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습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무언가 갈피[각주:1]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가슴이 유난히 두근 거린다. 이럴 때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가만히 차분해질 때 까지 숨을 고를 수 밖에 없다. 생각이 많아져서이다. 그런데 그럴 때 일수록 역효과가 난다. 무언가 할 것이 많이 있는데 반대로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이런 일은 때에 따라 몇 일이 지속되며 헤어나오기 힘들 때도 있다. 이런 걸 다른 사람들은 슬럼프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살면서 염두해 두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배웠다> 라는 시에 나온 한 대목인데, 마음에 간직해 둔 글귀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것 자체는 더 이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가 중요하다.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우연의 사건을 필연의 사건으로 바꿀 수도 있다. 어떤 일이 나의 잘못에 의해서 벌어졌다면 충분하고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반대로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만큼 그 기쁨을 누려야 하는 동시에 왜 나에게 그런 긍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는지 주변을 살펴야 한다. 나의 기쁨 뒤에는 분명히 다른 이의 그림자와 아픔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해두어야 한다.


이처럼, 유난히 두근 거리는 가슴을 달래기 힘든 슬럼프가 왔다면, 일단은 천천히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아직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무언가 하고 싶은데 능력이 되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로 충돌되는 가치를 모두 지키고 싶은 것은 아닌지, 조용히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서 수 없이 부딪쳐서 나온 말 한 마디가 필요하다.


몰입이란

자신을 새로운 시점, 높은 경지로 들어올려

그곳에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연습이며

군더더기를 버리는 행위다


몰입이란

알게 모르게 편견과 고집으로 굳어버린

자신을 응시하면서 그것을 과감히 유기하는 용기다. (발췌)


이렇게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내 자신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이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나의 강점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응시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담단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시선이 아닌

새롭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진부한 사람은

자신 속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안무를 갖지 못한다. (발췌)


중요한 순간이 다가 온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분명히 자각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찾아가지만, 대부분이 여기까지이다. 나 역시 항상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다이어리에 새로운 목표를 적어내고,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려고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실천이다. 여기서는 실천을 '용기'라고 부르겠다. '용기'로 말미암아 변화가 생기고 삶이 변하게 된다. 지금까지가 어떤 순간을 준비하는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의 수많은 노력이었다면 '용기'로 그 임계점을 넘어설 수 있다. 얼음이 물로 변하고,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그 시점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의 몸에 베어 들기 시작하는 아우라'를 말한다.

'아우라'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진정성'의 표현이다.


"당신은 1년 동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고,

그 운명적인 삶을 자발적으로 실천했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 

자신만의 삶의 문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발췌)


'아우라'는 용기의 결과로 생겨난다.  우리는 '아우라'가 생겨나는 그 지점, 즉 임계점은 알지 못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때로는 지치고 지겨울 수도 있는 그 시간을 참아내는 인내의 시간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몇 발자국을 남겨두고 발 길을 돌린다. 아쉬운 순간이다. 그 시간을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가? 그 때를 위해서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단련이 필요하다. 진리는 항상 복잡하지 않고 어렵지도 않다. 어쩌면 너무 쉬워 모두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차분하고 묵묵하게 한 걸음씩 발을 내딛을 수 밖에 없다. 






  1.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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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의 『시대를 훔친 미술』 은 '미술'과 '세계사' 두 분야의 만남이다. 

한 동안 융합(Convergence)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심리학과 문학', '고전과 경영학'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퍼져 나오는 파동의 접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솔직히 이런 종류의 책이 인상적이었던 적은 드물다. 글쓴이들은 대개 어떤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정통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맥락을 이어주는 것으로 그친다. 융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 무언가의 새로움을 기대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미술'과 '세계사' 두 분야를 각각 떼어놓고 읽어보아도 이 책의 깊이와 재미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때 융합이라는 것이 힘을 발휘한다. '세계사'는 '미술'이 만들어지게 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뒷받침해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더 많은 감상의 지점들을 제공해준다. 반대로 '미술'은 어쩌면 살짝 건조할 것 같은 '세계사'의 흐름 속의 단면을 시각적으로 제공해주면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넘겨준다.

 

중세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주요 역사적 사건과 그와 연관된 미술작품을 소개시켜주는 이 책은 다른 책에서 아직 접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숨어있어서 읽고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몇 가지 역사적 사건과 미술 작품들을 소개한다.

 

1488년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판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빠르게 인쇄되어 확산되었다. 필사본으로 책을 만들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책은 이제 부유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게대가 활자본은 필사본과 구전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미덕까지 자랑하며 동일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빠르게 집결했다. 텍스트는 혁명을 가져온다는 논리의 첫 번째 예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르네상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신앙에 대해서도 기존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p107)

 

바티칸은 개신교가 퍼져 나가는 것을 구경만 하지 않았다. 가톨릭 내부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대응한 새로운 운동을 반종교개혁이라고 한다. 교황 식스투스 5세는 반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로마를 새롭게 꾸며줄 건축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예술가들을불러 모은다. 십팔년 간의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를 통해서 가톨릭교의 개혁과 혁신을 다짐하던 시점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 덕분이었다. 개신교가 문자를 선택했다면, 가톨릭은 미술의 강력한 힘을 다시 불러냈다.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은 17세기 바로크미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권위와 영광을 드높이는 화려한 바로크미술이 꽃피게 된 것이었다. (p127)

 

▲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성 베드로의 순교」 (1601)

 

▲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성 베드로 무덤의 덮개 장식(1624)

 

바로크 양식의 회화는 명암대비가 뚜렷하다. 보는 이의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 잡아서 그림 속의 인물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바로크의 예술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얻는 성 베드로의 덮개 장식은 높이가 29미터나 되며 기둥과 덮개는 역동성을 자아낸다. 예전에 배낭여행 중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 간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덮개 장식을 보았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서 부터 압도되었던 나는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는 넋을 잃었다.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티칸의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미술을 앞세운 것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나 보다. 이제는 300년을 뛰어넘어 스페인으로 가보자.

 

▲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1937)

 

피카소는 히틀러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바스크 지역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 습격 사건을 다뤘다. 프랑코의 요청으로 1937년 4월 26일 히틀러 콘도르 군단의 비행대들이 민간인 마을을 기습하면서 감행한 융단 폭격으로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고 마을은 초토화 되었다. 이로써 공화정부군의 퇴로 차단에 성공한 프랑코는 전쟁의 승세를 잡았다. 승리의 대가로 나치는 바스크 지역의 공장과 제강소 대부분을 차지했다. (중략) 나치는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최신 무기의 성능을 아낌없이 실험했고 전쟁의 자신감을 키우며 확대해갔다. 게르니카에서 자행된 참혹한 학살은 국제적인 반파시즘 국제 여론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폈다. 프랑코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여론에 대응하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말 뒤집기에 나선다. 그들은 방어자들이 퇴각하면서 고의로 게르니카 지역을 파괴했다고 거짓 주장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전 세계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스페인에서 자행된 파시트들의 반인륜적인 행위에 분노했다. (p513)

 

『게르니카』는 피카소 생전에는 스페인에 가지 못했다. 1968년 프랑코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가져오고자 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복구될 때 까지 스페인에 자기 작품이 전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었다. 피카소는 프랑코보다 2년 먼저인 1973년에 자기 염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81년 마침내 『게르니카』는 피카소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조국 스페인에 발을 디뎠다. 이후 스페인에 영구 소장되어 타협과 대화라는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지 못해 불행에 빠졌던 역사를 환기하고 있다. (p517)

 

스페인내전은 이념의 격전지였고, 여기에는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네루다, 생텍쥐페리 등 많은 지식인들이 '국제 여단'을 만들어서 파시즘 세력에 대항하기도 했다. 여기서 이들의 작품으로 확장해보면 스페인 내전과 파시즘에 대한 이해를 더 도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위의 두 가지 사례만으로도 '미술'과 '세계사'의 훌륭한 조화, 두 파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신하며 글을 맺는다. 융합은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융합될 요소 개별적인 것들의 성숙 그것이 뒷받침되어야 새로운 빛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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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그래픽 노블을 한 권 읽었습니다. 그래픽 노블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만화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내용이 풍부해서 일반 만화책 보다는 글밥이 많이 있습니다. 만화책인지 알고 집어든 첫째 아이가 '아빠 이거 글씨가 너무 많어~!' 하더니 살며시 내려 놓더군요.

그래픽 노블은 어떤 책들이 있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중 나치 수용소의 모습을 담은 아트 슈피겔만의 『쥐』 와 스페인 내전 당시를 묘사하는 안토리오 알타리바와 킴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최근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팔레스타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마 많은 분들이 '테러', '난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각날 것입니다. 왜 이런 이미지들이 일반 사람들의 생각에 각인이 된 걸까요? 그리고 어떤 배경에서 '테러', '난민', '분쟁'이 발생하는 걸까요? 예전부터 언론에서 관련 해외 사건 보도가 나올 때마다 생각했던 질문입니다. 뒤늦게야 『팔레스타인』이라는 책을 만나고 그 궁금증을 조금 해소해봅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비극의 시작 - 맥마흔 선언과 벨푸어 선언


비극의 시작은 영국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동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땅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영국은 중동의 아랍인들을 설득해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때 전쟁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아랍인들의 독립을 약속합니다. 바로 1915년의 맥마흔 선언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똑같은 땅을 두고 또 다른 약속을 합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미국내 유대인들의 영향력과 재원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 조건으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을 합니다. 1917년의 벨푸어 선언입니다. 바로 영국의 이중계약이 지금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이 문제를 UN으로 넘깁니다. 유엔은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해서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통과시킵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팔레인스타인으로 모이게 되고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2000년이 넘는 동안 그 땅에 살고 있던 이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 중동 지역은 화약고로 변하게 됩니다.

▲ 지역적 위치


▲ 되풀이되는 중동의 비극 끝낼 방법 없나 - 중앙일보



■ 이스라엘과 그 뒤의 미국


▲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 위원회 (AIPAC - The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 Committee)


궁금한 점이 하나 생깁니다. 어떻게 아랍 연합국이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을 어떻게 국가의 틀을 만든지 얼마 되지 않는 나라가 이겨내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뒤에는 든든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내 유대인은 전체의 3%를 차지하는 많지 않은 수 입니다. 그런데 이 소수가 미국의 금융, 석유, 식량, 경제, 연예계, 학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미국의 양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에 엄청난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심에는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 위원회(AIPAC)가 있습니다. 


미국의 대선 후보는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 위원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이들이 누구 편에 서냐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위원회는 워싱턴의 1,2위를 다투는 로비단체입니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가 이스라엘을 지지하게 만들고 공적인 토론에서 이스라엘이 비판받지 않고 긍정적으로 묘사되기 위한 전략을 세웁니다. 또한 AIPAC 의 의견과 반대되는 후보들이 나오면 그 반대 정당을 지지하면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을 낙마시킵니다. 


이런 결과들이 이스라엘을 중동의 한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를 갖춘 국가로 만듭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400억 달러 이상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76년 이후 언제나 미국 해외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며 수혜국 중 유일하게 원조액을 사용한 내역을 보고할 의무가 없는 국가입니다. 미국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과 공유하지 않는 정보까지 이스라엘과 공유를 하며 다른 동맹국들에게 판매하지 않는 무기까지 판매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1960년대 이스라엘이 비밀 핵무기 개발하는 것 까지 용인해 줍니다. 


1982년 이래 유엔 아보리에서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결의안을 통과를 막으려 미국은 33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엔 총회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내 불법 정착촌 건설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에는 찬성 115, 반대 2표 였습니다. 2표는 이스라엘과 미국이었습니다.



■ 가려진 이야기


우리가 해외 언론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소식을 들을 경우 거의 대부분은 팔레스타인들의 이스라엘 테러 관련된 소식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인식에는 팔레스타인에 조금은 더 부정적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스라엘이 선(善)이고 팔레스타인이 악(惡)일까요? 한 번 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시선은 상당히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 보도의 정확성-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사례연구> 라는 논문을 보면 미국에서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보다 이스라엘 어린이 사망기사 통계상 30배 이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사망하는 빈도는 그 반대입니다. CNN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보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CNN 간부는 하루 수백 통의 불만 메일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비판적 보도를 한 NPR(공영라디오방송)은 100만 달러 이상의 후원금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번 걸러진 소식들이 우리들에게 들어옵니다. 언론에서 관련 소식을 듣는 다면 이제는 한 번쯤은 다른 각도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변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토에 대해서도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위의 지도처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영토에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영토에 거주하고 있다면 문제는 덜 할 것입니다. 심지어 720km 에 달하는 국경에 이렇게 분리장벽까지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서안지구) 내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스라엘 군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구도 20만명을 넘어섭니다.


▲  이스라엘이 건설한 팔레스타인을 분리하는 장벽 (약 720km) 


▲  팔레스타인에 건설된 이스라엘 정착촌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 건설된 이스라엘 정착촌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의 골을 더욱 깊이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1987년 부터 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운동인 인티파다가 시작됩니다.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독립을 바라는 민중의 바람이 투영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저항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습니다. 화력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에게 할 수 있는 건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것 뿐입니다. 


이런 저항이 일어난 다음 날은 이스라엘군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찾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잡아가 우리나라의 군사정권시기와 비슷한 고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위해서 팔레스타인들을 거주지역에서 몰아내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또 다시 돌을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군들에게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인들 - 출처 : 연합뉴스


▲  이스라엘 군들에게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인들


어쩌면 제가 이 글을 쓰면서 팔레스타인 편향적으로 썼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모두 그들 만의 투쟁 이유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들은 약자의 입장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국과 UN에 의해서 그동안 살고 있던 땅에서 쫓겨나고 살던 터전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그 지역의 구속력을 강화합니다. 그들은 단지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이유 만으로 그렇게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저항은 '테러'라는 이름으로 변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상식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힘과 권력이 만들어 놓은 산물이 상식으로 바뀌는 경우가 더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진정한 상식과 만들어진 상식을 구별할 줄 아는 시선입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 오던 것들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조금 더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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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건축법에 규정된 건축의 정의는 "건축이란 건축물을 신축, 증축, 개축, 재축하거나 건축물을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다.

그러나 건축을 건설과 분리시켜 국토교통부 같은 곳이 아니라, 문화부 산하 문화유산부에 소속하게 한 프랑스는 1977년에 제정한 건축법에서 이렇게 건축을 정의한다. "건축은 문화의표현이다. 건축적 창조성, 건축의 품격, 주변 환경과의 조화, 자연적/도시적 경관 및 문화 유산의 존중 등의 공공적 관심사다."


건축에 대한 정의부터 다르다. 우리나라는 건축을 부동산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문화유산으로 여기며 법을 제정한 것이다.

이렇게 다른 시작은 결국 다른 건축물, 다른 도시공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과연 어느 나라의 도시 공간에서 살고 싶을까?


우리가 흔히 쓰는 '우리가 책을 만들지만, 다시 그 책이 우리를 만든다.' 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윈스턴 처칠이 1943년 10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의회 의사당을 다시 짓겠다며,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 라고 연설한 부분을

타임스(The Times)가 인용한 말이다. 바라보는 시선부터 다르다. 우리에게도 건축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건축가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는 이런 건축과 우리가 사는 공간 그리고 도시에 대해서 인간 중심으로 풀어낸 한 편의 인문서적이다. 그의 첫 책이자 그의 건축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빈자의 미학』을 그는 가난한 이가 아니라 가난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건축 방법론이라 했다. 그런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책으로, 건축과 도시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성찰하고 있다.


▲ 건축가 승효상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을 읽으면서 특히 눈에 들었던 부분이 있다. 바로 프랑스 국립 도서관 건립에 관한 내용이다.
1989년, 그랑프로제(Grand Project)의 하나인 프랑스 국립 도서관 현상 공모에서 심사위원단이 두 개의 안을 뽑은 후 최종 결정을 미테랑 대통령(1916~1996)에게 미루는 일이 생겼다. 당시 심사위원단에는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렌초 피아노(1937~)도 포함되어 있는 역량있는 심사단이었지만, 대통령의 식견을 신뢰하고 그에게 위임한 것이다.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은 당시 43살이었던 도미니크 페로(1953~)의 설계안을 선정한다. 도미니크 페로는 이화여자대학교의 ECC 설계자이기도 하다.


▲ 프랑스 국립 도서관 전경(미테랑 도서관)


▲ 프랑스 국립 도서관 외관


▲ 프랑스 국립 도서관 내부


당시 해당 설계안 선정에 대한 미테랑 대통령의 평론을 소개한다.


"그의 디자인은 대칭 속에서 명료하며 선들은 절제되고 그 속의 공간들은 참으로 기능적입니다. 마치 침묵과 평화의 요구인 것처럼, 이 건축은 지면 속으로 파고 들었으며, 네 개의 타워는 이 도시의 심장부인 광장을 만들었습니다. 땅과 하늘에 생겨난 이 도서관의 산책로는 모두에게 열려 있어, 현대도시의 새로운 거처인 이 넒은 공공의 공간에서 우리는 만나고 섞이게 됩니다. 페로의 이 작업은 일개 건축이 아니라 미래를 예시하는 하나의 도시 계획입니다. 바로 그가 인류가 갈망하는 지식과 아름다움을 위한 위대한 성취를 이룩한 것입니다."


프랑스는 이 도서관을 미테랑 도서관이라고 이름 지으며, 그를 영구히 기리기로 한다. 그가 대통령 직을 마친 후, 예전에 저지른 불륜으로 인한 혼외자식 문제가 드러나자, 그 사건이 불륜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로 회자될 정도로 프랑스는 그를 보호하고 사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1996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전 세계에서 연민의 정을 보내왔으며, 정적인 시라크 마저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 도서관 건축을 단순히 도서관 하나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의 건축물이 공공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삶에 관점에서 건축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테랑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97년 부터는 프랑스의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기 위해 '2000년 포럼'을 운영한다.

오랜 기간의 논의 끝에 프랑스는 2000년이 시작되기 전에 21세기 맞이 행사계획을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2000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모든 지식의 대학'이라는 주제로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지 매일 토론한다. 과학기술을 주제로 200여회, 인문과학으로 100여회, 21세기의 장점에 대한 내용으로 60여회를 구성하는 이 토론회는 미테랑 도서관과 퐁피두 센터, 과학의 집에서 개최되며 매일 TV로 생중계하고 기록하여 모든 일정을 마치면 책으로 발간하여 보존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이게 바로 '격(格)' 이구나! 초고층의 높은 빌딩과 경제성장률의 수치 등은 국가의 격을 만들 수 없구나. 결국 격(格) 은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진지한 성찰과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격(格)을 향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함께 예전에 EBS 지시채널e 에서 소개한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인 '바칼로니아'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1808년 부터 지속되어온 이 시험의 목적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바칼로니아는 모두 주관식이고 특히 철학 문제는 세개의 질문 중 하나를 골라 4시간 동안 자기의 생각을 글로 적어야 한다.

중국의 천안문 사태가 있었던 1989년의 문제는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가?"

이민자 폭동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2006년은 "특정한 문화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정치인의 탈세와 온갖 비리로 얼룩졌던 2013년에는


이것이 격(格) 이다.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과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세상에 접근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들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매체와 매개가 다를 뿐이지, 결국 바라보는 세상은 같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으로 올바른 세상에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닐까?


만약 바칼로레아가 우리나라에 있다면,

과연 2016년 지금은 어떤 문제가 등장할까?

그 질문에 대해 각자 생각할 시간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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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시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시간 속의 삶은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인식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부모님의 하나 둘 늘어나는 주름에 변화를 실감합니다.

하지만 공간 속의 삶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넓게는 지금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 아시아라는 대륙,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좁게는 집 앞의 거리를 거닐며, 출퇴근 길의 도로를 이용하고, 집 안의 작은 서재와 침실에 이르기까지,

1초, 2초 시간이 끊임없이 지나가듯, 우리도 끊임없이 어떤 공간 속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 속의 삶에 익숙한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10년 후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면서,

하루를 24칸으로 나눈 다이어리에 일정을 체크하고, 일을 하면서도 업무 속도를 개선하기 위해 이런 저런 고민을 합니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는 공간에 대해서 어떤 고민을 할까요?

별다른 생각없이 지나던 길을 다니고, 타던 버스를 타고, 익숙한 풍경을 지나서 집과 회사를 오갑니다.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는 별 다른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주 동안에 공간이라는 것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정착할 공간을 찾으려고 이곳 저곳을 알아보았지요.

저 역시 많은 사람들처럼 수많은 네모진 박스의 한 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런 저런 고민을 합니다.

주변에 쇼핑몰이 가깝고, 공원이 있으며, 학군이 좋고,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통도 편리하다고 추천하는 아파트가 있습니다.

반면에 중심가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주거용으로 지어진 곳이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시설을 이용하려면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 하는 곳입니다.

그 접근성이라는 요소가 네모난 콘크리트 아파트의 작은 한 칸을,

평범한 직장인이 20~30년에 걸쳐서도 사기 힘든 공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와 도시와 동네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 참여시 '어디에 사는 누구'라는 자기 소개가 그걸 말해준다. 이방인은 자리만 바꾸지 않고 자신의 특성까지 바꾼다. 공간은 인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 인간을 변화시킨다.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공간과 분리된 채 자신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본질을 획득" 한다.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p144)

 

사람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시간은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가지만, 공간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마다 지금 현재도 각기 다른 공간에 있지요.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에서 인상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화가 나혜석에 대한 부분입니다. 

제가 사는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 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 거리의 중심에는 나혜석의 동상이 있지요.

하지만 그녀가 화가였다는 사실 말고는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습니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로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공(空)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사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의해 희생된 자 이었더니라" - 나혜석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p171)


화가인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의 신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프랑스 파리에도 다녀옵니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를 경험하고, 그 공간에 매료되었나 봅니다. 190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에는 프랑스의 문화예술인 뿐 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 제럴드 등이 머물렀던 공간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나혜석이 있었네요.

이런 그녀가 프랑스 파리라는 공간 속에서 계속 살아갔다면 분명 다른 삶을 살았겠지요.

공간은 이렇게 사람들을 다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공간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공간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공간이 사람들에게 똑같이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 공간 속에서 얼마나 자기가 느끼고, 그 공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느냐가 중요하지요.



보잘 것 없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위대함 속에서 보잘 것 없음을 찾아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크고 화려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허풍과 허세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스쳐지나가는 작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들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눈도 가지고 있다.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p43)


저도 무언가 새로운 시야를 얻고 싶습니다. 

낭만의 도시 프랑스도 가보고, 

드높은 마천루를 자랑하는 뉴욕 거리도 걸어보고 싶습니다. 

원시림이 살아 있는 아마존 유역도 가보고 싶고, 

고대 도시의 흔적을 찾아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를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들 비슷할 겁니다. 시간이 없죠.

시간이 많으시다구요, 그럼 그 때는 돈이라는 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사는 이곳에서라도 새로운 시야를 얻어보는 수 밖에요.


저는 예전에 그냥 지나가면서 간판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메모장에 다 적어 보았습니다.

가로수가 어떤 나무인지도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은 나무가 대부분이어서 알지 못했지요.

그러던 중에 일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새롭게 생각하는 방법을 집 근처 도서관 서가를 어슬렁 거리다가 발견한 거 같습니다.


그 책은 앞서도 몇 번 언급했던 정수복 작가의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라는 책입니다. 

우연히 만난 작가이고, 스쳐 지나가면서 고른 책이었는데, 

알고 보니 제 서가에도 이 분의 책이 한 권 꽂혀 있네요.

바로 책 읽는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적은 『책인시공』이라는 책입니다.

이 분의 책들을 보니 '공간' 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라는 책의 뒤에 보면 아주 소중한 정보가 있습니다.

저는 이걸 노트에도 적어두고, 별도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도시를 걷는 16가지 방법> 이라는 글입니다. 

각각의 방법을 소개하고, 조금 상세하게 방법을 기술해 놓았지요.

상세한 내용을 일상에서 꼭 한 번 활용해봤으면 좋겠네요. 책 한 번 꼭 읽어보세요.

여기서는 짧게 16가지 방법을 소개드립니다. 


1. 도시 전체를 보여주는 큰 지도를 벽에 붙이고 매일 다닌 지역을 표시한다.

2. 편안한 보폭으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3. 도로, 자동차와 사람들의 흐름, 가로수, 건물, 상점, 간판, 신호등, 진열창 등을 찬찬히 자세하게 바라본다.

4. 밖에서 보는 건물과 들어가 본 건물은 다르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모조리 다 들어가본다.

5.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먹고 마시고 무엇 하나라도 산다.

6. 안 가본 구역, 낯설고 잘 모르는 동네를 일부러 찾아다닌다.

7. 도시의 역사, 문화에 대한 책, 여행기, 안내 책자 등을 다양하게 읽는다.

8. 책에서 알게 된 장소를 방문하여 사실을 확인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9. 때로 함께 걸을 친구를 만들어 방문한 동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걷는다. 같이 걷는 사람에 따라 새로운 것이 보인다.

10. 지름길, 정해진 길, 상투적인 행로가 아니라 자기만의 다양한 우회로를 만든다.

11. 박물관, 미술관, 식당, 영화관 등을 갈 때 그 장소만이 아니라 그 주변을 걸으며 동네 분위기를 파악하고 인접한 다른 지역과의 이음새에 주의를 기울인다.

12. 마음이 가는 장소나 재미있는 동네는 여러 번 방문한다.

13. 방문하여 걸어본 동네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사진을 찍어 노트에 메모를 남긴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본 것, 한 것, 느낀 것, 생각한 것들을 정리한다.

14. 지금 살면서 걷고 있는 도시를 자신이 잘 아는 다른 도시와 비교해 본다.

15. 자신이 쓴 도시에 대한 기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

16. 걷고 싶은 도시, 살고 싶은 동네를 만들기 위한 작은 일에 참여한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습니다. 그런 여름도 비가 내리고 다음 날은 어김없이 사라집니다. 

8월의 막바지가 되면서 끝나지 않을 듯한 더위도 꼬리를 살살 내립니다.

대신에 하늘은 점점 더 드높아지고 있고, 어스름한 저녁이 조금씩 빨리 찾아오네요.

걷기 좋은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어디 한 번 걸어보시죠. 

이제는 새로운 것이 보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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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왔습니다. '박웅현 작가의 『다시, 책은 도끼다』 출간' 이라는 제목입니다. 인터넷 서점에 관심작가에 대한 신간알리미 서비스를 등록해두었더니 이렇게 관심 작가들의 책이 나올 때 문자를 보내줍니다. 최근에는 정유정, 박웅현, 유시민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들이 문자로 날아옵니다. 저에게는 상당히 반가운 문자입니다.


박웅현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고 했을 때, '아, 책 잘 파시는 분이 오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분은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자신의 책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저서에 소개하는 책들까지 독자들이 사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분입니다. 지난 번에 『책은 도끼다』를 읽고 세 권의 책을 주문했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 같습니다.


작가의 서문을 보면 『책은 도끼다』가 독서를 어떻게 해야할까 에 대해서 집중을 했다면, 『다시, 책은 도끼다』는 역시 기존과 마찬가지의 형식이지만 조금 더 개별적인 책들에 집중하면서 내용을 이어간다고 합니다. 읽고 나니 『책은 도끼다 2』라고 해도 좋겠네요. 앞으로 계속 이어서 출간이 되어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1 이제는 시습(時習)이다.



우리에게는 심사, 깊이 생각함이 빠져 있는 듯 합니다. 많이 읽는 게 제일이잖아요. 1년에 100권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심사할 시간이 없죠. 결국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적으로는 많이 읽었을지 몰라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불분명합니다. 책 속의 지식이 진짜 내 것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습, 즉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려는 노력입니다. 이 문장을 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양적으로 부족하더라도 주관적인 이성으로 내가 책에 담긴 내용은 제대로 이해한다면 소중한 지식이 된다는 사실도요.


예전의 제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여전히 그 모습 중 많은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박웅현 작가는 문장을 하나하나 곱씹어서 읽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읽는 저와는 다릅니다. 그가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라면 저는 차 창 밖으로 지나가는 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저는 차 안에서 가끔씩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습(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다)을 하려면 생각과 사색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배웠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도대체 사유, 사색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지? "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은 알거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손에 떼고 머릿 속에서도 잠시 떠나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도 써보고, 혼자 멍하니 생각도 해보는 겁니다. 지나간 일도 다시 한 번 떠올려보고요. 그냥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나 혼자 산다〉를 보니 '멍 때리기 시합' 도 있네요. 이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아마 말은 쉬워보여도 스마트폰에 매몰되어 버린 이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지혜보다 높은 것이 있다, 느끼는 것"  

- 고은


책 속에 보면 '북 스마트', '스트리트 스마트' 라는 말이 나옵니다. 책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랑 실제 경험을 통해서 얻어내는 것입니다. 저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 '책을 읽고 실제로 경험해보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자연의 소중함과 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글을 쓰지만 정작 산을 제대로 찾아가지 않습니다. 허울 뿐입니다. 알맹이가 없어요. 조금씩 경험을 하다보면 알게 됩니다. '북 스마트'도 중요하지만 결코 '스트리트 스마트'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시각적인 것에서 한정된 것에서 촉수가 오감으로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감각이 늘어났다고 그만큼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들 간에 서로 연결되면서 자극과 경험은 극대화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에게 하는 간절한 충고입니다. "이젠 시습이다."



#2 미성(未成)의 시간 그리고 질문



인생을 직선으로 놓고 봤을 때, 9할은 기존(旣存)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에요. 내가 살고 있는 당대, 내가 타고난 삶의 조검 등 대부분의 것은 기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나머지 1할인데, 그것의 9할은 기성(旣成)입니다. 이미 이루어졌어요. 저는 이제 오십대이고, 남자로 태어났고,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건 끝난 겁니다. 되돌릴 수 없어요. 이것들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이 1할의 1할입니다. 바로 미성(未成)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미성의 시간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1할의 1할이니 어떻게 보면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 미성이 곧 기성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미성이 기성으로 넘어갈 때 후회가 없어야 겠지요. 그러려면 미성의 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제 책상 위에 붙어있는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바 없고,

선택한 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탄생 이후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게 

인문학적 사유의 첫번째 과제라는 말의 의미다.

-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中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


도정일 선생은 '탄생 이후의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감당은 '마땅히 견디어 냄'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던지 간에, 그리고 지난 과거가 어떠했던지 간에 이미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땅히 견디어 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미성의 시간에 집중하고 미성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더 의미있게 지낼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미성의 시간을 어떻게 의미있게 보내야 할까요?

제가 이 책을 통해서 얻은 대답은 '질문'이라는 단어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구 중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과정' 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스스로 질문하지 않게 되면 남들이 정해놓은 길, 남들이 가는 길을 생각없이 따라 가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을 조금 더 많이 가졌으면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아쉬운 일은 생겨도 후회스러운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자기들만의 독법(讀法)을 찾아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책에서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해봤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박웅현 작가 만의 소설읽는 법입니다. 그는 밀란쿤데라의 『커튼』이라는 책을 읽은 후에 소설을 읽는 재미가 확 달라졌다고 합니다. 


알랭드 보통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얘기했죠.

우리는 부정확한 정보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고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의 정확한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사랑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치통과 그사람의 방귀끼는 습관과 그 사람의 짜증내는 모습, 이 모든 걸 다 알고는 사랑에 빠질 수 없어요. 부분적인 정보만 가지고 사랑에 빠진 뒤 나머지를 내 상상으로 채워요. 그 상상은 대부분 내 욕망이지요. 그리고 3,4년 후 사귀다 상대가 내 맘대로 안되면 넌 왜 내 바람대로 안되냐고 화를 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원래 그 모양이에요. 이 또한 사랑의 기본적인 속성이죠.


여기서 커튼은 사랑하는 사람의 좋은 면만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커튼을 걷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원래 이 사람의 일상적인 모습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죠. 로맨틱한 상황에 갑자기 배가 아파오고, 나름 잘 보이려고 입은 옷이 너무 꽉 끼어 숨을 참고 신발에 뒷꿈치가 까집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소설에서는 잘 다루지 않아요. 정말 로맨틱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우리의 삶은 커튼 뒤의 모습이 진짜입니다. 그리고 커튼 뒤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을 보여주죠. 

그 한 예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입니다. 소설 속에는 커튼 뒤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는 거 같습니다. 궁금합니다. 다음에 읽을 책으로 선정해 두었지요.


이 책의 마지막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 소개합니다. 제가 항상 읽고 싶다라고 생각만 하고 있는 책입니다. 쉽사리 읽어봐야 겠다고 결정을 못하는 책이죠. 그런데 박웅현 작가는 말합니다. 자기는 스토리를 따라가기 보다는 한 편의 시를 읽듯, 한 줄 한 줄 명언을 읽듯 읽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책에서 인상깊었다는 부분을 소개합니다. 그가 소개하는 문장들을 읽어보니 저도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글귀를 조금씩 얻어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파우스트』도 재미있게 읽을 날이 생기겠죠.

마지막으로 박웅현 작가가 소개하는 파우스트의 글귀를 소개합니다. 역시 후회없는 책이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친구여, 부득이 그대가 청춘을 필요로 할 때란

전쟁터에서 적들이 그대에게 밀어 닥칠 때,

사랑스럽기 한량없는 소녀들이

전력을 다하여 그대 목을 끌어안고 매달릴 때,

빨리 달리기 경주의 월계관이 멀리

도달하기 어려운 골인 지점으로 눈짓하고 있을 때,

회오리 바람처럼 돌아가는 격렬한 춤을 춘 다음

주연을 베풀어 술 마시며 밤들을을 지새울 때 올시다.


지상의 작은 신이라 자처하는 놈들은 언제나 판에 박은 듯,

천지창조의 그날 그대로 괴상망측하지요

차라리 당신이 하늘의 빛을 비춰주지 않았더라면,

인간들이 조금은 더 잘 살아갈 수 있을 텐데요.

인간은 그걸 이상이라 부르며

어떤 짐승보다 더 동물적으로 살아가는 데만 쓰고 있어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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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읽기와 글쓰기를 넘어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공부는 시인 네루다의 질문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회학자들의 관찰력과 인문학자들의 감수성을 통해 공부를 삶으로 살아야 한다. 『공부할 권리』는 이제 진짜 공부를 시작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제공하는 인문학 선언이 될 것이다.


책의 뒷표지에 적혀있는 글귀다. 정여울 작가가 말하는 공부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 그것도 '인간다운 삶'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공부할 권리』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다.


이 책은 인문학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각각의 장 마다 특정한 주제를 바탕으로 작가의 생각

과 관련된 책을 인용하면서 전개된다. 다양한 소주제를 가진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정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이다. 내 안의 감정을 올바르게 느낄 수 있게 해주고, 때로는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재조명해주는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했다.


특히, 분노, 고독(외로움), 무관심이 명징하게 생각나는 단어들이다.


분노는 폭력과 테러, 살인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정의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감정입니다. 부당함에 대한 영혼의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중추가 망가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에너지도 있지요. 인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회를 파괴시키는 에너지로서의 분노'가 아니라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분노, 그러니까 '정의로운 분노'에 대한 공감대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분노는 통제가 어렵기에 부정적으로 평가받기 쉬운 감정이지만,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발산한다면 분노는 구원의 첫번째 발자국일 수도 있습니다. (p229)



분노하면 일단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된다. 하지만 우리 현대 역사의 중요한 변환점에서는 시민들의 분노로 사회가 변해갔다. 너무 넓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일상 생활을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사건들을 바라보더라도 분노가 필요하다.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해서 대기업들이 소비자 즉 사람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 이에 연계되는 학계의 인사들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기업의 부당함, 사회의 부당함, 권력의 부당함 앞에서 분노는 쉽지 않다. 잘못하면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분노를 참게 되면, 결국은 부정적인 형태로의 분노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p100)



언젠가부터 외로움, 고독이라는 단어는 애잔하게 느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라고 속으로 되뇌일 수도 있다. 특히 한 번쯤 외로움을 지독히 경험해 본 사람은 그 강도가 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로움과 고독은 그 순간은 아플 수 있지만, 그 고독을 잘 극복해낸다면 조금은 성장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결국 자기 삶의 중요한 선택과 판단을 위해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게 되고,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쳐해있는지도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나와 같이 내향적인 성향을 바탕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혼자 만의 시간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언급하는 무관심에 관련된 부분이다. 길지 않은 문장이다. 그런데 그 여운은 결코 짧지 않다.


마틴 루터킹 주니어는 말했지요. 역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짜증나는 아우성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의 오싹한 침묵 때문에 일어난다고. (p187)



얼마 전에 심폐소생술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만약 거리에서 누군가 갑자기 심정지가 일어났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일단 호흡을 확인하고 심폐소생술을 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119에 전화를 해달라고 요청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강사는 말한다. 회사나 서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상관없지만 불특정 다수가 모여 있는 곳에서는 어떤 사람을 지목을 해서 연락을 해달라고 해야 한다. "빨간 색 가방메고 계신 분, 119에 연락 좀 해주세요." 그러면 지목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명확하기 때문에 전화를 건다. 하지만 단순히 "누가 119에 연락좀 해주세요." 하면 누군가는 하겠지 하며 아무도 연락을 하지 않을 수가 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한 사람일 테지만 이런 사회가 안타깝다.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후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잊어버린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라고도 말한다.

'나만 아니면 되지', '누군가는 하겠지', '내가 나서서 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어떨까' 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벗어나자. 왜냐 하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관심이 별로 없듯이 다른 사람들도 당신에게 많은 관심이 없다. 그것을 알고 나면 조금 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같은 시작을 했더라도 살아가면서 각자 겪은 경험들이 이정표가 되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가게 된다. 그 이정표가 꽂혀 있는 지점에서 그들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성격이 조금씩 변해간다. 나 역시 그런 길에서 이정표를 만나는 시점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어떤 길을 가야할 지 결정할 시기가 온 것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아지 뿌옇게 잘 보이지 않지만 생각한 것이 있다. 


나는 품위있게 살아갈 것이다.


정여울의 『공부할 권리』의 부제 역시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이다. 

부제가 처음에는 다가오지 않는 글귀였지만, 왜 그렇게 적어두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 『공부할 권리』에서 언급된 책들


저는 책을 읽고 나서 세 권의 책을 구입했네요.


『공산당선언』,  『관찰의 인문학』,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 - 밀턴 H. 에릭슨 (지은이), 시드니 로젠 (엮은이), 문희경 (옮긴이) / 어크로스

- 멋진 심세계 - 올더스 헉슬리 (지은이)

-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 오이겐 드레버만 (지은이), 김태희 (옮긴이) / 교양인

- 일리아드 - 호메로스 (지은이)

- 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지은이)

-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 카를 구스타프 융 (지은이)., 김세영 (옮긴이) / 부글북스

-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 아이스킬로스 (지은이)

-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 마루야마 겐지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 / 바다출판사

-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마루야마 겐지 (지은이), 고재운 (옮긴이) / 바다출판사

-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은이)

- 시민 불복종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은이)

-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지그문트 바우만 (지은이), 강지은 (옮긴이) / 동녘

- 원형과 무의식 - 카를 구스타프 융 (지은이)

- 라스무스와 방랑자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은이)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박완서 (지은이)

-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지은이)

- 최초의 인간 - 알베르 카뮈 (지은이)

- 타인의 고통 - 수잔 손택 (지은이), 이재원 (옮김)

- 별헤는 밤 - 윤동주 (지은이)

-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 크리슈나무르티 (지은이), 김은지 (옮긴이) / 청어람미디어

- 내면의 황금 - 로버트 A. 존슨 (지은이), 박종일 (옮긴이) / 인간사랑

- 큰바위 얼굴 - 너대니얼 호손 (지은이), 고정아 (옮긴이)

- 마음사전 - 김소연 (지은이) / 마음산책 

-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 장 뤽 낭시 (지은이), 이영선 (옮긴이)

- 철학자와 하녀 - 고병권 (지은이) / 메디치미디어

- 척하는 삶 - 이창래 (지은이), 정영목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

- 리어왕 - 셰익스피어 (지은이)

-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 우치다 타츠루, 오카다 도시오 (지은이) , 김경원 (옮긴이) / 메멘토

- 나는 길들지 않는다 - 마루야마 겐지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 / 바다출판사

-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이반 일리치(지은이), 허택 (옮긴이) / 느린걸음

- 이반 일리치의 유언 - 이반 일리치, 데이비드 케일리 (지은이), 이한, 서범석 (옮긴이), 박홍규 (감수) / 이파르

- 인간이해 - 알프레드 아들러 (지은이), 라영균 (옮긴이) / 일빛

- 내 무의식의 방 - 김서영 (지은이) / 책세상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헤르만 헤세 (지은이)

- 이성과 감성 - 제인 오스틴 (지은이)

-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정헤신, 진은영 (지은이) / 창비

- 책도둑 - 마커스 주삭 (지은이), 정영목 (옮긴이)

- 백년의 지혜 - 캐롤라인 스토신저 (지은이), 공경희 (옮긴이) / 민음인

- 공산당선언 -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은이), 이진우 (옮긴이) / 책세상

-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지은이), 김경원 (옮긴이) / 갈라파고스

- 열정과 기질 - 하워드 가드너 (지은이), 임재서 (옮긴이) / 북스넛

- 최고의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 - 루이즈 디살보 (지은이), 정지현 (옮긴이) / 예문

-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 - 윌 슈발브 (지은이), 전행선 (옮긴이) / 21세기 북스

- 관찰의 인문학 -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지은이), 박다솜 (옮긴이) / 시드페이퍼

-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 - 데이비드 리코 (지은이), 김하락 (옮긴이) /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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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해결과 올바른 선택을 위한 길 - 자유론을 다시 읽다.


■ WHY ?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원인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원인이 근본 원인인지 다시 찾아보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한다. 5Why 방법론은 Why를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근본 원인을 파헤치는데 사용된다. 이런 방법론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서 기인한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강의하는 형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면서 제자들의 생각을 이끌어 냈고, 제자들은 스스로 생각의 골을 깊이 파고 들었다. 그렇게 고대의 철학들이 하나씩 깊이를 더해갔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고 가정, 회사, 기타 사회생활에서 선택을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어떤 때는 여러 대안을 모색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 없이, 순간의 빠른 결정을 해야할 시기도 존재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를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가슴 한 켠에 약간의 의심쩍은 부분이 남아있을 때가 있다. '아마 이럴 경우는 없겠지?' 라는 유혹의 손길은 쉽게 놓을 수 없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자.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이게 미궁에 빠지는 문제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무언가 살짝 꺼림직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잘 되잖아. 이런 잘못된 성공은 경험으로 굳어지고, 결국은 반복되고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게 된다.

방법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어질때까지 질문을, why를 반복해야 한다.

 

■ 문제해결을 위한 토론 그리고 자세

이런 근본 원인을 찾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토론'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는데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심사숙고해서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풀리지 않는 부분이 어디인지 명확히 정해야하고, 그것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 만약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렸다면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확실하게 이해를 했다면 잘못된 자신의 의견을 바꾸어야 한다. 상대방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과 어떤 게 다르고 어떤 것이 같은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자세가 있다. 우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기본전제를 가져가야 한다. 동시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의견이라도 그 속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에 나왔던 이 부분도 말을 해야 할때 항상 염두해 둔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데이의 [세황금문]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 진가를 높이는 방어전

어떤 일을 진행하다보면 내가 한 것이 잘했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보다는 '내가 한 일은 문제가 없어.', '내 의견이 틀리지 않았어' 와 같이 다른 의견에 대해서 반박할 필요가 있을 때가 종종 발생한다. 어떻게 보면 이미 만들어낸 성과에, 이미 정립한 의견에 대해서 수없이 대답을 반복해야 하는 수고스러움과 소모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과정 또한 나름 긍정적인 영향을 이끌어 낸다. 권투선수들을 생각해보자. 챔피언에 올랐다고 끝이 아니다. 항상 도전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도전자를 꺾을 때마다 그 선수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내 의견이 내 주장이 내가 만들어낸 무언가가 타인들로 부터 신뢰를 얻게 되고, 그것은 개인의 진가를 더해지게 만든다.

 

■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의 선택

타인과 토론을 하고 자기 의견에 대한 근거를 정립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만족되었더라도 문제가 해결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의사결정에는 수없이 많은 부조리와 불합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정치적인 게임, 사람들의 심리적인 문제, 위계 구조 등이 엮어지면서 단순히 토론을 통해서 넘어 설 수 없는 범위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렇게 세상에는 불확실성, 불합리, 부조리가 존재하기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들이 의사결정과정에서 새로운 변수로 그것도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때는 어느 정도의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할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리스크를 자기가 수용할 수 있을때까지는 진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리스크 수용은 개인과 그 의사결정을 한 조직에게는 크나큰 짐이 되어 버린다.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고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외에도 사람들마다 나름의 방법론과 전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저에 반드시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른 '사람의 중요성' 이다. 올바른 선택과 문제해결을 위해서 토론을 같이 하는 것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도 결국은 감정이 존재하는 '사람'이다. 상대를 단순히 어떤 의사결정을 위한 도구로서의 존재가 아닌 사람으로서 인정하는 마음이 바탕으로 존재해야 진정한 올바른 선택이 이루어질 것이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풀릴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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