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단순히 두 종류로 나누어 본다면 거시적인 측면을 바라보는 것과 미시적인 측면을 다루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개인의 생각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전개되는 소설, 수필, 시와 같은 문학은 미시적인 부분입니다. 반면에 역사, 사회, 과학과 같은 분야는 거시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문학은 특히 개인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미세한 개인의 감각을 건드려줍니다. 반면에 세상을 넓은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내가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떤 환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 생각함으로써 현재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최근에 인간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한 권의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유발 하리리의 『사피엔스』입니다.

수렵채집인부터 시작해서 신만이 가능했던 새로운 창조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인간, 사피엔스를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솔직히 참신한 주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들은 이미 많은 다른 책에서 접한 내용입니다.

진화론, 세계사, 육식에 반대하는 책, 경제학에 관련된 책등에서 부분적으로 들어왔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강점은 바로 이런 내용들을 사피엔스라는 주제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많은 역사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600페이지에 달하는 부담스러운 두께의 책이지만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사피엔스』에서는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혁명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약 7만년 전에 일어난 인지혁명,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 그리고 5백년 전에 시작한 과학혁명입니다.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은 낯설지 않지만 인지혁명은 조금 생소합니다. 인지혁명은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책의 사례를 보면 언어가 없었을 때는 어떤 사냥감이나 채집할 것들을 발견하면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거나 직접 데리고 가야합니다. 그러다보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사냥감이 도망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언어로 빠르게 위치를 설명해주면 그 전보다는 손쉽게 사냥, 채집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인지혁명 시대의 중요한 점은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확연하게 다른 길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농업혁명에 대한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기존의 관점과는 조금 다릅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비교대상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과연 세상이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통해서 사람들 개개인은 과연 조금 더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삶으로 변화해갔을까가 궁금합니다. 모두들 현재 만을 살아가기에 어쩌면 영원히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책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수십, 수백만의 집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를 문화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문화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인지부조화'라는 점입니다.


만일 긴장과 분쟁과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가 모든 문화의 향신료라면,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닐 것이며 서로 상충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되는 핵심적 측면이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까지 있다. '인지 부조화'다.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핵심자산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품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지 부조화'의 개념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혔는데 그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합리적인 결론이 기존에 철석같이 믿고 있던 생각과 정면으로 모순될 때, 사람들은 합리적인 결론보다는 부조리하지만 자신의 기존 생각에 부합하는 생각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지 부조화의 원리(Cognitive dissonance)'입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난 후에는 어떻게든 그 선택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믿으려 애쓰며, 명백한 판단 착오였어도 끝까지 자신이 옳았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개인의 사생활의 사소한 결정에서부터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중대한 결정까지, 인간의 심리를 조종하는 이러한 법칙은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 [네이버 지식 백과]


어쩌면 사람들이 과학과 종료를 모두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인지 부조화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외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몇가지 더 있었습니다.

하나는 각각의 대륙이 어떻게 발견되어졌으며, 대륙의 발견으로 파생되는 원주민 학살과 경제적 관점으로 이어지는 노예무역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의 잔혹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다른 하나는 동물들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소, 돼지, 양, 닭은 지구상에 인간의 수만큼 필적하는 동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인간의 먹이를 위해서 길러집니다. 그렇다면 이게 진화론적으로 성공한 것인가? 결국 번식을 많이 했으니 성공한 것인가? 라는 의문제기와 함께 단순히 인간들의 먹이로 전락한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은 다루고 있기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마다 받아들이는 부분이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게 되면 '나(我)'라는 사람 개개인은 정말 전체 인류의 역사의 하나의 점에 불과하고 지구 밖에서 바라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거야 하는 생각도 들게 마련입니다. 동시에 조금 더 겸손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별다를 게 없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의 역사에서 수없이 많은 잔인한 일을 저지른 이들과 같은 인간이기에 지금 내가 하는 평범한 일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비수를 꽂지는 않는지 한 번 쯤 곰곰히 생각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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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제목 부터 보면 '이 책 제목 참 못 지었네.' 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에 관련된 책은 너무나도 많이 나와 있고, 어쩌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무분별하게 소비가 된다.

'행복' 이라는 단어는 어느 순간 특별하지만 일상이 되어버렸고, 추구해야 하지만 꺼리고 싶은 '행복'이 되어 버렸다.

모두들 '행복', '행복' 이라 하다보니 피로해졌고, 그들이 말하는 방식은 거의 유사하다. 그렇기에 더욱더 '행복'에 대해서 말하는 책들은 쉽게 손이 잡히지 않았다.


얼마 전에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읽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내 놓았다. 그러면서 언급된 책이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이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라는 문구를 보고 나서 과연 어떤 근거로 저런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은 '행복'에 관련된 다른 책들과는 달리 개인적 경험과 감성적인 방법의 '행복'이 아닌 과학적인 실험과 근거를 바탕으로 행복을 논한다 했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제목 『행복의 기원』을 만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2천년 동안 사람들에게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내재되어왔다. (삶의 목적 = 행복)

(삶의 목적 = 행복)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공식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살펴본 이 책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목적을 정의한다. 바로 (삶의 목적 = 생존)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우리가 행복해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 

새로운 접근이 마음에 든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은 생존 확률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고, 행복은 이 청사진 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p64)


다시 행복으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행복해야 하는 이유는 생존하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인가?


우리는 흔히 행복이라고 하면 로또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얻는 생각을 많이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물질적인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연구 결과들이 보여주는 답은 행복과 관련된 것은 '사람'이다. 우리들이 결국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카고 대학의 카시오포 교수 팀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의 가장 총체적인 사망 요인은 사고나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p84)


미국 다트머트 대학의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저면한 뇌과학자로 꼽힌다. 최근 그는 자신의 책에서 큰 질문을 하나를 던졌다.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 일평생의 연구를 토대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다. (p85)


약 10여 명의 소규모 집단에서 생활하던 인간이 정글을 나와 초원 생활을 하며 집단의 크기는 150명 정도로 커졌다.

낯선 이들과의 교류가 증가했고, 이들이 마음속에 숨긴 생각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게 됐다. 이처럼 인간의 뇌를 성장시킨 기폭제는 타인의 존재였다는 것이 최근 널리 각광받는 던바 교수의 '사회적 뇌 가설'의 핵심이다. (p86)


다리가 잘려나가는 것만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 것이 집단으로부터 잘려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뇌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기제를 사용해 그 위협을 우리에게 알렸다. 외로움, 배신감, 이별의 아픔,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신호가 보일 때 뇌는 이런 마음의 아픔을 느끼도록 했고, 그 덕분에 더 치명적인 고립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 원인은 달라도 기능은 같다.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니 조치를 취하라는 신호다. "너 아직도 TV보니? 당장 나가서 여자친구 붙잡아!" 사회적 고통이 전하는 메시지다. (p87)


우리의 뇌는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을 동일하게 받아들인다.

책에서도 언급된 흥미로운 실험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진통제로 많이 먹는 타이레놀을 사회적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먹을 경우 육체적 고통을 겪을 때 완화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점이다. 고통이라는 우리의 생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요소로 뇌는 그 위협을 먼저 판단해서 전달하고, 그 위협을 막으려 한다.


그런데 대단히 안타까운 견해가 있다.

바로 행복은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만약 행복이 노려글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행복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있다면 어떨까? 가뜩이나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게다가 플라스틱수저 라는 말까지 도는 상황에서  행복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면. 갑자기 힘이 쭉 빠지고 나는 행복유전자를 받고 태어났기를 하는 개인적 이기심으로 돌아간다.


행복해지려는 노력은 키가 커지려는 노력만큼 덧없다.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그래도 행복에 있어서 유전적 개입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다.


학계의 정설 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덜 알려진 사실이 바로 행복과 유전의 관계다. DNA가 행복을 완전히 결정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학자에 따라 다소 의견이 다른 통계적 수치지만, 학계의 통상적인 견해는 행복 개인차의 약 50%가 유전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p133)


여기서 행복과 관련된 유전적 개입은 '외향성'이라는 특성이다. 외향성 즉, 서은국 교수가 말하는 '사람쟁이'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과 같이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타인이 자기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타고난 재주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결국 외향성이 행복을 만드는 구나.

이렇게 또 다시 내향적인 나같은 사람은 또 다시 좌절해야 하는가? 다시 이 책을 덮고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수잔 케인의 『콰이어트Quiet』로 돌아가야 하는가.


책에서도 내향적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두둔하는 것 같지 않다. 단순히 어색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보통 책들을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래도 유전적인 것을 극복하고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다' 라는 탈출구를 하나 만들어 놓는데 이 책은 이런 말을 남길 뿐이다. 시크하지만 밉지 않다.


P145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한다. 어색함 대 즐거움. 최근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새로운 만남이 주는 즐거움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래된 연인과의 데이트를 택하지만, 실제 경험을 측정하면 낯선 이성과 식사한 후의 즐거움이 더 크다. 그러니 내향적인 사람들이여, 어색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볼 필요가 있다.


20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책인데 좋은 책을 읽고 리뷰를 하다보니 말하고 싶은 것이 많다. 지금까지 언급된 부분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

■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우리의 뇌도 그런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사실

■ 행복은 외향성이라는 유전자를 통해서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이 몇 부분이 더 남아있다.

이 책은 리뷰가 두 번으로 이어져야 겠다.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이런 책, 좋은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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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현상학이라는 단어가 계속 들려왔다. 도대체 현상학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간단하게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에서 '현상학'이라는 세 글자를 입력하고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을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되어진 책이 바로『후설&하이데거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이다.


이 책은 스승과 제자 사이인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각각 설명하며 어떻게 서로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책은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았지만, 책을 덮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그래서 도대체 현상학이 뭔데?'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들었다. 현상학은 무엇일까? 아직 한 권의 책으로는 정의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번에는 단순히 물꼬를 튼 것으로 생각하고,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위주로 글을 정리하려 한다.


우리가 보통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동일한 현상과 사건에 대해서 서로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태도가 객관적인 태도인가?  어떤 방식이 올바른 방식인가?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현상의 의미는 늘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 즉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현상'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설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참된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말한다. 어떤 현상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고, 문제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객관적인 태도라는 것이다.(p72)


'사태 자체'란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보는 것이 가능할까? 비록 우리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말은 하지만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후설 역시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후설 스스로도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포함해서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태가 왜 다른 의미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은 바로 그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 즉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의 의식이 해답의 열쇠를 쥐고 있다.(p73)


어떤 현상을 과연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가?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바라 볼 수 있는가?

분명 쉽지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주관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겠지만 주관적인 시선에 더불어서 다른 이들의 시선에 대해서 항상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자신과 충돌되는 지점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해가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사태가 벌어졌다는 현실은 단지 모든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 현실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문제의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사태가 현실적으로 벌어졌다는 제약에서 우리의 의식을 풀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p84)


현재 내 앞에서 벌어진 상황이라던가 눈 앞에 있는 사물들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동일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실제 일어난 현실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몫이 더 큰 법이다. 사건이 벌어졌다는 현실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여러 가능성의 하나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 세계 속으로 던져진, 혹은 상황에 내맡겨진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단지 혼자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언제나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는 존재자다. 이 '더불어 있음'은 현존재, 즉 실존의 또 다른 존재방식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더불어 있다고 할 때, 그 '더불어 있음'의 주체가 누구인지 물어보자.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나와 타인이 함께'일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만약 우리가 그 점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더불어 있음'의 주체는 제3자를 뜻하는 '그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그들'이라는 익명의 주체를 참된 의미의 실존이 아닌, 일종의 타락한 실존이라고 본다. '타락한 실존'이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한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욱 민감해진다. 그것이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민감해질수록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로써 나는 내 행동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 삶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고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 속에 숨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p109)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박제화된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철학적 사색, 혹은 사유다. 오직 철학적 사색만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삼은 그의 단조로운 삶이 보여주듯 사유함이야말로 철학의 주제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물음을 통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전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문제의식이기도 한 물음은 무엇보다 은폐된 것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한다. 은폐된 것이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것, 즉 '탈은폐'가 바로 하이데거에게는 진리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이른바 '이성'을 통해 세계를 규격화된 틀 속에 집어넣어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일, 즉 은폐를 걷어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론은 존재를 존재자처럼 다룸으로써 은폐해온 종래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역할을 떠맞게 된다.(p122)


하이데거 부분에서 인상적인 두 부분이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는 방법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내면에 집중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물음'이다.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에 부족하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숨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열어젖혀서 탈은폐를 시켜야 한다. 닫힌 부분을 치료하려면 우선 살이 째는 고통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스스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감히 탈은폐 시켜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해야 한다.


이 책만으로는 현상학의 정의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언급한 부분 중에 어떤 부분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고 어떤 부분이 의견의 차이가 있는 부분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똑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가오는 부분이 많았다.


1) 어떤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은 수많은 가능성과 의미를 내포한 현실 중 그 가능성, 의미 하나가 나에게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

2)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주관을 전제로 타자의 주관을 인정하는 태도이며 서로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는 태도라는 점.

3)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삶이라는 것은 스스로 성찰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이 내린 판단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4) 사유의 방식은 감춰두었던 의문, 문제 등을 과감히 탈은폐 시킴으로써 은폐를 시켰던 이유들을 하나씩 벗겨내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점, 이것이 곧 사색이라는 점


특히 하이데거의 관점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아서 그의 저작들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저작 중에 <존재와 시간>, <사유란 무엇인가>이 있는데 과연 내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유란 무엇인가>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니 일단 이건 다음에 미뤄야 겠다. 예전에 니체의 그 책을 읽다가 도무지 이해가 안가서 아직도 먼지가 쌓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하이데거 책을 바탕으로 국내 저자들이 다시 풀어낸 2차 도서를 중심으로 읽어야겠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책이 출판사 김영사의 <지식인마을> 시리즈인데 하나의 주제 대해서 두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체가 40권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이 책 한 권을 보더라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이 책을 통해서 우연히 알게 된 시리즈인데 관심가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권 한 권 책을 채워가는 재미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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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부터 궁금하고 불안했던 게 있었다. 우리가 잠을 자게 되면 자는 동안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데 과연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내 정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약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와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을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들도 내가 궁금했던 걸 답해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잠'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정신과, 뇌과학, 심리학 등의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미지의 세계가 잠에 존재한다. 


데이비드 랜들의 『잠의 사생활』은 잠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작가 데이비드 랜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몽류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고, 수면치료를 받기도 했는데 결국 만족스러운 처방을 받지 못했고, 여전히 수면 문제에 대해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데이비드 랜들 자신이 '잠'에 대해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그동안 다른 책에서 접해보지 못했던 잠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와 설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잠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지극한 영향을 미치고 잠을 통해서 삶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1. 나는 어젯밤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2. 사라진 두 번째 잠

3. 침대를 따로 쓰는 게 좋을까?

4. 아기와 부모가 모두 편하게 잠을 자려면

5. 꿈의 의미

6. 잠은 마음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

7. 'Z' 무기

8. 잠결에 저지른 살인

9. 승패를 좌우하는 것

10. 잠자다가 숨이 막힐 때

11. 불면증의 역설

12. 온전한 잠에 이르는 길

13. 편안한 밤이 되길


이 책의 목차다. 책을 고를 때 목차를 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이런 목차라면 충분히 구매할 마음이 생긴다. 제목 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궁금증을 유발하며, 처음 접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을 것 같다고 짐작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과 평소에 잘 모르고 있었던 부분에 대한 지식 측면에서 좋았던 부분을 잠시 소개한다.


인공조명이 발명되기 이전의 문학작품이나 많은 자료들을 보면 첫번째 잠과 두번째 잠이라는 것이 많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첫번째 잠과 두번째 잠 사이에 한 시간 정도 깨어있어서 무언가를 하고 다시 잠에 빠진다. 그런데 실험을 통해서 밝혀진 것으로는 두 가지 잠 사이의 시간 동안 실험 참여자의 뇌는 프로락틴 호르몬을 다량 분비했다고 한다. 프로락틴은 스트레스를 줄이는 효과가 있고, 오르가즘 이후에 찾아오는 편안한 느낌하고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두 가지 잠 사이의 시간을 명상에 빠진 시간과 비슷하다고 묘사했다.(p37)


연구자들은 잠시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략 90분마다 다섯 단계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첫번째 단계는 아주 가벼운 잠에 빠진 상태로, 잠에서 깨어나면 잠을 잤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다.

두번째 단계는 특유의 수면 뇌파가 나타나는데, 이 뇌파는 한 번에 겨우 몇 초만 지속된다. 전체 수면 사이클에서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는 자다가 깰 경우 자신이 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단계는 뇌가 의식에서 멀리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경유하는 정류장에 해당한다.

세 번째 단계와 네 번째 단계는 깊은 수면에 해당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델타파라는 파장이 길고 리드미컬한 뇌파가 나온다. 

네 번째 단계는 이때 나오는 뇌파의 속도 때문에 흔히 느린 파형 수면(서파 수면)이라 부른다. 느린 파형 수면은 가장 깊은 수면으로, 뇌가 의식적 사고에서 가장 멀리 여행한 단계에 해당한다. 네 번째 단계에서 잠이 깬 사람은 방향 감각이 없고, 기본적인 질문에 제대로 담을 하지 못하며, 도로 자고 싶은 생각 외에는 딴 생각이 없다. 연구자들은 이 상태를 '잠에 취한 상태'라 부른다.

마지막 단계는 렘 수면으로, 안구가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단계에서 뇌는 깨어 있을 때와 똑같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꿈은 대부분 이 단계에서 일어난다. (p20)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 보았던 부분은 잠의 신비로운 힘이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거나 시간이 부족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심지어 밤을 새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잠이라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사람들이 이런 수면 방식으로 진화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어느 정도 내 궁금증에 대한 정보는 주고 있다. 바로 잠을 통해 우리 몸이 치유되고, 잠을 통해 우리의 기억력이 향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공 조명은 우리 몸을 계속 깨어 있게 하고, 세포들의 정리와 재건처럼 잠잘 때 일어나는 야간 보수 유지 작업을 뒤로 미루라는 신호를 내보낸다. 인공 조명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우리 몸은 잠을 조절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을 분비하지 않을 수도 있다.(p46)


한 밤중에 밖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밝은 곳에서 사는 여성은 해가 진 후 어두운 곳에서 사는 같은 나이의 여성에 비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73%가 더 높았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암 발병률 증가는 우리 몸에서 에스트로겐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멜라토닌 분비가 낮아진 결과라고 생각했다. (p47)


폴 매카트니는 여자 친구의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어떤 멜로디가 떠올랐다. 그는 곧장 가까이 있던 피아노로 달려가 그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곡이 나중에 큰히트를 친 '예스터데이'였다. 매카트니는 훗날 전기 작가에게 "그것은 그냥 그대로 떠올랐어요. 완벽하게요. 나도 믿을 수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p135)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그 정보는 뇌에서 해마라는 부위를 통해 흘러 간다. 이 모든 정보를 장기 기억에 저장하는 것은 비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보가 필요해 그것을 찾으려고 할 때 뇌의 작업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뇌는 보관할 것과 버릴 것을 선별하며, 다음 날 새로 들어올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잊어버린다. 마음의 서류함을 정리하고 조직하는 과정은 렘 수면 동안에 일어날 수 있는데, 꿈의 무작위성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창조적 천재성은 뇌가 매일 밤 어수선한 잡동사니를 정리할 때 일어나는 일이 단순히 과장된 형태로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정보만 남았을 때, 우리 마음은 이전에 볼수 없었던 연관 관계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p138)


우리의 몸과 정신은 깨어있을 때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수많은 자극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들어오는 정보를 그저 쌓아놓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수면 상태에 빠지면 오감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최대한 차단하면서 손상되었던 세포나 신체적인 부분을 복구하고, 쌓아두었던 정보들을 나름의 방식대로 분류하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이런 시간이 아주 부족하게 되면 육체적으로 회복되지 않고, 쌓아둔 정보에서 어떤 정보를 찾아야할 지 갈피를 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나한테 잠 좀 편히 자라고 하셨다. 잠을 자는 걸 보면 뒹굴뒹굴 방 전체를 굴러다니고, 잠옷을 입고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자는 게 아니라 그냥 어딘가 누워있다가 자곤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잠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심했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데서나 눈만 감으면 몇 분안에 잘 수 있는 불면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운을 가졌다. 


『잠의 사생활』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최근에 몸소 경험한 것으로 봤을 때 '잠'이라는 것은 양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질적으로 충분한 수면이 우선되어야 한다. 살면서 깨어있는 시간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고, 깨어있지 않은 시간의 중요성은 간과하면서 살아왔다.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무시하면서 살아왔던 거 같다. 

나에게 잘 맞는 '잠', 건강하게 효과적으로 잘 수 있는 법을 찾아보고 금전적인 투자도 충분히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이제 잠 좀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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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책을 읽어야 하는데, 손에 잘 잡히지 않아서 걱정인 사람들이 있다면 우선 재미있는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어떤 일을 위한 자료 조사를 위한 독서가 아니라 책을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이라면 첫번째 조건은 재미와 흥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관심이 가고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야지 의무가 아닌 재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는 분에게 이 책은 상당히 추천할 만 하다.

주제는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런데 책의 형태는 만화책이다. 그리고 내용의 형식은 우리가 휴대폰으로 매일 사용하는 카카오톡 대화창이다.


무적핑크라는 이름으로 네이버웹툰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MBC TV 프로그램으로도 편성되어 방송되어지는 『조선왕조실톡』이다. 이 책은 그동안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재되어 오던 웹툰을 독자들이 읽기 쉽게 연대순으로 새롭게 편집해서 내놓은 책이다. 이 책은 총3권으로 '조선 패밀리의 탄생(1권)', '패밀리의 활극(2권)' , '패밀리의 빛과 그림자(3권)' 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은 1권만 출간되었고 나머지도 조만간 나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내용으로 쓰여진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수많은 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방의 작은 서재에도 조선시대 역사에 관련된 책이 십여권에 이른다. 한 마디로 '조선의 역사'에 관련된 책은 그동안 꾸준히 출간되어 왔고, 우리에게 익숙하고 평범하다. 이 말은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주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 점에서 나는 이 책 『조선왕조실톡』을 높게 평가한다. 기존에 익숙한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형식과 무적핑크(변지민)이름으로 책의 곳곳에 센스있게 표현한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항상 평범한 무엇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이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 카카오톡 대화 형식과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이용한 센스


책 자체가 만화책이라보니 자칫 내용적으로 부실할 수도 있는데, 이 부분에서도 적절하게 역사해설을 담고,  만화의 재미를 유지시켜주면서 가볍게 느껴지지 않게 만들었다. 

평소에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이렇게 왕의 이름을 외워왔지만 여러 권의 책을 읽어도 전체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정리하기가 힘이 들었다. 개별의 책들을 통해 어떤 사건을 이해할수는 있었으나, 조선의 전 역사에서 그런 사건들이 어떻게 엮여있고, 왕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항상 어렴풋했고 모호했다. 이런 면에서도 이 책의 구성은 이해하기 좋다. 각 왕들의 특성에 따라 몇 그룹의 패밀리로 구성해서 표현하는데 이 부분이 좋았다.





최근 여의도는 국정교과서 문제로 떠들석하다. 정부는 지난 12일에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교과서'라 명명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계획을 발표했다. 아마도 우리의 근현대사 부분에 대해서 왜곡될 가능성이 크기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조선왕조실톡』 이 책의 매력은 저자가 기존과는 새로운 접근방식과 해석방식으로 스마트폰에 익숙한 지금 세대에게 접근했고, 그것이 이어서 이렇게 출판물로 나왔다는 점이다.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기록하는 것이기에 절대로 주관적인 요소가 배제될 수 없다. 그러기에 다양한 견해의 역사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보수와 진보의 성향을 가진 역사책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근거를 가지고 끝없이 토론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자신의 의견에 대해 더욱 견고한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국정교과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올바른 교과서'라고 명명한 것을 가지고 가뜩이나 힘든 지금의 학생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바른' 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올바르다고 결정해버리면 그 틀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들은 올바르지 않게 되고, 올바르지 않은 것을 고쳐야 되고, 그리고 그것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배척되고, 이것은 곧 수많은 갈등을 야기시킨다.


'올바르다'는 것은 함부로 규정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대방과 계속해서 토론하는 길 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왕이 붕어하신 이후에 실록청이 만들어지고 그동안 사관들이 각자 비밀리에 보관해오던 사초와 승정원일기등을 모아서 만드는데, 이때는 그 기록들을 통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역사의 보고가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큰 역사적, 지적 보물인지 모른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일에 반추해서 배울 점은 배우고, 배우지 않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 반면교사로 삼아서 경계하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배워왔다. 그런데 왜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이들은 그것을 배우지 않을까 의구심이 든다.


마지막으로 얼마전 전우용 역사학자가 남긴 말로 글을 마친다.

"훌륭한 지도자는 역사를 바꾸고, 저열한 권력자는 역사책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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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래픽 노블을 한 편 읽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읽어오던 그런 만화책과는 사뭇 다르다.

300쪽에 달하는 분량, 만화치고는 너무나 많은 글, 두꺼운 하드커버에 빨강, 검정, 회색의 조화로 이루어진 책 표지에 냉소적이면서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듯한 쥐 두 마리가 등장하는 책이다. 그리고 다루는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태인들의 모습과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 지를 보여준 끔찍한 아우슈비츠에 관한 내용이다.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아트 슈피겔만(Art Spielgelman)의 『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이 계속 맴돌았다. 하나는 책의 형식적인 측면과 그래픽 노블이라는 점, 역시 만화치고는 글의 양이 상당했던 스페인내전을 다룬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이었다. 『이것이 인간인가』은 작가 자신이 겪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을 읽고 한 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었다. 인간이란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쥐』는 『이것이 인간인가』의 그래픽 노블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내용의 유사성과 느껴지는 잔혹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나역시 그런 인간이라는 불안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쥐』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작가인 아트 슈피겔만이 실제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살아나온 아버지를 인터뷰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독특한 점은 유태인들은 '쥐'라는 동물로 표현하고 있으며, 독일군들은 고양이,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돼지로 표현하고 있었다. 궁금했다. 작가는 왜 유태인을 쥐로 묘사했던 것일까? 책의 중간에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는 안타까운 글이 있다.



아우슈비츠에 관련해서는 책 뿐만 아니라 많은 영상들을 접할 수 있는데, 많이 접하더라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접할 때 마다 너무 끔찍하고 무섭고 두렵고 안타깝다. 어떻게 신문기사에 저렇게 끔찍하게 기사가 올라올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게 아닌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통해서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수많은 고민에 빠뜨려 버린다. 


민주적인 선거로 뽑힌 히틀러에 의해서 어쩌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공장이 만들어 진다. 히틀러가 유태인 뿐만 아니라 나치스와 히틀러에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어떻게 수십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죽일 수가 있었을까? 단지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점, 아니면 당시 대공황에 빠져있던 상황에 유태인들의 자본을 빼앗기 위해서인가? 그 어떤 이유에서도 이것은 설명할 수 없다.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에 들어온 포로들은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게 결정된다.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육체적으로 일할 힘이 없으면 바로 그들에게 심판당한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가스실에는 별도의 금니용해실이라는 곳도 있다. 그들의 목숨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이들이 이빨에 붙어있는 금딱지를 얻어내려고 금니용해실을 만들었다. 정말 끔찍하고 역겹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장면이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인터뷰의 대상인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의 창고에는 쌓여만 갈 뿐 버리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들과 길을 걸어가면서 버려진 전기줄을 마치 횡재를 한 듯이 줍는 모습이었다. 왜 아버지는 그런 습관이 몸에 베었을까? 

아우슈비츠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는다. 하루에 한조각 나오는 빵도 만약을 대비해서 반을 잘라서 보관해둔다. 그곳에서는 어떤 물건이라도 소중하다. 철사 한 조각, 버려진 끈 등 모든 것이 그들의 생사를 갈라 놓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트 슈피겔만은 작품 속에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싫어하지만, 그가 그 장면을 삽입했던 것으로도 그 역시 아버지의 그 습관에 대해서 뼈저리게 아파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한 장면은 포로수용소에 일반 포로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독일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포로들 중에 한 사람이이었다. 조금의 혜택을 받고 이들은 나치스 보다 더 심하게 동료들을 대한다. 그리고 그 결말은 그들 역시 가스실로 간다는 점이다. 사람은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동물이다. 모든 상황에 이런 사람들은 꼭 존재한다. 예전에 소작농을 괴롭히던 사람은 마름들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누구보다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이들은 일본인이 아닌 같은 조선인이었다. 이럴 때마다 가끔씩 나에게 묻는다, 실제 상황이 닥치는 과연 나는 어떨까? 하지만 확실한 자신감이 없기에 나 자신에게 묻는 것 조차 두려울 때도 많이 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라서 어쩌면 더 강하게 다가올지 모른다.

등장인물들이 사람이 아니기에 좀 덜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그린게 더 순화했다고 생각한다.

고양이, 쥐, 돼지는 원래 그렇게 사람처럼 잔인하지 않으니까.


책을 읽고 나니 사람이 무서워진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불안하다.



▲ 조그만 화차에 수백명을 억지로 집어넣는다. 대부분 그곳에서 압사, 질식사로 사망한다.



▲ 포로 수용소의 배식장면이다. 작업을 마치고 옷에 이가 있으면 배식은 없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돌베개

- 서평 : http://zorbanoverman.tistory.com/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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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는알랭 드 보통의 처녀작이자,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책이었다. 처음에 별로 큰 기대를 가지고 읽지는 않았는데 읽는 동안 몇 번을 감탄을 했는지 모르겠다. 남녀 간의 사랑의 미묘한 감정과 심리를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그의 세심함과 인간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너무나 부러웠다. 한 작가의 어떤 책이 마음에 들면 자연스럽게 그의 다른 저작을 찾아보는 습관으로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았다. 상당히 많은 책이 있었지만 그중 『불안』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었다. 내가 만난 알랭 드 보통의 두번째 책은 바로 『불안
』이었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가 매 장(chapter) 마다 소주제를 다루면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것 처럼 『불안』역시 불안이라는 것의 원인과 그 해결방법을 각 챕터마다 제시하면서 전개하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각종 철학에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여행, 건축 등 일상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 선생이 카드 작업을 통해 여러 주제들을 모아 두었다가 어떤 한 책의 맥락에 많게 카드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책을 내놓는 방식을 취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여러 저작들을 편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불안』에서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원인과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역시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불안의 원인으로는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이며, 불안의 해소 방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하고 있다. 그럼 차근차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 불안의 원인


(1.사랑결핍) 사람들은 태어날 때 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즉,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우리는 타인들의 칭찬이나 격려에 힘을 얻지만, 타인들이 자신을 배격하거나 무관심할 경우에는, 나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2. 속물근성)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자리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사람들은 타인들을 경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불안감과 열등감을 가진 이들은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는 느김을 심어주려고 기를 쓰는 경향이 있다. 또한 무시와 외면은 이러한 속물적인 세상에서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내려진다.


(3. 기대) 19세기 초에 서양의 서점에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책이 출간되면서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열심히 노력한다면 부유해질 수 있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또한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에는 항상 사회 고위층의 생활의 모습을 자주 노출시켜주었다. 결국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더 많은 돈을 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욕망 즉, 기대가 점점 높아져 결국 부자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4. 능력주의) 능력주의 사회에서 움트는 가혹한 의견 중의 하나는, 사회적 위계는 단계마다 거기에 속한 사람의 자질을 엄격하게 반영한다고 한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들이 성공하고 게으름뱅이가 실패할 조건은 이미 굳어져 있는 셈이고 결국 자선, 복지, 재분배 장치, 단순한 동정의 필요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즉, 능력주의 사회에서의 가난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선 수치라는 모욕이 덧붙여지게 되는 것이다.


(5. 불확실성) 1)변덕스러운 재능, 2)운, 3)고용주, 4)고용주의 이익, 5)세계경제 라는 요소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상당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위험에 빠지거나 안 좋은 상황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불확실성을 더 두려워 한다.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느냐는 대응여부는 삶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다면 알랭 드 보통이 '사랑결핌',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에 의해 야기되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 다섯 가지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살펴본다.



■ 불안의 해법


(1. 철학) 많은 철학자들은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에 따르라고 권한다. 살면서 중요한 것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2. 예술) 예술은 아무리 비실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소설가의 경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꾸고, 그림 역시 누가 또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세상의 정상적인 이해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매슈 아널드는 예술의 정의를 '삶의 비평이라는 정의'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실용과 동떨어진 예술에서 우리는 진정한 실용을 경험하게 된다.


(3. 정치) 조지 버나드 쇼는 말했다. "어릴 때 우리 모두 가졌던 환상, 즉 우리가 살아가는 제도가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환상을 머리에서 씻어내야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작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늘 존재해왔고 또 늘 존재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제도는 사실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제로 아무도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던 변화가 몇 세대 만에 일어나곤 한다." 어쩌면 이 말이 정치가 필요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실질적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만, 정치적 관심의 결과로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이런 관심이 없이는 그저 사람들의 만들어놓은 틀에 맞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규칙도 제대로 모른체.


(4. 기독교)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후는 삶 이후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마지막,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 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우리가 집착하는 지위와 부는 우주적인 관점과 천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미미하다. 이런 깨달음은 자신이 초라해진다는 관점이 아닌 모두가 동일하구나 하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게 만든다.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기본적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어되고 경감된다. 성공하여 피어날 것이냐 아니면 실패하여 시들 것이냐 하는 이분법의 그 가혹한 칼날도 약간은 무디어지는 것이다.


(5. 보헤미아) 보헤미아들은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있게 살아가려면 자신들만의 가치 체계,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집단과 전통보다 개인이 우월하다고 강조하며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가장 넓은, 가장 포괄적인 말로 보헤미아의 기여를 요약하자면 그들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 추구에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존중하는 하위문화의 경계를 정하고 의미를 규정했는데, 이곳에서는 부르주아 주류가 과소평가하고 간과하는 가치들이 적절한 권위와 위엄을 부여받았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不安), 사전적의미로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조마조마함' 이라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 중에 하나를 다섯가지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다섯가지 해법으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상당히 다양하고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상황과 맥락속에서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불안도 역시 마찬가지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원인을 위와 같이 제시했지만, 어쩌면 나는 다르게 접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원인과 해법은 어디에나 적용해도 될 정도로 보편적이고 포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제목이 『불안』일 뿐이지 이 책은 다른 제목으로도 충분히 만들어져도 내용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지만, 무언가 특별함이라던가,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보여주던 세심한 감각은 이 책에서는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다음에는 『뉴스의 시대』를 읽을 예정이다. 그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보자. 처음 그의 책을 읽고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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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듣는 순간부터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의 책으로 1956년에 발표되어 60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 온 책이며,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아무리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더라도 나에게는 생소한 책이었다. 제목부터 낯설고 아이러니 했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이 오가는 대로 느끼고 교감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랑에 기술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궁금했다. 최근에는 메신저를 분석해서 대화 상대 간의 일종의 '썸'을 타는지 알아보는 어플리케이션도 있다고 하니 그런 종류일까? 60년 전이니 그럴리는 만무하다. 아니면 여전히 연애의 기술에 많이 쓰이는 밀당의 기술을 말하려고 하나, 아니면 제대로 사랑 한 번 못해본 이들에게 권하는 글로 배우는 사랑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책을 펼쳐드는 순간 나의 모든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철학을 논하는 책이었으며, 사랑은 우리의 삶과 긴밀히 닿아있는 끈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인상적인 구절에 줄을 그어가며 읽다가 어느 순간 그만 두었다. 줄을 친 부분이 더 많은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읽어볼 방법 밖에 없다. 그만큼 인상적인 책이었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1)사랑은 기술인가? 2)사랑의 이론 3)사랑의 붕괴 4)사랑의 실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랑을 논하는 지금의 내가 하는 사랑은 어떠한가? 라는 자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1) 사랑의 기술


『사랑의 기술』에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학, 공학기술 혹은 음악, 미술과 같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론적인 측면과 실천(실습)적인 측면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를 더하면 그러한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왜 사랑이 필요한가? 에서 부터 시작해본다. 사람들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자신의 분리되어 있는 실존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그 불안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p24)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2) 사랑의 이론


하지만 그렇게 갈구하는 사랑이 모두 사랑은 아니다. 사랑에도 만족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다는 수동적인 개념이 아닌 먼저 준다는 능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기본적 요소가 있는데 바로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 필요하다. (보호)는 기본적으로 모성애를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된 부분은 '존경'이다.

(p44)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은 존경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공허할 뿐이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 따른다. 기본적인 조건조차 갖추지 못한다면 단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여러 관점의 사랑을 소개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인 '모성애(母性愛)'와 '부성애(父性愛)',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형제애(兄弟愛)',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성애(性愛)',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自己愛)'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의 사랑을 논하고 있다. 이중에서 잠깐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자기애'이다.

(p88)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3) 사랑의 붕괴


'사랑의 붕괴'는 원래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라는 소제목이다.

에리히 프롬은 근대자본주의가 사랑의 붕괴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 하다.

(p119)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 되고 목적 없이 -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붕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버이상에서 애착을 느끼고 어른이 되서도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느꼈던 감정, 기대, 공포를 그대로 애인에게 전가하는 모습, 어떤 이에 대한 우상숭배적 사랑, 영화나 잡지 등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사랑에서 느끼는 감상적 사랑,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회상으로 이어가는 사랑의 추상화, 이러한 신경증적인 사랑의 다른 형태인 자기 자신의 결함을 감추고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이나 결함에 관여하려는 투사적 매커니즘을 가진 사랑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랑의 붕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안타까움, 두려움으로, 심하게는 공포로 바꾸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의 붕괴를 겪는 이는 아마 모를 듯 하다. 그래서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는지 모르겠다.


4) 사랑의 실천


마지막으로 사랑의 실천편이다. 사실 이 부분이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좀더 참신하거나 사랑에 대한 것이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사랑을 삶으로 바꾼다면 '사랑의 실천' 부분도 그지없이 좋을 뿐이다.


우선 사랑의 실천에서 필요한 세가지를 먼저 언급하고 들어가보자. 바로 훈련, 정신집중, 인내이다. (훈련) 현대인의 경우 일을 떠나서는 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일을 떠나서는 일에 대한 훈련에 대한 보상을 얻으려는 듯 최대한 긴장을 풀고 게을러지거나 빈둥거리기를 원한다. 사랑에도 훈련을 할 시간을 내어줄 필요가 있다. (정신집중) 사람들은 한 번에 여러가지를 하려 하고 명상이나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든 사람도 많이 존재한다. (p152)정신 집중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인내) 현대인들은 시간에 대한 조바심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되지 않는다. 이를 알지 못한다면 사실상 정신집중도 또한 사랑의 기술도 배우지 못한다. (p150)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말고는.



수 없이 줄을 치며 읽다가 줄을 치기를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조금의 시간을 보내놓고 다시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나면 다시 기뻐하고, 문장의 단락을 만들고 별표를 치고 모서리를 접었다. 그렇게 이 책을 읽었다. 오랜 만에 개인적으로 너무 좋은 책을 만나서 정리하다보니 평소보다 문장이 길어지고 호흡이 길어졌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게 개인적인 사랑의 표현일텐데. 이 책은 살면서 몇 번이고 읽어볼 책이다. 항상 이런 책을 만나면 조금만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래도 만나긴 했네하는 안도감이 겹쳐흐른다. 고마운 책을 만났다. 에리히 프롬의 글의 배경에 흐르는 듯한 두 단어, '실존'과 '사랑'은 살면서 절대 놓치지 않겠음을 스스로 기약하며 그의 다른 저작들을 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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