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인연』 中 <수필>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은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씌어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도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의 일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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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건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져서 내 손까지 오게 되었을까? '

평소에 혼자 궁금해하던 물음이다. 그래서 이 물음에 조금의 힌트라도 주는 책들을 하나 둘 찾아서 읽고 있다. 그냥 궁금했다. 어떻게 이런 물건들을 만들 생각을 했고, 실제로 만들어지고, 어떤 유통경로를 통해서 내 손 안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대한민국 유통지도>, <대한민국 업계지도>라는 책을 통해서 비슷한 물음에 힌트를 찾으려고도 했다. 그렇게 이 궁금증은 항상 간직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책이 내 레이더망에 걸리면 바로 찾아서 읽으리라 생각된다.


오랜 만에 소설을 읽으려고 온라인서점에서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국내작가들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에 항상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던 김중혁 작가의 책을 찾아 보았다. 마음의 빚이라는 건 이동진, 김중혁, 이다해가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즐겨 듣고, 항상 유쾌한 김중혁 작가의 방송을 좋아하는데 그의 책은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만 읽어보고 손을 대고 있지 않아서이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발견했다. 

부제로는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라고 적혀있는 『메이드 인 공장』이다. 이 책의 표지는 상당히 좋다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색을 정확히 어떤 색이라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하늘색(?) 계통의 색에 노란 글씨 그리고 공장의 그림을 간략하게 그려놓은 점이 역시 표지 전문가 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떤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내 손까지 오게 되었을까?' 라는 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이고,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누군가의 에세이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인문학 책을 한참 동안 읽다보면 다른 장르의 책을 한 번씩 읽으면서 환기를 해줄 필요가 있다. 그럴때 누군가의 수필을 읽는 것은 상당히 좋다. 수필은 보통 작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다. 소설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면, 수필은 자기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풀어내서 읽는 사람도 마음이 편하다. 마치 빡빡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편안 옷을 갈아 입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무겁지 않아서 좋다.





『메이드 인 공장』은 김중혁 작가가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만드는 공장을 직접 다녀와서 적은 에세이다. 책에 등장하는 공장으로는 제지, 콘돔, 브래지어, 간장, 가방, 지구본, 초콜릿, 글, 도자기, 엘피, 악기, 화장품, 맥주, 라면 공장이 나온다. 글의 구조도 상당히 참신하고 하나의 아이템에 대해서 간단하게 얽힌 에피소드를 던져주면서 일상에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것들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게 만든다. 이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적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그저 당연히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면 당연한 사물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물이 되고 궁금해진다. 그렇게 삶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책의 본문에도 존재하고, 책 표지의 왼쪽 날개에 붙어 있는 글귀다.


애초 목표는 단순한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공장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건을 만든 장소에 가서 만드는 모습을 보면 물건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공장에는 사람이 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람을 빼고 공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달의 전면을 보며 후면까지 상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장의 진짜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복잡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중국 사서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8조목' 가운데 두 조목인 '격물치지(格物致知)' 다.

'사물을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순한 물건 하나를 깊이 바라보면 그곳에서 사람이 보이고, 세상의 흐름이 보인다. 그렇게 세상의 흐름이 보이면 그 흐름 속에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흥미로웟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궁금했다.오늘 부터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무엇이 있는지 하나하나 적어봐야 겠다. 또 어떻게 그것들이 나에게 왔는지 찾아봐야 겠다. 250페이지의 이 책에서 수천페이지의 지식으로 확장하기 바란다. 


김중혁 작가의 책으로는 두번째 읽는 것인데, 소재가 참신해서 마음에 든다. 그의 활기차고 자신에 찬 목소리 그리고 장난기있는 모습이 그대로 책에 전달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출간된 『가짜 팔로 하는 포옹』도 기대된다. 일단 제목은 잘 지었다. 아직 사놓은 책들이 쌓여있어서 꾹꾹 참아오고 있는데 조만간 김중혁 작가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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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가까이

- 법정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中

 

 

서산에 해 기울어 산그늘이 내릴 무렵,

훨훨 벗어부치고 맨발로 채소밭에 들어가

김 매는 일이 요즘 오두막의 해질녘 일과이다.

맨발로 밭흙을 밟는 그 감촉을 무엇에 비기랴.

흙을 가까이하는 것은

살아 있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흙을 가까이하라.

흙에서 생명의 싹이 움튼다.

흙을 가까이하라.

나약하고 관념적인 도시의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흙을 가까이해야

삶의 뿌리를 든든한 대지에 내릴 수 있다.

 

우리에게 대지는 영원한 모성,

흙에서 음식물을 길러 내고

그 위에다 집을 짓는다.

그 위를 직립 보행하면서 살다가

마침내는 그 흙에 누워 삭아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 삶의 방식이다.

 

흙은 우리들 생명의 젖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씨앗을 뿌리면 움이 트고

잎과 가지가 펼쳐져 거기 꽃과 열매가 맺힌다.

생명의 발아 현상을 통해

불가시적인 영역에도 눈을 뜨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흙을 가까이 하면

흙의 덕을 배워 순박하고 겸허해지며,

믿고 기다릴 줄을 안다.

흙에는 거짓이 없고,

추월과 무질서도 없다.

 

시멘트와 철근과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다.

비가 내리는 자연의 소리마저

도시는 거부한다.

그러나 흙은 비를, 그 소리를 받아들인다.

흙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 버리고 

일구어 놓은 밭흙을 맨발로 감촉해 보라.

그리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

그것은 순수한 생의 기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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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에서 중역들이 인상깊었던 책을 임직원에게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잊고 있다가 어떤 이의 글을 읽었는데 그곳에서도 비슷하게 소개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몇 번 눈에 익다 보면 자연스럽게 책에 손에 간다. 그리고 대부분 후회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 공식은 여전히 통했다. 이틀 동안 두 권의 책을 순식간에 읽었고, 마치 일본 사극을 한 편 보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우에스기 요잔(1751~1822)을 작품화한 도몬 후유지의 『불씨』다.

책 표지에는 '가슴이 뜨거운 지도자의 정의와 신념에 가득찬 개혁실천보고서' 라고 세로글씨로 길게 적혀져 있다.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특히 지도자와 리더십에 대해서 생각할 요소들을 던져준다. 이 책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몇 개 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일본 기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일본 정치가를 물었을 때 우에스기 요잔을 답했는데, 당시 일본인들 중에 많은 사람이 몰랐던 점과, 이 책이 출간 된 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인상 깊게 읽어서 청와대 고위관리들에게 읽게 했다는 후문이다. 이런 영향으로 많은 기업에서는 임원 및 간부급 직원들에게도 많이 읽혀졌다고 한다.


'우에스기 요잔'이라는 이름은 나 역시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그는 250여년 전 파탄지경에 빠진 일본의 요네자와 지방의 번주로 15세의 나이(1767년)로 등극해 2년 뒤 그동안의 관행을 뒤엎는 정치개혁을 단행해서 파탄지경에 이르렀던 요네자와번을 에도 막부의 최고의 번으로 탈바꿈 시켰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정치개혁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자연스럽게 '변화', '개혁', '리더십' 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지금 현재의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분명 리더십과 자기수양에 있어서는 참고할만 하다.


(1권, p162)

다른 지역의 개혁이 실패하게 된 원인에 대해 세이가샤 무리들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 개혁의 목적을 잘 몰랐던 점

둘째, 추진자가 일부 사람으로 제한된 점

셋째, 개혁을 실행하는 정부요원 전원에게도 개혁의 취지가 철저히 알려지지 않은 점

넷째, 개혁의 목적이나 방법이 친절하게 번민에게 알려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된 점

다섯째, 개혁이 추진되면서 막부나 번이 홀가분해지면 당연히 번민의 부담도 가벼워져야 하는데 반대로 박무나 번이 증세를 한 점, 즉 사공육민이던 세율을 오공오민 또는 육공사민의 비율로 인상시킨 예

여섯째, 개혁을 추진하는 관료는 전부 명문출신의 상위자로서 부하에 대하여 지시명령의 방법으로 일관하며 하급자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거나 동정도 하지 않은 점 


(1권, p176)

큰일이지. 그러나 남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할 때에는 우선 부탁하는 사람부터 직접 해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해보이고 말하고, 들려주고 시킨다> 라는 말도 있다. 나도 그 식으로 해보겠다.


(2권, p174)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일반번사들에게 있어서 번주는 구름 위에 있는 존재였다. 구름 위로 올라오라고 해도 쉽사리 되는 일이 아니다. 역시 번주가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권, p208)

개혁의 가장 어려운 점은 옛 것을 부수는 것도, 새것을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시작한 것을 어떻게 유지하는가가 관건이다.


(2권, p222)

눈앞의 현실에 급급하다 보니 개혁 이념의 원대함을 잊은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올바른 길은,

# 사회 상황의 변화와 함께 소속기업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알고

# 그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기업 목적이나 조직구성원의 의식이 현상태로 괜찮은가를 반성하고

# 그것을 어떻게 개혁하여 위를 보좌하고 아래를 지도할 것이가

등을 자신이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고경영자의 측근 보좌역이 할 임무요, 책임이다.


(2권, p232)

다케마타는 착각하고 있다. 개혁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것을 일제히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다케마타는 결과만을 서두르고 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정이다. 요네자와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가슴에 불을 붙여서 누군가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개혁이다.


어린 나이의 '우에스기 요잔'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혁을 성공해낸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7년 동안의 회사생활, 어떤 인연으로 모임을 만들어야 했던 상황들, 어렸을 때의 가족, 그리고 내가 가장인 상황에서의 가족을 생각했을 때 과연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1. 분명한 목적의식, '왜 해야 하는가?' 에 대한 대답

2. 현재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공유와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

3. 리더의 솔선수범 -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명확한 기준 제시를 통해서 구성원의 의사결정에 기준이 되야함

4. 리더의 생각을 이해하고 같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동료

5.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을 중시하고, 구성원들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과 사기증진

6. 결정이 필요할 때의 단호한 결정과 구성원들의 최종 방어선


잠시 고민해보고 적어본 몇 가지다. 아직까지는 특별히 내가 특별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자리에는 딱히 있어본 적은 없는 듯 하다. 글로 표현하기는 쉽지만 실제로는 가장 힘들다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성과를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생각된다. 


책을 읽으면서, 글로 정리해보면서, 그리고 주변에 실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서 바라볼 때, 리더의 자리는 쉽지 않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주변에 의해 혹은 스스로 누르는 압박감에 질식할 것 같다. 하지만 절대 성급하지 않아야 한다. 다급해서는 안 된다. 심리적으로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되겠지만 그 순간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틀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 괜히 작은 일에 빠져 큰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정말 세치 혀의 말로는, 글자 몇 글자의 글로는 쉽지만 분명히 행동에 옮기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사람들에게는 리더가 필요하고, 리더가 되기를 원한다. '과연 나는 어떠할까? ' 라는 자문에 불안하고, 긴장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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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읽었다.

그의 작품은 『데미안』, 『싯타르타』에 이어서 세번째다.

『데미안』은 유독 사람들마다 여러번 읽고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한 번 읽은 나는 지금은 어렴풋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싯타르타』는 우리가 흔히 석가, 부처라고 부르는 고타마 싯타르타와 관련된 내용이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두 작품 모두 우리 내면에 대해서 깊숙히 들어가서 뱉어낸 작품이었던 것 같다.

 

『크눌프』는 이전에 읽은 두 작품 보다는 읽기 편하다.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만 그렇게 무겁게만은 다가오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보다는 밝은 느낌의 주인공 크눌프 때문인지도 모른다.

헤세는 '크눌프'라는 작품 속 인물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크눌프'를 헤르만 헤세가 자신을 본떠서 만든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헤세가 애정을 간직한 인물, '크눌프'에 나 역시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 동안에 좋아하게 됐다.

이런 인물을 가슴 속에 하나, 둘 심어두고 가끔 한 번 꺼내 보는 것도 삶을 사는 재미가 아닐까.

'크눌프'는 어쩌면 나와는 다른 성격의 인물이기에 가슴 속에 더 심어두고 싶은지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 보면 예술은 우리들의 삶의 균형감각을 맞추어준다고 한다.

우울하고 힘든 사람들은 더 침잠해지기를 원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아름답고 경쾌한 미술작품을 통해 위로받는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인 사람은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품에 매료된다.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산부들이 평소에 먹지도 않거나 심지어 싫어했던 음식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몸 속에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 몸이 반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크놀프'를 가슴 속에 담아두고 싶은 이유는 나와는 다른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크눌프'에 대해서,

그가 부럽고 동시에 내 부족함을 대신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질감 뿐만 아니라, 그와 나는 비슷하다는 동질감 또한 갖게 되니 애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는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종말' 이라는 서로 이어지는 듯 하지만 단편적인 작품 세 편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쓰여졌지만, '크눌프'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라는 공통점으로 1915년에 한 권으로 묶여졌다.

 

<초봄>은 크눌프라는 '자유로운 영혼' 크놀프에 대해 여실없이 보여준다.

크눌프는 어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을 하며 떠돌아 다닌다.

세련된 매너와 여행을 통해서 보고 들은 경험으로 펼쳐지는 입담으로 사람들은 그가 그들의 집에 방문해주기를 원한다.

 

'자유롭다'라는 의미에는 때로는 '무절제하다', '버릇없다', '문란하다' 와 같은 곁가지들이 따라 붙는데,

'크눌프' 어떤 게 진정한 자유인지 알고 있다. 친구의 아내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자 재치있게 넘어간다.

하지만 자신이 애정을 가지는 대상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표현한다.

어떻게 보면 이 친구는 한마디로 'Gentle and Cool' 이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크눌프가 그렇게 의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며 영혼이기에 그가 밉지 않다.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은 한 때 크눌프와 친구였던 이가 기억하는 크눌프에 대한 이야기다.

(p76)크놀프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것 불어댈 뿐이지.

작품 속에서 크눌프가 하는 말은 친구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며, 그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는 말한다.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 같다' 라고.

나 역시 크눌프의 말로 회상한다.

 

<종말> '크눌프'의 마지막을 담고 있다.

크눌프의 몸은 점점 아파 온다. 그리고 마치 숙명처럼 고향으로 돌아 간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고향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삶의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다.

크눌프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한다. 무엇인가 잘못된 삶을 살지 않았나 자책한다.

 

그때 하느님이 말한다「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크눌프의 마음은 점점 편안해지는 것 같다.

 

(p134)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이렇게 나는 작품 속에서 '크눌프'라는 친구를 만났고,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는 삶에서 마주한 어떤 사건으로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사건 역시 그의 삶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간 게 아닐까.

나는 '크눌프' 이 친구가 마음에 든다.

자유롭지만 경솔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그가 좋다.

자유, 자연, 여행,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 '크눌프'가 그립다.

어쩌면 나에게는 끊임없는 결핍의 요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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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표지의 중앙에 마르고 잿빛 머리를 한 노인이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검정색 슬리퍼를 신고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끌고 간다. 그 아래에는 제목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라고 적혀 있다. 2013년 7월에 출간된 이 책은 작년 한 해 동안 서점계를 강타했다. 그리고 이 책의 작가인 요나스 요나슨은 이번 책이 데뷔작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대박을 친 것이다.


다들 너무나 좋아하고 항상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기에 작년 한 해 동안에 이 책은 내 읽을 거리에는 배제되어 왔다. 왠지 그냥 남들이 너무 많이 읽는 건 읽기 싫어하는 잘못된 독서방식과 책을 읽어가면서 생겨난 편견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경험한 걸로 봐서 이렇게 장기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들은 분명 이유가 있다. 과연 어떤 이유가 숨겨져 있을까 궁금하다. 사실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같이 책을 읽는 이의 적극적인 추천때문이었다.


그렇게 500쪽에 달하는 하늘색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읽고 있는데 내용이 어이가 없고 황당하다. 중간 중간에 이런 요소들이 조금씩 숨어있었다면 아마 나는 이 책에 큰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작가는 스케일이 다르다. 어이가 없고 황당함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하는 범위를 넘어서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래서 혼자 실소를 터뜨리며 읽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이야기는 두 개의 줄기로 진행된다. 하나는 자신의 100세 생일에 양로원 창문을 넘어 탈출한 노인 '알란' 이 우연히 어느 갱단의 돈가방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나머지 하나는 알란이 태어나서 겪게 되는 수많은 사건을 통해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주로 폭탄전문가로서 살아가는 예상을 초월해버리는 또 다른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던 장면을 한 장면을 꼽자면, '알란 일당'이 검사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었다. 100세 노인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말하는 부분과 삶의 경험으로 교묘하게 정신을 혼란시키는 알란의 모습과 그의 일당들이 중간중간에 증언하는 모습은 유쾌하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그 외에는 미국의 트루먼과 존슨 대통령, 러시아의 스탈린, 스페인의 프랑코,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는 장면은 작품을 흥미롭게 만든다. 어이가 없는 게 우선인 것은 사실이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재미있고 유쾌한 책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보통 책을 읽을 때 연필을 손에 쥐고 읽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처음에 (p47)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다> 이 부분을 줄을 친 후에 연필을 내려놓았다. 


이 책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나눈다면,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유쾌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책으로 기억될 거 같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세계사적인 사건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

-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 이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이다.


▷ 러시아 혁명 (1917년 10월) 

-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 스페인 내전 (1936~1939)

-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 1936년 2월의 총선거에서 스페인에 인민전선 내각이 성립되자 이것에 반대하는 프랑코 장군이 인속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치열한 내전이 일어났다.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이 반정부군 측을 강력하게 지원한 것에 반하여 인민전선 정부군 측을 원조한 것은 소련뿐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 등은 불간섭 정책을 취하였다. 그 때문에 전국은 점차 정부군 측에 불리하게 되어 1939년 3월 수도 마드리드가 함락되어 내전은 프랑코 장군의 반정부군 측의 승리로 끝났다. 


▷ 제2차 세계대전 (1941~1945)

-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서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이다.


▷ 중국 내전과 모택동의 승리 (1949)

- 19세기 말 중국 왕정은 무능하고 부패한데다가 제국주의적인 서양 열강들의 중국대륙 진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중국은 의화단 사건 이후 거듭된 혁명의 진통을 거친 다음 그들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인 중화민국의 탄생을 보게되었다. 이 공화국은 초대 지도자 손문(쑨원)이 일찍이 사망하고 난 다음 1927년에 국민당 장개석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곧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 사이가 결렬되면서 중국은 양대 세력 간에 20년이 넘도록 내전을 겪고 1949년 10월 1일 북경에서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강력한 공산정권을 탄생시켰다.


▷ 한국전쟁 (1950.06.25~1953.07.27)

-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


▷ 68혁명 (1968.05)

- 프랑스 칸대학과 파리대학 낭테르 분교의 학생 시위가 정부의 탄압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러한 정부의 조치에 분개한 각지역의 청년근로자들이 합세하였다. 총 400만 명이 파업과 공장 점거,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정부가 대학교육의 모순과 관리사회에서의 인간소외, 유럽공동체 하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미국, 독일, 일본 등 국제적으로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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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이번에는 책을 읽고 나서 남기는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을 책상 앞에 앉아 이런 저런 문장을 끄적이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왜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음을 알아간다. 


어쩌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번 다 읽고 나서 작품의 해설과 같은 책을 다룬 팟캐스트를 두시간 가량 들었는데, '이런~! 완전히 잘 못 읽고 있었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중요한 부분을 놓쳐버리고 말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읽고 난 후에 계속 걸리는 게 많았다. 아직까지 소설을 깊이있게 읽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늦지 않게 다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된 이청준 작가의 『당신들의 천국』이 이렇게 읽고 난 후에 나를 더 고민에 빠뜨려버렸고, 글을 남기는 것 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소설은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소록도의 병원에 새롭게 부임한 병원장인 현역 대령 조백헌과 섬 사람들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 된다. 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작품 속에도 기자가 등장하듯이 실제 어떤 한 기자가 기사로 쓴 것을 이청준 작가가 보고 나서 이 작품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인 조백헌 대령의 실제 모델인 '조창원 원장' 을 만나 본격적으로 글을 써내려 갔다고 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새로 부임한 조백헌 원장, 한센인을 대표하는 황 장로, 조백헌 원장과 대척점에 서 있는 보건과장 상욱이 있다. 황 장로의 어린 시절, 한센병을 걸리게 되는 이야기 부분은 어떻게 보면 작품 속에서 가장 자극적인 부분이고 극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이것도 실제 황 장로의 실제모델의 실화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고 거기에 허구를 덧씌운다고 하지만 어쩌면 실제 현실이 우리가 생각하는 극적인 소설보다 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나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소록도의 한센병 병원의 병원장으로 온 현역 대령인 조백헌 원장은 소록도를 한센인들을 위한 천국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섬사람들은 이미 수십년 동안 경험해 온 비슷한 병원장이라 생각하고 조원장과의 의지에 맞추어 행동하지는 않는다. 조백헌 원장은 발가락도 몇 개씩 떨어져나간 한센병 환자들로 구성된 축구팀을 만들고 도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조원장은 간척사업을 시작하고 후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쓸 구상을 합니다. 하지만 간척사업을 하면서 소록도 주민들과의 갈등을 겪고, 간척되어져가는 땅을 원하는 섬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결국 병원장에서 해임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후에 다시 일반인의 신분으로 소록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한센병 환자와 일반인들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윤혜원, 서미연의 결혼식을 준비하며 작품을 마치는데...


작품 속에서 갈등의 요소로 작용하는 가장 큰 점은 조백헌 원장이 소록도를 한센병 환자들의 천국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의지와 보건과장 이상욱이 생각하는 결국 그것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런 일을 추진하는 조백헌 원장을 위한 것일 뿐, 소록도의 환자들에게 천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조백헌 원장은 황 장로와 이상욱을 통해서 자신은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진정성있게 섬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후에 원장의 신분이 아닌 일반인의 신분으로 섬으로 들어와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 어쩌면 이게 정말 그들 간의 갈등의 화해, 한센인과 일반인들과의 경계의 허물어짐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결혼 장면으로 모든 것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해설을 읽고 나서, 그리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다룬 부분을 들으면서 이게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았다.

나는 너무 글자 그대로 일차원적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조백헌 원장의 수많은 노력은 어쩌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자기는 아니라 하고 다른 사람도 아닐 거라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일을 한 것인지 모른다. 작품 속에서 동상을 세운다는 개념이 나오는데 어쩌면 그도 모르게 스스로 동상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은 축사를 연습하는 조백헌 원장의 이야기를 결혼을 취재하러 온 기자와 이상욱 보건과장이 엿듣는 장면이다. 조백헌이 진심으로 일반인과 한센인들의 화해라 생각하는 결혼식 축사를 준비하는데 자신은 이미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있는데도 축사 연습을 할 뿐이었다. 결국은 스스로에게 취해있지 않았나 모르겠다. 작품은 축사 준비로 끝난다. 과연 결혼식의 주인공은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게 궁금할 뿐이다.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의 제목의 의미심장함을 느낀다. 이미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제목 속에는 '우리들의 천국'이 되지 못함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백헌 원장이 축사 연습을 엿듣는 장면이 뇌리에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p494) 긴장하고 있던 상욱의 얼굴 위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한 가닥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태는 아직 그 상욱의 웃음의 뜻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그는 조 원장의 그 너무도 직선적이고 순정적인 생각에 다소의 감동을 받은 듯 싶기도 했고, 어찌보면 오히려 씁쓸한 비웃음을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처음 읽었을 때는 순정적인 생각에 감동만을 받은 채 책을 덮었다. 하지만 나중에 뒤돌아봐서 생각하니 상욱의 쓸쓸한 비웃음이 유난히 선명나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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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인상적인 첫 구절이다. 2년 전에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는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넘어가지 못했다. 읽고 나서 해설에 매달리고 내가 잘못읽었나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아마도 더 이해하지 못했던 거 같다. 이번에는 소설의 이야기 중심으로 읽고 그리고 여러 사람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면서 읽어서인지 이해의 폭이 조금은 나아졌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뜨거운 태양 때문에 총을 쏘아 죽이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는 이야기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을 쏘아 죽인 것보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때 냉담했다는 사실, 장례 다음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희극영화를 본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뫼르소에게 비판의 날을 세우고 결국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뫼르소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 내가 아랍인을 쏘아 죽인 것과 상관없는 다른 것을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고 나를 심판하는지 의아해했다. 재판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인데 왜 자신은 거기서 배제되어지는 의아해한다. 사형선고를 받을 때도 자기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같은 사람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세상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p130)아무리 해도 나는 그러한 턱없는 확실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확실성에 근거를 마련해준 재판과 판결의 언도가 내려진 순간부터 어쩔 수 없게 된 그 결말과의 사이에는 어처구니없는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문이 17시가 아니라 20시에 낭독되었다는 사실, 그 판결문이 전혀 다를 수도 있었으리라는 사실, 그것이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프랑스 국민(혹은 독일 국민, 중국국민)이란 지극히 모호한 관념에 의거하여 언도되었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은 그 같은 결정으로부터 많은 준엄성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비벼되고 있던 그 벽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준엄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해서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부조리'와 '실존주의'다.

이 책을 읽을 때 소설을 그냥 이야기 중심이 아닌 그 속에 내재된 의미를 찾아야된다는 생각에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부조리'와 '실존주의'에 대해서 이해하고 난 후에 접한 이야기는 조금 더 풍성해진 느낌이 있다.


옮긴이(이휘영)에 따르면 부조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p176) 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 삼지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 이다.


소설을 있는 이야기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유없이 뜨거운 태양 때문에 총을 쏘았다는 것, 사람을 죽인 후에도 그렇게 큰 죄책감이 없었다는 점은 싸이코패스와 유사하다. 카뮈는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를 조금 더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본질 속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본질이 상실되면 나 조차 상실하게 된다. 이런 관점으로 부터 '실존주의'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의자라고 한다면 의자의 본질은 '앉을 수 있는 것' 이다. 만약 나무로 만든 의자가 다리가 뿌러져서 앉을 수 없다면 의자의 본질은 상실한 것이고 이것은 곧 의자 자체의 상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인간은 고정된 본질이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실존으로 존재한다. 본질로 규정되어 지는 자기를 둘러싼 억압과 규정에서 자유로워지고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은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부조리와 실존주의가 책을 읽고 나서 해설을 통해서 알게 된 이 책의 내포된 의미였다면, 등장인물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인간본연의 모습도 존재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 해변가에서의 아랍인 살해, 재판 과정 중에서도 담담하고 어떻게 보면 무관심했다. 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는 그동안의 모습과는 다른 인간 본연의 삶에 대한 의지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다.


(p134)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 그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나는 언제나 갑자기 놀라는 것을 싫어했다. 무슨 일이든 생길 때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마침내 낮에 좀 자두었다가 밤에는 끝끝내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오기를 기다리게끔 되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 오는 때라고 알고 있던 그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 나의 귀가 그처럼 많은 소리,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그 동안 발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으니 어지간히 운수가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셨다. 하늘이 빛을 디며 새로운 하루가 나의 감방으로 새어들 때 나는 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서 내 심장이 터지고 말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서 판자에 귀를 대고 얼빠진 듯이 기다리노라면 나중에는 나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거칠기가 마치 허덕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짝 놀라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결국 나의 심장은 터지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나는 24시간을 벌었다.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을 29살의 나이에 발표했는데, 어떻게 이런 작품을 그 나이에 발표했을 수가 있을까라는 놀라움과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가장 부조리하게 여겼던 교통사고로 4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된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하나의 작품으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다음은 『이방인』의 이해를 한 층 더 돕는다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카뮈를 다시 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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