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인상적인 첫 구절이다. 2년 전에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는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넘어가지 못했다. 읽고 나서 해설에 매달리고 내가 잘못읽었나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아마도 더 이해하지 못했던 거 같다. 이번에는 소설의 이야기 중심으로 읽고 그리고 여러 사람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면서 읽어서인지 이해의 폭이 조금은 나아졌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뜨거운 태양 때문에 총을 쏘아 죽이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는 이야기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을 쏘아 죽인 것보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때 냉담했다는 사실, 장례 다음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희극영화를 본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뫼르소에게 비판의 날을 세우고 결국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뫼르소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 내가 아랍인을 쏘아 죽인 것과 상관없는 다른 것을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고 나를 심판하는지 의아해했다. 재판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인데 왜 자신은 거기서 배제되어지는 의아해한다. 사형선고를 받을 때도 자기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같은 사람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세상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p130)아무리 해도 나는 그러한 턱없는 확실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확실성에 근거를 마련해준 재판과 판결의 언도가 내려진 순간부터 어쩔 수 없게 된 그 결말과의 사이에는 어처구니없는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문이 17시가 아니라 20시에 낭독되었다는 사실, 그 판결문이 전혀 다를 수도 있었으리라는 사실, 그것이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프랑스 국민(혹은 독일 국민, 중국국민)이란 지극히 모호한 관념에 의거하여 언도되었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은 그 같은 결정으로부터 많은 준엄성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비벼되고 있던 그 벽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준엄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해서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부조리'와 '실존주의'다.

이 책을 읽을 때 소설을 그냥 이야기 중심이 아닌 그 속에 내재된 의미를 찾아야된다는 생각에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부조리'와 '실존주의'에 대해서 이해하고 난 후에 접한 이야기는 조금 더 풍성해진 느낌이 있다.


옮긴이(이휘영)에 따르면 부조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p176) 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 삼지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 이다.


소설을 있는 이야기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유없이 뜨거운 태양 때문에 총을 쏘았다는 것, 사람을 죽인 후에도 그렇게 큰 죄책감이 없었다는 점은 싸이코패스와 유사하다. 카뮈는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를 조금 더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본질 속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본질이 상실되면 나 조차 상실하게 된다. 이런 관점으로 부터 '실존주의'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의자라고 한다면 의자의 본질은 '앉을 수 있는 것' 이다. 만약 나무로 만든 의자가 다리가 뿌러져서 앉을 수 없다면 의자의 본질은 상실한 것이고 이것은 곧 의자 자체의 상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인간은 고정된 본질이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실존으로 존재한다. 본질로 규정되어 지는 자기를 둘러싼 억압과 규정에서 자유로워지고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은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부조리와 실존주의가 책을 읽고 나서 해설을 통해서 알게 된 이 책의 내포된 의미였다면, 등장인물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인간본연의 모습도 존재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 해변가에서의 아랍인 살해, 재판 과정 중에서도 담담하고 어떻게 보면 무관심했다. 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는 그동안의 모습과는 다른 인간 본연의 삶에 대한 의지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다.


(p134)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 그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나는 언제나 갑자기 놀라는 것을 싫어했다. 무슨 일이든 생길 때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마침내 낮에 좀 자두었다가 밤에는 끝끝내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오기를 기다리게끔 되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 오는 때라고 알고 있던 그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 나의 귀가 그처럼 많은 소리,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그 동안 발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으니 어지간히 운수가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셨다. 하늘이 빛을 디며 새로운 하루가 나의 감방으로 새어들 때 나는 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서 내 심장이 터지고 말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서 판자에 귀를 대고 얼빠진 듯이 기다리노라면 나중에는 나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거칠기가 마치 허덕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짝 놀라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결국 나의 심장은 터지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나는 24시간을 벌었다.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을 29살의 나이에 발표했는데, 어떻게 이런 작품을 그 나이에 발표했을 수가 있을까라는 놀라움과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가장 부조리하게 여겼던 교통사고로 4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된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하나의 작품으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다음은 『이방인』의 이해를 한 층 더 돕는다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카뮈를 다시 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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