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배경 소개

 

[아우슈비츠],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가 바로 그곳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 간의 체험을 기록한 <이것이 인간인가> 에 대한 글을 남겨 보려고 합니다.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감내한 공포를 세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책의 겉표지에는 희미한 세로 글씨로 이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 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엇이 기억할 힘도 없이

두 눈은 텅 비고 자궁은 한 겨울 개구리처럼 차디찬 이가.

 

그리고 겉표지에는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작품이 등장합니다.

콜피츠는 1차 세계대전에서 둘째 페테를 잃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똑같은 이름의 손자를 잃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합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하는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고통 받는 짐승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극단적이며 강력한 슬픔을 보여줍니다.

 

 

책의 겉표지의 글귀와 그림에서 부터 인간이 겪게 되는 처참함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이 작품의 배경인 그 공간 아우슈비츠는 어떤 곳이었는지 먼저 잠시 살펴 봅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이 유럽에 있는 유태인들의 대거 학살을 그 목적으로 하는 '최종적 해결'이라는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세운 여섯 군데의 강제 수용소 중에서 그 본부 격이며, 또한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원래는 1940년 나치 독일 점령군에 의해 처음에는 폴란드인, 이후에는 소련군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곧 여러 다른 민족들을 모두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이곳은 본격적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수용소로,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아우슈비츠 1'이라는 이름의 최초 수용소는 본래 폴란드의 정치범들을 수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점차 다른 수용소들의 행정 본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2'(비르케나우)는 중심적인 집단 학살 수용소였으며, 80만 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한 장소이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3'(모노비츠)은 특수 노동 수용소로, I. G. 파르벤 합성 고무 공장과 석유 추출 공장에 강제 노역을 제공했다.

 

1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살당했으며 그중 90퍼센트가 유태인이었다. 수용소에서 주된 살해 도구로 사용된 것은 치클론-B라는 독가스였으나, 과도한 노동, 굶주림, 구타, 이유 없이 행해지던 사격으로 인해 죽은 이들도 많았다.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은 요제프 멩겔레 박사가 실시하던 생체 실험은 특히 끔찍스러웠다. 1944년 말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진격해 오자 수용소는 문을 닫았다. 오늘날 수용소의 잔해는 유적지가 되었다. 아우슈비츠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인간의 가치와 이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로부터 선포되었던 유네스코 규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 네이버 지식 백과                                                           

 

 

 

책 속이야기

 

프리모 레비는 1943년 12월 13일 스물네 살의 나이에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었습니다. 이유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파시즘에 대해 강고한 저항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만든 '정의와 자유'라는 단체의 유격대를 조직하는 일에 참여한 혐의였습니다.

 

체포된 레비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차에 태워지고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수용소로 이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SS대원이라고 불리어지는 히틀러친위대원들이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손가락으로 보낼 곳을 정합니다. 이 손가락 하나로 누구는 자신이 왜 죽어야하는지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힘겨운 노동을 위해 노동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이렇게 레비도 노동수용소인 아우슈비츠3 모노비츠에 들어가게 됩니다.

 

p28

이제 2막이 시작된다. 면도기, 비누솔과 가위를 가진 남자 네 명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다. 줄무늬 바지와 상의를 입고 있었고 가슴에는 숫자가 박혀 있다. 이 사람들도 오늘 저녁 봤던 그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까? 하지만 이 사람들은 건강하고 생기가 있다. 우리는 많은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붙잡아 순식간에 머리를 밀고 면도를 시켜버린다. 머리카락이 사라진 얼굴들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네 남자는 이 세상 언어가 아닌 것 같은 말들을 한다. 물론 독일어는 아니다. 나는 독일어를 조금 알아들을 수 있다.

마침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우리는 모두 그 문 안에 갇힌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알몸으로 서있다. 발이 물에 잠긴다. 샤워실이다. 안에는 우리 밖에 없다. 차츰 놀라움이 사라지면서 말을 하게 된다. 모두 묻기만 할 뿐 대답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샤워실에 알몸으로 보내졌다면 그건 샤워를 하라는 뜻이다. 샤워를 하라는 것은 아직 우리를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우리를 왜 세워두는지, 왜 마실 것을 주지 않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신발도 옷도 없고, 모두 알몸인 채로 발을 물에 담그고 잇다. 닷새 동안 여행을 하고도 앉을 수조차 없다.

 

p35

해프틀링(포로), 나는 내가 해프틀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 문신을 지니고 살게 될 터였다. 문신을 새길 때 약간의 통증이 있었다. 그 일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모두 한 줄로 선 뒤 우리 이름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짧은 바늘이 달린 일종의 펀치 같은 것을 든 능숙한 직원 앞을 지나갔다. 이게 진짜 시작 같았따.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받을 수 있었다.

 

체포되어서 5일 동안 기차를 통해 수용소에 오게 된 사람들은 이렇게 머리를 박박밀고 왼쪽 팔뚝에 번호를 새깁니다. 바로 그것이 이제부터 그들의 이름을 대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두 가지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돼지 고유 식별번호를 불에 달궈 찍고 도축 후 씻는 모습과 나머지 하나는 군대 훈련소에서의 유격훈련입니다. 그때도 이름이 붙는 자리에 번호가 대신 붙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올빼미라고 합니다. 대답은 네, 아니오가 아닌 악! 하는 소리였습니다.

 

이는 어쩌면 이제부터 인간대접을 해주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개개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일을 하는 해프틀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마주할 상대가 아닌 노동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루 이틀 지나가고 노동을 하고 수용소에서 할 수 있는 일, 해서는 안되는 일에 대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은 환경에 적응해갑니다. 이렇게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한 편으로는 너무나 불쌍하고 아쉽고 한 편으로는 너무나 다행입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을 기대하고 하루하루 이렇게 버티어 나가는 것이 너무나도 다행입니다.

 

P45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 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상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로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어 나갑니다. 그 힘겨운 날들 속에서도 어떤 이들은 타인을 위해주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켜나갑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 속에서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아둥바둥하고 타인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극한의 추위와 공포에 휘말리게 되면 타인이 아닌 자신만이 살기 위해 아둥바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의문에 답해 줄 수 있는 이들이 분명 존재하고 그들을 보며 충분히 살아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P58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하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P187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러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내용은 예전에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도 그렇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도 저런 상황이면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가해자가 될 수 있는가? 와 같은 가해자로서의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놀라움이 하나이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피해자이지만 삶의 주체자인 이들의 내적 강인함에 대한 놀라움이 그 나머지다. 어쩌면 이 두가지 질문은 살면서 가끔씩 다시 한 번 고개를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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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소설은 2010년 10월 27일에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26일에 끝난 작품이다. 정확히 두 달 만에 쓴 장편소설이다.

두 달 동안 나는 계속 항암치료를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손톱 한 개와 발톱 두 개가 빠졌다. 아직도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원고지에 만년필로 소설을 쓰는 수작업을 고집하기 때문에, 빠진 오른손 가운데 손톱의 통증을 참기 위해 약방에서 고무골무를 사와 손가락에 끼우고 20매에서 30매 분량의 원고를 매일같이 작업실에 출근해서 집필하였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었는지 나로서도 불가사의하다.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경외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만큼 창작욕에 허기가 진 느낌이었고 몸은 고통스러웠으나 열정은 전에 없이 불타올라 두 달 동안 줄곧 하루하루가 '고통의 축제'였다.


소설 속 이야기


토요일 아침 K는 알람소리에 눈을 뜬다. 분명히 토요일에는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 알람소리가 울린다. K는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날 아침 K는 거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내, 딸, 스킨(그는 V라는 스킨을 쓰는데 그날 아침 서랍에는 Y라는 스킨이 있다.), 강아지도 어제까지의 익숙했던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 였다.


K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중요한 휴대폰도 어제 이후로 보이지 않는다. K는 잠시 어제 무슨일이 있었는지 기억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기억에 공백시간이 있음을 알아낸다. 그 공백시간과 낯섦이 어떤 이유에 생겼을까? K는 하나하나 곱씹는다. 친구인 정신과의사 H(금요일 술을 같이 먹은 친구)의 조언에 따라 낯섦을 벗어나기 위해 몇 년만에 누나를 찾기도 한다. 


이렇게 주위의 낯섦을 경험하면서 K생각한다. 무엇인가 제3의 절대자나 빅브라더가 그를 조정하려고 한다. 그의 주변인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K가 알던 이들이 아닌 다른 낯섦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K는 생각한다. 다른 이들이 낯선 이유는 반대로 내가 내가 아닌 것이 아닌가? 내가 어제의 K가 아닌 다른 K가 아닌가? 의심해본다. 그러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누나를 만난 후, 그는 또다른 자신이 있음을 생각하고, 찾아나선다. 그곳에서 그는 K1을 본다. 그와 동시에 K는 K2가 된다. K1은 K2 자신과 동일한 인물이었다. 같은 얼굴, 목소리, 필체에 K2는 놀란다. 하지만 직업, 성격, 말투는 서로 다르다. K1도 얼마 전에 자기 주변에 대한 낯섦을 느끼고 집을 나와서 방황하고 있다고 한다. K2와 주변 환경만 다를 뿐 같은 상황인 듯 하다.


이렇게 낯섦을 느끼고 그 낯섦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내려고 동분서주하고  예전의 익숙함을 찾으려는 토요일, 일요일 지나가고 월요일이 된다. 월요일 아침에 씻고 스킨을 본다. 이번에는 V도 아닌 Y도 아닌 D다. 아직 낯섦이 이어진다. 그리고 출근길에 이르고 지하철 에스칼레이터에서 지난 주말에 보아오던 자신이 만났던 이상한 이들, 마치 그를 감시하려고 했던 이들이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듯이 영화의 몸신처럼 하나 둘씩 나타난다. K는 낯섦과 익숙함을 느낀다.


지하철역에서 한 여자 아이가 세일러문 복장을 하고 있고 그 봉을 지하철에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것을 주으러 간다. 열차는 들어오기 시작한다. K는 세일러문의 손을 잡고 올리려 한다. 잘되지 않는다. 열차가 다가온다. 기진하여 더 이상 체력이 없다. 어느 순간 손게 갑자기 힘이 더해진다. 레인저인 K1이 K2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마침내 하나의 '나'로 합체한다.


마지막 장 (P378)

나는 곧 '나'가 되었으며, K1과 K2는 합체하여 온전한 하나의 'K'가 되었다. 온전한 K는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알파, K를 낳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들이 태어나기 전의 태초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오직 말씀만이 존재하던 카오스의 신세기이자, 오메가의 천국이었다.


소설을 읽고 나서


이야기의 구성은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이렇게 3일 동안의 가간을 설정해서 진행이 된다. 금요일 저녁 친구인 H와 술을 먹고 공백이 생긴 그 시간을 찾아나서면서 이야기는 진행은 된다. 낯섦이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반복되지만 어느 순간 그 낯섦이 익숙함이 된다. 하루 하루가 지나갈때 화장실에 가는 것, 면도를 하는 것 등의 전개방식을 그대로 표현한다. 마치 토, 일, 월요일의 시작이 반복됨을 말하듯이 이야기 구조도 처음에는 동일하다. 동일하지만 스킨이 다르고, 무엇인가는 조금씩 다르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을 표현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등장인물은 소설 속에 특별한 이름이 없다. 단지 K,H,JS,MS,아내,장인 이렇게 표현될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주도하는 K외에는 정체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은 일방적으로 제3자의 눈으로 K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주도한다. 어쩌면 K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이야기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닌 주변인인 듯 하다. 아니 어쩌면 K 역시 본질은 아닌 듯하다. K가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은 결국 마지막 장 K1과 K2가 K가 되는 그 시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단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어쩌면 이것들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하나이지만 두 모순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 한 인간 속에 존재하는 선과 악인 지킬박사와 하이드, 자신이 또다른 자신과 직면하게 되는 도플갱어, 나는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원을 그리고 있는 링반데룽


◇ 뫼비우스의 띠

독일의 수학자 A.F. 뫼비우스가 처음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뫼비우스의 띠라고 불리는 기하학적 모형좁고 긴 직사각형의 종이를 180도로 한 번 꼬아 끝을 연결하면 동일한 위상에 기하학적 성질을 가진 곡면의 형태가 완성된다이 띠에는 여러 특성이 있다띠 안쪽에서 선을 칠해 나가면 안쪽은 전부 칠해지지만 바깥쪽은 칠해지지 않는 양측곡면과 띠의 바깥쪽에서 칠해나가면 아쪽까지 모두 칠해지는 단측곡면의 두 모순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따라서 뫼비우스의 띠는 안쪽과 바깥쪽의 구별이 없으며 좌우의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단일경계를 갖추고 있고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지킬박사와 하이드

한 인간 속에 선의 화신 지킬박사와 악의 화신 하이드가 동시에 존재하는 스티븐스의 소설악한 본성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여 악의 화신으로 만들 수 있고선한 본성을 더 순수한 선으로 만들 수 있는 야물을 발명한 지킬박사는 금지된 반사회적 쾌락을 취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고 살인을 저지른다마침내는 약물을 복용하지 않아도 하이드로 변신하는 비극적인 이 작품처럼 레인저는 ’ 속에 들어 있는 하이드의 형상이며, K2는 속에 깃들어 있는 지킬의 형상인가아니다레인저가 자신의 말대로 불운한 인생을 살아온 범죄자라 할지라도 악의 상징인 하이드로 지칭할 수는 없으며, k2가 지금껏 단 한 번의 경범죄조차 저지르지 않은 무죄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선의 상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왜냐하면 레인저는 곧 K2이며, K2는 곧 레인저이기 때문이다.


◇ 도플갱어 (doppelganger)

독일어로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분열된 또다른 자기 자신의 생령을 보는 심령현상을 말한다타인은 볼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하나의 ’, 그렇다면 K2는 지금 또 하나의 자기 자신과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영혼이 영과 혼으로 나누어져 있다면레인저의 분신복제이자 영인 K2는 지금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는 원형질의 혼인 레인저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 링반데룽

악천후로 인해 시야가 불분명한 경우에 제대로 목표 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원을 그리고 같은 곳을 되풀이해서 돌고 잇는 환상방황 같은 것이었까뫼비우스의 띠를 기어가는 개미처럼 안쪽에서 출발하였으나 바깥쪽을 통과하여 다시 안쪽으로 단측곡면의 행진을 계속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 속의 한 찰나였을까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굉장히 흥미롭게 읽혀진다. 그리고 무엇인가 판타지적이고 환상적이다. 하지만 그 속에 인간에 대한 고민이 무수히 녹아들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란 싶지 않다.

이 책을 읽어내려갔고 이렇게 정리했지만 나 역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다시 한 번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서서히 종착점에 다다름을 느끼면서 글을 써내려간 이의 정신 속에서 나오는 글에는 무엇인가 더 의미 심장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한 번 작가 최인호의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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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되면서 나에게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가끔씩 책을 들춰보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2년 전인 것 같다.  그 때는 무엇인가 마음이 공허했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하는 이런 저런 고민에 빠져들었던 시기였다. 아마 그때 차 안에서 소리도 질러 보고 눈물도 흘려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 당시에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있었다. 바로 자기를 선생님이 아닌 누나, 언니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던 한비야 누님의 <그건, 사랑이었네> 라는 책 한 권이었다. 그 책에는 한비야 누님이 고등학교 1학년 때 단짝 친구 영희와 '올해부터 죽을 때까지 1년에 백 권 읽기' 라는 약속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생각했단다. 사람들이 어제 본 스포츠, 영화 얘기를 하듯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제 읽은 책이야기를 하기를 원한다고. 


그 당시 혼자 생각했었다. 나도 한 번 해볼까? 그렇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갔다. 그렇게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올해가 3년 째가 되었다. 어느 순간 부터 가방 속에는 한두권의 책이 있었고, 때로는 버스에 내리기 직전까지 한 구절을 더 읽으려고 노력했고, 몇 페이지 안 남았는데 집에 다 도착해서 문 앞에서 잠깐 나머지를 읽고 들어가기도 했다. 나 자신도 신기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소유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읽은 책은 가지고 있고 싶었다. 분명 나중에 한 번 더 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지만 내 방 한 칸이 책으로 쌓여지는 그런 기분이 좋았고 책꽂이를 꽉 메운 책들을 볼 때 마다 무엇인가 마음이 놓였다. 마치 예전 어머니들이 김장과 연탄을 준비하면 마음이 놓였다는 듯이 나 역시 무엇인가 뿌듯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으면 뭐가 좋은가?, 내 인생이 변할까? 지금 내가 무조건 많이 읽으려고 하는게 과연 나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하나씩 생기게 되었다. 아직도 이 질문들이 지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인 것 같다. 책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다들 그런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안상헌 작가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이 나의 고민에 대한 해결은 해주지 못했지만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고, 아! 하고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다.그동안 내가 그저 책을 읽기에만 그쳤구나! 라고 생각했다. 책의 글자를 그냥 무심히 읽기만 했구나. 그 안의 금맥은 찾지 않고 그저 검정 잉크만을 눈으로 훑지는 않았는지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문학 공부법>에서는 독서와 공부에 대한 이런 저런 경해와 우리가 흔히 인문학이라 말하는 철학, 문학, 역사 에 어떻게 접근해서 독서를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 새로운 문장을 얻어야 한다.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새로운 문장을 얻어야 한다. 인문학 공부는 이런 문장을 얻게 해준다. 그것이 책에서 직접 얻은 것이든 읽은 것을 유추해서 얻은 것이든 새로운 문장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문장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주고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문장에 빠질 필요가 있다.


◆ 스스로 질문을 찾아내고 답하는 것

먼저 중요한 질문을 찾아내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봐야 한다. 이것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책을 읽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훈련하는 과정이 되려면, 읽으면서 질문하고 그것에 답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이다. 책에는 핵심이 되는 질문들이 있다. 그 질문을 찾아내고 답을 생각해보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일이다. 그러면서 독서 능력이 향상된다.


◆ 읽고 배운 것의 실제 생활에 적용

책을 한 권 읽은 후에 단 한 줄이라도 깨달음을 주는 문장이 있거나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단락을 만난다면 그것이 훌륭한 독서라고 믿는다.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적용하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살아있는 것이 되려면 큰 욕심을 버리고 배운 것들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식을 쌓아두는 것으로는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사용하고 또 사용해서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


◆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한 내적 고민

철학은 무엇일까? 강단히 말하면 세상을 밝히는 학문이다. 조금 자세히 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각을 키워주는 학문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워 자기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철학을 하는 목적이다.


◆ 문학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느끼는 것

문학을 읽을 때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순간이나 갈등에 봉착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하는지를 잘 살피는 것이 좋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빨리 넘어가기보다는 갈등의 순간에 더 머무르면서 문장을 천천히 읽어야 한다. 그래야 문학을 느낄 수 있다. 문학의 목적은 느끼는 것이다. 느껴야 감동할 수 있다. 느껴야 울 수 있고 웃을 수도 있다. 문학을 읽으면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한다면 도대체 왜 읽는 단 말인가! 그러자면 갈등과 변화의 순간을 주인공과 함께해야 한다. 이야기만 파악하기 위해 읽어서는 큰 감동을 얻고 주인공과 함께 느끼며 살기는 어렵다.


◆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통찰력으로 살아있는 역사 공부

공부에는 죽은 공부가 있고 살아 있는 공부가 있다. 죽은 공부는 단순한 사실들을 머릿속에 담아 두는 것이고 살아 있는 공부는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에는 필연성이 있다. 어떤 사건에는 그것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표출되는 모양은 다를지라도 모순이 표출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살아 있는 공부는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발견하게 해주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준다. 죽은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저 텍스트를 읽어내리는 독서였다면 이제부터는 스스로 가치있는 질문을 하며 그 질문을 곱씹으며 지금의 소중한 삶에 사소하더라도 한 걸음 내딛는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듯 하다.


독서는 다만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며,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 존 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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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과 영영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철학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philosophy - is the study or creation of theories about basic things such as the nature of existence, knowledge, and thought, or about how people should live

철학은 우리 인간 자신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 그리고 인간들 내부의 생각에 대해 다루는 학문인 것이다. 


최근에 '삶이란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글귀를 보면서 내가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기도 하였고, 얼마 전 작고하신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의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책에서 철학에 대한 세대별 해야 할 것을 보면서 한 번쯤 철학에 대해 살펴볼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구본형 선생은 철학에 대해 세대별로 "30대는 철학사를 뒤적여 가장 매력적인 철학자 한 '분'을 골라라. 그 '분'에 관한 책 두 권을 정독해 그 '놈'으로 만들어라. 40대는 자신의 철학을 가다듬어라. 차용한 철학으로는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길을 갈 수 없다. 50대는 자신의 철학을 이웃과 조직에 나누어주어라. 철학이란 삶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다." 라고 표현했다."


바로 지금까지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연구했던 철학자들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고 거기에서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하나씩 나를 바꾸어나가고 후에는 바람직한 내 삶의 철학을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도록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말인 듯 하다.


아직도 철학하면 동양의 공자, 맹자, 노자, 서양의 플라톤, 소크라테스 밖에 떠오르지 않으며 현대의 척학자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형편이라 예전에 사두고 이상하게 손에 잡히지 않았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손에 잡았다.


책에는 48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하나 다 깊이 스며드는 내용이었다. 단지 한 번 읽어보고 글로 똑같이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방식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P25 - 니체의 영원회기

니체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리는 없다. 순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삶이 비겁하다면 우리는 자신이 10만 년 주기로 지금까지 비겁했다는 슬픈 과거를,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10만 년 주기로 비겁하리라는 슬픈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P39 - 페르소나

맨얼굴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불행히도 맨얼굴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벗는 순간 망가진 맨얼굴을 볼까 두렵기 때문이다.


P56  - 인내천

개체에 내재하는 신적 생명력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고 불렀다면, 최시형은 한울님, 즉 천주라고 부른다. 흥미롭지 않은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자를 긍정하는 초월적 사유를 부정하자마자, 인간 내부에 잠재한 생명력을 긍정하는 내재적 사유가 전개된다는 사실이 말이다. 서양의 스피노자, 그리고 우리의 동학이 중요한 이유는 두 사유 전통이 공통적으로 인간이 직면하는 난제를 초월자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문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P83 - 생각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이데거라는 현대철학자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존재와 시간]이란 유명한 철학책을 썼던 이 독일 철학자는 인간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과연 언제 사유하게 되는지를 숙고했다.


P89 - 돈오

지눌의 눈에는 당시 고려의 선승들은 자신들이 왜 치열하게 정진해야만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맹목적인 수행만을 일삼고 있는 원숭이들로 보였던 것이다. 수행을 하기 이전에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지눌의 문제의식이었다. 왜 우리는 고통에 빠져 사는가, 왜 고통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어떻게 하면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가, 그리고 고통이 해소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게되는가? 우리는 자신의 실존적 상태나 수행의 방향을 지적으로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P106 - 진인사대천명

'사람의 일을 모두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유명한 구절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난 뒤, 조용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태도,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


P222 - 아우라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그리고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253 - 스펙터클사회

스펙터클 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상품에 대한 시각적 감각을 제외한 일체의 현실 감각을 박탈해버린 거대한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스펙터클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기억 속에 잡아두고 싶었던 내용이 너무나 많았고,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진 내용도 있었다. 라캉, 라베송, 하이데거, 지눌, 장자, 스피노자, 벤야민, 리오타르 같은 철학자에 대해서 한 번 더 그들의 생각을 알고 싶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폴 부르제의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과 지금의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인간스러움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남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하나의 부속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는 자명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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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 : 조선 건국의 주역, 요동정벌을 준비하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 태조 이성계 : 조선의 창업자로서 초대 임금, 아들의 반란으로 권력을 잃는다.

▷ 남은 : 왕자의 난 때 살해된다.

▷ 신덕왕후 강씨 : 자신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비극을 부르고 만다.

▷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 : 모두 왕자의 난 때 살해된다.

▷ 정종 : 얼떨결에 왕이 된 격구 마니아

▷ 홍무제 : 명의 초대 황제, 조선 정국을 뒤흔들어놓는다.

▷ 이방원 : 태조의 5남,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다. 태종

▷ 하륜 : 이방원의 핵심참모로 왕자의 난을 기획했다.

▷ 이방간 : 태조의 4남으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지방으로 추방된다.

▷ 이방원의 부인 민씨, 이숭인, 원천석, 길재, 변중량, 이무, 박위

▷ 왕자의 난 주요 공신들 : 이숙번, 이저, 이거이, 조영무, 민무구, 민무질



▶ 고려에서 조선으로


태조는 새 왕조를 함께 이끌어갈 내각을 구성, 발표한다. 배극렴, 조준, 정도전, 김사형, 남은, 이화, 이지란 등 철저한 공신 위주의 친위내각이었다. 그리고 명의 홍무제에게 나라 이름을 선택해 달라고 요청한다. (조선, 화령 중 하나로)


▶ 절개를 지킨 사람들


정도전, 남은, 조준이 청하기를 정몽주와 한때를 이뤄 태조세력을 몰살시키려 했던 이색, 우현보, 설장수 등 56인은 극형을 처해달라 요청한다. 이에 태조는 곤장형으로 하라고 하는데 정도전을 곤장을 치대 살아서는 안된다고 지시한다.

이렇게 떠난 이 중에는 도은 이숭인, 이종학, 김진양, 우홍수 등 8명이나 되었다. 


도은 이숭인은 14세 어린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16세에 대과에 합격한 수재이며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높였으며 중국과 관련된 외교문서는 거의 그의 손을 거첬다고 한다. 그는 스승 이색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고 젊은 날엔 정도전과 막역한 사이였으나 정도전과의 정치적 입장 차이로 결국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종학은 이색의 둘째 아들이며, 우홍수는 보수파의 수장 우현보의 아들이다. 이때 우현보는 아들 셋을 잃는다.

반 역성형명 진영의 정신적지주인 이색의 경우는 태조의 배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후 태조가 불러 도움을 요청했으나 목은 이색은 강력히 거부한다. 태조는 그런 이색을 죽는 날까지 존중해주었다. 1496년 신륵사에서 69세의 나이를 세상을 뜬다.


야은 길재의 경우는 정몽주의 후배이자 제자이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적이 있는 태종이 훗날 벼슬을 주려하나 소신을 밝히고 낙향한다. 낙향 한 후에는 후세 교육에 힘써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 제자의 제자.. 들이 힘을 길러 장차 조선의 주인인 사림이 된다.


[길재의 시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운곡 원척석의 경우는 고려가 멸망할 기색이 보이자 치악산에 들어가 운둔했다. 한때 그에게 배운 바 있던 태종 이방원이 벼슬을 주려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고려말의 정치적 격변을 기록한 책6권을 남겼는데 전하지 않는다.


[원척석의 시조]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신규, 조의생, 임선미, 서중보 등 수십 명은 벼슬을 버리고 개경 북쪽 두문동이란 골짜기에 들어가 운둔했다. 이들은 끝끝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니 이들을 일러 '두문동 72현' 이라고 했다. (두문불출)


▶ 공을 세운 사람들


배극렴, 김사형의 경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편에도 분명하게 가지 않은 중간파 그룹의 원로들인데 태조는 그들을 1등 공신으로 책봉한다. 이는 새나라가 측근들만의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어 중간파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개국공신들에게 주어진 포상은 1등공신(토지150~220결, 노비15~30명), 2등 공신(토지100결, 노비 10명), 3등공신(토지70결, 노비7명) , 왕자들에게 과전 100결이었다. 과전이란 해당 토지에 대한 수조권, 즉 나라 대신 세금을 거두어 쓸 권리인데 세금은 수확의 10%이다. 하지만 개국공신들에게 주어진 토지는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땅이었다.


공신을 세우면서 태조의 아들들은 불만을 가지게 된다. 

태조가 후에 신의왕후로 불리게 된 한씨와 열 다섯에 결혼해 6남 2녀를 낳는다. 첫째 이방우(진안군), 둘째 이방과(영인군, 정종), 셋째 이방의(의안군), 넷째 이방간(회안군), 다섯째 이방원(정안군, 태종), 장녀 경신공주, 차녀 경선공주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볐으며 개국과정에서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


▶ 세자 책봉, 비극의 씨앗을 품다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은 권문세족 강윤성의 딸로 개국과 함께 현비에 봉해진 신덕왕후 강씨다. 그녀는 태조와 2남 1녀를 낳았는데 방번(무안군), 방석, 경순공주 였다.


조선을 건국하 고 태조는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을 불러 정식으로 세자 문제를 제기하는데 평화로울 땐 장자로, 어지러울 땐 공이 큰 아들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태조는 방번을 세자로 하나 한다. 며칠 뒤에는 대신들의 의견으로 방석으로 세자를 바꾼다.


왕조국가에서 후계, 곧 세자를 세우는 일은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문제다. 장성한 형님들을 제쳐두고 나이 어른 막내 방석을 세운다는 것은 원칙에서 벗어난 무리한 수였다. 신덕왕후 강씨의 욕심은 이해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태조와 정도전은 왜 방석을 태자로 삼았을까?


정도전이 생각하는 조선은 안정적인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군자의 나라이다. 바로 재상중심주의 정치이다. 왕은 재상에 대한 인사권만 갖고 실제 국정의 주요 문제들은 능력과 도덕이 검증된 우수한 재상들이 책임지고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지나치게 똑똑한 정안군(방원) 보다 방석이 세자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태조나 정도전의 생각이 어떠했건 방석은 세자로 책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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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이성계 - 변방 출신의 무장, 대중적 인기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세운다.

정도전 - 신진 사대부, 급진 개혁파의 기수로 이성계와 역성혁명을 이뤄낸다.

공민왕 - 고려의 재건을 꿈꾸었던 개혁 군주, 개혁히 실패한 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신돈 - 승려로서 공민왕을 도와 과감한 개혁정치를 펴 나가다 역모 혐의로 참수된다.

이인임 - 공민왕 사후, 우왕의 후견인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친원 보수정책을 폈다.

최영 - 전쟁영웅,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실각한 뒤 참수된다.

정몽주 - 역성혁명을 막기 위해 공양왕과 손잡고 이성계 세력과 대립하다 피살된다.

공양왕 - 고려의 마지막 왕

이색 - 고려말의 대 유학자로 역성혁명에 반대하였다.

이안사 - 이성계의 고조

이자춘 - 이성계의 아비

조민수 - 위화도 회군을 함께 했다.

조준 - 이성계의 왼팔

이방원 - 이성계의 5남


◆ 이안사 - 이자춘 - 이성계


고려 후기 1250년대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는 전라도의 가장 큰 고을 전주에서 삼척으로 간다. 이유는 당시 관기 때문에 고을 수령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북쪽 끝인 동북면으로 간다. 당시 전주에서부터 이안사를 따라나선 이가 170여 가구에 달한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래도 이안사가 어느정도의 리더십을 갖춘 인물임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안사는 당시 동북면에서 어느정도의 세력으로 성장을 하고 몽고(원제국)으로 부터 관리가 된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가문의 명운을 건 결심을 한다. 당시 원제국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폐망의 그림자가 비춰지면서 이자춘은 개성으로 간다. 고려를 등진 지 100년 만에 이안사의 후손은 다시 고려 국적을 되찾는 것이다.

고려로 돌아온 이자춘은 공민왕의 밀명에 따라 원이 빼앗아 쌍성총관부를 두고 통치해 오던 동북면 지역을 되찾기로 하고 고려군의 공격에 내응하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은 동북면의 유력자에서 유일 패권자가 되었고, 원에 투항했던 반역자 집안에서 왕이 직접 하사한 집에 사는 공신의 가문으로 거듭나게 된다.


◆ 공민왕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11세에 볼모가 되어 원나라로 가서 10여 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또한 공민왕의 평생의 연인인 원나라의 노국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에 원나라는 그들의 지역정세에 따라 고려가 그들의 입장에서 안정될 필요가 있어서 그 인물로 공민왕을 선택하고 어린 충정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촌인 공민왕을 왕으로 세웠다.


예상과는 다르게 왕에 오른 공민왕은 친원세력인 권문세족의 수장인 기철과 그 일당을 숙청한다.

기철은 원제국 황후인 기황후의 올아비다. (공녀로 원나라 끌려와 원제국의 황후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당시 공민왕의 개혁에 기득권 세력은 반발했으며 원의 급격한 약화에 따른 동북아 정세의 혼돈이 결정적으로 공민왕의 앞길에 장애가 되고 있었다. 원에 반기를 든 한족 반란부대의 한 갈래인 홍건적이 원의 토벌에 밀려 쫓기다가 고려에 쳐들어오게 되고, 차례로 여진, 원, 왜구들이 고려를 침범하게 된다.


◆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는 아비와 함께 5년을 개경에서 머물고 동북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361년, 고향으로 돌아온 이자춘은 세상을 뜬다. 그 해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까지 함락시킨다. 이에 궁성을 비우고 줄행랑을 쳤던 조정은 병사를 모집하여 수도탈환작년을 전개하는데 이때 이성계도 가병 2,000병을 이끌고 참여한다.


당시 이성계는 2,000명의 가병으로 그 몇 배의 전공을 세우고 가장 먼저 동대문을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홍건적의 수장 및 장수의 목을 베었다. 이를 계기로 무명의 이성계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에 원나라의 장수도 물리치면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당시 고려의 권신으로 공민왕에게 원한이 있던 최유가 원나라의 기황후를 설득해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로 들어간다. 이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군은 초반에 기세가 밀렸으나, 이성계 부대의 활약으로 크게 물리치고 불채의 명장으로서 위신과 명성도 높아졌다.


◆ 혁명의 씨앗 - 목은 이색


고려 말의 대유학자, 목은 이색은 14세의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나라 과거에 응시 1,2,3차 시험에 각 1,1,2등을 한 당대의 수재이다. 모친의 연로를 이유로 그가 귀국하자 그의 집엔 공부를 하려는 새싹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고려 최고의 명문 학원이 되었다. 후에 신진사대부라 일컬어 지는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윤소종 등이 다 이색의 후학들이었어다.


그들은 100년에 걸친 무신란과 다시 100년에 걸친 원의 지배로 낳은 권문세족보다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권문세족은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만큼 광대한 사유지를 확보했으며 이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 졌다. 한 예로 권세가의 종, 곧 노비가 되면 납세, 국방, 노역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지않게 되자 권세가들의 종이 되기 위하여 농민들이 찾아가게 되고 이에 따라 신분질서는 무너지고 권문세족의 세력과 재산은 늘어만 갔다.


권문세족과 더불어 대토지를 소유한 곳이 있으니 바로 사찰이다. 고려 건국과 함께 국교로 대접받아온 불교인 만큼 왕실이나 종친, 권세가로부터 기증받은 토지가 엄청났다. 결국 왕실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 공민왕의 개혁실패와 죽음


공민왕은 밖으로는 원의 지배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제압해 토지집중 문제를 해결함과 아울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를 면천시켜 양인 수를 늘림으로써 나라 재정을 건실케 하고 국방을 튼튼하게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엇다.

하지만, 끊임없는 외침과 권문세족의 반발, 그의 연인인 노국공주가 산고 끝에 죽으면서 무너져 내렸다.


1365년에는 한 승려(신돈)가 왕으로 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개혁을 추진한다. 신돈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은 양인 신분을 되착제 하고 좌주, 문생들이 부정하게 합격시켜주는 폐단을 제거하고, 권문세가와 공신들에게 베풀었던 특전인 국자감시도 폐진한다. 

또한 성균관을 재건하였다. 성균관이 재건되고 성균관의 주요 인물들은 이색과 그의 제자들이 되었으며 신돈의 개혁 결과 최대 수혜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바로 신진사대부였다.


하지만, 급격한 개혁과 신돈이 성공에 취해 갔으며 정적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1371년 신돈은 역모사건에 휘말리고 유배되었다. 4일 후에는 목이 잘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고려 재건의 열정도 차츰 식어가기 시작했다.


1374년 9월에는, 공민왕은 어이없는 최후를 맞게 된다.  당시 자제위 (고관의 자제들 중 용모단정한 아이들을 골라 궐 안에 살며 왕의 시중을 들도록 한 특별기구)는 왕과 더불어 다양한 변태적인 해위를 하는데, 왕의 지휘 아래 후궁을 범하는 따위도 하였다. 후에 익비가 태기가 있다 하자. 이를 계기로 자제위를 죽이려 한다. 취중에서 한 말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말을 들은 내시 최만생이 자제위에게 알리고 자제위는 우발적으로 공민왕을 살해한다.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공민왕 사후, 총리격인 시중 이인임이 직접 진상파악에 나서고 가담자, 그들의 아비, 형제들을 포함한 일대의 피바람이 몰아쳤다. 공민왕은 죽기존에 신돈의 미모의 여종인 반야라는 여인과 잠자리를 갖고 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가 '모니노'다. 모니노를 원자로 삼고 어미의 낮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미 죽은 한씨와의 아들이라 한다.

그렇게 우왕(모니노)의 시대가 시작된다. 아니 이인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어린 왕(우왕)의 후견인 이인임


이인임은 권문세족의 출신으로 벼슬생활도 과거가 아닌, 귀족 자제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었던 '음서'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는 정치적 처신이나 정치감각이 뛰어났고, 권문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눈에 들어 개혁 실무 책임을 맡았고 신돈 제거시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숙청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승진하였고,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어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인임의 측근들인 염흥방, 임견미 등이 요직을 독차지 하고 실세들의 집앞에는 뇌물을 싫은 우마차들로 가득했다. 이에 혁명 세력들은 기가 막혔다. 또한 명나라에게 사대를 표하는 동시에 집권세력인 북원과의 국교회복 또한 결정하며 국정의 혼란을 가져온다.


◆ 혁명을 꿈꾸는 정도전


정도전, 호는 삼봉. 경북 봉화 출신이다. 아버지 정운경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던 인물이며 고려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기록될 만큼 치부와 세력 쌓기 같은 일엔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명문가인 우현보 집안 여종의 외손녀이다. 어머니 쪽 가계로 인하여 두고두고 귀족 출신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하고 빼어난 일솜씨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30대 중반의 나이로 정4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 사신에 대한 접대를 정도전에 맡기니 정도전은 스스로 유배지로 떠나버린다.

정도전이 유배되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등이 상소를 올렸고 이첨은 간신 이인임을 베어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비록 저항의 대가는 혹독했으나 세상은 이제 신진 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유배생활을 통해서 현실을 통해 이론을 확인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가며, 이색학원 시절이래 꿈꿔온 고려 개혁 구성을 다듬고 또 다듬게 된다. 2년이 넘게 지나 차츰 유배된 자들이 정계에 복귀하게 되지만 정도전은 유배를 해제하나 개경에 들어올 수 없다는 명을 듣게 된다. 정치 활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북한산 자락에 학원을 차리고 개혁사상을 전파하고 인재를 양성하지만 인근 재상가 사람들이 초막을 헐어버렸다. 그렇게 세 번이나 집을 옮겼다. 


[집을 옮기다]

오 년에 세 번 집을 옮겼는데

올해에 다시 옮겨야 한다.

들은 넒은데 초막은 자그마하고

산은 길고 길지만 고목은 성글어라.


밭 가는 농부는 서로 성을 물어오지만

옛 친구는 편지마더 끊어버렸다.

천지가 나를 능히 용납해주리니

표표히 가는 대로 내맡겨두자.


유배된 때로 부터 8년이 흐르고, 어느덧 나이도 40줄에 들어선 정도전은 결심하고 혁명의 주력군이 될 이를 만나러 간다.



◆ 고려 후기의 두 영웅 - 최영과 이성계


왜구들은 내륙까지 들어와 곳곳을 유린 했다. 이를 잠재운 것이 두 명장이었다. 60대의 노구이나 불패의 명장인 최영과 40대의 한창나이로 불패지장 이성계였다.

최영은 일찍이 젊어서는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장사성 반군을 토벌하는 싸움에 참전하여 중국 대륙을 누볐고, 김용의 난을 제압하였으며 홍건적의 싸움에서나 최유, 덕흥군이 원나라 군대를 이끌고 왔을 때에도 그의 공이 드높았다. 신돈 시절 유배생활을 겪기도 했으나 신돈이 죽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당시 어린 왕이 시중 자리를 맡아달라 청하지만 시중이 되면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왜구를 물리칠 수 없다 하여 거절한다. 그 후 60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직접 선봉에서 홍산대첩을 거둔다.


권력의 핵이었던 이인임이 노환을 이유로 은퇴를 자청하자 72세의 최영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이성계와 신속하게 행동한다. 당대의 실권자들인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와 그 일당들을 잡아 목베었다. 아내와 딸들은 관비로 삼았고, 어린 아들들은 임진강에 던져졌다. 당시 최영은 이인임을 변호해 줌으로써 이인임과 그 자식들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왕은 소원대로 권신들을 몰아냈다. 최영은 늘그막에 권력의 정점에 섰고, 외곽만 맴돌던 이성계도 드디어 권력 핵심부러 진입했다."


◆ 요동정벌 -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명나라 사신 살해사건 이래 명과 고려는 오랫동안 긴장관계에 있었고 명은 계속 으름장을 놓았고, 고려는 마땅한 대책이 없어 고심했다. 더 나아가 홍무제는 공민왕 때 되찾은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의 결심을 굳힌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으로 반대를 한다.


[4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침이 엃지 못하고,

둘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이 옳지 못하며,

셋째, 왜구들에게 빈틈을 보이게 되고

넷째, 장마철인 가닭에 활에 입힌 아교는 풀어지고 전염병의 우려가 있어 옳지 못합니다.


이 내용은 정도전을 필두로 한 개혁파 신진 사대부들의 생각이라 짐작된다.


그렇지만 최영은 이성계의 주장은 묵살하고 왕을 설득해 요동정벌 구상을 밀고 나간다. 지휘체계도 8도 도통사 최영, 좌군 도통사 조민수, 우군 도통사 이성계로 세운다.


하지만, 우왕은 최영의 정벌군 참여는 반대한다. 자기 옆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무모한 최영은 철없는 소망을 들어준다. 그렇게 총사령관은 남은 채 정벌군은 떠난다. 끝까지 4불가론을 고수하는 이성계에게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를 주어 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은 것이다.


이성계의 예측대로 장마가 시작된 탓도 있지만, 위화도에 다다른 군대는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하질 았았다. 또한 거듭 글을 올려 회군에 대한 명분을 쌓는다. 하여 발길을 돌리니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회군은 질서정연했으며 천천히 이루어졌다. 때를 맞춰 이성계의 가족은 일존의 몰모로 왕의 처소에 있다가 소리 없이 이성계군 쪽으로 달아났다. 회군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최영은 유배된 후에 처형된다.



◆ 조민수와 이색 우왕의 장자 창왕을 후계로 삼다


회군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조민수는 좌시중에 이성계는 우시중에 오른다. 왕은 변화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에 어둠을 틈타 내시 80여 명을 무장시켜 이성계, 조민수의 집을 급습한다. 무계획적인 도박은 실패로 끝나고 왕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에 후계 결정이 필요했는데 이때 조민수는 회군시 이성계와 약속한 다른 종친 중에서 후계를 세운다는 것과는 다르게 선왕의 장자인 창왕을 후계로 삼자 하고 이색과 의기투합한다. 이에 두 사람은 대비의 입을 빌려 폐위된 우왕의 아들을 세우니 곧 창왕이다. 이 때 나이 9세였다.


◆ 이성계파 정국을 장악하다 - 우왕, 창왕 유배,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후계 문제 결정에 있어 조민수와 이색에게 밀렸지만, 실권은 여전히 이성계 측에 있었다

그와 함께 종군하면서 공을 세운 퉁두란 등의 무장들, 회군의 막전막후를 연츨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도전, 남은, 윤소종등과 그들의 후배들, 그리고 또 한 사람 조준이 있었다.

조준은 권문세가 출신인데도 음서가 아닌 과거를 통해 벼슬을 시작했으며, 왜구 토벌에도 공이 컸으며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회군 후 이성계를 만나보고는 그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성계의 천거로 대사헌에 오르고 그의 상소로 조민수는 유배형에 터해진다.


뒤이어 구세력들의 몰락에 이른느 사건이 불거진다. 최영의 친척인 김저와 정득후란 자가 강화도로 가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암살한 계획을 세우고 이성계에게 가지만 그들의 함정에 걸려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김저는 옥에 갖힌다.  가혹한 국문 끝에 김저는 '이성계 대감을 제거한 뒤 우현보, 변안렬, 왕안덕, 우홍수 등과 공모하여 우왕을 맞이하고 금상(차왕)은 이에 내응키로 했다' 고 자백한다. 그리고 급사한다. 그리고 거명된 사람들은 투옥되거나 유배되었다.


후에 흥국사에 이성계파 아홉 대신이 모였다. 이성계, 정도전, 조준, 심덕부,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그리고 정몽주. 그래서 결정 된 것이 우왕은 강릉은 유배지가 옮겨지고 창왕은 강화에 유배된다.

그리고 45세의 정창군을 보위에 올리니 고려의 마지막인 제34대 공양왕이다. 


이렇게 최군과 폐가입진(거짓 임금을 폐하고 진짜 임금을 세운다)의 명분 아래 행한 쿠데타 덕에 이성계파는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 토지개혁 실시


토지문제를 개혁하는 일은 정도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개혁안이 통과되자 전국의 토지에 대한 조사사업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새로운 토지대장이 작성되었다. 과전법이 실시된 것이다. 1391년 1월의 일이다.

그 해 9월엔 이제는 한낱 종이쪼가리에에 불과한 옛 토지대장이 개경거리에서 불태워졌다. 뒤이어 조세제도도 크게 개선되어 백성들은 오랜만에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 고려를 지키려는 자 - 정몽주

공양왕이 이성계 세력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할 때 왕의 발언에 옹호하는 자가 있었으니 흥국사 9공신의 한 사람이면서도 조금 다른 사람 바로 정몽주였다. 자는 달가요, 호는 포은이다. 

그는 이색 학원에서 공부하였는데 단연 출중하였다. 스승인 이색이 말하기를 '달가야 말로 이 나라 이학의 원조! 그의 말은 어떤 말이든 이치에 닿지 않는 게 없다.' 고 하였다.


일치감치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세 번의 시험에서 세 번 모두 장원이었다. 원 사신 접대 문제로 신 진 세력이 이인임 정권과 한판 붙었을 때 그는 선두에 섰고,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몽주는 유배세력의 불순한 의도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이전에 떠난 사신들의 소식을 알 수가 없던 때였다. 이 때 정몽주는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해서 명에 당도했으며 홍무제를 설득하여 억류되어 있던 전임 사절까지 데리고 돌아온다.


이성계와는 초년 관료시절 이성계 부대에 배속되어 참전했고 황산대첩을 거둘 때도 이성계 밑에 있었다. 둘은 서로 좋아했고 존경했다 정도전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하여, 선후배를 떠나 (정몽주가 5년 선배)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서로를 믿고 아껴온 사이였다.


하지만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하고자 구세력을 제거하고 임금까지 바꾸면서 이룩한 개혁을 고려 안에서 하기를 원했고 정도전은 새 술은 새부대에 부라며 낡은 고려가 아닌 새로운 왕조 속에서의 개혁을 꿈꾸었다. 이런 서로 다른 노선은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 정몽주의 반격


이색과 조민수를 참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정몽주는 상황 정리에 나서며 결국 이색은 무죄, 조민수는 유죄로 인정한다는 왕의 명을 받게 된다. 이 후 추후 이일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고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헌부의 우현보 탄핵 사실이 아직은 대외비 상태였는데, 정도전이 이 사실을 몇몇 측근에게 흘린 사실이 드러난다.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던 사건이지만 반 이성계파 대간들이 움직였고 결국 정도전은 공신녹권을 박탈하고 유배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그 후 이색, 이숭인, 우현보, 심덕부, 이종학 등 이색 계열과 구세력들은 대거 유배지에 불러들여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다.


◆ 드디어 발생하다. 역성혁명


양자 간의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던 와중에,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정몽주는 이를 계기로 상소를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한다. 이에 공야왕은 조준,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등을 유배형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정몽주 측은 참수를 청한다. 이에 반해 이성계 세력은 유배에 반대하는 창을 한다.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은 정몽주 제거를 위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때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사위여서 일가이기도 하지만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한 변중량이란 이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정몽주에게 전한다.


이런 암살 음모를 알고 있는 정몽주는 돌연 이성계 집을 방문하다. 아마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했고 어디 어떻게 흘러가나 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던 중에 선죽교 위에서 이방원 일당에서 살해된다.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1392년 4월, 개경 선죽교. 그의 나이 56세였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제거했다. 이성계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도 생각했을 것이다.

아들의 냉혹한 결단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벼렸을지도 모른 다는 것을, 방원은 과거에 급제하여 변방의 촌놈 출신이란 콤플렉스를 덜어준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아들에 대한 아비의 신뢰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간 소소한 공이야 있었지만 이성계의 똑똑한 아들에 불과했던 방원은 일약 정도전 등과 어깨를 겨룰 만한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성계는 아들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에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성계파의 유배자들은 하나 둘 돌아오고, 그들을 탄핵했던 이들은 유배길로 올랐다.


왕으로부터 양위받는 형식으로 모양 좋게 이성계를 옥좌를 앉히고 싶었던 이성계 당 핵심들은 다른 방법을 택한다. 대비전에 찾아간 것이다. 대비는 공민왕 15년에 후궁이 되었으며 말년에 총기를 잃은 공민왕이 자제위 소년들을 시켜 범하려 하자 머리를 풀고 목을 매려 함으로써 저지했다.  우왕은 종종 안씨의 처소를 찾아 안씨를 곤란하게 했고 추문이 뒤따랐다. 우왕이 유배된 뒤 그의 아들 창왕을 세운 교지는 그녀으 몫이었고 창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것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군주제 나라에서 임금 위에 누가 있으랴마는 왕대비 이름으로 왕을 폐한다는 교서가 발표되었다.


폐위된 왕은 원주로 옮겨지고, 옥좌는 그 후 4일 동안 빈자리가 된다.1392년 7월 16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다음 날 수창궁에서 즉위식이 거행된다.


새로운 힘과 새로운 시대사상을 대표하는 이성계와 정도전, 둘이 만나 후 9년, 역성혁명을 통한 새 왕조 새 세상 건설이라는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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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명품을 낳은 샤넬, 현재를 즐겼다.


샤넬이 현실을 즐기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


1) 옷에 대한 신념(Belief)이 뚜렸했다.

2) 특유의 능력(Distinctive Capabilities)이 있었다.

3) 환경에 대한 민감도(Market Insight)가 뛰어났다.

4) 실험과 학습(Learning by Doing)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샤넬은 예술을 사랑했지만 수집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피카소, 모딜리아니, 브라크, 달리 등 친한 화가들의 그림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않았다. 예술작품보다는 예술가들과 교우하며 순간순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독창적인 예술품을 소장하기보다는 그걸 만든 사람의 독창성을 느끼고 싶어 했다. 그녀의 예술 후원은 자선활동이 아니라 유희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은 드러나지 않게 도왔지만 샤넬이 예술가들에게 너그럽다는 얘기를 듣고 도움을 구하러 오는 예술가들에게는 한 푼도 내주지 않았다. 샤넬은 현실을 마음껏 즐긴 사람이었다.  순간을 즐겼던 샤넬의 생각은 돈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샤넬은 "돈은 좋은 하인이자, 나쁜 주인이다" 라는 말을 남겼는데 평생 그녀는 돈에 구속되지 않고 삶을 즐기는 데 수입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모든 관심을 쏟을 줄 아느냐에 따라 지금 당장의 창조성 발휘 여부가 결정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예측성도 내던져 버리고 현재에만 완전히 몰두하여 즐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안다. 상황이 변하면 그에 따라 노선을 변경한다. 계획을 내던져 버리고 융통성을 발휘해 변화하는 상황과 시시각각 변하는 문제의 요구사항에 자신을 맞출 줄 안다. 왜냐하면 스스로 대한 신뢰와 자기존중이 있기 때문이다."

즏, 창초적인 사람은 스스로를 믿기 때문에 모호하고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지 않아서 현실을 즐긴다는 것이다. 현실을 즐기는 만큼 임기응변에 강하고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Dynamic Capabilities)이 뛰어나다. 실제로 샤넬은 변화무쌍한 패션계에서 100년 동안 최고의 위치를 지켜냈다.


□ 샤넬은 보다 실용적이고 단순한 옷을 만들었다. 남성용 속옷에나 쓰이는 값싸고 얇은 저지(jersey)를 활용해 치마 길이를 과감하게 줄인 단색의 드레스를 내놨다. 1916년 샤넬의 드레스는 대히트를 기록해 유명 패션잡지마다 소개됐다. 푸아레는 저지 같은 저렴한 소재를 활용한 샤넬의 제품을 "대부호들에게는 볼품없는 옷"이라고 폄하했지만 샤넬의 이상은 1차 세계대전 후 여성들의 변화된 생활에 더 적합했다. 학자, 사업가, 운동선수 같은 직업을 가진 활동적인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편안하고 실용적인 옷이 요구됐다. 그동안 여성들은 코르셋, 속옷, 심을 넣어 몸매를 강조하는 옷으로부터 구속받고 있었는데 샤넬이 여성의 몸을 해방시켰다. 샤넬의 의상은 파리 패션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이후 여성복 디자인이 편리하고 단순하게 변했다.


□ 1926년 샤넬은 어디서나 입을 수 있는 더욱 단순한 검은색 드레스를 발표했다. 이 옷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팔리던 자동차만큼 성공을 거뒀다고 해서 '샤넬의 포드'로 불렸다. 디자인이 워낙 단순해 다른 업자들에 쉽게 복제 생산해서 이 옷을 입는 여성들이 넘쳐났지만 샤넬은 개의치 않았다. 이 옷도 기존에 주로 상복으로 사용되던 검은색을 여성복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으로 평가받았다. 샤넬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930년대에는 할리우드 영화 의상을 담당할 정도로 국제적인 인물이 됐고 그녀의 옷은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 팔려나갔다.


□ 복귀 후 샤넬은 현실의 변화를 가장 먼지 감지해 패션사업의 패턴이 바뀌는 데 영향을 줬다. 20세기 중반까지 패션계를 이끈 것은 오트쿠튀르(고급 맞춤 의상실)였다. 오트쿠튀르는 한 명의 고객을 위한 맞춤 의상을 만들었다. 자연히 이들의 작품은 독창적이고 복제가 어려웠다. 그러나 샤넬은 자신의 작품이 복제돼 더 많은 사람들이 입는 것을 환영했다. 그녀는 복귀할 때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생산라인을 갖추고 옷을 대량 생산할 계획을 세웠다. 마땅한 공장을 찾지 못해 모조품 생산업자들에게 길을 터줬지만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고급 패션의 대중화가 가속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 들어 밀라노와 뉴욕의 기성복이 파리의 오트쿠튀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파리의 오르쿠튀르들도 샤넬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기성복 상표를 설립했다. 심지어 피에르 가르뎅이나 파코 라반 같은 후배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브랜드를 라이선스로 계약해 해외 업체들이 파리의 브랜드를 마음껏 생산하게 만들었다.


동태적 역량의 조건


신념(Belief) * 능력(Distinctive Capabilities) * 민감도(Market Insight) * 실험과 학습(Learning by Doing) = 동태적 역량(Dynamic Capabilities)


■ 티스와 동료 경영학자들은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는 동태적 역량이 경쟁력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동태적 역량은 환경 변화에 맞춰 내외부 자원을 통합하고 육성하며 재편하는 역량이다. 이제는 동태적인 관점에서 핵심역량을 수정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IBM은 몰락 직전에 동태적 역량을 구축하는 전략으로 회생했다. 컴퓨터 하드웨어 시장이 축소될 것을 내다보고 서비스 기회를 잡기 위해 기술과 인적 자원, 핵심역량을 재구성해 제품 중심 기업에서 서비스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티스는 동태적 역량은 세 가지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우선 시장의 작은 시그널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그 시그널을 읽은 후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며, 자원과 핵심역량을 재편해 새로운 기회에 적합한 경쟁력을 빠르게 기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 첫째, 샤넬은 신념(Belief)이 뚜렷했다. 변화의 밑바탕에는 강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줏대 없는 사람은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다. 샤넬의 경우에는 옷에 대한 신념과 철학이 분명했다. 옷은 편리함과 단순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이 바뀌어도 이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 둘째, 특유의 능력(Distinctive Capabilities)이 있었다. 매슬로도 지적했듯이 스스로를 존중해야 현실을 즐기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능력을 믿는다는 얘기다. 샤넬 역시 의복 디자인에 대한 독창성을 믿었고 자신감이 있었다. 샤넬이 카피를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셋째, 환경에 대한 민감도 (Market Insight)가 뛰어났다. 동태적 역량에서 전문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는 게 민감도, 즉 변화의 시그널을 읽는 능력이다. 빅데이터를 도입해서 소비자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민감도만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동태적 역량의 요건들이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 즉 신념과 능력이 있어야 시장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 넷째, 실험과 학습(Learning by Doing)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샤넬은 의복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내놓은 결과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었다. 현실을 즐겼던 샤넬은 스케치를 하지 않고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천의 질감을 느끼면서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디자인을 고쳐갔다. 공교롭게도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능한 혁신 기업들이 샤넬과 비슷한 방식을 쓰고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디자인 회사인 IDEO도 실험과 학습에 의해 디자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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