었다. 사막처럼 희미하고 고통스럽고 억눌려 있는 수많은 문장들이 묻혀 있는 오랜 침묵이 흐른 뒤에 나온 세 마디 였다. 울 수도 없었다. 커다란 불덩이가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 저 밑바닥부터 타오르면서 눈물을 말려 버렸다. (p12)


누군가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카뮈의 마지막 날들』 입니다. "가장 잘못된 죽음의 방법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 이라고 말했던 카뮈는 1960년 마흔 일곱살의 나이에 그가 부조리하게 생각했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책으로 작가는 카뮈의 입장이 되어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아직 너무 젊은데······." 라며 안타까워 하는 이는 카뮈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열두 살 때 티푸스에 감염된 이후에 거의 벙어리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카뮈를 낳은 다음 해인 1914년에 남편을 세계1차대전에서 잃게 됩니다. 이번에는 자식을 먼저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녀가 내뱉은 세 마디는 어쩌면 아픔의 극한을 표현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카뮈는 아버지 없이 외가에서 자라게 됩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카뮈에게는 그러기에 더 특별한 어머니였습니다.


알베르는 단어들이 입에 물고 있던 조약돌의 벽을 넘어가도록 애를 쓰며 크게 낭독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돌을 내뱉어버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장 힘든 것은 돌을 통제하는 것, 혀와 돌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움직이게끔 하는 것이었다. 결핵에 걸렸을 때 나던 소리와 똑같은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아직은 분명치 않은 음절로, 어머니가 내는 그런 발음처럼 어렵사리 변해갔다. 알베르는 그 소리에 익숙해져 갔고 자기 자신이 내는 소리를 거울 삼아 어머니가 소리를 삼켜버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언어를 표현함으로써 마침내 그 소리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하고 싶을 때 조차도 어머니의 말들은 결국 체념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파도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불분명한 문장을 삼켜버리는 이 해변에서 알베르는 침묵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p46)


카뮈는 어머니가 말하는 부분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장애로 인해서 불분명한 발음을 하게 되는 것을 카뮈는 스스로 바닷가에서 조약돌들을 입에 가득 물고 말을 해봅니다. 반 친구들이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에게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는 오직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카뮈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어머니 다음으로 생각났던 분은 제르맹 선생님이었습니다. 카뮈의 할머니는 그가 상급학교 진학이 아닌 졸업장을 따면 공장의 견습생으로 일을 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공부를 시킬 여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르맹 선생님은 좋은 성적을 받아서 장학금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할머니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할머니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때 갑자기 어머니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 애 학교 갈 거예요!" 


잘못했으면 우리는 카뮈라는 작가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은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에 그의 작품과 이름을 남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카뮈가 얼마나 어머니에게 자신이 쓴 글을 보여드리고 싶었을까요. "어머니, 제가 쓴 글이에요. 사람들이 많이 읽고 좋아하는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어리광도 부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자동차 사고가 나기 전에 카뮈는 유난히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쓴 작가의 상상이겠으나, 그 당시에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 누구보다 깊게 들어주는 어머니였기에...


오늘 저녁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렸을 적 밤마다 리듬을 맞추던 어머니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악몽을 꾸고 나서 달아나버린 잠을 다시 청해야 할 때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되곤 했었다. 눈을 감고 가벼운 증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똑똑히 듣곤 했었다.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최대한 옆에 붙어 어머니와 같이 숨을 쉬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꿈을 훔쳐 자기 마음속으로 조금씩 주입시키면 나중에 소리 없는 밤에 그것들을 깨울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르네 샤르 생각이 났다. 어느날 그에게 자기와 어머니와의 이상하고도 서글픈 관계에 대해 말했더니 그가 잠시 사이를 두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그건 침묵이 아니라네." (p104)

다시 어머니의 독백으로 돌아옵니다. "아직 너무 젊은데·····." 이 부분이 왜 이렇게 아플까요. 

그녀는 얼마나 아들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어 했을까요. 아들이 쓴 글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읽고 싶었을까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알베르 카뮈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니를 남겨두고 먼저 떠났기에 더 마음이 아프네요.



『조르바 위버멘쉬를 꿈꾸다』의 카뮈

『이방인』, 알베르 카뮈

- 『페스트』 그리고 알베르 카뮈

- 알베르 카뮈, 부조리로 세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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