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장인이 될 수는 없으나 장인정신을 가질 수는 있다는 주장도 있다. 장인정신을 본받아야 그 수준에 가까워질 수 있겠지만 창조적으로 일하고 확장적으로 배우는 삶의 과정은 정신 개념만으로는 드러내기 어렵다. 장인정신은 장인성을 구현하기 위한 하위 요소이거나 다른 차원의 개념일 뿐이다. 장인은 단지 정신이나 마음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를 통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정신을 갖거나 머리로 안다'는 말은 '몸에 벤다' 거나 '손에 익다'는 말과 대척점에 있다. 장인정신은 정신이지만, 그것은 몸에 배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장인의 행위와 기술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손에 익은 것을 말한다. 결국 장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정인정신을 갖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장인성이라는 행동 습성을 형성해야 가능하다.
[ 장인성의 8요소 ]
1. 장인은 성장에 대한 의지를 가진 자다.
- 본인이 원하는 길일 수도 있고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일에 입문하게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히 입문했다고 해도 장인은 그 기회를 살려서 최고의 위치까지 이른다. 처음부터 그 일에 소명의식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인은 고된 과정일지라도 우연을 필연의 길로 만들어낼 수 있는 열의와 힘을 가지고 있다.
2. 장인은 지독한 학습자다.
-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을지라도 장인은 그 일에서 성장하기 위해 하나하나 배워 나간다. 이는 혹독한 숙련의 과정이다.
3. 장인의 일의 해방자다.
- 일을 회피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일 자체에서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일 그 자체에서 성장한다. 일의 참된 본질을 발견하고 그 일의 리듬을 자신의 리듬으로 만들어 행함으로써 일 그 자체를 해방시킨다.
4. 장인은 창조적으로 일하는 자다.
-전통을 고수하고 전승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고 확장한다. 새로운 일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일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일의 지평을 넓히고 새롭게 창조하는 힘을 발휘한다.
5. 장인은 배움을 넓히는 자다.
- 최고의 숙련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은 끊임없이 배운다. 장인에게 있어서는 일 자체가 성장의 주요한 발판이 되고 느슨하지만 열린 관계 맺음을 하면서 배운다. 일의 확장과 창조는 이런 배움의 넓힘을 통해 가능하다.
6. 여섯째, 장인은 베움을 베푸는 자다.
- 장인은 평생에 걸쳐 힘겹게 얻은 배움을 공동체와 후속 세대를 위해 기꺼이 내놓는다.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나누고 남김으로써 일의 세계를 배려한다.
7. 장인은 정상에 오른 자다.
-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숙련도와 전문성을 가진다. 그 결과 일에 있어서 큰 성과와 높은 지위로 나타난다. 장인은 정상의 기쁨과 희열을 경험한다.
8. 장인은 고원에 사는 자다.
- 정상의 맛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 맛을 보기 위해서 성상 주변의 높은 지대에 머무른다. 거기서 언제든지 정상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고원에서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즐긴다.
[왜 다시 장인인가?]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이전의 후기 산업사회와 다르기 때문이다. 산업사회가 돈, 노동, 최적화, 안전성, 확정성, 결과 책임 등을 특징으로 한다면 4차 산업혁명 사회는 열정, 자유, 창조성, 사회적 가치, 공개성, 활동성 등이 특징이다. 산업사회가 소품종 대량 생산을 바탕으로 한 최적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4차 산업 혁명 시대는 다품종 소량 생산 혹은 맞춤형 생산에 초점을 맞춘다. 소품종 대량 생산 시대에 인간은 정형화된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제 정형화된 업무는 인공지능들이 대신하게 된다. 이에 따라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다기능 기술자와 고숙련 인력의 수요가 증가하게 된다. 또한 지식정보산업화에 따라 통섭형 지식과 창조적인 인재가 요구되고 있다. 이렇게 변화한 새로운 산업사회에서의 개인과 기업, 사회는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장인을 다시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 혁신은 전통적 교육이 추구했던 목표 및 내용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연속선 위에서 새로운 능력의 훈련이 추가돼야 한다. 4차 산업으로의 전환은 2차 산업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여전히 더 많은 장인을 필요로 한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의사나 변호사를 대체한다고 걱정하집만 여전히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생체, 기게적 로봇을 만들기 위해 정밀기계와 복합 재료에 대한 고도의 기술과 장인적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는 점은 간과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여전히 장인을 키우기 위해 요구되는 각고의 노력과 훈련이 기업교육에 필수일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닌 ㅈ차 산업을 떠받들던 장인의 확장된 버전이다.
[장인이 성장하는 일터]
볼보자동차의 우데발라 공장은 장인 육성 방식으로 일을 재조직한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스웨덴 내 볼보자동차 최종 조립공장이며 전통적인 컨베이어벨트에 의한 조립선 아닌 '성찰적 생산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생산방식이 '성찰적'인 것은 작업자가 기계에 종속도ㅒ 하나의 부속품으로 기계적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체계가 인간의 사고 방식에 부합되게 설계되고, 작업자는 생산품과 작업과정을 전체성 속에서 논리적으로 성찰하며 작업하기 때문이다.
성찰적 생산방식은 컨베이어벨트가 아닌 정지된 작업대 위에서 수행되며, 이를 위해 조립 지향적 부품 분류에 따른 키트 형태로 된 부푼이 공급됐다. 총체적 학습방식을 채택했다.
한 팀이 온전히 한 대의 차량을 작업하기 위해서는 완성차 조립 과정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요구되므로 연관된 내용을 학습하는 데 필요한 보조물과 과정이 개발됐다. 우데발라 공장 설계시 인간의 사고방식을 최대한 배려해 지능적 잠재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정지된 작업대는 작업자가 차량 전체를 통찰함으로써 차량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고, 유기적 부품 구조화 방식은 부품들의 기능과 부품 간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작업자들의 학습에 유용한 기반을 제공했다.
- 슬립노모어를 본 관객들은 공통적으로 기존에 경험하지 못했던 연극의 새로운 공간과 형식에 열광한다. 전문가들은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린 펀치드렁크의 새로운 공연 형태를 '이머시브 연극'이라고 정의했다. 이머시브 연극이란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와해된 공간적 환경을 제공하고, 관객이 직접 이동하며 창의적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참여형 공연 형태"를 말한다.
-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었다. 관객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참여시킨다. 무대는 실제 한 건물의 여러 곳에서 진행이 된다. 그리고 관객들은 때로는 함께, 때로는 혼자 각각의 방으로 들어가며 연기자들은 연기를 한다. 사람들이 가는 동선에 따라 이야기의 구성 중 순서는 바뀌지만 전체를 보고난 후에는 이야기가 연결이 된다. 같은 공연을 보았지만, 사람들마다 느끼는 방식은 달라지는 것이다.
※ 차별화, 관객 친화, 창발
■ 윤종신의 음악 창작 및 유통 플랫폼 전략
└ 모차르트보다 위대한 살리에리? '전략적 인재 활용'으로 천재를 넘어서다
- 윤종신은 5집을 만들 때 유희열을 통해 익힌 공식으로 이런 변혁에도 슬기롭게 대처해왔다. 윤종신은 1996년 발매한 6집부터 최근의 '월간 윤종신'까지 하림, 이근호, 조정치, 포스티노 등의 '신예 천재'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음악 노예'로 곁에 두고 작곡과 편곡을 대거 맡기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 윤종신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4월만 제외하고 2010년 3월부터 2017년 9월까지 총 102곡의 음악(리메이크 18곡 포함)을 꾸준히 발표하며 월간 윤종신의 페이지 수를 차곡차곡 늘려왔다.
- 월간 윤종신은 어느덧 윤종신만의 플랫폼이 아니라 모든 뮤지션들의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소위 뜬다는 아티스트들은 죄다 한 번씩 거쳐 가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됐다. 월간 윤종신이 폐간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으며 세련된 음악을 대중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개방형 플랫폼'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 감성적이고 세련된 음악을 좋아하는 소비자들은 월간 윤종신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무수히 쏟아지는 애중음악의 홍수 속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부류의 음악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음악 창작 및 유통 플랫폼인 월간 윤종신을 통해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저렴한 마케팅 비용으로 본인들의 작품을 원하는 두터운 고객층에게 잘 전달할 수 있다. 월간 윤종신이 플랫폼으로서 높은 가치 창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 '월간 윤종신' 의 힘은 바로 그 꾸준함의 시간 속에서 시작된다. 분명 매달 한 곡씩 쌓여가면서 양적인 측면에서의 성장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 속에서의 질적인 측면의 자연스러운 힘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꾸준함이 지속되면서 동료 가수들과 후배 가수들이 자연스럽게 합류되고, 자연스럽게 홍보의 역할까지 이어진다. 이제는 이전보다는 적은 노력으로 더 나은 성과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플랫폼을 통해서 자원들이 모여들고 그 속에서 새로움이 창출되는 것이다. 내 삶에서도 플랫폼은 필요하다. 플랫폼을 통해서 내 삶의 정보들을 하나의 통로로 모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지식과 경험들이 쌓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경험과 지식들이 이제는 그 플랫폼이라는 것을 통해서 예전보다는 적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효과는 유지되어야 한다. 그게 힘이다. 어떻게 하면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 하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효과적/호율적으로 처리해나갈 수 있을까. 그 방법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나가자.
※ 플랫폼, 꾸준함, 협력
■ 관행 파괴한 현대무용가 안은미
└ 작품 형식, 가치관, 전통, 관객과의 소통... 모든 것을 깨고 현대 무용의 전설이 되다.
- 안은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파격적인 무용가로 꼽힌다. 그는 작품의 형식은 물론 작품 세계, 그리고 예술가와 관객이 맺는 관계까지 기존 관행을 모두 파괴하고 새로움을 시도했다. 그의 예술 활동은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고 기존에 없었던 시장을 창출해 내는 일종의 '창업가 전신'과 맞닿아 있다. 새로운 장르의 현대 무용을 끊임없이 시도했으며 글로벌 무대에서 동양인 여성 안무가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또 예술가의 근엄함과 신비주의 대신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인터뷰 등을 통해서 관객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며 현대 무용의 진입장벽을 낮췄다.
- 성공요인 분석
1)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2)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창조정신
3) 창업가 정신을 접목한 노련한 예술가
- 현대무용가 안은미를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로서의 철학과 고집을 통해 굽히지 않고 움직이는 힘이다. 분명 이렇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자기 확신과 확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어느 정도의 실력이 쌓아가면 그때 부터는 그 사람의 철학이 중요한 법이다. 이제는 실력과 철학을 모두 준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 작가와 상생 파트너십 구축한 아라리오갤러리
└ 판매하는 '딜러' 아닌 지원하는 '매니저', 전속작가제 도입해 '윈윈' 모델 구현
- 아라리오 갤러리의 성공 요인
1) 공간 브랜딩 통해 중소도시 갤러리라는 지역적 한계 극복
: 세계적인 스타 작가들의 전시회를 잇달아 개최하고 수십억 원대 조각품들로 구성된 야외 조각 공원을 운영하며 공간에 파워와 권위를 더함, 그 결과 천안이라는 중소도시에 근거지를 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갤러리로 자리매김에 성공
2) 호랑 역할 재정의 통해 작가와 갤러리 간 상생 파트너십 구축
: 단순히 작품을 판매하는 '딜러'가 아니라 작가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고 관리해주는 '매니저'역할로 갤러리 역할 재정의. 전속작가제 도입해 작가와 '함께 성장'하는 모델 구축.
- 30년 넘게 수많은 컬렉션을 해오던 김창일 회장은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외국 작가들의 작품만 수집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그는 외국 작가, 특히 유망한 신예 작가들의 경우 앞으로 스타로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아무리 창의적인 아티스트라 해도 소위 '뜰'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됐다. 그 주된 이유는 "작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를 지원해주는 시스템의 부재 때문" 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해외 아티스트들의 경우 작가마다 전속 갤러리가 붙는다. 그 덕에 작가는 작품에만 전념하고 갤러리가 나서서 각종 전시회도 기획하고, 작품도 유통시키며, 마케팅과 프로모션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엔 대부분 작품 판매를 통해 수익을 올릴 생각만 하지 체계적인 관리가 없다." 는 게 김창일 회장의 설명이다.
- 아라리오갤러리는 파워 컬렉터인 김창일 회장의 소장품과 해외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해 2002년 개관 초기 세계적인 스타 작가들의 전시회를 집중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아라리오갤러리라는 공간에 권위를 더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YBA 처럼 실험정신으로 가득한 작가들의 기획 전시회를 통해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전시회를 잇달아 개최하며 현대적이고 진취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더했다. 엄청난 거금을 들여 수집한 컬렉션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거리에 '내놓은' 것 역시 아라리오갤러리의 공간 파워를 더하는 데 플러스 요인됐다. 미술품은 소수의 상류층과 지식인들이나 즐기는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은 물론 일반 대중과의 지속적 소통이 가능한 접점을 만들어냄으로써 아라리오라는 브랜드 지속성 관점에서도 큰 도움에 됐다. 그 결과 근거지가 지방 중소도시에 있다는 지역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길러리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 시작은 김창일 회장의 컬렉션과 그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그를 통해 연결되는 네트워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전략들을 통해 아라리오갤러리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중요한 것은 매니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라도 확실하게 매니아가 되어라. 그리고 나면 그 이후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 따라오게 될 것이다.
■ 미술관의 통념 깬 프랑스 마그재단
└ "돈 말고 열정" 아티스트 놀이터로 출발, 살아 숨 쉬는 예술 플랫폼으로 우뚝 서다.
- 마그재단 미술관은 오로지 당대에 활발히 활동하던 아티스트들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한 터전, 다시 말해 그들의 영감 넘치는 놀이터로 기획되고 만들어졌다. 작가들도 직접 나섰다. 그래서 마그재단 컬렉션 중 상당수는 오로지 이 전시 공간만을 위해 창조됐다. 샤갈의 모자이크, 미로의 정원, 자코메티의 뜰, 브라크의 타일 작품이 바로 그 살아 있는 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미술관이 많지만 다수의 작가들이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동참해 미술관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낸 사례는 극히 드물다.
- 마그재단 미술관의 가치이자 성공 요인
1) 20세기 예술사를 써 내려간 보석 같은 '다국적' 작가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보통 지역 기반의 미술관은 자국 작가들을 중심으로 세워진다. 설립자 부부는 프랑스 국적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그재단 미술관의 컬렉션을 보면 작가 국적이 다양하다. 브라크나 레제 같은 프랑스 작가들도 있지만 스위스 출신인 자코메티, 러시아에서 망명한 유대인 샤갈,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 미로와 건축가 세트르, 벨기에 아티스트 폴 뷰리, 미국이 낳은 칼더 등이 있다. 유럽과 미국을 무대로 활동한 갤러리 가문답게 다국적 아티스트들로 구성한 결과, 다채로운 개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20세기 최고 작가들의 컬렉션으로 남게 됐다.
2) 단순한 자본의 힘이 아니라 아티스트들과 남다른 친분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창조적 협업의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공공이든, 사립이든 세계적인 수준의 미술관 컬렉션은 대개 꾸준한 수집의 산실이거나 아티스트들이 미술관이나 컬렉터의 의뢰를 받아 탄생한다. 그런데 마그재단의 컬렉션은 오히려 아티스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미술관 자체를 예술품으로 빚어낸 '관계의 미학'이 작용한 경우다. 메세나 활동의 전범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 가문이 20세기에 작은 규모로 환생한 하지만 보다 능동적인 협업의 예를 보는 듯하다.
3)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가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가 빼어난 한적한 마을 생폴드방스를 택함으로써 '힐링 미술관'의 본보기가 됐다. 사실 예술이란 자연을 재현하거나 모방하고, 그 위대함을 찬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만 해도 대도시가 아니라 고요한 자연 속에 '힐링' 콘셉트로 지어진 수줍급 미술관은 드물었다. 마그재단 미술관은 독일 노이스의 인셀홈브로히미술관, 덴마크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과 과 더불어 자연과 공존하고 소통하는 유럽 최고의 '힐링 뮤지엄'으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인기 관광지인 니스를 옆에 둔 지리적 이점도 있지만 사실 남프랑스는 워낙 이름있는 미술관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이라 경쟁도 만만치 않ㅅ다. 하지만 자연미를 머금은 마그재단 미술관을 보기 위해 일부러 생폴드방스를 찾는 '힐링족'이 꽤 많다.
4) 과거를 화려하게 수놓은 '올드 마스터' 들에게만 기대지 않고 현존 작가들과 꾸준히 협업함으로써 동시대 문화 플랫폼으로서의 결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애초에 문화유산이 되기를 원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술'에 초점을 맞춘 설립자 가문의 뜻을 이어가는 행보이기도 하다 .개관식 당시 앙드레 말로의 연설문 내용처럼 미술관을 지을 때 마그 부부는 단순한 저장고 처럼 예술 작품들이 박제되듯이 보관되는 게 아니라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아티스트들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역동적인 공간을 의도했기 때문이다.
- 마그재단 미술관의 시작은 마그 부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의한 작품들이었다. 마그 부부의 매니아 적인 측면이 역시 그 시작이었으며, 이를 통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무언가에 빠져들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자.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2017년 노벨문학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후보군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사람들이 예상하는 후보에게는 일부러 수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작년에는 음악가인 '밥 딜런'이 수상하면서 많은 이슈가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른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 이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수상은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많은 독자들과 작가, 평론가 들에게 인정을 받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해 "그의 소설에는 위대한 정서적인 힘이 있다." 며 "소설을 통해 세계를 연결하는 우리의 환상적 감각 아래에 있는 심연을 발견했다." 고 밝혔다고 한다.
2016년 우리나라의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 작품을 통해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그래서 맨부커상은 우리에게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가즈오 이시구로 역시 이 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9년에 발표한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작품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 『남아 있는 나날』의 원작이기도 하다. 오늘은 소설 속 이야기를 소개한다.
■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허망함, 그래도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남아 있는 나날』 은 1956년 여름, 영국의 한 저명한 저택,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살아온 스티븐스가 그의 삶에서 첫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됩니다. 집사의 역할로서 저택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사람을 보러간다는 마음과 동시에 젊은 날 떠나보냈던 켄턴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지금까지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기도 하며 지나간 사랑을 깨닫기도 한다.
스티븐슨의 직업은 '집사'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스티븐슨의 '집사'라는 직업의 사명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달링컨 경을 모시면서 그의 저택을 관리하는 일에 삶을 바칩니다. 그 중에서도 달링턴 홀에서 개최될 회담을 위해 방문하는 귀한 손님들을 위한 접대와 연회준비는 단연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스티븐슨은 그가 모시는 달링턴 경이 영국과 그 당시 유럽의 정치에 기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를 위해 집사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어쩌면 자신 또한 그런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한다고 생각을 했지요.
달링턴 홀에서 개최되는 회담의 내용은 제1차 세계대전 후 191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조약, 바로 독일에 대한 각종 조치가 취해졌던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서 논의할 예정이었습니다. 달링턴 경은 베르사유 조약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앗으며 한 나라를 계속해서 단죄하는 것은 영국의 신사적인 모습은 아니며, 또한 전 세계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회담을 진행을 한 것이지요.
그 회담이 진행되는 연회 중에 스티븐슨의 아버지는 뇌졸증으로 저택 내에서 삶을 뒤로 합니다. 그의 아버지 또한 한 때는 그와 같은 집사였었고, 나이가 드신 후에 스티븐슨이 모셔와서 달링턴 홀에서 하인과 같은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는 순간 마저도 그는 옆에 있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 또한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연회에서 집사인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지금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실거라 생각했다. 결국 그 연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집사로서의 경력에서도 중요한 한 획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집사라는 직업에 헌신했다.
(p143)
"조의를 표하네, 스티븐슨. 부친께서 심한 뇌졸증을 일으키셨어.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이 크지는 않으셨을 거야. 자네뿐 아니라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네."
"감사합니다, 박사님."
"난 그만 가 봐야겠네. 뒷일은 자네가 수습하겠지?"
"그럼요, 박사님. 그런데 지금 아래층에 아주 특별한 신사분께서 박사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급한가?"
"한시바삐 박사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나는 메러디스 박사를 모시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당구장으로 안내한 다음 서둘러 흡연실로 돌아갔다. 연회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고 있었다.
내가 마셜 씨나 레인 씨 같은 우리 세대의 '위대한' 집사들과 같은 반열에 낄 만큼 훌륭하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하긴, 엉뚱한 관용을 베풀어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1923년의 회담, 특히 그 마지막 날 밤이 내 직업상의 발전에 전환점이 되었다는 말은 순전히 내 나름의 소박한 기준에서 하는 이야기란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날 밤 내게 붙어 다닌 중압감을 고려한다면, 내가 그날 마셜 씨 같은 사람의 '품위' 혹은 내 부친의 그것을 약간 보여주었다고 감히 말한다. 해도 지나친 자기 착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내가 왜 그 점을 부인해야 하는가? 지금도 그날 저녁을 생각할 때면, 함께 떠오르는 가슴 아픈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뿌듯한 성취감에 젖어 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뒤늦게 알게 됩니다. 그가 모시던 달링턴 경은 나치에서 이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가 그렇게 헌신했던 사람이 영국인에게는 가장 적대적이었던 독일 나치를 지지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평생을 받쳐 왔습니다.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그동안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합니다.
예전에 어떤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남자는 평생 한 가지 일을 했습니다. 공장에서 제품이 지나갈 때 어떤 레버를 내리는 작업 공정을 진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일을 하고 퇴직을 하게 되죠. 그런데 그가 그 직장을 떠나갈 때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레버를 통해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그동안 계속 고장이 나서 작동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수십년을 일한 그곳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허망 했을까요? 그래도 그 일을 하면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을 텐데 한 순간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죠.
하지만 스티븐슨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달링턴 경이 독일 나치를 지지하는 일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해서 평생 헌신을 받친 것처럼 그의 삶이 한 순간에 변해 버렸습니다. 이 책의 뒷 부분에는 번역가인 김남주 씨가 적어놓은 작품 해설이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적어봅니다.
(p306)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함으로써 악을 돕고 악에 이용당하는 범인들의 삶, 그 소름끼치는 관성의 폐해에 대해 말한다. 600만여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데 앞장선 전범 아이히만은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괴물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고 근면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다면, 아이히만은 좋은 아버지, 자상한 남편, 성실한 직업인이었다.
계급과 편견과 차별에 길들여져 있었던 근대인의 조건은 고려해야 겠지만, 결국 인간은 자신의 더듬이로 길을 가고 그 여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여행 첫 날 주인의 포드를 몰던 스티븐스는 왠지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며 회상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당연한 지각력은 정작 그의 삶에서는 안타깝게도 억압되어 있다. 집사의 품위에 앞서 존중되어야 했던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대한 성찰은 없는 것이다. 잡사의 정신, 집사의 역할, 집사의 품위는 입는 것이지만, 인간으로서의 사로와 행위는 본연적인 것임을 그는 인식하지 못했다.
이 책의 말미에는 스티븐슨과 한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스티븐슨은 그의 과거의 허망함에 내적으로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때 그 남자가 말합니다.
(p300)
"이 봐요, 형씨.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소만, 만약 나한테 묻는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어선 안됩니다. 우울해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래요, 이제 당신은 예전만큼 일을 해낼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 나를 봐요, 퇴직한 그날부터 종달새처럼 즐겁게 지낸답니다. 그래요,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그러고 나서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무엇보다도 돌이킬 수 없는 허망함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겠지요.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항상 부족하기에 어쩔 수 없이 허망함을 간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 이후의 자세가 중요한 법입니다. 반성할 것이 있다면 반성하고, 깊이 고민을 해서 지난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이 책의 제목 처럼 남아있는 나날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우리의 삶은 지속되어야 하니까요.
P96
어쨌거나 브레만 씨의 사망 후 2년여에 걸쳐 나리와 그 당시 그 분의 가장 가가운 동지였던 데이비드 카디널 경이 힘을 합쳐 꾸준히 노력한 결과, 독일의 상황을 계속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인사들을 광범위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영국인과 독일인은 물론,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외교관이거나 고위 정치인, 저명한 성직자, 퇴역 장성, 작가, 사상가 들이었다. 이 신사들 중 일부는 나리와 생각이 같아서, 당시 베르사유 조약(제1차 세계 대전 후 191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조약. 독일에 대한 각종 조치가 취해졌다.) 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미 끝난 전쟁을 두고 한 나라를 계속 단죄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독일이나 독일 사람들을 크게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다만 독일의 경제 혼란을 막지 못하면 전 세계로 급속히 파급될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992년으로 접어들자 나리는 분명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고 계셨다. 그것은 즉, '비공식' 국제 회담의 개최에 지지 의사를 밝힌 가장 영향력 있는 신사들을 바로 우리 달링턴 홀의 지붕 밑으로 모으려는 것이었다. 이 회담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들이 수정될 수 있게 각종 방안이 논의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비공식 회담이 '공식' 국제 회담들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충분히 무게가 실린 자리가 되어야만 했다. 그동안 베르사유 조약을 재검토한다는 명목으로 공식적인 회담들이 이미 몇 차례 개최되었지만 혼란과 적대감만 초래했을 뿐이었다.
P143
"조의를 표하네, 스티븐슨. 부친께서 심한 뇌졸증을 일으키셨어.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이 크지는 않으셨을 거야. 자네뿐 아니라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네."
"감사합니다, 박사님."
"난 그만 가 봐야겠네. 뒷일은 자네가 수습하겠지?"
"그럼요, 박사님. 그런데 지금 아래층에 아주 특별한 신사분께서 박사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급한가?"
"한시바삐 박사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나는 메러디스 박사를 모시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당구장으로 안내한 다음 서둘러 흡연실로 돌아갔다. 연회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고 있었다.
내가 마셜 씨나 레인 씨 같은 우리 세대의 '위대한' 집사들과 같은 반열에 낄 만큼 훌륭하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하긴, 엉뚱한 관용을 베풀어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1923년의 회담, 특히 그 마지막 날 밤이 내 직업상의 발전에 전환점이 되었다는 말은 순전히 내 나름의 소박한 기준에서 하는 이야기란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날 밤 내게 붙어 다닌 중압감을 고려한다면, 내가 그날 마셜 씨 같은 사람의 '품위' 혹은 내 부친의 그것을 약간 보여주었다고 감히 말한다. 해도 지나친 자기 착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내가 왜 그 점을 부인해야 하는가? 지금도 그날 저녁을 생각할 때면, 함께 떠오르는 가슴 아픈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뿌듯한 성취감에 젖어 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P299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알겠습니까?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 봐요, 형씨.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소만, 만약 나한테 묻는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어선 안됩니다. 우울해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래요, 이제 당신은 예전만큼 일을 해낼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 나를 봐요, 퇴직한 그날부터 종달새처럼 즐겁게 지낸답니다. 그래요,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그러고 나서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P302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바로 저런 거구나 싶다. 어쩌면 좀 전에 내 옆에 앉았던 노인도 나와 농담이나 주고받으려 한 것인지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본의 아니게 실망만 안겨 줌 셈이다. 이제 정말 이 농담의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탐닉한다고 해서 크게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인간의 따뜻함을 느끼는 열쇠가 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가에게 농담은 결코 터무니없는 의무가 아니라 주인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는 의무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나는 농담의 기술을 발전시키고자 이미 많은 시간을 투자해왔지만, 내 모든 역량을 바쳐 농담이라는 이 직무에 접근한 적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내일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새로운 각오로 연습에 임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패러데이 어르신은 아직 일주일 더 있어야 돌아오신다. 그래서 내 주인께서 돌아오실 즈음에는 그분이 흐뭇하게 감탄하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면 좋겠다.
올해도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도박가들은 무라카미 하루키, 파올로 코엘료, 밀란 쿤데라, 응구기 와 티옹오, 조이스 캐롤 오츠 등을 손꼽았었죠. 그런데 노벨문학상 당일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외의 인물에 놀라워하는 동시에 작년과는 다르게 그래도 받을 만한 작가가 받았구나 하는 공감대가 생겨난 거 같습니다. 그 만큼 가즈오 이시구로는 조금씩 독자들과 작가들 사이에서 살며시 그러나 깊숙하게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과 함께 그의 작품들이 하나 둘 베스트셀러로 올라서기 시작했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부분의 책들을 출판한 민음사는 아마도 환호를 지르며 회식 자리를 가지지 않았을까요. ^^
반갑게도 최근에 하나 둘 생겨나는 중고서점들에서도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들은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역시 타오를 때 한 번에 타오르는 대한민국입니다. 다행히 제 책꽂이에는 그의 책이 두 권이나 꽂혀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남아 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가 제 이름을 새긴 책도장까지 박혀서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3년 전인가 민음사 북클럽 회원으로 등록을 할 때 책을 선정할 수 있어서 선택한 책들이었습니다. 읽지 않고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지금을 기다렸나 봅니다. 역시 책은 나와 인연이 다을 때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껴봅니다.
3년 동안 간직만 해 두었던 책을 작가의 수상 소식과 함께 한 달이 안 되어서 모두 읽어버렸습니다. '권위'에 대한 내면의 복종이었을까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기 전에 읽었더라면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 같은 부분이 하나 하나 다 의미가 있어보이는 느낌을 받으면서 읽었습니다. 역시 노벨상을 받을 만 하구나. 역시 노벨상을 받는 작가의 작품은 다르구나. 어쩔 수 없는 편견에 빠지고, 권위의 늪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의 작품은 상당히 인상 깊었으니까요.
그 중 오늘은 그의 대표작이자 제 서재에 있는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나를 보내지 마』를 소개드립니다.
회사에서 누군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그래서 내용을 잠깐 설명해 줬죠.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어, 그거 영화로 나온 얘기 아니야?" 이 책이 영국에서 출간된 시기는 2005년 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시기는 2009년 이었네요. 그리고 영화가 국내에 개봉한 시기는 2011년 이네요. 조금 늦었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에서 태어나 4살에 영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성장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영국에서 출간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타임>은 이 작품을 '100대 영문 소설'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돌아왔습니다. 이제야 소설 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를 보내지 마』는 지금까지 읽어왔던 소설과는 다릅니다. 소설의 소재 자체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습니다. 이미 여러 경로로 우리가 한 번쯤 들어봄직한 이야기거든요.
소설은 '복제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서 복제된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한 줄로 표현하면 마치 공상과학과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이 들수 도 있겠네요. 하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로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였다고 생각됩니다.
작품 속의 화자였던 캐시와 그의 친구인 토미와 루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배경은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입니다. 기숙학교에서는 분기 별로 교환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학생들이 만들어온 유화, 소묘, 도예품, 시 등 작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잘 만들어진 것들은 '마담'이라는 어떤 인물에 의해서 학교 밖으로 나가게 되죠.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들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일반 사람들처럼 담담하게 표현해나갑니다. 마치 실제 캐시, 토미, 루스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죠. 하지만 중간 중간에 그들이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지 암시하는, 아니면 더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헤일셤의 학생들은 암묵적 동의하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p114) 연못가에서 대화를 나눈 지 1~2주 후에 루시 선생님의 영어 수업 시간에 일어난 사건의 예를 들 수 있다. 어떤 시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 어쩌다가 2차 대전 때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마자애 하나가 수용소를 둘러싼 담장에 전류가 흐르고 있었는지 묻자, 누군가가 그런 곳에서 사는 것은 정말이지 기묘한 느낌일 것이라고, 언제라도 담장에 손만 대면 자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심각한 의도에서 한 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는 그 말을 상당히 재미있게 생각했다.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일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순간 교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모두들 전류가 흐르는 담장을 만지는 흉내를 내며 소리를 질러 댔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줄곧 루시 선생님을 관찰했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아주 잠깐 어떤 희미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을 추스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일셤의 담장에 전기선이 둘러져 있지 않은 건 다행이지. 그랬다면 때때로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어조는 아주 나직했고, 아이들은 줄곧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므로, 그 말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을 거야."라는 말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가 어디서 벌어진 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그 점을 묻지 않았다. 우리는 시에 대한 토론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학교를 나온 후에 간병인이 되고 기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진정으로 사랑을 한다면 기증을 3년 유예 시킬 수 있다는 소문' 에 의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렇게 캐미와 토미는 그 유예를 시켜준다는 '마담'이라는 조재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마담과 그들이 헤일셤에 있었을 때 교장선생님으로 있던 에밀리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기준으로 일반인을 구분할지 모르겠으나 일반인을 위해서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복제인간 중에서도 아주 혜택을 받아오며 성장해왔습니다. 에밀리 선생님과 마담이라 불리던 사람이 복제 인간의 휴머니즘과 그들도 역시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며 만든 학교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어린 시절 교환회에 제출했던 작품들은 에밀리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제 인간들이 단순히 장기를 주기위한 그런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헤일셤 학교가 아닌 다른 곳은 마치 가축이 사육이 되듯이 그렇게 복제인간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난 캐시의 시각으로 이야기는 진행되며, 마지막에 에밀리 선생님과 마담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지가 하나 둘 드러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닝데일 사건을 통해서 그들의 노력은 흔적을 감추게되죠.
(p361) "줄곧 말씀하시는 모닝데일 사건이라는 게 뭔가요. 에밀리 선생님? 그것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알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
"음 너희가 그 사건을 알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는 것 같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 사건은 상당히 재능을 갖고 자기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가던 제임스 모닝데일이라는 과학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벽지에서 자기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지. 그런 곳에서라면 관심이 덜 쏠릴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가 하려던 건 좀 더 강화된 특질을 가진 아이를 얻는 거였어. 지성이나 운동 능력 같은 면에서 우수한 아이 말이야. 물론 이제까지도 그 비슷한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모닝데일이란 사람은 이전의 이런 연구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밀어붙였지. 그러다가 법의 범위를 넘어서고 말았단다. 물론 그건 우리의 경우와는 상관이 없지. 조금 전에 말한대로 그건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단다. 하지만 그게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냈지 . 그 사건은 사람들에게 줄곧 가지고 있던 공포를 환기시켰단다. 너희 같은 학생들을 만들어 내는 기증 프로그램에 대한 공포 말이다. 혹시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들의 후손이 우리 사회에서 자리를 잡게된다며? 그들이 우리 일반인보다 우수하다는 게 증명된다면? 오, 안 돼, 그 생각은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어. 그들은 뒷걸음질 쳤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간과 장기기증을 위한 인간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탁월하게 휴머니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럼, 처음부터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도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반대로, 다들 그들의 운명을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 묘한 경계와 긴장감을 작가는 마치 줄타기를 하듯이 작품의 마지막까지 끌고 나갑니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암시하게 만드는 사소한 에피소드를 숨겨두고, 따뜻한 인간애의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 다 같이 일을 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남들에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 조직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다 같이 일을 해야 뭔가 성과를 낼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보이게 일해야 한다. 보이게 일하면 일에 대한 피로가 줄어든다. 반대로 혼자만 볼 수 있도록 일하면 쉬운 일도 힘들어진다. 팀워크의 기본은 보이게 일하기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간의 신뢰와 정보 공유가 기본이다.
2. 어디로 가는지 보이게 하라.
- 현실적인 목표로는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 이상적인 목표는 시장을 뒤흔드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기존 방식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 구글에는 '구글X'연구소가 있다. 이들은 인류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 목표다. 인류 차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환경에 무해한 차를 만들 수 없을까?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차는 없을까? 아프리카 오지에 인터넷을 공급하는 방법은 없을까? 구글이 잘 나가는 이유 중 하나는 크고 담대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큰 목표가 필요하다. 평범한 목표가 아닌 큰 목표가 있어야 한다.
- 10% 성장이 아닌 10배 성장 같은 목표가 필수적이다. 현실적인 목표로는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 허리는 낮추고 목표는 높여야 한다. 이상적인 목표는 시장을 뒤흔들고, 판도를 바꾸고, 완전히 다른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방식과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가능하다.
- 단순한 상상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곧바로 실행하는 능력, 불가능해 보이는 생각을 실제 만들어가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쉬운 문제만 풀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하는 성취감은 늘 고통에서 시작된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것을 이겨내면서 사람은 성장한다. 편하고 쉬운 것은 공허함과 허무만을 남긴다." 일본 교세라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의 말이다.
3. 무엇을 하는지 보이게 하라.
- 업무내용을 동료와 쉽게 공유하기 위해서는 보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기록을 남겨야 한다.
-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문제가 밖으로 보이게 해야 한다. 또 문제를 보이게 하려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과 해결하는 사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 문제를 발견한 사람에게 해결까지 책임지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문제 해결까지 맡기면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든 아무 부담없이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 내 업무를 통일된 절차나 공통의 언어로 미리 정리해놓으면 설명하기도 쉽고, 동료의 업무를 배울 수도 있다. 폐쇄적인 조직에서는 이런 기회가 없다. 성장도 멈추는데 이게 큰 문제다. 자기 일만 잘하는 사람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혼자만으로 성과를 낼 수도 없다. 자기 일에 대해 불가침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위험하다. 자기 일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고 남의 일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개인의 성공보다는 팀 성공을 위해 일하는 개인이 오래간다.
4. 어떻게 하는지 보이게 하라
- 갈무리 회의를 통해 동료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 자연스럽게 성과에서도 상향 평준화가 이뤄질 수 있다.
- 한 두 사람이 아무리 잘해도 그 다음 단계 일이 원활하지 ㅇ낳으면 팀 성과와 효율은 떨어진다. 혼자만 잘해서는 안 된다. 각자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할 때 성과가 난다. 갈무리 회의를 하다 보면 개개인의 업무능력이나 업무량, 숙련도와 성과 창출 능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떻게 일해왔는지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일의 난이도와 양의 차이, 보이지 않게 고생하는 동료도 알 수 있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동료도 알 수 있다. 자연스럾게 상향평준화가 이뤄진다. 진짜 일 잘하는 동료가 있다면 그를 통해 다른 사람도 배울 수 있다. 업무 프로세스를 투명하게 공개하면 업무 능력 차이에서 오는 병목 현상과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고 초과 업무로 인한 불만도 없앨 수 있다.
5. 공유와 협업이 보이게 하라.
- 처음부터 개발, 설계, 생산기술자 등 조직 내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일하면 의사결정, 업무처리 속도가 빨라진다.
- 유니클로의 핵심은 협업이다. 내부는 물론 외부와의 장벽도 허물었다. 외부 파트너와 긴밀하게 협업해 품질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공장은 없지만 빠른 생산능력과 공급능력을 갖췄다.
- 도요타는 2013년 1000평 이상 되는 공간에 500명의 엔지니어가 같이 일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나무가 열매 맺기를 거부하는 것. 이를 가리켜 '해거리'라고 한다. 말 그대로 열매를 맺지 않고 해를 거른다는 뜻이다. 어느 해에 열매를 너무 많이 맺고 나면, 다음 해 가을에는 어김없이 빈 가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살아 남기 위해서다.
열매 하나를 맺는 데는 최소한 수십 개의 잎사귀에 해당하는 영양분이 필요하다. 광합성 등 나무의 모든 생명 활동이 잎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잎을 희생한 열매의 가치는 다른 것과 비교할 게 못 된다. 나무에게 열매는 최고의 재산인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에 걸쳐 열매 맺는 데만 온 힘을 다 쏟으면 어떻게 될까. 해가 거듭할수록 나무 안의 자생력은 사라지고 점차 기력을 다하게 된다.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무의 상태가 계속 나빠져 어느 순간 한계치에 달했을 때 나무가 또다시 열매를 맺으면 그 나무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나무는 해거리를 통해 한 해 동안 열매 맺기를 과감히 포기한다. 그리고 해거리 동안 모든 에너지 활동의 속도를 늦추면서 오로지 재충전하는 데만 온 신경을 기울인다. 그동안 물과 영양분을 과도하게 옮기느라 망가져 버린 기관들을 추스르고, 헐거워진 뿌리를 단단히 엮으며, 말라 비틀어진 가지들을 곧추 세운다.
그 어떤 생산 활동도 하지 않고 전원 스위치를 내린 나무가 해거리에 하는 게 있다면 오직 하나 휴식이다. 옆 나무가 여매를 맺건 말건 개의치 않고 쉴 때는 정말 확실하게 쉬기만 한다. 그리고 일 년 간의 긴 휴식이 끝난 다음 해에 나무는 그 어느 때 보다 풍성하고 실한 열매를 맺는다.
때가 되면 모든 걸 접고 해거리를 통해 과감하게 휴식을 취할 줄 아는 나무, 일부 식물학자들이 나무가 세상에서 가장 진화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람도 하기 어려운 일을 나무들은 하나같이 당연하게 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 역시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에 휴식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다. 수천 년 전 시황제가 왜 사람들의 휴식을 금했는지는 한 번 되짚어 볼 일이다.
삶에서 진정한 휴식은 흔히 생각하듯 놀고 먹는 게 아니다. 삶에 대해 반성하고 더 큰 도약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휴식이다.
한 번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에게 물어보자.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것은 우리의 삶이 바쁘고 숨가쁘기에 더욱 필요한 일이다.
최진석 교수의 책으로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을 읽고 나서, 이번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읽게 되었다.
서로 다른 세 책은 저자의 하나의 생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사실 중복이 되는 내용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또한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강조하고 싶은 것을 제시하고 나서,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살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번 책은 제목 그대로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 대해서 논하는 책인데 주제 자체가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이기에 실제로 어떻게 하면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갈증이 쉽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일상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번 쯤 지금 사는 삶을 관심있게 살펴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나 역시 그동안 내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이 내가 걷고 있는 방향이 맞는 것인지 확인해보고,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기 위한 생각과 결정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수 없이 다짐하고, 아침마다 앞으로의 길을 상기시키고,
이렇게 틈이 날때 마다 글을 반복적으로 남기면서 그 전환점에 다가가기를 희망한다.
#1.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
장자의 제물론 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승 남백자기에게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성자유가 어느 날 자기 스승을 보니 앉은뱅이 책상에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선생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르냐고 스승이 물으니, 제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실연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어깨가 축 쳐지죠. 짝을 잃은 사람은 불 꺼진 재나 마른 나무처럼 풀기가 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다 타고난 재는 불이 꺼진 후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가 손만 대면 으스러지지요. 안성자유가 봤을 때 예전의 스승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실연당한 살마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에 스승 남백자기가 제자를 칭찬하면서 말합니다.
"안성자유야, 너 참 똑똑해졌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고는 분명한 어조로 결론을 맺듯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 라고 합니다.
스승은 그 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장례 지냅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육체를 포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바로,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 삶의 자세, 정신적인 측면에서 과거와 단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잘못된 삶의 자세를 조금씩 고쳐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새로 태어나듯이, 마치 빅뱅이 일어나듯이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조금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조금씩 개선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간절함의 부족 때문인지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장자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 역시 스스로 장례를 지내야 했습니다.
어쩌면 스승 백남자기 처럼 완전하게 스스로를 죽이지는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분명한 느낌은 받았습니다. 분명 이전과는 달라질 겁니다.
서른 여섯 살의 이 날은 분명 제 삶의 중요한 한 지점이 될 것입니다.
#2.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나'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확인하면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입니다.
일상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일상에 매몰되는 순간, 생각이 멈춰버립니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생각에 대한 생각이 중요한 지점입니다. '생각에 대한 생각'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왜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조금 더 효율적일 수 있는지? 내가 하는 행동으로 인해 내 삶과 내 가족과 타인들의 삶에 영향이 어떻게 미치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생각을 할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입니다.
그 생각 중에서 몇 가지 질문을 우선 순위로 두고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될 거 같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이 두 질문을 글로 적고 있는데 가슴이 너무나도 두근거립니다.
평범한 두 질문일지 모르지만, 분명 이 질문을 매일매일 곱씹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제 조금 더 저와의 대화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이 변환점의 시기라는 게 계속해서 느껴집니다.
이 가슴 뛰는 시기를 절대 아깝게 놓치지는 않겠습니다.
P242
장자의 제물론 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노옵니다.
스승 남백자기에게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성자유가 어느 날 자기 스승을 보니 앚은뱅이 책상에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선생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르냐고 스승이 물으니, 제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실연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어깨가 축 처지죠. 짝을 잃은 사람은 불 꺼진 재나 마른 나무처럼 풀기가 없이 무너져내립니다. 다 타고난 재는 불이 꺼진 후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가 손만 대면 으스러지지요. 안성자유가 봤을 때 예전의 스승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실연당한 살마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에 스승 남백자기가 제자를 칭찬하면서 말합니다.
"안성자유야, 너 참 똑똑해졌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고는 분명한 어조로 결론을 맺듯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P67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 구레함 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결정하고 지배할 더 높고 큰 단계에서의 결정을 감행할 수 있는 높이가 바로 철학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P73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만들어진 판 안에서 다른 것들에 대응하는 형태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죠.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인 사고입니다. 전략적으로 형성된 판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종속적인 변수들을 다루면서 하는 행동들을 전솔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킬 것이냐 말 것이냐, 전쟁을 일으켜서 국제 질서나 주변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로운 구도로 끌고 갈것이냐를 생각한다면 전략적인 사고일 테고, 전쟁이 벌어진 상황 안에서 상대방에 어떻게 대응하며 어떻게 공격할 것이냐, 어떻게 방어할 것이냐 혹은 병력을 어떻게 전개시킬 것이냐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전술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술은 전략의 제약 속에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전술이 전략 보다 높거나 넓을 수는 없습니다. 전술가가 전략가를 이길 수는 없죠. 대개의 전술가들은 전략가들이 펼쳐놓은 판 위에서 놀 뿐 입니다. 따라서 전술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신이 전략가의 손바닥 안에서 있을 뿐이라는 사실조차도 알아채기 힘들어져버립니다.
P76
철학적인 높이로 상승한 단계의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바로 전면적인 부정을 이야기합니다. 전면적인 부정은 새로운 생성을 기약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생성이라는 것은 바로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결정하지 못하는 한 항상 종속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종속적인 삶을 사는 한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의 삶을 꾸리거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효과적으로 관리해나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P93
"[장자]를 감명 깊게 읽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장자]에 감명을 받고 나서 기껏 한다는 생각이 장자처럼 살아보는 일인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장자는 절대 누구처럼 산 사람이 아니네."
P92
문제는 그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겪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특히 철학 수입국인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예민한 경각심을 가지고 숙고해야할 주제입니다.
P121
무엇인가 새로 만들면서 이루는 일정한 범위를 '장르'라고 합니다. 선진국은 바로 이 '장르'를 만듭니다. 저는 어떤 나라가 문화적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바로 장르를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한다고 봅니다. 장르를 만드는 나라는 문화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장르를 만들지 못하고 수입하는 나라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습니다. 장르를 만들면 그 장르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고, 경제적인 성취가 힘을 형성하여 앞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르-선도력-선진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장르를 개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꿈' 입니다. 고유한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회의 선진성 여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각자 개인들은 꿈이 있느냐 없느냐로 독립적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유한 자신으로 고품격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고 싶다면 바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꿈이 있는 사람은 선도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살마은 종속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또 물어보십시오. "나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가?"
ㅇㄹ
P125
대답에서는 지식이나 이론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뱉어내는지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원래 모습'은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입니다. 그래서 대답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주로 과거를 따지는 일에 더 몰두합니다. 또 '원래 모습'을 중시하다 보니 그것을 강력한 기준으로 사용하여, 그 '원래 모습'에 맞으면 참으로 분류하고 맞지 않으면 거짓으로 분류합니다. 당연히 진위가 가장 중요해지지요. 그래서 질문보다 대답을 위주로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주로 과거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버리거나 진위 논쟁으로 빠져버립니다.
하지만 질문은 이와 다릅니다. 질문이 일어나려면 우선 궁금증과 호기심이 작동해야만 합니다.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지요. 자신에게만 있는 이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 이것을 질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고유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발휘하는 형태가 바로 질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하고, 질문은 미래로 열리게 합니다.
P153
철학은 이미 있는 철학적 지식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철학적 이론이 생산될 때 사용되었던 그 높이의 시선에 함께 서보는 일입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고도의 지성적 시선으로 사유 활동을 한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놓은 철학적 사유 활동의 결과들을 단순히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해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배우는 이유는 단지 그 과정을 통해서 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철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철학으로 아른 것은 마치 박물고나에 가서 유물들 하나하나를 보고 감탄하는 것에 멈추는 일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성적 수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물들 하나하나를 보고 감탄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넘어서서 그 유물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인간의 동선, 문화적 흐름 등을 읽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죠.
P159
철학을 공부하는 일은 누군가의 전도사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탈레스나 베이컨의 예에서 보았듯이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정해진 것들과 결별하는 독립적인 자세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고, 문명의 깃발이 되는 일이고, 인간에게 새 빛을 끌어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앞선 것을 숙지하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구체적 현실로서의 시대라는 터전에서 독립적인 사유를 발동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해버리고 제한해버리는 확정적인 이론보다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시대의 구체성에 집중할 때, 시선은 비로소 앞을 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앞선 철학자들은 모두 다 이렇게 했습니다.
P171
사실상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분석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분석을 할 때 사용되는 논리나 근거는 어디서 온 것인가요? 지금 이미 있는 것들입니까? 아니면 지금은 없지만 다가올 것들입니까? 분명히 이미 있는 것들을 사용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미 있는 논리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따지거나 분석하면 결과가 정확하게 나올까요? 현재의 틀로 미래를 재단하면 미래가 제대로 열릴까요? 그래서 꿈을 꾸는 사람이 현재의 문법에 갇혀 있으면 꿈은 항상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꿈꾸는 일을 차라리 멈춰버리는 얌전한 사람이 되어버리죠. 안전을 추구하기만 하고, 낙오되지 않으려고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꿈은 불가능의 냄새가 더 강하게 나야 진정한 꿈일 가능성이 큽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꿈입니다. 가능해 보인느 것은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괜찮은 계획일 뿐입니다.
P173
어느 조직이든지 그 조직이 붕괴하기 전에는 공통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바로 그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등의 비평만 하는 일이 점점 일상화 되는 것입니다. 바로 구성원들의 이탈 현상입니다. 구성원들이 참여자나 행위자로 혹은 책임자로 존재하지 않고 제3자처럼 존재합니다. 구성원들이 구경꾼으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구성원들 가운데 점점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진다면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조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에서든지 일류 비평가들과 일류 분석가들이 넘쳐납니다. 제3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꿈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책임성 있는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비평이나 분석에 빠지는 제3자적 태도로만 존재하는 삶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데에는 취약하기 마련입니다.
P174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나'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확인하면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입니다.
P187
소피아라는 것은 로고스적인 지적 훈련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생각의 힘,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지요.
P191
'독립'은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불편해지면서 거기로부터 벗어나려고 용기를 발휘하여 얻은 선물입니다. 여기서 불편해진다는 것은 이미 있는 기존의 생각들이 더 이상 나의 삶이나 새로운 문명을 책임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신과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적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고독을 자초하는 시도를 해야만 합니다.
P196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일들은 이렇게 등장합니다. 이는 독립적 의사 결정이기도 합니다. 창조란 새로운 흐름을 포착한 상태에서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하여 극한으로 몰입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기존 체제에 갇혀서 그 구조를 계속 반복하거나 재생하는 역할만 하기 때문에 기존 체제 안에 새로움이 나타나도 그것을 새로움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죠.
P212
관찰을 유지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집요함이고 몰입입니다. 인생의 다양한 방면에서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휘하여 진실하게 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집요한 관찰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몰입한다는 것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아주 높은 단계에 도달해 있음을 증명합니다.
P215
독립적 주체로 선다고 했을 때 그 독립은 강제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고독도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즉 기존의 지식과 이론에 근거해서 대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것들과 결별하고 낯설어지는 실험을 감행한다는 뜻입니다. 철학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P221
버드런트 러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적 모험심은 어른보다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훨씬 흔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고, 가상 놀이와 공상의 시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희귀해지는 까닭은 모든 교육 과정이 그것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고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것, 파괴적이고 가공할 만한 것이다. 사고는 특권과 기성제도와 편안한 습관을 무자비하게 다룬다. 사고는 무정부적이고 법률로 제어할 수 없으며 권위를 중시하지 않고 여러 세계를 거치면서 정교화된 지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고는 지옥을 들여다보고 지옥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사고는 인간을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에 둘러싸여 있는 희미한 알갱이로 본다. 그러나 사고는 마치 자신이 만물의 영장인 듯이 확고하고 당당하게 처신한다. 사고는 거대하고 재빠르고 자유로우며, 세계를 비추는 빛이며, 인간의 가장 큰 자랑 거리다.
P224
나의 생각이 합리적인가 아닌가를 따진다고 할 때, 그 합리성을 증명하는 근거들은 이미 있는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의 합리성을 검증하려는 태도가 이미 있는 체제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게도 합니다. 왜 생각이 꼭 합리적이어야만 하나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 기존에 있는 모든 합리성으로부터 이탈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입니다. 왜 우리가 하는 생각들이 항상 합리성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나요? 완전히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가 날 수도 있고 거칠 수도 있습니다. 모가 나고 거친 그 길을 왜 가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그 길이 내 길이면 안 되는 것인가요?
합리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꿈을 꾸십시오. 꿈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있는 관점들로 명료하게 해석되어 합리적으로 보이거나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꿈이 아닙니다. 착실한 계획일 뿐이지요. 꿈은 생래적으로 거칠고 비합리적이며 돌출적입니다.
P225
탁월함을 추구하고 소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적 인간은 자신을 기존에 있는 것으로부터 격리시켜 고독하게 놓아둡니다. 그러면 그는 어느 순간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단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기존의 해석 방식을 수요하기보다 새로운 방식을 만들려는 용기를 발휘한다면 합리성 여부를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없겠죠. 그보다는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훨씬 더 많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과하게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비합리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한테 등장하는 새로운 생각을 기존에 있는 합리적 조건 속에서 해석하려고만 하는 것은 너무 점잖 떠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제가 러셀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철학적 사고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것, 파괴적이고 가공할 만한 것이라는 그의 웅변을 말입니다. 철학적 사고는 특권과 기성제도와 편안한 습관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차분한 균형 상태를 즐기기보다는 아주 불안한 불균형을 과감하게 맞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불균형을 생산해야 합니다.
P238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일은 이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야만 가능해집니다. 이것을 저는 '지적인 부지런함'이라고 표현합니다.
계속 강조하듯이 대답에만 빠지는 일도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품고 있는 지식과 이론을 요구에 따라 그냥 뱉어내기만 하는 일은 편하지요. 이에 비해 질문은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새로 등장하는 조짐이나 신호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로 즉각 반응하는 일도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좋다' 거나 '나쁘다'라는 판단은 이미 내면화된 가치관을 근거로 해서 거기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만 따지는 일입니다. 이때는 숙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미 있는 가치관이 등장하여 즉각적인 판단을 해주지 않습니까? 편리하지요. 하지만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편한 길을 애써 피하고, 그 조짐이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 부단히 숙고합니다. 힘들고 불안하지요. 이 힘들고 불안한 내면을 극복하고 계속 질문을 해대는 일은 지적으로 부지런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합니다.
P242
장자의 제물론 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노옵니다.
스승 남백자기에게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성자유가 어느 날 자기 스승을 보니 앚은뱅이 책상에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선생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르냐고 스승이 물으니, 제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실연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어깨가 축 처지죠. 짝을 잃은 사람은 불 꺼진 재나 마른 나무처럼 풀기가 없이 무너져내립니다. 다 타고난 재는 불이 꺼진 후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가 손만 대면 으스러지지요. 안성자유가 봤을 때 예전의 스승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실연당한 살마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에 스승 남백자기가 제자를 칭찬하면서 말합니다.
"안성자유야, 너 참 똑똑해졌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고는 분명한 어조로 결론을 맺듯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P248
'종속적 주체'와 '능동적 주체'를 말한 서양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떠오릅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근대 사회는 주로 종속적 주체들로 구성되었지만,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능동적 주체들로 구성된 삶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푸코는 근대적인 인간을 왜 종속적인 주체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먼저 '주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활동을 하거나 판단을 한 때 자기 자신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자기가 주도적인 결정과 행동을 한다고 여기는 자의식이 있는 상태의 사람을 주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보통은 자기로부터 생산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보편적인 생각을 각자 내면화해서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자신이 활동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판단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주체이지만, 그 주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 자신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고 외부에 존재하는 보편적 의식을 내면화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종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속적 주체는 비록 주체는 주체이지만 아직 피지배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갖춘 주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종속적 주체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나 이념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이지,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독립적으로 건설하고 실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푸코는 이러한 종속적 주체성을 벗어나서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능동적 주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기만이 자신의 주인이 된 주체를 말합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판단과 행위가 모두 자기의 결정으로부터 나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주체, 이 사람이 능동적 주체입니다. 종속적 주체는 내면화된 이념이나 가치가 주인이 되어 있기에 그것들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해져서 대답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능동적 주체는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근본적인 토대인 궁금증과 호기심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능동적 주체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로 등장합니다.
P261
태연자약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태연자약에서 자약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만 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태연은 아주 크고 넓고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태연한 사람은 자약하고, 자약한 사람은 아주 태연하지요. 태연자약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자신만의 흐름이나 결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모습입니다. 태연자약한 후타바야마의 '기세 없는 기세'에 눌려서 상대가 자멸하는 것이나, 나무 닭의 '온전한 덕'에 눌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버리는 것은 매우 닮아 있습니다.
P271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선례'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이 큰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선례가 없거나 지시 내용이 없으면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하는 힘이 약해져버렸습니다. 저도 직장에서 무슨 일을 시도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선례'와 '형평성' 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이놈의 '선례'와 '형평성'만 찾다가 모두 함께 말라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선례를 찾기만 하지 선례를 세우려는 도전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자기는 기존 논리를 넘어서서 창조하고 기존 논리를 압도하는 사람으로 서지 못하고, 계속 분석하고 비판하고 해석하는 사람으로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술 영역에서도 비판과 해석만이 넘치고 창의적 도전이 취약한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합니다.
P298
행위 다음의 절차를 궁금해하기보다는 직접 무엇인가를 하십시오. 실행하지 않고 궁리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저 멀리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P302
혁명이 완수되지 못하는 이유는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즉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성숙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입니다.
P309
순자 - 권학 편에 나오는 글을 보겠습니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거기에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
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물고기들이 생겨나고
선을 쌓고 덕을 이루면, 신명이 저절로 얻어져서 성인의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바람과 비는 거기에서 저절로 생겨납니다. 우리는 그져 흙을 쌓아 산을 이루기만 하면 됩니다. 많이 쌓으면 큰 산을 이루고, 적게 쌓으면 작은 산을 이룹니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는 일은 하지 않고 비와 바람을 얻기만 기대하면 안 되지요.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마치 행운이나 선물처럼 비와 바람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람과 비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저 흙을 쌓고 산을 이루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선물이나 행운처럼 물고기들이 생겨납니다. 이렇듯 탁월함을 추구하고 덕을 이루면 마치 행운이나 선물처럼 신명한 통찰력이 생기고 성인의 마음이 따라서 갖춰지게 되지요. 우리가 학문을 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일을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해나가면 통찰력이나 성인 수준의 마음을 갖는 행운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