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이미 이스탄불로 향했지만, 훗날 언젠가는 갈거라 기약하고 사진으로 대신 위안을 삼는다.
이번 작품을 통해 드디어 오르한 파묵과 만났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2권짜리 책을 읽었는데 흡인력이 대단하다. 읽으면서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늦은 저녁에도, 이른 새벽에도 빨간 눈을 해가며 읽어나갔다.
마지막 30쪽 정도는 소리를 내서 음독을 했는데 사건의 진행에 따라 읽는 속도와 음의 크기도 달라지면서 나 역시 이스탄불의 어두운 수도원에 함께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혼자 웃었고 오르한 파묵의 마무리에 감탄했다. 읽고 나서 세 가지에 관심이 생겼다.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 작가인 <오르한 파묵>, 배경인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 어떤 도시인가?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부터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기때문에 오스만제국의 유물이 다수 분포하고 있으며 그리스로마시대의 유물도 여러 곳에서 전해진다.
『내 이름은 빨강』, 다시 이스탄불을 쌓아 올리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이 다시 도시를 문화적으로 풍성하게 해주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서현 교수는 《빨간 도시》에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 언어로 도시를 다시 세웠다고 했다.
16세기 도시와 그림을 치밀하게 그려나간 이 소설은 단지 터키의 문학적 성취에 그치지 않는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가 얻게 된 문화적 중요한 자산이다. 건물에만 관심있던 여행자에게 회색빛이던 도시가 이제 빨갛고 파란 속살을 지닌 도시로 변모했다. 그 색을보여준 도구가 바로 소설이다. 2006년 노벨상은 이렇게 언어로 도시를 쌓아 올린 작가 오르한 파묵에게 수여되었다.
어느날 세밀화가 엘레강스가 죽은 채 발견됐다
이 작품은 16세기 오스만제국(현재 터키)의 전통회화인 세밀화의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스탄불은 지정학적 위치의 특성으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역사가 만나고 충돌한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은 오스만제국의 화원들에게도 천천히 손을 뻗어온다. 베네치아의 그림의 새로운 양식이 들어오면서 그곳의 전통회화와 충돌한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고 세밀화가 엘레강스가 살해된다.
이야기는 직접 읽으면서 즐겨야 하기에 등장인물들을 잠깐 살펴보면서 내용을 추측해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으면 한다. 이게 소설의 매력이니!
오스만화원장, 오스만제국의 전통적인 회화를 고수하고 지켜내려고 한다.
에니시테 베네치아를 다녀와서 서양의 화풍에 매료되고 화원들에게 술탄에게 바칠 서양풍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
엘레강스, 올리브, 황새, 나비 오스만 화원장으로부터 그림을 배운 화원들이며 동시에 에니시테의 그림을 그린 당시 최고의 화원들이다. 엘레강스가 이들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세큐레 에니시테의 딸이며 오르한과 세브켓 두 아들이 있다. 남편은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이 돌아오지 않고 카라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순되는 행동을 보인다
하산 세큐레 남편의 동생이다. 형이 돌아오지 않자 형수인 세큐레에게 마음을 품는다
에스테르 방물장수이자 카라와 세큐레를 연결해주고 이야기의 중간중간 이음새 역할을 한다.
하이리예 에니시테 집안의 여종이다.
세브켓 세큐레의 첫째 아들
오르한 세큐렝듸 둘째 아들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커피숍
작품 속에는 커피숍에서 화원들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서로 어떤 의견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며 커피를 금하게 하려고 합니다.
박우현의 『커피는 원래 쓰다』에서 커피는 처음에 이슬람 수도사 사이에서 비밀리에 음용되다가 15세기 말부터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 작품이 16세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당시으 커피의 인기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당시 사람들은 커피하우스에서 문학, 예술, 정치를 논하기 시작했고 토론이 일상화되었으며 집권 세력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블에서 커피하우스가 금지되기도 했다고 한다.
유럽에 커피가 처음으로 보급된 것이 바로 오스만제국이 중동을 지배하면서 그곳으로 부터 소개된 커피가 유럽지역으로 전파된 것이다. 현재 터키의 커피문화는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16세기의 오스만제국시대의 세밀화가는 어떤 것인가
《내 이름은 빨강》은 지리적배경은 16세기 오스만제국의 이스탄불이다. 당시 오스만제국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고 있는 나라였다. 세밀화가는 중국과 당시 중동지역을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해온 그들만의 양식이었다. 서양미술과 우리나라 미술에 익숙한 나에게는 많이 낯설다. 하지만 원근법을 중심으로 가까운 것은 크게 먼 물체는 작게 그리는 서양미술의 기법과는 다르게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을 부각되어 표현하거나 의미를 표현하는 점에서는 우리의 미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미술의 형식이 있음을 이제 알았으니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찾아봐야 겠다.
책을 읽으면서 이 도시를 잘 모르면 내용의 이해가 부족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읽는 도중에 잠깐 이스탄불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소설 속의 배경은 16세기 후반 오스만제국 이스탄불이다. 그때가 궁금하다
□ 우선 매력적인 도시 '이스탄불'의 개괄적인 역사를 살펴본다.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부터는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 부터 1,600년 동안 수도였기에 이스탄불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오스만제국시대의 유물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현재 터키는 그리스와 해양, 상공 영토에 관련된 분쟁을 벌이고 있고, 주민의 대부분은 터키인이지만 1984년부터는 터키 동쪽 지역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이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터키 저우를 상대로 유혈투쟁을 벌여왔고 최근에도 그들의 독립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 술탄, 칼리프, 샤, 칸
술탄은 이슬람세계에서 세속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 즉, 세속적인 왕이란 뜻으로 원래는 칼리프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특정한 지역을 지배하는 통치자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는데 많은 이슬람국가의 수장들이 이 칭호를 선택해 사용해 왔고 현재도 많은 이슬람 국가의 지배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칼리프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 사후 그가 생전에 한 일들 바로 이슬람을 수호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일을 대신할 자를 선출한 뒤에 칼리프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했다. 그 의미는 '신의 사도의 대리인'으로 신의 사도인 마호메트의 대리자라는 뜻으로 모든 이슬람세계의 최고 지배자를 의미한다.
샤는 전통적으로 이란 왕조의 왕을 뜻하는데 기원은 페르시아제국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호메이니로 인해 이란왕정이 무너지기 전까지 이란의 왕을 샤라고 호칭했다.
칸은 중앙아시아의 많은 유목민족들이 자신들의 지배자를 뜻하는 말로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몽고의 징기스칸이 있다. 칸은 변형되어서 가한, 가서간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 헤라트파의 바흐자드
아프가니스탄 서부의 헤라트에서 티무르 왕조의 후원 아래 번성한 15세기의 세밀화 양식. 이슬람교의 정복자인 티무르의 아들 샤 로흐가 이 휴파를 설립했지만, 그 후 그의 아들인 바이순쿠르 미르자(~1433)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역에서 미술가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이 파를 회화의 중요한 중심으로 발전시켰다. 헤라트파는 1507년 헤라트가 우즈베크족에게 정복될 때까지 크게 발전했다. 때때로 비단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시집 등의 필사본에 그린 삽화들이 보다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헤라트파 그림의 주제는 당대의 문학에서 많이 따왔다. 네자미, 사디, 자미의 후기 작품들을 기초로 한 삽화들 외에도 시인인 페르도우시(?~1020)가 지은 페르시아의 서사시 <열왕기>를 주제로 한 많은 장면들이 남아있다.
헤라트파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바흐자드(1450 ? ~ 1536 ?)가 있다. 아래 그림은 그의 세밀화이다.
《꽃잎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는 2003년 4월, 길상사 요사채에서 가진 법정 스님과 최인호 작가의 네 시간에 걸친 대담을 엮은 책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분들이지만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짧은 글들과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사진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한 없이 위로 받았고 두 분의 대담 속에서 삶이라는 게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다 읽고 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최인호가 물었다.
"스님,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법정이 답했다.
"몸이란 그저 내가 잠시 걸친 옷일 뿐인 걸요."
둘은 웃었다.
두 분의 대화 속에서 몇 번이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정해진 길이 없는 삶 속에서 과연 나는 어떤 길을 택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따끔하지만 따뜻하게 감싸줌을 느꼈다. 그리고 삶은 살아가는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두 분의 삶이 대화에 그대로 드러나인지 몰라도 짧은 글 속에서도 큰 울림이 있다.
고독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법정)
사람은 때로 외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을 모르면 삶이 무디어져요.
하지만 외로움에 갇혀 있으면 침체되지요.
외로움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그런 바람을 쏘이면 사람이 맑아집니다.
(최인호)
현대인들은 갈수록 고독을 느낀다고 합니다. 인간 자체는 고독한 존재인데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똑같이 외롭고 쓸쓸한 존재이지요.
다만 현대인들이 갈수록 고독해지는 것은 광장에 나와 있기 때문이고 고독을 받아들일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에서 훨씬 많은 일과 부딪치며 삽니다. 고독할 기회가 적다고 할까요. 그래서 인간은 원래 혼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다가 문득 외로워지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지요. 쾌락으로 고독을 잊어보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결코 위로하지 못합니다.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시가 하나 있어 적어본다.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 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법정 스님의 '외로움을 모르면 삶이 무디어져요' 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마 외로움이란 자기 자신의 마음의 눈을 비로소 마주 응시할 수 있음을 뜻하리라. 삶이라는 것이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스스로 찾아나가는 그리고 언젠가는 완벽한 고독과 마주하게 되면서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생각일 뿐이다. 어쩌면 그저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뻔지르한 말 뿐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자신과 맞닥뜨리는 게 길인 듯 싶다. 쉽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속인에게는 어쩌면 두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알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정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법정)
영혼에는 나이가 없으니까요. 단지 육신을 가지고 나온 시간이 얼마 안 되었을 뿐 몇 번의 생을 겪고 나온 것이잖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라든가, 배울 새도 없었을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지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그 소리입니다. 육신의 나이로 아이를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법정)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꼭 해 주는 애기가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은 죽고 못 살 만큼 서로 좋아하지만 속상하면 못할 소리가 없다. 아무리 속상해도 막말은 하지마라. 막말을 하게 되면 상처를 입히고 관계에 금이 간다.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 언젠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 어떤 일이 있어도 막말은 하지 마라."
관계의 균열이란 사소한 일, 무례한 말 같은 것에서부터 생기게 마련이거든요.
(최인호)
칼릴 지브란이 말했던가요?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왔는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내 것은 아니다.' 라고요.
(최인호)
가정은 우리 최후의 보루입니다. 가족은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끝까지 지키지 않으면 너무 억울한, 우리 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식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에 가서 불공드리고 교회가서 기도하고 불우 이웃 좀 돕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히려 집에서 왜곡된 사랑으로 상처 받는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는 게 더 중요하지요.
이런 대화 중심에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존재적 대등함, 인격적 대등함이라는 바탕이 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어떤 갈등이나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인 접근법은 남편, 아내, 아이들을 모두 동등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자식이니까 내가 하는 말은 무조건 들어야해.' 라고 자연스럽게 박혀 있는 생각을 걷어내야 한다. 다치고 상처입고 돌아온 가정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어야 한다. 가정은 그런 공간이어야 한다. 고립되고 감추는 공간이 아니고 서로를 보듬어 주는 동시에 각자 개인의 존재적 대등함을 인정해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보고 부끄러워하고 반성해본다. 그리고 늦지 않았음을 알고 다시금 되돌아본다.
두 분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대담이지만, 그 옆에 잠시 앉아 있었던 기분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그 무게가 갖는 힘은 다르다. 그러기에 이 분들의 말씀이 깊이 스며들었다. 《꽃잎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 여전히 꽃은 지지 않았다. 향기가 진해짐을 느낀다
p35
"사람은 때로 외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을 모르면 삶이 무디어져요. 하지만 외로움에 갇혀 있으면 침체되지요. 외로움은 옆구리로 스쳐 지나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그런 바람을 쏘이면 사람이 맑아집니다."
p41 (법정)
소욕지족(少欲知足), 작은 것을 갖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알면, 행복을 보는 눈이 열리겠지요. 일상적이고 지극히 사소한 일에 행복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p42 (최인호)
작고 단순한 것에 행복이 있다는 진리를 요즘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글에 '별은 한낮에도 떠 있지만 강렬한 햇빛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내용이 있지요. 밤이 되어야 별은 빛나듯이 물질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 모두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면서도, 요즘 사람들은 행복이 아니라 즐거움을 찾고 있어요. 행복과 쾌락은 전혀 다른 종류인데 착각을 하고 있지요. 진짜 행복은 가난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p44 (법정)
매화가 필 때면, 어떤 중국 사람은 매화 밭에 이부자리를 가지고 가서 며칠씩 먹고 자며 꽃구경을 한답니다. 연꽃이 필 때는 연못가에서 며칠씩 머물고요. 우리야 차 타고 가서 휘 둘러 보고 매화 봤다고 하지만 중국사람들은 좀 다르다더군요.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참 멋쟁이들이죠. 하찮은 꽃구경 같지만, 그처럼 우리 주위엔 기쁜 일이 얼마나 많은 지요.나 혼자 '아, 좋다, 좋다' 소리를 가끔 하는데 행복이라고 표현하기도 쑥스럽습니다.
p45 (법정)
안목은 사물을 보는 시선일 텐데 그것은 무엇엔가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하는 과정을 통해서 갖추게 될 것입니다. 똑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어떤 이는 가격이 얼마라는 식으로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의 가치로 보지요. 이는 똑같은 눈을 가졌으면서도 안목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p52 (법정)
사랑은 따뜻한 나눔이고 보살핌이고 관심이지요. 더 못 줘서 안타깝고 그런 것이 사랑인데 말이지요.
p56 (최인호)
오래 전 명동인가에서 젊은이 둘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서로의 눈을 깊이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서로의 우주를 바라보는 듯, 서로에게 빠져들고 있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습니다. 이런 게 사랑의 원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하고 거룩하며 신성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p61 (최인호)
문제는 이렇듯 가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른다는 거예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방법이 옳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우도 자식은 강하게 키워야 된다는 생각으로,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발가벗겨 한데로 내쫓는 식이었어요. 전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거든요. 사랑의 방법을 몰랐던 것이지요.
짐승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듯이, 가정은 서로의 온갖 상처와 불만을 치유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허구한 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외치지만 과연 내 집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는가, 내가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서로 할 말은 해야 하고, 또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들으려고 노력하는 곳이 가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반대로 가고 있지요. 밖에서도 충분히 피곤했으니 집에서는 복잡한 얘기 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가정은 모든 것이 유예된 공간이 되어 버리고 말지요.
p66 (법정)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꼭 해 주는 얘기가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은 죽고 못 살 만큼 서로 좋아하지만 속상하면 못할 소리가 없다. 아무리 속상해도 막말은 하지 마라. 막말을 하게 되면 상처를 입히고 관계에 금이 간다.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 언젠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 어떤 일이 있어도 막말은 하지 마라."
관계의 균열이란 사소한 일, 무례한 말 같은 것에서부터 생기게 마련이거든요.
p67 (최인호)
칼릴 지브란이 말했던가요?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왔는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내 것은 아니다.' 라고요.
가정은 우리 최후의 보루입니다. 가족은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끝까지 지키지 않으면 너무 억울한, 우리 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식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에 가서 불공드리고 교회 가서 기도하고 불우 이웃 좀 돕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히려 집에서 왜곡된 사랑에 상처 받는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는 게 더 중요하지요.
p69 (법정)
영혼에는 나이가 없으니까요. 단지 육신을 가지고 나온 시간이 얼마 안 되었을 뿐 몇 번의 생을 겪고 나온 것이잖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라든가, 배울 새도 없었을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지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그 소리입니다. 육신의 나이로 아이를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p71 (법정)
누구도 닮고 싶지 않고 나다운 내가 되고 싶다는 것, 본질적인 나를 펼쳐 보이고 싶다는 그 생각은 여전히 변치 않습니다. 내 인생관이라면 인생관이라 할 수도 있는데,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나다운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이지요.
p74(최인호)
저는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나 자신이며 소중히 지녀할 것도 나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소유, 내 편견, 내 지식, 내 위선...... 진짜 내가 아니라 나로 위장된, 본체가 아닌 나를 버려야 하지요. 예수가 말씀하셨듯, 그런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대부분 가짜의 나조차 사랑을 해요.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 버리지 않으면 내가 변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요.
p80 (최인호)
물론 교육열이 높은 것은 중요합니다만, 그것은 난사람이 아닌 된사람을 만드는 교육이어야지요. 된사람은 1백 명이 다 될 수 있거든요. 이게 교육의 철학이고요. 외국에서는 주로 교육의 역점을 건강한 시민이나 건전한 국민을 만드는 데 두는데 우리는 남보다 뛰어나서 남보다 빨리 출세를 하는, 만인이 일류 대학에 가는 걸 목적하는 교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p83 (법정)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생각나는 군요. 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의지와 불의 앞에 맞선 시민 정신을 오늘의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p88 (최인호)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에서 습관이 나오고, 습관이 성격이 되고, 성격이 운명을 이룬다."
p89 (법정)
사람 '인(人)' 변에 말씀 '언(言)' 자로 이뤄진 '믿을 신(信)'자는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지요. 사람의 말이란 곧 믿음입니다.
p91 (최인호)
지식이라면 무슨 말이든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말의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지요. 이제는 말수는 적어도 마음이 실려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태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나이가 들수록 말문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
p92(최인호)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눈이라는 조리개를 통해 나름대로의 인생 하나를 촬영해 가는 것 같습니다. 육신은 죽어도 살아왔던 궤적들은 뇌리의 필름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이 죽을 때 파노라마처럼 단숨에 펼쳐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소설가란 그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무의식이라는 창고 속에 들여놓는 사람들이겠지요. 그 양은 물론 엄청나지요. 생각을 시작하면 그 신비한 창고 어딘가에 가서 기억을 끄집어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랬을 때 그 문장도 빛이 나지요. 플로베르가 모든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딱 한 마디 말이 필요할 뿐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햇빛을 표현할 때, 제 머릿속은 60년 동안 경험했던 햇빛의 기억을 끄집어내 오는 것이겠지요. 제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경험한 기억의 창고로 달려가는 것이죠. 그렇게 제가 보여 주려고 하는 장면과 독자가 가지고 있는 장면이 교감 상태에 이른 것을 감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로베르의 말처럼 영감에 의해서 더 정확한 묘사와 정확한 장면의 제시를 할 수 있을 때, 그 소설도 더 생생하게 빛이 날 수 있겠죠. 그것을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고요
p121 (법정)
나는 글 쓸 때 볼펜도 사용하지 않는데, 볼펜은 빨리 나가기 때문에 생각이 함부로 손을 따라가거든요. 옛날엔 먹을 갈며 생각을 정리하고 한 획 한 획 붓을 놀리며 책임 있는 글들을 썼는데 요즘 사람들은 손가락이 빨라서 그런지 무책임한 글을 많이 씁니다.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가와바타 야스나리 같은 일본 작가는 자기 작품 [설국]을 붓으로 다시 한 번 쓰곤 했답니다. 사실 원고지에 한 칸 한 칸 글을 쓰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만년필 동기를 만나 반갑군요.
p125 (최인호)
간디는 우리를 파괴하는 일곱 가지 증상이 있다고 했는데요. 일하지 않고 얻은 재산, 양심에 결여된 쾌락, 성품이 결여된 지식, 도덕이 결여된 사업,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원칙이 없는 정치, 희색이 없는 종교, 위기의 시대에 인도에서 간디가 한 말이 우리 현실과 다 들어맞으니 기가 막힌 일이죠. 게다가 현대인은 모두 병을 앓고 있어요.
p127 (법정)
수영을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다든지 강물이든지 흐름을 따라서 가면 아주 편하지만 수영하는 재미는 없어요. 물살을 약간 거스르며 헤엄칠 때는 몸이 뻐근하면서도 뭔가 에너지가 분출되는 게, 새로운 기력이 생기는데요. 흐름을 따라가면 편하기는 한 데, 자기의 새로운 에너지, 잠재력은 개발이 안 되지요.
p130(법정)
화두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종교인들은 교리나 형식 따위에 걸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보다 오히려 비종교적인 작태를 보이는 경우가 흔합니다. 자칫하면 그런 덫에 걸리기 쉬운데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p138 (최인호)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율법 학자일 가능성이 많아요.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지식인들이지 지성인이 아니에요. 한마디로 지식인들은 눈먼 자들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누구보다 더 잘 본다고 생각하지요. 차라리 안 보인다고 하면 좋겠는데,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보인다고 하니 그게 문제인 거죠. 왜냐하면 그를 따라가는 사람들조차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으니까요. 소위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많아요. 제가 보기에는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기본 도덕률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지성인 인 양 말하고 행동하느데, 그런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p142 (법정)
사람은 때로 외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을 모르면 삶이 무디어져요. 하지만 외로움에 갇혀 있으면 침체되지요. 외로움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그런 바람을 쏘이면 사람이 맑아집니다.
p143 (최인호)
현대인들은 갈수록 고독을 느낀다고 합니다. 인간 자체는 고독한 존재인데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똑같이 외롭고 쓸쓸한 존재이지요. 다만 현대인들이 갈수록 고독해지는 것은 광장에 나와 있기 때문이고 고독을 받아들일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에서 훨씬 많은 일과 부딪치며 삽니다. 고독할 기회가 적다고 할까요. 그래서 인간은 원래 혼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다가 문득 외로워지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지요. 쾌락으로 고독을 잊어보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결코 위로하지 못합니다.
박완서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 보았다. 우리 문학계의 큰 별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 책은 처음 접했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녀가 떠난 지 4주기에 맞춰 초기 산문집을 다시 재편집한 것이다. 7권으로 구성된 산문집인데 그 중에 제목이 와닿는 책을 먼저 읽어 보았다. 5번째 산문집인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이다.
최근에는 일부러 산문을 읽는다. 글을 쓰는 데 너무 딱딱하고 건조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보통 자신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나름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내는 산문을 찾아 읽으려고 하고 있다. 나 역시 상투적인 표현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내가 경험한 진짜 내 삶을 토대로 글을 써내려가고 그 속에서 의미를 얻어내고 싶었다.
작가의 다른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도 곧잘 웃으셨는지 잘 모르지만 책의 작가 소개에 등장하는 사진과 함께 여러 사진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글에도 사회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도 일상을 통해서 담담하게 풀어낸다. 하지만 우선은 이해와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을 전제로 그런 부분을 끌어내려 한다는 인식을 많이 받았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시점의 글들이 많이 보인다. 30년 전의 글의 모음인 것이다. 그런데 그 때의 일상이라는 것도 지금과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나 보다. 시점을 이야기하는 단어들을 감춘다면 지금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어색함이 하나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건가보다 하는 생각을 한다.
'가족', '아이', '자연', '집'
이런 소재가 산문 속에 자주 드러난다. 이 밖에도 우리의 일상의 많은 부분은 담담히 말하고 있다. 내가 위의 네 단어를 끄집어 낸 이유는 나 역시 위에 대한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하였고,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항상 느끼지만 나는 많은 부분에서 표리부동하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마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데, 컨디션에 따라서 화를 내지 않아도 될 것에 화를 낸다. 항상 닭장 같은 아파트 말고 주택에 살고 싶다고 말하고, 내 주변에 있는 나무들 이름을 알아야겠다고 말도 하고 때로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도 했지만 정작 집안에 있는 화분 속에서 자라는 화초들의 이름 조차 지금 알지 못한다.
항상 마음 뿐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와 다짐 뿐이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보면 아무 것도 하나 한 것이 없다. 아내한테 말한다. '나 뭐 할거야' 그러면 대답이 돌아온다. '하고 나서 얘기해요~!' 라고.
점점 느껴가는 것이 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힘이 들다는 것과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이 삶이다라는 생각이다. 일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키워야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 라고 했다. 우리의 일상도 아는 만큼 보일 뿐이다. 꽃이 피지 않아도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아야 어떤 나무는 여름, 가을, 겨울에는 이렇구나 알게 된다. 단순한 건물의 구조도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생각하게 되고,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 사회를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평범한 데, 그래서 특별하다. 그 '평범', '일상'의 무게가 오늘따라 묵직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의 마지막 산문은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이다.
책을 이제 다 읽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마지막에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았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일부분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하는 데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게 '시'의 힘인가 보다. 라고 다시금 느꼈다.
시의 의미를 정확히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첫 부분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정말 큰 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소한 것에만 홀로 분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운전을 하면서 앞에 차가 끼어들면 경적을 올리고 혼자 화를 냈다. 음식점에 가서 서비스가 좋지 않으면 분개한다. 조금이라도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분개했다. 그런데 정작 분개해야 할 때 한 번이라도 동조해본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분명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다시 배운다. 다음 번에 사소한 일에 내가 화를 내려고 한다면 그 때 이 시를 다시 떠올릴 것이다.
박완서의 산문집이 고맙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산문집이 7권이라고 하니 나머지가 궁금하고 고마울 뿐이다.
어느 순간 작가에게 빠져버린다.어떤 작품 속에서 깊은 감동과 가슴을
뒤흔드는 울림을 경험하게 되면 작가를 흠모하게 된다.거기에는 하나의 작품이 존재하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작가의 전작을 탐한다.《소금》을 읽고 나서 박범신 작가의
전작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소년이 온다》를 읽고 단어 하나 하나
소중히 다루는 듯 한 한강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그리고 올 해 초에도 한 작가를 만났다. 바로 중국 작가 위화다.그의 작품은 이전에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인 《허삼관 매혈기》,사람이 죽은 후7일 동안의 일을 보여주는 《제7일》을 통해서 먼저 접했다.풍자와 해학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그 속에서 중국 사회의 단상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독특한 문체로 나를 사로잡았다.그런데 거기까지였다.하지만 이번에 접한 《인생》 을 통해서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늦은 저녁이었고 내일 출근을 해야 했지만 이야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읽으면서 몇 번이나 굵은 눈물을 떨구었는지
모른다. 작가 위화는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이지만,최근에 배우 하정우가 감독으로 연출한<허삼관>개봉과 함께 다시 조명받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어서 기쁜 마음도 있지만, 나만 알고 싶은데 다른 사람도 알아버렸다는 안타까움과
소소한 이기심도 감출 수 없다. 《인생》은 푸구이라는 한 노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화자인 나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푸구이는 어떤 삶을 살았나 궁금하다.
부유한 지주의 외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젊을 때 주색과 도박에 빠져 집안의 재산을 모두 잃게 되고 아내 자전도 장인이 데려간다. 후에 자전은 돌아오고 푸구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옛 땅에서 소작인이 된다. 어느 날 어머니 건강이 안 좋아져서 약을 구하러 가던중 이유도 모른채 국민당 군인으로 끌려가서 내전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병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푸구이는 다시 삶을 살아간다. 당시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겪으면서 가난에 허덕이며 쌀이 생기면 문을 걸어잠그고 끓여먹었다. 예전 지주로 남아있었으면 위험했을 뻔한 순간도 있었고, 자신의 집이 풍수적으로 좋아서 집을 빼앗길 뻔하는 순간도 오지만 위기는 잘 넘어갔다. 이제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아들 유칭은 어느날 학교 교장이 출산 중 급한 수혈이 필요해서 헌혈을 하다가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죽게 된다. 딸인 펑샤는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다가 유칭은 그곳에서 똑같이 숨을 거둔다. 두 자식을 먼저 땅에 묻고, 구루병에 심해진 아내 자전도 푸구이에게 마지막을 부탁한다. 아직 그치지 않았다. 후에 사위와 손자도 푸구이를 남겨두고 먼저 떠나게 된다. 푸구이는 이렇게 가족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하나하나 직접 마지막을 정리해준다.
홀로 남은 푸구이는 어느 날, 늙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한 마리 보게 되고, 자꾸 마음에 걸려 그의 남을 털어서 소를 사게 된다. 그리고 그 소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남은 삶을 살아간다.
위화의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는 그만의 풍자와 해학,독특한 문체가 읽는 재미를 북돋아 주었는데,푸구이의 아픔과 쓰라림을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 식으로 담담하게 풀어내니 읽는 내내 묵직한 슬픔이 몰려왔다.마치 한 번 가슴 속 슬픔을 터뜨려
버리면 더 이상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느끼듯이 깊이 울음을 감춘 푸구이의 모습이 눈에 아련했다. 시대적 배경이 중국의1900년대 초반부터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시기를 관통하고 있지만,우리에게 낯설지 않다.일제강점기,한국전쟁,경제개발계획,민주화운동을 겪어낸 우리 할아버지,아버지들도 비슷한 격변의 세월을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푸구이의 개인적인 삶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끌려가게 되고,자신의 손으로 먼저 떠난 아내,딸,아들,사위,손자를 묻는다.땅 속에 묻고 아물지 않은 찢어진 가슴을 더 깊게 파낸다. 푸구이는 생각했을 것이다.아프지만 자신이 가족들을 거둘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하지만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그러면 마지막 남은 푸구이 할아버지는 어떡하지.푸구이는 동네 사람들이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게 너무 아팠다. 세월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짊어지고 갈 짐이 생긴다.짐이라는 말보다는 책임이라는 게 좋겠다.자신이 선택했든 그렇지 않았든 우리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현실을 살아나가야 한다.그 현실이 참담할 수도 있고 힘에 부칠
수도 있다. 이 작품은‘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너무 아프고 힘들어서,참을 수 없는 아픔을 겪게 되어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한다.
푸구이는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냈지만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한 소를 한 마리 사서 함께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낸다. p282
소가 우리 집에 온 이상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니 이름을 지어줘야 했어.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푸구이라고
하는 게 좋겠더구먼.그렇게 정하고 푸구이라 부르다 보니,여길 봐도 저길 봐도 나를 쏙 빼닮아
기분이 정말 째지더군.나중엔 마을 사람들까지도 우리 둘이 꼭 닮았다고 했다네.나는 허허 웃으며 속으로'요보게들,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네'라고 말했지.
단순히 한 권이 책이었다.어쩌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그 속에서 내 삶을 보고,가슴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버린다.문학을 소설을 평생 손에 놓지 않을 것이다.오늘은 문학에 대한 글을 하나 소개하면서
마무리할까 한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을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문학을 함으 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물론 출세하지도,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중략)인간은 문학을 통해,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새벽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그날 처음으로 내 얼굴과 마주한다. 반쯤 감긴 눈에 눈곱이 끼어 있고, 머리카락은 나뭇잎들이 햇빛을 찾아 뻗어가듯이 사방팔방으로 솟구쳐 있다. 급하게 씻고 머리에 왁스를 바르고 로션을 바른 다음 거울을 다시 바라본다. 나름 하루의 시작이니 얼굴에 신경을 써야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에 마주했던 거울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묻는다. "넌 누구냐?" 하루 종일 컴퓨터를 바라 보아 오른쪽 눈의 가장자리가 붉게 충혈되어 있고, 푸석푸석해진 피부에 각질이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침에 바른 로션의 효과는 과연 얼마나 갈까?
하루 두번 씩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이게 내 얼굴인가? 많이 변했다. 예전 사진들과 동일인물인가 싶기도 하고, 안경에 눌린 콧대의 번질거림이 어색하기도 하다. 라색 수술을 할까 하다가도 워렌 버핏, 빌게이츠가 안경을 쓰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한다. 거울을 보며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서 찾아낸다. 그저 피부 나이라도 천천히 먹기를 바란다. 이왕 늙어가는 거 보기 좋고 품격있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신체적 젊음을 잃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아무리 사람을 지구 밖으로 보내고 유전자지도를 완성해 나가도 아직까지는 막을 수 없는 현상이다. 하지만 막을 수 있는 곳이 있긴 하다. 바로 소설 속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기도 한 번으로 다른 무엇이 당신 대신 늙어간다면 기도를 하겠는가? 기도를 할지 신중한 결정을 내리기 바란다. 소설 속에도 공짜는 없으니까.
p47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도리언 그레이는 여전히 자신의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점점 늙어가며 끔찍하고 흉측해지겠지. 하지만 이 그림은 항상 젊음을 간직하고 있을 테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6월, 바로 오늘의 모습 그대로이겠지. 정반대라면 좋으련만! 내가 항상 젊음을 간직하고, 이 그림이 나 대신 점점 늙어간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바칠 텐데!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바치지 못할 게 없지! 내 영혼이라도 바칠거야!"
오늘 소개할 책인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한 대목입니다. 훌륭한 화가인 배질 홀워드는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를 알게 된 후 그로부터 작품의 영감을 얻습니다. 도리언이 배질의 모델이 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온 날에 그는 쾌락주의적인 인생관을 깊게 가지고 있는 배질의 친구인 헨리 워튼 경을 만나고 그의 매력에 빠지게 되고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이 만난 날 배질은 도리언의 훌륭한 초상화를 완성한다. 초상화를 본 세 사람은 작품에 감동을 하고 도리언은 작품 속 자신에 감탄하고 변하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합니다. 베질은 초상화를 도리언에게 건네 주고 도리언은 그것을 자신의 집에 걸어 둡니다.
어느 날, 도리언은 싸구려 연극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시빌 베인을 만나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예술적인 연기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결혼을 약속하고 그녀에게 키스를 하지요. 하지만 배질과 헨리에게 그녀의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극장을 찾은 날, 그녀는 형편없는 연기를 선보이고 도리언은 시빌 베인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헤어지자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도리언을 만나고 진정한 사랑과 삶을 알았다고, 극중 인물들의 연기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도리언이 사랑하게 된 예술적인 연기가 도리언을 사랑하게 되면서 변하게 된 것이죠. 그녀는 도리언에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간청하지만 도리언은 그녀를 내치고 떠나버립니다.
다음 날 헨리는 자신이 너무 했나 싶어 그녀에게 잘못과 사랑을 구하는 편지를 씁니다. 하지만 헨리가 놀랄 만한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그녀가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헨리는 그 소식을 이야기하고 별 일 아니라고 그녀는 도리언으로 인해 진정한 삶을 살았다며, 그 삶이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도리언은 그를 따라 파티를 갑니다. 그의 삶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파티에서 돌아온 도리언은 초상화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림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됩니다.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자신이 아닌 그림의 외모를 변하게 만든다는 것을. 도리언은 그 후, 점점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듯이 유미주의에 빠져들고, 작중 헨리의 영향으로 쾌락으로 짙게 물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아파하죠. 그의 감춰진 초상화는 점점 더 흉측하게 변해만 갑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환상 소실입니다. 소재 자체도 그리스신화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할 만 합니다. 소재는 이렇게 허구적이지만, 내용 속에서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건넵니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적인 요소들이 드러납니다. 도리언, 배질, 헨리를 통해서 오스카 와일드 자신을 표현해냅니다. 그 속에서 배질과 헨리가 도덕과 쾌락으로 갈등하는 모습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합니다.
"나이 마흔에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에 그들의 삶이 드러난다는 말이겠죠. 사람들의 얼굴은 그들의 삶의 조각조각들이 켜켜이 쌓여 올려지면서 나타납니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10년 후의 제 모습은 어떨까 상상해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질문을 해봅니다. "기도 한 번으로 내가 늙어가는 대신 다른 무언가가 대신 늙어간다면 그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제가 사는 대로 얼굴에 반영되면서 늙어가고 싶습니다. 이해인 수녀, 법륜 스님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샛길로 빠져 봅니다. 항상 생각하지만 잘 풀리지 않는,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거 같은 것이 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태어나자 마자 고통받는 어린 아이들,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로 가족을 떠나는 이들의 삶은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운명으로 미루어두어야 할까? 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나 혹은 우리 가족이 아니니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는 우연으로 닥칠 수 있습니다. 삶은 예측할 수 없고, 내일을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허무주의로 빠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아쉬움과 후회를 남기지 않게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용서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리언처럼 추하게 변한 자신의 초상화를 숨기려 애쓰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책을 한 권 한 권 찾으면서 제목과 간단한 소개글을 읽어보았다. 《고산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을 '대동여지도'를 남긴 김정호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와 소설을 좋아하기에 망설임없이 손에 잡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글을 남기면서 알게 되었다. '고산자'는 바로 김정호의 호였다.
김정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잠시 찾아보았는데, 그의 생애와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며, 생몰년도 또한 알 수 없었다. 다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지도 판각을 도왔다고 한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삶이 작가 박범신의 눈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기록되지 않은 그의 삶은 이렇게 역으로 이야기를 통해서 찾아가게 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는 1864년(고종1)인 것으로 보아 그는 순조, 헌종, 철종 대에 거친 사람으로 추정된다.
작가는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어 냈을까. 소설 속으로 들어가본다.
고산자의 아버지는 홍경래의 난 때 지원대에 들어오면 전정, 군정, 환곡과 같은 세금을 면해준다는 현감의 거짓약속에 산속으로 들어간다. 후에 아버지와 함께 떠난 사람들은 추위와 식량이 없고, 산을 빠져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서 산속에서 죽게 된다. 그 때 그의 아버지의 손에는 관에서 준 잘못된 지도 한 장이 있었다. 당시 지도는 관에서만 소유하고 있었는데 고산자는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지도가 아닌 자기네와 같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지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구니가 된 묘허와의 인연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야기는 역시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지면서, 그 배경은 홍경래의 난, 조선후기의 세도정치, 천주교와 서학의 배척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사건들이 서로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영토문제를 빼놓지 않는다.
우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보통 지도를 만들 때는 지지를 함께 만든다는 것이다.
p14
지지는 지도에 다 토달 수 없는, 이를테면 각 고을의 연혁 관원 고읍 풍속 호구 봉산 진보 영진 등 수많은 정보들을 편목별로 구분해 기록한 책이다. 지도가 있으면 그에 따른 지지가 있어야 산하와 사람살이가 입체성을 갖추는 것이니, 지도와 지지는 언제나 한통속으로 맺어져야만 피차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번 대동여지도의 판각이 끝나고 나면 당연지사 대동지지 편찬에 곧 착수할 터이다.
책 속에서 소개되는 영토문제는 독도, 대마도, 간도 지역이다.
특히, 독도에 관련된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대동여지도에는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독도에 관한 소식을 듣다 보면, 일본의 고지도에서 독도가 조선의 땅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말을 듣곤 한다. 반대로 일본은 조선의 대표적인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는 독도(우산도)가 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p202
대동여지도는 아래위와 좌우로 접는 분첩절첩식이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스물두 첩으로 나누고 한첩을 다시 동서 팔십 리 간격으로 나누어, 접으면 하나의 서책이 되도록 고안하고, 때에 따라선 그 서책에서도 필요한 첩과 절을 빼내어 간편히 휴대할 수 있게 한 것은, 지도의 효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울릉도는 열다서번째 첩의 가장 오른쪽 절로 배치된바, 만약 우산도를 새기려면 울릉도에서 우산도가 이백 리는 안 된다고 쳐도 최소한 팔십리 간격의 절이 두 세 개가 더 필요해진다. 그중에서도 두 절은 바다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축척을 무시하고 다른 지도들이 그렇듯 울릉도에 바짝붙여서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새기는 것도 불편하거니와, 아무것도 없는 빈 목판을 끼워맞춰 지도를 찍어내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더구나 우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대동여지도를 그릴 때 그의 뜻은 지도로써 사람살이를 이롭게 하자는 것에 두었으니 목판본으로 제작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모든 작은 섬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새겨놓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럴 필요성도 없다. 필사본과는 사정이 이렇게 다르다. 대동여지도도는 펼쳐놓으면 동서로 대략 스물두 척이 넘는다. 판각 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 그가 스스로 그렸던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을 대동여지도에서 오히려 오천여 곳이나 뺀 것도 그렇거니와, 그러저러한 제작과정의 어려움이나 효용성 때문에 우산도를 뺀 것이다.
고지도를 보면 정말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로 정확하지 않고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자기들이 사는 곳이 비대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금처럼 위성이나 하늘에서 바라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유사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실제 김정호는 벗들을 통해서 관의 지도를 볼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지도가 나올 수 있었음은 아마도 평생을 오로지 우리 강토와 산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의 구도적인 삶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마포나루에서 고산자가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떠난 후,
"어떤 이는 그가 일찍이 남몰래 보아둔 옛산에 들어가 푸른 정기에 기대 살아 백 살이 넘고도 젊은이처럼 먹고, 일하고, 자주 환하게 웃었다 한다."
그의 마지막 삶이 정말 이랬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그의 혼이 망가져가는 산하, 강토를 지켜주기를 바랄뿐이다.
지지는 지도에 다 토달 수 없는, 이를테면 각 고을의 연혁 관원 고읍 풍속 호구 봉산 진보 영진 등 수많은 정보들을 편목별로 구분해 기록한 책이다. 지도가 있으면 그에 따른 지지가 있어야 산하와 사람살이가 입체성을 갖추는 것이니, 지도와 지지는 언제나 한통속으로 맺어져야만 피차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번 대동여지도의 판각이 끝나고 나면 당연지사 대동지지 편찬에 곧 착수할 터이다.
p50
지원대에 들어오면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한 전정과 군정과 환곡도 본래대로 거두어 제 배를 불리겠다는 수작이었다. 전정이란 토지세로서, 본래 지주가 물어야 하도록 돼 있는 걸 소작인들에게 물렸는데, 1결당 4두나 6두로 정해져 있는 전세에다 근거 없는 부가세를 보태어 매겨서 배가 넘게 거둬들이는 게 다반사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무렵 토산현이 유독 가렴주구가 심해서 부가세 종류만 해도 무려 마흔 가지가 넘었다고 했다. 군대에 가는 대신 내야 하는 군역도 근거대로 거두어들여서는 양이 안 차니까 어린아이나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황구첨정이 다반사였으며, 무이자로 빌려주게 돼 있는 환곡 또한 고리를 붙여 거둬들이는 게 상례였다.
p61
지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양면성으로 작용한다. 지도가 없으면 사람의 오감이 부풀어오를 대로 올라 스스로 지도가 되지만, 지도가 있으면 지도를 믿기 때문에 오감은 만삭의 돼지처럼 그 운행이 느려진다. 엉터리 지도가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 넣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p63
개구리가 물을 건너가는데, 다 건너간 뒤에도 파문으로 물 위에 개구리의 길이 남아 있는 걸 보고 감동한 적도 있고, 다람쥐가 오르내리는 나무에도 다람쥐의 길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놀란 적도 있었다. 산과 물과 바람이 모두 이어져 서로서로 등대고 어깨 기대어 있는데, 그 자신만이 오로지 혼자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길이 시작되고 물이 시작되고 산이 시작되는 곳에 가면 부용꽃같이 이뻤다는 어머니를 만날 것도 같았다. 놀이 비낀 길이라는 뜻을 가진 석양사로라는 글귀에서는 눈물이 났고, 훈장댁 대청에 걸린 편액에서 붕정만리의 뜻을 알았을 때는 가슴속이 불을 지핀 것처럼 뜨거웠다.
p84
임금과 재상이 강토의 형세를 알아 치국의 저울로 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백성이 땅을 알아 이롭게 가꾸고 넉넉히 거두며, 물과 바람을 알아 살림과 식솔을 보호하고, 험난한 곳과 평탄한 곳, 급한 곳과 완만한 곳을 알아 풍속을 바르게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마땅히 지도는 나라의 것이기에 앞서 백성의 것이라야 한다.
그가 굳이 대동여지도를 목판본으로 새기고 절첩식으로 고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도는 당연히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던가. 목판본 대동여지도로써, 온 백성이 이를 지녀 더이상, 아버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 게 그의 오랜 꿈이다.
p123
도성에서 갖고 내려온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토산과 곡산이 나타나 있는 두 장의 목판본 지도였다. 곡산이 들어 있는 것은 대동여지도 22첩 중에서 열번째 첩의 네번째 판이고, 토산이 자리잡은 것은 열한번째 첩의 세번째 판이었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22첩이 되게 분할하고 동서는 팔십 리 간격에 따라 여러 절로 쪼갠 것은, 이처럼 온 백성이 필요한 판만 분리해 가볍게 소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테면 도성에서 강릉을 가려면 제 13첩의 네 절만 지니면 될 테니까, 구태여 번거롭게 전도를 품고 다닐 필요가 없는 셈이다. 여지껏 모든 지도가 이렇게 고안되지 않은 것은, 지도는 오로지 나라의 것일 뿐이라는 관리와 사대부들의 유아독존적인 생각때문이었다.
어찌하여 지도가 나라의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온 백성이 무릇 서로 통하고 뜻을 나누면서, 내가 가진 걸 네게 팔고 네가 가진 걸 내가 얻어 더불어 잘살고, 땅과 물의 근원을 알면, 밖으로 방비를 든든히 할 뿐 아니라 안으로 실용을 통한 유익함이 많을 것은 정한 이치였다. 무릇 지도란, 나라에서 감춰둘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나눠, 쓰임을 널리 구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p171
길은 끝나는 법이 없다. 앞서 걷는 자가 지도를 만든다. 그는 새삼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먼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p178
나라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도를 비변사 비밀곳간에 한사코 감춰두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스스로 지도를 그려 동행자와 기꺼이 나눠 갖는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고 방대한 지지를 편찬하는 데 있어 제일의 조력자는 그러므로 그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일찍이 그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비옥한 땅을 찾아내기도 하고, 잡초에 묻혀 유실된 의미 깊은 성지나 진보를 드러내어 끊어질 뻔한 역사를 올곧게 되살리기도 하며, 그곳으로 가는 길과 다리를 만들어 기꺼이 국토를 시간과 공간사이로 넓혀놓기도 한다. 상단의 유명한 접주나, 패랭이 쓰고 물미장 짚고 다니는 늙은 행상들 사이에서, 그가 지도에 미친 사람으로 소문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게다가 관아에서 돈을 주고 그에 따라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백성의 안위와 생업을 위해 지도에 미쳤다고 알려진바, 골수 보부상이나 상단 행수들과 그가 호형호제할 수 있는 것은, 떠도는 그로선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p192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엔 ........ 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대마도는 예부터 경상도 계림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고려사]에서부터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기술돼 있는 것은 위당이나 혜강도 알고 있을 터이다.
실록의 기록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건국 초기엔 태조가 우정승 김사형을 시켜 대마도를 징벌한 바 있고, 세종 때 역시 징벌군을 대마도 두지포에 상륙시켜 도주의 항복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대마도가 확실히 조선 영토로 귀속된 것을 세상에 천명했으며, 더 나아가 대마도 도주의 정무보고를 경상도 관찰사가 받도록 문서로써 예시하기에 이른다. 대마도 도주에게 종일품 판중추부사 겸 대마도 주도절제라는 벼슬을 내리고 이에 합당한 녹을 책정해 신하의 도리를 다하도록 한 것은 세조 때의 일이다. 역사적 근거가 그처럼 깊을진대, 웬만한 지도에서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그려넣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국팔도여지도나 흔한 조선 전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조선팔도총람도 그러하고, 체계적인 축척지도로 칭송받는 농포자의 동국지도도 그러하다. 농포자의 동국지도엔 대마도 표식과 함께 대마도 경계에 ... 라고 씌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일본과의 경계를 대마도 끝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p196
"저는 ...... 감히 말씀드리지만,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한 지도를 그리고자 합니다. 이용후생입지요. 제 선친께서 일찍이 실제와 다른 지도로 억울하게 작고하셨습니다. 관에서 내준 지도였어요. 지도란 사람살이의 흥망은 물론이고 목숨줄이 달려있는 겁니다.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강토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으로는 나도 대마도, 우리 땅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적 이상이나 정치적인 목적, 판단은 제 소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시 말해 대마도를 우리 강토로 그려내도록 하는 일은, 여기 계신 대감 같은 분의 소임이지요."
"더구나 고산자로 말할 것 같으면,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아닙니다. 비변사나 규장각 관리라면 당대의 정치적 이념이나 전략에 따라 국토를 달리 정해 그릴 수도 있겠으나, 그에 비해 고산자는 객관성을 엄격히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겠지요. 고산자는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거나 그 근본이 유동적이거나 한 곳은 일단 뒷일로 미루어둔 것이고, 그것은 실학에 바탕을 둔 과학자로서 금도를 지킨 것이라 봅니다. 어떤 당대의 위정자가 여기저기를 그리라고 해서 그린다면, 다음에 다른 권세자가 빼라고 하면 또 빼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사구시의 과학이란 차가운 머리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고산자가 정치적 판단이 뚜렷하지 않은 곳을 지도에서 우선 제외한 것은 올바른 처사라 봅니다."
p202
대동여지도는 아래위와 좌우로 접는 분첩절첩식이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스물두 첩으로 나누고 한첩을 다시 동서 팔십 리 간격으로 나누어, 접으면 하나의 서책이 되도록 고안하고, 때에 따라선 그 서책에서도 필요한 첩과 절을 빼내어 간편히 휴대할 수 있게 한 것은, 지도의 효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울릉도는 열다서번째 첩의 가장 오른쪽 절로 배치된바, 만약 우산도를 새기려면 울릉도에서 우산도가 이백 리는 안 된다고 쳐도 최소한 팔십리 간격의 절이 두 세 개가 더 필요해진다. 그중에서도 두 절은 바다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축척을 무시하고 다른 지도들이 그렇듯 울릉도에 바짝붙여서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새기는 것도 불편하거니와, 아무것도 없는 빈 목판을 끼워맞춰 지도를 찍어내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더구나 우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대동여지도를 그릴 때 그의 뜻은 지도로써 사람살이를 이롭게 하자는 것에 두었으니 목판본으로 제작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모든 작은 섬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새겨놓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럴 필요성도 없다. 필사본과는 사정이 이렇게 다르다. 대동여지도도는 펼쳐놓으면 동서로 대략 스물두 척이 넘는다. 판각 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 그가 스스로 그렸던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을 대동여지도에서 오히려 오천여 곳이나 뺀 것도 그렇거니와, 그러저러한 제작과정의 어려움이나 효용성 때문에 우산도를 뺀 것이다.
p229
압록강 건너편을 서간도라고 부르고 두만강 건너, 송화강 상류와 백두산 동쪽 지역을 북간도라고 이르기도 한다. 간도는 두만강, 압록강과 천산산맥 흑산산맥 등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땅으로, 함경도나 평안도 북부에 비해 비옥한 토질을 갖고 있다. 처음엔 강을 건너가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차츰 탐관오리들의 압제와 가렴주구에 못 이겨 식솔을 이끌고 아예 간도 깊숙이 들어가 터를 잡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땅이 비옷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 일대가 주인 없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에 시달릴 일도 없었고 관아의 노역에 시달릴 일도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일어나고 백두산과 간도 일대에 크게 관심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조상이 세웄던 고구려나 발해의 터전이었다는 것도 심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그러나 최근엔 사뭇 분위기가 다른 모양이다.
청이 제 민족의 발생지라 하여 간도 내륙은 물론 백두산 일대와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걸핏하면 국경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 경비를 강화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자칫하면 백두산이 통째로 저희 땅이라고 우기면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도 얼마 전 간도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도 세금을 물리고, 그 경계를 당당히 청나라에 선포해야 한다는 공론이 한 차례 있었다고 한다. 무릇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경계가 두만강입네 압록강입네 하는 명코ㅔ한 실선으로만 나뉠 수는 없다.
p230
숙종조에 이르러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서쪽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고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삼는다 했으나, 그 토문이 과연 어떤 물줄기를 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p233
그는 여름에야 오래 전 홍경래의 반란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정주성에 닿는다. 관군이 열여드레 동안 땅굴을 파고 들어가 성 밑에 화약을 쟁여놓고 폭발한 다음에야 비로소 무너뜨릴 수 있던 단단한 정주성이다. 성을 폭발하기 위해 관군이 쟁여넣은 화약이 무려 천팔백 근이나 됐다고 한다. 그 최후의 전투에서 죽은 반란군이 홍경래를 비롯해 수백이요 체포돼 참수된 백성이 수천여 명이나 된다고 들은 일이 있다.
p240
청이 들어서면서 백두산을 자기들 조상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성역화하면서 한동안 사람의 접근을 막아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p260
흥선대원군은 무서운 사람이다.
주색에 빠져 지내면서 안동 김씨 일문에게 권력을 맡기다시피 했던 철종 임금이 승하한 것은 삼 년여 전인 계해년(1863) 겨울의 일이고, 뒤이어 흥선대원군의 어린 둘째아들 명복이 고종 임금으로 등극했다. 말인즉, 궁중의 제일 웃어른인 풍양 조씨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하나, 모든 권세가 임금님의 아버지인 흥성대원군 수중에 떨어진 건 자명하다. 때맞추어 동학 교주였던 최제우와 그 일당이 처형됐고, 개혁이 앞세워 서원 철폐를 단행한 것도 그해 겨울의 일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철종 임금의 장인인 김문근이 죽은 뒤로 안동 김씨 일문의 권세도 반 이상 흥선대원군 품 안에 들어가 있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고종 임금으로 낙점한 신정왕후가 누구인가. 기해년(1839) 천주교 박해를 일으켜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처단한 장본인이라 해도 좋은 돈령부영사 조만영의 딸이다. 기해년 박해 때 죽은 이가 수백이라 들은 일이 있거니와, 이번엔 아마 그 열 배, 백 배를 넘을 터이다. 살얼음판 같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