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감정 : '사랑' By 조르바
오늘 아침에는 걸어서 출근을 해볼까?
1시간 정도의 거리를 퇴근 시간에는 몇 번 걸어보았지만,
항상 시간에 쫓기는 아침에는 처음 걸어 본다.
거리는 버스에서 보아오던 출근 길과는 사뭇 다르다.
자전거 도로에는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등교 시간이 9시로 바뀌면서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한 시간을 걸어가면서, 저절로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간다.
회사에 거의 다다랐을 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 손에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걸어 간다.
장미꽃은 다듬어지지 않았고, 포장도 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학교 가는 길에 빨간 장미를 보고,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생각나서, 바쁘게 한 송이를 꺾어가는 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젊음과 풋풋함이 그리워지고, 부럽기도 하다.
최근에 강신주의 『감정 수업』 처럼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서 조금씩 생각해보기로 했는데,
출근 길에 본 빨간 장미 한 송이에서 '사랑' 이라는 단어로 이어졌다.
사랑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남녀 간의 사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남자와 여자는 원래 하나였는데 지금과 마찬가지로 서로 자존심을 세우고 다투어서 제우스가 나눌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제는 서로를 더 찾아 헤매이는 듯 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전에 어디선가, 어쩌면 전생에서, 또는 꿈에서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태초에 모든 인간은 등과 옆구리가 둘에, 손과 다리가 넷, 하나의 머리에 두 얼굴이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자웅동체 였다. 이 자웅동체들은 워낙 막강하고 자존심도 강해서 제우스는 이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모든 남자와 여자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반쪽과의 결합을 원하게 되었다.
- 알랭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中
어릴 때 만난 반쪽(반쪽은 정말 반쪽인지 아닌지 찾기가 쉽지 않다.) 과는 많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랑을 한다.
그래서 소중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래서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어리다'는 표현보다는 '젊다'라는 표현이 입에 달라붙는 시기가 오면,
사랑이라는 표현이 조금 다르게 다가오게 되고,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서는 배워야하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다.
(중략)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일 것이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공허할 것이다. 지식에는 여러 층이 있다. 사랑의 한 측면인 지식은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것이다. 나의 취향에 맞게 고치려는 것이 아니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어서는 안된다.
잘못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요소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올해 초 1개월 간 데이트 폭력 집중신고기간 중에 무려 1,279건의 피해가 접수되었다.
이 중 61.9%는 폭행 및 상해, 17.4%는 감금, 협박, 5.4%는 성폭력으로 신고가 되었으며 심지어 2건은 살인 및 살인미수 였다.
캠페인의 표어는 '너는 사랑이라 부르고 나는 폭력이라 부른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찾아 볼 수 없다.
데이트 폭력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고, 우리는 말 한마디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책 제목 그대로, 이제는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한 번 쯤 생각해보자.
태어날 때 부터 우리는 자식으로서 부모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어느 덧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부모가 되었다.
부모 자식 사이에는 과연 어떤 사랑의 자세가 필요할까?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 "아빠(엄마) 인생은 아빠(엄마)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야" , "내 인생에 상관하지 마" 같은 대사가 튀어 나온다.
이 말은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인생이 자식의 인생이 되기는 싶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자식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삶은 자식이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히 변해 버린다.
세상의 중심은 아이들을 향하고, 그들의 삶은 조금씩 우선 순위가 밀려간다.
어느 순간 내가 아버지가 된 다음에야 알았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태어날 때 부터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당신들에게도 엄마, 아빠라고 부르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꿈을 품고, 사랑을 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아이가 무엇인가를 했기에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로 이미 기쁘다고 전해야 한다. 이상적인 모델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그 대신 내 눈앞에 있는 아이에게서 출발해야 한다.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기준으로 현실 속의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기준으로 삼고 현실 속의 아이를 보면 그 아이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쁨이다. 그 아이의 어떤 모습이라도 좋게 보인다. 바로 그런 느낌을 아이에게 말로 전해주는 것이 용기를 주는 것이다.
"나이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아이가 몇 살이든 대등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해요. 아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칭찬하는 건 아예 그만두세요."
- 기시미 이치로,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中
아직은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육아에 대한 일이 항상 고민이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아이를 대해야 하는 방식도 동일하다.
아들러는 말한다.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고. 아이가 몇 살이든 대등하다고 한다.
이 구절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닿고 반성을 했던 부분이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내 자식이더라도 개인적인 인격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라고 강요하고, 내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님을 내가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재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진짜'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더 나아가 타자에 대한 사랑.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본능에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하기에,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금 더 대화하고, 조금 더 배워야 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로 '내 안의 감정 : 사랑' 편의 문을 닫습니다.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사랑이 다른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이 커지기 시작하면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 주고 싶은 충동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야 하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일과가 되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공간과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