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錦繡)
1. 수를 놓은 직물
2. 아름다운 직물이나 화려한 의복
3. 아름다운 단풍이나 꽃을 비유하는 말
4. 시문, 훌륭한 문장을 비유하는 말
지금껏 알지 못했던 작가의 책을 읽었습니다. 미야모토 테루라는 일본작가의 『금수』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순전히 제가 신뢰하며 듣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에 소개되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은 소설과 비소설을 번갈아가며 소개하는데,
이동진이 직접 선정하는 소설은 아직까지 읽으면서 후회가 없었던 만큼 믿고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의 번역자인 송태욱 씨의 역자 후기에도 이 책을 번역할 수 있게 한 가장 큰 힘이 『이동진의 빨간책방』 이라고 하니,
하마터면 만나지 못했을 작품을 만나게 해주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금수』 는,
한 때는 부부였지만 뜻하지 않는 사건으로 이혼하게 되고,
10년 후 우연찮게 한 케이블카에서 만난 아키와 아리마가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이야기입니다.
뜻하지 않는 사건이라 말한 것은 아키의 남편인 아리마가 어느날 한 여관에서 유카코라는 호스티스와 동반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리마의 뜻이 아닌 유카코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둘은 헤어지게 됩니다.
유카코라는 여자가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채, 어떤 일이 벌어져 거기까지 오게 됐는지도 모르는 채 헤어지게 됩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둘에게도 시간이 흘러갑니다.
아키는 모짜르트 음악을 틀어주는 카페의 노부부와 아버지를 통해서 만나게 된 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선천성 소아마비인 아들 기요타카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아리마와 헤어진 후, 다시 남편에게 마음을 쏟지 못하고 남편과 거리는 멀어집니다. 동양학 조교수인 남편은 한 여제자와로 이어집니다.
아키는 아리마 그리고 새롭게 만난 남편 모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그리고 몸이 불편한 아이를 처음에는 아리마 탓으로 돌리지만 결국은 자신의 업보라 여기고 초연히 받아들입니다.
저는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기요타카는 나와 가쓰누마 소이치로 사이에 태어난 아이다.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기요타카 같은 아이도 낳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 탓이다. 아리마 야스아키라는 남자 탓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기요타카라는 가여운 아이를 낳게 한 것이다. 저는 그때 아마 알전구의 희미한 빛 아래서 요괴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p160
내 아이는 왜 그런 불행을 짊어지고 태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왜 그 할머니에게는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었는가, 왜 그 사람은 흑인으로 태어났는가, 왜 그 사람은 일본인으로 태어났는가, 왜 뱀에게는 손발이 없는가, 왜 까마귀는 까맣고 백조는 하얀가, 왜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병에 시달리는가, 왜 어떤 사람은 아름답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추하게 태어나는가...... 기요타카라는 인간을 낳은 어머니로서 저는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합리한 불공평이나 차별의 진정한 원인을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겠지요.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당신의 편지를 보면서 저는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 할머니가 말한 이야기가 일소에 부칠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혹시 진실이라고 한다면...... (p193)
아리마는 아키와 헤어진 후 끊임없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우연히 케이블카에서 만나게 된 것도 빚에 쫓겨 헤매이다가 거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싸구려 여관의 어둠 속에 홀로 앉아있고 고양이와 쥐를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고양이와 쥐라는 존재가 모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쳐한 처지는 지금의 쥐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신이 아키와 유카코 그리고 다른 여자들에게는 고양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물 두 마리가 뒤엉켜 있는 걸 보니 죽이려는 자와 죽임을 당하려는 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다툼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허락한 사이의 장난처럼 보였습니다. 고양이는 수십 번이나 쥐를 공중으로 던져 올렸고 쥐가 움직이지 않고 옆으로 쓰러지자 오른쪽으로 굴리고 왼쪽으로 굴리며 너무나도 지루한 듯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제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을 때 고양이는 쥐의 옆구리를 물어뜯었습니다. 쥐의 몸은 살아 있는 채 조금씩 줄어 갔습니다. 머리를 뒤로 젖히거나 발을 실룩거리고 있던 쥐가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고양이는 다다미 위에 떨어져 있는 쥐의 피를 핥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미 죽은 작은 동물을 계속해서 먹어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는 쥐의 뼈까지 먹어 치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머리뼈를 으깨는 소리가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흘러나온 피를 남김없이 핥아먹은 후 앞발로 입 주위를 정성껏 손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만은 고양이의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쥐의 꼬리만이 다다미 위에 남아 있었습니다. 제 안에 이 고양이를 죽여버리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고양이에 대한 영문을 알 수 없는 증오 같은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던 것입니다. (p138)
아리마의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꼬여 가는 거 같습니다. 어느 날, 자기 앞을 지나가는 전철을 보았을 때는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무언가와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카코에 의해 동반자살이 이루어지려 했을 때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그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렇게 그 역시 고난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역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다가오는 전철을 보았을 때 앗, 전철이 온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다가온다. 이제 곧 내 앞을 맹렬한 속도로 지나갈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심장도 강하고 빨리 뛰기 시작하여 온몸의 피가 쏴 하는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습니다. 전철은 바로 근처까지 왔습니다. 저는 눈을 꼭 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전철이 지나가고, 차단기가 올라가고, 자동차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저는 옆에 있는 사람이 타고 있는 자전거 짐칸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랬던 것입니다. 다가오는 전철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나쳐 갈 때 까지의 시간 동안 제 안의 뭔가와 뭔가가 격렬하게 싸웠던 것 같습니다. (p220)
두 사람은 10년 동안의 공백을 서로 알아가고,
그 동안 그 공백이 메어지지 않아서 앙금으로 남아 있고,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부분을 열네 통의 편지로 채워갑니다.
그리고 채워짐과 동시에 서로 각자의 삶을 새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 소설은 이렇게 단순히 단편적인 주요 사건을 표현하자니 단순히 치정에 대한 이야기네 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직접 한 자 한 자 읽다보면 느낌이 상당히 다릅니다.
아키와 아리마가 서로 주고 받은 열네 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의 문체 속에서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리고 문장이 상당히 섬세하고, 뱉어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속을 후벼 파기도 합니다.
어쩌면 소설 속의 내용 중에 일부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작가의 글에 힘없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만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 감동이 사그러지는 아쉬움을 달래려 이렇게 또 다시 흔적을 남깁니다.
'미야모토 테루', 저는 또 한 분의 소중한 인연을 만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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