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이나 서평을 쓰고, 가끔 하루 일과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어떤 때는 그냥 어떤 단어 하나를 가지고 혼자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내려가기도 했다. 나는 작가나 기자처럼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물론 그들처럼 글을 쓰지도 못한다. 그런데 왜 나는 혼자 이렇게 글을 쓰는 걸까? 어떤 이유 때문에 내가 이렇게 글을 남겨두는 것일까?
하루를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항상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서 일을 하거나, 개인적인 업무 처리 그리고 홀로 생각할 시간은 스마트폰에 빼앗긴지 오래되었다. 잠시 생각해보니 어떤 날은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깊이 한 적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사는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생긴다. 이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그리고 동시에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면 내용에 따라 자연스럽게 예전에 내가 경험했던 내용이나 관련된 삶의 흔적들이 내면에 감춰진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오고, 어린 시절로도 가보고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공감할 수 있는 요소에서 함께 감응하기도 한다. 그런데 글쓰기는 그 퍼져나가는 정도가 더 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이가 더 깊숙하다. 그래서 글쓰기는 세속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수양의 길이요, 성찰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P22
작가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원래부터 작가라서 지식인의 본분으로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작가라는 뜻으로. 그래서 작가가 되기는 쉬워도 작가로 살기는 어렵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가라는 말은 명사의 꼴을 한 동사다. 작가는 행하는 자, 느끼는 자, 쓰는 자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세공하고 두루 나누면서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사람이다. 세상과 많이 부딪치고 아파하고 교감할수록 자기가 거느리는 정서와 감각과 지혜가 많아지는 법이니, 그렇게 글쓰기는 존재의 풍요에 기여한다.
p199
한 사람의 독특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를 가늠한다. 직업과 취향, 인생관을 파악한다. 긍정적으로 사는지, 부정적으로 사는지를 단어와 말투로 짐작한다. 그러니 어떤 단어를 주로 쓰는지, 욕설을 자주 하는지, 간결한 화법을 좋아하는지, 말끝마다 부연설명을 붙이는지, 심지어 문법적으로 수동형을 좋아하는지, 능동형을 좋아하는지, 사투리를 쓰는지, 말끝을 흐리는지 그대로 전하는 게 좋다. 또한 무의식적인 몸짓과 행동마저도 성격을 보여주는 단서다. 말을 하면서 헛기침을 해대는지, 여럿이 걸을 때 앞서 걷는지. 뒤로 처지는지, 아시다시피나 사실, 가령 같이 자주 사용하는 말버릇이 있는지 그러한 디테일을 살리면 글의 생생함을 더할 수 있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유쾌한 농담에서 진지한 토론까지 하나도 놓칠 게 없다.
글을 쓰다 보면 항상 생각하게 되는 것이 글의 재료이다. 글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내용들을 적어내려가야 한다. 바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스펙트럼이 글의 재료가 된다. 그러다보니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세상을 좀 더 자세히, 남들이 보지 못하는 숨은 부분까지도 바라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관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 더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는 항상 휴머니즘의 전제가 필요하다.
책을 읽고 남기는 개인적인 독후감을 쓰고 나서 어떨 때는 홀로 뿌듯할 때가 있다. 무언가 내 글에 대한 자아도취의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는 대부분 형식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내가 경험했던 내용, 개인적으로 고민했던 내용을 풀어내는 경우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거나, 대중매체를 통해서 접한 정보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에는 어쩐지 글을 쓸 때 감정이 제대로 스며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내가 내 이야기를 쏟아낼 때는 그 만큼 힘이 생기고 글에도 탄력이 붙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p62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문학은 저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글쓰기는 용기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소설가 김연수는 글 쓰는 일이 "아랫도리 벗고 남들 앞에서 서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용기가 충만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글을 써내는 과정에서 문제에 직면하면서 용기가 솟아난다는 말일 것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다 보면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고 했다.' 라는 말이 나온다. 글을 쓰다 보니 색다른 시선으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사람, 다정하게 이야기하듯이 읽는 내내 마음도 차분해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부러웠다.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을까. 시기심이 발동한다. 그런데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잘 쓸 수 없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상처가 되는 말이지만 반대로 내가 한 만큼은 보상해준다하니 위로가 되기도 한다.
글이 '자기 능력' 보다 잘 쓸 수 없다고 할 때, 그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다시 독서와 사색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기르고, 만나지 못하는 인물들의 내면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삶의 직간접 경험을 되새김질 하듯이 끊임없이 곱씹으면서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능력이 살아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p81
대학교 3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의 어머니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스물여덟 살에 청상이 되어 삯바느질로 삼형제를 키우던 어머니가 순천 시내 서점 주인에게 "우리 아들이 읽고 싶은 책은 마음대로 읽게 하고, 사고 싶은 책은 그냥 가져가게 하면 월말에 들러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승옥은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책이란 책은 거의 다 읽었고 그것들이 글을 쓰는 바탕이 되었다며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독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글쓰기에 대한 많은 책이 내 책꽂이에 서로 기대어 꽂혀있다. 잘 쓰고 싶은 욕심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그들이 특별한 해답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그저 써야 한다'가 진리임을 알게 된다.
『글쓰기 최전선』의 표지의 윗 부분에 쓰인 짧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P9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
P17
사보 일의 유일한 낙은 인물 인터뷰. 연인과의 만남처럼 늘 설렌다. 그동안 보아온 삶의 유형을 벗어난 다양한 얼굴들. 세상의 척도가 아닌 제 '멋'에 취하거나 '흥'에 겨워 사는 사람들. 일상이 예술인 다양한 직업의 세계.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넓어지는 기쁨이 컸다. 혼자만 알기 너무 아까웠다. 인터뷰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는데 그게 매번 반복되니 하루는 친구가 지청구를 주었다. 도대체 안 멋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P18
나는 인터뷰만이 아니라 영화나 책에서 감동을 받으면 잠이 잘 안 왔다. 가슴에서 퍼내야 홀가분했다. 이 주옥같은 이야기, 이 놓치기 쉬운 생의 진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서 마음 편히 살고 긍정적 변화를 이루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시켜서라면 하지 못할 선천적인 오지랖인데 그것이 귀찮고 피곤해도 글을 쓰게 했다.
P19
감응하면 행동하게 되고 행동하면 관계가 바뀐다. 내 안에 머무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언어를 통한 '함께-있음'. 그리고 '나눔-변용'이다.
P20
글쓰기도 요리와 다르지 않다. 우선 내 생각을 글로 나타내면 남의 말을 잘 알아듣게 된다. 신문, 책, 블로그 등 무수한 텍스트를 접할 때, 글쓰기 전에는 단순한 '활자 읽기'라면 글쓰기 후에는 글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로 독해가 비약한다. 글쓴이의 처지가 헤아려지며 문제 의식과 깊게 공명할 수 있다. 글쓴이가 자료를 찾기 위해 얼마나 발품을 팔았는지, 적합한 단어 선택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글쓰기는 글 보는 눈을 길러주며, 글 보는 안목은 곧 세상을 보는 관점을 길러준다. 아울러 남의 말을 알아듣는 만큼 타인의 삶에 대해 구체적 감각이 생긴다. 이 감각, 마음 쏠림이 또 다른 글쓰기를 자극한다.
P22
작가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원래부터 작가라서 지식인의 본분으로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작가라는 뜻으로. 그래서 작가가 되기는 쉬워도 작가로 살기는 어렵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가라는 말은 명사의 꼴을 한 동사다. 작가는 행하는 자, 느끼는 자, 쓰는 자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세공하고 두루 나누면서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사람이다. 세상과 많이 부딪치고 아파하고 교감할수록 자기가 거느리는 정서와 감각과 지혜가 많아지는 법이니, 그렇게 글쓰기는 존재의 풍요에 기여한다.
p31
기존의 글쓰기 강좌가 '기자가 되기 위한' 또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또는 '자서전을 쓰기 위한'등 목적이 뚜렷했다면 <글쓰기 최전선>은 목적에 갇히지 않는 글쓰기 수업이었다. 자기 삶을 자기 시대 안에서 읽어내고 사유하고 시도하는 '삶의 방편이자 기예'로서 글쓰기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표방했다. 그렇다고 요즘 이슈인 힐링이나 치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구조적인 매트릭스에서 자신을 분리시킨 채 성급한 반성과 화해, 자기 정당성 확보의 글쓰기로 잠시 위안받고 산뜻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그 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조금낏 불편해지며 깨어있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다. 그러니까 다른 강좌가 잘 살기 위한 방향과 목표를 이미 결정한 이들이게 글쓰기의 실용적인 기법을 전수하는 방식이라면, <글쓰기의 최전선>은 왜 그 직업을 욕망하는지, 밤이고 낮이고 쓰는 글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잘 산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등등 자기 생각과 욕망을 글로 풀어내며 나를 알아가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p42
작가와 독자의 분리,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분리, 선생과 학생의 분리, 지식인과 대중의 분리, 정신노동과 육체노ㄴ동의 분리라는 치안적 질서는 각 개인의 능력과 재미를 제한한다. 한 사람이 직업의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존재로 변신할 때, 자기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있고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
p43
자기 이해를 전문가에게 의탁하기보다 스스로 성찰하고 풀어가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중 가장 손쉬운 하나가 내 생각에는 글쓰기다. 글쓰기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공업으로, 부단한 연마가 필요하다. 자기 안에 솟구치는 그것에 대해 알아채는 감각, 자기 욕망과 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감성적 역량, 세상을 읽어나가는 지식과 시선 등을 갖춰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삶의 장인이 될 수도 있고 아니될 수도 있지만 더 망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다. '망가지지 안는다'는 말이 얼핏 소극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무척 섬세한 감수성과 인지성이 들어 있다.
p47
'여럿이 함께' 쓰기 위해 모였다는 점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한국사회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낯선 사람들과 무작위로 섞이는 기회가 극히 적다. 비슷한 가방을 들고 비슷한 메뉴를 고르며 비슷한 드라마를 보는 사람끼리 어울린다. 그런데 동류 집단을 벗어나 낯선 배치에 놓이는 기회가 글쓰기 수업에서 주어진다. 저마다 다른 사람의 이력을 갖고 있으며 고단한 삶에 쉼표를 찍고자 떠나온 사람들과 마주하는 시간, 젊은 농부와 프로그래머가 만나고 공무원과 예술가가 벗한다. 다른 감각 다른 경험 다른 문화를 접한다. 이런 외부 자극과 내적 감응은 우리의 세포를 글 쓰는 신체로 활성화시켜준다. 멋진 여행이나 사랑, 혹은 곡절을 경험한 사람들이 넘치는 정서와 감성, 이전과는 다른 느낌과 생각에 겨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p48
이제껏 내가 살아온 것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글쓰기 수업은 여행하고 참 비슷해요. 서로 호기심을 갖고 깊은 대화를 나누고 좋은 자극 주고받으세요. 내 안에 수다가 많으면 글쓰기에 유리하거든요."
p50
글쓰기는 삶의 지속적 흐름에서 절단면을 만들어 그 생의 장면을 글감으로 채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p52
이처럼 열 편 남짓 글을 쓰고 나서 예외 없이 글감의 고갈에 직면하는 이유는 삶 혹은 나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어쩌면 글감의 빈곤은 존재의 빈곤이고, 존재의 빈곤은 존재의 외면일지 모른다.
p53
글쓰기는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자아냈던 대소사의 나열은 삶의 극힐 일부분이다. '나'의 범위 역시 피와 살이 도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총체이기도 하며 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내가 쓰는 언어를 보자. 그간 읽었던 책, 접했던 언론, 살았던 가족, 만났던 애인, 놀았던 친구의 말의 총합이다.
p54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경험의 코뮨적 구성 원리를 인식한다면, '경험의 고갈'이라는 난감한 사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p57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문장을 쓰고 그걸 다듬어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의 힘으로 한 페이지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서 영감을 기다리고 지적 자극을 위해 벤야민을 읽고 벤야민을 읽다보면 마르크스가 궁금하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려면 [자본론]을 펴야 하고 ..., 무능력에서 출발하면 글은 영원히 쓸 수 없다.
p58
글쓰기 초기 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일본 메이지대 문학부 교수 사이토 다카시는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이라는 책에서 "질보다는 양"이 문장력 향상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고지 열 장을 쓰는 생활 습관을 기르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좋은 글을 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백지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말하려는 내용을 완벽하게 써내야 한다는 부담을 버리고 글을 써내려가면 그 과정에서 좋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
p62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문학은 저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글쓰기는 용기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소설가 김연수는 글 쓰는 일이 "아랫도리 벗고 남들 앞에서 서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용기가 충만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글을 써내는 과정에서 문제에 직면하면서 용기가 솟아난다는 말일 것이다.
p68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p74
글쓰기 치유 워크숍이 끝나고 나면 참가자도 나도 조금씩 달라져 있기를,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재확인이 아니라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고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희망했다.
p76
타인의 경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 리뷰를 마치고 나서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굿'을 한 것처럼 몇 시간씩 앓기도 했다. 그건 아마 성장기에 뼈가 자라듯이 사유의 회로와 감각의 형질이 변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p81
대학교 3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의 어머니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스물여덟 살에 청상이 되어 삯바느질로 삼형제를 키우던 어머니가 순천 시내 서점 주인에게 "우리 아들이 읽고 싶은 책은 마음대로 읽게 하고, 사고 싶은 책은 그냥 가져가게 하면 월말에 들러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승옥은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책이란 책은 거의 다 읽었고 그것들이 글을 쓰는 바탕이 되었다며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독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p81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세계문학전집 뒤에 있는 자료 등을 보고 나름 세계 문학사 연표를 만들어서 연도순으로 읽어 나갔어요. 고대부터 1960~70년대 작품, 밀란 쿤데라까지 듬성듬성하긴 해도 꽤 많이 읽었는데 그때 독서가 자산이 됐어요.
p82
글쓰기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한 사람이 그간 읽은 책, 들은 말, 본 것, 접한 역사와 당대 이념등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그것이 풍부할수록 더 힘 있고 좋은 글이 나온다. 내가 글쓰기 수업에 책을 넣는 이유다.
p83
카프카의 말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나는 학인들에게 책을 읽되 '진실한 독해'를 당부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사실에 부합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곧 책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저자의 의도에 맞추려 낑낑대지 말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떠올리고 접목시키면서 '주관적'으로 읽어달라고 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다. 지식 따로 생활 따로의 교육 풍토 탓일 게다. 사회학자 조한혜정은 <글 읽기와 삶 일기1>에서 이렇게 썼다.
"학생들은 추상화 수준이 높으면 그 나름대로 쉽게 소화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구태여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볼 필요없이 공식을 외우듯 머릿속에서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p86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한된 삶의 조건에서 한정된 독서를 한다. 만나는 사람을 계속 만나듯이 읽던 책들을 주로 읽는다. 그간 읽어왔던 이물감 없이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책들 위주로 본다. 그것이 참다운 독서일까. 앞서 카프카가 말한 내면의 얼음 바다를 더 단단히 만드는 책 읽기. 자아가 유연해지기보다 고집스러워질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그건 약일까 독일까
p92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시는 패배자의 기록
p94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시 암송을 통해 '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그동안 오직 쓸모를 챙기기 위해 이루어진 지식의 축적에 물음표를 남겼다. 이것이 문학평론가 김현이 말한 문학의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으로의 이행이 아닐까. 잘 알려졌다시피, 김현은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p96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니체는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없다며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사적 독서가 아무래도 아는 지식을 재차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공고히 할 위험이 있다면, 함께 읽기는 이를 피해갈 기회가 주어진다. 자기 경험이 놓친 부분을 다른 동료의 경험으로 발견할 수 있다. 예기치 못한 느낌의 자장에, 의미의 풍요에 겹겹이 포위된다.
p97
시집은 나의 변화를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때는 도저히 감각의 주파수가 안 맞던 시가 계절이 바뀌고 나면 읽힐 때가 있다. 매번 읽을 때마다 새 책같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 사이 나는 살았고 뭐라도 겪었고 변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시집은 나에게 너무 어려워" 혹은 "이 책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제쳐두는 것은 자신을 고정된 사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절대 변하지 않고 화석처럼 살겠다는 이상한 다짐이다. 그 해 여름에 나를 밀어내던 시가 이듬해 겨울에 조금씩 스며들고 문장들이 마음에 감겨오면 그 기쁨은 무척 크다.
p100
김수영 시는 고약한 구석이 있다. 시어는 생활어이지만 의미를 흔들고 뒤집는다. 시의 난해함은 삶의 난폭함에서 유래한다. 삶이 종잡을 수 없다면 삶을 받아낸 시도 그럴 수밖에. 한 학인은 시가 도저히 안 읽혀 집 근처 도서관에서 김수영 관련 도서를 일곱 권이나 빌렸다고 했다. 이미 유명한 철학자가 진행한 김수영 시 강연을 듣고 온 이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럴 땐 난감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안 읽히는 ' 김수영의 시-삶이지, 김수영의 시-삶을 이론의 형틀로 찍어낸 '잘 읽히는' 지식인의 해석이 아니다. 소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느낌과 생각으로 시를 읽어내고 해설하느라 낑낑대는 것이 공부다. 독서의 참맛이다. (학자의) 권위에 복종하지 말고 (나만의) 느낌에 집중하기. 시의 본령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삶의 결을 무한히 펼치는 데 있다. 시가 아무리 어려워도 처음 읽을 때는 참고도서를 들춰보지 말자고 당부했다.
p102
내 마음도 꼭 그와 같았다. 평소에 쓰지 않던 언어를 사용하면 색다른 느낌이 사르르 피어난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천석꾼 부럽지 않게 든든하다. 어쩌면 우리는 안다는 것보다 느낀다는 것에 굶주린 존재인지 모른다.
p103
책은 기호품이거나 의약품이다. 배경지식, 관심분야, 자기욕망, 독서습관 등에 따라 또 현재 당면 과제와 자기 아픔에 따라 읽히는 책도 필요한 책도 다르다. 나의 좋음이 남의 좋음과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
p105
취향을 만드는 일은 탈취향을 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 말이다.
p106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둔,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만 돌리면 들어오는 광고가 정보를 제공해주는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래도 먹고사는 건 바쁘고 문화생활은 해야겠으니 가까운 데에, 익숙한 것에 손이 간다. 영화는 흥행 영화로 책은 베스트셀러로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일찍이 일침을 가했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어. 상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는 거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어."
대다수 사람들이 보는 책, 인구의 사분의 일이 선택하는 영화라는게 얼마나 자기모순적인가.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경제의 법칙이다.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모든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건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다.
p107
고유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적 서정이 높아지고, 타자를 이해하는 감수성이 길러지지 않을까. 그러면 온갖 끔찍하고 야만적인 갑질 사건이 잦아드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p115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p116
사람이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제도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축적된 정보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슬프게도 한 인간의 우주가 미디어를 통해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 상식, 통념이라 부르는 가치 체계는 워낙 당대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 알려고 해야 한다. 언론매체에서 떠드는 상식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 TV에서 커트된 무수한 삶을 '감히 알려고' 하는 자가 작가다.
P118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작가는 그것을 촉발해야 한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내가 쓴 글이 숨 막히는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막을 옥토로 만들 물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왜라고 묻는 글,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하도록 등 떠미는 글, 도덕 위에서 춤추도록 깨달음의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글, 모든 글(책)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P124
글쓰기는 이미 정해진 상식, 이미 드러난 세계의 받아쓰기가 아니라 자기의 입장에서 구성한 상식, 내가 본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갈, 그 사람만 쓸 수 있는 고유한 글이 나온다.
P127
김기덕의 영화나 디앤 아버스의 사진처러 좋은 작품은 물음을 던진다. 자기 시대가 떠받드는 가치 체계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서 자기 삶을 ,주변 사람을, 이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철학자도 마찬가지. 철학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려고 하는 것이라고 푸코는 말했다.
P128
작가든 기자든 글 쓰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대상에서 비범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 안목,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에세이, 칼럼, 논문 등 모든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질문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문제의식이 없는 글은 요란한 빈수레와 다름엇다. 메시지가 없는 미사여구의 나열은 공허하다. 지식은 넘치고 지혜가 빈곤한 글은 무료하다. 전문적 지식과 현란한 수사로 빼곡하지만 정작 다 읽고 나도 필자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글은 일간지에서도 눈에 띈다. 이는 독백이다. 글이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는 대화와 소통 수단이어야 한다. 울림이 없는 글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어야 좋은 글이다. 그러니 글쓰기 전에 스스로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두툼한 책이든 한 페이지 글이든 한 줄로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글에 대한 예의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요약하면 이것이다. '관습적 해석에 저항하는 글을 재미있게 쓰자.'
P131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것은 창작자의 임무이다. 창작 분야 종사자 중 '대체 가능한 존재'는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아니어도 남이 할 수 있으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나만 쓸 수 있어야 한다. 박완서의 글은 김훈이 흉내 낼 수 없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고 했다. 내가 글을 쓸 때 꼭 염두에 두는 말이고 학인들에게도 자주 당부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P132
이 세상에 컵 자체는 없다. 노란 컵, 플라스틱 컵, 종이컵, 깨진 컵만 있을 뿐이다.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만이 존재한다. 내가 만약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보편적 관섬을 변화시키고, 알고 있는 것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내 진짜 느낌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글을 참신하게 한다. 어떤 글이 읽힌다면, 독자의 눈길을 붙들었다면 그것은 진부하지 않다는 뜻이다.
P135
글에는 적어도 세 가지 중 하나는 담겨야 한다. 인식적 가치, 정서적 가치, 미적 가치. 곧 새로운 지식을 주거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거나 감정을 건드리거나
P136
사는 이유가 별거 없듯 대수롭지 않은 소소한 이유이다. 그런데 그 별거 없는 삶, 시시한 욕망을 밀도 있게 찬찬히 담아내면 특별한 글, 진솔한 글이 된다.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나는 왜 언제부터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갖게 되었는지, 일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일에 대한 환상이 어떤 지점에서 깨졌는지, 이 일을 계속 할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P137
사회적으로 소위 '성공'한 이들의 정보는 차고 넘치는 반면, 영화 스태프나 장애인 야학교사나 비전향 장기수, 경비원 등 수입이 높지 않은 이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집단적으로 무시한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제의식이란 거창하지도 까다롭지도 않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의문이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놓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세상의 풍경들. 예를 들면 엄마가 매일 일어나 밥하는 일, 마트 종업원이 기계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일, 괜히 싫은 감정이 드는 것 등 상황과 감정에 집중하고 관찰하고 질문하는 일이다.
P141
어떤 완벽한 인격체라는 뜻이 아니라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도와 모험을 행하는 자가 채택하는 삶의 원리와 태도가 위버멘쉬라고
P143
자기 욕망과 능력을 알아가면서 자기만의 행복을 만들어가기보다 행복이라고 이미 규정된 사회적 모델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 크나큼 피로가 덮친다. 그런 의욕-하기, 곧 노예적 의욕 하기라면 아주 멀리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무작정 행복만 원하지, 정작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는 것이다. 랭보의 시구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환, 나의 벌레였다." 행복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행복만을 바랄 때 벌레처럼 삶을 파먹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P144
(장정일) "학교에서 세상을 배우고 있을 때 /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P149
끊어치기가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며 하는 말이, 같이 일하는 동료가 공문을 작성했는데 문장이 길게 늘어져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단다. 끊어쳐서 다시 써보라고 충고했더니 한결 낫더라는 것이다. 끊어쳐라. 단문을 써라. 간결한 문장을 써라. 한 문장에 한 가지 사실만 담아라. 일문일사. 거의 같은 의미, 다른 표현이다.
P151
주어와 동사는 연인이다. 가까이 있게 하라, 는 말이 있다. 문장이 길수록 주술 관계가 어긋나기 쉽다. 문장이 간소해야 내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갔는지, 빠진 부분은 무엇인지, 부연할 요소는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P152
"지금은 삶이 내것인지 두렵다" "사람을 만날수록 외로워졌다" 같은 경우처럼 "~했다""~이다"라는 문장이 잇달아 나오는 글은 흐름이 탁탁 끊겨 이야기가 흩어진다. 복잡한 문장과 마찬가지로 앙상한 문장도 메시지 수용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P153
문장이 길든 짧든 나는 이런 글이 좋다. 사유가 촘촘해서 문장이 흐름을 타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며 인식의 틀을 흔들어 놓은 글. 하나의 메시지나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라도 남으면 그건 좋은 글이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단문쓰기가 글쓰기를 여는 문이다.
p154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지 않은 것에 사랑을 느끼는 법이 없다. 모든 사랑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출발한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나온구절이다.
p155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어록이다.
p156
"모방은 물듦이다. 진정한 모방의 힘은 충실하고 충실해서 마침내 그 모방을 뚫어내는 길 속에 있다. 그러나 착실하게 모방의 길을 걸어 보지 못한 자라면 냉소마저 허영일 뿐이다. 가령 프로이트에 충실한 라캉의 생산성이 그러하고 라캉에 충실한 지젝의 생산성이 그러하지 않던가."
p159
글쓰기는 파편처럼 흩어진 정보와 감정에 일종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주제'를 부각하는 행위다. 단계가 있다. 마음에 걸리는 것 일단 쓰기, 어지러운 생각들을 자유롭게 마구잡이로 풀어놓는다. 그리고 편집하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판단해서 덜어내고 보완한다. 행동 표정 대화를 떠올리고 그대로 묘사하여 글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차분히 앉아서 하나씩 써나가는 거다. 내가 쓰고자 하는 화제에 대한 사전적이고 교훈적인 정의를 내리기, 가령 여자에게 커피심부름 시키지 맙시다가 아니라 '나에게 그 화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나의 경험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글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p162
필자의 개성과 글의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으며, 신문 사설용 언어와 차별성도 없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어라'는 내러티브 제1원칙에 해당하는 말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갈 수 있는 좋은 팁이다.
p164
내 글을 들려주고 싶은 구체적 대상을 정하고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살아있는 이야기가 풀려 나온다.
p165
버스나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사연이 재미있는 이유는 반대다. 깨알 같은 상황 묘사와 인물묘사와 대사가 살아 있어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다.
p166
글을 쓰면서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다. 내 글이 누구에게 가닿길 바라는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먼저 걸어가고 느낀 자로서 무슨 이야기를 건넬까. 그런 물음에 대한 응답 장치가 사진 한 장 붙여놓고 글을 쓰는 일이다. 좋은 사연을 들려주고 좋은 음악을 틀어주는 디제이처럼 글쓰기도 나와 닮은 영혼에 말 걸고 위로를 건네는 일이다.
p171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고 했다.
p173
내가 편했다면 남이 힘들었단 뜻인데 몰랐다. 삶이란 누군가의 노동에 빚지고 살아가는 것이구나 싶고, 아무튼 그날 하루 내가 의젓해지는 기분이었다.
p174
계몽, 공 도덕적 마무리는 위험하다. 상황을 단순화 시켜버린다. 감정을 평준화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깨소금을 치듯 글도 기어코 '교훈'으로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 하루도 참 알차게 보냈다. 오늘도 참 재미있었다. 같은 '그림일기형' 엔딩 처리인데 글이 식상해지는 지름길이다. 기껏 자기 경험과 생각에 근거해 잘 써놓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글이 평범해진다.
p176
글은 삶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것이 글 쓰는 사람에게는 좌절의 지점이기도 하고 희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p180
르포르나주는 기록이라는 뜻의 불어다. 구체적인 현장에서 구체적인 사람과 대면하며 쓰는 기록 문학을 뜻한다. 사실에 근거한 취재에 배경지식과 비판의식을 더한 글이다. 그런 점에서 르포르타주는 글쓰기의 한 장르가 아니라 글쓰기의 기본 준칙이자 윤리에 가깝게 느껴졌다. 현장, 사람, 기록, 이것은 늘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세 가지가 아닌가
p183
조지 오웰은 "글쓰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의 주제, 곧 마땅히 표현해야 될 바를 표현하는 일인데 그건 경험하지 않으면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오웰은 또한 표현의 방식과 스타일 등 넓은 의미의 작품성은 그 다음에 따라오며 그건 고통스러운 반복작업과 훈련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p199
한 사람의 독특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를 가늠한다. 직업과 취향, 인생관을 파악한다. 긍정적으로 사는지, 부정적으로 사는지를 단어와 말투로 짐작한다. 그러니 어떤 단어를 주로 쓰는지, 욕설을 자주 하는지, 간결한 화법을 좋아하는지, 말끝마다 부연설명을 붙이는지, 심지어 문법적으로 수동형을 좋아하는지, 능동형을 좋아하는지, 사투리를 쓰는지, 말끝을 흐리는지 그대로 전하는 게 좋다. 또한 무의식적인 몸짓과 행동마저도 성격을 보여주는 단서다. 말을 하면서 헛기침을 해대는지, 여럿이 걸을 때 앞서 걷는지. 뒤로 처지는지, 아시다시피나 사실, 가령 같이 자주 사용하는 말버릇이 있는지 그러한 디테일을 살리면 글의 생생함을 더할 수 있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유쾌한 농담에서 진지한 토론까지 하나도 놓칠 게 없다.
p205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느낀다. 가장 큰 가난은 관계의 빈곤이다. 관계가 줄어들면 자아도 쪼그라들고 관계가 끊어지면 자아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