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한 나라의 국경선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하기에 보통 복잡한 곡선을 띄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보시다시피 직선들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서구 열강들이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끼리 임의로 그어버린 국경선인 것입니다.
1884~1885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회의 (베를린회의) 에서 콩고분지 지역의 영유권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을 공식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확정된 국가간 분할선은 원주민의 인종과 문화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히 열강들의 이익만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현재까지 아프리카의 정치적 불안정과 분쟁, 내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는 서구 열강들의 일방적인 국경선 성립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적인 이유로 여전히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전세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적인 복합적인 이유로 여전히 굶주리고 있으며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런 아프리카의 모습을 분야별로 살펴보고,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아프리카의 정치와 정치인
아프리카의 과거 통치구조는 왕, 부족장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종족, 씨족 중심 사회입니다. 여전히 그 문화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왕과 부족장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바로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지요. 또한 지배 계급들 역시 나라와 국민을 자신의 소유로 알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른 구조 입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난 후에 유럽과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민주주의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민주주의의 축제인 선거를 통해서였습니다. 분명, 선거는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힌 곳에서는 축제가 분명합니다. 아프리카에서의 그 축제는 때로는 아니 많은 경우가 갈등과 분쟁의 축제이기도 합니다. 선거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에 대항하고, 심할 경우 상대편 야당 주요인사들을 무참히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국제 원조, 그 허와 실
아프리카의 국제 원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들 나라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아주 큽니다.
보통 아프리카 국가들의 GDP의 약12~15%정도에 해당되고, 어떤 국가의 경우에는 거의 50%에 육박할 정도로 국제 원조는 아프리카 경제의 중심 축입니다.
문제는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조되는 비용이 적절한 곳에 사용된다면 문제되지 않겠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이 통치 계급의 부정부패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국민을 위한다기보다는 대통령과 일부 부족, 종족을 위해서 쓰인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한 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만, 일부 정치인들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비자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국제원조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들을 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자생능력을 떨어뜨리고 계속적으로 원조에 의지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프리카 정치인들이 평가받는 중요한 기준 중에 하나가 자기 지역에 얼마나 많은 국제 원조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국책 사업을 한다거나 할 때 항상 자금 원조의 첫번째 대상이 국제 원조입니다.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자생 능력 결핍 현상 발생 등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의 국가의 정치 청렴도 등에 따라 지원을 달리하고, 식량 지급 뿐망 아니라 교육 및 근본적인 것에 원조를 하고 있어서 그 방법론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의 식량 문제
아프리카에서 재배되는 농작물은 자국의 식량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커피, 코코아, 땅콩 등 서구에 수출하기 위한 작물을 재배합니다. 이런 작물은 식민지 시기에 서구인들이 재배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것인데 독립 이후에도 자국 내 식량생산 보다는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아프리카는 국제 곡물가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됩니다. 식량으로 먹을 수 있는 쌀, 밀 등의 곡물가 상승은 바로 아프리카의 기아에 직결되며, 상품작물의 가격 하락 또한 영향이 크게 미칩니다.
아프리카와 비슷한 시기에 독립을 한 아시아에서는 독립 이후 한 차례의 농업혁명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고 비료 연구에도 힘을 실어서 어느 정도 식량확보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그런 단계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석유와 같은 지하자원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국내 식량 확보보다는 지하자원을 팔아서 식량을 얻었으며, 식민시대의 잔재인 상품작물을 식량 생산을 위해서 바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당장의 이익을 바라본 소위 지배계층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노예화와 종족 갈등
아프리카에서는 스페인이 진출한 이후에 약 600년 동안 약 1,500 만명이 되는 인구가 신대륙 및 유럽의 국가에 노예로 팔려나갔습니다. 이렇게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는 실제로 유럽인들이 흑인들을 잡아서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얻은 포로들을 유럽인들이 가져온 럼부, 칼, 각종 장신도구 등 싸구려 물품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유럽의 물품에 익숙해진 부족장들은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부족민들을 팔아서 싸구려 물품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국외로 유출된 인구는 아프리카의 발전 저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노예로 유출된 인구 외에 아프리카 내부에서 종족 갈등 및 내전으로 사망한 인구 수는 약 50년 동안 1,500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실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르완다 대학살, 콩고 대학살 등 제노사이드가 일어난 것이 다른 나라가 아닌 같은 나라에서 종족 문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국가보다는 종족의 개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처음에 언급한 국경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구 열강들에 의해 만들어진 국경선은 같은 종족을 여러 나라에 분리시키기도 했고, 서로 반목하는 종족을 하나의 국가로 묶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내전 및 종족 갈등은 이미 예견된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내전 - 나쁜 이웃들
아프리카의 내전은 단순한 내전이 아닙니다. 아프리카는 위에 언급하였듯이 같은 종족이 서로 다른 국가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국가에서 내전이 발생할 경우 다른 국가의 같은 종족들이 지원을 합니다. 이제 더이상 내전이 아니게 됩니다. 국제사회는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에 무기수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기는 끊임없이 공급됩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해관계에 있는 유럽,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은 아프리카의 정부군 혹은 반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은 더 이상 내전이 아니게 됩니다.
아프리카는 여러 면에서 자의든 타의든 많은 갈등 요소와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소위 재스민혁명이라 불리는 아랍권의 민주화 물결은 알제리, 사우디, 예멘, 바레인, 시리아로 이어졌으며, 그 파급효과는 아프리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일부 국가에서는 자생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아프리카가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오고 빈곤과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와 아프리카 내부의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국제사회는 물질적인 지원만이 아닌 교육과 같은 장기적인 개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에 더 많은 원조를 해주고 아프리카의 정치인들은 권력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국민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같은 종족만을 의지하는 투표가 아닌 관심을 가지고 정치인들을 바라보고 원조에 의지하기 보다는 보다 자발적인 자세로 극복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내가 저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앞으로 새롭게 진출하기 위한 시장이기 때문' 도 아닙니다. 내 아이와 같은 아이들이 기아에 허덕이면서 죽어가고, 열악한 의료환경으로 간단한 질병에도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글자 하나 알지 못해서 선거 참여 역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현실을 알고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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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반부터는 검은 피부와 인종적 퇴화와의 관계를 입증하려는 시도들이 뒤를 이었다. 외과의사, 생물학자들은 초기 인류가 백색과 흑색의 중간쯤 되는 피부 빛깔을 가졌으나, 환경 또는 질병과 같은 영향으로 피부색이 변했다고 보았다. 특히 인종 퇴화론의 대표 학자인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뷔퐁은 흑인의 검은 피부가 인종적 퇴화의 증거라고 하면서, 이들을 온화한 북미 지역으로 이주시켜 장기간 새로운 음식을 먹인다면 피부색도 다시 밝게 변할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어떤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모든 흑인들이 피부를 검게 만드는 유전성 피부병을 앓고 있으며, 이 병을 치유하기 위해 백인들이 흑인들을 최대한 인간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흑인과의 결혼과 출산은 강력히 반대했는데, 이는 선천적 결함을 가진 자녀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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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은 인간의 피부색을 하나의 보호 장치로 이해한다. 피부색은 체내의 멜라닌 색소에 의해 결정되는데, 색소 세포들은 필요 이상의 자외성을 차단하거나, 또는 부족한 자외선을 더 많이 흡수하기 위해 색소 생산량을 조절한다. 자외선은 우리 체내의 비타민D 생성을 돕지만, 너무 지나치면 엽산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엽산이 부족하면 불임과 조산처럼 종족 번식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비타민D가 부족하면 뼈가 연해져 휘는 구루병을 일으킨다.
인류학자 니나 자블론스키는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지구의 자외선 분포 지도가 피부색 분포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인간의 피부색이 종족 번식과 관련이 있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아프리카와 호주, 서인도제도,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은 강령한 자외선을 막기 위해 피부가 검게 변한 반면, 북유럽 원주민은 부족한 자외선을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흰 피부를 가졌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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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상 모든 인간들의 피부색은 하나다. 유전적 탈색증을 가진 알비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피부 세포에 갈색 멜라닌 색소를 가지고 있다. 백인과 흑인의 차이는 이 색소의 많고 적음에 지나지 않으며, 그 중간에 무수히 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더구나 멜라닌 색소의 양은 환경에 따라 변한다. 직사광선과 자외선이 강한 열대 또는 사막으로 이주한 백인은 차차 피부가 검어진다. 다만 사람에 따라 생산할 수 있는 멜라닌의 최대치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이 유전적으로 결정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하지는 않다. 엄밀히 말해 희고 검은 것을 기준으로 인종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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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은 그 사연과 스케일이 다른 노예들과 사뭇 다르다. 농경지를 뺏기 위한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힌 것도 아니고, 인근 지역으로 끌려간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는 7세기 이래 적어도 3,000만 명 이상이 노예로 팔려갔고, 유럽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가담한 18세기부터는 1,5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으로 이송되었다. 인류사에 있어 이와 같은 규모의 노예 사냥은 아프리카 외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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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 역사학자 티지안 은자에의 <숨겨진 인종청소>는 다소 충격적인 아랍 노예무역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먼저 아랍인들은 흑인 남성의 성욕을 두려워했다. 흑인들의 그것은 억제할 수 없는 위험한 욕구이며, 정상적 노동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본능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랍인의 땅에 흑인의 자손이 자라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수한 증언들은 거세된 흑인들이 하렘의 경비 또는 십부름꾼으로 일하거나, 심지어 아랍 동성애자에게 선물로 넘겨졌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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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은 대체로 흑인 남자2명당 여자 1명의 비율로 노예를 사고자 했다. 흑인 여성은 가사 노동용으로 그리고 노예의 재생산(흑인 아기)을 위한 용도로 끌려갔다. 백인 주인은 배란기에 접어든 여성 노예를 2~3일 동안 가두어놓고는 건장한 흑인 청년들을 들여보내 강제로 성관계를 갖게 했다. 그리고 흑인 여성의 임신 여부를 체크했다. 도대체 가축의 교배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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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재앙 그 자체였다. 신대륙에서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노예로 부려먹지 않았다. 백인들은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살아남은 인디언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대규모 노예 공급자로서 가치가 없었다는 설명이 있는가 하면, 인디언을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아무튼 아메리카 대륙에서 본격 대규모 농장이 조성되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른바 삼각 무역에 뛰어들면서부터 흑인 노예의 수요는 급증했고, 이후 300년간 1,500만 명의 흑인 대서양 너머로 끌려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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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헙의 아프리카 왕국들의 정복 전쟁 승리와 영토 확장에 기여했고, 소규모 부족 단위로 쪼개져 있던 아프리카인들의 통합을 도왔다는 주장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정복 전쟁이 끝나 더 이상 전쟁 포로가 잡히지 않자, 이제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사람을 팔기 시작했다. 이미 유럽제 물건에 중독되어버린 권력자들은 노예를 끊임없이 팔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다. 유럽 역시 17세기 신대륙 개발로 노예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던 차에 흑인 노예가 어떻게 어디서 잡혀왔는지 따질 필요가 없었다. 아프리카 왕들은 군대로 하여금 아무나 노예로 잡아올 것을 지시했다.
폭력과 불신이 증폭되고 무시무시한 공포가 주변을 떠도는 곳에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가족밖에는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잡아먹는' 시대에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의 범위는 부족, 씨족, 가족 단위로 좁혀졌다. 아프리카의 파편화는 이를 표현한 것이며, 인근 부족, 이웃 마을 사람들 간 불신과 증오의 기억은 훗날 국민 국가 형성 과정에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이 모든 사회적 죽음의 생산 과정은 200여년 뒤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에서 일어났던 비극들과 너무나도 닮았다. 독립 이후 아프리카 권력자들이 국가를 사적 소유물로 여기면서 개인 재산 축적에 열을 올린다거나, 다이아몬드나 자원을 팔아 무기를 산다거나, 특정 부족에 대한 인종청소가 일어난다거나, 마치 언제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 20세기에도 재현된 것이다.
아프리카주의자들은 이러한 것들이 과거 노예무역 시대에 습득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유럽주의자들은 원래 아프리카인들에게 내재한 면모라고 주장하지만, 전자의 주장은 자기반성 없는 책임 떠넘기기식 변명임을, 후자의 주장은 인종주의적 편견임을 지적하지 ㅇ낳을 수 없다. 다만 노예 생산 과정에서 나타났던 증오와 불신, 폭력의 트라우마가 독립 이후까지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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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볼 줄 모르고, 교통, 통신 수단마저 없이 세상 소식을 접할 길 없는 국민들은 그저 중앙정부의 선전이나 그 지역 출신의 거물들의 말을 맹신하게 되고, 독재자들을 무감각하게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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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구의 절반 정도는 우리 돈 1,3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하루를 살고 있다. 탄자니아, 르완다, 말라위, 기니, 라이베리아와 같은 나라에서 이런 극빈층의 비율은 70~80퍼센트나 된다. 그나마 양식이 생기면 함께 나눠 먹는 온정이라도 있어서 집단적인 아사는 흔치 않지만, 이것마저 구할 수 없을 때는 그야말로 굶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아프리카에서 매일 2만 5000명이 굶어 죽는다는 통계가 의심스럽겠지만, 도시 여기저기 직업이나 집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고 ㅏ슬럼가의 모습, 피폐해진 농촌을 보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우울하게도, 기후 변화와 흉년으로 인해 앞으로 그 숫작 ㅏ더 커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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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죽는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은 연간 400만 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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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젊은이들이 많은 이유는 슬프게도, 사람들이 일찍 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젊은 대륙'이라는 표현을 접할 때 마다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당신들의 눈에는 아프리카인들이 노동자와 소비자로만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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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모두 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아니다. 절반 정도는 학업을 그만두는데, 결국 아프리카인들의 4분의 1정도만이 중학생이 되는 셈이다. 이후 진학생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어 결국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학생의 5퍼센트만이 대학생이 된다. 물론 남학생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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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농업은 자연에 대해 너무나도 순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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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 시절의 획일적 농업 생산 구조도 빈곤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아프리카를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농업 생산은 수출용 작물, 즉 돈이 되는 특정 작물에 집중되었는데, 면화, 땅콩, 코코아, 커피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다. 먹을 수가 없거나, 먹어도 영양 공급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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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더 큰 책임은 독립 이후 수십 년 동안 농업 생산 구조를 바꾸지 않은 아프리카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다. 독립 이후 돈이 아쉬웠던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땅콩, 커피, 코코아, 면화 수출은 외화 획득의 중요한 방법이었기에 굳이 농업 생산을 다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훗날 아프리카 농업에 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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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독립 이후 내홍을 겪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로 폭력과 유혈이 낭자한 곳이었다. 2006년 한 해에만 전 세계 유혈 분쟁의 40퍼센트 정도가 아프리카에서 일어났으며, 11개 아프리카 국민들이 전란 상태에서 호환, 마마에 떨어야 했었다. 내전은 국가 경제를 상처투성이로 만들기 마련인데, 아프리카에서만 매년 180억 달러의 국민소득이 사라진다고 한다. 1990년에서 2005년까지 분쟁이 일어났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손실은 무려 3,000억 달러나 된다. 국가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내전을 치르는 사이에 매년 GDP의 15퍼센트 정도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앙골라는 1975년 독립과 동시에 좌우익 간의 내분으로 27년간 내전을 치렀는데, 이로 인해 50만명이 사망하고 400여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했다. 장기각ㄴ의 내전으로 외채와 물가는 정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이러한 부담을 이기지 못해 정부는 타협안은 제시하면서 종전을 요청했다. 수세에 몰렸던 반군이 이를 수용하ㅁ으로써 분쟁은 종결되엇는데, 앙골라는 2002년에야 독립 이후 처음으로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석유 부국 앙골라는 그 후 연평균 10퍼센트가 넘는 경제 성장을 달성했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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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코코아를 키우거나 다이아몬드를 캐내어 구구민들이 피땀 흘려 벌어들인 외화로 지도자들은 무기를 샀다. 그 무기로 반란군과 전투를 치르고, 자신을 위협하는 정치가와 부족들을 처단한 것이다. 자신의 정권 유지에 급급했던 지도자들에게 국민들의 고통과 굶주림은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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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보다는 인맥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부작용은 또 있다. 우선 정부 정책 자체가 전문성이 없어 각종 부실 사업들을 양산한다. 권력자들은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거나 발국하는데 관심이 없고, 이들 국가들의 테크노크라트들은 툭혜 받는 소수 집단으로 한정된다. 시니컬한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우수한 인재들은 외면받기 마련이고, 그 중 일부는 아예 일자리르 찾아 해외로 가버린다. 인적 부패 구조가 아프리카식 두뇌 유출을 조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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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왕 또는 부족장들에게 싸구려 유럽 제품을 주면서 노예 공급을 부탁했는데, 이것 자체가 뇌물 지급 행위로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의식을 썩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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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부패의 외래 기원론은 오늘날 치열하게 전개되는 아프리카 자원 쟁탈전과도 맞닿아 있는데, 특혜를 요구하는 다국적 기업의 물량 공세가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부패의 유혹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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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서' 돈 버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아프리카에서는 이것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정부는 여기저기 묻혀 있는 자원만 팔아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농업이나 제조업고 ㅏ같은 다른 산업에는 관심이 없다. 아프리카의 농업이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제조업이라고 해봐야 전통 공예품이나 고무, 플라스틱으로 만든 단순 생활 용품, 직물류에 한정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가봉의 열대림에는 바나나가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가봉 사람들은 이웃 카메룬 바나나를 수입해서 먹는다. 가봉에서 석유 붐이 일자 노동자들이 죄다 유전으로 몰려, 바나나 농장들이 하나둘씨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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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겠지만, 아프리카 산유국들도 석유를 수입해서 쓴다. 자국에서 난 원유를 휘발유나 경유, 등유 등으로 정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정제 공장이 잇긴 하지만 ,이들은 모두 외국자본으로 지은 데다가 ,아프리카 석유 소비 수요를 충당하기에도 충분하지 못하다. 부족한 석유는 당연히 국제 석유 시장에서 수입해야 한다. 사실 산유국 정부는 정제 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역시 '가만 앉아 있어도'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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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빼돌리고 남은 돈은 일단 국고로 들어오지만, 이 역시 예산 뻥튀기 수법에 능한 공무원들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국영 항공사의 유류비, 공부원들의 통근 버스 비용, 대통령 또는 도지사의 접대비 사용 내역을 조작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실제로 과거 나이지리아 국영 항공사는 단 두 대의 비행기로 운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료는 26대 분을 지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세계 9위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독립 당시 300달러 정도 였는데, 50년이 지나서도 겨우 200달러 정도만 증가했다. 석유는 말 그대로 일반 국민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편 아프리카에는 민간인 광산 소유주도 많이 있는데, 이는 대개 독재 정부로부터 광산을 불하받았거나, 돈을 주고 산 경우이다. 국가를 사적 소유물로 생각했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국토를 수백 개의 광구로 구분하여 일련번호를 부여한 다음, 가족들과 측근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주기도 하고, 재력가에게 돈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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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물아비들은 그 대가를 무기로 지급하면서 더 많은 원유를 훔쳐 오라고 사주했고, 러시아 무기상과 이슬람 과격 단체의 도움으로 좀도둑들은 이제 쾌속정과 중화기까지 갖춘 무장 단체로 성장했다. 오늘날 니제르 델타에서 생산된 원유의 20퍼센트가 이렇게 새어나가지만, 석유 회사들은 이를 묵인하는 경우가 많다. 로켓포 한 방에 유정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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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정부는 2006년 MEND(니제르델타해방운동)의 우두머리 헨리 오카가 체포되었지만, 3년 뒤 정부는 그를 사면할 수 밖에 없었다. MEND가 이에 불만을 품고 쉘의 송유 시설을 공격했고 그 여파로 국제 유가가 상승할 정도로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니제르 델타 지역 사회 개발 계획은 발표하는 등 유화책을 펴 보았지만, MEND는 이후에도 라고스 항구를 포격하고 수도 아부자의 정부 청사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종종 석유 회사들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이 게릴라 토벌을 위해 민가르 폭격하고 무고한 원주민들이 죽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MEND는 무차별 테러를 가하겠다고 선언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 자본의 힘과 부패한 정부, 생존을 위한 투쟁이 온통 뒤섞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가련하고 무서운 곳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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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그런 안목은 기대하기 어렵다. 아프리카에서 자원이란 지금의 나, 그리고 나를 돕는 이들의 재산으로 인식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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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식민 지배는 아주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실제 지구 육지 80퍼센트 정도는 16세기 이후 단 한 번 일지라도 피식민 지배에 놓였고, 식민지라고 정의된 곳만 모두 160여 개나 된다. 오늘 날 190개가 넘는 유엔 회원국 가운데 피식민 지배를 겪지 않은 나라를 찾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이니 사실 세계 근대사는 어쩌면 '독립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피지배 민족들은 식민 종주국의 경제적 수탈에 신음하는가 하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강제적으로 피를 흘려야 했고, 고된 투쟁 끝에 독립을 얻었다. 이들에게 20세기는 해방과 희망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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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경우는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우선 피식민 지배의 역사가 매우 길다.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쟁탈전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1884년 베를린회의로부터 1990년 나미비아의 독립까지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배는 길게는 100년간 지속되었다. 1960년대에 독립한 31개 아프리카 국민들도 60년 이상 피식민 지배를 경험했다.
일부 아프리카 학자들은 식민 지배 이전의 착취에 더 큰 의미를 둔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5세기에 아프리카에 도달한 유럽인들은 싸구려 럼주나 총, 칼, 장신구 등 값싼 유럽산 제품을 주면서 흑인 노예와의 교환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지배자들의 영혼은 타락했고, 아프리카는 서서히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고 싸구려 제품을 소비하는 최하위 계급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1500만 명에 가까운 흑인 노예 포획은 아프리카 대륙의 경제와 사회 기반을 흔들었고,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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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간 아프리카를 경영했던 유럽은 이미 아프리카를 노예와 자원, 작물의 공그지로 특화시켜놓았지만, 이 이상의 발전을 도모하지 않았다. 물론 독립 이후 아프리카에게 새로운 도약의 가능성은 있었다. 특화되 1차 산품 생산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킬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산업을 육성할 것인지였는데, 아쉽게도 두 가지 모두 실패했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독립 이후 의욕적으로 식량 증산을 위해 사회주의식 집단 농장 제도를 실시하는가 하면, 반유럽 정서가 강한 곳에서는 수입품을 대체해보갰다면 공장을 지었지만, 제조업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부실한 계획을 추진하다 보니 공장은 가동되기도 전에 폐허가 되기 일쑤였다. 국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불만이 커졌고, 지도자들은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더 폭력적이고 독선적인 행태를 취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가 걸어왔던 성장 경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강제로 도입하려 했다 .노예무역과 식민 지배를 통해 아프리카는 1차 산품의 공급자로서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되었고, 벗어날 수 없는 저개발 구조가 고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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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남아공의 인종 분리가 철패되고 만델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잠시 희망에 젖기도 했지만, 아프리카의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일 뿐이다. 이 시기에 시에라리온, 소말리아, 르완다, DR콩고 내전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서구는 아프리카 회의론을 공공연하게 표출했다. 독립 이후 30여 년간 철저한 내분과 학살이 만연했던 아프리카는 말 그대로 암담한 대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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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프리카의 여느 택시기사, 대학생, 가게 점원을 상대로 질문을 던져보라. 우선 유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은 아마 아프리카에서 자원을 가져가거나 물건을 팔 뿐, 정작 해준 것은 없는 유럽을 비난할 것이다. 이제 '당신 가족과 당신 나라는 왜 그렇게 가난한가?'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를 '정치가들 때문이죠. 그들은 부자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난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난 50년간 전쟁과 학살에 시달리고, 엘리트들의 부패를 목격했던 아프리카인들은 이제 유럽 식민 정부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탓하게 된 것이다. 독재자들의 강제 노역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내전으로 가족과 삶의 터전 모두 잃어버린 아프리카인들에게 '당신은 왜 가난갆가? 유럽 때문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어쩌면 넌센스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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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독립 초기 아프리카 국가들은 그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보통 자본은 저축, 해외로 부터의 투자를 통해 축적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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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아프리카에 투입된 돈을 천문학적이다. 2010년 한 해에만 약 1,000억 달러 가까운 원조가 있었으며, 독립 이후 아프리카에 투입된 자본은 1조 달러에 족히 달한다. 이토론 많은 자본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성장과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현실은 말 그대로 의문과 모순 덩어리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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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서방 세계는 원조의 효과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의미있는 교훈을 얻었다. 원조를 주는 국가, 즉 주체와 행위 자체의 문제점을 인식한 것이다. 그들은 그저 돈과 물자를 주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가 원조의 효과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했고, 원조 받는 국가, 즉 수원국의 실정을 고려치 않는 일방적이고 무성의한 원조에 경각심을 느꼈다. 이러한 원조는 소위 탁상 원조 또는 눈먼 원조이며,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가 원조기금을 착복하거나 잘못 사용함으로써 원조의 효과를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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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지도자자들, 그리고 대부분 공여국 정부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제프리 삭스와 같은 경제학자 그리고 아프리카주의자들은 원조의 양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이를 근절한다고 병들어가는 수천만 아프리카인들을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역시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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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전체 GDP 대비 12퍼센트 이상의 원조를 요구한다. 실제로 콩고, 부룬디, 라이베리아, 르완다, 시에라리온과 같은 나라는 국민 총소득의 30~50% 정도를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기니비사우 정보 예산의 절반 이상은 원조 받은 돈이며, 부룬디는 1년 국가 총수입액과 맞먹는 규모의 원조를 받는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의존성이 해가 가도 낮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원조를 얻어 내는 것은 공무원과 정치가들의 능력으로 간주된다. 대통령도 원조를 유치한 장관을 신임하기 마련이다. 국회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 원조를 유치하기 위해 발로 뛴다. 원조사업으로 병원이나 학교가 지어져 준공식을 치를라치면 수없이 많은 공무원과 정치가들이 나서서 밥숟가락을 올려놓는데, 이들은 마치 병원과 학교 설립이 자신들의 업적이라는 듯 연설한 다음 기념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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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역시 대형 원조 프로젝트를 발굴하기 바쁘다. 파리선언 이후 꽤 재미를 보는 업종은 아마 서구의 컨설팅 업체일 것이다. 아프리카 정부는 신공항, 고속 도로, 댐, 항만, 국립극장, 신도시처럼 야심만만한 건설 프로젝트들을 쏟아내는데 이는 모두 원조가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한 사업들이다. 컨설팅 업체들이 사업의 타당성과 수익성을 보기 좋게 꾸며주고, 정부는 사업 계획이 완성될 때마다 외교단과 원조 기관들을 불러 모아 설명회를 가진다. 물론 개발 프로젝트를 발굴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부가 기존에 있던 것들을 유지, 보수해서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만 신규 사업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조받은 농기계, 자동차, 트럭이 고장 나도 이를 고쳐서 쓰려하지 않는다. 새롭게 원조 받는 편이 훨씬 수월하고, 또 국민들에게 더 큰 홍보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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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의한 원조가 아프리카 독재자 개인의 통치자금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딸의 결혼식을 콩코드 기내에서 치렀던 모부투나 '프랑스에게 요구해. 그럼 돈을 줄 테고, 그럼 우린 그걸 낭비하는 거지' 라 했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독재자 보카사의 말은 1960년대의 원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비단 그 시절만의 일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원조를 횡령하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혐의가 종종 언론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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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재정이 원조로 채워지고, 각종 국책 사업도 남의 돈으로 이뤄지다 보니, 국민에 대한 책임 의식이란 게 자랄 수 없다. 제네바에서 알게 된 유엔개발계획의 어느 직원은 '에티오프아 공무원들은 정부나 국민보다 유엔과 공여국 정부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잘만 하면 원조 사업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이는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걷어서 주는 봉급의 수십, 수백 배나 되는 돈이다. 아프리카의 공무원들이 정상적인 소득으로만 외제 승용차를 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형 벤츠를 타는 와벤지족들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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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는 수원국의 정치 또는 민주화 수준을 높이는 것과는 직접 연관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원조가 민주주의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오늘날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북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부패지수가 낮은 국가를 선별하여 공적 원조를 지급한다. 원조는 아프리카 국민들을 위한 것이지, 정부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기에 이 점을 아는 정부만을 선볅하여 원조 프로젝트의 파트너로 삼는 것이다. 하편 유럽연합은 공적 원조의 상당 부분을 아프리카 선거 시스템 구축을 위해 지급한다. 독재자의 투표 조작을 막아 국민들의 선택을 신성하게 여기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아프리카 비극의 출발점은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는 정치 문화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유럽의 민주주의형 원조는 그런 의미에서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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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참여형' 원조나 '수익 창출형'원조가 대안으로 제시된다. 단순히 우물을 파주거나 밀가루를 제공하는 것보다 우물 파는 법과 제분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보다 지속적인 효과를 보장한다. 원조에 관한 한, 얼마나 많이 하는가는 사실 의미가 없다.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하는가가 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과거 미국의 아프리카 무상 식량 지원 사업인 '평화를 위한 식량 계획'처럼 아프리카 농민들의 경작의욕을 저하시키는 원조는 안 된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은 가나 의회에서 '아프리카의 미래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달려 있다'고 연설했다. 그는 아프리카인의 운명과 이를 위한 변화는 은크루마나 조모 케냐타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 아프리카 국민들과 이들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이 주도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원조는 양날의 칼과도 같아서 자활의 의지가 없는 이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고, 돕겠다는 이들에게 원조 피로감을 줄 뿐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국민을 돌보지 않는 정보, 운명론적 토속 신앙에 물든 아프리카인을 상대로 한 원조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보다 큰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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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기보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장기 집권을 노리는 대통령들은 헌법을 무시하거나 고치면서까지 출마함으로써 일단 물의를 일으킨다. 정부는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를 치를 의지도 능력도 없다. 부정과 폭력이 만연하기에 늘 선거 결과를 놓고 분열과 갈등이 반복된다. 아프리카연합이나 유럽연합 같은 제3자가 매번 선거 감시단을 파견하고, 감시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어쩌면 아프리카 집권자들 때문이다. 그들은 고집스럽게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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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야당이 자리를 잡은 것은 1990년대부터인데, 그 이전까지는 법적으로 야당의 설립과 활동이 금지되어왔다. 그만큼 일당 통치의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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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규정된 서구식 정치 행위가 몸시 부자연스럽고도 거북한 것임을 깨달은 엘리트들은 아프리카식 통치를 정당화하게 된다. 아프리카 정치의 가장 큰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일인, 일당 통치는 가나 건국의 아버지 은크루마의 개인적 정치 철학으로 머물지만은 않았다. 미국 유학생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한 은크루마는 1950년대 말 과도 정부 수반 시절부터 야당,노조, 언론을 탄압하는 악법을 만들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1960년에는 아예 헌법을 개정해서 여당을 제외한 정당을 없애버렸고, 스스로를 종신 대통려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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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 독재와 폭력, 쿠데타가 끊임없이 반복되었지만,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과거의 교훈을 무시한 채 여전히 일당 통치에 빠져들었다. 그 누구든 권좌에 오르면 야당을 혐오했는데, 이는 사실상 국민적 단합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