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게 많았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하나씩 생겼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작품에 놀라고 매료되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나온 그의 책들을 모두 읽어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작가의 전작을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게 무라카미 하루키와 박범신 두 명이 지금까지의 전부인 듯 하다.
지금까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작품들의 작가를 열거해 보면 김진명, 황석영, 정유정, 천명관, 황정은, 김민규, 조정래, 박범신 정도였다. 물론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아직은 만날 계기가 되지 않아서 접하지 못한 것은 너무 많아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박범신 작가의 작품이 너무 진하게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본성의 미세한 지점까지 파고드는 부분은 너무 예리해서 아프기도 하다. 사람들이 누구나 알지만 표현할 수 없는 그것들을 어쩌면 그는 과감히 표현할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금》을 읽으면서는 몇 번이나 혼자 책을 읽으며 눈물을 떨구었는지 모른다. 그냥 많이 아프고 쓰렸다.
그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며 그들의 내면 속에 떨어진 작은 나뭇잎 하나의 자그마한 움직임도 민감하게 잡아낸다.
p198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에서
이런 박범신 작가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제목은 《산다는 것은》 이다.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부제를 담고 있는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서 박범신이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다소는 풀리는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삶, 산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를 사랑하는 삶, 항상 젊은 낙지, 문어(?) 한마리를 가슴 속에 안고 사는 삶, 봄꽃에 홀로 기뻐하며 소주 한 잔을 하는 그의 삶이 글을 통해 다가왔다.
p68
그러나 젊은 날, 자기 지향을 오지게 쫓아갈 수 있는 동력은 안정감보다 필연적으로 불균형하게 드러나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나는 아직 수정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매사 상대적인 관계로써 안정감을 확보한 '젊은 그들' 보다 여전히 내부적 불균형 때문에 불편하게 살고 있는 '늙은' 내가 오히려 덜 권태롭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p172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평생 남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앉아 원고지와 한사코 마주앉아 있겠는가. 밤새워 원고를 쓰고 난 아침에 아내는 곧잘 '당신 일하는 데 혼자 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미안하네. 왜냐하면 당신 재워놓고 밤새 내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하고 있었거든."
그는 무엇보다도 뼛 속까지 작가이다. 그가 절필선언을 하고 글을 쓰지 않았던 시절이 그는 편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밤새워 원고를 쓰며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를 한다는 그는 분명 이별의 슬픔에 만나지 못하는 아픔에 많이 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이제는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사회의 어른에게 깊은 조언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
노새를 보며 슬퍼하고 봄꽃을 보고 너무 기뻐하던 그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날 선 예리함을 드러내며 사람들이 말하기 망설여하는 것에서도 작가답게 글로써 담아낸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글은 아마도 우리들의 진심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너무 드러내버리니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p210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편차가 심한 민족이다.
심장엔 노무현의 '지향'을 두고 머리로는 이명박의 실용적인 '보따리'를 넘보면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 누구인가. 자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자심의 손이 알아듣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를 버린 것이 누군인가. 그는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남아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미워하는 것으로 양다리를 걸쳤던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명목적인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을 각각 딴 주머니에 넣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마는 우리의 부정직한 이중성, 혹은 과실을 핑계로 한 비겁한 삶의 전략에 그 연유가 있다. 혹시 나는, 우리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할 '짐
꾼'을 잃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아직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네 편의 작품 《소금》,《은교》, 《촐라체》,《산다는 것은》을 만나면서 이미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마다 가슴 아픈 사연이 등장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기꺼이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 온다. 나 역시 삶이라는 것은 기쁘건, 아프건, 한 번쯤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산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인 동시에,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p174
사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예컨대,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쓰고, 가정생활에 30퍼센트를 쓰고, 취미 활동에 20퍼센트를 쓴다. 그는 직장에서도 쉬엄쉬엄 좀 심심하게 일하고 가정에서도 대충대충 오직 습관에 의존해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는 100퍼세트의 에너지를 쓰고 100이라는 인생을 산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100퍼센트를 쓰고 가정 생활에서 100퍼센트, 또 취미 활동에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 이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따라서 삶의 정체성을 뜨겁게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300퍼센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놀라운 산술로 보면 결국 그도 100퍼센트의 에너지로 100의 인생을 살 뿐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연애다. 전자의 인생엔 연애가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혹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다 해도 권태롭지만, 후자의 스타일은 일상에 늘 연애의 본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연애를 동반한 삶은 최소한 쓸쓸하지 않다. 그는 불황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환경을 핑계로 도덕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는 희망이고 도덕이고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꽃이 제 목숨을 바쳐 그것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미물도 마찬가지고 새들도 마찬가지고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지 꽃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다. 그게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는 그 직위나 빈부나 학벌에 관계없이 똑같이 아름답고 고귀하다. 너무도 뻔하고 쉬운 이것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올봄엔 숲이나 뜰로 나가 대지의 굳은 땅을 뚫고 나오는 어린 싹이 부르짖고 있는 도덕상의 선과 악에 대해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람을 보든 자연을 보든 오로지 그 결과만을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동반하기 쉽다. 당신이 지금 보는 아름다운 꽃은 하나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결과 너머의 생명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p26
산악인들이 고산에 오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는, 이른바 극지법 등반.
히말라야 같은 큰 산을 등반하기 위해 본거지를 설치하고 차례로 캠프를 세우면서 정상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흔히 등정주의 등반이라고 한다. 극지법 등반은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므로 그 목표를 위해 방대한 장비와 물자, 그리고 많은 전문 인력들이 동원된다. 이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등반 과정에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높이 오르는가 하는 최종 목표의 높이 서열에 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곳을 정복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등반법으로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이후 세계 산악계에서 거의 사라져가는 전근대적 등반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알파인 스타일
등로주의 등반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최종 높이가 아니라 등반 과정에 있다. 일반적인 코스보다 더 위험한 새로운 코스를 선택하여 타인이나 장비의 도움을 최소화해서, 오로지 오르는 사람의 고유한 판단과 감각에 의존해 정상에 오르는 실존주의적 등반법이다. 오늘날 세계 클라이밍 추세는 단연 알파인 스타일에 방점이 찍혀 있다.
p29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가는 언제나 자신의 '봉우리'를 찾아 오른다.
p34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지는 숲을 보면서 봄과 여름의 숲을 가리켜 '무섭다'고 말한 이상의 통찰력 넘치는 잠언을 생각해본다. 세상도 숲과 같다. 다만 자연의 숲은 홀홀히 옷을 벗는 가을과 겨울이 있지만 인간 세상의 숲은 절대로 가을과 겨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섭고 숨이 막힌다. 무엇을 쫓아 세상의 숲은 저리도 무섭고 울울창창 뻗어가고 달려가는가? 행복을 좇아서? 어떤 행복? 누구의?
p35
내 후각을 후려치고 달아나는 그것은 분명히 방귀 냄새다.
p56
내부 공사를 하면서 오래되어 상판이 휘어 주저앉은 책상을 바꿀 수 밖에 없어 그걸 버리라고 했더니, 버리기 쉽게 한다고 대뜸 망치질이다. 휘어진 책상의 상판이 망치질에 두 조각나는 순간 마치 내 허리가 조각나는 것 처럼 아프다. 오래 쓴 책상이다. 내가 쓴 소설의 3분의 2는 아마 그 책상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원고를 쓰다 말고 지쳐 거기에 엎드려 잠든 적도 많다. 그 책상으로 작가의 외길을 멈추지 않고 갔고, 그 책상으로 아이들 셋을 먹이고 가르쳣으며, 그 책상으로 지금 고치고 있는 이 집도 지었는데, 망치질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끝장나고 만다. 내 삶의 정체성과 내 삶의 가장 뜨거웠던 추억들도 '책상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쓴 소설 중에 <더러운 책상>이 있다.
글쓰기를 지향하는 한 청년의 내적 분열을 다룬 소설인데, 그 소설에서 가리키는 '더러운 책상'은 오래 쓴 낡은 책상이 아니다. '더러운 책상'은 그 책상에서 공부하고 배운 것을 오직 개인의 영달과 소비적인 자본주의 안락에 매진하고자 사용하는 경우의 책상이다. 어떤 이의 책상은 낡았어도 깨끗하고 어떤 이의 책상은 비록 새것일지라도 더럽다. 내 책상은 더러운 책상이었을따. 깨끗한 책상이었을까.
p57
부서진 소쿠리를 마른 그릇으로 재사용하려고 비료포대 종이로 예쁘게 바르던, 또 몽당연필을 못 쓰는 붓 뚜껑에 박아주던 어머니가 그립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머니는 진실로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구분할 줄 알고 있었으나, 대학까지 보낸 내 아이들에게 나는 그것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첵에 가슴을 치는 '불황'의 봄이다.
p66
사랑은 합리성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감정과 다름없어서, 한번 연애에 돌입하면, 무슨 일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내부에서 끊임없이 추락과 상승이 반복되고, 주관과 객관이 전도되고, 이성적 판단과 감성적 선택의 경계가 무화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내부의 열망으로 모든 감각체계가 풍뎅이처럼 부풀어 올라 매사에 균형과 안정감을 잃게 되는 것이다. 공부라고 뭐 다르겠는가. 특히 창작이란 비정상적인 감정의 반응을 포착하여 그 씨앗으로 얻어내는 과실 같은 것이라서, 심리적 균형은 경우에 따라 언제든 독이 될 수 도 있다.
p68
그러나 젊은 날, 자기 지향을 오지게 쫓아갈 수 있는 동력은 안정감보다 필연적으로 불균형하게 드러나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나는 아직 수정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매사 상대적인 관계로써 안정감을 확보한 '젊은 그들' 보다 여전히 내부적 불균형 때문에 불편하게 살고 있는 '늙은' 내가 오히려 덜 권태롭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p77
인간은 피부 색깔로 줄 세워질 수 없고, 문화엔 서열이 없다는 게 세계화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상식이다. 그러나 개발 이데올리기가 만든 경제제일주의는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강력한 습관을 만들어 우리에게 주입시켰다. 제3세계 사람들에게 유난히 야박하게 구는 심리의 밑바닥엔 분명히 모든 생명 값이나 문화 값조차 재빨리 수직으로 서열화하고 마는 천박한 후천적 습관이 작용하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의 콤플렉스, 혹은 가진 자의 우쭐함에 계속 사로잡혀 산다면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 될 게 뻔하다. 얼마 전, 십팔 년이나 우리 땅에 머물렀던 네팔인 '미누'가 내 생각으로는 이미 한국인이 되고만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추방될 때 남긴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내가 한국에서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사람입니까..... 한국이 너무 슬퍼요."
p86
사람의 영혼은 짐승이 사는 시궁창으로부터 신이 사는 하늘까지 걸쳐져 있을 진대, 어떤 층위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겉으로 보아선 그게 그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지 않다. 깊이 들여다보면 지금 이 순간도 누구는 시궁창 가까이 살고, 누구는 하늘 가까이에서 살고, 또 누구는 지상과 하늘로 추락과 상승을 밥먹듯 하면서 산다. 그것이 모여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p87
필요한 건 그리움이고 그리움이 깊어지는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보는 일이다. 혹은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서' 떠나온 것들 때문에, 혹은 이룰 수 없는 허다한 꿈 때문에 깊은 밤 홀로 앉아 그리운 많은 것들이 내 몸 안에 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때로 들여다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목표는 꿈이 아니다. 목표 너머를 보는 마음이 꿈의 시작이고,그로써 그리움이 깊어지면 우리의 삶은 더욱 향기롭게 깊어질 것이다.
p100
올 설엔 늙어가는 아버지도 보자.
뒷전에 물러앉아 헛기침이나 날리고 있는 아버지가 권위를 부리려고 그렇다고만 단정해선 안 된다. 어쩌면 민망해할지 모를 그들을 따뜻이 불러 함께 차례상 제수를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회가 그들에게 역할을 분배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한때 권세를 누렸지만 그들이 애당초 원해서 누렸던 권세는 아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이로부터 권력자로 '길러졌기'때문에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잘모소딘 가부장제의 일차적 희생자인지 모른다.
p103
누가 새삼 훈계를 해서 변화한 것은 더욱더 아니고, 경험의 축적에 의한 변화도 아니다. 저절로 예까지 오고 만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시간이 나를 태워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비와 불심이라는 게 뭐 따로 있겠는가. 시간은 쫓아 발에 물집이 생길 만큼 걷고 걸었더니, 어떤 날 자비심 같은 것이, 사물에 대한 애달픈 연민 같은 것이 내 안에 들어와 세상만물이 다 예쁘다고, 이를테면 마음의 눈을 띄어준 셈이다.
p104
사람처럼 추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독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불쌍한 것이 없고, 그리고 사람처럼 예쁜 것이 없다. 사람 속엔 무엇보다 사랑의 감정이 깃들어 있으니 그럴 터이고, 사람만이 삶의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이다. 모든 게 영원하다면 무엇이 예쁘고 무엇이 또 눈물겹겠는가
p113
힌두교도들에겐 일반적으로 삶을 운영하는 네 개의 사이클이 있다.
어릴 때는 배우고 익히는 학생기로 살고, 철들면 일, 결혼, 부모 노릇하며 가주기로 살고, 늙으면 모든 걸 자식에게 물려준 뒤 숲으로 들어가 유유자적 임주기로 살고,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순례길로 나서 흘러 다니는 유행기로 사는 게 그것이다. 이 사이클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자연으로 보고 그것에 순응해 보편적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p147
"대지는 우리 자신에게 온갖 책보다도 많은 걸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니까. 인간은 장애물과 더불어 겨룰 때 비로소 제자신을 발견하는 법이다."
p149
책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의 얼굴은 착하고 유익한 것으로서 우리들 영혼을 깊이 발효시켜 향기롭게 하지만, 또 하나의 얼굴은 파괴적이어서 우리들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서는 그런 점에서 유익하면서 동시에 위태롭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위태롭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끝없는 일상의 권태와 무위를 책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뻔하고 뻔한 습관적인 삶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경제적이고 빠른 길은 독서 밖에 없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이미 세계가 너무 섬세하고 조직적으로 짜여 있어 어떤 모험도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152
우리는 매 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적 경쟁심이 부추기는 욕망과 알량한 수준의 안락을 추구할 뿐인 '습관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한마디로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이고, 그래서 거의 평생 우리는 관행과 습관에 의지해 삶을 상투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혹하게 말해서 '나의 삶'이 아니다.
p166
바람이 불었고, 감나무 잎에 머물렀던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나서 다시 보니, 그가 거기 없었다.
p167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한 부분이며,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된 존재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사유와 감정이 주변의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여 일종의 의식이 빚어낸 착시현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미혹이 바로 우리 자신을 가두고, 우리를 개인적인 욕망과 가까운 몇몇 사람에 대한 애정에 집착하게 만든다. 살아 있는 우리의 임무는 모든 살아 있는 목숨들과 자연 전체를 포용하기 위해 자비심의 테두리를 좀더 넓힘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러한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p172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평생 남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앉아 원고지와 한사코 마주앉아 있겠는가. 밤새워 원고를 쓰고 난 아침에 아내는 곧잘 '당신 일하는 데 혼자 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미안하네. 왜냐하면 당신 재워놓고 밤새 내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하고 있었거든."
p174
사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예컨대,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쓰고, 가정생활에 30퍼센트를 쓰고, 취미 활동에 20퍼센트를 쓴다. 그는 직장에서도 쉬엄쉬엄 좀 심심하게 일하고 가정에서도 대충대충 오직 습관에 의존해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는 100퍼세트의 에너지를 쓰고 100이라는 인생을 산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100퍼센트를 쓰고 가정 생활에서 100퍼센트, 또 취미 활동에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 이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따라서 삶의 정체성을 뜨겁게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300퍼센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놀라운 산술로 보면 결국 그도 100퍼센트의 에너지로 100의 인생을 살 뿐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연애다. 전자의 인생엔 연애가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혹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다 해도 권태롭지만, 후자의 스타일은 일상에 늘 연애의 본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연애를 동반한 삶은 최소한 쓸쓸하지 않다. 그는 불황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환경을 핑계로 도덕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는 희망이고 도덕이고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p182
"나는 사랑을 찾아 헤맸다. 첫째는, 그것이 황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황홀은 너무나 찬란해서 몇 시간의 이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남은 생애 전부를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가끔 있었다. 둘째는, 그것이 고독감은, 하나의 떨리는 의식이 차디찬, 불모의 끝없는 심연을 바라보는 무서운 고독감을 덜어주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다녔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랑의 결합 속에서 성자와 시인들이 상상한 천국의 신비로운 축도를 미리 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헤맸다.
p185
나는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 사랑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상기했고, '내게 있어 연애란 유일한 사업이었다'는 스탕달의 고백도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가파른 세계화에 따른 과도한 경쟁 때문에 사랑의 감정조차 재빨리 일상화되고 만다는 식의 보편적 발언들은 너무 일반적인 속단이 아닐까. 삶이 사막처럼 느껴진다면 오히려 사랑에의 갈망이 더 깊어진다는 고전적인 생각은 과연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p185
자본주의적 경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끝없이 이간질해 황폐화시킨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의 갈망이 더 타오르는 것이 인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필요한 것은 타오르는 사랑의 갈망을 자학적으로 억누르거나 일반화하지 않는 정직성의 회복이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랑으로써 존재의 진정한 품위를 높이지 않는 한 행복은 나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p186
나는 "사랑의 결합 속에서 성자와 시인들이 상상한 천국의 신비로운 축도를 미리 보았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아직도 굳세게 믿고 있다.
p187
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 속에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나서 또한 이렇게 썼다.
"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이다.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었다. 황폐한 벌판에서 코스모스를 만나면 나는 또 그것과 똑같은 고독을 느낀다."
p188
"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계절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버려야겠다.
p189
가을이 깊어지면 그러하니, '혼자'가 되자.
p191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하는 모든 것은 어떻게든 곁에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고 이미지뿐이다. 사랑은 영원한 추상명사에 불과하다. 증명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사랑에 의한 헌신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헌신의 주체자에겐 어저며 '자학의 남모르는 축적'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이것은 심한 비유인가.
p198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에서
p210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편차가 심한 민족이다.
심장엔 노무현의 '지향'을 두고 머리로는 이명박의 실용적인 '보따리'를 넘보면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 누구인가. 자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자심의 손이 알아듣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를 버린 것이 누군인가. 그는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남아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미워하는 것으로 양다리를 걸쳤던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명목적인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을 각각 딴 주머니에 넣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마는 우리의 부정직한 이중성, 혹은 과실을 핑계로 한 비겁한 삶의 전략에 그 연유가 있다. 혹시 나는, 우리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할 '짐
꾼'을 잃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p225
<행복론>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알랭은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성공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라고 설파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족하는 지점'
p269
"신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가 한 말이다. 애당초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으므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한 표현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제도적 필요에도, 또는 그 어떤 운명적 우연에도 예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의 지도를 따라 사는 일은 그런 점에서 행복의 지름길이고 존재의 빛나는 증명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