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보통 혼자 읽는다. 누군가의 추천도서를 읽을 수도 있고, 베스트셀러를 선택해서 읽을 수도 있고, 이미 유명한 고전에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가고 그렇게 조금씩 책의 힘이 나도 모르게 쌓여 간다. 하지만 이 힘이 반드시 긍정적인 힘만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처럼 책을 통해 좋지않은 힘에 눌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지금 내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모르는데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흔이 될 때 까지는 다독(多讀)을 할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정독(精讀, 뜻을 새겨 가며 자세히 읽음), 숙독(熟讀, 글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차분차분하게 하나하나 읽음) 강조하지만 우선 내용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재료를 가질 수 있도록 마흔이 될 때까지는 차곡차곡 구석구석 쌓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분야를 이어줄 수 있고 한 분야에 대해 깊이 파고 들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항상 고민하는 것들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정량적인 측면에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만약 제대로 된 독서를 하지 않고 그저 활자를 훑는 독서라면 그 소중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거나 다름이 없다는 점이다. 책을 읽다보면 보통 흐름을 타게 된다. 일종의 Chain Reading을 하게 된다. 하나의 책은 자연스럽게 다른 책으로 연결되어 진다. 그리고 이런 것은 보통 비슷한 분야이기가 쉽다. 나는 유독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을 좋아한다. 그래서 읽다보면 너무 소설에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작년에도 연간 읽은 책의 절반 이상이 소설이었다. 이것이 두번째 고민이다. 하나의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다방면의 분야를 두루 살펴보는 것이 좋은가?
어떻 책에서 읽기로는 자신의 분야에 대한 책을 100권 이상 읽으면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에는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한다. 비록 실천은 하지 못했지만 대학에서 어떤 학과를 전공한 것 보다 관련 분야의 양서를 찾아서 100권 아니 30권 정도만 신경써서 읽는다면 어느 정도 개인적인 논리를 세울 정도의 지식은 쌓아질 것이라 생각된다. 분명 그 뒤에는 관련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논리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함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깊어지면 탁석산의 <자기만의 철학>에서 말하는 경험적 철학자의 범주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이젠, 함께 읽기다> 로 돌아가보자.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이 책에서는 제목에서 언급하다시피 혼자 보다는 함께 읽자고 권하고 있다. 나 역시 이 말에는 공감한다. 어쩔 수 없이 핑계일 수밖에 없지만 항상 시간 탓으로 돌리면서 실천은 잘하고 있지는 못하다. 작년에 처음으로 짧은 기간이지만 독서모임을 가졌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우선 사람들마다 선호하는 분야가 서로 다르다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양서를 추천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똑같은 책을 가지고 독서모임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서로 의견을 교환하다 보면 인상깊었던 부분이라던가 책을 통해서 느꼈던 부분이 거의 대부분 상이하다.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촉수를 가지고 책에 접근하다보니 책에서 빨아들이는 부분도 역시 달랐다. '아! 이런 부분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내가 그저 스쳐지나간 문장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장이었구나.' 이렇게 혼자 읽을 때는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모임 또한 공통의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모임을 찾아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다 보니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익숙해진다. 이 또한 놀라운 경험이다. 분명 책을 똑같이 읽었으나 그것을 글과 말로써 표현해내는 것 또한 중요한 데 이런 면에서도 독서토론은 분명히 효과적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독서 토론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다름을 인정하면서 접근해가는 방식과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서 배려하는 점도 그것을 통해서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과 핑계로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지만, 추후에 모임의 구성원으로 혹은 모임을 만들어서 진행을 하게 된다면 이 책을 한 번쯤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소개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이 책에서는 다른 양서들의 소개도 잊지 않으며 책에 대한 책으로도 또한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에 줄을 그어가면서 읽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에 줄이 그어졌다. 늦지 않은 시일에 함께 읽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봐야 겠다.
언제부터, 어떻게 자기 생각을 뺏겼는지조차 모르고 매일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에게 어떤 책을 권하고 어떤 영활르 추천해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다.
p17
문제도 답도 자기 안에 있다. 주체적 사고와 선택에 이르기 위해 우린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한다. 매일 밀려드는 풍랑에도 의연히 노를 젓기 위해, 주체적으로 책과 관계 맺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나만의 책 읽기를 시작해보자. 내 수준에 맞는 책을 스스로 고르고 다음 책으로 걸어갈 힘만 있다면, 어떤 책이든 오롯이 남을 테며 오래 머무르리라.
p19
책을 읽은 뒤 최악의 독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최악의 독자라는 것은 약탈을 일삼는 도적과 같다. 결국 그들은 무엇인가 값나가는 것은 없는지 혈안이 되어 책의 이곳저곳을 적당히 훑다가 이윽고 책 속에서 자기 상황에 맞는 것, 지금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것, 도움이 될 법한 도구를 끄집어내어 훔친다. 그리고 그들이 훔친 것만을 마치 책의 모든 내용인 양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삼가지 않는다. 결국 그 책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물론, 그 책 전체와 저자를 더럽힌다.
- 니체의 말
p23
돌아오는 길, 독서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누군가의 서가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떠오른 질문.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책, 자기를 위로하고 지지하는 책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책들로 하나의 성을 쌓아가는 것은 '지적 영주'가 되는 쾌감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성에 갇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독재자가 될 수도 있으니 언제든지 서재 문을 열어둘 일이다. 골방독서가 아닌 광장독서로 나아가야 한다.
p26
골방독서에서 광장독서 나오고 싶은 이라면 누구나 환영이다. 읽고, 사유하고, 토론하라!
p28
김연수 작가는 말했다.
"작품을 쓰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한 명이라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쩔 수 없이 창조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독자의 입장인 것 같다."
p33 지금부터라도 답 없는 책 읽기, 저자 비판하기, 엉뚱한 질문하기를 즐겨보자. 책은 책장을 넘기는 오직 당신의 것이므로.
p35
왜 싫은지에 대한 이유는 밝히기 어렵지만 그냥 싫다는 배타적 태도, 그 냉소가 교실을 죽이고, 토론을 죽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한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라고
p36
전반적으로 책을 너무 안 읽고 단지 쓰는 기술만 배우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이 많은데 그것이야말로 소설이 뭔지 모르고 덤비는 어리석음이다. 독서가 반드시 소설책만 읽는 걸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을 쓴느 데에는 전방위적인 분야가 필요하다. 그러니 학실과 견문은 넓을수록 좋다. 독서를 무시하고 오직 감성만으로 소설을 쓰고자 하는 지망생을 간혹 만나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는 좀처럼 작품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가에게 필요한 인식이 넓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자기가 만든 벽에 갇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니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작가의 의식은 궁긍적으로 우주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벽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무경계의 경계, 그것이 곧 자유로운 창작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인식의 확대'를 위해, '작품의 진화'를 위해 균형 잡힌 독서가 필요하다.
p41 프랑스 교육철학자 콩도르세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라고,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니?"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p42
좋아하는 책을 넘어서기란 분명 힘든 일이다. 학문의 기초체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여러 영역을 오가기란 뼈를 깎는 고통일 터,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즐겁게' 소화할 수 있을까. 바로 다른 사람이 고른 책을 '함께'읽는 독서토론이 답이 될 수 있다.
평소 관심조차 없던 책을 의무적으로 읽어보는 것이다. "저도 참석할게요." 라는 한마디를 책임지기 위해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책으로 나아가는 숙제와도 같은 책 읽기,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책을 힘겹게 들고 나가서,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잘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청의 독서'. 이런 시간을 조금씩 경험하다 보면, 어느새 책장 한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낯선 책들의 목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언제, 어떻게 나았는지조차 모르게 편독이라는 고질병 또한 사라질 것이다.
p43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 감각으로 받아들인 것을 경계하라던 데카르트를 곱씹다 보면 홀로 읽은 책 또한 경계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이론을 읽기로 가져오면, 책이 주는 간접경험이 독자의 인식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성적 활동이 필요하다. 독자 스스로 생각하며 자기 존재성을 의식하는 과정이다.
유시민은 "독서란 저자와의 대화"라고 했다.
독서에는 비판의식과 능동성이 요구된다.
p45
문제는 공감력이 부족한 독자, 어떤 책을 보든 자기 문제가 아니면 몰입을 하지 못하는 경우다.
p46
인식의 한계, 공감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은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다 말한다.
p47
앞만 보며 달려온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귀도, 이야기에 공감할 심장도 고장난 지 오래였다.
p50
왕멍, <나는 학생이다.>
나는 배우는 것을 시종일관 멈춘 적이 없었고, 그 가치나 의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배움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의탁처이자 암흑 속의 횃불과 같았고 나의 양식이자 병을 막아주는 백신과 같았다. 배움이 있었기에 비관하지 않을 수 있었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미치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배움을 지속함으로써 나는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무위도식하며 세월을 허송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에게 배움은 타인에 의해 결코 박탈당하지 않는 유일한 권리였다.
p51
다른 생각을 접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경험적 독서로 가는 길, 바로 공독이다.
p59 개인주의는 여러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매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한국에서는 그런 의미의 개인주의가 뿌리 내리지 못했다. 남에 대해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다.
p71
독서토론의 가장 큰 목적은 책을 잘 읽는 것이다. 여기서 잘 읽는다는 의미는 '넓고 깊게'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두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반드시 함께 읽기, 즉 공독이 이뤄져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시야의 한계 때문이다.
프랑스의 수도사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는 <공부하는 삶>(은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학한 사람이 수많은 약점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혼자 힘으로 공부해서는 처음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일정한 단계에 도달한 집단에 합류할 경우, 독학한 사람은 그 집단의 다른 이들이 이미 지나온 단계들 중 하나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것과 그 집단의 현재 단계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각자 자신의 발달 단계를 냉정히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라도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역량을 판단해야 한다.
p80
배움의 공동체 숭례문학당은 '100권 읽고 토론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최소한 좋은 책 100권을 읽으면, 새로운 경지에 올라서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말을 꺼낸 내가 더 놀라곤 한다. 매년 신문의 한쪽을 장식하는 '대한민국 성인,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 30%'라는 기사에 실망하지만 재야에 묻힌 독서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다
p82 삶을 위한 철학수업 中 늙는다는 것은 입력 장치는 고장나고 출력장치만 작동하는 상태이다. '늙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동물행동학적 현상이다. 입력은 정지되고 출력만 되는 상태. 그러니 머리도 쓸 일이 없다.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출력하니까. 그래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듣지 않고 하던 말만 계속한다. 몸도 그렇다. 새로 입력된 게 없으니, 하던 것만을 한다. 누군가가 이런 상태에 있다면, 그는 나이 마흔이 안되었어도 이미 충분히 늙은 것이다. 반면 나이가 일흔이 넘어도 계속 무언가 입력하여 몸과 마음을 바꾸어간다면 아직 늙었다고 할 수 없다. '젊다'는 것은 무언가가 끊임없이 입력되고 입력된 것을 처리하기 위해 뉴런들이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고, 그에 따라 새로운 패턴의 출력이 언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프로세스를 '공부'라 하고, 이런 상태 있는 사람을 '학인'이라 부른다. 젊다는 것은 공부하며 살고 있음을 뜻한다.
p90
희정 씨에게 서평 쓰기란 치유의 시간이다. 글을 쓰며 몰랐던 내면의 자아를 발견하고, 화해하는 여정이다. 희정 씨는 꾸준히 읽고 쓰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길 원한다. 이밖에도 대기업 홍보실, 번역가, 교사 등 다양한 직업군이 모인다. 한 달에 한 번, 자기 글을 발표하고 다른 생각을 들으며 성장의 기쁨을 누린다.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 무슨 회사의 대리, 팀장으로 살아온 이들은 이제 제 이름으로 글을 쓴다. 익명의 삶이 아닌, 유명의 삶을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p92
책 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재능과 강점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확인하는 시간이다. 글로 정리해내지 못한다면, 진짜 실력 아니다.
p111 러시아 시인 네끄라소프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사는 사람은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p124
새로운 시대에는 주어진 문제를 푸는 문제해결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화두제시 능력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독서토론의 논제다.
p125
독서토론에는 치유와 성찰, 통찰과 혜안이 있다. 주관과 객관, 가치와 재미, 그리고 삶에서 배어 나오는 감동이 있다.
p127 동아리기업은 일과 놀이가 함께 이루어지는 공동체 기업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 취미를 일로 만드는 사람들.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래서 동아리기업과 사회적기업 사이의 지점을 고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일이 돈만 버는 일보다 더 보람있고 행복한 법이니까
p133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선택 기준에 답해야 한다. 1) 머리 쓸래, 몸 쓸래? 2) 같이 할래, 혼자 할래? 3) 돈 볼래, 흥미(보람) 볼래?
p138
독서의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간접경험을 쌓는 일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평소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강화시키기 위한 아전인수식 독서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p140
독서조차 빈익빈 부익부다. 읽는 사람만 읽고, 읽지 않는 사람은 읽지 않는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재미'를 먼저 든다. 독서 세계로의 입문을 권하기 위해서겠지만, 재미만을 위해 읽어서는 곤란하다. 우리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독서를 해야 한다. 혼자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잘 살기 위해 읽어야 한다.
p145 베이컨 曰 독서는 풍부한 사람을, 대화는 재치있는 사람을, 글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p147 존 로크가 "독서는 다만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며,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의 힘"이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독후활동, 독서를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만 읽는 사람보다 독후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편협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독후감이 책에 대해 주관적인 감상을 위주로 쓰는 독후활동이라면, 서평은 책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담은 독후활동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후감까지는 어찌 써보겠다고 하는데, 서평은 어려워한다. 감히 저자의 책을 평가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를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말하자면 경서가다.
p148 시골의 박경철의 자기 혁명 中 독서를 통해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언어와 말하는 언어를 배우고, 내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은 고정되어 있고, 언어는 맥락이 있어야만 뜻이 형성된다. 언어, 즉 어휘가 부족하면, 생각이 풍부할 수 없고 언어를 맥락화할 수 없다면 체계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
p149 그가 말하는 '편집공학'이란 뇌, 미디어, 말, 몸짓, 이미지, 음악, 오락, 광고 등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정보 편집이 어떻게 일어나는 가를 형식적인 정보 처리가 아니라 '의미적인 정보편집 과정'을 통해 연구하고,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어가는지를 전망하는 학문이다. 그의 편집공학을 독후활동에 적용해보면, 하나의 주제에 따라 여러 권의 책을 서평으로 직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복합독서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독서 토론이다.
p153 인간이 그리는 무늬 中 왜 토론이 되지 않을까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할 말이 없을까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의식이 없을까요?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이나 관심이 없기 대문입니다. 왜 호기심이 없을까요?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움직이기만 하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의성도 바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질문도 없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동선에 대한 질문이 없이 어떻게 그 동선이 나아가는 방향을 앞설 수 있겠습니까?
p158 인문학 서적과 소설을 읽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지만, 과정을 마친 뒤에는 "가장 좋았던 점은 몇쾌한 답이 아니라 모호한 그 느낌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그 모호함을 견디는 힘인 것 같다" 고 말했다.
p168 하류지향 中 진정 '자기 찾기'를 하고자 한다면 타인과 무관한 존재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이 네트워크는 어떤 구조이고, 이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p178 독서토론은 토론을 잘 이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토론자로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좋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되도록 이끄는 것도 중요하다. 화기애애함은 성찰과 탐색을 넘어 치유와 상담, 감동, 행복으로 나아가게 한다.
진행자는 사회자의 역할도 함께 한다. 독서토론이 너무 사담으로만 흐르지 않도록, 즉 토론이 늘어지지 않도록 하고, 탄탄하고 팽팽한 의견들이 교환될 수 있도록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경직된 토론진행으로 토론의 재미와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하면서 유머와 재치있는 진행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p191 논제 발제를 맡은 진행자는 책을 꼼꼼하게 읽는 '현미경 독서'도 중요하지만, 책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는 '망원경 독서'도 필요하다.
P193 토론 논제를 준비할 때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참여그룹을 분석하는 것이다. 참여자들의 연령층은 어떤지,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지, 어떤 직종에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p196 니체의 말 中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를 이용해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가지고 있는 언어가 빈약하면 표현도 빈약해지고, 실제로 사고와 감정이 충분히 표현된다고 할 수 없다. 동시에 그 언어의 질과 양이 자신의 사고와 마음을 결정하기도 한다. 어휘가 적은 사람은 사고도 마음가짐도 거칠고 난폭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나 독서, 공부에 의해 언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것은 자연히 자신의 사고와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p199 책 읽기는 1차적으로 저자와의 대화다. 저자와의 대화를 나눈 다음에는 자신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내 생각을 정립하는 과정이다. 책 읽기는 가급적 비판적으로 해야 한다. 비판적 책 읽기란 저자의 생각과 주장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독서법이다.
저자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주장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못하는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져 저자의 주장을 파악했다면 이제 나만의 관점을 세워야 한다.
p202 다른 토론자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자리,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열린 광장이다. 세상의 많은 독서가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을 읽었으면 광장에 나와 토론하라!"
p217 인문(학)적인 사람이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이 총체적으로 집적된 문사철을 읽으며 지혜를 얻고 통찰에 이르는 사람이 아닐까. 철학자 강유원은 인문적인 교양인을 '세상의 어려움을 겪는 소년'에 비유했다. 어려움을 겪어봤으니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고 성장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p219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삶은 가변적이다. 정해진 답이 없으므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탐구해야 한다. 불안한 미래에서 내가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공부는 바로 인문학이다.
p221 책을 '보는'데만 그친다면 웅숭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기 힘들다. 읽은 책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소가 되새김질하듯 곱십어보는, 사유하는 독서로 나아가야 한다.
p222 통찰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예민한 인문적 사유가 없다면 불가능한 능력이다. 무모함과 용기, 가혹함과 정의, 소심함과 신중함, 유약함과 유연함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문적 독서의 진가는 책을 읽고 능독적으로 사유할 때 발휘된다. 바로 독서의 시원은 인문적 독서이다.
p223 교육철학자 존 듀이는 "사고는 보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가정"이라고 했다. 저자의 생각에 대해 '과연 그럴까'를 끊임없이 묻고 의심하는 독서는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준다. 하지만 독서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감히 저자에게 반기를 들 수 가 있느냐"고 묻는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라"하면 "궁금한 것 없는데요"라는 힘 빠지는 답변만 돌아오기 일쑤다
p226 전체에 대한 통찰 中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을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중략)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p230 세계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헤르만 헤세 명작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며, 힘들여 얻지 않으면 안된다. 명작이란 우리에게 읽힘으로써 그 진가를 증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어떤 명작을 읽는 것인가로 우리 자신들의 진가를 입증해야만 할 것이다.
p233 시인 이성복 문학의 실제 자리는 훨씬 낮은 곳이어야 해요. 문학이라는 것이 일정한 자리에서 어떤 권리와 자격을 가진다면 그것은 관계 가운데서 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위 문학을 한다면 '거룩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중략) 세상의 모든 거룩한 것은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합니다. 문학도 그렇습니다. 또, 그것이 문학의 힘이기도 해요. 글을 예쁘게 쓰고 싶다면, 그건 높은 자리에서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죠. 내가 말하는 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문학을 제외한 모든 것보다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문학은 삶을 받아내는 그릇이에요.
p235 한 민족이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역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잘 안다'라는 것은 그냥 '안다'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훌륭한 역사이건 추악한 역사이건 간에 있는 그대로 역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문제는 때로 권력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역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는 있는 그대로 모습일 수가 없다.
p246 프랑스 사회운동가 故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고 경고한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인 그는 체념의 내재화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p258 다윈의 영향은 종교나 생물학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설가 도스토엡스키는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죄와 벌>을 썼다. 주인공 라스콜리코프의 모습은 니체의 초인에서도 발견된다. 니체 역시 철저하게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니체 철학은 전쟁광 히틀러에 차용되어 인종청소라는 반인륜적 범죄로 이어졌다. 나치 사상의 중심 강령 중 하나가 진화론이었다. 이처럼 과학자는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의 전위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p266 움직임, 조경란 불행은 우성이고 행복은 열성이다. 그래서 불행은 유전되지만 행복은 유전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불행해지는데, 노력해야만 행복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 어떤 움직임도 정지보단 나은 거야.
p267 복싱에서 상대가 자기를 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쉬지 않고 상대 주위를 돌며 움직이는 거라 한다. 힘들다고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우리에게 여지없이 펀치를 날릴 것이다. 고통을 피하지 않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텝을 밟아야 한다.
책은 처음에 만들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예전에는 전체 인구 중일부 특권층 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책은 특권과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책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은 누구나 책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여전히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운동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되지 않고 꾸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책 역시 읽는 책력이 필요하다. 책력에 따라서 같은 책을 읽어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가게 된다.
처음에는 앞으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할까? 하는 생각에 집어든 책이지만 당연하고 누구나 다 아는 듯한 말을 풀어낸 이 책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되고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과연 나는 어떻게 독서를 해야 할지, 지금의 방법에서 이어갈 것은 무엇이며 고쳐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선 뜻을 세우는 입지가 있어야 한다. 누가 이것을 모르랴? 어렸을 때부터 가장 대답하기 곤란한 물음 중 하나는 "너 뭐하고 싶니?" 라는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갈 수록 점점 이것이 중요함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뜻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방향으로 독서의 길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선정한 후에는 기본적인 개론서를 바탕으로 해당 분야에 대해 개괄하고 관심있는 부분으로 확장을 해야 한다. 아직은 이렇게 집중적으로 책을 읽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관심있는 분야는 문학, 역사, 미술, 환경, 경제 부분인데 어떻게 체계적으로 접근해서 깊이있는 독서를할 수 있을 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두번째는 무엇을 읽었느냐 보다는 읽은 것을 소화하는 게 중요하다.
책을 읽고 덮어두면 그대로 그 책은 내 기억 속에서도 쉽사리 사라진다. 읽은 것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반복해서 읽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아직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경우가 드물어서 쉽사리 실천하지 못할 듯 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글로 남겨 둔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읽은 책의 내용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생각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 기억이 연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인상깊었던 구절에 대해서는 별도로 수첩에 정리해두거나 인쇄해 두어서 집안의 자석 칠판에 붙여두어 가족과 함께 공유하는 방법을 실천에 옮겨야겠다.
세번째는 책을 매개로 해서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방법이다.
여행을 가기 전에 여행 장소에 대한 역사적 사건 혹은 그곳의 문화를 미리 책을 통해 살펴본 후에 여행지를 경험하다. 다녀 온 후에 다시 그것을 기록에 남겨 추억을 간직한다. 음악에 대한 책을 읽었으면 그 음악을 찾아서 들어보고, 음식에 관련된 책을 본 후에는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거나, 손수 요리를 해먹는 것이다. 책을 흔히 간접경험의 매개라고 한다. 이런 책을 실제 경험으로 연결하면서 독서와 체험의 시너지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은 어떤 주관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아서 특정한 주제를 탐독하는 독서는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러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끈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하나의 전체적인 틀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식당에도 그 식당 만의 메인 메뉴가 있고, 기업들도 주력 제품을 통해서 사업을 확장해 나가듯이 독서에서도 나만의 분명한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면서 확장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계속 해본다.
장기적으로는 집중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로 내 독서생활을 이어가고 싶다. 둘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줄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고 하나씩 행동으로 옮기면서 체화할 수 있었으면 한다.
어떤 책인지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이 올려 놓은 서평을 하나씩 찾아 읽어보고, 내가 주로 이용하는 '요술램프'에 들어가서 목차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 중 눈에 띄는 세 가지가 있었다.
<박혜란의 세 아들 이야기>라는 부제, 세 아들이 모두 서울대학교를 나왔고, 그 아들 중 한 명이 40대의 <꽃보다 청춘>의 한 멤버이자 우리에게는 '달팽이'로 유명한 이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양가 부모님들이 유난스럽다고 하는 다섯 살, 세 살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딸을 낳으려고 셋째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의 기대는 없지 않았다. 이게 확률상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추석을 지낸 다음 날에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나 역시 궁금해서 아침부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자 마자 울먹인다. "아들이래~ 엉". 나는 괜찮다고 아기만 건강하면 된다고 했다. 자기도 아는데 자꾸 눈물이 난단다.
다음 날 아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신은 아들 셋을 키울 수 있는 사람에게만 준대. 신에게 선택받은 거야."
"딸들은 툭하면 삐지고 말 안하고 아들들이 차라리 나아~!"
"지금 둘도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셋째는 또 어떨지 너무 궁금하네."
<박혜란의 세 아들 이야기>라는 부제를 담은《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 이렇게 우리 손에 왔다.
이 책은 사람들이 수식어로 많이 사용하는 '아들 셋을 서울대학교에 보낸 육아법', '이적처럼 아이를 창의력있게 가르치는 법' 에 대한 책은 아니다. 저자인 박혜란이 세 아들들을 키워오면서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먼저 경험을 한 선배의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는 형식이며, 세상 부모들이 다 그렇듯이 은근히 아니 대놓고 자식자랑을 하는 그런 책이다.
엄마가 하루 종일 붙어서 아이를 키운다고 아이들이 모두 문제 없이 크는 건 아니다.
엄마가 취업을 했건 안 했건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안정되어야 한다.
이제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르지 말아야 돼!
이 명령처럼 아이와 엄마를
다 구속하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이 명령이 지켜진다면 곧 아이들의 자유를 빼앗는 꼴이고
만약 안 지켜진다면
엄마의 짜증이 촉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명령이다.
비싼 새 옷을 사 입혀 놀이터에 내보내고서는
절대로 더럽히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화는 반드시 말로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부모 자식 간의 대화에서 말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바로 스킨십인 것 같다.
스킨십처럼 친밀한 대화가 또 어디 있으랴.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놀 수 있는 기간은 대단히 짧다.
막내까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사실 아이들과의 놀이는 끝나고 만다.
그 후에 아이들이 뭘 하며 보내는지 나도 잘 모른다.
아이는 자기가 흥미를 가지면 저절로 배우게 되어 있다.
그걸 엄마의 흥미나 욕심에 맞추어 억지로 가르치려 든다면
역효과만 나게 마련이다.
문제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중심을 잃는 것이다.
아이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아낼 때까지
무엇보다 부모의 '참을성'이 필요하다.
아이의 작은 몸짓,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너희들이 공부를 잘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반복하는 엄마보다
아무 말 없이 틈만 나면 책을 펼치는 엄마에게서
아이들은 지적 자극을 받는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늘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이 문제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웬일인지 상당히 생각이 깊은 것 같은 어른들도
부지불식간에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엄마가 없으면 라면 한 끼도 못 끓여 먹는다거나, 엄마가 올 때까지 고스란히
굶는 아이들 때문에 꼼짝달싹 못한다고 넋두리하는 주부가 있다면,
자신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무능력자로 만든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 뒤에
소유욕과 명예욕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을까.
세상에 답이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다.
부모들이 각자 생각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양육에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분명 어떤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부모들은 여러 모로 아이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얼마전에 첫째가 둘째가 다투는데, 형(5살)이 동생(3살)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혼을 낸다.
순간 깜짝 놀랐다. 내가 첫째에게 했던 그대로 동생에게 하는 것이다. "동생한테 그러면 안돼!" 라고 말하니 "아빠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라고 한다. "아빠도 다음부터는 그렇게 안 할게, 동생한테 그러면 안돼"라는 말로 마무리 했다. 그런데 이게 나한테는 좀 크게 다가왔다. 정말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고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과 표정과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다. 아직 가치판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그 기준은 부모인 듯 하다. 내가 기준을 잘 잡아야 한다. 아직까지도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많이 부족하고 여전히 많이 미숙한데 아이들은 그런 나를 따라온다. 실로 책임이 막중하다.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할까? 라는 고민을 많이 해본다. 너무 잘해주기만 하면 버릇이 나빠지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너무 틀에 얽매이게 하면 표현을 잘 하지 못할까봐 걱정도 된다.
하지만 몇 가지는 항상 염두해 둘 생각이다.
아이들과 이렇게 교감하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기에 그 시간 동안 많은 대화와 스킨십을 통해서 서로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점과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닌 그들이 타고난 성향을 이해하면서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 너무 힘들 때는 아빠에게 다가올 수 있게 그 배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글이 쉽고 말은 쉽다.
작가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먼저 첫 번째 인생이 있다. 길에서 만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건널목을 건너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넥타이를 매는 그런 일상생활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두 번째 생활의 또 다른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을 다시 곱씹는 두 번째 인생이다. 이들은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면밀히 음미한다. 삶을 이루고 있는 세부를 들여다 본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글쓰기에 관심이 생깁니다. 항상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다가 이렇게 글을 쓰려 하면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서툰 글쓰기 실력을
만회해보려고 이런저런 기술이나 방법을 소개하는 책을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저 한 순간에 불과했습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그런 방법이 아닌 글쓰는 마음가짐과
자세로 인도합니다.
사람들은 일상(日常)을
살아갑니다. 일상은 ‘날마다, 늘, 항상’ 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변함없이쳇바퀴 돌아가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듯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에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 비일상적인 행복만을 쫓기에는 우리의 일상은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상을 온전하게 살아가는 힘입니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일상을 온전히 살아가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알려줍니다.
바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주변에 대한 관찰입니다.
이제는 거리에서 마주 오는 사람을 속으로 유심히 살펴보곤 합니다.
머리스타일, 옷의 종류와 색상, 걸음
걸이, 얼굴표정이 보이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거리의 어떤 풍경이 한 컷의 사진처럼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비 오는 날 창문을 바라보면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여러 개의 작은 방울로 흩어져 나가는 모습이 보이고, 비가 그친 후에 거미줄에 조그맣게 매달려 있는 물방울에 혼자 미소 짓기도 합니다.
출퇴근 버스에서 보이는 거리의 간판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보고, 가을하늘의
짙은 노을을 보며 홀로 감탄하며, 짙은 어둠 속에 멀리 보이는 불빛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P85
작가가 쓰는 글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재료로 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들이며,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작가가
되려는 당신은 알고 있는가?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모든 순간과 사물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것, 그것이 작가의 임무다.
여러분들도 글을 한 번 써보시기를 권합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 자발적이지 않은 독후감과 일기쓰기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인지 글쓰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의 기억은 잠시 접어두시고 다시 글을 써보시기를 권합니다.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어떤 것을 쓰던지 글을 쓰다 보면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머리
속의 생각을 정리하고 곱씹어 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사유와 사색으로 이어집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기를 적다 보면 다시 하루를 살게 됩니다. 아쉬운
게 생각나기도 하고,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분명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위해 지금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 지금 당장 자리에 앉으라. 지금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 무엇이 다가오더라도 지금 이순간의 것을 잡아라
.손을 멈추지 말고 계속 쓰기만 하라.
# 글감 노트를 활용하고 만들어 보라. ~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성질에 대해서 써보라. ~ ‘기억이 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사소한 기억이라도 적어보자.
~ 분홍색만을
생각하며 산책을 해보고 그것을 노트에 옮겨보라
~ 오늘
아침 당신의 모습을 적어보라. ~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를 시각화 시켜보라.
# 평범한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배우라.오래된 커피잔, 참새, 도시버스, 얇은 햄 샌드위치에 존경을 표해 보라. 당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계속
그 목록을 늘려가라.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글의 형태와 장르에 상관없이 이 목록에 들어 있는
것들을 단 한 번 이라도 언급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라.
# 당신에게는 꿈을 채워 나가게 하는 기본적인
연장인 '글쓰기'가 있다.
또 기억할 것이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당신 안에 숨겨져 있던 은밀한 꿈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절대 당신의 꿈을 회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표지에 남긴 글을 적어봅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단 하나다.
자신의 느낌을 믿어라! 자신이 경험한
인생을 신뢰하라!
뼛속까지 내려가서 내면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어라.
p34
지금 당장 자리에 앉으라. 지금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 무엇이 다가오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것을 잡아라. 손을 멈추지 말고 계속 쓰기만 하라.
p53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쓰기만 하라. 열등감과 자책감으로 중무장한 채 자신을 학대하는 싸움은 하지 말라.
p55
우리는 글이 안 써질 때도 무조건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두려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어떤 글이든지 쓰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p59
직접 경험한 것만이 체험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누군가 써 놓은 글을 읽으면서도 체험할 수 있어요. 뉴욕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 뉴욕의 모든 도로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여러분 속에는 다른 이들의 삶도 들어가 있습니다."
p63
우리의 잠재력은 지구 표면 밑에 있는, 보이지 않는 지하 수면과 같습니다.
누구라도 이 지하수면에 가 닿을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글쓰기 훈련을 계속하라. 그런 다음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목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곧장 나가라.
p64
공교육이 저지르는 가장 끔찍한 잘못은 타고난 시인이자 소설가인 어린 학생들에게서, 그들의 문학을 빼앗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문학수업은, 어린이들에게 문학 작품을 읽게 한 다음 곧바로 문학에 '대해서'만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한 편의 시를 놓고서, 학교 수업은 살아 숨쉬는 시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기보다 은유법과 상징법을 찾아 낱낱이 해부해 버리고 만다. 학교는 우리에게, 시를 대할 때는 시인이 언어 속에 숨겨 둔 비밀의 열쇠를 찾아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냥 그 시에 최대한 몰입해야만 한다. 그 시를 쓰며 시인이 보았던 이미지를 다시 불러와야만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 가르치듯이, 정작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 '대하여'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시에 머물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가라. 작품 자체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시 쓰기를 배우는 방법이다.
p71
우리는 바로 이런 태도로 글쓰기에 임해야 한다. "왜?" 라고 끊임없이 묻거나 옷을 고를 때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는 대신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정도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엄청난 에너지를 종이 ㅜ이에 쏟아붓도록 해야 한다. '이건 글을 쓰기에 좋고, 저것은 이야깃거리가 못 된다' 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작가는 두려움 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써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p83
우선 마음을 편안하게 열어 놓고 결혼식을 즐겨라. 당신이 주변 상황에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당신이 글을 쓰 때 정말 살아 숨쉬는 듯한 생생한 기억들을 불러낼 수 있다. 웃을 때마다 빨간 립스틱이 묻은 앞니가 보이던 신부 어머니의 모습과 신부의 드레스 자락에서 폴폴 풍기던 향수 냄새까지 전부 당신의 글 속으로 불러 낼 수 있다.
p85
작가는 쓰는 글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재료로 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들이며,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작가가 되려는 당신은 알고 있는가?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모든 순간과 사물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것, 그것이 작가의 임무다.
p86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부둥켜 안아야 할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은 지극히 평범한 동시에 신화적이다.
p88
좌선을 할 때 당신은 사라져야만 한다. 좌선이 좌선을 하도록 만들어라.
이것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당신은 그저 당신 속에서 흐르고 있는 생각들을 글로 적어 내고 있을 뿐이다.
p90
"아주 맛있어요. 일품이야!" 라는 말에는 에너지가 없다. 어떻게 대단한 것인가? 독자에게 그 대단함의 냄새를 맡게 하라. 바꿔 말해서 세부 묘사를 이용하라. 세부 묘사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요소이자 단위다.
p91
작가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먼저 첫 번째 인생이 있다. 길에서 만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건널목을 건너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넥타이를 매는 그런 일상생활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두 번째 생활의 또 다른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을 다시 곱씹는 두 번째 인생이다. 이들은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면밀하게 음미한다. 삶을 이루고 있는 재질과 세부 사항을 들여다 본다.
p99
당신은 그저 식탁 건너 편에서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곳의 분위기가 내는 소리와 의자와 문이 말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문 너머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도
계절이 만들어 내는 음향과 바람에 실려오고 있는 온갖 색상의 음향을 받아들여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당신이 있는 곳에 귀를 열어 두어라. 귀로만 듣지 말고 온몸으로, 당신의 위장과 심장과 피부와 머리카락으로 들어라.
듣는 것은 곧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더 깊이 들으려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이 가는 길을 받아들일 때 그 사물에 대한 진실한 글이 태어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셈이다.
p100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주고, 많이 써 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냥 단어와 음향과 색깔을 통해 감각의 열기속으로 뛰어들어가라.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느낌이 종이 위에 생생히 옮겨지도록 계속 손을 움직이라.
p113
당신에게는 꿈을 채워 나가게 하는 기본적인 연장인 '글쓰기'가 있다. 또 기억할 것이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당신 안에 숨겨져 있던 은밀한 꿈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절대 당신의 꿈을 회피할 수 없다.
p121
나는 여기에 대한 책을 구입한 다음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볼더 가를 천천히 내려가면서 단풍나무, 느릅나무, 참나무, 아카시아의 잎사귀와 씨앗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관찰 내용을 노트에 자세히 기록했다. 나는 이웃 사람들에게 자기네 집 정원에서 키우고 있는 꽃과 나무 이름을 일일이 물어보기도 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원에서 같이 거주하는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이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마음속 흐릿한 부분이 선명해지면서 이 지상의 삶에 더 튼튼한 줄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내가 아는 식물들인 산딸나무나 개나리를 보면 그 장소에 더 깊은 친근감을 느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 줄 때 느끼는 기분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쾌한 증명인 것만 같다.
p129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지구를 위해, 텍사스를 위해, 지난 밤 우리의 끼니를 위해 생명을 바친 병아리를 위해, 각자의 어머니를 위해, 고속도로와 나무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친절하게 대할 책임이 있다. 먼저 자신에게 친절할 때에만 세상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p132
우리가 글쓰는 방법을 배우는 이유는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탐욕과 질투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경탄하고 애착을 가지기 위해서다.
p162
평범한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배우라. 오래된 커피잔, 참새, 도시버스, 얇은 햄 샌드위치에 존경을 표해 보라. 당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계속 그 목록을 늘려가라.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글의 형태와 장르에 상관없이 이 목록에 들어 있는 것들을 단 한 번 이라도 언급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라.
p225
고독을 이용하라. 고독의 아픔은 당신에게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고독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그 고독을, 당신의 더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경으로 이용하라.
책에 관한 책을 읽으면 편안하다. 이런 저런 분야의 책을 읽다가 이따금 한 번씩 이렇게 '책에 관한 책'을 읽으면 기분전환이 되고 내가 하는 책읽기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준다.
사실 어떤 이야기를 할 거 같은지 대략 짐작은 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다시 궁금해진다.
책을 읽고 나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어떤 책을 읽고 있고, 언제 어디서 책을 읽기를 즐기고 있을까?
잠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기분좋은 시간이었다.
◆ 어떤 분야를 읽고 있을까?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생기고 그 관심의 폭이 점점 넓어짐을 접하게 된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쓰는 자기개발서 같은 책을 읽었다.
무엇보다 지속적인 책 읽기를 위해서는 재미가 중요하기에 재미있다는 소설책을 찾아서 읽었다. 어느 순간 소설에 빠져들었고,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소설들, 바로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찾아 읽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소설이다. 특히 소설 중에서 사회를 반영하는 내가 없었던 공간과 시간에 대해 알려주는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는 한 때, 고고학자나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저 생각만 있었을 뿐, 별다른 관심을 갖거나 노력은 하지 않았었다.
지금도 역사는 항상 관심을 가지는 분야이다. 올해 목표가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개괄하는 정도의 독서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구입하고 정리하려 하는데 몸이 안 따르고 다른데 자꾸 관심이 간다. 그래도 목표는 올해 조선시대 역사에 대해서 개괄해 보고자 하고, 항상 책이 나올 때마다 기다리는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의 책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려 한다.
그리고 내년에는 고려시대도 한 번 도전해보아야 겠다. 일단 조선시대부터라도 제대로 읽어보자.
최근에 부쩍 관심이 가지고 있는 부분은 미술이다. 얼마 전에 동대문디자이플라자에서 진행중인 간송문화전에 다녀왔는데 고려청자의 신비한 색채와 신육복의 화첩과 추사 김정희의 서화 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번이 직접 찾아서 간 두번째 전시작품관람이다. 앞으로 이런기회를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보는 감동은 컴퓨터로 책으로 보는 그 이상의 아우라를 담고 있다.
그래서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의 책들과 다른 여러 책들을 찾아보고 읽는 중이다. 읽을 수록 재미있다. 아마도 이쪽은 더 찾아볼 수 있을 듯 하다.
나중에는 고려청자에 대해서도 조금 더 공부해보려 한다.
서양미술에는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계기로 고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갱과 흥미롭게 연관된 고흐를 알게되어 고갱, 고흐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고 있다.
이것을 기반으로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작품도 찾아보고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아보려 한다. 나중에는 곰 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한 번 완독해야 겠다. 지금은 거의 사전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항상 기반이 되는 것은 인문/사회이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직접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다루게 되는 이 분야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삶을 위해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
관심이 가는 분야가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쉽지가 않다. 철학인데 그 진입장벽이 나에게 좀 높은 듯 하다. 최근에는 입문서 정도라고 하는 피노키오의 철학을 찾아 읽고 있는데 심오한 철학의 세계가 언제쯤 나를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걷기, 건축, 클래식, 글쓰기, 교육관련, 여행, 인테리어 등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고 한다.
이런 관심이 불과 2~3년 만에 생긴 것이니 아마 2~3년에는 조금의 발전과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더 생기길 바란다.
◆ 책 읽는 시간
책을 읽으면서 좋은 점 한가지는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다는 점이다.
예전에 약속한 사람이 늦게 오면 전화를 몇 번 해보고, '어느까지 왔느냐?'고 확인하고 했는데, 이제는 덕분에 관대해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가방에는 적어도 2권 정도의 책과 볼펜 한자루는 항상 들어가 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나는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 게 불편하다. 눈의 피로도 심한거 같고 그게 오히려 나에게는 더 좋은 듯하다.
굳이 가장 선호하는 시간을 꼽으라면 역시 세상이 조용한 새벽시간이다.
예전부터 나는 밤 늦게 자거나 시험기간에 밤을 지새우거나 하지 못했다. 지금도 아이들의 영향도 있지만 빨리 잠드는 편이다.
그래서 오히려 새벽에 일어날 수 있게 되었고, 아무도 없는 듯이 조용한 새벽에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점심시간의 20~30분 정도의 독서도 맥을 잘 이어주는 연결의 시간이 되어준다.
◆ 책 읽는 공간
어느 기사에선가 '남자들은 자기만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는 여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인이 선호하는 공간에서 소진되었던 힘과 기운을 천천히 채워주워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내일을 살게 해 준다.
아내는 나중에 아이들이 크면 내 방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공간이기에 그동안 방책을 세워야겠다.
쇼파에 앉아서 양 벽면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바라보면 무언가 뿌듯하고, 여러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가 된다.
커피는 집에서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라 잔잔한 노래, 시원한 물 한 잔, 땅콩, 호두같은 것 한 접시, 볼펜 한 자루, 책 한 권이면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어린 두 아들을 위해서는 쉽게 즐길 수 없는 사치아닌 사치가 되긴 했으나 가끔 누려보기도 한다.
지하철과 버스도 훌륭한 장소다.
아침에 버스 속에서 밤 사이 달콤하고 황홀한 꿈을 잇기 위한 유혹을 벗어난다면 훌륭한 장소가 된다.
항상 짓눌려 출근하는 서울 지하철이나 출근길 만원버스에는 다소 힘들기는 하겠지만 이동 중 대중교통은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된다.
책을 읽을 때 주변 사람들의 대화나 전화통화는 방해가 되지만 지하철, 버스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엔진소리, 정차소리, 사람들의 숨소리와 발걸음은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내어 책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내가 관심있어하는 분야와 좋아하는 공간, 시간에 대해서 적어보았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는 언제 어디서든 상관이 없는 듯 하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점점 다양한 분야로의 관심 확장과 끊임없는 호기심의 유지와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게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 책 속 구절을 소개한다
P67
루치우스 세네카는 “인간은 항상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듯 행동한다.” 고 지적했지만 바쁜 시간 중에도 한가한 순간이 있는 법이다. 짬을 내고 틈을 내고 멍하니 흘려보내는 시간을 잘 활용하면 책을 읽을 시간을 얻을 수 있다.
P77
책은 영원히 남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함부로 펴낼 수 엇ㅂ는 것이다. 말처럼 내뱉고 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아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 읽힐 것이라는 생각은 책을 쓰는 사람에게 책임감을 갖게 한다.
P78
청년이라면 자기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세계와 자연과 우주의 존재 이유를 물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던지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이냐에 앞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P82
장년의 독서는 지식 축적을 위한 독서에 머무를 수 없다. 장년의 독서는 그와 더불어 자신의 인생체험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깊게 심화시켜 그 문제들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체계적 답변을 마련하는 독서가 되어야 한다.
P84
청춘의 독서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타는 독서라면, 중년의 독서는 내면적 성숙을 위한 고요한 독서가 될 것이다.
P87
공자나 아인슈타인 같은 지적 업적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고, 그만큼 유명하게 되는 것도 삶의 보람이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업적을 남기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유명하게 되는 것보다, 그런 목적 이전에 오로지 앎 자체, 진리 자체에 정열을 갖고 자신의 지적 세계를 가능한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각자 자신의 능력, 분수, 처지에 따라 자신의 지적 세계를 넓혀간다면 그만큼 그의 세계는 확대되고 그만큼 그의 삶은 깊고, 그만큼 그의 삶은 풍부하게 된다. 설사 내일 눈을 감고 의식을 잃은 송장이 되더라도 그 순간까지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고 알아가는 기쁨, 그 보람을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91
독서의 근본적 목표는 인간의 변화에 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갖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나 자신의 내적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바에야 독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책을 읽기 전이나 읽은 뒤나 아무런 변화가 없이 똑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을 것인가?
P126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도서관이나 친구들을 통해 책을 빌려 보기도 하지만 언젠가 돌려줄 생각에 부담이 되고 책에 마음대로 줄을 긋거나 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낀다. 그래서 다른 데 쓸 돈을 아껴서 필요한 책과 읽고 싶은 책 들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호기심이 또 다른 호기심을 낳고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자꾸 책을 사게 된다. 한계를 모르는 호기심과 지칠 줄 모르는 독서열은 계속 책을 사들이게 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한권 두권 늘어나는 책은 점점 서재의 수용능력을 넘어서게 된다.
P137
안동에 가면 퇴계 이황이 글을 읽고 가르치던 도산서원이 있고 퇴계가 앉아서 글을 읽던 돗자리가 원형 그대로 깔려 있고 퇴계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나 이상이나 김수영의 서재는 아예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얼마 전에는 최남선이 살던 집이 완전 철거되면서 우리나라 근대 지성사와 문학사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져버렸다.
P176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이고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는 말이 있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는 말도 있다.
P179
“신촌 기차역에서 일산으로 가는 기차는 왕복 1시간 20분이 걸렸다. 캔커피 하나, 책 두 권을 들고 매주 기차역으로 간 적이 있었다. 역 근처 서점에서 신간 한 권, 잡지 한 권 사는 기분을 늘 상쾌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해도 내리기 싫어진다.”
P192
파리 만이 아니라 서울 거리에도 길을 걸어가면서 책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걸어가면서 책을 읽어도 넘어지거나 어디에 부딪히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책의 여신이 책에 빠진 사람을 보호하는 모양이다.
P196
영국에서는 서점을 bookshop이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bookstore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점(書店)과 더불어 서관(書館), 서림(書林)등의 한자어가 함께 쓰였다. 당시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서점은 박문서관과 한남서림이었다. 서점, 서관, 서림 가운데 ‘책의 숲’이라는 뜻을 담은 서림이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데 ‘책 파는 상점’을 뜻하는 서점이 점점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대현 서점들이 서점 대신 ‘글의 창고’라는 뜻을 담은 문고(文庫)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가장 눈에 띄는 보기다. 1970년대 서울에서 가장 컸던 서점은 종로서적이었다. 그것에서 종로3가 쪽으로 조금 떨어져 양우당이라는 서점도 있었고, 신문로 쪽에는 범한서적이라는 서점도 있었다. 범한서적이나 종로서적은 서점이면서 출판사도 겸하도 있었다. 그래서 서점이라는 칭호 대신 서적이라는 간판을 달았던 모양이다.
P198
<근대의 책 읽기>의 저자인 국문학자 천정환은 이렇게 토로했다.
서점에 가는 일이 두렵다. 서점에서 수많은 책 사이에 서 있는 일은 고통 그 자체이다. 서점에 가지 않은 얼마 동안 책들이 쏟아져나와 있다. 그 책들을 들추고 있노라면 내 게으름과 무식함이 발가벗는 것 같다.
P206
오늘날에도 센 강변에는 약 80여 개의 부키니스트 중고책 서점이 오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부키니스들의 초록색 철제상자는 파리 시 소유로, 파리 시가 심사를 거쳐 서적상에게 영구 임대한다. 그 대신 서적상은 책 판매수익의 5퍼센트를 파리 시에 납부해야 한다. 서적상이 사망하면 자동 상속은 안 되지만 가족들이 승계를 신청할 수 있다. 서적상들은 개인 연결망을 통해 장서가들이 사망하고 난 뒤 인수하거나 고물상을 통해 사들인 책을, 먼지를 털고 바라믕ㄹ 쏘인 다음 작가별로 시대별로 분류하여 초록상자 속에 진열한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면 각 서적상들의 전공 분야를 알 수 있다. 정치가나 연예인 들의 전기물을 모아놓은 상자가 있는가 하면, 1차대전과 2차대전을 중심으로 전쟁에 관한 책을 모아놓은 상자도 있다. 그 밖에도 중고서적상의 취향에 따라 20세기 문학, 예술사, 종교사, 왕실의 역사, 파리 여행기나 관광안내, 영화 등 고객들의 관심을 끌 만한 주제의 책들이 상자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책 전체를 셀로판지로 싸고 오른쪽 위에 매직펜으로 가겨을 써놓기도 하며 때로 강변의 둑 위에 책을 올려놓기도 한다.
P233
책 속의 문장에 눈길이 닿으면 냉동되어 있던 생각의 얼음들이 녹아 따뜻해지면서 생각의 아지랑이를 무럭무럭 피어나게 한다.
도서관에는 서로 다른 입장과 의견을 표명하는 책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책들은 들리지 않는 소리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면 도서관은 서로 다른 생각들이 싸우고 있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P236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도서관에 소장된 책의 입장이 되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무덤이 되느냐 보물이 되느냐,
내가 말을 하느냐 침묵을 지키느냐는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오로지 당신에게 달려 있다.
친구여, 욕구 없이는 부디 들어오지 마라.
도서관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원전 280년경에 북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였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거대한 도서관 이야기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주의적 이상을 지식의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건립한 이 도서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재에 있던 장서를 그대로 가져와 소장하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을 모아서 무려 7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이었다.
아테네와 로마가 인문학의 중심이라면 알렉사드리아는 자연과학이 강했다. 아르키메데스와 유클리드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그들은 아마 이 도서관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그런 유명한 학자들만이 아니라 클레오파트라도 그곳에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도서관은 여러 번에 걸친 전쟁으로 수난을 겪다가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일으킨 전쟁의 와중에 불타 재가 되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2004년 그 자리에 다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1974년 유네스코가 인류문화의 상징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건립하자는 제아능ㄹ 한 지 30년이 지나, 드디어 그 도서관이 완공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라진 도서관이 부활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립에는 중동의 산유국들과 유럽 여러 나라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 도서관은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 사이의 대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도서관의 서가에 처음 꽂힌 두 권의 책은 코란과 성서였다.
P241
도서관 서가의 수많은 책들은 19세기 말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던 멜빌 듀이가 1876년에 창안한 십진분류법에 따라 총류, 철학사상, 사회과학, 자연과학, 어학, 문학, 예술, 역사 등으로 분류되어 진열되어 있다.
P244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동과 서, 옛것과 새것을 두루 찾아 읽었으며 그것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 청년 시절을 보냈다. 어깨 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립도서관의 참고 열람실에서 이루어진 책읽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희망 없는 내일과 궁핍이 의식을 목죄었지만 날마다 책을 읽는 것으로 그 고통을 견뎌냈다. 훗날 시인이자 평론가가 된 장석주의 회고담이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에게는 도서관이 대학이고 대학원이었다.
P263
모든 책은 의무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하기로 되어 있어서 정식으로 출판된 책은 어떤 책이든 다 찾아볼 수 있다.
P267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저자들에게 수액을 전달하는 장소
P285
얼굴의 형태는 태어날 때 결정되지만 얼굴의 분위기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사람들의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에 따라 달라진다. 스무 살까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얼굴로 통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행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 조금씩 그 사람의 삶이 얼굴 표정 속에 반영된다. 인생을 피상적으로 함부로 막산 사람의 얼굴 표정과 진지하게 삶의 의미와 깊이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의 얼굴 표정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발자크의 말대로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며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매력있는 작업이다. 종이에 연필로 쓰던, 이렇게 블로그에 자판을 통해서 적든 쓰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름의 쾌감이 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만 신기하지 않은가? 어떤 이들이 글을 쓴다면 그들이 직접 그어내린 글자 획의 수가 같을지라도 자판으로 두드린 횟수가 비슷할지라도 각기 내뱉는 글은 천차만별로 존재하게 된다. 어떤 글은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의 생명을 이어준다. 반면에 어떤 글은 불편하고 기분나쁘고 조악하기까지 하다. 글은 바로 글쓴이의 생각과 사상 삶이 담기게 된다.
<대통령의 글쓰기>에서도 글과 말이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글은 곧 사람이다. 때로는 내가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괜히 한 번 아는 체 해본다. 관심을 받고 싶어서 나 자신에 집중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경우도 있다. 결국은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듯이 그런 글 또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게 된다.
비록 글을 많이 써보지는 못했으나, 분명히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글로 표현해내는 것과 단순히 꾸며내거나 생각해서 쓰는 글은 많은 차이가 있다. 경험한 일은 그때의 기억과 추억이 남아있고, 뇌리에 남아있는 오감이 있다. 그래서 당시의 이성적인 판단과 감성적인 자극이 고스란히 글에 담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글에는 한계가 있다. <라이어>에서 처럼 한 번 거짓말을 하다보면 그것이 진짜인 척 하기 위해 거짓말이 계속 덧붙여지듯이 어느 순간에는 글에도 군더더기가 계속 붙어버리게 된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 책의 제목처럼 자신의 직간접적인 경험과 내면을 깊숙히 찾아보는 것이 진실하고 진정한 글이 나오는 길이다. 이런 글이 결국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감동이 전해진다.
글쓰기의 기본은 자신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이것이 준비되어 있으면 된다고 생각된다.
항상 기본이 있으면 그 토대 위에 차곡차곡 쌓여져서 일정한 선에 도달하게 된다.
글쓰기에는 어떤 것을 차곡차곡 쌓아올릴까?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언급된 내용 중에 살짝 체크해 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글쓰기재료 수집
P78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말한다. "글쓰기는 집을 짓는 것과 같으며,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연장통을 잘 갖춰놓아야 한다." 내게 포털사이트는 훌륭한 연장통이다. 연장통을 쓰는 요령은 이렇다. 포털사이트의 '뉴스'를 클릭한다. 우측 상단에 '검색'을 클릭한다. '뉴스 상세검색'을 클릭한다. 검색어를 입력하고 하단에 '칼럼'을 클릭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도서관'을 검색하면 이에 관한 통계나 사례등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해당 칼럼이 너무 많은 경우에는 '제목에서만'을 클릭하면 된다. 지금도 글을 쓸 때 이 방법을 쓴다. 거의 모든 주제에 관해 쓸 말이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자주 이 방법을 추천하기도 한다. 자료를 완벽하게 찾아놓고 글을 쓰기보다는 쓰면서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P221
관심있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한다고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2년 동안 관찰한 결과, 소설 <개미>를 썼다. 주변 사람과 사물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관찰하면 된다.
P216
글을 잘 쓰기는 잘 듣기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스스로 중심만 잡을 수 있으면 많이 들을수록 좋다. 잘 들어야 말을 잘할 수 있고, 말을 잘해야 잘 쓸 수 있다.
글쓰기재료는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한 주제에 대해서 표현한다고 꼭 그것과 관련된 어휘 혹은 글귀만 사용되는게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글쓰기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런 재료들을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에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간접경험을 꾸준히 해야 한다. 어떤 매체라도 좋지만 글로 된 매체를 끊임없이 살펴보는게 효과적일 것 같다.
쉽게 읽히는 글
P178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오는 이 대목은 새겨들을 만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엄숙히 맹세하기 바란다. '생리현상을 해결했다'고 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똥을 싸다'는 말이 독자들에게 불쾌감이나 혐오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대변을 보았다'고 써도 좋다.
P178
"쉽게 읽히는 글이 쓰기는 어렵다."고 한 헤밍웨이의 말은 확실히 맞다.
글쓰기를 조금씩 하다보니 정말 어려운게 쉽게 읽히는 글을 쓰기다. 글쓰기의 목적은 글쓴이의 욕구일 수도 있으나 읽는이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글은 정말 쉬운 단어와 글귀로 이루졌으나 다루는 내용의 무게를 결코 낮추지는 않는다. 어떤 글들은 화려한 미사여구가 붙지만, 단순하게 특별한 수식어 없이 내용만을 담백하게 전하는데도 감춰진 수식어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짧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글들도 있다. 아직은 쉽게 쓰는 법을 나 역시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가장 염두해두고 생각해볼 부분이다.
요약
P158
2005년 10월 <한겨레>에 이런 기사가 났다. 독일 동방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르와의 대담이었다. "독일은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전에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대해 면밀히 검토했는데, 그것을 정리한 것만도 2,000쪽에 달했고, 이것을 요약하여 27쪽으로 만들고, 다시 1쪽 반으로 요약한 문서로 만들었으며, 이것이 1989년 동구권 변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2005년 10월 3일 한겨레>
예전에 어떤 글쓰기 책을 보았는데 긴 글을 적어두고 1,000자 내로 줄이기, 다시 500자로 줄이기, 100자로 줄이기, 글의 제목 만들기 식으로 요약하는게 있었다. 정말 글자수가 적어질 수록 힘들다. 어느 순간부터 형용사와 부사를 빼야 한다. 그게 쉽지 않다. 주어와 서술어로 줄이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똑같은 표현을 나타내는 단어도 많이 있는데 아는 단어도 한정되어 있다보니 결국은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어버린다. 항상 생각해보자. 글에 군더더기가 없는지, 핵심이 무엇인지, 내가 분명히 말하려는게 무엇인지, 글을 읽는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지 분명히 알아가면서 그 중심을 찾아내자. <THE ONE PAGE PROPOSAL>도 이런 연습하기에 효과적일 듯 하다.
퇴고
보통 글을 다 쓰면 '아 다 썼다.' 하고 끝내버린다. 이건 다 쓴게 아니다. 글을 다 쓰고 나서 퇴고를 하고 살펴보고 수정하고 다시 읽어보고 이런 일을 여러 번 반복해본 후에 글을 다썼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게 힘들다. 글을 마무리했다는 끝마침의 기분때문인지 결국 마지막이 소홀해진다. 오타도 생기기도 하고 나중에 읽어보면 단락간에 이어지지도 않고, 전체 흐름과 상관없는 내용이 들어가있기도 하다.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하는지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나온 퇴고의 방법을 보고 항상 염두해두어야 겠다.
<시작보다 중요한 퇴고>
1.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하는 게 맞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주제의 적절성 여부다.
2. 두 번째 주안점은 주제가 명확하게 전달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주제가 잘 부각됐나? 즉 청중이나 독자가 어느 게 주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후, 3개월이 지난 2009년 8월 18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시대의 거인인 김대중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가이면서 한 시대의 사상가였다. 삶 자체가 민주주의 본연이었다. 그의 말과 글은 곧 그의 행동이었고, 행동은 다시 말과 글이 되었던 분이다.
P243
1980년대 초 총칼로 권력은 찬탈한 신군부 세력이 달콤한 제안으로 회유하려 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에게 협력하면 일시적으로는 살지만 영원히 죽는다. 그러나 당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는 죽지만 역사와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산다. 따라서 나는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
그는 알았다. 말 자체가 그를 대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과연 처음부터 달콤한 제안을 했을까? 모진 고문과 살해 위협을 받아오면서 버티어왔다. 용기로 버티왔을 뿐이다. 우리가 아는 용기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두렵지 않은 것을 용기라고......
너무나 두려운데 무서운데도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용기로 그 시대를 버티어 왔다.
김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에 참된 용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두렵다고, 겁이 난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용기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리 약해도 강합니다."
그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과 글은 독서로부터 비롯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독서는 이제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을 하셨다. 책을 읽고 싶어서 다시 감옥에 가고 싶다고.
<김대중옥중서신>을 보면 항상 편지의 말미에는 다음에는 어떤 책을 찾아서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다. 감옥에서 끊임없이 읽고 다시 꺼내어 사색하고 곱씹었다. 단지 읽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독서의 완결이란 읽은 책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데까지라고 했다.
P47
"나는 오랜 옥중생활을 통해서 러시아 문학을 섭렵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등 많은 러시아 고전을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솔제니친과 사하로프의 작품들도 애독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문학을 읽은 것만으로도 감옥에 간 보람이 있었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1999년 5월 러시아 국빈방문 모스크바 대학 연설>
민주주의에 반하는 신군부세력에게는 총칼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당당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다들 기억한다. 대화를 할 때는 말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을 항상 배려하고 경청하고 또 경청했다. 어쩔 수 없이 지적할 상황이더라도 인격의 존중은 지켜주었다. 그런 분이었다. 강했지만 부드러웠다. 누구에게 강해야하는지 알고 있었다.
P214
김 대통령은 자전적 에세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화는 얼마나 말을 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대화의 요체는 수사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심리학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은 대화의 실격자요, 인생의 실격자다."
P289
김대중 대통령은 꾸중을 하는 데도 원칙이 있었다. 그 원칙을 자신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밝힌 바 있다.
"나는 비판을 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하나는 먼저 상대방의 입장이나 장점을 인정해주는 비판, 그리고 두 번째는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하는 비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장점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비판을 자기에 대한 비난으로 생각하고 수용해주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故김대중 대통령이 생각하는 연설문(글)과 기념사(말)을 소개한다.
글쓰기 책에서 삶을 배워간다. 나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철학자로서 사상가로서 그를 기억한다. 글을 읽어가면서 몇 번이고 넋이 나간듯 바라보았고, 다시 곱씹어 읽어보았다. 이 글귀를 ...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전진한다." - 김대중 대통령
P49
"나는 정치를 시작한 이래 연설문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설문에 많은 것을 담으려 했다. 집회가 있을 때면 연설 원고가 늘 걱정이었다. 원고가 완성이 안 되면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설을 했다. 한때는 정치가 곧 연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원고를 작성했다. 중요한 연설문은 산통이 대단했다. 호텔방을 전전하며 구상하고 수없이 다듬없다. (중략)
내 연설문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작성하지 않았다.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했다. 내 자서전에는 연설문이 비교적 많이 실렸다. 그것은 어떤 설명보다 어느 비유보다 내 연설문이 더 정확한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내 철학과 비전, 열정과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삼인>
P170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다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 간의 화해 협력을 이룩해야 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에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떻게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삶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 <2009년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