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단순히 두 종류로 나누어 본다면 거시적인 측면을 바라보는 것과 미시적인 측면을 다루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개인의 생각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전개되는 소설, 수필, 시와 같은 문학은 미시적인 부분입니다. 반면에 역사, 사회, 과학과 같은 분야는 거시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문학은 특히 개인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미세한 개인의 감각을 건드려줍니다. 반면에 세상을 넓은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내가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떤 환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 생각함으로써 현재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최근에 인간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한 권의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유발 하리리의 『사피엔스』입니다.
수렵채집인부터 시작해서 신만이 가능했던 새로운 창조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인간, 사피엔스를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솔직히 참신한 주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들은 이미 많은 다른 책에서 접한 내용입니다.
진화론, 세계사, 육식에 반대하는 책, 경제학에 관련된 책등에서 부분적으로 들어왔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강점은 바로 이런 내용들을 사피엔스라는 주제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많은 역사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600페이지에 달하는 부담스러운 두께의 책이지만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사피엔스』에서는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혁명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약 7만년 전에 일어난 인지혁명,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 그리고 5백년 전에 시작한 과학혁명입니다.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은 낯설지 않지만 인지혁명은 조금 생소합니다. 인지혁명은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책의 사례를 보면 언어가 없었을 때는 어떤 사냥감이나 채집할 것들을 발견하면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거나 직접 데리고 가야합니다. 그러다보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사냥감이 도망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언어로 빠르게 위치를 설명해주면 그 전보다는 손쉽게 사냥, 채집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인지혁명 시대의 중요한 점은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확연하게 다른 길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농업혁명에 대한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기존의 관점과는 조금 다릅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비교대상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과연 세상이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통해서 사람들 개개인은 과연 조금 더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삶으로 변화해갔을까가 궁금합니다. 모두들 현재 만을 살아가기에 어쩌면 영원히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책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수십, 수백만의 집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를 문화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문화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인지부조화'라는 점입니다.
만일 긴장과 분쟁과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가 모든 문화의 향신료라면,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닐 것이며 서로 상충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되는 핵심적 측면이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까지 있다. '인지 부조화'다.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핵심자산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품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지 부조화'의 개념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혔는데 그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합리적인 결론이 기존에 철석같이 믿고 있던 생각과 정면으로 모순될 때, 사람들은 합리적인 결론보다는 부조리하지만 자신의 기존 생각에 부합하는 생각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지 부조화의 원리(Cognitive dissonance)'입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난 후에는 어떻게든 그 선택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믿으려 애쓰며, 명백한 판단 착오였어도 끝까지 자신이 옳았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개인의 사생활의 사소한 결정에서부터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중대한 결정까지, 인간의 심리를 조종하는 이러한 법칙은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 [네이버 지식 백과]
어쩌면 사람들이 과학과 종료를 모두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인지 부조화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외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몇가지 더 있었습니다.
하나는 각각의 대륙이 어떻게 발견되어졌으며, 대륙의 발견으로 파생되는 원주민 학살과 경제적 관점으로 이어지는 노예무역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의 잔혹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다른 하나는 동물들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소, 돼지, 양, 닭은 지구상에 인간의 수만큼 필적하는 동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인간의 먹이를 위해서 길러집니다. 그렇다면 이게 진화론적으로 성공한 것인가? 결국 번식을 많이 했으니 성공한 것인가? 라는 의문제기와 함께 단순히 인간들의 먹이로 전락한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은 다루고 있기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마다 받아들이는 부분이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게 되면 '나(我)'라는 사람 개개인은 정말 전체 인류의 역사의 하나의 점에 불과하고 지구 밖에서 바라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거야 하는 생각도 들게 마련입니다. 동시에 조금 더 겸손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별다를 게 없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의 역사에서 수없이 많은 잔인한 일을 저지른 이들과 같은 인간이기에 지금 내가 하는 평범한 일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비수를 꽂지는 않는지 한 번 쯤 곰곰히 생각해봐야 겠습니다.
인간 공동체의 지식은 고대 인간 무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개인 수준에서 보자면, 고대 수렵채집인은 역사상 가장 아는 것이 많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수렵채집인들은 주변의 동물, 식물, 물건뿐 아니라 자기 신체와 감각이라는 내부 세계에 대해서도 완벽히 터득했다. 이들은 뱀이 숨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풀밭에서 나는 아주 미세한 소리까지도 귀 기울여 들었다. 또 과일과 벌집, 새둥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나뭇잎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이들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이동했으며 가장 기민한 방식으로 앉고 걷고 달릴 수 있었다. 신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사용한 덕분에 마라톤 주자처럼 건강했다. 그들의 신체적 기민성은 요즘 사람들이 요가나 태극권을 수십 년간 수련해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먹고, 주당 일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으며, 전염병도 드물었으니,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는 농경 이전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불렀다.
인지혁명 이전의 인간 종은 모두가 아프로아시아 육괴(아프리카와 아시아가 합쳐진 고대륙)에서 살았다. 물론 가까운 거리의 섬 몇 곳은 헤엄을 치거나 급조한 뗏목을 타고 건너가서 정착하기도 했다. 예컨데 인도네시아 소순다 열도의 플로레스 섬은 85만년 전 이미 거주지로 개척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큰 바다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었으며, 아무도 아메리카, 호주 혹은 더욱 먼 곳인 마다가스카르, 뉴질랜드, 하와이에는 가지 못했다.
바다라는 장벽은 인간만 가로막은 것이 아니다. 아프로아시아 육괴에 살던 동식물 중 많은 종이 '외부세계'로 나아가지 못했고, 그 결과 호주나 마다가스카르 같은 먼 곳의 생물들은 고립된 상태로 수백만 몀에 걸쳐 진화하여 형태나 성질이 멀리 아프로아시아 친척들과는 아주 달라지게 되었다.
최초의 인류가 호주까지 여행을 한 것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거나 아폴로11호 탐험대가 달에 착륙한 것 못지않다. 이것은 인류가 어떻게 해서든 아프로아시아 생태계를 떠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사례다. 사실 대형 육상동물이 어찌어찌해서 아프로아시아에서 호주로 건너간 첫 사례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의 누명을 약화시키고 우리 조상들을 호주의 대형동물 멸종과 연루시키는 세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45,000년 전쯤 호주의 기후가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눈에 띈 만큼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다. 새로운 기후 패턴이라는 단독 요인이 어떻게 그런 대량 멸종을 유발했는지를 알기도 쉽지않다.
둘째, 기후변화가 대량멸종을 초래할 경우 해양 생명체는 육지 생명체 못지 않게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45,000년 전 해양 동물의 개체수가 유의미하게 줄었다는 증거는 없다.
셋째, 호주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대량멸종이 그다음 수천년 간 인류가 외부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 정착할 때 마다 거듭거듭 벌어졌다. 이런 경우들에서는 사피엔스가 유죄라는 것을 반박하기가 불가능하다.
인류의 이런 진격전은 호모 사피엔스의 뛰어난 창의력과 적응력을 증언한다. 다른 동물은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양한 서식지들에 사실상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상태로 그토록 빨리 이주한 예가 전혀 없다.
아프리카 본토에서 동쪽으로 약 4백 킬로미터 떨어진 큰 섬 마다가스카르가 대표적 사례다. 수백만 년간 고립되어 있던 이 섬에서는 독특한 동물들이 진화했다. 가령 코끼리새는 날지 못하는 새로서 키3미터, 몸무게 5백 킬로그램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새였다. 자이언트여우원숭이는 지상에서 가장 큰 영장류였다. 이 코끼리새와 자이언트여우원숭이는 마다가스카르의 다른 대형동물 대부분과 함께 약 1,500년 전 갑자기 사라졌다. 이 섬에 인간이 발은 디딘 것과 정확히 같은 시기였다.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경 터키 남동부, 서부 이란, 에게 해 동부 지방에서였다. 시작은 느렸고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만을 대상으로 했다. 밀을 재배하고 염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9000년 경이었다. 완두콩과 렌즈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경, 포도는 기원전 3500년 재배가 시작되었고, 말은 기원전 4000년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낙타와 캐슈넛 같은 일부 동식물은 더 나중에 가축과 재배식물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500년이 되자 가축화와 재배작물화의 주된 파도는 지나갔다. 온갖 기술이 발달안 오늘날에도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퍼센트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처럼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했던 한 줌의 식물들에서 온다. 지난 2천 년 동안 주목할 만한 식물을 작물화하거나 동물을 가축화한 사례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 163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약 1만 년 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 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이 대가를 치렀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새로운 농업노동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밀밭 옆에 영구히 정착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명심하자 인류는 아주 다양한 음식을 먹고사는 잡식성 유인원이다. 농업혁명 이전 식사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었다. 곡류를 중심으로 하는 식단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우며 치주조직에 해롭다. 밀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농부의 삶은 수렵 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을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설령 저장해둔 식량이 없더라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나갈 수 있엇다. 특정한 종을 손에 넣기가 힘들어지면 다른 종들을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었으니까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년 전 중동에 도착했다. 그후 5만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농업 없이 번성했다. 그 지역의 자연자원은 인구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이를 좀 더 많이 낳았고 궁핍한 시절에는 약간 덜 낳았다. 인간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번식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유전자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었다. 풍족한 시절에 여자아이는 사춘기가 일찍 오고 임신 가능성이 조금 높아진다. 어려운 시절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고 번식력이 떨어진다.
이런 자연적 인구조절에 문화적 메커니즘이 추가된다. 아기와 어린이는 동작이 굼뜨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방랑하는 수렵채집인들에게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3~4년 터울로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늦은 나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터울을 두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금욕, 낙태, 때로는 유아 살해등이 있었다.
18,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가고 온난화 시기가 도래했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비가 많이 내렸다. 새로운 기후는 중동의 밀을 비롯한 곡물에 이상적이었고, 이들은 증식하고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밀을 더 많이 먹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무심코 밀이 퍼지는 데 기여했다. 야생곡식은 키질을 하고 껍질을 까고 익혀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곡류를 임시 야영지로 가져와서 처리해야 했다. 밀 낟알은 작고 숫자가 아주 많기 때문에, 야영지로 오는 동안 일부는 떨어트리고 잃어버리게 마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오솔길과 야영장 주위에 점점 더 많은 밀이 자라게 되었다.
사람들이 숲과 덤불을 불태우는 것은 밀에게 도움이 되었다. 불은 크고 작은 나무들을 제거해서 밀과 여타 풀들이 햇빛과 물, 영양소를 독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차츰 방랑하는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정착했다. 밀이 특히 풍부하고 사냥감과 여타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에 계절별로 혹은 아예 영구히 캠프를 차린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 밖에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꼭 맞는 양을 만들기 위해서 좀 더 주의 깊게 선택하기 시작했다. 가장 공격적인 양, 인간의 통제에 가장 크게 반항하는 양을 먼저 도살했다. 비쩍 마르고 호기심 많은 암컷도 마찬가지였다. 세대가 거듭할수록 양들은 더 살찌고 순하고 호기심이 줄어들었다 .그랬더니 짜잔! 메리에게는 어린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메리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녔다.
인류가 세상에 퍼지면서, 이들이 가축화한 동물도 함께 퍼졌다. 1만 년 전에는 몇백만 마리 되지 않는 양, 소, 염소, 돼지, 닭이 아프로아시아의 몇 되지 않는 좁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반면 오늘날 세계에는 10억 마리의 양, 10억 마리의 돼지, 10억 마리의 소, 250억 마리 이상의 닭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도처에 퍼져 있다. 가축화된 닭은 역사상 가장 널리 퍼진 가금류다. 지구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대형 포유류를 순서대로 꼽이면 사람이 첫째이고 2,3,4위가 가축화된 소, 돼지, 양이다.
불행하게도 진화적 관점은 성공의 척도로서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뿐,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가축이 된 닭이나 소는 아마도 진화적 성공의 사례이겠지만,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물인 것도 사실이다. 동물의 가축화는 일련의 야만적 관행을 기반으로 이뤄졌고, 관행은 수백 수천 년이 흐르면서 더욱 잔인해졌다. 야생 닭의 자연 수명은 7~12년이고 소는 20~25년이다. 대부분의 야생 닭과 소는 그 이전에 죽었지만, 상당히 오래 살 가능성도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축화된 닭과 소는 몇 주 내지 몇 개월 만에 도살당한다. 그것이 경제적 관점에서 가장 적절한 도살 연령이기 때문이다.
염소, 양은 새끼를 낳은 다음에야, 그리고 새끼가 젖을 빠는 동안만 젖을 생산한다. 그러니 동물 젖을 계속 얻으려면 젖을 빨 새끼가 있어야 하고, 이들 쌔끼가 젖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널리 쓰인 방법은 출생 직후 새끼를 도살하고 어미의 젖을 가능한 한 오래 짜낸 뒤 다시 임신시키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잇다. 오늘날의 수많은 낙농 농가에서 젖소는 약 5년을 산 뒤 도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5년 동안 젖소는 거의 항상 임신 중이며, 출산한지 60~120일 내에 또다시 수태한다. 우유의 최대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송아지는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미에게서 떼어내진다. 암송아지라면 다음 세대의 젖소로 길러지고, 수송아지는 육류 산업에 넘겨진다.
다른 방법은 새끼들을 어미 가까운 곳에 두면서 젖을 너무 많이 빨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책략이 사용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새끼가 젖을 빨게 두었다가 젖이 나오기 시작하면 어미에게서 떼어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미와 새끼 양쪽의 저항을 부른다. 일부 양치기 부족은 새끼를 도살하고 살코기를 먹은 다음 새끼의 가죽에 속을 채워 박제하는 관습이 있었다. 박제된 새끼를 어미에게 들이밀어 우유 생산을 촉진하는 것이다.
농사 스트레스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대규모 정치사회 체제의 토대였다. 슬프게도 부지런한 농부들은 그렇게 힘들여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토록 원하던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슬프게도 얻지 못했다. 모든 곳에서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현했다. 이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식량으로 먹고살면서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 밖에 남겨주지 않았다.
이렇게 빼앗은 잉여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왕궁과 성채, 기념물과 사원을 지었다.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설령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일부터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이와 반대로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군대, 경찰, 법원, 감옥은 사람들이 상상의 질서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제하면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한다. 사람이 평등하지 않은 것은 함부라비가 그렇다고 해서가 아니라 엔릴과 마르두크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마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이 최선의 경제체제인 것은 애덤 스미스가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변의 자연 법칙이기 때문이다. -- 229
역사상 최초의 문서에 담긴 것이 철학적 통찰도, 시도, 전솔도, 심지어 왕의 승리도 아니었다니. 세금 지불액과 쌓이는 빚의 액수와 재산의 소유권을 기록한 평이한 경제 문서였다니.
수메르 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문서로서 이것과 유형이 다른 것은 딱 하나뿐인데, 그 내용은 더더욱 흥미롭지 않다. 그것은 필경자 견습공이 교육을 받으면서 반복해서 쓰고 또 썼던 단어의 목록이다.
기원전 2500년이 되자 왕이 포고령을 내릴 때, 사제들이 신탁을 기록할 때, 이보다 신분이 낮은 시민들이 편지를 쓸 때도 이 문자가 사용되었다. 대략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라 불리는 별개의 완전한 문자체계를 개발했다. 또 다른 완전한 문자체계는 기원전 1200년경 중국에서, 기원전 1000~500년경 중미에서 발달했다.
문자를 발명한 사람들이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목록화하고 인출하는 방법을 발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수메르와 파라오의 이집트, 고대 중국, 잉카 제국이 달랐던 점은 이런 문화들이 문자기록을 보관하고 목록을 만들고 검색하는 뛰어난 기술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또한 필경사와 서기, 사서와 회계원을 양성하는 학교에도 투자했다. 현대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학교에서의 글쓰기 연습 기록은 4천 년 전 학생들의 생활을 엿보게 한다.
문자체계가 인간의 역사에 가한 가장 중요한 충격은 정확히 이것, 즉 인간이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과 세계를 보는 방식이 점차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자유연상과 전체론적 사고는 칸막이와 관료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여러 세기가 흐르면서 자룔르 처리하는 관료주의적 방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에서 더욱더 멀어졌고, 더욱더 중요해졌다. 결정적인 단계는 9세기 이전의 어느 시점에 왔다. 수학적 데이터를 전에 없이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불완전한 문자체계 하나가 새로 발명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0에서 9에 이르는 열 개의 기호로 이뤄진 체계였다. 인도인이 처음 발명했음에도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져 혼란을 부르는 그 숫자들이다. 하지만 아랍인들이그들이 인도를 침공해 이 체계를 보았을 때 그 쓸모를 알아차렸고, 그것을 더 다듬어서 중동으로, 나중에는 유럽에까지 퍼뜨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아라비아 숫자에 더하기, 빼기, 곱하기 등의 부호가 추가되면서 현대 수학적 표기법의 기반이 출현하게 되었다.
농협혁명 이후 수천 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그런 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이다.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발명품을 통해서 생물학적으로 물려 받은 것에 의해 생겨난 틈을 메웠다. 하지만 이런 협력망들의 출현은 많은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불안한 축복이었다. 그 그물을 지탱하는 상상의 질서는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그 망은 사람들을 서열로 구분된 가 - 상의 집단으로 나눴다.
자유란 단어 역시 오늘날과는 그 함의가 크게 달랐다. 1776년에 이 단어는 권력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권력을 얻고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지 국가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시민의 사유재산을 압수하거나 그 재산으로 어떤 일을 하라고 시민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미국의 질서는 부의 위계질서를 옹호했다. 일부는 이 위계질서를 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부는 불변의 자연법이 구현된 것이라고 보았다. 자연은 인간의 장점을 부로써 보상하고 나태함을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많은 학자의 추측에 따르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형성된 것은 약 3천 년 전 인도아리아 사람들이 인도 아대륙을 침략해 현지인들을 복속시켰을 때 였다. 침략자들은 계층화된 사회를 건설하고, 자신들이 윗자리(사제와 전사)를 차지하고 현지인은 하인과 노예로 삼았다.
수가 적었던 침략자들은 특권적 지위와 고유의 정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사람들을 카스트로 구분했고, 각 카스트는 특정한 직업을 갖거나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스트마다 법적 지위, 특원, 임무가 각각 달랐다. 카스트를 뒤섞는 사회적 상호작용이나 결혼, 심지어 식사를 함께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이런 구별은 단순히 법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화와 관련습의 고유한 일부분이 되었다. 지배자들은 카스트제도가 우연한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영원한 우주적 실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적, 과학적 신화가 동원되었다. 신학자들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아의 아들인 햄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햄은 그 아버지로부터 "네 자손들은 노예가 되리라"는 저주를 받았다. 생물학자들은 흑인들은 불결한 상태로 살며 병을 퍼뜨린다고, 다시 말해 오염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신화들은 미국 문화와 서구 문화 전반에 잘 공명됐다. 그래서 노예제를 만들어낸 조건들이 사라진 지 오랜 뒤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세기 초 대영제국은 노예제를 불법화하고 대서양의 노예무역을 중단했으며, 이후 몇십 년에 걸쳐 노예제는 미 대륙에서도 점차 불법화되었다. 이것은 노예를 소유한 사회가 자발적으로 노예제를 추방한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이다.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돈은 돈 있는 자에게 들어오고, 가난은 가난뱅이를 방문하는 법이다. 교육은 교육받은 자에게, 무지는 무지한 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서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의 특권을 누린 계층은 또다시 특권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기능은 애를 낳는 것이라는 주장, 동성애는 부자연스럽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법과 규범, 권리와 의무는 대부분 생물학적 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승리의 열쇠는 본국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해외에서 동맹국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공격적인 야수는 전쟁 지휘관으로서 최악일때가 많다. 그보다는 유화정책을 쓸 줄 알고, 사람들을 조작할 줄 알고,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줄 아는 협동적인 인물이 훨씬 낫다.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이런 특징들을 갖추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안정적인 제국체제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여,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장군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했다. 당대에 그를 칭송했던 사람들과 현대 역사가들은 공히 그가 그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온화함과 관용이라는 미덕 덕분이었다고 해석하곤 한다. - 311
농업혁명 이래 인간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그동안 그런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상상의 건축물 역시 더욱 정교해졌다.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모든 문화는 나름의 전형적인 신념, 규범,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환경의 변화나 이웃 문화와의 접촉에 반응해 스스로 모습을 끊임없이 바꾼다. 스스로의 내부적 역동성으로 인해 변이를 겪기도 한다. 안정된 생태계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존재하는 문화조차 변화를 피할 수 없다.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만일 긴장과 분쟁과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가 모든 문화의 향신료라면,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닐 것이며 서로 상충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되는 핵심적 측면이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까지 있다. '인지 부조화'다.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핵심자산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품을 능ㄺ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1521년에는 메소아메리카 세계를 먹어치웠다.스페인인들이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프로아시아는 대양 세계도 처음 뜯어먹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항해를 하고 그 직후 정복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안데스 세계는 1532년에 붕괴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 제국을 짓밟은 것이었다. 유럽인이 처음 호주 대륙에 상륙한 것은 1606년이었고, 자연 그대로의 대륙이 끝장난 것은 영국이 본격적인 식민지화를 시작한 1788년이었다. 그 15년 뒤에 영국인들은 태즈메이니아에 첫 정착지를 건설함으로써 최후까지 남아 있던 독자적 인간 세계를 아프로아시아의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아프로아시아가 삼킨 것들을 모두 소화하는 데는 이후 여러 세기가 걸렸지만 그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지구화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이른바 '민속'요리다. 우리는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토마토소스를 넣은 스파게티를 예상하고, 폴란드와 아일랜드 식당에서는 많은 감자를, 아르헨티나 식당에선 수십 종의 스테이크 중 하나를 고를 것을, 인도 식당에선 거의 모은 음식에 매운 고추가 들어갈 것을, 모든 스위스 카페의 하이라이트는 크림을 잔뜩 넣은 뜨겁고 진한 코코아일 것을 예상한다. 하지만 이 중 어떤 음식도 이들 국가가 원산지가 아니다. 토마토, 고추, 코코아의 원산지는 멕시코다. 이것들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한 다음에야 유럽과 아시아에 들어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다테 알리기에리는 토마토소스가 듬뿍 묻은 스파게티를 포크 (포크는 당시 개발되지 않음)로 감아본 일이 없다. 윌리엄 텔은 초콜릿을 맛본 일이 없으며 부처는 음식에 고추를 넣어 먹은 일이 없다. 감자가 폴란드와 아일랜드에 들어온 지는 4백 년도 되지 않았다. 1492년 아르헨티나에서 얻을 수 있는 스테이크는 라마 고기로 만든 것 뿐이었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우리 대 그들' 이라는 이분법적 진화적 구분을 처음으로 어찌어찌 초월했고 인류의 잠재적 통일을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상인, 정복자, 예언자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세계 전체 단일시장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고객이었다. 이들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경제질서를 세우고 싶어했다. 정복자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 제국이었고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민이었다. 예언자들에게는 온 세계에 진리는 하나뿐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자였다. 이들 역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지난 3천 년간 사람들은 이런 지구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점점 더 야심 찬 시도를 했다. 이어지는 세 장에서는 화폐와 제국과 보편종교가 어떻게 퍼져나갔고 어떻게 오늘날의 통합된 세계의 기초를 닦았는가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역사상 최대의 정복자, 극도의 관용과 융통성을 지녔으며 사람들을 열렬한 사도로 만들었던 정복자에 대한 것이다.
제국이란 정치질서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그런 명칭으로 불리려면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서로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서로 다른 민족이나 국민을 지배해야 한다. 정확히 얼마나 많아야 할까? 둘이나 셋으로는 충분치 않다. 20이나 30이면 충분히 많다. 제국이라 불리기 위한 조건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둘째, 제국의 특징은 탄력적인 국경과 잠재적으로 무한한 식욕이다. 제국으 자신의 기본구조와 정체성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갈수록 더 많은 국가와 영토를 집어삼키고 소화할 수 있다. 오늘날 영국은 국경이 분명하며, 스스로의 기본구조와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는 국경을 넘어설 수 없다. 1세기 전에는 지구상의 거의 어떤 지역이라도 대영제국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문화의 다양성과 영토의 탄력성은 제국의 독특한 특징일 뿐 아니라 역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하다.
많은 경우 하나의 제국이 무너진다고 해서 피지배 민족들이 독립하는 일은 드물었다. 옛 제국이 붕괴하거나 후퇴한 자리에 생긴 진공에는 새로운 제국이 발을 들여 놓았다.
종교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가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속성이 필요하다. 첫째, 언제 어디서나 진리의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째,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이신교는 1천 년 이상 번성했다.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란 이름의 예언자가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교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 마침내 가장 중요한 이신교인 조로아스터교가 되었다.
고타마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개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항상 불만을 낳는다. 마은은 뭔가 불쾌한 것을 겪으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하고, 뭔가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그 즐거움을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 일 수 있을까?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이 같은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고타마는 그 자신이 열반에 들었으며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그는 '부처'로 알려졌다.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부처는 모든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여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발견을 전하는 데 바쳤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한 가지 법칙으로 요약했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난다는 것,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고통은 집착에서 생긴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진리다.
일신론적 종교의 제일 원리는 "신은 존재한다. 그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인 반면에 불교의 제일 원리는 "번뇌는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이다. --440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엔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와 마주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 - 인간의 목소리 - 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 이라고 부른다.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한느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업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송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서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나치가 다른 인본주의 분파와 구별되는 점은 '인간성'에 대해 진화론에 깊이 감화된 좀 색다른 정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다른 인본주의자들과 달리 인류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수도 있었다.
나치의 주된 야망은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보적 진화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치가 인류의 가장 발전된 형태인 아리아인을 보호육성해야 하고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정신병자 같은 호모 사피엔스의 퇴화된 종류들을 격리하거나 심지어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상업, 제국 그리고 보편 종교는 모든 대륙의 사실상 모든 사피엔스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구촌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팽창과 통일 과정이 단선적이었다거나 중단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큰 그림을 보면 다수의 작은 문화에서 몇개의 큰 문화로, 마자믹에는 하나의 전 지구적 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사 역학에 따른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잉ㄹ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새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이러스 같은 기생체는 숙주의 몸속에서 산다. 이들은 스스로를 복제하며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 나가고, 숙주를 먹고 살면서 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게 할 때도 있다. 숙주가 기생체를 퍼뜨릴 만큼 오래 살기만 하면, 기생체는 숙주의 상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속에 산다. 증식해서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며, 가끔 숙주를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기독교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자의 지상낙원에 대한 믿음 같은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파를 위해서라면 목숨가지 걸고서 헌신하게 만든다. 해당 인간은 죽지만, 아이디어는 퍼져나간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라 불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밈 meme' 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1500년경 역사는 가장 중대한 선택을 했다. 인류의 운명뿐 아니라 아마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의 운명까지도 바꿀 선택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그 혁명은 서유럽에서, 아프로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커다란 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주목할만한 제국주의 학자는 윌리엄 존스였다. 그는 1783년 9월 뱅골 최고법원의 판사로 봉직하기 위해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의 경이로움에 사롭잡힌 나머지, 그는 부인 6개월 만에 '아시아 협회'를 세웠다. 아시아, 그중에서도 인도의 문화, 역사, 사회를 연구하는 단체였다. 그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근느 <산스크리트어>를 출간했다. 이것은 비교언어학의 출범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서적이었다. 여러 저서에서 존스는 고대 인도어로서 힌두교 의례에 쓰이는 신성한 언어가 된 산스크리트어가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을 ,그뿐 아니라 이들 언어가 고트어, 켈트어, 고대 페르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와도 비슷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유감스럽게도 인도와 페르시아를 침공한 아리아인들은 현지 원주민과 결혼을 해서 흰 피부와 금발 머리를 잃었으며, 이와 함께 합리성과 근면성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인도와 페르시아의 문명은 쇠퇴했다. 한편 유럽에선 아리아인이 인종적 순수성을 보존했다.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이들이 지배에 적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열등한 인종과 섞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은행이 실제 보유하고 있는 돈은 얼마인가? 여전히 1백만 달러뿐이다. 처음부터 은행에 있던 바로 그 액수다. 미국의 현행 은행법은 이런 행위를 일곱 차례 더 할 수 읻로고 허용하고 있다. 그러면 도급업자는 마침내 자신의 계좌에 1천만 달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은행 금고에는 실제로 1백만 달러 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다. 은행은 자신들이 가진 1달러당 10달러를 빌려주는 것이 허용된다. 그 말은 우리의 은행계좌에 있는 모든 예금의 90퍼센트는 이에 대응하는 실제 화폐가 없다는 뜻이다.
1776년 애덤 스미스는 아마도 경제학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문일 <국부론>을 썼다. 제1권 8장에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주장을 폈다. 지주나 직공이나 구두공이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내면 그는 남는 돈으로 조수를 더 많이 고용해 이윤을 더욱 늘리려 한다. 수익이 늘어날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은 조수를 채용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 기업인의 수익 증대는 공동체의 부와 번영을 늘리는 기초가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에게는 이 내용이 그리 독창적이라고 비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모두 스미스의 주장을 단연히 여기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에서 이 주제의 변주를 듣는다. 하지만 스미스의 주장 - 개인적인 수익을 늘리려는 이기적 인간의 욕구는 공동체 부의 기반이다. - 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에 속하낟. 경제적 관점에서 뿐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 관점에서는 더더욱 혁명적이다. 스미스는 사사리상 탐욕이 선한 것이며, 내가 부자가 되면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자본주의 정부와 기업이 특정 과학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보통 "이 프로젝트는 우리의 생산량과 수익을 늘려줄 것인가? 경제성장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다. 이 장애물을 못넘는 프로젝트는 후원자를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 자본주의를 관련시키지 않을 길은 없다.
1484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을 찾아가, 동아시아를 향한 새 무역로를 개척할 테니 선단을 구성할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제안한다. 그런 탐사는 위험이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배를 건조하고 보급품을 사고 선원과 군인 들의 급여를 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투자가 수익을 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포르투갈 왕은 거절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업의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처럼,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을 거쳐 포르투갈로 되돌아왔다. 그는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번에 그는 새로 통일된 스페인의 통치자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 운을 시험해보았다. 그는 숙달된 로비스트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이사벨라는 대박을 터뜨린다.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금광, 은광을 개발했으며 사탕수수와 담배를 재배할 대형 농장을 건설하여 스페인의 왕, 은행가, 상인을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부자가 되게 만들어 주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정확히 어떻게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었을까? 첫째, 이들은 기일에 맞춰 전액을 반드시 갚았다. 그래서 대부업자들에게 신용을 얻었다. 둘째, 사법제도가 독립되어 있는 데다 사적 권리, 그중에서도 사유재산권을 보호했다. 자본은 민간인들의 재산을 보호해주지 않는 독재국가에서 새어나와 법치와 사유재산권이 있는 국가로 흘러들어갔다.
유럽의 주요 도시 대부분에 주식거래소가 설립되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주식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1602년 설립 인가를 받았다. 당시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를 떨쳐버리는 투쟁을 하던 시기로, 스페인이 발사한 대포 소리가 암스테르담의 성벽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던 시절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주식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선박을 건조했고, 그 배를 아시아로 보내서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의 재화를 실어 왔다.
오늘날 일부에선 21세기의 기업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근대 초기 역사를 보면, 기업이 이익을 무한히 추구하게 놔둘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인도양에서 활약한 반면 네덜라드 서인도회사는 대서양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허드슨 강에서 이루어진 교역이 중요했기 때문에, 회사는 이를 장악하기 위해 강 입구 섬에 뉴암스테르담이란 정착지를 건설했다. 식민지는 거듭해서 원주민들의 위협을 받고 되풀이해서 영국인의 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1664년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영국은 섬의 이름을 뉴욕으로 바꿨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식민지를 원주민과 영국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웠던 성벽의 잔해 위에 깐 포장 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즉 월스트리트가 되었다.
미시시피 사의 주식값은 1만 리브르에서 1천 리브르로 떨어졌고, 그 다음엔 완전히 붕괴하여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즈음 프랑스 중앙은행과 왕국 재무성은 돈은 한푼도 없으면서 무가치한 주식만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손 투기꾼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금융붕괴 사태였다. 프랑스의 금융시스템은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미시시피 사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연줄을 이용해서 주가를 조작하고 매수 광풍에 불을 질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대중은 프랑스 은행 시스템과 프랑스 왕의 현명함에 대해 불신했다. 루이 15세는 신용대출을 받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것은 해외의 프랑스 제국이 영국의 손에 떨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인들은 자금을 저리로 쉽게 빌릴 수 있었던 데 비해, 프랑스인들은 융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왕은 점점 불어나느 빚을 갚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더욱더 높은 이자율로 빌려야 했다. 그가 죽자 왕위에 오른 (1774) 손자 루이 16세는 1780년에 이르러 자신이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간 예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 지불금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1789년 그는 마지못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15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북미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는 런던 사, 플라이마우스 사, 도체스터 사, 매사추세츠 사 같은 17세기 초 주식회사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629
정부가 큰돈을 벌려고 나선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동인도회사와 잡다한 영국 사업가들은 마약 수출로 돈을 벌었는데, 특히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중독자가 되었고, 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쇠약해졌다. 1830년대 말 중국 정부는 마약 거래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으나 영국 마약 상인들은 법을 완전히 무시했고, 중국 당국은 배에 실려 있던 마약을 압류해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약 카르텔들은 웨스트민스터와 다우닝 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의원과 각료들이 마약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었다.
1840년 영국은 '자유무역' 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감 과잉이던 중국은 증기선, 대구경 대포, 로켓, 신속발사 소총 같은 영국의 신무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어진 평화조약에서 중국은 영국 마약 상인의 활동을 제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중국 경찰이 마약 상인에게 끼친 피해도 보상하기로 했다. 더구나 영국ㄱ은 홍콩의 조차를 요구해 통치함으로써 그곳을 안전한 마약 거래 기지로 계속 사용했다. (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세기 말 중국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는 약 4천만 명이 마약 중독자 였다.
유럽인은 아메리카를 정복한 뒤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고 사탕수수, 담배, 면화 농장을 건설했다. 이 광산과 농장은 미국의 생산과 수출의 중추가 되었다. 사탕수수 농장은 특히 중요했다. 중세 유럽에서 설탕은 희귀한 사치품이었다. 중동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수입되어 진미 요리나 엉터리 약에 들어가는 비밀 성분으로만 조금씩 사용되었다. 아메리카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 건립된 이후 점점 더 많은 설탕이 유럽에 들어왔다. 설탕 가격은 하락했고, 유럽인들은 단것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기업가들은 엄청난 양의 단것을 만들어 수요를 충족시켰다. 가령 케이크, 쿠키, 초콜릿, 캔디 그리고 코코아, 커피, 홍차 같은 가당 음료였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약 1천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아메리카로 수입되었다. 이 중 약 70퍼센트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노동 환경은 끔찍했다. 대부분의 노예는 짧고 비참한 사람을 살았다. 그 외에도 노예를 포획하기 위한 전쟁이나 아프리카 내륙에서 아메리카 연안으로 노예를 옮기는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모두가 유럽인들이 달콤한 홍차와 캔디를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설탕 농업의 거물들이 막대한 이윤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행된 일이었다.
노예무역은 정부나 국가에게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경제사업으로서,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자유시장에 의해 조직되고 자금조달이 이루어졌다. 민간 노예무역 회사들은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주식거래소에서 주식을 판매했고, 좋은 투자처를 찾는 중산층 유럽인들이 이 주식을 샀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회사는 배를 사고 선원과 군인을 고용한 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서 미국으로 수송했다. 노예는 대형 농장의 주인에게 팔렸고 그 수익은 다시 설탕, 코코아, 커피, 담배, 면화, 럼주 같은 농장의 산물을 구매하는 데 쓰였다. 이들은 유럽으로 돌아와 설탕과 면화를 비싼 값에 판매한 뒤, 다시 돛을 달고 아프리카로 향하여 같은 영업을 되풀이 했다. 주주들은 이런 사업 방식에 매우 만족해했다. 18세기 내내 노예무역 투자에 대한 연간 수익률은 약 6퍼센트였다. 현대의 컨설턴트라면 누구나 재깍 인정할 만한 엄청난 돈벌이였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그것만 아니라면 흠이 없었을 기록에 새겨진 유일한 오점이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벵골 대기근 역시 이와 비슷한 역학에 의해 유발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인 1천만 명의 삶보다 자기의 이익에 더 신경을 썼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 사업에 돈을 내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중히 여기지 않았다. 지구의 한켠에서 현대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범죄와 악행이 뒤따랐다.
고무 산업은 특히 악명 높았다. 고무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산업 필수품이 되었고, 고무 수출은 벨기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고무를 수집하는 아프리카 촌마을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유로 잔인한 벌이 주어졌다. 팔을 절단해 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885~1908년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6백만 명 (콩고 인구의 20퍼센트_에 이르렀다. 일부에선 1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정한다.
증기기관의 유형은 여러 가지 였지만 모두가 공통된 원리로 작동했다. 석탄을 비롯한 모종의 연료를 태우고 거기서 나오는 열로 물을 끓여서 증기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증기가 팽창하면서 피스톤을 밀어내고, 피스톤이 움직이면 거기 연결된 것은 무엇이든 따라 움직인다. 18세기 영국 석탄광산에서 피스톤은 갱도 바닥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와 연결되어 있었다. 초창기 증기기관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효율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물을 뿜어 올리려면 엄청난 양의 석탁을 태워야 했다. 하지만 광산에는 석탄이 바로 옆에 잔득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1825년 한 영국인 엔지니어는 석탄이 가득 찬 운반 차량의 행렬에 증기기관을 연결했다. 증기 엔진은 이 광차들을을 인근의 2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까지 끌고 갔다. 이것이 역사상 첫 증기기관차였다. 만일 증기를 이용해 석탄을 운반할 수 있다면, 다른 물건은 왜 안 되겠는가? 사람은 왜 안 되겠는가? 1830년 9월 15일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잇는 최초의 상업 철도가 영업을 시작했다.
또 다른 중요한 발명품은 내연기관이었다. 내연기관은 불과 한 세대 남짓에 인간의 운송 수단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석유를 액체 정치권력으로 바꿔놓았다. 석유는 이미 수천 년 동안 알려져 있던 물질이었고, 지붕에 방수처리를 하거나 회전축이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데 쓰였다.
분명 세상에는 에너지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에너지를 찾아내 그것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전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다.
화학자들이 알루미늄을 발견한 것은 1820년대였지만, 광석에서 이것을 분리해내기는 극도로 힘들었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수십 년 간 알루미늄은 금보다 더 비쌌다. 1860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는 가장 신분이 높은 손님들 앞에는 알루미늄 식기를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보다 신분이 떨어지는 사람들 앞에는 금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가 놓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화학자들이 막대한 양의 알루미늄을 값싸게 추출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오늘날 연간 총 생산량으 3천만 톤에 이른다. 만일 나폴레옹 3세가 자기 백성의 후손들이 샌드위치를 싸거나 남은 음식을 가져갈 때 값싼 알루미늄 호일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정말 놀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문제가 생겼다. 누가 이 모든 물건을 구매할 것인가?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산업혁명은 인류사회에 수십 가지의 커다란 격변을 불러왔다. 산업적 시간에 적응하는 것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또 다른 두드러진 예로는 도시화, 농민의 소멸,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등장, 보통 사람에게 주어진 힘, 민주화, 청년문화, 가부장제의 해체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격변들조차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게 닥친 가장 증요한 사회혁명에 대면 시시했다. 그것은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리를 대신한 사건이었다.
폭력이 감소한 것은 대체로 국가의 등장 덕분이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폭력은 가족과 공동체가 서로 일으키는 국지적 반목이 원인이었다.
익히 아는 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더 적었고 근근이 버틸 양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병과 착취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아이디어와 기술과 농작물을 이동, 순환시키고 새로운 상업로를 개척한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ㅡ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 730
진화의 결과 우리의 마음과 신체는 수렵채집인의 삶에 맞도록 주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농업으로, 그 다음에 산업으로 이행한 탓에,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타고난 성향과 본능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므로 가장 깊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이루는 어떤 것도 매머드 사냥에 성공한 슈렵채집인 무리가 경험한 흥분의 도가니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근접할 수 없다. 새로운 발명이 하나씩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에덴의 낙원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씩 멀어질 뿐이다.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동물권리 운동가들의 주장을 10분의 1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현대의 기업농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두 기둥 - 대중매체, 광고산업 - 은 지구의 만족 저장고를 생각지 않게 고갈시키는 중일 수도 있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세계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 다른 모든 정신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복도 월급이나 사회관계, 정치적 권리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경, 뉴런, 시냅스 그리고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 등의 다양한 생화학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집을 사거나 승진하거나 심지어 진정한 사랑을 찾거나 하는 일로 행복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밖에 없다. 바로 신체 내부의 쾌락적인 감각이다. 방금 복권에 당첨되거나 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기뻐 날뛰는 사람은 실제로 돈이나 연인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혈관 속을 요동치며 흐르는 다양한 호르몬과 뇌의 여러 부위에서 오가는 전기신호의 폭풍에 반응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중요성을 지닌 역사적 진전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나 반란이나 이데올로기에 시간을 그만 낭비하고, 대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에, 즉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일에 집중 할 수 있다.
우리가 뇌의 생화학 시스템을 이해하고 적절한 요법을 개발하는 데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다면, 혁명을 일으키지 않아아도 과거 어느 때보다 사람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일례로 프로작은 생화학 시스템 자체는 바꾸지 않지만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게 돕는다. 과거 뉴에이지 세대의 유명한 구호만큼 생물학자들의 주장을 핵심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또 없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 성형수술, 아름다운 집, 높은 자리는 우리에게 전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지속적 행복은 오로지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에서만 온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장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렷다. 완전히 거꿀 ㅗ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은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의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2005년 시작된 '블루 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컴퓨터 내의 전자회로가 뇌의 신경망을 고스란히 모방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에 다르면, 지금 모금이 적절히 이루어질 경우 10~20년 내에 우리는 인간과 흡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인공두뇌를 컴퓨터 내부에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성공한다면, 이것은 생명이 유기화합물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40억 년간 배회한 끝에 마침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꿈조차 꿀 수 없던 방식으로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나갈 태세를 갖추고서, 인간의 마음이 오늘날의 디지털 컴퓨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리라는 데 대해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2013년 유럽연합은 이 프로젝트 10억 유로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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