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전에 상당히 인상깊게 읽은 책 중에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있었다. 『스토너』의 마지막은 스토너가 암을 선고 받은 후 죽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의 삶은 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힘든 삶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스토너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마지막을 맞이 한다. 당시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러시아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중단편 중에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를 읽었는데 『스토너』의 마지막과는 대조적으로 읽으면서 내가 너무 조마조마 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명성도 있었지만 삶의 마지막으로 다가올수록 그가 살아온 삶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괴로워 한다.


(p103) 왜? 왜 이렇게 된 것이지? 그럴리가 없다.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라면 왜 이렇게 죽어야 하고 죽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한단 말이냐? 아니다, 뭔가 그게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난 정해진 대로 그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잘못될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삶 이후의 세상인 죽음에 대하여 궁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종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으로 채워진 사후세계의 그림을 제시하며 사람들의 두려움을 달래준다. 가끔 죽음의 문턱을 오간 사람들이 말하는 신비체험 같은 것들이 있지만, 결국은 모두 살아있기에 죽음은 여전히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감춰진 세상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어느 정도 성공한 법조인인 이반 일리치가 어느 날 부터 알 수없는 아픔에 고통받다가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이야기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반은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왜 이렇게 빨리 죽어야 하느냐는 의문에 휩싸인다. 자신의 몸은 점점 약해지고 움직임 조차 힘들 때, 건강한 육체를 지닌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평소 어느 정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한 자신의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서 무의미했던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내면의 갈들을 겪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톨스토이의 중단편에서 손꼽는 이유는 아마도 모든 죽음은 사적이고 그들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겠지만, 어쩌면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시점에는 어쩌면 사람들의 심리와 감정이 이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죽음의 추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추체험은 변증법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삶'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박웅현,『여덟 단어』中) 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 '죽음을 기억하라'와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조합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고 그러니 지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저는 이런 태도가 자존 같습니다.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운명이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은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 속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느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무의미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 역시 느끼게 된다면 어떨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얼마나 속상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살면서 조금씩 생각해봐야 한다. 죽음을 가정하고 지금을 돌이켜본다면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조금은 덜 후회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무거운 주제지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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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단편소설로 평가받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잊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초반에 무진의 안개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 부부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안개를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 작가 김승옥과 그리고 그의 우리말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겨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더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p10)


『무진기행』은 1964년 작품이다. 

그 시대를 잠깐 살펴보면, 1960년 4월 19일 자유당정권의 부정 선거에 반발해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혁명이 일어나서 이승만과 자유당의 12년간의 장기집권이 종식된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한다. 그 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1962년부터 추진하면서 전후 산업화가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렇게 196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대적 배경을 감춘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시대를 담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제약회사 전무가 되기 위해 아내와 장인이 손을 쓸 수 있도록 잠시 무진에 온 주인공과 고등고시를 패스해서 세무서장이 되어 무진에 있는 친구 조가 당시 한국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속물주의, 출세주의를 엿보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50년 뒤의 한국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나 다른 요소들은 배제하고, 초반에 묘사된 무진의 안개가 작품 속을 뒤덮은 것 처럼 축축하면서도 희미한 그리고 쓸쓸한 감정을 읽는 내내 떠나보낼 수 없었다. 특히 어머니의 산소에 들렸다가 방죽길로 돌아오는 길에 약을 먹고 자살한 술집여자를 보게되는데 이 부분에서 작품 속 나의 쓸쓸함이 진하게 느껴지는건 왜 인지 모르겠다.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 해제의 사이렌이 불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나는 슬며시 잠이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p32)


주인공인 나를 보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성공을 했지만 무진의 안개에 둘러싸여 희미하게 보이듯이 삶에 대한 애정이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결핍이 느껴졌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보다 더 못한 경제적 여유만을 쫓으려고 아둥바둥 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잠시 서글프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읽고 나서 분명 좋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이 있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김미현 평론가의 글로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 본다.


"김승옥의 소설은 1960년대 서울의 근대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첨예하게 문제 삼는다. 그래서 '감수성의 혁명'을 보여 주면서 '슬픈 도회의 어법'을 그 누구보다도 '지적인 절제'를 통해 소설화함으로써 '1960년대 문학의 기둥'이라는 찬사를 받는 김승옥의 소설은 한국 문학의 근대성 논의에서 뚜렷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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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메아리가 퍼지듯이 남는 한 편의 짧은 이야기,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읽은 다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짧은 중단편 소설이지만 읽는 이에 따라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측면이 다양하고 흥미로워서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나 곁눈질하는 재미도 상당하다.


『필경사 바틀비』(1853년 作) 는 복사기가 없던 당시에 필사를 하고 글자 수대로 돈을 받던 직업이었던 필경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바틀비의 이야기다.  어느날 변호사 사무실에 바틀비가 필경사로 들어오게 된다. 변호사는 성실하고 업무에 충실한 바틀비를 마음에 들어한다. 하지만 필경의 일 외에 서류를 검증하는 일을 하자는 변호사의 말에 바틀비는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변호사는 당황스럽고 놀랍니다.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수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p29)


바틀비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나중에는 필사 자체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을 자신의 거처로 정하고 잠을 자고 생활을 한다. 하지만 어떤 요구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다. 변호사는 바틀비의 이러한 태도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는 듯 보이지만,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면서 내적갈등을 겪는다. 결국 변호사는 이사를 하기로 한다. 하지만 바틀비는 여전히 기존의 사무실과 건물을 떠나지 않고, 결국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의해서 구치소에 보내지게 된다. 그리고 구치소에서 음식을 거부하고 결국은 죽음을 마주한다.


이야기 자체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도대체 왜 바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왜 필경사가 필경을 하지 않고 변호사 사무실에 무단 거주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바틀비의 죽음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가? 라는 질문도 하게 된다. 이 책의 말미에 '옮긴이의 말'에 보면 이 책은 보기에 따라 고립과 소외, 산업화된 일터와 본질과 계급투쟁, 노동운동, 형제애, 정신질환, 허무주의, 메시아론 등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가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읽었는데, 읽는 이들마다 생각하는 관점이 달랐다. 어떤 이는 바틀비를 우울증 환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바틀비가 그렇게 되기까지 변호사가 취하는 애매모호한 태도에 대해서 지적한다. 다른 관점으로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상징하는 유산계급과 필경사라는 직업이 대변하는 무산계급을 언급하며 계급투쟁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면서 계속 떠올랐던 책이 있었다. 바로『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또 다른 책인 『시민불복종』이었다.『시민불복종』에서 소로우는 인두세를 내라는 경관의 요구에 거부한다. 그는 노예제도를 암암리에 인정하고 멕시코를 침략하는 제국주의 전쟁을 서슴지 않는 미국 정부를 지지할 수 없고, 그런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를 유지하는 세금을 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이 책에 대해서 알았을 때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상당히 신선했다. 남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기를 들 수 있는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필경사 바틀비』에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시민불복종』은 1849년 작품으로 1853년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와 같은 시기 그리고 미국이라는 장소적 배경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두 작품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점이라 생각한다.


중단편의 길지 않은 글이라서 두 번을 읽었다. 우선 내용 자체가 대단히 흥미로워서 읽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방식이 아니고,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와 내적갈등을 통해서 그려지기에 읽는이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읽히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책 내용이 차곡차곡 정리되는 기분이 아니고 모호하고 애매하게 남기는 하지만 그런 모호함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생각을 남기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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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한 삶에 대한 기록, <토너>

 

‘묵묵하다’ 라는 단어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사전에서 다시 찾아보았다. 이 작품을 읽고 머릿속에서 맴돌던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주 읽던 책들과 반응되는 감각기관이 다른지 평소와 다르게 읽는 내내 차분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작가인 ‘존 윌리엄스’는 1922년 생으로 작가인 동시에 덴버대학교에서 30년 간 문예창작을 가르친 교수였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생전에 총4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으며 1994년에 세상과의 인연을 접는다. 그의 작품 중 『스토너』는 196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한 동안 독자들에게 잊혀졌다가 최근 유럽에서 재조명 받기 시작하며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평범한 농부의 아들인 스토너는 농업을 배우기 위해 미주리대학에 입학했지만, 문학수업에 매료되어 영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영문학 연구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진지한 애정을 가진 교수가 된다. 아내 이디스와 우연히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딸 그레이스를 얻게 된다. 하지만 사랑보다는 억압적인 분위기의 집에서 탈출이 우선이었던 이디스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딸 또한 비극의 씨앗을 이어받아 어머니를 떠나기 위한 수단으로 임신을 택하게 된다. 스토너는 한때 대학의 강사였던 캐서린 드린스콜과 진지한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동료교수 로맥스와 학내에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그는 묵묵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은퇴를 몇 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그 동안의 삶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스토너의 삶을 곱씹어 보면 많은 부분에 조용한 비극들이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아마 어떤 이들은 이 중 하나를 겪는다면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실패와 갈등을 내포한 비극을 삶의 자연스런 한 부분인 양 조용히 담담하게 겪어낸다. 그의 무심한 듯한 담담함 속에서 독자들은 다른 소설에서 느껴지는 극적이고 예상하지 못한 감동과는 사뭇 다른 깊이 있고 울림이 있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작품 말미에는 스토너가 스스로에게 세 번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에 대한 마지막 물음에 대한 답의 일부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p390)

그는 인생의 매 순간을 타인의 삶의 잣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애정과 의미를 두고 살아왔다. 어렴풋이 떠올렸던 실패도 삶의 바다 속으로 들어오는 작은 물줄기로 차분히 받아낸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죽어갔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삶을 정리하면서 하기에는 아까운 이 물음에 스스로의 삶으로 묵묵히 답해야 하지 않을까. 사전에서 찾은 묵묵하다의 뜻은 말없이 잠잠하다였다. 말없이 잠잠히 이렇게 하루를 살아낸다. 하루를 살아간다.

 

이 책을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일상에 전복되어 자신을 잃지 않았나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 본다. 스토너의 내밀한 고민과 상처들이 독자들의 감춰진 갈등과 생채기를 드러내어 자신들의 삶을 반추해 볼 시간을 내어주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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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설

- 함민복


손가락이 열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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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通)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

주역 사상의 핵심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리게 되며, 

열려 있으면 오래 간다는 뜻입니다.

양적 축적은 결국 질적 변화를 가져오며,

질적 변화가 막힌 상황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열려 있을 때만이 그 생명이 지속됩니다.

부단한 혁신이 교훈입니다.



정체성의 기본은 독립입니다

국가의 경우든 개인의 경우든

정체성의 기본은 독립에 있습니다.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지 않고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자신의 아픈 역사와 현실을 자부심으로 껴안는 

치열한 독립의지가

정체성의 기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관해난수 (觀海難水)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합니다.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자유

자유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

셋째,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이 가로 막으면 돌아갑니다.

분지를 만나면 그 빈 곳을 가득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마음을 비우고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

결코 무리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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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관리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납니다. 유령은 사람들이 걸치고 있는 '외투'를 벗겨가죠. 사람들은 그가 국에 근무하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임을 알아봅니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모든 사건은 제목 그대로 <외투>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아카키 아카키비치는 정서 업무를 맡고 있는 9급 문관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에는 충실했지만,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죠.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자신의 외투가 너무 낡아서 페테르부르크의 추운 겨울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해 재봉사인 페트로비치를 찾아가 수선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너무 낡아 수선조차 힘들어서 새롭게 외투를 맞추게 되죠.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는 최대한 돈을 아껴서 외투를 살 돈을 마련하려 합니다. 눈물겹습니다.


저녁마다 마시던 차를 끊고, 저녁마다 켜던 촛불도 켜지 않고,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주인 여자의 방으로 가서 그녀가 켜놓은 촛불 밑에서 하기로 했다. 길을 걸을 때는 구두 밑창이 빨리 닳지 않도록 가능한 한 가볍고 조심스럽게 거의 발끝으로 돌과 판석을 밟고, 속옷이 빨리 해지지 않도록 세탁부에게 가능하면 속옷 빨래를 덜 맡기고, 집에 돌아오면 매번 속옷을 벗고 아주 오래됐지만 잘 보관해온 목면 실내복만 걸치기로 했다. (p33)


새로운 외투를 걸친 날은 아마 아카키 아카키비치 생애에서 가장 장엄한 날이었을 겁니다. 새 외투를 입고 국으로 출근을 합니다. 동료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파티에도 참석하게 됩니다. 파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진열장의 여자그림을 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여자를 뒤따라 갈까하는 충동도 생깁니다. 외투 하나에 자신감이 생겼나봅니다.


그런데 밤 늦은 시간, 광장에서 강도를 만나고 외투를 빼앗깁니다. 누군가에는 단순한 외투일 뿐이지만 아카키 아카키비치에게는 어쩌면 삶의 목표일지도 모르는 그런 '외투'였습니다. 이제 외투를 찾아 나섭니다. 처음에는 강도를 당한 광장 끝에 있던 입초 근무 경관에게 찾아가지만 날이 밝으면 파출소장을 찾아가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경찰서장을 찾아가라고 하지요. 그래서 경찰서장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경찰서장은 아카키 아카키비치가 그 시간에 무엇을 했으며 불법적인 장소를 이용했는지 여부를 조사합니다. 아카키 아카키비치의 동료 관리들은 직접 고관을 찾아가라고 조언합니다.


이 고관은 전에는 별 볼일 없다가 최근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그는 원래 착한 사람으로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관이라는 지위는 그를 혼란 속에 빠뜨렸죠. 그는 자신보다 직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엄격, 엄격 또 엄격"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고, 그의 말에는 보통 세 문장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소?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누가 앞에 있는지 알고나 있소?" 이 들어있었습니다.




아카키 아카키비치는 고관을 만납니다. 고관은 다른 관리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자신을 찾아온 아카키 아카키비치에게 언성을 높여 말합니다.

"당신이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아오?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나 아오? 당신은 알고 있소? 알고 있느냐고? 내가 당신에게 묻고 있잖소." (p57)

아카키 아카키비치는 완전히 넋이 나가 비틀거렸고 온몸이 떨려 서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입을 벌린채 길을 잃고 눈보라 속을 걷다가 편도선이 붓게 되고 몇 일을 앓다가 안타깝게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몇 일 후 매장이 되고 그의 유품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가 맡고 있던 국의 정서 업무도 어느새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됩니다. 그는 흔적도 없이 세상 속에서 사라집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카키 아카키비치와 고관 모두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에게 둘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거 같아서 불편합니다. 자신의 차, 옷, 가방이 마치 자신을 말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경계를 긋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윗사람과 동료들에게는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이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거침없는 폭력과 무분별한 권위의식을 세우려하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제 '외투'는 어떤게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제 삶의 목적이 '외투'를 쫓는 것으로 그쳐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됩니다. 

제 '감투'는 어떤게 있을까요? 저도 모르게 가해지는 폭력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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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읽었다. 그의 작품 중에 두번째로 접한 책이다. 처음은 그가 노벨상을 받게 된 작품 《노인과 바다》를 통해 만났다. 그의 후반기 작품을 먼저 읽고 나서 그의 초기작인 책을 읽었다. 한참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났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작품은 상당히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다른 작가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름은 그의 작품보다 더 유명하다. 극적인 삶을 살았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느낌을 준 두 작품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들이 더 궁금해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에 대한 궁금점도 늘어만 간다.

 

문학 작품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서 읽히지만, 때로는 그 시대와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는 듯 하다.  F.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고 나서 재미있게는 읽었지만 왜 이 책이 그렇게 찬사를 받는지 알지 못했다. 작품 해설과 다른 책들을 통해 1920년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해 알고 나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배경적 지식이 없으면 충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배경지식이 아니라 소설 그 자체만을 읽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배경 지식이 중요함을 느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읽고, 다음에는 배경지식을 찾고 다시 곱씹어보는 형식으로 읽게 되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역시 1920년대 미국 소설이다. 당시의 젊은이들을 'Lost Generation' 이라고 칭한다. 과거에서 부터 이어져왔던 많은 사상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이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목적을 상실했고, 그저 술이나 마시고, 소비문화에 젖어 들어갔다.

 

이 책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라고 하면

"1920년대 미국인들이 프랑스 파리로 와서 그곳의 문화를 즐기고, 술을 마시고, 이성간에는 최근 유행하는 some을 탄다. 그러다가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기로 하고 그곳에서 다시 술 마시고 낚시하고 투우를 즐기는 이야기" 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시의 배경을 모르면 이렇게 거칠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책의 내용보다는 주요등장인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잠시 그들을 소개한다.

 

제이크 반즈
- 소설 속에서 '나'로 등장하는 화자이다. 1차 세계대전 때의 부상으로 성불구가 되어버린 미국인 신문기자


레이디 애슐리 브렛
- 전쟁 중 특별지원 간호사가 된 영국의 귀족 부인, 제이크 반즈를 사랑하게 되지만 제이크 반즈의 성불구로 육체적인 사랑은 하지 못한다. 후에는 마이크와 결혼을 약속하기도 하고, 로버트 콘과 관계를 맺기도 하며, 어린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도 사랑에 빠진다.

 

로버트 콘

- 대학시절에는 미들급 챔피언, 대학 졸업후 첫번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 셋이 생겼다. 부유한 아내는 다른 남자와 만나게 되면서 나가고 후에 프랜시스라는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함께 미국에서 유럽으로 한다. 그때 2년 동안 파리에 머물었는데 이 시기에 장편소설을 쓴 작가이다. 후에 브렛을 좋아하게 된다

 

빌 고턴

- 제이크 반즈의 친구로 작가로 어느 정도 성공을 하여 돈을 벌었다. 여행 차 반즈를 만나고 그와 스페인 여행에 동행한다.

 

마이크 캠벨

- 브렛과 결혼을 하려는 사내로 사업을 하다가 파산을 하게 된다.

 

페드로 로메로

- 스페인의 젊은 투우사로 다른 투우사들보다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브렛이 나중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그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자주 들르는 커피숍과 바에서 그들은 어떤 옷차림과 자세로 있었을까? 당시 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책을 읽고 나서 당시의 모습을 잠깐 찾아보기도 했다. 특히 작품 속의 브렛이 궁금했다. 어떤 패션의 여성이었을까? 책에는 그녀에 대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p40

소매 없는 스웨터에 트위드 치마를 입고 머리는 사내아이처럼 빗질하여 뒤로 넘기고 있었다. 이런 유행은 하나같이 그녀가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 경기용 요트의 동체 같은 미끈한 곡선미를 지닌 몸매에 그런 스웨터를 입으니 곡선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트위드 치마에 소매없는 스웨터는 아니지만 당시 미국의 패션을 알아 볼 수 있는 사진을 잠깐 찾아보았다.


▲ 1920년대의 미국 패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여행을 한다. 그들이 여행을 갔던 스페인의 산 페르민 축제는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다른 나라의 축제 소식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자주 등장하던 그 장면이 그려진다. 아마 1920년대도 지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책 속으로 돌아가서 팜플로나의 소몰이 축제 현장에 들어가본다. 그리고 나서 근처 바에서 압생트도 한 잔 해본다.

 


 

 

▲ 스페인 산 페르민 축제

 

책을 읽다가 책 속의 상황이 너무 부럽고 나 역시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적어둔 부분이 있다. 빌과 제이크가 낚시를 하다가 샘물에 담가놓은 포도주와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장면인데, 나중에 한 번 시원한 계곡이나 개울에 와인을 시원하게 해서 친구들과 함께 먹어 보련다.

 

p186

나는 샘물로 걸어가서 포도주 두 병을 꺼냈다. 병은 차가웠다. 나무 있는 데로 돌아오는 중에 술병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신문지 위에 도시락을 놓고 포도주 한 병은 마개를 따고 나머지 한 병은 나무에 기대 세워 두었다. 빌은  손을 닦으면서 올라왔는데 그의 광주리가 고사리로 불룩해져 있었다.

"어디 그 병 좀 봐." 그가 말했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뽑은 뒤 병을 기울여 마셨다. "어휴! 두 눈이 다 짜릿해지는걸."

"어디 한 번 마셔 볼까."

포도주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왠지 녹슨 쇠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렇게 형편없는 포도주는 아니야." 빌이 말했다.

"차가워서 그런 거지." 내가 말했다.

우리는 조그마한 점심 꾸러미를 풀었다.

"닭고기군."

"삶은 달걀도 있어."

"소금은?"

 

책을 읽고 나서 뒷부분에 나오는 <작품해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은 Lost Generation 이지만 무조건적으로 방황하는 것이 아닌 희망이 있다라고 표현한다. 콘, 브렛, 마이크의 경우는 욕망과 알코올에 빠져있지만 제이크와 빌은 자신들의 중심을 잡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브렛이 투우사 청년 로메로를 보내주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p367

"난 이제 서른넷이야. 어린애들을 망치는 그런 화냥년이 될 생각은 없어."

 

투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거세된 소가 나오는데 거세된 소는 다른 소의 공격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직접 다른 소를 공격하지 않고 사나워진 소를 달랜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런 생소한 부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거세한 소와 성불구가 된 화자 제이크 반즈가 계속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등장인물들은 제이크 반즈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때로는 친하게, 때로는 서로 반목을 하면서 지낸다. 그리고 항상 그 중간에 제이크 반즈가 있다. 이렇게 읽고 나서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지니 곱씹을 거리가 많이 생긴다. 이래서 잠시 떨어져서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p204

"여간 재미있지 않지. 한 번에 한 마리씩 우리에서 내보내는데, 놈들이 울타리에 들어가면 거세한 수소들을 같이 넣어 서로 싸우지 않게 하는 거야. 황소들이 거세한 소들을 향해 덤벼들지만 거세한 소들은 마치 노처녀처럼 놈들 주위를 빙빙 돌면서 달랜단 말이야." 내가 말했다.

"거세한 소들을 떠받지 않아?"

"떠받지. 어떤 때는 곧바로 달려가 죽이는 일도 있어."

"그럼 거세한 소들은 아무 반항도 못한단 말이야?"

"못해. 그저 친구가 되려고 할 뿐이지."

"뭣 때문에 그 안에 넣어 두는 거야?"

"황소들을 달래서 돌담을 들이받아 뿔을 부러뜨리거나, 또는 서로 떠받아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지."

 

마지막으로 내용을 정리하려고 책을 다시 한 번 훑어보는데 다음에는 이 작품에서 이 친구들이 바와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술이 어떤게 나오는지도 한 번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배경이 술을 먹는 장면이라 어떤 술들이 나오나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이제 문학을 읽을 때 조금 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읽어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건, 장소, 시간, 문화를 연결하고 눈으로 활자를 읽고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모든 감각의 촉수를 바짝 세우고 읽어야 겠다. 예전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도 다시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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