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블로그에 서평을 남기거나, 눈에 보였던 것들을 묘사하거나, 아니면 하루 동안 변해왔던 내 감정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글로 적어내려 갈 때가 있다. 그런데 왜 내가 메모지, 다이어리,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있을까?
항상 대답은 정해져 있다. 손이 가기 전에 먼저 마음이 먼저 앞선다. 무언가 하루 동안 겪었던 기억들이 휘발되어 날아가지 않게 담아두고 싶고, 책을 읽으면서 그 순간에 느꼈던 진한 감동과 감탄스러웠던 순간들을 그대로 아로 새겨서 간직하기를 원한다.
글을 쓸 때 느끼는 쾌감 중에 하나는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마지막을 마치는 순간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아~! 끝났다' 하는 시원함과 동시에 '어떻게 글을 써내려왔지?' 하는 궁금증이 겹친다. 그리고 글을 처음부터 혼자 읽어 본다. 문맥의 흐름은 맞는지, 어색한 표현은 없는지 살펴본다. 너무나 식상한 단어를 보면 어휘력의 한계에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평소에 잘하지 않았던 마음에 드는 표현이 나왔을 때는 스스로 대견해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기억을 하기 위해서다. 서평, 일기, 생각나는 무언가에 대한 기록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유산으로 남는다. 순간순간 남기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중요하거나 가치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한 때는 지금처럼 현재였던 그 순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 당시의 내 모습과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 순간에는 너무나도 중요했던 일들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니 그렇지 않았구나! 깨닫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평범한 순간이 정말 기회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게 개인적인 글들이 늘어나면 나만의 자서전, 역사책이 만들어진다. 가능하면 내가 느끼는 세세한 감정들,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자세히 적어두고 싶다. 그렇게 나를 한 번 더 깊이 관찰하고 싶다.
마지막은 생각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난 다음에 해야하는 것이 성찰과 사색이다. 성찰과 사색의 시간을 거쳐야만 배움과 지식이 그 사람의 몫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성찰과 사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자에 앉아서 '나 이제부터 생각할꺼야?' 라고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이다. 예전부터 이 방법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이제는 그 방법을 조금은 찾은 듯 하다.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은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무언가가 실체적인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글로 변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이루어져야 하고, 조금 더 나은 글을 풀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게 되고,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과연 맞는지,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서 곱씹어 보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자연스럽게 성찰과 사색이 된다.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책과 글쓰기에 관련된 책은 항상 내용은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언제나 나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공감하는 부분을 잠시 소개한다.
첫째. 취행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이 세 가지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에는 철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화려한 문장을 쓴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가서야 훌륭한 글이다.
무엇보다 뜻이 두루뭉수리 불분명해서 아무 곳에나 넣어도 되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단어를 자꾸 쓰면 어휘 구사 능력이 퇴화한다. 생각을 감추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곧바도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어휘가 너무 적어서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탓이라면 단기 해결책이 없다. 근본 대책은 독서량을 늘리는 것 뿐이어서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글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실용적인 면에서든 윤리적인 면에서든, 읽는 사람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주는 글은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 수 없다. 타인에게 텍스트를 내놓을 때는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글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려면 지식과 전문성을 내보이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작가 유시민은 본인이 읽었던 교양서(학자들이 보통 사람을 위해 쓴 책) 중에서 '글쓰기를 위한 전략적 독서' 목록을 만들어서 소개하고 있다. 이 책들은 앞으로의 내가 읽을 책에도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책 목록을 보니 분명 소화해내기 쉬운 책이 아님은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읽는 힘이 아직은 부족하기에 올해에는 차근 차근 한 권씩 곱씹어 읽어가면서 어느 정도의 책력은 키워야겠다. 분명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독서,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가능하게 될 거라 확신한다.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로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승산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다락원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우물이있는집
◎ 스티븐 핑거 외, 존 브록만 엮음, <마음의 과학>, 와이즈베리
◎ 스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바오
◎ 신영복, <강의>, 돌베개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한국경제신문
◎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은 아름답다>, 문예출판사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흥신문화사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문학사상
◎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어크로스
◎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갈라파고스
◎ 존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흥신문화사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책세상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 이후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서해문집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은행나무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 글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람이 변하면 글이 변한다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면 속이 후련할 때가 있다. 이와 비슷하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글로 뱉어내면 마음이 편안해질 때도 있다. 어떤 글을 쓸 때 잘 써진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보통 내가 진심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쓸 때다.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 아니고, 직접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풀어낼 때는 글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도가 높아진다. 평소에 갑자기 욱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속상하게 할 때가 있는데, 이런 모습을 내가 알고 글로 몇 번을 적다 보니 점점 그런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현실적이지 않은 소망과 이상적인 것을 계속 글로 남기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글로 남긴 것이 내 생각으로 자리가 잡혀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글로 적어두었던 것 중에 많은 부분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그렇게 내가 쓴 글이 어느 순간 내 모습이 되어 버리고, 변화된 내 모습에서 새로운 글이 나온다. 그렇게 글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소개하며 나를 변화시키는 글쓰기를 마친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김형수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장강화, 이태준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의 <한겨레>에 연재하는 칼럼 '현대를 만든 물건들'
http://www.hani.co.kr/arti/SERIES/606/home01.html
유시민, <항소이유서>
논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다면 무엇보다 생각을 바르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먼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 기준을 바꾸고 감정에 휘둘려 논리의 일관성을 깨뜨리면 산문을 멋지게 쓸 수 없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을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이 세 가지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
우리는 언어로 소통하고 교감해서 자신과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말이든 글이든 원리는 같다. 언어로 감정을 건드리거나 이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 능력에 기대어 소통하려면 논리적으로 말하고 논리적으로 써야 한다. 그러려면 논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효과적으로 논증하면 생각이 달라도 소통할 수 있고 남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내 생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미적 취향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타인의 미적 취향을 '미친 짓'이라고 욕하거나 '비정상'이라고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미적 취향을 표현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단순한 취향 고백과 논증해야 할 주장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이것이 논증의 미학을 구현하는 첫 번째 규칙이다.
논리학이나 수학에는 공리라는 것이 있다. 증명하지 않고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명제가 공리다. 유클리드기하학의 평행선 공리가 널리 알려진 사례다. 글을 쓸 때는 사실을 수학의 공리처럼 대해야 한다.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은 반드시 그 타당성을 논증해야 한다.
개혁이 '고친다'는 뜻을 가진 중립적 단어라면, 개선을 고쳐서 더 좋게 만드는 것이고, 개악은 고쳐서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논증의 미학이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사실과 주장을 구별하고 논증 없는 주장을 배척해야 하며 논리의 오류를 명학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미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논증의 미학을 애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엄격한 논증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논증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논증의 미학을 실현하기 위해 지켜야 할 세 번째 규칙이다. 말과 글로 논증하고 토론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 규칙을 지키면서 글을 쓰는 것은 훨씬 어렵다. 이해는 생각만 해도 할 수 있지만 실천은 삶으로 몸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더 많다 .글쓰기도 그런 것이다.
시나 소설을 쓰고 싶은 독자라면 앞에서 소개한 김형수 시인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 같은 책을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살아 있는 고전으로 인정받는 이태준 선생의 <문장강화>도 나쁘지 않다.
글쓰기에는 철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스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든느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무슨 주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논리적, 실증적 근거를 신속하게 탐색하는 습관이 생겼다.
연구 논문, 보도자료 같은 글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을 정할 수 있다. 나는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쉽게 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의할 근거가 있는 글이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다음 네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제가 분명해야 한다.
둘째,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꼭 필요한 사실과 중요한 정보를 담아야 한다.
셋째, 그 사실과 정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넷째, 주제와 정보와 논리를 적절한 어휘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잘 알려져 있다. 첫째는 텍스트 독해, 둘째는 텍스트 요약, 셋째는 사유와 토론이다.
논리 글쓰기의 첫걸음은 텍스트 요약이다. 그런데 이 첫걸음을 똑바로 내딛으려면 텍스트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싶으면 먼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텍스트를 읽지 않고 독해력을 키우는 방법은 없다. 글스기의 첫번째 철칙은 바로 이 단순한 사실에서 나온다.
많이 읽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읽을수록 더 잘 쓸 수 있다.
텍스트를 독해하고 요약하는데 능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그러면 글을 잘 쓸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그래서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독서광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 쓰는 기술만 공부해서 잘 쓰는 사람도 물론 없다.
논리적 글쓰기의 두 번째 철칙이 나온다.
쓰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화려한 문장을 쓴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가서야 훌륭한 글이다.
글을 썼으면 남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혹평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혹평도 반갑게 듣고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해야 글이 는다. 남몰래 쓴 글을 혼자 끌어안고만 있으면 글이 늘 수 없다.
독해는 단순히 문자를 알고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다. 독해는 어떤 텍스트가 담고 있는 정보를 파악하고 논리를 이해하며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정보와 논리와 감정을 특정한 맥락에서 분석하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작업이다 .독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같은 시간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텍스트를 읽고 더 넓고 깊게 이해하며 때로는 남들과 다르게 텍스트를 해석한다. 독해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텍스트를 더 정확하게 더 개성 있게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독해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훌륭한 글은 뚜렷한 주제 의식, 의미 있는 정보, 명료한 논리, 적절한 어휘와 문장이라는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이 네가지 미덕을 갖추는 데 각각 서로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면 글쓰기는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다행히 그렇지가 않다. 이 네 가지는 따로따로 배우고 익히는 게 아니다. 넷 모두 한꺼번에 얻거나, 하나도 얻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인간의 모든 지적,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활동을 총괄하는 신체 기관은 뇌다. 3층 구조로 된 이 1.4킬로그램짜리 살덩어리는 수십억 년에 걸친 생물의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언어 구사를 포함한 정신적, 지적활동은 대뇌피질이 관장한다. 글쓰기가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뉴런)가 있다. 뇌신경 세포는 저마다 수십 개에서 수천 개의 돌기(시냅스)를 만들어 다른 신경세포와 전기적, 화학적 신호를 교환한다. 뇌는 여러 신체 기관이 전해준 정보를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분석 처리하며 각각의 신체 기관이 상황에 맞는 운동을 하도록 명령한다. 우리가 자아를 인식하고 의식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뇌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나 '지성''의식'은 물질이 아니라 뇌신경세포가 주고받는 전기적, 화학적 신호의 집합일 뿐이다. 언어 구사는 뇌가 수행하는 여러 기능 중 하나다. 대뇌피질은 영역마다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언어를 관장하는 영역도 물론 따로 있다. 이 영역은 뇌가 성장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는 영역과 함께 형성된다. 뇌는 태내에서느 만들어지기 시작해 태어난 후 3년 정도 폭발적으로 자라며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성장기의 뇌에서는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부위 사이에 더 많은 신경세포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래서 이 시기에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어떤 자극과 과제를 받느냐에 따라 뇌의 구조와 기능이 적지 않게 달라진다. 형성기의 뇌는 만지기에 따라 모양이 잘라지는 점토와 비슷한 것이다.
뇌는 유전자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다. 환경도 뇌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의 뇌는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뇌는 평생 두 요인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 발전, 퇴화한다. 사람의 언어 구사 능력도 유전자와 환경이 어울려 결정한다. 사람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하드웨어를 지니고 태어나며,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모국어라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한다. 부모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풍부한 언어적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아이의 뇌가 이 과제를 순조롭게 완수하도록 도울 수 있다.
사람의 뇌도 같은 원리에 따라 형성된다. 뇌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에 적절한 언어적 자극에 노출된 아이들은, 언어를 담당하는 뇌 역역에 충분히 많은 신경세포를 확보하고 원활한 교신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말 못하는 아기한테도 자주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아기는 부모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부모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 때 아기의 뇌에서는 행복한 비상사사태가 일어난다. 청각신경이 포착한 음성 정보를 해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 아기의 뇌는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에 더 많은 뉴런을 배치하고 교신을 더욱 강화한다. 따라서 반쪽짜리 말을 하는 아이라도 완전한 문장을 대화해야 한다. 따라서 반쪽짜리 말을 하는 아이라도 완전한 문장으로 대화해야 한다. '찌찌', '때때', '응가' 같은 반쪽짜리 말을 가르치고,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부모도 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아이의 뇌는 쉬운 숙제를 받은 학생처럼 느긋해진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배치하고 더 많은 시냅스를 만들어 더 효율적으로 교신하려는 노력을 덜하게 된다.
아이가 언어 능력을 온전하게 발전시키도록 하려면 부모가 우리말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부모가 우리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말 공부를 새로 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말을 바르고 예쁘게 쓴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부모가 완전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책을 친숙한 목소리로 읽어줄 때, 아이의 뇌는 그 음성 정보를 해독하기 위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모든 아이가 동화책 듣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은 확실하다.
말을 시작한 뒤에는 무엇이든 본인 의사를 말할 기회를 주었다
어린이 독서는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독서를 생활 습관으로 만들고 자신이 읽은 것을 활용해 무엇이든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된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독서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재미를 붙이기만 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나름의 독서 이력을 만들어간다. 만화, 판타지소설, 무협소설, 추리소설, 역사소설, 잡지, 그 무엇이든 괜찮다.
독해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려운 글은 밑줄을 긋고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가면서 읽어야 한다. 독서량이 늘어 아는 게 많아지고 생각이 깊어져야 텍스트를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비판적, 창의적으로 독해할 능력이 생긴다. 글을 잘 쓰려면 먼저 높은 수준의 독해 능력을 길러야 한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고르는 기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 사회, 문화, 역사, 생명, 자연, 우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지식을 담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글을 쓰는 데 꼭 필요한 지식과 어휘를 배울 수 있으며 독해력을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둘째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을 구사한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자기의 생각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장 구사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인이 쓴 것이든 외국 도서를 번역한 것이든 다르지 않다.
셋째는 지적 긴장과 흥미를 일으키는 책이다. 이런 책이라야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논리의 힘과 멋을 느낄 수 있다. 좋은 문장에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으면 지식과 어휘와 문장과 논리 구사 능력을 한꺼번에 얻게 된다.
이런 책은 친구로 만드는 게 좋다. 친구는 오랜 세월 좋은 일은 함께 즐기고 아픔은 서로 나누며 자주 어울려야 친구다운 친구다. 어떤 책과 친구가 되려면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시간이 들지만 손으로 베껴 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런 책 목록을 제안하기에 앞서 우선 세 권을 소개한다. <토지>와 <자유론> 그리고 <코스모스>다. 이 책들은 두세 번이 아니라 열 번 정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자유론>에서 밀은 단 하나의 질문을 다루었다. 어떤 경우에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가? <자유론>은 놀라운 책이다. 우선 내용이 놀라울 만큼 훌륭하다. 개인의 자유와 관련한 중대한 쟁점을 철학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해명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그 훌륭한 내용을 사회에 대한 기초 지식과 평범한 수준의 독해력만 있으면 누구나 어려움 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섰다는 것이다. 밀은 아무리 심오한 철학이라도 지극히 평범한 어휘와 읽기 쉬운 문장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칼 세이건 박사는 <코스모스>에 1980년대까지 인간과 생명, 지구와 우주에 대해서 인류가 알아낸 거의 모든 것을 압축해서 담았다. 나는 밤하늘의 별과 내 몸이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위로를 받았다.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삶이 덜 외롭고 덜 허무해 보였다. 우주의 질서와 운행 법칙을 예전보다 더 명료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의식과 지성을 가진 생명체로 세상에 온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깨달았다. 나는 이 책에 이끌려 예전에는 관심도 없고 어렵게만 느꼈던 생물학과 뇌과학, 물리학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전략적 독서 목록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 모든 집단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가? 구성원들이 개별적으로는 이타적인데도 집단으로 뭉치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권계급의 집단적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불의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정의를 함께 실현할 수 있을까?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로
화학살충제와 제초제로 '해충'과 '잡초'를 박멸할 수 있는가? 만약 성공해서 곤충과 잡초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좋은 일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가? 생태계의 다양성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해충과 잡초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우주와 생명은 누가 만들었나, 스스로 태어났나?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종교의 도움 없이도 삶에 필요한 도덕을 세울 수 있는가? 신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다윈의 진화론은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을 주장한다. 자연선택과 생존경쟁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가? 집단인가, 개체인가, 유전자인가? 인간을 유전자가 창조한 생존기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이론인가? 인간의 자유의지로 유전자의 독재에 저항할 수 있는가?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기계인 인간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승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는 무엇이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원자에서 거대한 은하에 이르기까지 물질세계의 모든 운동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은 있는가?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은 인간의 세계관과 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 마이클 샌텍,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정의는 무엇이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철학적, 도덕적 원리에 의지해야 하는가? 사유재산제도와 징병제, 누진소득세, 낙태와 성매매 금지 같은 국가의 법과 제도가 정의의 원칙을 어떻게 또는 얼마나 잘 실현하거나 침해하고 있는가? 상이한 철학적, 도덕적 원리가 대립, 경쟁하는 상황에서 최대한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다락원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우물이있는집
■ 스티븐 핑거 외, 존 브록만 엮음, <마음의 과학>, 와이즈베리
■ 스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바오
■ 신영복, <강의>, 돌베개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한국경제신문
■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은 아름답다>, 문예출판사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흥신문화사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문학사상
■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어크로스
■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갈라파고스
■ 존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흥신문화사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책세상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 이후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서해문집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은행나무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어떻게 하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로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못 쓴 긋이다. 못나고 흉한 글이다. 이런 글을 읽기 쉽고 듣기 좋고 뜻이 분명해지도록 고치면 좋은 글이 된다.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소리 내어 읽어봄으로써 못난 글을 알아보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한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언어는 말과 글이다. 생각과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이 된다. 말과 글 중에는 말이 먼저다. 말로 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을 쓸 때는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 쓴 글을 알아보지 못하면 자기가 잘못 쓴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잘못 쓴 문장을 알아보는 진단법은 이미 소개했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귀로 듣고 뜻을 새겨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한 방법을 외면한다. 좋은 글, 훌륭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면서도 잘못 쓴 글, 못난 문장과 결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글쓰기도 면역력이 있어야 잘할 수 있다. 우리는 못난 말과 글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산다. 책, 신문, 방송을 보면 병든 말과 글이 널려 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을수록 문장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반면 면역력이 센 사람은 글이 엉망인 책을 읽어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좋은 문장을 쓴다.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못난 글과 나쁜 문장에 대한 면역력이 저절로 생긴다. 하지만 '백신' 예방접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효과가 좋은 백신이 이미 수십 년 전 서점에 나왔다. 앞에서 말한 이오덕 선생의 책 <우리말 바로쓰기>다.
'으로의' '에로의' '에서의' '으로부터의' '에 있어서의' 와 같아 '의'를 겹쳐 쓴 토씨도 모두 우리말법에 어긋난다. 이것은 일본말 조사를 옮긴 것이다. 우리말은 그런 식으로 토씨를 쓰지 않는다. 일본말처럼 토씨를 쓰면 글이 늘어지고 운율이 죽으며 문장의 힘이 빠진다. 읽기도 나쁘고 듣기도 좋지 않다.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이 '나는 나의 집의 뒤의 나의 집의 밭의 나의 집의 복숭아를 따 먹었습니다'와 다르지 않은 문장을 쓴다. 못난 글에 대한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피동형 문장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말에는 피동문이 드물다. 반드시 피동문을 써야 정확하게 뜻을 전달 할 수 있을 때만 예외로 쓴다.
'보여지다' '되어지다''키워지다''다뤄지다''모여지다''두어지다''보아지다' 같은 것은 글뿐만 아니라 방송에도 출몰한다. 타동사를 피동형으로 쓰는 것만으로 모자라는지 자동사까지 억지로 피동형으로 만들어 쓴 문장은 우리말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단문을 써야 인물의 행위와 사건 전개 상황을 속도감 있게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만 그런 게 아니라 에세이를 쓸 때도 단문이 좋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무엇보다 뜻이 두루뭉수리 불분명해서 아무 곳에나 넣어도 되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단어를 자꾸 쓰면 어휘 구사 능력이 퇴화한다. 생각을 감추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곧바로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어휘가 너무 적어서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탓이라면 단기 해결책이 없다. 근본 대책은 독서량을 늘리는 것뿐이어서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아무리 어려운 텍스트라도 문맥을 파악하면 그런 대로 독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에게 신묘한 독해력을 요구하는 글은 잘 쓴 글이 아니다. 맥락을 잘 모른 채 텍스트를 읽어도 뜻을 아는 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써야 한다.
생각은 자유롭고 상념은 스쳐간다. 생각하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 버스 안에서든 샤워 꼭지 아래서든, 아니면 횡단보도 위에서든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아, 이건 중요한 생각이네. 꼭 기억해놔야겠다. 그런 생각도 적어두지 않으면 금방 사라진다. 이건 중요하니까 잊지 말아야지! 그렇게 결심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도 정작 그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생각과 느낌은 붙잡아 두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우리 뇌는 엄청난 용량을 지녔지만 모든 정보를 다 저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자투리 시간 글쓰기의 주제와 내용은 정하기 나름이다. 출근길 버스나 지하철 풍경을 그려도 좋고 단골 카페 인테리어를 묘사해도 괜찮다. 거리에서 진한 스킨십을 하는 젊은 연인을 부러워해도 된다. '키도 큰' 친구에 대한 시기심을 토로해도 무방하다. 트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이론에 관한 생각, 70미터 굴뚝 위에서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 드라마 <미생> 시청 소감을 적어도 된다. 어제 읽은 책 독후감도 나쁘지 않다. 뭐가 되었든 많이 쓰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방법도 있다. 창조의 시작은 모방이다. 인간의 표현 행위는 자연을 모사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고구려 고분벽화 모두 자연과 인간의 겉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사람의 몸을 비틀고 찢고 조합한 <게르니카>로 유명한 화가 피카소가 세 살 때 처음 그린 것은 비둘기 발이었다. 그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연필로 그린 말은 금방 종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실감이 난다.
긴 글보다는 짧은 글쓰기가 어렵다. 짧은 글을 쓰려면 정보와 논리를 압축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압축 기술은 두 가지다.
첫째, 문장을 되도록 짧고 간단하게 쓴다.
둘째, 군더더기를 없앤다.
문장을 짧게 쓰려면 복문을 피하고 단문을 써야 한다. 여기서 복문은 주술 관계가 둘 이상 있는 모든 형태의 문장이다. 복수의 문장을 대등하게 연결하는 '중문',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의 성분이 되는 '좁은 의미의 복문', 중문과 복문을 모두 가진 '혼성문'을 한데 묶어 복문이라고 하자. 글을 압축하려면 단문을 기본으로 하고 특별한 경우에 복문을 쓴다느 ㄴ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뜻과 느낌을 강하고 확실하게 깊게 전하려면 복문을 써야 한다는 판단이 들 때만 복문을 쓰는 것이다. 간단한 원칙이지만 해보면 금방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다. 문장의 군더더기란 무엇이며 군더더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없애버려도 뜻을 전하는 데 큰 지장이 없으면 군더더기다. 문장의 군더더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접속사(문장부사), 둘째는 형용사와 부사, 셋째는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형용사나 부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문장 요소다.
굳이 없어도 좋은 접속사는 과감하게 삭제해야 한다. 단문으로 글을 이어나갈 때 문장 사이에 매번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그런데' '그렇지만' 같은 접속사를 넣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문장은 뜻을 담고 있다. 그 뜻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접속사가 없어도 된다. 단문을 기본으로 쓰고 불필요한 접속사를 생략하기만 해도 글을 조금은 압축할 수 있다.
다른 정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쓰려면 철저하게 독자를 존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문용어나 이론을 끌어올 때는 문맥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도록 적당한 방법으로 설명을 붙여야 한다.
글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실용적인 면에서든 윤리적인 면에서든, 읽는 사람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주는 글은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 수 없다. 타인에게 텍스트를 내놓을 때는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글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려면 지식과 전문성을 내보이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형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멋진 문장을 구사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다.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써야 잘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표현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을 내면에 쌓아야 하고, 그것을 실감 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문장을 멋지게 쓰면 '글재주'를 인정받을 수 있다. '글재주' 가 있으면 '써야 해서 쓰는 글'을 어느 정도 잘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글재주'만으로 공감을 일으키거나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