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3년 전에 한 번 읽어본 책입니다. 소설은 한 번 읽고 잘 보지 않는 편이지만, 그녀의 언니 '샬롯 브론테' 덕분에 다시 한 번 『폭풍의 언덕』을 잡게 되었네요. 지난 여름에는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매력적인 인물인 제인 에어의 삶 속을 함께 거닐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고 자신의 진정한 내면에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사랑과 삶을 선택해나가는 모습에 빠져 있었지요. 당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의 삶을 알고 나면 『제인 에어』의 진가를 다시 한 번 알게 됩니다. 보통 한 작품을 읽으면 그 작가의 다른 책으로 뻗어 나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렇다면 그녀의 동생은 어떤 작품을 썼을까가 궁금했습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살려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폭풍의 언덕』으로 들어갔지요.
『폭풍의 언덕』은 액자구조 입니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는 것이지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히스클리프에게 세를 얻어서 드러시크로스에 사는 '록우드' 라는 인물이 '넬리 딘' 이라는 하인에게 이야기를 듣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라는 두 공간적 배경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복수라는 진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 등장인물 관계도
언쇼 어른은 어느 날 리버풀에 다녀오면서 부모없이 떠돌던 한 남자 아이를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예전에 죽은 아들의 이름인 '히스클리프'라고 지어줍니다. 언쇼의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하게 됩니다. 반면에 딸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언쇼가 죽으면서 상황에 변하기 시작합니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학대하고 집안의 하인 취급을 합니다. 그리고 캐서린은 린튼 집안의 에드거와 결혼하게 되죠. 그리고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를 떠납니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것이 변한 히스클리프가 나타납니다. 복수가 시작되는 것이죠.
■ 이야기 속의 시대는?
『폭풍의 언덕』을 지금의 시각으로 읽다 보면, 이해가 잘 안되거나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47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소설 속에서 상당히 불편했던 점은 이사벨라가 히스클리프의 아내가 된 후 워더링하이츠에 데리고 왔을 때의 모습, 이사벨라가 죽은 후 린튼이 아버지 히스클리프에게로 가는 순간, 캐서린(에드거의 딸)이 린튼과 결혼하자 히스클리프가 며느리를 데려가야 한다고 하는 장면입니다. 아내, 자식, 며느리가 되는 순간에 철저하게 위계가 생기며 모든 것이 남자의 권한으로 넘어옵니다. 그래서 그 사회적 틀에 의해서 히스클리프에게 억압되는 인물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를 보게 되면 결국 언쇼 집안과 린튼 집안의 재산을 모두 그가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 '상속'이라는 방법을 택합니다. 즉 자신의 아들인 린튼을 캐서린(에드거의 딸)과 결혼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드거가 사망했을 때 재산은 캐서린의 것이 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캐서린의 남편인 린튼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도 지금과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인물 관계도를 보면 캐서린(에드거의 딸)은 린튼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린튼, 히스클리프가 죽은 후에는 아마도 헤어튼과 결혼을 하게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를 보면 린튼은 캐서린의 이종사촌이고 헤어튼은 고종사촌입니다. 이건 뭐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는 왕족과 귀족들은 혈통을 유지한다는 명목과 상속과 같은 금전적 요소들 때문에 근친혼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가에서는 합스부르크 립(주걱턱이라 불리는 하악전돌증)과 같은 유전병도 등장을 한 것입니다.
■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복수와 아동 학대
▲ 윌리엄 와일러 『폭풍의 언덕』, 1939
어쩌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과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비극의 씨앗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히스클리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싸이코패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집요합니다. 그가 원한을 품었던 이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까지 복수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자신의 아들까지 이용을 합니다. 이런 부분은 읽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힌들리가 죽은 후, 히스클리프는 여러 수단을 통해서 워더링하이츠를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을 철저하게 세뇌교육을 시킵니다. 헤어튼은 분명 여러 재능이 있지만, 육체적인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죠. 소설 속 이야기지만 가장 화났던 부분은 비록 사랑하지 않은 여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지만 자신의 아이를 철저하게 자신의 계획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린튼은 자신의 아버지의 행동, 목소리 하나하나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속의 악함을 드러내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히스클리프의 아들이긴 하구나 하면서 동정심이 확 떨어지기는 합니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에드거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기 위해 가둬두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캐서린이 소리지르고 화를 내자, 히스클리프는 그의 본성을 드러내며 캐서린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가 가장 속으로 화가 많이 났던 거 같습니다.
아마 히스클리프가 캐서린과의 사랑을 이루었다면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제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그가 있어서 『폭풍의 언덕』 이라는 소설 속으로는 깊이 빠져들었지만, 현실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폭풍의 언덕』
이 작품은 『모비딕』,『리어왕』 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싯 몸은 세계 10대 소설의 반열로 이 작품을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감은 팽팽하게 유지됩니다. 가계도를 그리면서 까지 읽을 정도로 서로 간의 관계를 파악하고 갈등을 읽어내려고 했습니다. 히스클리프의 악마적인 모습에 치를 떨면서 읽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 하지만, 그것이 다른 계기가 아니라 히스클리프의 죽음이 원인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남기는 합니다. 해피엔딩을 꿈꾸는 독자의 일 인이거든요.
▲ 1834년 브론테 자매의 남동생 브란웰이 그린 초상 (왼쪽부터 앤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샬롯 브론테, 가운데는 브란웰인데 그가 지운 것으로 보임)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 도 상당히 인상적이며 안타까운 인물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녀가 세 살때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는 언니들과 함께 비용이 싼 기숙학교에서 생활을 했는데 두 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 후 아버지는 살롯과 에밀리를 데리고 오지요. 1942년에는 언니 샬롯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어학을 배우고 같은 해 돌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샬롯, 에밀리, 앤을 우리는 브론테 자매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례적으로 자매들 모두 문학적 성과를 얻어서 후대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하지만 에밀리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을 발표한 다음 해인 1848년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시달리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정리하게 됩니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동생인 앤 역시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의 언니인 샬롯 브론테도 1855년에 서른 아홉살의 나이에 임신한 상태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그녀들은 모두 후대에 기억되는 훌륭한 작품을 남기지만, 정작 그 삶은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납니다.
폴 칼라니티 라는 '유능한 의사'가 있습니다.그는 이제 곧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신경외과 의사로서 발돋움하는 일만 남았을 뿐입니다.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언제나 다른 이들의 죽음을 지켜 보고,떠나는 이들의 마지막을 책임져 주던 그 였는데,이제는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는 천천히 죽음과의 만남을 준비합니다.같은 의사였던 아내와 함께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도 신중한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2세를 갖기로 하고 딸 아이를 출산합니다.그는 투병 중에서도 몸이 허락할 때 까지 신경외과 의사로서 수술에 참여하고,레지던트 생활을 마칩니다.더 이상 의사로서의 역할이 힘들어지게 되었을 때는 평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그가 남긴 글과 아내가 덧붙인 글이 모아져서 한 권의 책으로 남았습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폴 칼라니티의 유일한 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서른 여섯 살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삶을 정리하며 적어낸 글,그는 과연 어떤 이유로 삶의 마지막 기록을 책으로 남기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짧은 생각일 수 있겠지만,어쩌면 그가 떠난 뒤 남게 되는 아내와 딸을 위해서 적어둔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르겠네요.
▲ 폴 칼라니티와 그의 아내, 그리고 딸
삶과 죽음은 그 자체가 부조리합니다. 카뮈는 어린 아이들의 죽음,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처럼 부조리한 게 없다고도 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하지 못하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예상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찾아옵니다.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것이 공평하다고 하지요.
저는 ‘만약~라면?’ 이라는 질문을 저에게 대입하는 것을 망설이는 편입니다. 입으로 꺼내는 순간, 글로 적어버리는 순간 무언가 제 삶에 영향을 미쳐버릴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의미일 경우에는 잘 담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만약 제 남은 삶이 1년 이라면?’ 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제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람을 향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내 가족들이 나의 부재로 인해 겪게 될 여러 아픔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 명확해지는 거 같습니다. 가족들이 겪게 될 아픔을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고, 그들이 살아가면서 힘이 될 수 있는 기억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 마지막 남은 삶을 위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 번쯤 제 인생을 처음부터 곱씹어 볼 거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로 인해 누군가 큰 상처와 아픔을 겪지 않았는지, 정말 기뻤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깊은 슬픔에 눈물을 흘렸던 적은 없었는지 하나씩 하나씩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서 한 번 더 되새기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위화의 <제7일> 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죽음’ 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겪어야 할 경험이지만, 우리 주위에서 그 경험에 대해서 말해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의문점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간직해 둡니다.
▲ 해골과 꽃다발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 (1599~1652) 作
대신에 대단히 실용적인 호모사피언스들은 죽음을 통해서 삶을 돌아봅니다. 서양화를 보다 보면 해골이 등장하는 그림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보다는 죽음을 통해서 삶을 바라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철학자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다가오는 운명의 필연성에 긍정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만약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야지 다음 삶에도 이 순간이 반복 될 테니까요. 죽음은 부조리하기에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은 어쩌면 지금 현재에 충실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책을 한 번 읽으면서 ‘만약 내 삶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가족의 소중함과 현재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카뮈가 말하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삶의 반복' 에 대처하는 나름의 처방을 가지고 있다.
만약,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본래 외롭다고 하지만,
무언가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군가로 하여금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들마다 받아들여지는 삶의 무게는 다르기에,
아쉽게도 그 방법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술에 빠져 들기도 하고,
누적되는 삶의 피로에 허우적되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그 방법을 한 가지는 찾은 것 같다.
'사람들의 삶을 엿보기',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할 수 있는 재미'
'한참 동안 마음 졸이다, 긴 한 숨을 내 쉴 수 있는 감정의 경험'
'혼자 한 없이 외로워져서 눈물을 흘리다 조그만 위로에 위로 받을 수 있는 약한 감정'
나에게 이런 삶의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는 것은 '소설', 바로 '이야기' 다.
소설을 너무 좋아한다고 하지만,
항상 아쉬움이 있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분명히 수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작품 속에 등장시킬 인물들에게 각자 어울리는 성격을 만들어주고,
독자들이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있도록
긴장의 끈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숨은 요소들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런 작가들이 숨겨놓은 것들을 찾아보고 싶었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의 재미 뿐만 아니라,
그렇게 숨겨진 보물을 하나씩 찾아내듯 '소설' 을 읽을 수 있다면,
작은 방에서 '책 한 권' 읽는 재미로 남 부럽지 않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 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2980.01.05 움베르트 에코
'소설' 에 대해서 그 기법과 형식들을 한 번 쯤 알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이론을 설명하는 책이라면,
쉽게 몰입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그러던 중에 '정여울' 작가의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최근에 『공부할 권리』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글을 이끌어 가는 감성에 매료되어서,
이 분의 책이라면 기꺼이 선택해도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제목이 '문학멘토링'이다. 딱딱하지 않다.
작가는 '문학'을 정말 좋아하고, 자기가 발견한 것들을
후배들에게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듯 하다.
문학의 미로를 헤치는 18개의 열쇠를 준비하고,
하나씩 독자들에게 설명해준다.
말하는 이도 즐겁고, 듣는 이도 즐거운 대화같이 들린다.
각각의 열쇠에 해당하는 소설의 한 부분을 소개시켜준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소설의 경우는 궁금해져서
별도의 목록으로 정리를 하기도 하고,
읽어 본 책의 구절이면, 입가에 미소가 생기면서 반가움이 앞선다.
정여울 작가가 소개해주는 문학의 미로를 헤치는 18개의 열쇠는
지금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열쇠이기에 잘 보관해 둔다.
01. 패러디 - 고전은 왜 끊임없이 패러디되는가?
02. 시점 - 여섯 살 옥희의 눈에 비친 세상
03. 의인화 - 인간의 탈을 쓴 동물
04. 은유 - 하늘의 별이 튀밥 같다고?
05. 상징 - 그들은 왜 걸핏하면 방앗간을 찾을까?
06. 아이러니 - 어쩐지 너무 운수가 좋다 했더니
07. 알레고리 - 소인국은 그저 소인국이 아니다
08. 트릭스터 - 방자, 골룸, 동키, 큐피드의 공통점은?
09. 안타고니스트 - 저 녀석만 없으면 주인공이 행복할 텐데
10. 시간 - 또 기억 상실증
11. 공간 - 그곳이 평사리여야만 하는 이유
12. 음식 - 어떻게 먹을 것인가, 누구에게 먹일 것인가?
13. 판타지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거꾸로 흐른 까닭은?
14. 트라우마 - 견딜 수 없는 슬픔의 역할
15. 통과의례 - 영웅은 왜 과도한 시련을 겪는가?
16. 정체성 - 위대한 '가출'의 주인공들
17. 대재앙 - 세상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18. 사랑 - 사랑의 혁명적 힘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라는 작품이다.
아직 초반부를 읽고 있는데,
이번에는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조금씩 주변을 둘러볼 예정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을 보고 있어서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지금은 제인 에어가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부터,
외숙모와 외사촌들에게 심한 구박을 받는 것 부터 나온다.
과연 제인 에어는 이런 통과의례를 잘 겪어낼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제인 에어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보는 이야기를,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시선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새롭다. 신선하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진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문학을 조금 더 파고 들어야 겠다.
갑자기 서재에 꽂혀 있는,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라는 책이 생각난다.
소설을 쓰는 법에 대해서 나온 책인데,
이 책을 만날 시기를 만났다.
앞에 몇 페이지만 들춰보고 고이 꽂혀있는 책인데
이제는 내가 조금 더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길 바란다.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처럼
사람들 가슴을 딷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함민복, 『긍정적인 밥』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좋아져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정보와 서비스를 먹고는 못산다
이 몸의 진리를 건너뛰면 끝장이다
첨단 정보와 지식과 컴퓨터가
이 시대를 이끌어간다 해도
누군가는 비바람치고 불볕 쬐는 논밭을 기며
하루 세 끼 밥을 길러 식탁에 올려야 한다
누군가는 지하 막장과 매캐한 공장에서
쇠를 캐고 달구고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선가 나 대신 누군가가
더럽고 위험한 일을 몸으로 때워야만 한다
정보다 문화다 서비스다 하면서 너나없이
논밭에서 공장에서 손털고 일어서는
바로 그때가 인류 파멸의 시간이다
앞서간다고 착각하지 마라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다!
- 박노해, 『몸의 진리』
영웅의 영웅다움은 재능이나 신묘한 능력으로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참여하는 '공감'의 능력에서 나온다. 타인의 고통이 인간에게 어떻게 새로운 삶의 '영감'을 주게 될까?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질문한다. "나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내가 상관할 것도 아닌 고통이 마치 나 자신의 것인 양 내게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며, 나로 하여금 행동에 몰입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타인의 고통이 내게 말을 거는 순간, 그 순간이 우리가 운명의 갈림길에 서는 순간이다. 타인의 슬픔에 함께 엉엉 우는 '마음'만으로는 그를 구할 수 없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익사 위기에서 구하려고 할 경우, 자칫하면 그 사람이 여러분을 무작정 잡아당겨 같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것처럼 생각하는 상태를 넘어, 내가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실질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p218)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에서
수천 권의 책을 읽어도, 아무리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도, 진정한 교양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교양의 뉘앙스에는 '꼭 알아두어야 할 것' 이라는 의무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내 안의 진정한 교양이 깨어나는 순간, 그 순간은 '알아 두면 좋은 것'이라는 실용성, 남들에게 무지가 탄로날까 봐 두려워하는 '불안' 때문이 아니라, 정말 '내 삶에 필요한 공부는 무엇인가', '내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산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이다. 교양이 깨어나는 순간은 바로 내 꿈이 정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p224)
사랑은 해일처럼 덮쳐 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돈키호테는 말한다.
"사랑은 맞붙어 싸워 이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줄행랑 칠 수 밖에 없다."
사랑 때문에 아무리 괴롭더라도, 인간은 사랑을 멈출 수가 없다. 사랑하며 아픈 것이 사랑하지 않은 채로 아프지 않은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리하여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말한다.
"사랑을 고치는 약은 없다. 만약 있다면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학교이기도 하다. 사랑을ㅇ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자기 자신을 탐구한다. 그리하여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한다.
"우주를 단 하나의 사람으로 줄이고 그 살마을 신에 이르게까지 확대하는 것, 그것이 곧 연애이다."
"책을 한 권 출간 하고 싶습니다." 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저 입니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책의 맛을 알았습니다. 뒤늦은 감이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하면서 책들을 꾸역꾸역 읽기도 했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어려서부터 문학소년, 문학소녀로 초등학교, 중학교 부터 많은 책들을 읽어서 그들의 삶과 글의 근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나도 조금만 더 일찍 책에 빠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만약 이라는 것이 없지만 '대학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때부터라도 책을 읽고, 차근 차근 기록을 남겼으면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작가' 라는 단어는 저한테는 조금 크게 다가옵니다. 때로는 '작가' 라는 권위를 스스로 만들어서 제가 그들의 작품에 맹목적으로 빠져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비판적으로 읽어야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도 제가 만든 그들의 권위에 스스로 무릎을 꿇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에 대한 동경은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럴 때 위안이 되는 책들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바로 저와 같은 직장인들이 출간한 책들입니다. 전업작가가 아닌, 그들의 밥벌이는 따로 있는 사람들, 저와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책을 출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책의 내용과 함께 그 책들만의 독특한 개성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기 바쁩니다. 그리고 나도 마흔 살이 될 때는 한 권의 책을 출간해야지 하는 다짐을 다시 해보기도 합니다.
성수선 작가의 『밑줄 긋는 여자』에서 제가 하고 싶은 글쓰기의 한 단면을 보았습니다. CJ, LG, 삼성정밀화학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하면서 경험했던 에피소드들과 그녀가 읽은 책의 한 단락을 끈으로 이어주면서 자연스러운 독서에세이가 펼쳐집니다. 이 책의 매력은 성수선 작가가 해외영업을 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과 그녀가 직장생활 하면서 느꼈던 부분을 적절하게 잡아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색하지 않게 책의 메세지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녀의 필력이 느껴집니다.
'나는 일상생활에 특별한 게 없어서 글을 쓸 내용이 별로 없어!'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에세이들을 보면 그들의 삶은 무언가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거 같아서 내심 질투와 시샘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수선 작가는 일상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자기만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제 메모장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내 생활의 에피소드를 적어보았습니다.
'오늘은 가장 더운날, 그런데 에어컨 고장, 그리고 누진세는?' , '텃밭에 키우던 토마토 농사 접은 날' , '아이들과 함께 한 서해 갯벌 체험', '짭짤이 토마토와 어상천 수박과 같은 과일들' 이라는 단어들을 적어 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경험과 다른 분야를 자연스럽게 이어서 '생활의 쫄깃쫄깃함'을 적어 볼까 합니다.
생활의 쫄깃쫄깃함이 바쁘게 서두르는 출근길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제 씻고 출근해야 겠네요.
『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1999
『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쓰, 2006
『장미도둑』, 아사다 지로, 2002
『안토니 가우디』, 손세관, 2004
『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1996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럼』, 박민규, 2003
『괜찮다. 다 괜찮다.』 공지영, 지승호, 2008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2008
『군주론』, 마키아 벨리, 까치출판사, 2003
『나의 이력서』, 피터드러커, 2006
『딜리셔스 샌드위치』, 유병률, 2008
『남한산성』, 김훈, 2007
『달인』, 조지 레오나르드, 2007
『감독, 열정을 말하다』 지승호, 2006
『2008 글로벌 금융위기』, 최혁 2009
『엘레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1999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 센트 반 고흐, 2005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이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2003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 이유명호, 2004
『불안』, 알랭 드 보통, 2005 『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 에너 퀸들런, 2001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로 작가 은희경을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가던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 접하고 나니, 벗어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녀가 점점 궁금해졌습니다.
토요일 오후, 회사를 마치고 집 앞 도서관에 갔습니다. 가끔씩 어떤 책을 읽을지 정하지 않고, 도서관을 둘러보는데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역사' 쪽에서 책을 몇 권 선택하고, '영미문학' 쪽에서 책 한 권, 그리고 한국문학 쪽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은희경' 이라는 이름 석 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현대소설 시리즈에 있는 그녀의 작품 『빈처』 였습니다.
영어 제목은 『Poor Man's wife』 네요. 의자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응시하는 작가의 표정이 상당히 인상적인 표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책을 쇼파에 누워서 읽고 있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컴퓨터에서 만화를 보고 있고, 막내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내는 주방에서 삼계탕을 끓인 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책을 조금씩 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내 생각이 번뜩했고, 누워서 읽던 몸을 다시 바로 세웠습니다. 어쩌면 대단히 일상적인 부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부분을 건드려서 그런지 몰라도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소설은 어느 날 내가 아내의 일기장을 보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6월 17일
나는 독신이다. 직장에 다니는데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 시 정도까지 근무한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이다.
이 시간에 난 읽고 쓰고 음악 듣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외출은 안 되지만.
나는 생각한다. 아니 두 아이의 엄마이고, 남편도 있는 사람이 독신이라니? 하지만 아내의 일기를 읽다 보면 알게 됩니다. 아내는 독신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회사 영업부에서 일하는 남편은 매일 저녁 술에 취해 들어오고, 집안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아내는 그런 자신을 독신으로 표현한 것이죠.
9월 16일
나는 왜 이렇게 쉬운 여자인가.
새벽에 파고 드는 그이를 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면서 사는 게 다 안쓰럽기만 하였다. 아침에 그이는 다정하다. 일찍 들어올게, 하더니 정말로 일찍 들어왔다. 나는 그만 감격해서, 저는 당신이 얼마든지 주무르고 어를 수 있는 여자여요, 하듯이 다소곳해져 갖고 그이를 맞았다. 그런데 그이는 다시 나간다. 나는 왜 이렇게 쉬운 여자인가. 그이에게 나는 왜 이렇게 하찮은가. 열한 시가 넘도록 들어오지 않는데 오늘만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화가 난다기보다 모욕감 같은 것이 들었다. 그렇다, 이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먼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랜 만에 집에 빨리 들어온 소설 속의 나는 친구의 전화에 또 다시 술집으로 나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빨리 들어왔다고 조금은 들떠 있습니다. 무엇을 해줄까 하는 생각뿐이죠. 그런데 남편은 다시 집을 나섭니다.
이런 아내는 남편을 보면 평소에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내는 아이를 낳기 이전의 모습은 많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이의 칭얼거리는 울음소리에는 몸이 움직입니다. 힘이 들어도 자기 몸 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합니다.
아내는 그렇게 그녀의 담담한 삶의 일기를 적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의 일기를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내가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런 아내의 잠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죠. 많이 변한 아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소설의 마지막입니다.
나는 손에 펴 들고 있던 그녀의 일기장을 가만히 덮어준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작품 속에는 나와 아내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남편과 아내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허구의 문학인 소설이지만, 허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저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거 같기 때문입니다.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제 생각, 이런 행복을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지만 그 속에서 다른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하는 모습이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평범' 이라는 단어로 말하지만, 그 평범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도 모든 걸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아내의 마음과 생각을 조금 더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조금 더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많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존중하고, 그 다름을 조금 더 관심있게 바라봐야 겠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니까요.
소설을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국내소설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국내 작가들의 책을 찾아 읽어가면서 좋아하는 작가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정유정, 김훈, 조정래, 황석영, 한강,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박범신, 김훈, 최인호, 김연수, 공지영 작가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작품을 만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인연이 안 닿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안타까웠던 인연 중에 한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은희경' 작가입니다. 워낙 유명한 분이지만 처음으로 작품을 만나게 되었네요.
은희경 작가는 얼마 전에 『중국식 룰렛』라는 소설집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만난 작품은 2006년 출간된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라는 작품입니다. 총 7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시나 하루에 한 작품씩 읽었습니다. 단편 소설의 매력에 다시 한 번 빠지게 되었지요.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작품에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 거 같습니다. 하나는 여자들을 소재로 하고 여자들의 심리를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다양하게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은희경 작가의 표현력입니다. 처음 접하는 그녀의 글에 포스트잇으로 좋은 문구에 붙이기 바빴습니다.
오늘은 소설 속의 내용은 접어둘 생각입니다. 그것보다 '여자' 라는 단어에 대해서 남자의 입장에서 조금 생각해 봅니다.
제 주변의 여자들을 생각해봅니다. 그 중 가장 가까운 두 명은 당연히 엄마와 아내입니다. 과연 내가 그녀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들었습니다.
엄마는 그저 '엄마' 였습니다. 여자로서의 엄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생각을 해 본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라는 호칭을 얻기 전 부터 엄마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고, 사랑을 꿈꿨던 여자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이구요.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알게 됩니다. 엄마가 '엄마'라는 호칭을 얻으면서 '여자'로서 많은 것을 희생했겠구나! 가슴 속에 여전히 묵혀있는 아쉬움이 많겠구나!
오랫동안 만나오고 함께 살고 있는 아내를 과연 저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남자와 여자는 너무나 다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속담의 '사람' 이라는 단어는 아마 여자를 가리킬 것이라 추측해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 만의 생각과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에 보면 남편과 있을 때는 행복해보이지만 실제 아내의 마음은 텅 비어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걸 모릅니다. 소설 속 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남자 분들은 여자의 마음을 배울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이 책에서 좋았던 점은 작가의 표현력이었습니다. 서사의 관점으로 소설을 읽는 편인데 은희경 작가의 소설 속에서는 중간 중간 눈에 드는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가족이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아프게 깨물면 아프게 물린다. 그렇다고 가볍게 물었다가는 자칫 서로를 놓칠 수도 있다. 너무 세게 물면 - 끊겨버릴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이 다 그렇듯이. -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中, p34>
골목에서 한 떼의 술꾼들이 삶은 밤에서 나오는 밤벌레처럼 비틀거리며 기어나왔다. - <여름은 길지 않았다 中 , p241>
여대 앞 골목에서는 누군가 마대에서 담아와서 쏟아놓은 것처럼 발랄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다. - <인 마이 라이프 中, p251>
그때 그녀가 젓고 있던 커피가 작은 물살을 이룰 만큼 동요를 일으키며 좀 거칠다 싶게 문이 열렸다.
- <인 마이 라이프 中, p256>
이런 문장들을 만나면서, 혼자 상상을 합니다. 정말 삶은 밤의 밤벌레가 생각납니다. 그 벌레가 술 취한 사람이라 생각해 봅니다. 재미있습니다. 상상 속에서 마대 자루를 쏟아냅니다. 발랄한 젊은 이들이 서로 웃으면서 쏟아져 나오네요. 이래서 작가는 작가구나!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오랜만에 저에게는 새로운 작가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작품 중에 좋은 작품이 워낙 많으니, 당분간은 소설읽는 재미가 생겨나겠네요.
다음은 그녀의 대표작인 『새의 선물』 로 은희경 작가를 만나 볼 생각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와는 또 어떻게 다른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p34
가족이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아프게 깨물면 아프게 물린다. 그렇다고 가볍게 물었다가는 자칫 서로를 놓칠 수도 있다. 너무 세게 물면 - 끊겨버릴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이 다 그렇듯이. -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中>
p45
그녀가 더브(dove)콤플렉스에 대해 말해주었다. 비둘기 암컷은 수컷한테 그렇게 헌신적이래. 그런데 일찍 죽는단다. 자기도 사랑받고 싶었는데 주기만 하니까 허기 때문에 속병이 든 거지. 사람도 그래. 내가 주는 만큼 사실은 받고 싶은 거야. 그러니 한쪽에서 계속 받기만 하는 건 상대를 죽이는 짓이야. 인연을 맺는다는 건 참 끔찍하지 않니? -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中>
p52
요새는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이 종종 생각나. 인공 때도 숨는 장소를 어머니한테 말하고 간 사람은 살았는데 마누라한테 알려주고 간 사람은 다 죽었다고 했거든. 우리 아버지가 여름에 찬 돌을 잘못 베고 낮잠을 주무시다가 입이 돌아간 적 있었대. 근데 참기는 참아도 정말 꼴보기 싫더란다. 눈도 돌리기 싫더라지. 앞으로 같이 못 살 것만 같아서 도망이라도 쳐야지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말야, 침을 맞고 감쪽같이 나으니까 도로 정이 솟더라지 않냐. -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中>
p105
아무튼 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살아 있는 편이 천배는 더 좋겠지만 죽어버렸으니 어떡해. 그냥 죽은 너를 사랑할 수 밖에, 네가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리도도 없잖아. 이미 생겨난 것인데 그 사랑이 어디로 사라지겠어. 어릴 때 난로 위의 주전자를 한나절씩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는 말을 너한테 했던가? 기운차게 치솟던 하얀 김이 점점 흩어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서운했어. 어디로 간 걸까? 그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여전히 공기 중에 다른 형태로 떠 있다는 사실을 자연시간에 배우고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지. 죽음이란 삶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바뀐 것일 뿐 사라진 것은 아니야. 죽은 너를 사랑하는 일이 조금 외롭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두렵지 않아. 두려운 건 너를 잊는 일이야. 너를 잊게 되면 사랑을 잃는 거니까. 한 사람의 생에서 사랑이란 단 한 번뿐인 거잖아. -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中 >
p241
골목에서 한 떼의 술꾼들이 삶은 밤에서 나오는 밤벌레처럼 비틀거리며 기어나왔다.
- <여름은 길지 않았다 中 >
p244
나무가 갑자기 흔들리면 아는 사람이 먼 곳에서 방금 죽은 거란다. 작별인사를 한 뒤에 떠나려고 혼령이 잠깐 가지에 앉았다 가는 거지. - <여름은 길지 않았다 中 >
p251
여대 앞 골목에서는 누군가 마대에서 담아와서 쏟아놓은 것처럼 발랄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다.
- <인 마이 라이프 中>
p256
그때 그녀가 젓고 있던 커피가 작은 물살을 이룰 만큼 동요를 일으키며 좀 거칠다 싶게 문이 열렸다.
- <인 마이 라이프 中>
p264
남편이 갖고 있는 커다란 종이상자 속에 구색으로 갖춰진 작고 예쁜 조개껍질 같았다. 조개껍질을 열어보면 그녀라는 존재는 텅비어 있을지도 모른다.
- <인 마이 라이프 中>
p267
"나는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고 공부도 중간 정도였어요. 생긴 것도 그저 그렇고, 뭐든지 그저 그렇게 살아왔죠. 불만은 없었어요. 뭐가 되고 싶다든지 뭘 갖고 싶다든지 그런 생각 없이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거죠. 그런데 그 사람을 알게 되면서부터 깨달았어요. 나에게는 꿈이 없다는 것을, 이루어지고 아니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워요. 꿈이 있는 사람은 뭐랄까. 살아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뭔지 몰라도 그 사람이 꼭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한 동안 소설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고픕니다. 이게 비소설을 읽다가 소설로 돌아오는 저의 주기입니다. 이야기가 고플 때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소설, 무엇을 읽을 지 망설일 때 찾게 되는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한 번 뒤적여 봅니다. 역시 예전에 사놓고 읽지 않은 게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제 주린 감성을 채워준 책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였습니다. 예전에 사 놓고는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책이었는데, 시기가 잘 맞았나 봅니다. 이번에는 다르네요.
알베르 카뮈(1913 ~ 1960)의 책은 『이방인』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납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로 시작하는 『이방인』은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코트의 깃을 세우고 짧게 문 담배와 무언가를 살짝 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잡힌 두 줄의 이마 주름의 사진을 보면 이 작가에게 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소설도 궁금하지만, 이름부터 작가스러운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집니다.
카뮈의 『페스트』는 그의 나이 35살(1947년 作)에 지은 작품입니다. 지금의 제 나이입니다. 그래서 작년에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것이 잡혔나보네요 라고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 봅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어느 한 마을에 페스트가 발생해서 사라지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책의 뒷 표지에 적힌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합니다.
조용한 해안 도시 오랑에서 언젠가부터 거리로 나와 비틀거리다 죽어 가는 쥐 떼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부 당국이 페스트를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하자 무방비 도시는 대혼란에 빠진다.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려는 리유와 부당한 죽음을 거부하려는 미지의인물 타루, 우연히 오랑에 체류 중이던 신문기자 랑베르 등은 공포와 불의가 절정에 달한 도시에서 페스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이 재앙을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보고 신의 뜻에 따르자고 설교하는 신부 파늘루, 모두가 고통에 빠진 상황에서 오히려 세상에 소속감을 느끼는 코타르도 있다. 페스트는 쉽사리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보건대 사람들은 새로운 혈청의 실험 대상이었던 어린아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본다.
반항하는 행동적 휴머니즘
카뮈의 소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두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카뮈는 살아 생전에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제 2차 세계대전(1939~1945)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전쟁의 시대를 살아간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기존의 진리, 제도를 파괴하고 합리주의에 대한 한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간 존재와 삶의 태도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카뮈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부조리', '반항하는 행동적 휴머니즘'으로 대답합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세상을 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와 다르게 비합리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는 의의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곧 부조리로 인식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한 부조리에 대해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반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 반항해서 무의미한 삶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진리를 바라며, 행복을 바라는 욕구를 가지고 나가라는 것이 카뮈의 행동적 휴머니즘입니다.
'행동적 휴머니즘'은 『페스트』에서도 등장인물들을 통해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럼요" 그는 말했다. "아마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나는 필요한 정도의 자존심 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지, 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일은 그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나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뿐이지요." (p170)
그래서 늦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비 속에서도, 매일같이 한밤중이면 승객 없는 전동차의 괴상한 행렬이 바다 위 저 중턱으로 덜거덕거리면서 지나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시민들도 마친내는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순찰대가 임해 도로에 접근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흔히 몇몇 무리의 사람들이 파도치는 바다를 굽어보며 솟아 나온 바위 틈에 숨어 있다가 전동차가 지나갈 때면 유람차 안에 꽃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전동차가 꽃과 시체를 싣고 여름밤 속을 더한층 심하게 흔들리며 달리는 소리를 듣곤 했다. (p234)
등장인물 그 중에서도 의사인 리유는 의사라는 자신의 사명감과 다른 이유없이 자신 앞에 있는 환자들을 살리겠다는 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도 타루는 보건대를 스스로 조직합니다. 그리고 페스트가 심해져 사람들이 장례 절차도 없이 땅에 묻히기 위해 수송되어 질 때 사람들은 전동차에 꽃을 던집니다. 먼저 떠나는 이에 대한 인간애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페스트라는 부조리에 각자 나름대로 반항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부조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게 됩니다.
알베르 카뮈 (1913~1960)
우리 시대 인간의 정의를 탁월한 통찰과 진지함으로 밝힌 작가
- 1957년이 밝힌 노벨상 수상 사유
지금까지 제가 만난 두 작품 『이방인』, 『페스트』를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인간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번쯤은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깊이있게 파고들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심연을 바라보기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가봐야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쯤 진지하게 나 자신을, 인간을 바라보고 싶은 분들에게 카뮈의 작품을 권합니다.
(p55)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이동 이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 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p64) '그런 경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야.' 그는 페스트가 체질이 허약한 사람들은 가만히 놓아두고 특히 건장한 사람들을 쓰러뜨린다는 기록을 읽은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그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리유는 그랑에게서 어떤 자그마한 신비의 한구석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p72) 그렇지만 리샤르는 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병 자체가 저절로 멈추지 않는 한 법률에 규정도니 중대한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그 병이 페스트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확증이 절대적이지 않은 이상 심사숙고가 필요하다는 것 등을 지적함으로써 사태를 요약하려는 생각이었다.
(p79) 그랑은 그 담배 가게 여주인이 있는 데서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한참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여자가 알제에서 한창 떠들썩하던 당시의 어떤 체포 사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어떤 상사의 젊은 사무원이 바닷가에서 한 아랍인을 죽인 사건이었다.
(p150) 설교가 있은 지 얼마 안 가서 더위가 시작되었다. 6월 말이 된 것이다. 그 설교가 있던 날을 인상 깊게 만들어 주었던 철늦은 비가 내린 다음 날, 여름이 대번에 하늘과 집 위에서 폭발했다. 먼저 뜨거운 강풍이 일더니 하루 종일 불어 대며 벽돌을 모조리 말려 놓았다. 해가 제자리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더위와 햇빛의 끝임없는 물결이 하루 종일 시가에 넘쳐 흘렀다. 아케이드로 된 거리와 아파트를 제외하고, 이 도시 안에서 눈부신 햇빛의 반사 속에 놓여 있지 않은 곳이란 하나도 없었다. 태양은 우리 시민들을 거리의 구석구석까지 뒤쫓아 가서, 어디든 멈추어 서기만 하면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 첫 더위가 매주 칠백에 가까운 숫자를 기록하는 희생자 수의 급상승과 일치했기 때문에 우리 시는 일종의 절망에 사로잡혔다.
(p154) 그는 또한 자기가 즐겨 관찰하는 인물들의 묘사도 계속했다. 우리는 고양이와 장난을 하는 그 작달만한 늙은이도 역시 비극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거기서 알게 되었다. 과연 어느 날 총알들이 가래침같이 날아가서 고양이들 대부분을 죽였고, 질겁한 나머지 고양이들도 그 거리를 떠나고 말았다. 바로 그날, 그 작달만한 늙은이는 습관대로 제 시간이 되자 발코니에 나타났는데, 적이 놀라는 눈치를 보이더니 몸을 굽히고 길 저 끝까지 골고루 살펴보고 하는 수 없다는 듯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손으로 발코니의 철망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그는 또 좀 기다리다가 종잇조각을 조금 찢어서 뿌렸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간, 얼마 후에는 갑자기 화가 치민 ㅗㄴ놀림으로 창문을 쾅 닫으면서 집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 며칠 동안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그 키 작은 늙은이의 얼굴에는 슬픔과 혼란의 기색이 점점 더 뚜렷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타루는 매일처럼 나타나던 그 늙은이를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창문들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슬픔 속에 굳게 닫혀 있었다. '페스트 기간 중에는 고양이에게 침을 뱉지 말 것' 이것이 타루의 수첩에 적힌 기록의 결론이었다.
(p170) "그럼요." 그는 말했다. "아마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나는 필요한 정도의 자존심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지. 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일은 그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나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뿐이지요."
(p172)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p186) 그런데 페스트가 절정에 이르고 그 재앙이 이 도시를 공격해 완전히 삼켜 버리려고 있는 힘을 다 모으는 동안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꼭 적어 둘 것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가령 랑베르 같은 마지막으로 남은 개개인들이 그들의 행복을 되찾고자 하는 그들 자신의 몫을 페스트로부터 구해 내기 위해서 기울인 절망적이고도 단조롭고 꾸준한 노력들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위협하는 굴욕을 거부하려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었으며, 또 비록 그 거부가 표면적으로 다른 거부만큼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서술자의 의견으로는 그것도 그것대로의 의의가 충분히 있고, 또 그 나름의 허영과 심지어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대로나마 그 당시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자랑스럽게 깃들었던 그 무엇을 증명해 주기도 했다고 믿을 수 있다.
(p216) "옳은 말씀이에요, 랑베르. 절대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서 마음을 돌려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일이 내 생각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라 여겨지니까요.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하고 랑베르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하고 랑베르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어떤 것이 내 직분인지를 모르겠어요. 아마 내가 사랑을 택한 것은 정말 잘못일지도 모르겠군요"
리유는 그를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랑베르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께서는 아마 그런 모든 일에서 조금도 손해 보실 것이 없을 겁니다. 유리한 편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니까요?"
리유는 자기 잔을 비웠다.
"자."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에겐 할 일이 있어서요." 그가 나갔다.
타루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나가려는 순간에 막 생각이 난 듯이 신문기자에게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리유의 부인이 여기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에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랑베르는 뜻밖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타루는 이미 나가 버렸다.
이튿날 꼭두새벽에 랑베르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이 도시를 떠날 방도를 찾을 때 까지 함께 일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잠시 저쪽 수화기에서 침묵이 흐르더니 이윽고, "좋아요. 랑베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들려왔다.
(p224) 페스트라고 하는 저 꼭대기 지점에서 내려다보면 형무소장에서부터 말단 죄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유죄 선고를 받은 처지였으니, 아마 사상 처음으로 감옥 안에 절대적인 정의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p228) 그런데 초기에 우리의 장례식의 특색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신속성이었다. 모든 형식은 간소화되었으며, 일반적인 경향으로 볼 때 장례식은 폐지되었다. 환자들은 가족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었으며 밤샘 의식은 금지되었으므로, 결국 저녁나절에 죽은 사람은 송장이 되어 혼자 밤을 넘기고, 낮에 죽은 사람은 지체 없이 매장되었다. 물론 가족에게 통보는 하지만, 알려 봤댔자 대부분의 경우 그 가족도 만약 병자 곁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예방 격리를 당하고 있었던 터라 발이 묶여 있었다. 가족이 그 고인과 함께 살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은 지정된 시각, 즉 시체의 염이 끝나고 입관되어 묘지로 떠나려는 시각에나 와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p233)
8월에 접어들자, 사실상 페스트가 통계 그래프의 꼭대기 평행선상에서 요지부동으로 기승을 부리면서 누적한 희생자들의 수는 이 시의 조그만 묘지가 제공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담 한 쪽을 헐고 시체들을 위해 그 옆 터를 넓혀 놓았다 해도 소용이 없어서 이내 다른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밤에 매장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은 확실히 여러 가지 번거로운 고려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구급차에는 점점 더 많은 시체를 포개어 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변두리 지대에서는 등화관제 시간 이후에도 볼 수 있는, 규칙을 위반하며 밤늦게 다니는 산책객들은, 때때로 광채 없는 사이렌 소리를 울려 대며 밤의 후미진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길쭉한 백색의 구급차들을 만나곤 했다. 시신들은 서둘러서 구덩이 속에 내던져졌다. 아직 완전히 구덩이 속으로 쏟아져 들어 가기도 전에 벌써 삽에 퍼 담긴 석회가 시체의 얼굴을 짓이겼고, 이어서 이제는 더욱더 깊게 파인 구덩이 속에, 이름 없는 흙이 그 위를 덮어 버리는 것이다.
(p234)
그래서 늦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비 속에서도, 매일같이 한밤중이면 승객 없는 전동차의 괴상한 행렬이 바다 위 저 중턱으로 덜거덕거리면서 지나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시민들도 마친내는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순찰대가 임해 도로에 접근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흔히 몇몇 무리의 사람들이 파도치는 바다를 굽어보며 솟아 나온 바위 틈에 숨어 있다가 전동차가 지나갈 때면 유람차 안에 꽃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전동차가 꽃과 시체를 싣고 여름밤 속을 더한층 심하게 흔들리며 달리는 소리를 듣곤 했다.
(p236)
아니다.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하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무엇보다도 용의주도하고 빈틈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사무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 삽입해서 말하자면, 아무것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서술자는 객관성이라는 것을 고집해 왔던 것이다. 서술자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기본적ㅇ딘 필요성에 관한 것들 이외에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서 무엇이건 덧붙이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객관성 자체가 서술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요구한다. 즉, 그 시기의 커다란 고통, 가장 심각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고통은 바로 생이별의 감정이었으며 페스트의 그 단계에 나타나는 생이별의 감정에 대해 새로운 기록을 남겨 놓는 것이 양심적으로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에 있어서 고통 자체는 그것의 비장감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p239)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는 법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현재의 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p242)
결국 그 별거당한 사람들은, 초기에 그들을 보호해 주었던 그 야릇한 특권을 읽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의 에고이즘과 거기서 얻는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제는 사태가 명백해졌고, 재앙은 모든 사람에게 다 관계가 있는 것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가 시의 문에서 울리는 총소리며, 우리들의 삶 또는 죽음에 박자를 맞추어 주는 고무도장 소리의 한가운데서, 화재와 카드, 공포와 수속 절차 속에서, 굴욕적이면서도 대장에 등록된 죽음과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무시무시한 화장터의 연기와 구급차의 한가한 사이렌 소리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어처구니없는 재회와 평화의 시간을 똑같이 기다리면서 똑같은 유배의 빵으로 요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우리들의 사랑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건만, 단지 그것은 무용지물이어서, 지니고 다니기에만 무거울 뿐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생기를 잃어, 마치 범죄나 유죄판결과도 같은 불모의 존재였다. 그 사랑은 이미 미래가 없는 인내에 불과했고 좌절된 기대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시민들 중 어떤 사람들의 태도는 시내 곳곳의 식료품 가게 앞에서 줄을 선 그 긴 행렬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끝이 없는, 동시에 환상도 없는 똑같은 체념이었고 똑같은 참을성이었다. 다만 생이별에 관해서는 그 금정을 천배 이상의 단위로 확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생이별은 또 하나의 굶주림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으 ㄹ다 집어 삼켜 버리는 굶주림이니 말이다.
(p280)
리유는 가끔가다가, 딱히 그럴 필요성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자기의 무력한 부동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린애의 맥을 짚어 보곤 했는데, 눈을 감으면 그 요란한 맥박이 자기 자신의 동요와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 그는 고통 받는 어린애와 함 몸이 된 것을 느꼈으며, 아직 몸이 성한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그 애를 지탱해 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일치되었다가도 두 사람의 심장 고동은 다시 엇갈려 어린애는 그만 그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이었고, 그러면 그는 그 가느다란 손목을 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P312)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들을 거기서 끌어내기 위한 운동이나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생각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끌어내는 일에 급급해서, 끌어내야 할 사람에 대해서는 잊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비록 불행의 막바지에 이른 경우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순간에도 결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살림 걱정도 안 하고, 날아다니는 파리도 안 보이고, 밥도 안 먹고, 가려움도 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P329)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이 유행병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당신들 편에 서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 것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살마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하려고 애쓰는 며쳧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해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P345)
"됐어요." 하고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놈들이 다시 나와요."
"누가요?"
"쥐 말이에요, 쥐!"
지난 4월 이후로 죽은 쥐는 단 한 마리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다시 시작된다는 건가요?"하고 타루는 리유에게 물었다.
노인은 손을 비비고 있었다.
"놈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꼭 봐야 한다니까요! 정말 기분이 만점이죠."
그는 살아 있는 쥐 두 마리가 거리로 난 문으로 해서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말로는, 그들 집에서도 그놈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서까래 위에서 몇 달을 두고 잊고 살았던 바스락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리유는 매주 초에 실시되는 총괄적 통계의 발표를 기다렸다. 통게는 병세의 후퇴를 표시하고 있었다.
(P379)
아무도 단죄할 권리를 인간에게 주지 않았던 타루, 그러면서도 누구도 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희생자가 때로는 사형 집행인 노릇을 하게 됨을 알고 있었던 타루는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며, 희망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리유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P383)
페스트가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됨으로써 추상이 되어 버렸던 사랑이나 애정이 그것의 구체적 실현 매체인 육체적인 존재와 맞닥뜨리는 순간을 랑베르는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P384)
그들은 모두 서로를 꼭 껴안고 자기들 밖의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겉으로는 페스트에 승리한 듯한 얼굴로, 모든 비참함을 잊어버린 채, 그리고 역시 같은 기차를 타고 왔지만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그 오랜 동안의 무소식이 그들 마음속에 빚어 놓았던 두려움을 현실로 확인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잊힌 사람들, 이제 동반자라고는 아주 생생한 고통밖에 는 없게 된 살마들, 또 그 순간 사라져 간 사람의 추억 밖ㄴ에는 매달릴 것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달라서, 이별의 슬픔은 절정에 달했다. 이름도 없는 구덩이에 허망하게 묻혀 버렸거나, 또는 잿더미 속에서 녹아 없어진 사람과 더불어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어머니들, 배우자들, 애인들에게 페스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