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작가 위화의 책을 찾았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책이 있더군요. 제목은 『살아간다는 것은』 입니다. 한 참 동안 의자에 앉아 읽어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겁니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분명히 내가 들어본 내용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서재에 꽂혀 있는 위화의 『인생』이라는 책을 꺼내서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중고서점에서 새롭게 찾은 『살아간다는 것은』은 『인생』과 같은 책이었습니다. 처음에 『살아간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인생』으로 제목을 바꾸어 출간되었네요.


소설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한 번 읽으면 다시 읽지 않는 편 인데 이런 우연이 찾아왔으니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그 소설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기억들이 저 깊은 내면의 서랍 속에서 고개를 듭니다. 복귀라는 노인의 일생을 다룬 내용인데, 그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소설 속의 내용 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소설 속의 간단한 내용은 예전에 적어둔 『인생』의 감상평(http://zorbanoverman.tistory.com/472)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 일상에 맞추어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 때는 무언가를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예전부터 무언가를 진지하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마다 그런 방법은 다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조용히 글을 쓰는 시간이 가장 깊이 생각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민이 있거나, 생각이 깊어지거나, 한 동안 아무 생각없이 멍하게 지냈다고 생각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 손이 갑니다. 몸이 아프면 열을 내면서 신호를 보내듯이, 마음이 아프면 저에게 이렇게 글을 써 보라고 나름의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책 제목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 걸까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돌아오는 내일 아침에는 또 무엇을 해야할까요?'


한 사람의 삶은 수 없이 많은 변수에 의해서 바뀌어 갑니다. 어떤 변수는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고, 어떤 변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변수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다른 결을 가지게 되고, 서로 다른 색과 향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전제 자체가 통제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겠네요. 단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내 삶에 파고들더라도 그 변수에 무너지지 않도록 어떤 대비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매 겨울 마다 어떤 감기 바이러스가 유행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독감 백신 주사를 접종하듯이 통제가 힘들어 보이는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로 조금씩 끌여들여야 할 거 같습니다.


이제는 통제 가능한 변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부터 어른들이 수 없이 질문해 왔던 '꿈이 뭐니?' 와 같은 질문을 다시 듣는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과연 그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면서 통계와 평균에 나를 포함시키면서 면죄부를 받으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복귀'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인해 어머니, 아내, 아들, 딸, 사위, 외손자가 먼저 삶을 떠났지만, 먼저 떠난 이들을 그의 손으로 묻어 줄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거의 도살 직전에 있던 늙은 소를 데리고 오면서 자기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아내 옆에 묻어줄 거라는 기대가 있기에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언제될 지 모르는 그의 마지막을 위해 베개 밑에 돈을 조금 놓아둡니다. 자기를 거두어 줄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인 것이죠.


아직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정말로 무엇인지? 꿈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저로서, 일을 하면서의 제 모습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것들을 사소하지만 하나씩 적어두고, 실현해 나가는 것이 지금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생각이 납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자신이 살았던 삶을 반복해서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고, 제가 사는 지금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만들어 갈 첫 번째 삶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삶들을 곱씹고 회상하며 한 번 더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회상이 흐뭇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 희미하고 확실히 어떻게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씩 하나씩 시간을 내고 수 없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다 보면 언젠가는 제 스스로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에 대한 물음에 조심스럽지만 나름의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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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누군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고 물어봤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 라고 답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출간된 그의 작품을 완독하고 책꽂이 한 켠을 바라보니 그의 책이 10권이나 되었다. 특히 그의 장편이 발표되었을 때 서점가 들썩이듯이 나 역시 항상 그 작품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어쩌면 그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힘이 아닐까. 작품을 통해 먼저 좋아하게 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수필집이라던가,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서 그들을 조금 더 알고 싶어지는데, 이제는 '무라카미 하루키' 에 대해서 찾아볼 시간이 다가온 듯 하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1권 '현현하는 이데아' 는 거의 열흘에 걸쳐서 짜투리 시간이 생길 때 마다 한 장 한 장 읽어갔고, 2권 '전이하는 메타포'는 주말 하루동안 깊숙이 빠져들어서 읽어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특히 그의 장편소설은 '이야기의 힘' 이다. 초반 부터 인물을 차곡 차곡 쌓아가고, 풀어야 할 미스테리를 다시 얽히고 설키게 만든다. 그리고 궁금하게 만든다. 내가 읽는 이야기가 의문을 풀어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시 한 단계 더 깊이 어둠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인지 긴장된다. 어쩌면 '쫄깃쫄깃하다' 라는 표현이 이런 때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나는 어느 날 아내인 유즈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다. 유즈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고 한다. 나는 차를 몰고 여기저기를 떠돈다. 그러던 중 한 레스토랑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그녀는 자신을 아는 척 해달라 한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들어온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달라 한다.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를 타고 온 남자를 그려서 그녀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녀와 하룻밤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녀는 마조히스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한다.


그리고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가 아버지인 일본의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 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머물게 되면서 아버지가 살던 산 속의 집을 관리할 겸 나에게 그곳에서 살아도 된다는 권유를 한다. 일본의 대 화가의 집과 그의 작업실을 사용하면서 나의 하루하루의 삶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 집의 천장 쪽으로 이어진 조그만 방에는 한 작품이 고이 포장되어 있었다. 제목은 '기사단장 죽이기' 였다. 이 작품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사건들이 하나씩 일어난다.


잘 모르던 어떤 이에게 제안이 들어온다. 고액의 사례가 있을 테니 자신을 직접 모델로 세우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것이다. 그는 '와타루 멘시키'라는 인물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작품이 '와타루 멘시키'라는 인물을 불러들인 것일까? 그리고 어느 날 새벽 평소 울던 풀벌레 소리는 들리지 않고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 종소리는 정원의 뒤 편에서 시작되는데 멘시키와 그가 그 종소리의 위치를 찾으면서 3미터 가량의 깊이의 구멍에 사면이 촘촘한 돌로 메꾸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번 작품을 끌어가는 주요 매개는 '그림' 이다. 주인공인 내가 친구의 집에서 발견한 그림과 그곳에서 그리기 시작한 새로운 나의 작품들 속에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고, 그 이야기가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내가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와 '아마다 도모히코'의 요양원에 가서 '지하세계?' 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부분이다. 무언가 갑자기 맥락에 맞지 않은 이야기가 나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에 맥락을 생각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부분을 읽으면서는 살짝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밝혀지지 않았던 '멘시키'라는 인물이다. 그가 소설 속에서 분명히 마지막에는 어떤 역할을 할 줄 알았다.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를 등장시키면서 이야기가 이어졌고, 갈등과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듯 하다. 그래서 무언가 풀리지 않은 응어리를 남겨둔 느낌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다. 바로 소설 속의 음악 찾기다. 한때 그의 아내와 재즈 카페를 운영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던 그이기에 언제나 작품 속에 음악에 등장하는 것이다. 한 번씩 찾아서 들어보려고 하나씩 적어두었다. 이런 것도 책 읽는 쏠쏠한 재미다. 최근에 클래식을 하나씩 찾아서 듣고 있는데, 클래식을 들어야지 하면서 찾는 것 보다 이렇게 우연하게 만나는 인연들이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으로 이끌어 준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라 보엠>

베토벤 <현악 4중주>

슈베르트 <현악 4중주>

모차르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베르디 <에르나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이번에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차(Car) 도 등장한다. 나는 차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많은 남자들이 자동차에 대한 나름의 로망이 있지 않은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 속에 다양한 차들을 등장시키면서 그런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주인공인 내가 처음에 몰던 '도요타 코롤라 왜건'

나중에 새로 바꾸게 된 '빨간색 푸조 205해치백'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된 남자의 차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

내가 나중에 초상화를 그리게 될 아키가와 마리에의 고모 아키가와 쇼코에의 '파란색 도요타 프리우스'

멘시키가 그의 집에 초대할 때 보내준 '닛산 인피니티'

나의 유부녀 여자친구가 타고 오는 'BMW 미니'

아키가와 쇼코에의 아버지의 추억 '재규어 XJ6 (시리즈 Ⅲ)'

멘시키가 가지고 있는 차들 '은색 재규어 쿠페, 재규어 E타입 (시리즈 Ⅰ 로드스타), 레인지로버, 미니쿠퍼'



마지막은 소설 속의 마지막으로 대신한다.


"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무로를 향해 말했다.

"너는 그걸 믿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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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소식이다. 최근 우리 동네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새로 생겼다. 한 동안, 온라인 서점 중심으로 재편되던 국내 도서시장에 오프라인 서점이 하나 둘 씩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소규모 책방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가수 요조와 방송인 노홍철도 소규모 책방을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조용히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시류에 편승하듯 아니면 이들이 먼저 그 시류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대형 온라인 서점인 '알라딘'과  'YES24' 에서도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하나 둘 씩 늘려가면서 독자들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서고 있다.


집 근처에 생긴 중고서점을 반가운 마음에 빈 가방을 하나 메고 간다. 많은 책들을 손에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 한 권의 책만을 가방에 넣고 돌아왔다. 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을 돌아보았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를 적어보라면 나는 서둘러 이 두 명의 이름을 남길 것이다.

'알베르 카뮈' 그리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을 읽었을 때는 무언가에 홀린 듯 하며 읽었었다.  아마도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를 빼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홀로 수없이 감탄하며 읽어 내려갔다. 이 한 권의 책 만으로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접한 그의 다른 책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 이었다.  여전히 나는 바다로 다시 나가는 플렌티노 아리사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 까지"


이렇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만나고 나서, 그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그와 관련된 사소한 것들도 관심이 생겨난다. 그의 작품, 그의 삶, 그의 이야기. 나에게도 행운이다.



이번에 만나게 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은 한 노인의 생(生)과 성(性) 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1927년 생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004년에 발표한 작품이니 77세의 나이에 집필한 책인 것이다. 어쩌면 작품 속의 한 노인 속에는 그의 내면의 모습도 어느 정도는 투영되지 않았을까.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소설의 시작이다.  소설 속의 나는 아흔 살이다.  그는 아흔 살이 되는 날에 갑작스런 결심을 한다.  그동안 비밀의 집 여주인인 로사 카바르카스가 '새로운 것' 이라는 말과 온갖 음탕한 유혹을 했지만 그는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 일까? 아흔 살이 되던 날 갑자기 마음 속에 어떤 내적 갈등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처녀와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로사 카바르카스는 열 네살의 한 소녀를 소개한다. 소설 속의 나는 그녀를 '델가디나'라 부른다.


아흔 살의 나는 매일 저녁 로사 카바르카스가 마련해 놓은 유곽의 델가디나의 방으로 향하고, 그녀의 방에 그림을 가져다 두고, 그녀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씩 가져다 놓는다. 나는 델가디나의 방에 저녁마다 찾아가지만, 그녀를 실제로 탐하지 않는다. 낮에 바느질을 하며 피곤에 찌든 델가디나를 그저 바라보고 아침에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뜰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델가디나가 어느 사건에 의해서 처녀성을 잃어버렸다고 오해한 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소설의 마지막으로 향한다. 나는 그 사건이 오해임을 알게 된다. 


"소녀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오?"

"아, 나의 서글픈 현자 양반, 늙는 것은 괜찮지만 멍청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로사 카바르카스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 불쌍한 아이는 당신을 미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요."


이 소설의 마지막은 아흔 살의 노인에게는 분명히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을 덮은 뒤에도 여전히 궁금하다. 과연 열 네살의 소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소설 속의 소녀는 실제 그녀의 입으로 어떤 의사를 표출한 적이 없다. 로사 카바르카스의 입을 빌려 그녀가 표현될 뿐이다. 소설 속의 그녀는 실제 아흔 살의 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그 반대의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과연 아흔 살의 노인과 열네 살의 소녀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그냥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들 뿐이다. 


이른 일곱살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소설을 예전부터 구상을 하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를 읽고 작품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고양한 짓은 하나도 할 수 없습니다." 여관 여주인이 노인 에그치에게 경고했다.

"잠자는 여자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도 안 되고, 그와 비슷한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됩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의 집』


어쩌면 그는 남자의 욕망과 노인의 삶을 조금 더 선명하게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는 아흔 살의 노인과 열 네 살의 소녀라는 극단적인 인물 창조를 통해 조금 더 거칠게 그리고 조금 더 절제하며 삶을 그려낸다.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 번 믿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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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알쓸신잡' 에서 김영하 작가가 故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이라며 소개한 한 문장이 있다.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 


글이라는 것은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나 문장을 말할 수 있는 법인데.

저렇게 사람의 가슴 속까지 파고 들어가며,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김영하 작가는 프로그램 속 작은 수목원에서 꽃을 보며, 다음 포털의 꽃이름 검색 서비스로 이름을 확인한다.

하나 하나 궁금해 한다. 작가는 단순히 '꽃이 예쁘다' 라고 쓰는 이가 아니기에 그는 사물의 이름을 찾아 간다.


그의 소설은 예전에 『살인자의 기억법』을 한 번 읽었고, 『보다』 라는 산문집을 접해본 적이 있다. 

국내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보통 한 작가에 빠지면, 그 작가가 발표한 책을 모두 찾아서 읽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책은 흥미롭게 읽었지만, 이후 다른 작품은 찾아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하나씩 다시 찾아볼 생각이다. 

김영하 작가는 최근에 지난 7년 동안 발표했던 중단편을 모은 『오직 두 사람』 을 출간했다.

몇 일에 걸쳐서 단편을 하나씩 읽어가는데, 

읽을 때 마다 수없이 감탄하며, 

'김영하 작가가 이 정도 였구나!' 느끼며 그동안의 무지에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 라고 했던가.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에 수록된 모든 단편을 읽은 후에는 알게 된다.

"작가는 사람의 어두움을 아는 자" , "작가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는 자" 


이번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특히 <아이를 찾습니다>, <옥수수와 나>는 인상적이었다.


그 중에서 <아이를 찾습니다> 를 읽을 때는 수 없이 그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모든 게 수없이 끔찍했다.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되어 본다. 

아이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되어 보고, 아이를 잃고 정신마저 온전치 못하게 된 엄마가 되어본다.

아들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한다. 더 복잡해진다. 엄마라고 생각했던 이의 죽음, 엄마가 자신을 납치한 납치범이었다.  

다시 찾게 된 진짜 엄마와 아빠. 하지만 더 낯설다. 마치 새롭게 납치당한 듯이.


<옥수수와 나> 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배경 설정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 설정부터 남녀 간의 치정, 소설가의 창작, 

자신은 옥수수며 닭들이 자기에게 달려든다는 정신 질환의 요소들까지 나에게는 신선한 요소들이었다.


이전에도 그의 작품을 읽었었지만, 이번에 정말 나는 새롭게 김영하 작가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 번 작품을 쓸 때 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아갈 세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간의 관계를 이어준다.


그러기에 세상을 알아야 하고, 사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슬픔과 어두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이번 작품들에서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어두움을 건들여 주었다.

사람들이 숨기고 싶지만, 말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작품으로라도 이해해준다는 손짓을 내민다는 것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어두움을 말하려 하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아물지도 모르겠다.


■ 책갈피


언니,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전에 어떤 일간신문 만화에서 본 건데요. 어떤 남자가 교통방송에서 뉴스를 들어요. 고속도로 어느어느 구간에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가 있으니 일대를 운행하는 차량들은 모두 주의하라는 거예요. 그는 문득 그 방면으로 출장을 간 친구가 떠올라서 전화를 걸어요. 야, 그 부근에 역주행을 하는 미친놈이 하나 있대. 조심해.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한둘이 아니야. 얼른 전화 끊어. 

- '오직 두 사람' 中


그 순간에도 나의 손은 그녀의 몸 곳곳을 애무하면서 해독 불가능한 문장들을 무수히 그녀의 몸에 입력해 넣었다.

- '옥수수와 나' 中


나는 쥐가 돌아다니는 집에서 아랫배가 뻐근해질 때까지 글만 썼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미친듯이 써나가는 가운데 내 영혼과 육체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꿈꿔왔던 , 모든 창작자들이 애타게 찾아 헤맨다는 에피파니의 순간일지도 몰랐다. 뮤즈가 강림한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작가가 됐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 '옥수수와 나' 中


"완벽한 알리바이? 그거야말로 허상입니다. 반드시 허점이 있게 마련이죠. 작가들도 말이죠. 구상 완벽하게 하고 작품 시작하는 사람들치고 별 볼일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겁니다. 실패한다는 거죠. 써나가보면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돼버리거든요. 내가 볼 때 당신을 강박증이에요. 계획한 대로 다 돼야 한다고 믿는 어린애란 말입니다. 자, 총 내려놓으세요. 살인이라는 건 말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짓을 함부로 저지르면 안 돼요. 인생이 무슨 게임입니까?"

- '옥수수와 나' 中


그가 처음으로 킬킬 웃었다. 농담은 죽음의 공포를 처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것이 커트 보니것이었던가 

- '슈트' 中


태준씨, 그 분노와 좌절은 곧 체념과 우울로 바뀌어요. 정은은 그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라는 세계에 짙은 먹구름과 안개가 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먹구름과 안개는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만 같죠. 그런데 정은은 태준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새로운 힘이 밀고 올라오는 기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혼자 떠안고 있던 우울과 무기력의 부채가 남자들이 당한 끔찍한 일로 인해 모두 탕감된 것 만 같았다. 

- '신의 장난' 中


"불안은 영혼을 먹어치운다. 는 아랍 속담이 있더라고요. 몇 년 전 엄마가 수술을 받게 됐어요. 우리 가족은 엄마와 나뿐이거든요. 병원 대기실에서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어요. 다섯 시간이면 끝난다는 수술이 열 시간이 돼도 안 끝나는 거예요. 혹시 읽을까 싶어 책을 가져갔는데 펴보지도 못했어요. 보니까 대기실 사람들이 다 그래요. 모두 YTN 뉴스만 보고 있는 거예요. 본 걸 또 보고, 또 보고. 그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어요."

- '신의 장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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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7년 동안 하던 일과는 다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생각해오던 방식과 기술이 지금 하는 일에 도움은 되지만, 그렇게 큰 역할은 하지 못하네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생각하고 정리하고 설득하는 일을 차근차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회사라는 건, 제가 배울 때 까지 기다리지 않는 법이지요.

새롭게 시작한 지 6주 정도 된 거 같은데, 평소 같지 않게 한 숨이 자주 나오고 스트레스성 증상들이 하나 둘 생겨납니다.


그 동안은 이런 스트레스가 계속 누적되어 왔던 거 같습니다.

하루가 힘들었을 때 그걸 잘 풀고 새로운 하루를 마주해야 하는데, 푸는 방식은 자기 전에 캔 맥주 2캔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떠는 건 그렇게 큰 효과가 없습니다. 조용히 어떤 책을 집중해서 읽어내고, 잔잔한 음악 조차 배제하고 단지 백색 소음 속에서 조용히 제 머릿 속의 생각들을 글이라는 형태로 토해내는 것이 저를 다시 차분하게 해주고, 가슴을 달래주는 듯 합니다.


제대로 저를 달래주지 못하다보니, 괜한 짜증과 스트레스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짜증스런 목소리와 상처주는 말을 뱉어낼 때도 생겼습니다. 뒤늦게 다시 미안한 마음에 달래도 보고, 스스로 자책도 몇 번이고 해봅니다.


이번 주말은 온전히 하루 동안 저만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책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책만 읽으려고 합니다. 우선 손에 잡은 책은 그동안 이름만 수 없이 들었던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 입니다. 책상 의자에 앉아 보다가, 쇼파에 누워서 읽고, 바닥에서두  발을 모으고 책을 잡은 손으로 무릎을 감싸면서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휴~' 그냥 오랜만에 한 권을 단 숨에 읽어버린 것이 기쁘네요. 이런 게 저한테는 무엇보다 큰 위안입니다.


『댓글부대』는 박근혜 정부 시기 '국정원 여론 조작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2012년 대선에서 국정원이 운영한 댓글 부대를 1세대로 보고 있으며 그 이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불현 듯 생각난 게 있었습니다. 예전에 사건이 발생했을 때 생각은 국정원에서 댓글 부대를 운영한단 말이야 하는 역할에 맞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댓글 부대가 만들어지기 전에 과정이 궁금해졌으며,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더 소름이 돋아났습니다. 저는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어떤 제안을 하거나 일을 할 때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댓글 부대를 만들 때도 누군가는 제시를 했겠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주제의 글에 어떤 댓글을 남길 경우 어떤 분위기가 만들어 질 것이며, 그런 댓글을 반복적으로 남긴다면 그건 분명 여론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여론이 생기고 대중의 의견이 되면, 저희가 모두들 알 듯이 우리는 그 대세라는 곳에 편승해서 자신의 의견없이 그저 몸을 싣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석과 대중의 심리를 파악하고 누군가는 이런 방법을 제시하고 실제 국정원을 통해서 실행에 옮겼다는 것에 다시 한 번 제가 사는 세상을 낯선 눈으로 볼 수 밖에 없네요.


인터넷신문사 중에 돈 받고 기사 실어주는 데들 많아요. 뒷거래고 뭐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인터넷언론 홈페이지 가면 첫 페이지에 그냥 써 있어요. 기사 게재 문의는 어디로 하라고. 인터넷 돌아다니다보면 이게 신제품 홍보인지 기사인지 모를 뉴스들 있잖아요. 보도자료 그대로 올려놓은 거. 그게 다 그렇게 올리는 거예요. 별로 비싸지도 않아요. 30만원 정도? 그 인터넷신문이 네이버뉴스에 등록이 돼 있냐 안돼 있냐, 기사에 '이 기사는 광고 기사입니다' 라고 쓰느냐 마느냐, 기자 이름 적느냐 마느냐 그런 거에 따라 가격은 좀 달라지지만.

그렇게 기사 올린 다음에 실시간검색어 순위를 올리면 누리꾼들이 알아서 다 퍼가요. 내용만 있으면 (중략)

조금 있으면 큰 언론사에서도 퍼가요. 언론사에 닷컴부서라고 인터넷뉴스만 따로 만드는 팀들이 있거든요. 그런 데는 실시간으로 클릭수랑 유입량 체크하고 그걸로 광고 팔아서 돈 버니까 조금만 화제가 된다 싶으면 다 퍼가요. 팩트 확인하고 그런 거 없어요.

그러면 살마들이 웃기는 게, 신문사 닷컴 사이트에 기사가 오르면 그게 실제로 그 신문에 난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신문에 실렸으니 이건 진짜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 P165


장강명 작가의 프로필을 보니 11년간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했네요. 그래서일까요? 무언가 하나의 사건을 파헤쳐가는 것에서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짜임새 있게 이어갑니다. 제 성향도 나름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을 해서인지 몰라도 이런 흐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사이버 상에서 의도적인 목적으로 심각하게 댓글을 조작하고, 그걸 넘어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획에서 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런데 그게 정말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 속의 내용은 마치 취재를 해서 적어놓은 듯 느껴집니다. 


오늘 아내와 무슨 대화 중에 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보, 아이를 낳고 나이가 점점 들어가다 보니까 정말 사는 게 더 무서워진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냥 저만 열심히 하면 모든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다 보니, 예전에 인정하지 않았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고, 어떤 것은 그건 내가 바꿀 수 없는 무엇으로 고정시켜버리기도 합니다. 어쩔 때는 그저 세상의 아름다운 면만 보고 그저 멍하니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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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은 작년 가을에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출간될 때 부터 계속해서 읽어야지 하면서도 손에 잡지 못한 책이었다. 그런데 출간된지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에도 여전히 서점의 판매 순위는 상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책들은 무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다시 한 번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지난 5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 간의 청와대 오찬이 있었는데,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이 책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로 드린 것이다. 그리고 책의 속지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82년생 김지영』 은 190 페이지 정도로 두껍지 않은 책이다. 그리고 소설도 아주 쉽게 읽혀서 두 세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정도의 분량이다. 그런데 짧은 독서 후에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책을 쉽사리 접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자인 엄마, 여자인 내 아내, 아이들의 엄마인 내 아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인 조남주 작가는 <PD 수첩>, <불만 제로>, <생방송 오늘 아침> 등 시사교향 프로그램의 작가로 10년 동안 일을 해왔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내용들은 남자인 나에게 그대로 비수가 되어 찔러 버린다. 마치 시사 방송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남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잘 모른다. 그냥 평소의 일반적인 행동과 대화였다. 그런데 그것은 여자들에게는 날카로운 칼날로 향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칼날에 상처가 남는다.


결국 면접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깜빡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조바심 내면서 헤매기 싫어 곧바로 택시를 탔다.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기사님은 룸미러로 김지영 씨를 한번 흘끔 보더니 면접 가시나 보네, 했다. 김지영 씨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82년생 김지영』 中,  100p -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택시 기사님은 면접을 보러가는 지영씨에게 마치 인심을 쓰는 듯이 말한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어쩌면 이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손녀 같은 손님을 배려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이 할아버지는 몇 십년 전의 생각에 머물러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인심을 좀 썼네' 하며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선물로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 할아버지 너무 했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그 할아버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82년생 김지영』 中,  144p  -


김지영씨가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 부분에서는 마치 나에게 하는 소리 같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방금 전에도 글을 쓰면서 '집안일을 도와준다' 라는 표현을 썼다가 서둘러 지웠다. 어쩌면 이런 게 더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다. 행위자는 스스로 만족하며, 마치 선(善)을 행하는 듯한 감정이 든다. 하지만 그 행위를 당하는 당사자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가하는 언어적, 육체적 폭력에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입장이 되고 만다.




지난 5월 17일에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1주기' 관련된 집회가 강남역에서 있었다. 1년 전 강남역 남여 공용 화장실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사건, 범행 동기는 단지 '여자' 였기 때문이었다. 이유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 무섭고, 사람들의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사건 1주기 그 날 다른 곳에서 역시 남여 공용 화장실에서 한 여자가 성폭행을 당할 뻔 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범인은 바로 잡혔다고 한다. 여성들은 단지 걸어다니는 그 자체로 위협을 받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 여자는 남자들의 어머니, 아내, 누나, 동생 들이다.


이런 사건은 극단적인 예이다. 나를 포함한 다른 남자들은 당연히 그런 놈들을 비난한다. 당연히 이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여자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범한 남자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은 물어 본다. 당신은 어떠시냐고?

나는 항상 평범한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내 관점일 뿐이었다.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김지영 씨가 겪는 일들은 내 아내가 겪은 일들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지금의 삶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우선 내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이 이 작품을 읽은 후기를 읽어보면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읽는다고 한다. 또한 자기가 경험한 일들과 비슷한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읽는 내내 김지영 씨로 변한다고 한다. 가장 가깝고 소중한 이의 아픔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나와 태어난 해가 같은 82년생 김지영씨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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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읽고 난 다음 문득 든 생각이다.

최근에는 한참 알베르 카뮈에 빠져 있는데 『시지프 신화』의 까만 잉크를 읽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그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떠했을까 다른 블로그들을 찾아보았다. 누군가는 오전 중에 이 책을 읽고 세 번이나 눈물을 참았다고 한다. 지금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눈물을 쏟을 것 같으니 결과는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 안타까움을 충분히 달래준 이가 '밀란 쿤데라'이다. 책 날개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라는 짧은 소개 글이 적혀 있다. ' 아! 멋지지 않은가!' 어쩌면 그냥 '밀란 쿤데라 지음' 이라고 적혀 있었어도 충분한 작가 소개가 아니었을까.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알아보려고 하는 중인데, 이런! 갑자기 밀란 쿤데라가 이렇게 궁금해져 버리니 큰일이 나 버렸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책 제목은 기가 막히게 지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2년 전인가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길지 않은 소설인데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혼자 쇼파에 앉아 환호를 지를 정도였다. 그 때 기분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쿤데라에게 제대로 당했네!' 이다. 


『정체성』은 샹탈과 장마르크 두 연인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노르망디 해변가의 작은 도시의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샹탈이 먼저 도착하고, 하루가 지나 장마르크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샹탈은 해변가 근처로 산책을 하던 중 기분 좋지 않은 경험을 하고, 장마르크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장마르크는 걱정스레 그 이유를 물어보는데, 샹탈은 그 이유가 아닌데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그리고 이 말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간다. 


『정체성』의 정체성은 무언가 깊이 농축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길지 않지만 그 속에 이야기가 한 순간도 질리지 않게 꽉 들어 차 있다.

동시에 이 책의 독특한 매력인 두 주인공 샹탈과 장마르크의 사유가 깊이 새겨나온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세계관이며 동시에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내면의 감정을 쿤데라는 깊이 들여다 본다.



샹탈, 그녀는 일상 속에 있지만 자유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속에...


아들의 무덤 앞에 섰다. 그녀는 거기에 가면 항상 그에게 말을 했고 그날도 자신을 해명하고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낀 듯 아들에게 얘기했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아기를 갖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가 저지르는 바로잡을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내게서 앗아 갔지만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달았단다.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p68)


그녀는 장마르크와 만나기 전에 한 남자와 결혼을 했었고,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먼저 가슴에 묻게 되었고, 지금의 샹탈이 되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아들이 만약 살아있었더라면 아마도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누구나 결국 하나의 삶 만을 살 수 밖에 없다. 다른 삶은 정말 '만약' 이라는 세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모습들은 감춰진 채 살아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대목을 읽는데 이것만으로도 샹탈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샹탈은 유모차를 밀고 동시에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안고 가는 아빠를 유혹하는 상상을 해 본다. 부인이 쇼윈도 앞에 멈춰선 틈을 타 남편 귀에 약속 시간을 속삭여 보는 것이다. 그는 어떤 행동을 할까? (중략) 샹탈은 이런 발상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유쾌해졌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남자들이 결코 더 이상 나에게는 한눈을 팔지 않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 (p19)


그녀 앞의 남자는 거만하게 젊었고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거만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젊은 남자의 시선을 받으니 자신의 육체가 그 시선 아래 환한 세상에서 빠른 속도로 늙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p114)


그녀는 자신이 장미의 향이 되어 남자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보다 어린 장마르크와 살면서 그녀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서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이름 모를 이의 편지를 받으면서 다시 여자로서 설레이기도 하지만 분노에 차기도 한다.



장마르크, 존재와 관계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


장마르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와 관계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 


"다 용서했지.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지난번 그를 더 이상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서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당신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나는 그때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런 내가 흡족하기까지 했어. 그런데 그의 죽음이 이런 감정을 전혀 바꿔놓지 못하는 거야." (p53)


장마르크는 자기가 세계와 맺고 있는 유일한 감정적 관계가 그녀라고 생각했다. 죄수들, 박해받는 자들, 굶주린 자들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그들의 고통에 개인적으로 절실하게 감동받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그는 안다. 샹탈이 그들 입장이 되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란 중 강간당한 여자들이 있다고? 그는 강간당한 샹탈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를 무관심에서 해방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다. 그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라는 매개를 통해서일 뿐이다. (p98)


장마르크는 한 친구와 어떤 이유로 관계를 접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했지만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친구에 대한 애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형식적인 어쩌면 그보다 더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세상에서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어쩌면 샹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이가 더 적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과의 관계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을 생각해보니 전혀 그렇지 않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언젠가는 이방인 혹은 떠돌이로 떨어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학업을 포기한 것은 실패가 아니었어. 그때 내가 포기한 것, 그것은 야심이었어. 나는 어느 날 돌연 야심 없는 남자가 되었던 거고 그 바람에 나는 이 세계의 변두리에 놓인 거였어. 더욱 끔찍한 일은, 내가 그 외 다른 곳에는 있고 싶지 않았다는 거지. 거기에서 떠나고 싶지 않으니 다른 어떤 위협도 무섭지 않았어. 그러나 아무런 야심도 없이 성공하고 인정받고 싶어 안달복달하지 않으면 당신은 몰락의 문지방에 턱하니 걸터앉게 되는 거야. 나는 거기에 정착했고 사실 아주 편했지. 정착하긴 했지만 그곳은 어쩔수 없이 추락 직전의 문턱이었어.  (p95)


그는 무척 피곤했고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시작된느 것이다. 어느 날 벤치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가 해가 떨어지면 잠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느 날 떠돌이 틈에 끼이게 되어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p163)


거리에서 구걸하는 어떤 한 남자를 보면서 그는 그 사람이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자신이 비슷한 길로 갈 때의 느낌을 기억하기에 어쩌면 더 연민이 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추락 직전의 문턱에서 벗어나야 함을 또한 알기에 벤치에 누우려 했다가 허리를 세우고 다시 앉았는지도 모른다.



정체성 그리고 장자의 호접몽


어쩌면 이런 두 인물 간의 갈등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다 보면 장자의 <호접몽>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조금 뜬금 없긴 하지만, 아마도 책을 읽고 나면 생각날지도 모르기에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며 다시 한 번 감상에 젖어 본다.


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버렸더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비인지도 몰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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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너무 젊은데······."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또렷한 발음으로 그녀가 한 말은 이 세 마디뿐이었다. 사막처럼 희미하고 고통스럽고 억눌려 있는 수많은 문장들이 묻혀 있는 오랜 침묵이 흐른 뒤에 나온 세 마디 였다. 울 수도 없었다. 커다란 불덩이가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 저 밑바닥부터 타오르면서 눈물을 말려 버렸다. (p12)


누군가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카뮈의 마지막 날들』 입니다. "가장 잘못된 죽음의 방법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 이라고 말했던 카뮈는 1960년 마흔 일곱살의 나이에 그가 부조리하게 생각했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책으로 작가는 카뮈의 입장이 되어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아직 너무 젊은데······." 라며 안타까워 하는 이는 카뮈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열두 살 때 티푸스에 감염된 이후에 거의 벙어리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카뮈를 낳은 다음 해인 1914년에 남편을 세계1차대전에서 잃게 됩니다. 이번에는 자식을 먼저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녀가 내뱉은 세 마디는 어쩌면 아픔의 극한을 표현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카뮈는 아버지 없이 외가에서 자라게 됩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카뮈에게는 그러기에 더 특별한 어머니였습니다.


알베르는 단어들이 입에 물고 있던 조약돌의 벽을 넘어가도록 애를 쓰며 크게 낭독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돌을 내뱉어버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장 힘든 것은 돌을 통제하는 것, 혀와 돌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움직이게끔 하는 것이었다. 결핵에 걸렸을 때 나던 소리와 똑같은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아직은 분명치 않은 음절로, 어머니가 내는 그런 발음처럼 어렵사리 변해갔다. 알베르는 그 소리에 익숙해져 갔고 자기 자신이 내는 소리를 거울 삼아 어머니가 소리를 삼켜버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언어를 표현함으로써 마침내 그 소리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하고 싶을 때 조차도 어머니의 말들은 결국 체념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파도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불분명한 문장을 삼켜버리는 이 해변에서 알베르는 침묵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p46)


카뮈는 어머니가 말하는 부분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장애로 인해서 불분명한 발음을 하게 되는 것을 카뮈는 스스로 바닷가에서 조약돌들을 입에 가득 물고 말을 해봅니다. 반 친구들이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에게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는 오직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카뮈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어머니 다음으로 생각났던 분은 제르맹 선생님이었습니다. 카뮈의 할머니는 그가 상급학교 진학이 아닌 졸업장을 따면 공장의 견습생으로 일을 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공부를 시킬 여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르맹 선생님은 좋은 성적을 받아서 장학금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할머니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할머니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때 갑자기 어머니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 애 학교 갈 거예요!" 


잘못했으면 우리는 카뮈라는 작가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은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에 그의 작품과 이름을 남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카뮈가 얼마나 어머니에게 자신이 쓴 글을 보여드리고 싶었을까요. "어머니, 제가 쓴 글이에요. 사람들이 많이 읽고 좋아하는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어리광도 부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자동차 사고가 나기 전에 카뮈는 유난히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쓴 작가의 상상이겠으나, 그 당시에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 누구보다 깊게 들어주는 어머니였기에...


오늘 저녁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렸을 적 밤마다 리듬을 맞추던 어머니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악몽을 꾸고 나서 달아나버린 잠을 다시 청해야 할 때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되곤 했었다. 눈을 감고 가벼운 증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똑똑히 듣곤 했었다.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최대한 옆에 붙어 어머니와 같이 숨을 쉬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꿈을 훔쳐 자기 마음속으로 조금씩 주입시키면 나중에 소리 없는 밤에 그것들을 깨울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르네 샤르 생각이 났다. 어느날 그에게 자기와 어머니와의 이상하고도 서글픈 관계에 대해 말했더니 그가 잠시 사이를 두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그건 침묵이 아니라네." (p104)

다시 어머니의 독백으로 돌아옵니다. "아직 너무 젊은데·····." 이 부분이 왜 이렇게 아플까요. 

그녀는 얼마나 아들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어 했을까요. 아들이 쓴 글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읽고 싶었을까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알베르 카뮈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니를 남겨두고 먼저 떠났기에 더 마음이 아프네요.



『조르바 위버멘쉬를 꿈꾸다』의 카뮈

『이방인』, 알베르 카뮈

- 『페스트』 그리고 알베르 카뮈

- 알베르 카뮈, 부조리로 세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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