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현재의 나에 대한 생각부터 갑자기 튀어나왔다.
여전히 흔들리고 어느 길로 가야할지 잘 몰라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다른 이의 글에 기대본다.
(1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2부) 타인의 발견 (3부)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책의 구조는 개인-타인-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형식을 취한다.
개인주의자 선언이라 해서 나 혼자만 잘 살아볼거다라는 것은 아닐 거라 짐작은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책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문유석 판사는 우리 사회에서 지나친 것은 집단주의이고, 부족한 것은 개인주의라고 한다.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근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p26)
나 역시 오늘부터 합리적 개인주의자 선언을 하는 바이다.
# 넷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거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몫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직업병 때문일까.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흔해 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p13)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갸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의 글이다. (p119)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p136)
사람은 태어날 때 부터 공감력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공감력 그리고 민감하게 느끼게 하는 감수성은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이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랬으면 좋겠다. 옆의 어떤 이가 너무나 아프고 지쳐있을 때 누군가 힘이 되어주고 같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힘이 들 때 누군가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내 가족들이 힘들고 아플 때 주변에 도와주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공감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세상이 살만하니까.
# 다섯
진보, 보수, 좌파, 우파. 결국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 문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다층적인 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귀한 것 같다. (p228)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인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p37)
악을 행하는 악마보다 선악 구분조차 없는 백지 상태의 야수가 더 무섭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성찰할 줄 모르는 무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야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야수를 문명의 굴레에서 풀어준 것은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이다. (p235)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정치,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만 너무나 다양한 요소와 그 이면에 숨겨진 것들이 많아서 어떻게 해야 올바른 가치판단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 정치는 각각의 세부적인 요소로 들어갈 수록 복잡하고, 실질적인 사례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 할 때 더욱더 힘들것이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은 모르겠고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세상이 너무나 자본주의적으로 빠지지 않고, 조금은 더 인간적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위험에 빠졌을 때, 내가 없더라도 사회시스템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났으면 좋겠고, 한 번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소외되고 버림받는 사회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개인의 가치를 중요하게 다루어주며, 조금은 더 공평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 역시 혼란스럽다. 어쩌면 글로는 이렇게 좋은 말을 뱉어내지만, 허위의식으로 가득차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내가 이상으로 여기는 것들이고, 그런 것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내가 그렇게 실천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 이상을 가끔씩 한 번쯤 들춰내고 조금이라도 그곳에 수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Book
서은국 교수 『행복의 기원』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스티븐 핑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p9
아무리 객관적인 척 논리를 펴도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선호, 자기가 살아온 방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게다가 현대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성격조차 타고난 요소, 즉 유전자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말해준다. 그 바탕 위에 인간관계, 일, 독서 등을 통해 쌓아온 직간접 경험들이 결국 '나'라는 고유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p11
곰곰이 생각해보니 알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살아가면서 분명히 내 일이 아닌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들이 있다. 피가 거꾸로 솟는 순간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책없이 줄줄 흐르는 순간들이 있다.
p12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 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나 같이 이기적이고 무심한 사람조차 자꾸 접하다보니 결국은 깨닫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더라. 하물며 나보다 훨씬 따뜻한 가슴을 가진 많은 분이 이런 일들을 보고 듣는다면 어떻겠나. 내가 겪은 것들을 알려드리기라도 하고 싶다.
p13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거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몫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직업병 때문일까.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흔해 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
p14
"네 능력은 뛰어난 게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p19
'내가 통제할 수 잇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내 공간을 침해 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본능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누구는 세상으로부터 전면적인 인정, 사랑, 존경을 받고 싶어하고 누구는 세상에 전면적으로 헌신하고 싶어하지만 누군가는 광장 속에서는 살기 힘든 체질이기도 하다. 그걸 죽어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잇다. 그냥 레고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있는 거다.
p22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p23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p24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 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 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p26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p27
현대의 합리적 개인은 자신의 비합리성까지도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각자도생의 이기주의 전락하여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마저 저해할 뿐이다. 자기 이익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합리성이다. 이와 동전의 양면 처럼, 양보하고 타협하지 않는 개인의 이익이 지속가능하지 못하도록 '반대 인센티브'를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합리성이기도 하다.
p31
한국 사회는 이런 사회다. 실제 하는 일, 봉급도 중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번듯한지' '어떤 급인지' 가 실체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인 거다.
p32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큰 의미 없는 인연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한 학번이라도 위라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극존칭과 예우를 요구하며 군기를 잡는 시대착오적인 군대 문화가 대학사회에 만연하는 이유도 기성사회의 집단주의 문화를 흉내내고 서열주의를 내면화한 행태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이 아니라 소속 학교, 학과, 학번 등의 집단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위계질서에 개인이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문화가 젊은 세대까지 재생산되고 있다는 건 절망적인 일이다.
p36
학교, 직업, 외모, 사는 동네, 차종 등 모든 것이 서열화되어 있는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문화, 입신양명이 최고의 효도이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 여기는 가치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남들과 다르게 비치는 것, 튀는 것에 대한 공포, 이 집단주의 문화로 인한 만성적인 긴장과 피로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않았다.
p37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인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p41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p44
성취, 성공에의 열망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간다.
p45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정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
p46
조지 오웰의 1984 에서 인구의 2퍼센트에 불과한 지배계급인 영사(영국 사회주의) 내부 당원들이 13퍼센트의 실무자 중간계급을 동원하여 85%의 노동자 계급을 사육하는 도움ㄹ처럼 지성적인 사고의 싹을 잘라내며 온갖 선전선동과 공포의 조작으로 통치하듯 말이다.
p50
중병에 걸리면 최고의 대학병원을 찾아 최신 의술에 의지하면서도 왜 행복에 대해서는 최고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최신 연구 결과를 먼저 찾지 않는지다.
p52
서교수가 이야기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행복의 메커니즘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이다. 이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옛말의 지혜와 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대단한 성취나 환희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건 심오한 인생철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물체의 기본 메커니즘인 적응 때문이다. 한 번 맛있는 먹이를 먹었다고 영원히 동굴에 누워 그 즐거움만 만끽하다가는 굶어죽는다. 다시 사냥을 나가도록 등을 떠밀려면 지나간 쾌감을 잊고 새로운 쾌감을 좇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백억 원의 복권 당첨자 집단에 대한 추적 연구 결과 일 년 뒤에 이들의 행복감은 주변 이웃 수준으로 복귀했다. 이런 메커니즘 때문에 행복 전략에 있어 큰 것 한 방 보다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심리학의 연구성과다.
p54
가성비 좋은 행복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직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집착할 필요도 없다. 우선 자기 힘으로 생존하는 것이 생명체의 기본 사명이므로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자기가 선택가능한 직업 중 최선을 선택하여 생계를 유지하되, 직업은 직업일 뿐 자신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취미 활동, 봉사, 사회 참여 등 다양한 행복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춤 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반드시 백댄서가 되어 평생 춤만 춰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일하면서 동호회 활동으로 주말에 홍대 앞에 나가 춤을 춰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재능과 열망의 크기에 따라 합리적으로 선택하면 그뿐이다. 이런 식으로 위험을 분산하면 행복할 기회가 늘어나고 소소한 행복의 플랜B, 플랜C를 계속 만들어갈 수 있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과학에 따라
p56
원래 행복의 원천이어야 할 인간관계가 집단주의사회에서는 그 관계의 속성 때문에 오히려불행의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공감되는 얘기다. 맛있는 음식도 내가 원치 않을 때 강제로 먹으면 배탈이 나듯, 타인과의 관계가 나의 선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된느 것이 아니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되고, 의무와 복종의 위계로 짜이는데 이것이 행복의 원천이 될 리 없다. 갑을관계, 경쟁관계, 상명하복관계, 나를 평가하고 지배하는 관계, 내가 일방적으로 순종하고 모셔야 하는 관계에 있는 인간들이 과연 나에게 유용한 생존의 도구이기는 할까? 생존의 위협에 가깝지 않을까?
p57
행복에 관한 과학의 연구 결과 중 가장 씁쓸한 진실은,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소는 유전적인 외향성, 사회성이라는 점이다. 타고나길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 중독증 환자들이야말로 행복해지기 쉬운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문명은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이들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고민해야 한다.
p62
생물학적 수명과 사회학적 수명이 불일치하는 대책없는 고령화시대를 맞아 미래의 언젠가 무기력하게 방구석에서 종일 사극 재방송만 반복해서 보며 식구들에게 잔소리만 하게 되기 전에, 기력 있을 때 주변 정리하고 마지막 날까지 지구의 오지들을 걷는 여행을 떠나 길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계곡으로 떠나는 코끼리처럼, 이 얘기를 비장하게 했더니 마눌님이 가려면 혼자 가라고 그러시더라.
p95
사회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끊임없이 서로 대화한다면 더디더라도 옳은 방향을 행해 갈 것이라고 믿는다.
p104
'비동시성의 동시성'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전근대성, 근대성, 탈근대성이 공존하던 1930년대 독일 사회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특징이 같은 시대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내 대학 시절의 한국사회도 그랬다. 고도 성장기의 자본주의, 전체주의적인 군부독재, 전근대적인 가부장제 문화,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 이념인 20세기 초반의 러시아혁명 이론부터 20세기 후반 유럽의 후기 마르크스 주의, 심지어 또다른 전체주의인 주체사상까지 혼재했던 것이다. 결핍되어 있던 것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그 토대인 합리적 개인주의였다. '근대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근대를 그냥 뛰어넘고 다음 시기로 갈 수 없는 것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p107
스쿠버다이빙 사진전을 여는 변호사, 합창하는 판사, 무협소설 작가인 검사 ...... 법조인이라는 직업은 나라는 존재의 일부에 불과하다. 법조 내에서 한 줄로 서서 경쟁하고 낙오할 것이 아니라 가족, 친구, 취미를 같이 하는 동호인들, 함께 봉사하는 이들, 작지만 다양한 여러 사회 내에서 누구든 필오한 존재, 인정받는 존재로 살 수 있다.
p114
결국 취업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박탈감과 불안감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난을 '개인의 노력부족'으로 돌리며 자신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기에 그들보다는 낫다고 구분짓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그 누구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p115
대학 서열에 따라 인간의 능력, 태도 자체에 우열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선택한다.
p117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고 답한다. 일본이 지금보다 더 심각한 격차사회, 계급사회가 되면 역설적으로 행복지수 자체는 올라갈 수도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고도 성장기의 버블이 다 꺼진 지금,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없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는 얘기다.
p119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의 글이다.
나를 포하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 두터운 현재를 갖고 있지는 못하기에 서로 일깨워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주변의 친밀한 세계와 사회라는 커다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p136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 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p162
한 진영 내부에 생기는 작은 균열에서 변화의 지점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같은 진영 내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고 부드러운 '다른' 목소리들이다. 작은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선거와 같은 큰 세력 다툼의 시기를 전후하여 집단 내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코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 슬쩍 다른 길로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창하고 근본적인 해결책만 고집하지 않고 당장 개선가능한 작은 방법들을 바로 적용했고, 작지만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켰다. 영웅은 이런사람들이 아닐까.
p166
경영자야말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그 인재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는 조직 내 관료주의의 벽을 부수는 능력, 그리고 더 중요한 능력이 있다. 사람들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능력이다.
p200
반대로 실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것은 무조건 옳다고 보는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실은 그 반대가 맞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식재료도 자연 상태 그대로는 독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먹는 것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 인위적인 종자 개량을 통해 먹을 수 있게 만든 것들이다. 인류는 자연 상태의 폭력성을 문명화 과정을 통해 극복하여 현대적인 평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은 지금의 발전한 문명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에 따라 옳은 것은 더욱 북돋우고 그릇된 것은 제어해야 한다.
p207
하긴 정신연령이 낮은 나 역시 굳이 무슨 주의자인지 물으신다면 모든 집단주의를 혐오하는 '전투적 개인주의자'이며, 이념보다는 태도가 후진 사람, 그리고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을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
p208
이념 문제가 아닌 것을 이념 문제회하는 강박증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 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광속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둘째, 삼인성호, 몇몇이 떠들어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몇몇 소소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 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다보면 마치 이 사회에 진짜 심각한 이념 대립이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생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인류는 속을 만큼 속았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다.
p213
인간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감시다. 눈먼 의리가 아니다.
p222
많은 한국 교민들이 흑인 거주지역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자녀의 아이비리그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돈이 벌리기 때문이다. 돈이 벌리는 이유는 이곳이 경쟁 없는 독장시장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장사하려는 백인들은 없다. 이 지역에서 장사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흑인도 없다. 미국 전역에 널린 것이 타깃, 월마트 같은 대형 마트들이지만 이들은 거기까지 타고 갈 차가 없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슈퍼마켓에서는 대형마트들과의 경쟁 따위 의식할 필요 없고, 받고 싶은 만큼 값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빈민 집단거주지역에서는 술, 담배, 복권이 워낙 잘 팔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시에서 주는 지원금만으로 살아가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의 집단거주 영세민 아파트의 슈퍼마켓은 의외로 이문이 쏠쏠하다고 한다.
p228
진보, 보수, 좌파, 우파. 결국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 문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다층적인 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귀한 것 같다.
p230
인도네시아의 우익 세력인 '프레만'과 '판차실라 청년단'이 국가적 살인을 거들었다. 숙청은 이듬해인 1966년까지 이어졌고, 희생자만 최소 백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p235
악을 행하는 악마보다 선악 구분조차 없는 백지 상태의 야수가 더 무섭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성찰할 줄 모르는 무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야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야수를 문명의 굴레에서 풀어준 것은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이다.
p244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보적이고 자유를 희구하는 민중'의 이미지는 지식인들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자유, 가치상대주의, 다원주의 등의 서유럽적 가치는 엘리트, 중산층들의 선호이고, 서민들은 윤리적 보수주의, 종교적 원리주의, 배타적 민조주의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p246
대의제,법률보다 개정이 어려운 헌범, 권력 분립과 견제, 표현의 자유 보장.... 하지만 이런 장치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폭넓ㅅ게 공유하는 것이 주요하다. 이를 내면화하려면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고, 잘못된 생각들과 싸워야 한다.
p269
우리 사회는 '결과책임론'이 지배하는 사회다. 물론 이런 가정이 무의미할 정도로 현실에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준 자들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이런 문화가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책임자를 결정장애와 도피심리로 몰아넣는 측면이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고 본다. 영미식의 실용주의 가치관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전제 아래 해야 할 의무를 다 이행했다면 과감하게 면책한다. 결과가 제 아무리 중대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지게 하는 사회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p275
슬로빅에 따르면 일반인이 체감하는 위험도는 양적지표보다는 결과의 끔찍함 정도, 자신의 지식 범위 밖에 있는 미지의 정도, 위험에 노출되는 사람 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고 한다. 치사율이 높다고 알려진 신종 전염병은 이 세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한다. 한국인이 미개해서 메르스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다.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구조에 기인한 공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