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전에 상당히 인상깊게 읽은 책 중에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있었다. 『스토너』의 마지막은 스토너가 암을 선고 받은 후 죽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의 삶은 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힘든 삶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스토너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마지막을 맞이 한다. 당시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러시아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중단편 중에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를 읽었는데 『스토너』의 마지막과는 대조적으로 읽으면서 내가 너무 조마조마 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명성도 있었지만 삶의 마지막으로 다가올수록 그가 살아온 삶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괴로워 한다.
(p103) 왜? 왜 이렇게 된 것이지? 그럴리가 없다.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라면 왜 이렇게 죽어야 하고 죽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한단 말이냐? 아니다, 뭔가 그게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난 정해진 대로 그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잘못될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삶 이후의 세상인 죽음에 대하여 궁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종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으로 채워진 사후세계의 그림을 제시하며 사람들의 두려움을 달래준다. 가끔 죽음의 문턱을 오간 사람들이 말하는 신비체험 같은 것들이 있지만, 결국은 모두 살아있기에 죽음은 여전히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감춰진 세상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어느 정도 성공한 법조인인 이반 일리치가 어느 날 부터 알 수없는 아픔에 고통받다가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이야기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반은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왜 이렇게 빨리 죽어야 하느냐는 의문에 휩싸인다. 자신의 몸은 점점 약해지고 움직임 조차 힘들 때, 건강한 육체를 지닌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평소 어느 정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한 자신의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서 무의미했던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내면의 갈들을 겪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톨스토이의 중단편에서 손꼽는 이유는 아마도 모든 죽음은 사적이고 그들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겠지만, 어쩌면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시점에는 어쩌면 사람들의 심리와 감정이 이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죽음의 추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추체험은 변증법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삶'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박웅현,『여덟 단어』中)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 '죽음을 기억하라'와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조합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고 그러니 지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저는 이런 태도가 자존 같습니다.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운명이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은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 속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느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무의미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 역시 느끼게 된다면 어떨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얼마나 속상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살면서 조금씩 생각해봐야 한다. 죽음을 가정하고 지금을 돌이켜본다면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조금은 덜 후회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무거운 주제지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p19
'사흘 밤낮을 끔찍하게 괴로워하다 주겅ㅆ다. 언제든지, 지금 당장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서늘한 두려움에 순간 몸서리쳤다.
p20
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 국고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녀는 연금 문제에 관해 뾰뜨르 이바노비치에게 조언을 구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심지어 그도 잘 모르는 것까지 훤히 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렇게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 국고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는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뜯어낼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것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뽀뜨르 이바노비치는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지 열심히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다가 예의상 그저 우리네 정부가 하는 일이 다 그렇게 인색하다며 탓하고는 더이상은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미망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제 어떻게 이 조문객으로부터 벗어날 것인지 궁리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그는 담배를 눌러끄고 일어서서 손을 한번 잡아주고는 다른 방으로 건너왔다.
p25
그가 그렇게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었다.
p31
이반 일리치가 결혼하게 된 것은 두가지 사항을 고려해서였다. 우선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어 자만심이 채워졌고, 동시에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일을 행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부부간 사랑이 넘치고 가구며 그릇이며 침구며 모든 것이 새로웠던 신혼 시절은 아내가 임신하기 전까지는 너무나 좋았다.
p33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더 집요하게 매달릴수록 이반 일리치는 점점 더 생활의 무게중심을 자신의 직무로 옮겨갔다. 그는 더욱더 일에 빠져들었고 명예욕도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아주 일찍부터, 결혼한 지 채 일년도 되지 못해 이반 일ㅊ리치는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삶에 편리함을 주는 점이 일부 없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힘겨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품위있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직에서와 마찬가지로 결혼생활에서도 일정한 원칙을 세워 지켜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햇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생활에 대해 자기 나름의 태도를 확립했다. 그는 가정생활에서 아내가 해줄 수 있는 거승로 따뜻한 식사와 집안 관리, 잠자리 등 딱 세가지 편의사항만을 기대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보기에 겉으로나마 가정의 품격을 잘 지켜가는 것이었다. 그외에 조금이나마 즐겁고 유쾌한 일이 있을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만일 이 세가지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거나 불평이 생기면 그는 그 즉시 자신만의 고립된 일의 세계에 파묻혀 거기서 보람을 찾았다.
p35
그는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점점 더 줄여나갔고 함께 있어야 할 경우에도 가급적 다른 사람들을 불러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 이반 일리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 속에 파묻혀 오직 거기서 삶의 재미를 느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재미라는 것이 그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잡아넣을 수 있다는 권력의식, 비록 외적인 것이지만 법정에 들어설 때나 부하 직원들을 만날 때 분명하게 전해져오는 존경 어린 시선, 상관들과 부하들 앞에서 과시할 수 있는 성공,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 스스로도 잘 느끼고 있는 탁월한 업무처리 능력 등등 이런 모든 것들에서 그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덧붙여 동료들과 대화와 식사, 그리고 카드놀이 등등이 그의 삶을 채워갔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자신이 생각하고 기대한 대로 그렇게 별일 없이 즐겁고 나름대로 품위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p42
한번은 도무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도배공에게 직접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그러나 워낙 단단하고 민첩했던 그는 다행히 균형을 잡아 굴러떨어지지는 않고 창틀에 튀어나온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치기만 했다. 부딪친 옆구리의 통증은 심했지만 금방 가라앉았다.
p43
사실 아주 부자는 아니면서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고급스러운 비단천들, 흑단과 여러 꽃나무들, 양탄자, 청동조각품 같은 것들이 있다. 한마디로 짙은 색상에 번쩍이는 광택이 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건 모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명문가 사람들을 흉내 내려고 사들이는 것이었다.
p48
공적 업무에서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을 세워주었고 사교계 생활에서의 기쁨은 허영심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가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카드놀이였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살면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그 어떤 불쾌한 사건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마치 촛불처럼 다른 모든 것들 앞에 환하게 타오르는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에 맞는 좋은 친구들과 둘러앉아 너무시끄럽지 않게 카드를 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최고 상류사회에 속해있었고 지체 높은 사람들은 물론 젊은 사람들도 그들 집에 드나들었다.
남편과 아내, 딸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모두 완벽하게 일치했다. 벽마다 일본제 자기 접시들이 걸린 응접실에 몰려와서 친하게 구는 온갖 부류의 친구며 일가친척들, 초라한 사람들을 그들은 굳이 서로 말하지 않더라도 깨끗하게 물리치고 멀리했다. 결국 그런 꾀죄죄하고 시시한 친구들은 발길을 끊게 되고 골로빈 집안에는 최상층의 사람들만이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p59
사람들은 그저 세상사가 전과 다름 없이 그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점이 무엇보다 이반 일리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p61
그런데 갑자기 이반 일리치는 빨아들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입안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카드에서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68
'내가 없다는 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가? 내가 없어지면 그럼 난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정말 죽음인가? 아니야, 죽고 싶지 않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초를 찾다가 촛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베개 위에 쓰러지듯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불을 켜서 뭐해? 다 마찬가진걸.'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두 눈을 크게 떠 어둠 속을 응시했다. '죽음, 그래 죽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상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즐겁게 놀기나 하는구나. 다 마찬가지다, 저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너희들은 좀 나중일지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즐거울까, 짐승 같은 놈들!' 그는 악에 받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통증이 밀려와 더이상 견딜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니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p70
아내가 그에게 입 맞출 때 그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아내를 증오했으며 그녀를 확 밀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아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p73
요즘 들어 이반 일리치는 대부분의 시간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막아주던 예전의 감정 상태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할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일이나 하자. 그래, 난 일 때문에 살아왔잖아.'
p74
이젠 법원 일도 그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방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죽음이란 놈이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도록,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죽음을 응시하도록 모든 일을 손에서 내려놓고 그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만 했다.
p82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는 거짓이었다. 그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병이 들었을 뿐이고 안정을 취하고 치료만 잘한다면 곧 아주 좋아질 것이라고 모두들 빤한 거짓말을 해댔다. 아무리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갈수록 심해지는 고통과 죽음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거짓말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고 이반 일리치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끔찍한 그의 상태를 감추려고만 했다. 게다가 이반 일리치마저 그런 거짓말에 동참하게 하려고 했다. 거짓말, 죽기 직전까지도 멈추지 않을 이런 거짓말, 이 무섭고 장엄한 죽음의 의식을 인사차 들렀다든지, 커튼이 어떻다든지, 오찬 자리의 철갑상어 요리가 어떻다는 따위의 일상의 사소한 것들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하는 이런 거직말, 바로 이런 거짓말이 이반 일리치는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하고 싫었다.
p84
거짓말 외에, 아니 그런 거짓말 때문에 사람들이 이반 일리치가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괴로웠다.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던 중 어떤 때에는 사실대로 고백하기 좀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 자신을 아픈 어린아이 대하듯이 그렇게 가엾게 여기며 보살펴주기를 가장 간절히 소원했다.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그는 바랐다. 지위가 높은 관리이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였던 그에게 누구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p94
의사를 전송하는 이반 일리치의 기대감이 담긴 시선이 어찌나 측은하고 안돼 보였는지 왕진료를 지불하려고 서재 문을 나서던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p95
젊은 육체가 한껏 드러나게 차려입은 딸이 들어왔다. 같은 육신이건만 그의 육신은 고통받고 있는데 딸은 그의 앞에서 제 몸을 뽐내고 있었다.
p100
그는 다리를 내려놓고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웠다. 자신이 너무나 불쌍했다. 그는 게라심이 옆방으로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없는 무력감과 끔찍한 고독이, 사람들과 하느님의 냉혹함이, 그리고 하느님의 부재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p101
다시 통증이 몰려왔지만 그는 몸을 뒤척이지도 누구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 또 온단 말이지. 올 테면 오라고 해! 그런데 왜? 도애체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네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무엇이 필요하냐고? 더이상 고통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사는 거라고? 어떻게 사는거 말이냐?'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데?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나?'
p103
왜? 왜 이렇게 된 것이지? 그럴리가 없다.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라면 왜 이렇게 죽어야 하고 죽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한단 말이냐? 아니다, 뭔가 그게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난 정해진 대로 그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잘못될 수가 있단 말인가?'
p104
잠시 후 그는 울음을 멈추고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골똘이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는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자신이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찾아들었지만 그는 즉시 자신의 삶은 올바르고 정당했다고 강변하며 그 이상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버렸다.
p106
그는 서로 상반된 두가지 마음의 상태를 끝없이 오가고 있었다. 하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 몸의 움직임을 열심히 관찰하며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 희망이었다. 어떤 때는 제 임무를 잠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신장이나 맹장이, 또 어떤 때는 어떻게 해도 피할 수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죽음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p106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많고 많은 친구들과 가깝디가까운 가족들 곁에서 느껴야 하는 고독함, 그것은 그 어디에서도, 바다 저 깊은 바닥에서도, 땅속 깊은 곳에서도 찾을 수없는 처절한 고독이었다. 이런 고독 속에서 이반 일리치는 그저 과거의 추억만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p107
'갈수록 고통이 더욱더 심해지듯이 내 삶의 모든 것은 더욱더 나빠져만 갔군'
p111
그의 정신적 고통은 전날 밤, 광대뼈가 불거진, 게라심의 졸음이 가득한 선량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만약에 정말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이,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하는 의심이 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p115
아내에게 대답했던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제 종말이, 진짜 종말이 다가왔지만 의혹은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 우우, 우우우!"
이반 일리치는 크고 작은 고함을 계속 내질렀다.그는 '니 하추-우! 하추-우!'(난 죽고 싶지 않아!)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마지막 음절이 비명처럼 길게 이어졌다.
p116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었다."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 어쩌면 아직, 아직 '그걸'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지?"
p117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 그게 뭐지?
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단편소설로 평가받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잊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초반에 무진의 안개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 부부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안개를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 작가 김승옥과 그리고 그의 우리말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겨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더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p10)
『무진기행』은 1964년 작품이다.
그 시대를 잠깐 살펴보면, 1960년 4월 19일 자유당정권의 부정 선거에 반발해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혁명이 일어나서 이승만과 자유당의 12년간의 장기집권이 종식된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한다. 그 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1962년부터 추진하면서 전후 산업화가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렇게 196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대적 배경을 감춘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시대를 담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제약회사 전무가 되기 위해 아내와 장인이 손을 쓸 수 있도록 잠시 무진에 온 주인공과 고등고시를 패스해서 세무서장이 되어 무진에 있는 친구 조가 당시 한국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속물주의, 출세주의를 엿보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50년 뒤의 한국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나 다른 요소들은 배제하고, 초반에 묘사된 무진의 안개가 작품 속을 뒤덮은 것 처럼 축축하면서도 희미한 그리고 쓸쓸한 감정을 읽는 내내 떠나보낼 수 없었다. 특히 어머니의 산소에 들렸다가 방죽길로 돌아오는 길에 약을 먹고 자살한 술집여자를 보게되는데 이 부분에서 작품 속 나의 쓸쓸함이 진하게 느껴지는건 왜 인지 모르겠다.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 해제의 사이렌이 불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나는 슬며시 잠이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p32)
주인공인 나를 보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성공을 했지만 무진의 안개에 둘러싸여 희미하게 보이듯이 삶에 대한 애정이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결핍이 느껴졌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보다 더 못한 경제적 여유만을 쫓으려고 아둥바둥 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잠시 서글프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읽고 나서 분명 좋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이 있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김미현 평론가의 글로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 본다.
"김승옥의 소설은 1960년대 서울의 근대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첨예하게 문제 삼는다. 그래서 '감수성의 혁명'을 보여 주면서 '슬픈 도회의 어법'을 그 누구보다도 '지적인 절제'를 통해 소설화함으로써 '1960년대 문학의 기둥'이라는 찬사를 받는 김승옥의 소설은 한국 문학의 근대성 논의에서 뚜렷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메아리가 퍼지듯이 남는 한 편의 짧은 이야기,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읽은 다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짧은 중단편 소설이지만 읽는 이에 따라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측면이 다양하고 흥미로워서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나 곁눈질하는 재미도 상당하다.
『필경사 바틀비』(1853년 作) 는 복사기가 없던 당시에 필사를 하고 글자 수대로 돈을 받던 직업이었던 필경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바틀비의 이야기다. 어느날 변호사 사무실에 바틀비가 필경사로 들어오게 된다. 변호사는 성실하고 업무에 충실한 바틀비를 마음에 들어한다. 하지만 필경의 일 외에 서류를 검증하는 일을 하자는 변호사의 말에 바틀비는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변호사는 당황스럽고 놀랍니다.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수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p29)
바틀비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나중에는 필사 자체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을 자신의 거처로 정하고 잠을 자고 생활을 한다. 하지만 어떤 요구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다. 변호사는 바틀비의 이러한 태도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는 듯 보이지만,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면서 내적갈등을 겪는다. 결국 변호사는 이사를 하기로 한다. 하지만 바틀비는 여전히 기존의 사무실과 건물을 떠나지 않고, 결국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의해서 구치소에 보내지게 된다. 그리고 구치소에서 음식을 거부하고 결국은 죽음을 마주한다.
이야기 자체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도대체 왜 바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왜 필경사가 필경을 하지 않고 변호사 사무실에 무단 거주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바틀비의 죽음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가? 라는 질문도 하게 된다. 이 책의 말미에 '옮긴이의 말'에 보면 이 책은 보기에 따라 고립과 소외, 산업화된 일터와 본질과 계급투쟁, 노동운동, 형제애, 정신질환, 허무주의, 메시아론 등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가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읽었는데, 읽는 이들마다 생각하는 관점이 달랐다. 어떤 이는 바틀비를 우울증 환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바틀비가 그렇게 되기까지 변호사가 취하는 애매모호한 태도에 대해서 지적한다. 다른 관점으로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상징하는 유산계급과 필경사라는 직업이 대변하는 무산계급을 언급하며 계급투쟁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면서 계속 떠올랐던 책이 있었다. 바로『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또 다른 책인 『시민불복종』이었다.『시민불복종』에서 소로우는 인두세를 내라는 경관의 요구에 거부한다. 그는 노예제도를 암암리에 인정하고 멕시코를 침략하는 제국주의 전쟁을 서슴지 않는 미국 정부를 지지할 수 없고, 그런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를 유지하는 세금을 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이 책에 대해서 알았을 때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상당히 신선했다. 남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기를 들 수 있는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필경사 바틀비』에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시민불복종』은 1849년 작품으로 1853년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와 같은 시기 그리고 미국이라는 장소적 배경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두 작품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점이라 생각한다.
중단편의 길지 않은 글이라서 두 번을 읽었다. 우선 내용 자체가 대단히 흥미로워서 읽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방식이 아니고,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와 내적갈등을 통해서 그려지기에 읽는이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읽히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책 내용이 차곡차곡 정리되는 기분이 아니고 모호하고 애매하게 남기는 하지만 그런 모호함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생각을 남기게 하는 책이었다.
‘묵묵하다’ 라는 단어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사전에서 다시 찾아보았다.이 작품을 읽고 머릿속에서 맴돌던 단어였기 때문이다.그리고 자주 읽던 책들과
반응되는 감각기관이 다른지 평소와 다르게 읽는 내내 차분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작가인‘존 윌리엄스’는1922년 생으로 작가인 동시에 덴버대학교에서30년 간 문예창작을 가르친 교수였다.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생전에
총4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으며1994년에 세상과의 인연을 접는다.그의 작품 중 『스토너』는196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한 동안 독자들에게 잊혀졌다가 최근 유럽에서 재조명 받기 시작하며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평범한 농부의 아들인 스토너는 농업을 배우기 위해 미주리대학에 입학했지만,문학수업에 매료되어 영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그리고 영문학 연구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진지한 애정을 가진 교수가 된다.아내
이디스와 우연히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딸 그레이스를 얻게 된다.하지만 사랑보다는 억압적인 분위기의 집에서 탈출이 우선이었던
이디스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딸
또한 비극의 씨앗을 이어받아 어머니를 떠나기 위한 수단으로 임신을 택하게 된다.스토너는 한때 대학의 강사였던 캐서린 드린스콜과 진지한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동료교수
로맥스와 학내에서 갈등을 겪기도 한다.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그는 묵묵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학생들을 가르친다.그리고 은퇴를 몇 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그 동안의 삶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스토너의
삶을 곱씹어 보면 많은 부분에 조용한 비극들이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아마 어떤 이들은 이 중 하나를 겪는다면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실패와 갈등을 내포한 비극을 삶의 자연스런 한 부분인 양 조용히 담담하게 겪어낸다.그의 무심한 듯한 담담함 속에서 독자들은 다른 소설에서 느껴지는
극적이고 예상하지 못한 감동과는 사뭇 다른 깊이 있고 울림이 있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작품
말미에는 스토너가 스스로에게 세 번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그에 대한 마지막 물음에 대한
답의 일부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p390)
그는 인생의 매 순간을 타인의 삶의
잣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애정과 의미를 두고 살아왔다. 어렴풋이 떠올렸던 실패도 삶의 바다 속으로 들어오는
작은 물줄기로 차분히 받아낸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죽어갔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삶을 정리하면서 하기에는
아까운 이 물음에 스스로의 삶으로 묵묵히 답해야 하지 않을까. 사전에서 찾은 ‘묵묵하다’의 뜻은 ‘말없이
잠잠하다’ 였다. 말없이 잠잠히 이렇게 하루를 살아낸다. 하루를 살아간다.
이 책을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일상에 전복되어 자신을 잃지 않았나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 본다.스토너의
내밀한 고민과 상처들이 독자들의 감춰진 갈등과 생채기를 드러내어 자신들의 삶을 반추해 볼 시간을 내어주기를 바래본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관리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납니다. 유령은 사람들이 걸치고 있는 '외투'를 벗겨가죠. 사람들은 그가 국에 근무하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임을 알아봅니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모든 사건은 제목 그대로 <외투>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아카키 아카키비치는 정서 업무를 맡고 있는 9급 문관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에는 충실했지만,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죠.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자신의 외투가 너무 낡아서 페테르부르크의 추운 겨울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해 재봉사인 페트로비치를 찾아가 수선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너무 낡아 수선조차 힘들어서 새롭게 외투를 맞추게 되죠.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는 최대한 돈을 아껴서 외투를 살 돈을 마련하려 합니다. 눈물겹습니다.
저녁마다 마시던 차를 끊고, 저녁마다 켜던 촛불도 켜지 않고,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주인 여자의 방으로 가서 그녀가 켜놓은 촛불 밑에서 하기로 했다. 길을 걸을 때는 구두 밑창이 빨리 닳지 않도록 가능한 한 가볍고 조심스럽게 거의 발끝으로 돌과 판석을 밟고, 속옷이 빨리 해지지 않도록 세탁부에게 가능하면 속옷 빨래를 덜 맡기고, 집에 돌아오면 매번 속옷을 벗고 아주 오래됐지만 잘 보관해온 목면 실내복만 걸치기로 했다. (p33)
새로운 외투를 걸친 날은 아마 아카키 아카키비치 생애에서 가장 장엄한 날이었을 겁니다. 새 외투를 입고 국으로 출근을 합니다. 동료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파티에도 참석하게 됩니다. 파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진열장의 여자그림을 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여자를 뒤따라 갈까하는 충동도 생깁니다. 외투 하나에 자신감이 생겼나봅니다.
그런데 밤 늦은 시간, 광장에서 강도를 만나고 외투를 빼앗깁니다. 누군가에는 단순한 외투일 뿐이지만 아카키 아카키비치에게는 어쩌면 삶의 목표일지도 모르는 그런 '외투'였습니다. 이제 외투를 찾아 나섭니다. 처음에는 강도를 당한 광장 끝에 있던 입초 근무 경관에게 찾아가지만 날이 밝으면 파출소장을 찾아가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경찰서장을 찾아가라고 하지요. 그래서 경찰서장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경찰서장은 아카키 아카키비치가 그 시간에 무엇을 했으며 불법적인 장소를 이용했는지 여부를 조사합니다. 아카키 아카키비치의 동료 관리들은 직접 고관을 찾아가라고 조언합니다.
이 고관은 전에는 별 볼일 없다가 최근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그는 원래 착한 사람으로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관이라는 지위는 그를 혼란 속에 빠뜨렸죠. 그는 자신보다 직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엄격, 엄격 또 엄격"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고, 그의 말에는 보통 세 문장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소?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누가 앞에 있는지 알고나 있소?" 이 들어있었습니다.
아카키 아카키비치는 고관을 만납니다. 고관은 다른 관리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자신을 찾아온 아카키 아카키비치에게 언성을 높여 말합니다.
"당신이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아오?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나 아오? 당신은 알고 있소? 알고 있느냐고? 내가 당신에게 묻고 있잖소." (p57)
아카키 아카키비치는 완전히 넋이 나가 비틀거렸고 온몸이 떨려 서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입을 벌린채 길을 잃고 눈보라 속을 걷다가 편도선이 붓게 되고 몇 일을 앓다가 안타깝게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몇 일 후 매장이 되고 그의 유품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가 맡고 있던 국의 정서 업무도 어느새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됩니다. 그는 흔적도 없이 세상 속에서 사라집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카키 아카키비치와 고관 모두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에게 둘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거 같아서 불편합니다. 자신의 차, 옷, 가방이 마치 자신을 말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경계를 긋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윗사람과 동료들에게는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이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거침없는 폭력과 무분별한 권위의식을 세우려하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제 '외투'는 어떤게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제 삶의 목적이 '외투'를 쫓는 것으로 그쳐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됩니다.
제 '감투'는 어떤게 있을까요? 저도 모르게 가해지는 폭력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p10
이 관리의 성은 바시마치킨이었다. 명칭만 봐도 이 성은 바시마크(목이 짧은 장화)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에, 어떻게 바시마크에서 유래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심지어 처남까지도 바시마치킨 사람들은 모두 장화를 신고 다녔고, 일 년에 세 번 정도만 밑창을 갈았다. 이 관리의 이름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였다.
늙은 산모가 말했다. "아마도 이 아이의 운명인가봐요. 그렇다면 차라리 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게 낫겠어요. 아버지 이름이 아카키였으니 아들 이름도 아카키로 해요." 이렇게 해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란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러시아인의 성명은 이름, 부칭, 성으로 이루어진다. 이 경우에 아카키는 이름, 아카키예비치는 부칭인데 이는 아카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p12
나중에 사람들은 그가 대머리에 제복을 입고, 이미 관리가 될 준비를 완전히 한 채로 세상에 태어났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누가 서류를 갖다놓았는지, 그 사람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지 살피지도 않고 그저 서류만 바라보며 일을 맡곤 했다.
p14
단지 농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하거나 사람들이 팔꿈치를 밀치며 일을 방해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날 내버려둬요. 왜 날 모욕하는 거요?" 그런데 그의 말과 목소리에는 이상한 무언가가 있었고, 강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최근에 국에 들어온 한 젊은이는 다른 동료들을 따라 그를 조롱하려다 마치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그의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았고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어떤 이상한 힘 때문인지 그는 지금껏 점잖은 사교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알고 지내던 동료들과도 멀어졌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가장 즐거운 순간에, 이마가 벗어진 작달막한 관리가 가슴을 지르는 듯한 목소리로 "날 내버려둬요. 왜 날 모욕하는 거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그 젊은이의 눈앞에 떠오르곤 했다. 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말 속에서 "나는 당신의 형제요"라는 또다른 말이 울렸다. 그러면 이 가엾은 젊은이는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고, 그후 평생 동안 인간에게 비인간적인 면이 얼마나 많은지, 세련되고 교양있는 사교계 사람들에게조차, 오 하느님, 사교계에서 고결하고 정직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조차 무례한 면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지를 보면서 여러 번 몸서리를 쳤다.
p15
그는 몇몇 글자를 특별히 좋아했는데, 그 글자들을 발견하면 마음의 평정을 잃고 슬쩍 웃음을 짓기도 하고, 눈을 깜박이기도 하고, 입술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그가 펜으로 무슨 글자를 쓰는지 그의 얼굴에서 모두 읽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p17
그는 사람들이 창문으로 온갖 쓰레기를 버리는 바로 그 순간에 창문 밑을 지나가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모자 위에는 늘 참외나 수박 껍질 같은 잡동사니가 얹혀 있었다.
p19
페테르부르크에는 연봉 사백 루블이나 그 정도 급료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강력한 적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북쪽의 한파다.
p20
길에서 꽁꽁 얼어붙은 모든 직무 능력과 재능이 녹을 때까지 현관 수위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다.
p21
실제로 그 외투의 모양이 기이하기도 했다. 옷깃을 잘라내 외투의 다른 부분에 덧대느라 외투 깃이 해마다 점점 줄어든 것이다.
이 재봉사(페트로비치)에 대해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소설에서는 모든 인물의 성격을 철저하게 묘사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여기서 페트로비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p23
페트로비치가 화를 내는 바로 그 순간에 도착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페트로비치가 술에 취해 약간 허세를 부릴 때, 혹은 그의 아내 표현대로 "애꾸눈 악마가 술에 푹 절었을 때" 뭔가 주문하기를 좋아했다. 그런 상태일 때면 페트로비치는 대개 아주 즐겁게 양보하고 가격에 합의했으며, 매번 인사를 하고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사실 그러고 나면 그의 아내는 찾아와 남편이라는 작자가 술에 취해 헐값에 일을 맡았다고 징징댔다.
페트로비치가 하나뿐인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고,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p24
"그게 뭐죠?" 이렇게 말하는 동시에 페트로비치는 외눈으로 옷깃부터 소매, 등, 옷자락, 단춧구멍까지 그의 제복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이 모든 것이 원래 그의 일이기 때문에 그에겐 아주 익숙했다. 이게 바로 재봉사의 습관이다. 그가 사람들을 만나면 맨 처음 하는 것도 바로 이렇게 옷을 살펴보는 일이다.
페트로비치는 실내복 같은 외투를 집어 우선 책상 위에 펴놓고 오랫동안 살펴보다 고개를 젓더니 창 쪽으로 한 손을 뻗어 어떤 장군의 초상화가 그려진 둥근 담배값을 집었다. 손가락으로 하도 만져서 얼굴이 그려진 자리가 뚫어졌고, 그 구멍에 네모난 종잇조각을 붙여놓아서 어떤 장군인지 알 수 없었다.
p26
"어쩔 수가 없어요. 양복지가 완전히 삭았어요. 추운 겨울이 오면 양말로는 보온이 안 될 테니 이걸로 각반이나 만들어 쓰는 게 좋을 겁니다.
p28
거리로 나온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이런. "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 그러고 나서 잠시 침묵하다 덧붙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어. 정말이지 이렇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어."
p32
여자재봉사에게 셔츠 세벌과 출판되는 글에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속옷도 두 벌 주문해야 했다.
우선 독자는 돈의 절반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일 루블을 쓸 때마다 뚜껑에 돈을 넣는 구멍이 뚫린, 열쇠로 잠근 작은 상자에 동화 반 코페이카를 넣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반년에 한 번씩 그는 모인 동전의 총액을 세어보고 그것을 은화로 바꾸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왔고, 몇 년 동안 쌓인 총액이 사십 루블이 넘었다. 이렇게 절반은 수중에 있었다.
p33
저녁마다 마시던 차를 끊고, 저녁마다 켜던 촛불도 켜지 않고,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주인 여자의 방으로 가서 그녀가 켜놓은 촛불 밑에서 하기로 했다. 길을 걸을 때는 구두 밑창이 빨리 닳지 않도록 가능한 한 가볍고 조심스럽게 거의 발끝으로 돌과 판석을 밟고, 속옷이 빨리 해지지 않도록 세탁부에게 가능하면 속옷 빨래를 덜 맡기고, 집에 돌아오면 매번 속옷을 벗고 아주 오래됐지만 잘 보관해온 목면 실내복만 걸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처음엔 그런 절약하는 생활에 적응하기가 조금 어려웠지만, 어쩐지 차츰 익숙해졌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저녁마다 굶는 게 완전히 습관이 되었다. 그 대신에 그는 앞으로 생길 외투를 늘 마음속에 그리며 정신적인 양식을 섭취했다. 이때부터 그는 존재 자체가 어쩐지 더 완전해진 것 같았고, 마치 결혼이라도 한 것 같았고, 어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았고, 혼자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어떤 인생의 반려가 그와 함께 인생길을 가기로 동의한 것 같았다. 이 인생의 반려는 다름 아닌 두툼하게 솜을 두고 닳지 않는 튼튼한 안감을 댄 바로 그 외투였다.
p34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고 외투가 완성될 날이 마침내 오리라고 생각하며 그는 언제나 만족해서 돌아왔다. 일은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예상외로 국장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에게 보너스로 사십 루블이나 사십오 루블이 아니라 육십 루블을 주기로 결정했다. 국장이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에게 새 외투가 필요하다는 것을 예감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일이 그렇게 풀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여윳돈 이십류블이 갑자기 생긴 것이다. 이 덕분에 일의 진행이 빨라졌다. 두 세달 정도를 더 굶주른 끝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정말로 팔십 루블을 얼추 모았다. 평소에 늘 평온하던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p35
정확히 무슨 요일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페트로비치가 마침내 외투를 가져온 그날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생애에서 가장 장엄한 날이었을 것이다.
p37
페트로비치는 그의 뒤를 따라 거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외투를 다시 한번 오랫동안 바라보았고, 일부러 샛길로 들어가 굽은 골목을 따라 아카키를 앞질러 가서 다시 거리로 달려 나와 반대쪽에서, 그러니까 정면에서 자신이 만든 외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p42
그는 환하게 불을 밝힌 가게의 유리 진열장 앞에 멈춰 서서, 장화를 벗고 미끈한 다리 한쪽을 다 드러낸 아름다운 여자가 그려진 그림을 호기심있게 바라보았다. 그림 속 여자의 등 뒤로, 구레나룻에 입술 밑에는 작은 삼각 수염을 멋지게 기른 어떤 남자가 다른 방문에서 머리를내밀고 있었다.
p46
몸 전체를 이상하게 움직이며 번개처럼 휙 지나간 어떤 여자를 왠지 모르게 갑자기 뒤쫓아 가려고 했다.
p47
그의 심장이 뭔가 안 좋은 일을 예감이라도 한 듯, 그는 어떤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광장으로 들어섰다.
광장 끝까지 다 왔는지 보려고 눈을 뜨자. 뜻밖에도 바로 앞에 콧수염이 난 어떤 사람들이 서 있는게 보였다. 그는 도대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내 외투야!" 그들 중 하나가 그의 멱살을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사람 살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바로 그 순간 다른 사람이 관리의 머리통만 한 주먹을 그의 입에 들이대며 "소리만 쳐봐!"하고 말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외투가 벗겨지고 무릎에 발길질을 당해 눈 위에 벌렁 나자빠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p50
조금이라도 남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그가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서장은 외투 강탈 사건을 어쩐지 매우 이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사건의 본질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에게 왜 그렇게 늦게 귀가했는지,어떤 지저분한 곳에 들른 것은 아닌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완전히 당황했고, 외투 사건이 적절한 절차를 밟게 될지 어떨지 알지도 못한 채 서장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p51
이 고관은 최근에야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그 전에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쨌든 그 고관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신의 중요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출근할 때 부하 직원들이 계단에서 자신을 맞이하도록 했고, 감히 그 누구도 자기를 직접 찾아오지 못하게 했으며, 모든 것이 엄격한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했다. 즉, 14급 관리는 12급 관리에게, 12급 관리는 9급 관리나 적당한 다른 문관에게 보고하도록 하는 식으로 절차를 거쳐야만 자기에게 보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성스러운 러시아에는 이미 모든 것을 모방하는 병이 퍼져 모두가 상관을 약 올리면서 서툴게 흉내 냈다. 심지어 어떤 9급 관리는 조그만 부서의 책임자가 되자마자 즉시 칸막이를 치고 자신의 특별한 방을 만들어 '집무실'이라 부르고, 문 앞에 붉은 옷깃에 금실을 단 일종의 안내원을 세워놓고 방문객이 올 때마다 문을 열어주게 했다고 한다. 그 '집무실'은 평범한 책상 하나를 겨우 들여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고관'의 행동방식과 습관은 확고하고 위풍당당했지만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았다. 그의 행동방식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엄격성이었다. 그는 보통 '엄격, 엄격, 또 엄격'이라는 말을 되풀이했고 ,마지막단어를 말할 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곤 했다.
p53
그가 부하직원들에게 건네는 평범한 말에도 엄격함이 배어 있었고, 말은 거의 세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소?" 그는 원래 마음이 착한 사람으로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고 친절했으나, 고관이라는 지위가 그를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고관이 된 후로 그는 어쩐지 혼란에 빠져 길을 잃더니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기와 지위가 같은 사람들과 있을 때,그는 꽤 괜ㅊ낳고 아주 점잖은 사람이었으며 여러 면에서 전혀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보다 한 직급이라도 낮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는 아주 졸렬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도 딱했고, 그 자신조차 시간을 좀더 재밌게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움을 느낄 정도였다.
p54
고관은 오래전에 관직을 떠나 시골에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관리들을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할 수 있는지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p55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겸손한 모습과 낡은 제복을 본 고관은 갑자기 그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현재의 자리와 고관직을 받기 일주일 전부터 방에서 혼자 거울 앞에 서서 일부러 연습하여 익힌 단속적이고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
고관은 왠지 모르게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그런 태도가 허물없이 구는 것처럼 느껴졌다.
p57
"당신이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아오?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나 아오? 당신은 알고 있소? 알고 있느냐고? 내가 당신에게 묻고 있잖소."
p59
다만 두서없는 말과 생각이 하나같이 똑같은 외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가련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방법도, 그의 물건들도 봉인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상속자가 없었고, 둘째, 유산이라야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위 깃털 펜 한 묶음, 관청에서 사용하는 백지 한 뭉치, 양말 세 켤레, 바지에서 떨어진 단추 두 세개, 그리고 이미 독자가 알고 있는 실내복 같은 낡은 외투가 전부였다.
이 모든 것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백건대,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조차 이것엔 관심이 없다.
p60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없는 페테르부르크는 마치 원래붜 그런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 어느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애정도 받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존재, 심지어 흔한 파리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핀에 꽅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자연관찰자의 주의조차 끌지 못한 존재가 사라지고 자취를 감춘 것이다. 동료 관리들의 조소를 묵묵히 견뎌낸 그 존재는 어떤 특별한 일도 없이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런 존재에게도, 비록 생이 끝나기 직전이었지만 외투의 모습을 한 명랑한 손님이 갑자기 나타나 짧은 순간이나마 가련한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황제나 세계의 지배자에게도 닥치기 마련인 불행이 잔인하게 그를 덮쳤다. 그가 죽은지 며칠이 지나 즉각 출두하라는 명령서를 가지고 국에서 경비 한 사람이 그의 아파트를 찾아왔다. 그러나 경비는 별 소득 없이 돌아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더는 출근할 수 없다고 보고해야 했다. "어째서?" 라는 질문에 겨ㅓㅇ비는 "그게, 그는 이미 죽었고 나흘 전에 매장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국에서도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다음날 훨씬 키가 큰 새 관리가 이미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곧은 필체가 아닌 훨씬 비스듬하고 삐딱한 필체로 정서를 하기 시작했다.
p62
그가 죽고 나서 며칠 동안 소란스러운 삶을 살 운명이었음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고, 우리의 슬픈 이야기는 예기치 않게 환상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p65
경관이 오른쪽 콧구명을 손가락으로 막고 왼쪽 콧구멍으로 코담배 반 줌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유령이 재채기를 하도 세게 하는 바람에 담배 가루가 날려 세 경관의 눈에 들어갔다. 그들이 주먹으로 눈을 비비는 사이 유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읽었다. 그의 작품 중에 두번째로 접한 책이다. 처음은 그가 노벨상을 받게 된 작품 《노인과 바다》를 통해 만났다. 그의 후반기 작품을 먼저 읽고 나서 그의 초기작인 책을 읽었다. 한참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났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작품은 상당히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다른 작가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름은 그의 작품보다 더 유명하다. 극적인 삶을 살았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느낌을 준 두 작품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들이 더 궁금해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에 대한 궁금점도 늘어만 간다.
문학 작품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서 읽히지만, 때로는 그 시대와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는 듯 하다. F.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고 나서 재미있게는 읽었지만 왜 이 책이 그렇게 찬사를 받는지 알지 못했다. 작품 해설과 다른 책들을 통해 1920년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해 알고 나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배경적 지식이 없으면 충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배경지식이 아니라 소설 그 자체만을 읽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배경 지식이 중요함을 느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읽고, 다음에는 배경지식을 찾고 다시 곱씹어보는 형식으로 읽게 되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역시 1920년대 미국 소설이다. 당시의 젊은이들을 'Lost Generation' 이라고 칭한다. 과거에서 부터 이어져왔던 많은 사상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이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목적을 상실했고, 그저 술이나 마시고, 소비문화에 젖어 들어갔다.
이 책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라고 하면
"1920년대 미국인들이 프랑스 파리로 와서 그곳의 문화를 즐기고, 술을 마시고, 이성간에는 최근 유행하는 some을 탄다. 그러다가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기로 하고 그곳에서 다시 술 마시고 낚시하고 투우를 즐기는 이야기" 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시의 배경을 모르면 이렇게 거칠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책의 내용보다는 주요등장인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잠시 그들을 소개한다.
제이크 반즈 - 소설 속에서 '나'로 등장하는 화자이다. 1차 세계대전 때의 부상으로 성불구가 되어버린 미국인 신문기자
레이디 애슐리 브렛 - 전쟁 중 특별지원 간호사가 된 영국의 귀족 부인, 제이크 반즈를 사랑하게 되지만 제이크 반즈의 성불구로 육체적인 사랑은 하지 못한다. 후에는 마이크와 결혼을 약속하기도 하고, 로버트 콘과 관계를 맺기도 하며, 어린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도 사랑에 빠진다.
로버트 콘
- 대학시절에는 미들급 챔피언, 대학 졸업후 첫번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 셋이 생겼다. 부유한 아내는 다른 남자와 만나게 되면서 나가고 후에 프랜시스라는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함께 미국에서 유럽으로 한다. 그때 2년 동안 파리에 머물었는데 이 시기에 장편소설을 쓴 작가이다. 후에 브렛을 좋아하게 된다
빌 고턴
- 제이크 반즈의 친구로 작가로 어느 정도 성공을 하여 돈을 벌었다. 여행 차 반즈를 만나고 그와 스페인 여행에 동행한다.
마이크 캠벨
- 브렛과 결혼을 하려는 사내로 사업을 하다가 파산을 하게 된다.
페드로 로메로
- 스페인의 젊은 투우사로 다른 투우사들보다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브렛이 나중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그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자주 들르는 커피숍과 바에서 그들은 어떤 옷차림과 자세로 있었을까? 당시 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책을 읽고 나서 당시의 모습을 잠깐 찾아보기도 했다. 특히 작품 속의 브렛이 궁금했다. 어떤 패션의 여성이었을까? 책에는 그녀에 대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p40
소매 없는 스웨터에 트위드 치마를 입고 머리는 사내아이처럼 빗질하여 뒤로 넘기고 있었다. 이런 유행은 하나같이 그녀가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 경기용 요트의 동체 같은 미끈한 곡선미를 지닌 몸매에 그런 스웨터를 입으니 곡선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트위드 치마에 소매없는 스웨터는 아니지만 당시 미국의 패션을 알아 볼 수 있는 사진을 잠깐 찾아보았다.
▲ 1920년대의 미국 패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여행을 한다. 그들이 여행을 갔던 스페인의 산 페르민 축제는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다른 나라의 축제 소식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자주 등장하던 그 장면이 그려진다. 아마 1920년대도 지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책 속으로 돌아가서 팜플로나의 소몰이 축제 현장에 들어가본다. 그리고 나서 근처 바에서 압생트도 한 잔 해본다.
▲ 스페인 산 페르민 축제
책을 읽다가 책 속의 상황이 너무 부럽고 나 역시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적어둔 부분이 있다. 빌과 제이크가 낚시를 하다가 샘물에 담가놓은 포도주와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장면인데, 나중에 한 번 시원한 계곡이나 개울에 와인을 시원하게 해서 친구들과 함께 먹어 보련다.
p186
나는 샘물로 걸어가서 포도주 두 병을 꺼냈다. 병은 차가웠다. 나무 있는 데로 돌아오는 중에 술병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신문지 위에 도시락을 놓고 포도주 한 병은 마개를 따고 나머지 한 병은 나무에 기대 세워 두었다. 빌은 손을 닦으면서 올라왔는데 그의 광주리가 고사리로 불룩해져 있었다.
"어디 그 병 좀 봐." 그가 말했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뽑은 뒤 병을 기울여 마셨다. "어휴! 두 눈이 다 짜릿해지는걸."
"어디 한 번 마셔 볼까."
포도주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왠지 녹슨 쇠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렇게 형편없는 포도주는 아니야." 빌이 말했다.
"차가워서 그런 거지." 내가 말했다.
우리는 조그마한 점심 꾸러미를 풀었다.
"닭고기군."
"삶은 달걀도 있어."
"소금은?"
책을 읽고 나서 뒷부분에 나오는 <작품해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은 Lost Generation 이지만 무조건적으로 방황하는 것이 아닌 희망이 있다라고 표현한다. 콘, 브렛, 마이크의 경우는 욕망과 알코올에 빠져있지만 제이크와 빌은 자신들의 중심을 잡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브렛이 투우사 청년 로메로를 보내주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p367
"난 이제 서른넷이야. 어린애들을 망치는 그런 화냥년이 될 생각은 없어."
투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거세된 소가 나오는데 거세된 소는 다른 소의 공격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직접 다른 소를 공격하지 않고 사나워진 소를 달랜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런 생소한 부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거세한 소와 성불구가 된 화자 제이크 반즈가 계속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등장인물들은 제이크 반즈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때로는 친하게, 때로는 서로 반목을 하면서 지낸다. 그리고 항상 그 중간에 제이크 반즈가 있다. 이렇게 읽고 나서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지니 곱씹을 거리가 많이 생긴다. 이래서 잠시 떨어져서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p204
"여간 재미있지 않지. 한 번에 한 마리씩 우리에서 내보내는데, 놈들이 울타리에 들어가면 거세한 수소들을 같이 넣어 서로 싸우지 않게 하는 거야. 황소들이 거세한 소들을 향해 덤벼들지만 거세한 소들은 마치 노처녀처럼 놈들 주위를 빙빙 돌면서 달랜단 말이야." 내가 말했다.
"거세한 소들을 떠받지 않아?"
"떠받지. 어떤 때는 곧바로 달려가 죽이는 일도 있어."
"그럼 거세한 소들은 아무 반항도 못한단 말이야?"
"못해. 그저 친구가 되려고 할 뿐이지."
"뭣 때문에 그 안에 넣어 두는 거야?"
"황소들을 달래서 돌담을 들이받아 뿔을 부러뜨리거나, 또는 서로 떠받아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지."
마지막으로 내용을 정리하려고 책을 다시 한 번 훑어보는데 다음에는 이 작품에서 이 친구들이 바와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술이 어떤게 나오는지도 한 번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배경이 술을 먹는 장면이라 어떤 술들이 나오나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이제 문학을 읽을 때 조금 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읽어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건, 장소, 시간, 문화를 연결하고 눈으로 활자를 읽고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모든 감각의 촉수를 바짝 세우고 읽어야 겠다. 예전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도 다시 읽어봐야 겠다.
p81
이 세상에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어떤 말을 하면 금방 세계가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파멸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럼 사람 말이다.
p132
브렛은 나를 쳐다보았다. "한데 말이야. 이번 여행에 로버트 콘도 가나?" 브렛이 말했다.
"그래 그건 왜 물어?"
"그 사람한테 좀 가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구하고 산세바스티안에 간 줄 알아?"
"축하할 일이군." 내가 말했다.
우리는 함께 걷고 있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지?"
"나도 모르겠어. 그럼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어?"
우리는 계속 길을 따라 걸었고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 사람은 그런대로 얌전히 굴었어. 조금 따분해졌지만."
"그래?"
"그 사람한테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지."
"차라리 자선 사업을 시작하는 게 좋겠는걸."
"심술부리지마."
"심술부리는 게 아냐."
"정말 몰랐어?"
"몰랐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는 거 같은데." 내가 말햇다.
p167
그 노인은 우리와 악수를 하고 다시 뒷좌석으로 돌아갔다. 다른 바스크인들은 감동했다. 내가 시골 경치를 구경하느라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편안하게 버티고 앉아서 내게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힘들여 미국 말을 하는 바람에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177
"저렇다니까. 저러고서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건가. 넌 신문장이를 못 면하겠어. 국적을 상실한 신문기자 말이야. 침대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반어적이어야 하는 거야. 입안 가득 연민을 머금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p178
"넌 국적 상실자야. 조극의 땅과 접촉을 잃어버렸단 말이야. 귀하신 몸이 된 거지. 사이비 유럽 기준 때문에 넌 망치고 만거야. 죽도록 술만 퍼마시고, 섹스에 사로잡혀 있고. 넌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지껄이는 데 허비하거든. 넌 국적 상실자야., 알겠어? 카페나 헤매고 다니고 말이야." - 빌이 제이크에게
p294
"미안해, 제이크. 날 용서해 줘."
"용서하라고, 빌어먹을."
"제발 용서해 줘, 제이크."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때 내 기분 어땠는지 너도 알 거야."
"아, 그 소린 집어치워."
"브렛 일을 참을 수가 없었어."
"나를 뚜쟁이라고 했잖아."
중략
"알아. 그 말은 제발 잊어 줘.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브렛 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지옥을 헤매는 기분이었지, 제이크. 그래, 맞아, 지옥이라고밖엔 할 수 없어. 이곳에서 만났을 때 브렛은 나를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대하더군. 난 그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거야. 산세바스티안에서는 함께 지냈거든. 그건 너도 아마 알고 있을 테지. 난 도저히 더는 견딜 수가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