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생각에 대해서 한 장의 시각화된 장표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최근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시각화된 장표를 통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까? 시각화되었지만 내용의 충실도가 부족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다가 일단 내가 읽은 책들을 하나의 장표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비록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한권 한권 ~ 수 십권이 쌓여나간다면 각각의 한 장의 장표들은 내 머릿 속에 시각화된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 희망하며 뉴런들이 시냅스에 의해 수없이 연결되듯 내 생각도 끝없이 확장될거라 기대해본다. 

반응형

최근에 책을 읽는 이유는 기존과는 다르게 실제 업무와 새롭게 시작한 업에 도움이 될 만한 재료들을 찾아서 나만의 격자 무늬 틀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여 조금은 더 체계적으로 모든 일에 접근하기 위해서이다. 즉흥적이지 않고, 많은 일들을 빠르면서도 실수를 가능한 줄이고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방법으로 삶과 일에 적용해 보고 싶다.

 

이제는 업무를 진행을 할 때 새로운 많은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필요가 있고, 그들에게 내가 원하는 답을 얻을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나의 모든 업무가 진행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현명하게 요청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없이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간 『설득의 심리학』,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와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그런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얻으려고 시도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연속선 상에서 알렉산드라 카터의 『원하는 것을 얻는 10가지 질문법』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으로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이유는 이 방식을 나도 어쩌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가족과의 대화에서, 고객과의 대화에서 어쩌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방식이 효과를 만들어낼 것 같아서 짧게 정리해본다. 나와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방식과 조언을 통해서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작은 것 부터 하나씩 실천에 옮겨보자. 그리고 평가하고 개선하면서 나의 방법론, Tool이 되었으면 한다. 


[나를 돌아보는 다섯 가지 질문]
1. 문제를 올바로 정의하라. -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2.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라.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3.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라. -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4. 과거의 경험에서 방향을 찾아라. - 과거에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5. 한 단계씩 나아가라. -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 단계는 무엇일까?

[나에게 올바른 질문을 위한 조언]
1. 의식을 준비하라.
2. 답을 적어라.
3. 생각하는 것을 적어라.
4. 후속 질문을 하라.
5. 답을 요약하라.

 

[상대방을 파악하기 위한 다섯 가지 질문]
1. 가장 넓은 그물을 던져라. - 말해주세요
2. 상대방의 욕구를 파악하라. -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3. 상대방의 우려를 먼저 해결하라. -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4. 과거의 성공을 기억하게 하라. - 과거에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죠?
5.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단계를 설정하라. - 첫 단계는 무엇일까요?

[상대방에게 올바른 질문을 위한 조언]
1. 핵심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라.
2. 침묵의 시간을 즐겨라.
3. 후속 질문을 하라.
4. 요약하고 피득백을 요구하라.
5. 말하지 않은 것까지 들어라.

 

반응형

 

최근 업이 바뀌면서 장표를 만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는 역할이 이전 보다 더욱 커졌다. 아직까지는 연습과 경험이 부족하여 가끔씩 논리적인 허점을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하려다 곤혹을 당하기도 한다. 충분한 근거와 논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개인적인 결정과 생각을 가지고 주장을 하려다 보니 설득력을 잃곤 한다. 이러한 부족한 점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고, 다음에 상대방을 설득하려 할 때는 지금의 실수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도록 해봐야 겠다. "세상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일어난 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차근 차근 좋은 자료와 책들을 통해서 조금씩 채워나가자.

 

[ 보고의 정석 ]

1. Idea - 한 눈에 보이게 작성하라.
2. Outcome - 이미지로 기억하게 만들어라
3. Logic Flow -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한 문장
4. Matrix - 할말이 많으면 네모로 분류하라.
5. Circle - 동그라미의 관계를 이용(과정,순환,포함,분류,마인드맵)하라.
6. Pyramid - 상하위 단계를 나타내는데 활용하라.
7. Graph - 원인과 결과는 그래프를 짚어가며 보여줘라
8. Result - 기대효과를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로 제시하라.
9. Imagination - 머리에 그림을 그리게 설명하라.
10. Memory - 상대방의 입장에서 기억하게끔 만들어라.

 

[ 보고의 정석 ] - Image

 

반응형

 

현재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세기까지만 해도 그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라비아반도는 16세기경부터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20세기 초반 영국의 지원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낸 후 아랍의 내부 세력 간 주도권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때 리야드를 통치하던 사우드 가문이 메카의 하심 가문을 물리치고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합니다. 이후 영국이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지배를 허용하면서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가 건국됩니다. (Book: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20p)

 

파이살이 석유 무기화를 망설인 것은 무엇보다 사우드 왕가가 왕실의 안전과 부를 지키기 위해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동에서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이 전복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사우드 왕가도 반대 세력에 의한 쿠데타를 걱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사우디는 적은 인구(2019년 기준, 사우디 3400만, 이란 8300만, 이라크 3900만)로 막대한 석유가 매장된 넓은 영토를 지켜야 했습니다.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는 사우디의 체제 유지와 안보 차원에서 중요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사우디의 막대한 석유 판매 수익은 달러로 전환되어 미국 금융 기관에 예치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이 사우디에 아람코를 설치한 이후에 사우디는 이미 달러와 공동 운명체였습니다. 이렇게 사우디는 정치적, 경제적 관계때문에 미국을 쉽게 압박할 수 없었습니다.

 

이즈음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부통령 자리에 오르는데, 그는 미국을 압박하는 데 미온적이었던 사우드 왕가에 대해 미국 및 미국 자본과 결탁한 반동적인 지배 집단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합니다.

 

사우디의 확답을 받지 못한 채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등은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선제 기습으로 전쟁을 개시합니다. 이 전쟁은 4차 중동전쟁 또는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불리는데, 전쟁이 발발한 10월 6일이 이스라엘의 종교 기념일인 욤키푸르(신성한 속죄일)였기 때문입니다. (Book: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92p)

 


■ 아람코(Saudi Arabian Oil Company)

- 아람코가 내는 배당금과 세금이 사우디 정부 재정의 87%를 차지할 만큼 사우디 경제는 아람코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의 셰일 오일 생산등으로 인한 저유가가 지속되고, 화학연료로 인한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석유가가 폭락하자 2016년 아람코의 매출은 크게 줄었고, 당시 사우디 경제성장률은 0%대로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한 바 있다.

2019년 4월 1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레이팅스는 아람코의 영업이익이 2240억 달러(254조), 순익 1111억 달러(126조)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같은 기간 전 세계 기업 중 가장 큰 이익으로, 순이익 기준 2위인 애플(594억 달러)의 2배에 달한다.

 

■ 아람코와 국내 기업 관계

- 아람코는 에쓰오일 지분 63.41%를 보유한 최대 주주이며, 현대오일뱅크 지분 17%를 획득하여 2대 주주가 되었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과는 자회사 '사빅'으로 합작사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반응형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COVID-19는 수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마치 과거로 회기한 듯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차단되고, 백신과 치료제의 부재로 사람들은 여전히 전염병의 평등함에 두려워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가 COVID-19 전까지만 해도 수 없이 내뱉었던 단어인 '4차 산업혁명'은 COVID-19 이후 2개월 만에 2년이라는 기간 만큼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IT 뿐만 아니라 산업계는 이미 Digital Transformation 이라는 화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블록체인, IoT, 5G 등 최신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4차 산업혁명'의 파도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한다. 이와 동시에 COVID-19 이후에 식당, 카페들에는 키오스크가 확산되고, 원격화상회의, 온라인 커머스 등 비대면 방식으로 많은 것들이 재편되고 있다.

 

분명 최근 몇년 사이의 변화들은 4차 산업혁명이라 칭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예상하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그 변화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과연 그 모습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인간의 수많은 육체 노동 뿐만 아니라, 지식 노동도 AI를 기반으로 하는 로봇과 자율주행, 스마트 팩토리 등으로 대체하여 인간의 노동이 필요한 부분은 아주 국한된 분야에만 해당될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일'이라고 정의하고 살아가는 삶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를 해야할까?

대니얼 서스킨드의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는 이런 고민들을 다룬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스마트팩토리 분야에서 업을 가지고 있으며, 정보관리기술사를 통해서 최근 ICT 기술에 대해 학습하면서 대부분의 내용들은 익숙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다시 한 번 고민해보게할 질문 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1. 과연 AI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줄어들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서 그 동안 반복되었던 의심을 무너뜨릴 것인가?

 

- 지금까지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졌지만, 동시에 새로운 직업들이 등장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단계까지는 그런 사이클은 반복될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에서도 논하듯이 그 직업은 사람들의 피하게 되는 각종 육체노동과 고난이도의 업무 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사라진 업무들에서 자연스럽게 대체되지는 않기에 분명 그 전환시기에 많은 문제가 예상이 된다. 앞으로 얼마 후일지 모르겠으나, AI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업무는 지극히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에 사회적 고민은 필요하다. 가까운 미래에 당장 닥치지는 않을 것이지만, 어쩌면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2. 앞으로 빈부격차의 심화는 막을 수 없는 것인가? 

   기술 대기업으로 집중되는 정보와 권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AI, 클라우드, 빅데이터는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기술들이다.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애플'은 미국의 IT를 선도하는 기업들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네이버, 카카오'가 IT를 선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의 특징은 '데이터' 이다. 지금은 말 그대로 '빅데이터'의 시대이다. 지금은 데이터를 가진 기업을 중심으로 데이터가 다시 쌓이고 있으며, 부와 권력이 기술 대기업에 집중이 되고 있다. COVID-19 3월 이후로 미국의 10대 IT기업이 총 680조 정도의 부가 증가했다고 한다. 수많은 벤처기업 중 경쟁력있는 기업들은 위에 소개한 기술 대기업이 인수,합병을 한다. 앞으로는 그 정도가 더 심화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기술 대기업에 경쟁하기 위해서는 허들이 너무나 높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들은 통제하고 제어하는 방법은 이제는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3. 줄어드는 일자리와 끊임없는 소비가 필요한 자본주의를 위해서 기본소득은 필요한가?

 

- 기본소득은 다른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 COVID-19로 인한 '재난지원금' 과 주요 정당의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 등으로 인해 이제는 조금씩 고민의 물꼬가 생겼다. 기본소득에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지원하는 '보편적 기본소득'과 특정한 기준으로 분류하여 지원하는 '선택적 기본소득'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는 기본소득에 대한 부분은 의견제시가 어렵다. 하지만 이 책에서 논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기본소득은 필요할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하면 부의 양극화로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술 대기업에서 어떤 사회적 약속과 법률로 세금을 부과하고 분배할 것인가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될 것 같다.

 

4. 사람은 일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가?

 

- 사람은 분명 일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 전제조건은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하루에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일을 통해서 의미를 찾는 방식은 전개하는 순서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삶 자체의 의미를 상실하기에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만약, 사람들이 노동하는 시간이 극적으로 감소하고 여가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 여가시간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앞으로 나와 내 아이들을 위한 교육은 어떤 것이 필요한가?

 

-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새로운 것에 대해서 빠르게 학습하고 다른 이들과 깊이 있게 토론할 수 있는 능력, 지금도 어디에서나 필요한 역량이지만 앞으로는 무엇보다 더 우선적으로 필요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의사결정에 대한 책임이 더 많이 질 것이다. 의사결정을 할 때, 단순한 자기만의 생각보다는 토론과 다양한 견해와 충돌한 후의 정제된 생각 반영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코딩이다. 가트너에서 소개하는 기술을 보면 AI Driven Development 라는 것이 있다. 언젠가는 AI가 직접 개발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이제는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많은 애플리케이션이나 다양한 웹서비스 들에서 AI와 다양한 기준의 SW개발이 더 증가할 것이다. 단순히 사용자의 입장이라도 프로그래밍에 대한 이해와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녹여낼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갖출 필요가 있다.

 

분명 세상은 변해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쩌면 내가 그 중심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시점에서는 각자의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단순히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이들'은 뒤늦게 후회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은 틀리더라도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앞으로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자기들만의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조금은 늦더라도 그 파도 속에서 지켜봐야 한다. 그 변화를, 그 도전을, 그 위기를, 항상 그런 상황 속에서 삶과 세상이 변화했다. 긴장하자.

 

 


# 함께 보기: <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반응형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리오 휴버먼

 

'이 책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그것은 경제 이론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과 역사로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결합은 중요하고도 필요하다. 역사의 교훈은 경제적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기 어렵다. 반면, 경제 이론은 역사적 배경에서 분리되면 따분해진다. "우울한 학문"[경제학]은 역사를 빠뜨린 채 가르치고 연구하는 한 계속 우울한 학문으로 남을 것이다.'

 

저자의 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 듯 하다. 지금까지 경제사에 대한 책들을 접해왔지만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주제들과 지식 전달 위주의 구성 때문인지 책을 읽는 것이 흥미가 있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책의 내용 또한 쉽게 머리 속에서 지워졌다.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읽은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이 책으로 수업을 들었다면, 아마 그때부터 세계사에 관심을 가졌을 거다." 

 

저자는 봉건주의에서 부터 이 책이 쓰여진 1936년까지의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그리고 너무나 생생한 사례, 논리적인 연계관계를 끊지 않으며 책을 마무리한다. 어느 순간 이해가 된다. '돈이 왜 만들어졌는가?', '자본주의는 왜 만들어졌는가?', '빈부격차가 왜 만들어졌는가?',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라는 수 많은 질문들을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어느 정도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경제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그 어떤 경제사 책보다 더 깊이 각인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동하는 과정, 두 번째는 자본주의의 방향에서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 책은 1929년 대공황 이후이자 세계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6년에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언론인이자 노동운동가에 의해 쓰여졌으며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만약 작가가 현재도 살아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었을까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를 배우려 하는 이유는 그 폐해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부분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고 있는 시스템의 구조를 알고, 그 속에서 매몰되지 않고 나아가서는 나 역시 '경제적 독립'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이 책에 접근을 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투자를 하더라도 내가 투자하려는 이 자본시장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고, 그 동안의 수많은 변화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내가 어떤 작은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지 판단의 근거를 하나씩 쌓아가고 싶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앞으로 내가 경제 분야에 대해서 파고들 수많은 영역을 위한 첫걸음이자 개론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어떤 역사와 구조 속에서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떤 부작용들이 있었는지를 알게해주는 기반 지식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각 영역에 대해서 확장하려 한다. '과연 돈의 무엇인지?', '시장의 움직임은 무엇이 결정하는지?', '상황에 따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이 있는지?' 하나씩 파생해나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너무나 기본이 묵직하게 잘 잡혀있다. 항상 확장을 하면서 산발적으로 흩어지는 주제에 정리가 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다시 돌아와서 그 줄기를 연결해야 겠다.

 

책장을 둘러보니 경제에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책은 없다. 조금씩 이어나가보자.

고마운 책이다. 이 책은 앞으로도 내가 간직할 책 중에 하나로 손꼽힐 것이다. 책장에 비슷한 주제로 홍춘욱 박사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라는 책이 있다. 읽었던 책이었는데 아무런 기억이 없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의 내용에 덧붙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파생시키는 계기로 삼아보자.

 

더보기

1. 기도하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 중세 사회는 기도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 교회 계급과 군사 계급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로 이뤄졌다.

- 서부, 중부 유럽의 농토는 대부분 '장원'이라는 지역들로 나뉘어 있다

- 땅은 방목지, 목초지, 삼림, 황무지, 경작지로 되어 있었고 방목지, 목초지, 삼림, 황무지는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경작지는 두 부분으로 나뉨, 한 부분은 보통 전체 영지의 1/3을 차지 하며 영주에게 속한 '직영지' 였으며 다른 부분은 토지에서 실제로 노동하는 농민들이 보유했다.

- 장원 제도의 주요한 특징이 있다.

: 첫째, 경작지를 두 부분으로 나눠서 한 부분은 영주 자신이 보유해 영주만을 위해 경작했고, 다른 부분은 여러 농민들에게 분배됐다.

: 둘째, 토지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밀집된 경구가 아니라 흩어져 있는 지조로 경작됐다는 것

: 셋째, 농노가 단지 자신의 보유지만이 아니라 영주의 직영지에서도 노동을 했다.

- 항상 영주의 직영지를 먼저 갈고, 씨 뿌리고 먼저 보호해야 했다.

- 봉건 시대에는 토지만이 거의 모든 필요한 재화를 생산했고, 그래서 사실상 토지만이 부의 열쇠였다. 부의 척도는 단 한 가지, 즉 보유한 토지의 양으로 결정됐다.

 군역의 대가로 토지를 보유한 제후와 귀족들은 다시 비슷한 조건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토지를 하사했다.

- 교회에는 진보적이고 생기가 있었지만 다른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단지 교회 토지를 잃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교회는 '십일조'로 재산을 늘렸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소득에 대한 10퍼센트의 세금이었다. 한 유명한 역사가는 그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십일조는 오늘날의 어떤 세금보다도 훨씬 더 부담이 큰 토지세, 소득세, 사망세로 이루어졌다"

- "봉건제는 최후의 수단으로, 흔히 환상에 불과한 보호의 대가로 유한 계급들이 노동하는 계급들을 쥐락펴락하게 하고, 경작자들이 아니라 정복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주는 조직에 토대를 두었다.

 

2. 상인이 나타나다.

봉건사회 초기에는 장원 촌락은 그 자체로 거의 완벽했다. 장원은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고 소비했다. 단지 약간의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지역 차원에 한정된 '국지적 시장'이 있었다.

- 시장을 더 확대하지 못하게 한 또 다른 장애물은 열악한 도로 조건이었으며, 두 부류의 강도 때문이었다. 하나는 보통의 강도, 다른 하나는 상인을 멈춰 세우고 열악한 도로를 지나는 대가로 통행세를 징수한 봉건 영주였다.

- 하지만 상거래는 계속 증가했다. 11세기 십자군 원정에 의해 상업은 크게 발전했고, 12세기에는 서유럽에 변화가 일었다.

- 십자군 운동의 진정한 힘과 그것을 이끈 활력은 특정 집단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에 주로 바탕을 둔다.

첫째, 교회였다. 물론 종교적 동기가 분명했지만 교회는 세력 확장을 원했고, 기독교 세계가 넓어질수록 교회의 권력과 부는 커졌다.

둘째, 아시아의 이슬람 세력권과 매우 가까이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비잔틴 제국과 비잔틴 교회(그리스정교회)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을 세력 확장의 기회를 여겼던 한편, 그리스 정교회는 자기 영토에 이슬람 교도들이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단으로 보았다.

셋째, 전리품을 원했거나 빚을 진 귀족과 기사, 유산이 적거나, 전혀 없었던 젊은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십자군이 토지와 부를 얻을 기회라 생각했다.

넷째, 이탈리아 도시들인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얼마동안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기 때문에 동방의 향료, 비단, 모슬린, 약재, 양탄자는유리한 처지에 있던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주로 무역 도시였기 때문에 소아시아 연안 도시들과 무역할 수 있는 특권을 원했다. 이탈리아의 무역도시들은 십자군을 상업상의 이익을 얻을 기회로 여겼다.

11세기와 12세기의 남방의 지중해에서 무역이 부활했다면, 북방의 바다에서는 무역의 가능성이 크게 열리고 있었다. 브루게에서는 유럽과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세계가 접촉했다. 북방의 상품을 운반하는 상인들은 알프스를 넘어온 남방의 상인들과 샹파뉴 평야에서 만났다. 이 곳의 많은 도시들에서 대규모 정기시가 열렸다.

- 예전에는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하고 꾸준한 상품 수요가 없어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상설 시장이 열릴 수 없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의 정기시는 안정된 상설 교역으로 가는 일보 전진이었다. 과거에는 주시만으로도 간단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는데, 이제는 주시로는 늘어나는 교역 기회를 붙잡을 수 없었다.프랑스의 푸아가 그런 지역이었는데 왕에게 1년에 두 차례의 정기시 설립을 요청했다.

- 중세 초기의 주시는 소규모였고, 대부분이 농산물인 지역 상품을 취급했다. 반면에, 정기시는 대규모였으며 알려진 모든 세계에서 들어오는 도매 상품을 취급했다. 정기시는 소규모 떠돌이 행상인과 지방의 장인과는 구별되는 대상인들이 동방과 서방, 북방과 남방에서 들어오는 해외 상품을 사고 팔았던 유통 중심지였다.

- 당시 영주는 방방곡의 상인들이 정기시에 오라고 초청했으며 상인들이 정기시에 들어오고 떠날 때 경호를 제공했으며 정기시에 가는 도중에 정례적으로 요구했던 부과금과 통행세를 면제했다. 이는 정기시에서 장사하는 사인들은 영주에게 특권의 대가를 지급했기 때문이다. 들어오고 떠날 때와 물건을 창고에 보관할 대 세금이 있었고, 판매세와 접포세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기시는 매우 커서 자체적으로 치안대와 특별 경비대, 재판소를 두었다.

- 정기시는 상업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행해진 금융 거래 때문에도 중요했다. 정기시의 중심에 있었던 환전상의 건물 안뜰에서는 갖가지 주화의 무게를 달고 평가하고 교환했다. 또 대출을 교섭하고, 묵은 빚을 갚고, 신용장을 갱신하고, 환어음을 자유롭게 유통했다. 당시의 은행가들은 이 곳에서 광범한 금융 거래를 했다.

이런 사실은, 경제 생활이 거의 화폐 사용 없이 이루어진 구래의 자연 경제가 상업이 발전함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하다.

- 화폐가 도입되면 이제 단일한 거래가 이중의 거래로 변했지만, 그럼에도 시간과 노력은 절약됐다. 이렇듯 화폐 사용은 상품 교환을 더 쉽게 함으로써 상업을 촉진했다. 상업 발전은 다시 화폐 거래를 확대하는 반작용을 한다. 12세기 이후로 시장 없는 경제는 많은 시장이 있는 경제로 변모했다. 그리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중세 초기의 자급자족하는 장원의 자연 경제는 상업이 팽창하는 세계의 화폐 경제로 변모했다.

 

3. 도시로 가다.

상업 증대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도시의 성장이었다.

- 상업이 급속하게 확대되는 곳에서 도시가 성장한다고 한다면, 중세에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성장하는 도시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곳이 도시가 제일 먼저 성장한 곳이었다.

 

p44

두 도로가 만나는 곳이나 가 어귀 또는 땅의 경사가 적당한 곳에서 도시가 성장하고 수가 늘어났다. 그런 곳이 상인들이 찾던 장소였다. 게다가 그런 곳에는 보통 대성당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성시"라 불린 요새화한 곳이 있었다. 오랜 여행 중에 휴식을 취하거나, 얼어붙은 강이 녹기를 기다리거나, 진흙 길을 다시 지날 수 있기를 기다리는 떠돌이 상인들은 자연히, 둘러쌓인 요새의 벽 근처나 대성당의 그늘에서 멈추었다. 점점 더 많은 상인들이 이런 곳에 모여들면서 "성곽 밖", 즉 '바깥쪽 성시'가 생겨났다. 오래지 않아 '성곽 밖'이 구래의 '성시'바체보다 더 중요해졌다. 얼마 안 가서 '성곽 밖' 의 상인들은 보호를 위해 그들의 도시 주위에 방어벽을 쌓았는데, 그것은 아메리카 식민 개척자들의 말뚝 울타리와 비슷했다. 그러자 '성시'의 벽은 불필요해져서 허물어뜨렸다. 옛 '성시'가 밖으로 확대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곽 밖'에 흡수됐다. 사람들은 옛 장원의 촌락을 떠나 활독적이며 성장하는 이 도시들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이 확대되면서 일자리도 많아졌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갔다.

 

상인들은 주시와 정기시에서 교역을 할 때 자신들의 증대된 재력으로 흥정을 더 잘 하기 위해 뭉쳤다. 이제 자신들의 방식을 속박하는 봉건적 제약에 부딪힌 상인들은 장사 확장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도시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길드' 또는 '한자'라고 불린 조합으로 뭉쳤다. 상인들은 싸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었던 곳에서는 만족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하는 곳에서는 싸웠다.

- 일분 봉건 주교와 영주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몰랐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감지할 만큼 눈치가 빨랐던 사람들은 일어나고 있던 일을 최대한 이용해서 결국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일조차 언제나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역사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하려 한다.

-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도시 공화국들처럼 어떤 도시들은 완전히 독립적인 도시가 됐다. 자유 코뮌들의 경우에는 독립의 정도가 다양했다. 봉건 영주에게서 간신히 몇 가지 특권을 얻어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는 영주의 지배를 받는 도시들도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권리가 어떠했든지 간에, 도시의 주민들은 도시의 권리를 확인하는 특허장을 가지려고 했다. 특허장은 영주나 영주의 대리인들이 도시의 권리를 망각하는 경우에 분쟁을 막는 데 도움이 됐다. 

도시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상인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고, 상인들의 길드나 한자는 온갖 특권을 획득했다. 흔히 상인 길드는 도시의 도매업을 독접했다. 만약 여러분이 상인 길드의 조합원이 아니라면 교역을 할 때 불리했을 것이다.

- 게임의 모든 단계에서 길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길드는 배타적인 독점을 통해 시장을 지배했다.

- 길드 상인들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누가 도시의 관리가 돼야 할지에 관해 발언권이 셌다. 어떤 곳에서는 관리들이 상인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상인 자신이 관리가 됐다. 그리고 몇몇 곳에서는 길드의 조합원만이 도시 정부의 관리가 될 수 있다고 법으로 명시했다.

- 상인과 도시가 획득한 권리는 상업이 부의 원천으로서 더욱 중요해졌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도시 상인의 지위는 화폐 재산이 토지 재산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더욱 중요했음을 보여 준다.

 

4. 낡은 것을 대체한 새로운 관념

- 돈을 빌려 쓰는 대가로 이자를 요구하는 것을 중대한 범죄로 여기던 때가 있었다. 중세 초기에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을 금지했다. 그렇게 한 권력은 교회였다.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교회라는 권력의 말은 곧 법이었다.

- 상업이 소규모였고 이윤을 위해 돈을 투자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봉건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돈을 빌리고자 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돈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돈을 빌리고자 했을 것이다..그런 상황에서는 도와 주는 사람이 그의 불행에서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세의 관념이었다.

- 성직자들은 돈은 아무 것도 낳지 못하며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자를 받는 것은 분명이 잘못된 일이었다. 이것이 교회가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말한 것과 교회가 행한 것은 달랐다. 주교와 왕은 이자를 받는 것에 격노해 그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그들은 그 법을 맨 먼저 어긴 사람들에 속했다. 그들 자신이 이자를 붙여 돈을 빌리고 빌려 주었다. 다른 고리대금업자들을 탄압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위험이 컸기 때문에 보통 고율의 이자를 요구한 소규모 대금업자였던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자로서 미움받고 박해받고 어디서나 경멸당했다. 반면, 이탈리아 은행가들은 어마어마한 사업을 벌인 대규모 대금업자들이었다. 그리고 흔히 대출금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지 않을 때, 채무자들을 정신적 형벌로 위협해 이자를 징수한 사람은 교황 자신이었다.

- 점차 고리대금에 관한 교리는 사라지고, "일상의 상업 관행"이 등장했다. 신념, 법, 공통의 생활 양식, 인간 관계, 이 모든 것이 사회가 새로운 발전 단계에 접어들면서 수정됐다.

 

 

5. 농민이 속박을 부수다.

시장이 성장했다. 그래서 농민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과 영주가 가져가는 부분을 제외한 곡물은 모두 팔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농민은 화폐를 얻을 수 있었다. 농민은 아직 화폐 사용에 완전히 익숙하지는 못했지만 점점 더 익숙해졌고, 그래의 사회 구조에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계급의 사람들, 즉 상인이 나타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상인은 번영하고 있었고, 근처에 있는 상인들의 도시는 자기와 같은 농노들도 가끔 돌아다니며 꽤 괜찮게 살기도 하는 굉장한 곳이었다. 이제 이처럼 변해 가는 세계에서 농노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진정한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 농노가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곡물을 지배한다면, 영주에 대한 부역의 일부를 면제받을 수 있는 야각ㄴ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만약 영주가 농노의 부담을 가볍게 해 주지 않으면, 그 때는 도시나 개척지로 달아날 수 잇었다.개척지에서는 자기와 같은 농노들이 숲을 개간하고 있었고, 성가신 부과금이 면제되는 땅뙈기를 그 댁가로 받고 있었다.

 

14세기 유럽에서는, 20세기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 도구를 사용해 4년여에 걸쳐 조직적인 살육이 자행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 수의 갑절이 넘는 사람이 흑사병을 절멸했다.

-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살아 남은 사람의 노동이 더 커다란 가치를 지니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의 대가로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받을 수 있었다. 토지는 여전히 재앙을 겪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러나 토지는 생산성이 잇을 때만 가치가 있었고,. 토지를 생산적으로 만드는 필수 요인은 노동이었다. 노동의 공급이 감소하면서 노동의 상대적 수요가 증가했다. 농민의 노동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큰 가치가 있었다.

- 14세기의 농민 반란은 달랐다. 노동의 부족 때문에 농업 노동자의 지위는 강력햊ㅆ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서유럽 전역에서 잇달아 일어난 반란에서 농민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획득하거나 유지할 수 없었던 양보를 폭력으로 얻어 내는 데 그 힘을 사용했다.

 

6. 외지인은 일할 수 없다.

- 전에는 상업적으로 판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내 수요를 위해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외부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서 물품을 생산했다. 자재와 작업 도구를 소유하고 완제품을 판매하는 직업적인 장인들이 물품을 만들었다. 이 장인들은 그들보다 먼저 단체를 결성한 상인들을 본따서 길드를 조직했다. 특정 도시에서 똑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수공업자 길드라고 불린 동업자 조합을 결성했다.

- 길드 조합원들이 자기들이 담당하는 공업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단결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길드 조합원들은 도시에서 자기 직업을 계속 독점하기 위해 싸웠다. 그리고 외부 사람이 그들의 시장에 침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 길드는 조합원의 작업의 질에 관심을 가졌다. 길드는 모든 조합원은 도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규칙을 강요함으로써 조합원이 자기 일을 잘 알도록 했다. 게다가 길드는 조합원의 작업을 엄격히 감독함으로써 손님이 질 낮은 제품을 구입하지 않도록 보증했다. 길드에서는 규칙과 규제가 있었고 이런 규정을 어기면 무거운 벌을 내렸다.

- 길드 제도의 근본 특징 두 가지는 장인들이 서로 평등했다는 것과 노동자들이 쉽게 장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길드 제도의 전성기였던 13~14세기에는 대체로 그랬다. 그 뒤 피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어떤 장인들은 번창해서 더 큰 세력을 얻었고, 작은 길드의 장인들은 큰 길드를 지배하는 장인들을 위해 임금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자체 상품을 거래하는 수공업자 길드가 도시 상업을 독접했던 초기의 상인 길드를 대체했다. 그러나 일부 길드 상인은 상업 일반에 손을 떼고 특정 품목 하나만 취급함으로써, 사라지기는 커녕 거대 상인 길드로 번창했다.

- 큰 길드의 조합원들은 자기 길드를 지배하다가 곧 시 정부까지 배타적으로 지배하게 됐다. 그들은 도시를 사실상 지배하게 됐다. 거의 모든 곳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은 대개 시의원과 동일시 됐다.

- 길드 제도가 붕괴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은 장인과 직인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원래 도제-직인-장인이 통례였다. 이제 그것은 도제 - 직인으로 변했다.

- 장인들과 직인들의 조합원들,, 여기에 속하지 못한 노동자들..가진 것이라곤 노동력뿐이었고 살기 위해서는 고용주와 유리한 시장조건에 의존해야 하는 근대 프롤레타리아가 등장한다.

- 봉건 영주에게서 도시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에서는 상인, 장인, 노동자 할 것 없이 부유하거나 가난한 도시민이 힘을 모았다. 그러나 승리의 열매는 상층 계급들에게 돌아갔다.하급 계층에게는 단지 주인만 교체됐다는 것을 깨달았다.14세기 후반에는 이런 강력한 지배자들에 대한 소규모 장인들의 원한과 질투가 결합되면서 계급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 길드는 점점 힘이 약해지고.. 후에 도시는 다시 외부의 지배 즉, 군주, 제후의 지배를 받게된다.

 

7. 국왕이 납시오!

- 중세말인 15세기 무렵이면 국민이 탄생한다. 국민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국민 문학이 생겨난다. 공업에 대한 국가 규제가 지역적 규제를 대신한다. 국법과 국어, 심지어 국교가 나타난다. .. 그들은 나라 전체의 군주인 국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 도로에서 강도와 통행세를 없애야 한다고 가장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상품이나 돈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혼란과 불안정은 장사에 해롭다. 중간 계급은 질서와 안정을 원했다.

- 봉건 영주들 간의 투쟁은 누가 이기든지 지역 주민들에게는 흔히 재앙이었다. 사업에 필요한 도로를 따라 여러 곳에 서로 다른 봉건 영주들이 버티고 있었던 것은 상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중앙의 권위로서 국민 국가가 필요했다. 봉건적 혼란을 탈피하고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최고 권력이 필요했다. 바야흐로 강력한 중앙 권력이 등장할 때가 무르익었다.

- 도시가 봉건 영주에 맞서 싸울 때 국왕은 도시의 강력한 동맹자였다. 봉건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모두 왕권을 강화시켰다. 도시주민들은 국왕이 도와 준 대가로 흔쾌이 돈을 빌려 줌으로써 국왕을 도왔다. 이것은 중요했다. 돈이 있으면 국왕은 봉신들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충성에 의존하지 않고 급료를 지급한 훈련된 군대를 고용할 수 있었다.

= 돈 있는 사람들은 즐겁게 돈을 내놓았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들은 국왕에게 이런 저런 대출을 해 준 것은 그 대가로 명백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 국왕은 필요한 화폐를 부르주아지에게서 얻었고, 커지고 있는 왕국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조언과 원조를 갈수록 부르지아지에게 의존했다. 국왕의 재판관, 장관, 공무원을 부르지아지 출신이었다.

- 교회는 엄청나게 부유했다. 교회ㅡㄴ 모든 토지의 1/3에서 1/2가량을 소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전에도 교회는 정부에 세금을 내려 하지 ㅇ낳았다. 국왕은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미 엄청나게 부유한데도 계속 부유해지기만 하는 교회가 세금을 많이 냄으로써 국가의 운영비를 보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517년 마루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95개 조'를 붙임.

- 교회는 쓸모가 줄어들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이미 권력을 잃었을 것이다. 사실 교회는 전에는 교회가 교육을 완전히 지배했지만, 이제는 상인들이 설립한 독립 학교가 개교했다. 전에는 교회법이 최고였지만, 이제는 상없회의 필요에 적합한 옛 로마법이 부활했다. 예전에는 교회만이 국사의 운영을 도울 수 있는 교육받은 사람을 배출했지만, 이제 상업 실무로 훈련 받았고, 나라의 상공업에 필요한 바를 아는 새로운 계급의 사람들에게 군주는 의지할 수 있었다.

- 교회는 그 자신이 봉건 영주로서 토지의 1.3을 소유했으며 교회재산의 대부분을 나라 밖으로 유출했다. 신흥 중간계급은 각 나라에서 봉건제를 쓸어버리기 전에 그 핵심 조직, 즉 교회를 공격해야만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투쟁은 죵교의 가면을 썼다. 종교개혁이라고

 

 

 

8. 부자는...

- 주화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주화 속에 들어 있는 금이나 은의 양을 줄이는 것을 뜻한다. 한 개의 주화에 들어 있던 은을 쓸모 없거나 질 낮은 금속을 섞어서 두 개의 주화에 들어가도록 나누면 국왕은 한 개의 주화 대신 두 개의 주화를 가질 수 있었다. 주화의 가치가 더 작다는 것은 같은 주화로 전보다 더 적은 물건을 사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물가가 오르는 것이다.

- 국왕들은 주화의 가치가 떨어지면 자신들이 직접 이익을 얻는 다는 것만 보았다. 화폐의 가치가 급격하게 변하면 상업이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물가가 오르면 가난한 사람들과 고정적인 수입을 가진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 
- 상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금과 은이 매우 필요했던 이 시기에, 상업의 발전 자체가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발견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 발견은 거꾸로 상업을 더 한층 발전시켰다. 400년 이상 지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콜럼버스 발견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5세기 사람들에게 콜럼버스는 인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멕시코와 페루의 광산에서 스페인으로 은이 흘러들어가던 16세기에 와서야 콜럼버스 '발견'의 진가가 인정됐다'

- 동방으로 가는 옛 통로를 터키인들이 점령했다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엄청난 가격을 매기는 것도 이제 주요하지 않았다. 희망봉을 거쳐 동방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했기 때문에 터키의 호의에 기댈 필요가 없어진 상인들은 베네치아의 독점을 깨뜨렸다.

- 이제 상업의 흐름은 변화했다. 전에는 베네치아와 남부 독일의 도시가 지리적 위치 때문에 그보다 서쪽에 있는 여러 나라보다 유리했지만, 이제는 대서양 연안의 나라들이 유리했다. 베네치아와 상업으로 연결돼 있던 도시들은 이제 상업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갔다. 대서양이 새로운 대로가 됐으며,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상업이 두드러졌다.

-16세기와 17세기에 설립된 회사들 중 몇몇 회사의 이름은 그 회사들이 무역이나 식민지 사업 또는 이 두가지를 동시에 수행했던 곳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일곱 개의 '동인도'회사가 있었고,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회사였다. 네 개의 '서인도'회사가 있었고, 그것들은 네덜란드, 프ㅏ랑스, 스웨덴, 덴마크에서 설립했다. '동부지중해'회사와 '아프리카'회사도 인기가 있었다.

 

 

9. 가난한 사람, 거지, 도둑

-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상인들이 상업으로 거대한 재산을 쌓는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그들의 국고에 화폐를 늘릴 수 있는 더 간단한 방법을 발견했다. 스페인 탐험가들은 무역 이익을 가져다 줄 인도 항로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우연히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다. 멕시코와 페루에는 매우 귀중한 금, 은 광산이 있었다. 그것은 약탈하면 그만이었다.

- 이렇게 많은 은이 유럽에 흘러 들어오자 엄청난 물가 상승이 생겼다. 

- 당시 농민은 지주 계급이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지대 때문에 물가가 비싸다고 비난한 반면, 기사는 터무니없는 농산물 가격 때문에 지대가 비싸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물가 상승의 결과 이익을 얻은 사람은 상인들이었다. 그들의 지출은 늘어났지만 사업에서 얻는 수익은 더 크게 증가했다. 이익을 얻은 또 다른 집단은 생산비는 고정돼 있지만 생산물 가격이 상승한 사람들이었다. 즉 과거에 정한 지대로 토지를 오랫동안 빌리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버터, 밀, 보리따위를 크게 오른 가격에 팔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 이와 반대로, 임금 노동자는 고통을 받았다. 물가 사승의 시대는 거의 언제나 임금 상승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임금은 물가처럼 상승하지 않았다. 즉 노동자에게 실질적으로 압박으로 다가왔다.

- 수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다른 종류의 엔클로저(울타리 치기)가 있었다. 그것은 양을 치기 위한 엔클로저였다. 양털 값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영주들은 농경지였던 자신들의 토지를 양 치는 목장으로 바꿈으로써 더 큰 화폐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다. 이 때문에 그 토지에서 살아온 농민들은 직업과 생계를 잃었다.

- 가혹한 지대 징수가 있었다.

이 시대에 일어난 한 가지 중요한 변화에 주목하라. 토지는 토지에 투여한 노동량 때문에 중요해진다는 낡은 개념은 사라졌다. 상공업의 발달과 가격 혁명은 화폐를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제는 토지가 소득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일반 재산을 다루듯이 토지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됐다. 토지는 돈을 노리고 매매하는 투기꾼들의 투기 대상이 됐다.

 

 

10. 일손 구함 - 두 살짜리도 괜찮음

- 어떤 물품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고용한다면 작업을 나누어 시킬 수 있다. 각각의 노동자가 한 가지 특수한 작업만 되풀이해 그 작업에 숙달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따라서 생산에 속도가 붙는다. 팽창하는 시장에 필요한 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나야 했다. 진취적인 중간상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 뉴버리의 잭은 중요한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수공 기술자에게 원자재를 주고 그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일하게 한 대다수의 다른 중간상인들과 달리, 그는 200개나 되는 방직기를 설치한 자기 소유의 건물에서 약 600명의 성인 남녀와 어린이에게 일을 시켰기 때문이다. 이때는 16세기 초였다. 그것은 300년 후 공장 제도의 예고편이었다.

-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중세의 독립 수공업자들은 차츰 사라져가고, 그 대신 자본가이자 상인이자 중간상인인 기업가에 갈수록 종속된 임금 노동자가 나타났다.

당시 조사ㅓ대상 129가구 가운데 96가구에서 16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일하고 있었다. 심지어 2살짜리도 있었다.

 

 

11. 황금, 위대함, 영광

- 한 나라에 금, 은이 많을 수록 그 나라는 더욱 부유해진다는 이론을 각국 정부가 믿는다면 그 다음에 취할 조치는 분명하다. 국민들이 금과 은을 해외로 반출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제정하라. 각국 정보는 잇달아 그러한 조치를 취했고, 이제 "금, 은 수출 금지법"은 흔한 것이 됐다.

- 무역수지 흑자에 관한 개념 

- 무역수지 흑자를 위해서는 값비싼 상품을 수출하고 필요한 것만 수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액을 금, 은으로 받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업을 장려하는 것을 뜻한다. 공산품은 농산품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외국 시장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 자국의 공업을 발전시킬 방법을 생각해낸다. 각국 정부는 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조금과 높은 관세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직종이나 새로운 방법을 소개할 수 있는 외국의 숙련 노동자들이 국내에 정착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 어떤 나라에서는 발명가에게 독점권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새롭고 더 좋은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국내 산업 육성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기도 했다.

- 식민지가 종주국의 공업과 경쟁할 수 있는 어떠한 공업에도 진출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식민지에서는 모자, 모직물, 철제품을 제조하는 것이 금지했다. 이런 것들을 만드는 원자재는 모두 아메리카에도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는 이런 원자재를 영국으로 보내고 영국에서 만든 제품을 다시 사야 했다.

- 영국은 아메리카뿐 아니라 모든 식민지에 이런 태도를 취했다. 예컨대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아일랜드인들이 자국의 양털로 모직ㅇ물을 만들자 아일랜드의 모직물 공업을 억누르는 법률이 통과됐다. 그렇다면 아일랜드인들이 원자재인 양털을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었는가? 아니다. 아일랜드의 양털은 반드시 영국에만 팔아야 했고, 영국은 양모를 쓸 수 있는 만큼 다 쓰고 나머지는 다시 수출했다. 이처럼 가격조정은 아일랜드에서는 불가능했다.

- 국가의 이익과 상인계급의 이익을 동일시한 것도 당연했다. 따라서 무역과, 무역과 관계있는 모든 것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것이 국가의 주업무가 됐다.

 

 

12. 우리를 내버려 둬라!

- 1776년은 반란의 해였다. 그것은 기억할 만한 해였다. 미국인에게는 독립 선언, 즉 영국의 중상주의적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란의 해였다.

- 모든 나라의 경제 학자들에게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해였는데, 그 책은 중상주의의 3R정책, 즉 , 제한, 규제, 금지(restriction, regulation, restraint)에 대한 반란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자유방임은 구르네이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의 구호가 됐다. 그들은 경제학자들 가운데 최초의 '학파'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학파의 회원들은 제한의 철폐, 자유 무역, 자유방임을 요구하느 책과 논설을 썼다.

- 고도 기술, 시간 절약, 일반적인 효율과 그 밖의 다른 이유로 분업이 노동 생산성을 향상시켰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우리가 동의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그것이 자유 무역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분업이 시장의 크기에 따라 경정되기 때문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분업을 생겨나게 한 것이 교환의 힘이므로, 분업의 범위는 항상 그 힘의 크기, 즉 시장의 크기가 결정한다. 시장이 매우 작을 때는, 자신의 노동 생산물 가운데 자기 소비를 넘어서는 모든 잉여 부분을 교환하게 하는 추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만약 생산성 증대가 분업을 통해 일어나고, 분업은 시장의 크기에 의해 제한 된다면, 시장이 커질수록 분업은 고도화되고 생산성 증가도 두드러질 것이다. 즉, 나라의 부가 증대할 것이다. 따라서 자유 무역이 이루어진다면 시장 가능한 확대될 것이고, 분업도 가능한 한 고도화 할 것이며, 생산성도 최대한 증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무역은 바람직하다.

- 그러므로 특혜를 주는 것이든 금지하는 것이든 모든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면, 알기 쉽고 단순하며 자연스런 자유의 제도가 저절로 확립된다. 모든 사람은 정의의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 한은 자기 방식으로 자기의 이익을 완전히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고, 자기 공업과 자본으로 다른 사람이나 법인과 경쟁할 수 있다.

 

 

13. 옛 질서는 변했다.

- 성직자와 귀족은 특권 계급이었다. 그들은 각기 1신분과 제2신분이라고 불렸다. 성직자의 수는 약13만명, 귀족은 약 14만명이었다. 비록 그들이 특권 계급이었지만, 모두 부유했거나 모두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민중은 비특권 계급들이었다. 그들을 제3신분이라고 불렀다. 2500만명의 프랑스 국민 가운데 그들은 95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특권 계급 사람들 사이에 부와 생활 양식의 차이가 있었듯이, 비특권 계급들 사이에도 그런 차이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약 25만 명의 상층 중간 계급인 부르주아지는 제3신분의 나머지 사람들보다 부유했다. 여러 도시에 사는 장인들이 또 하나의 집단이었다. 그들의 수는 약 250만명이엇따. 그 나머지는 모두 땅에서 일하는 농ㄴ민이었다. 약 2200만명 이었다. 그들은 국가에는 세금을, 성직자에게는 십일조를, 귀족에게는 봉건 부담금을 납부했다.

- 농민은 수입 가운데 정확히 얼마만큼 세금으로 납부했을까? 그 대답을 들으면 여러분은 놀랄 것이다. 미루어 계산하면 자그마치 수입의 80% 를 각종 징세관에게 납부했던 듯 하다. 나머지 20%로 자기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했다. 농민이 불평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흉작 때 농민이 굶어 죽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시절 수많은 농민이 먹을 것을 찾아 거지가 돼 길거리를 떠돌아다닌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 부르주아지는 누구였을까?

그들은 저술가, 의사, 교사, 변호사, 판사, 공무원, 즉 교육받은 계급이었다. 또한 그들은 상인, 제조업자, 은행가, 즉 이미 돈을 가지고 있고 더 많은 돈을 갈망한느 계급이었다.다른 무엇보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실제로는 더이상 봉건적이지 않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봉건적 법률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꽉 끼는 봉건적 복식을 벗어버리고 헐렁헐렁한 자본주의 이투로 바꿔 입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경제의 영역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중농주의자들과 애덤 스미스의 저작에 표현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사회 여역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볼테르,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의 저작에 표현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공업에서 자유방임은 종교와 과학에서 "이성의 지배"와 짝을 이루었다.

- 부르주아지는 토지를 거의 소유하지 않았지만,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구가에 돈을 빌려 주었고 그 돈을 돌려받고 싶었다. 그들은 정부가 공적 자금을 우둔하고 소모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반드시 파산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만큼 정부 업무에 대해 잘 알 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축을 염려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경제력에 걸맞는 정치권력을 원했다. 그들이 재산을 가졌다. 그들은 특권을 원했다. 그들은 정부에 빌려 준 돈을 확실히 상환 받고 싶었다. 이런 사항들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정부참여권을 스스로 쟁취해야 했다.

- 봉건사회는 기도하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서 중간 계급 집단이 생겨났다. 중간 계급의 힘은 여러 해에 걸쳐서 점점 더 증대했다. 그들은 봉건제에 맞서 길고도 고된 투쟁을 전개했고, 특히 세 차례 결정적인 전투를 치렀다. 첫째는 종교개혁, 둘째는 영국 혁명, 셋째는 프랑승 혁명이었다. 18세기 말 그들은 마침내 낡은 봉건 질서를 파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해졌다. 부르주아지는 봉건제 대신, 이윤 창출의 제1의 목적으로 하는 상품의 자유 교환에 기초한 전혀 다른 사회 체제가 등장했음을 알렸다.

우리는 그 체제를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14. 돈은 어떻게 생겨났나?

- 이윤을 낳는 혹은 기대되는 사업이나 거래에 돈을 쓸 때 그 돈은 자본이 된다. 사용을 목적으로 사기위해 파는 것과 이윤을 목적으로 팔기 위해 사는 것은 차이가 있다.

- 진정한 자본주의 생산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본 유입이 새로 필요했다. 그러한 필요를 충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자본이 축적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칼맑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의 발견, 원주민 말살과 노예화와 광산에 매장, 동인도에 대한 정복과 약탈의 시작, 아프리카를 상업적인 흑인 사냥터로 만든 것은 자본주의 생산 시대의 장밋빛 여명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런 목가적인 소행들이 시초 축적의 주된 동력이 되었다."

- 이러한 상업, 즉 정복,해적질, 약탈, 수탈은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것들은 막대한 이윤, 엄청난 액수의 화폐를 가져다 줌으로써 자본의 공급을 늘렸다.

- 노동자는 토지나 도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에만, 즉 그러한 생산수단과 분리될 때에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 노동자는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를 구입할 돈을 벌기 위해 그렇게 한다. 생산수단을 빼앗겼기 때문에 노동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노동자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인 일할 수 잇는 능력, 즉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 자본주의 체제로 향한 길을 개척하는 과정은 다름 아닌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사회적 생존 수단과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 변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생산자를 임금 노동자로 변형하는 과저잉다. 직접 생산자, 즉 노동자가 더 이상 토지에 속하지 않게 되고, 더 이상 타인의 노예나 농노나 채무 예속민이 아니게 되면 그가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몸 뿐이다.

- 18세기와 19세기 초반에 다시 엔클로저가 잇어났다. 이 때의 엔클로저는 규모가 컸기 때문에 임금을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토지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토지를 가진 노동자는 이제 토지 없는 노동자가 돼 임금 노동자로서 공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

- 이 토지가 소수 대농들의 손에 들어가면, 소농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바뀌는 결과가 생겨날 것임이 틀림 없다. 도시와 메뉴팩처링는 성장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와 메뉴팩쳐로 내몰 것이기 때문이다. 

- 상인, 제조업자, 은행가가 지배하는 세계는 성직자와 전사가 지배하던 세계와는 다른 종교적 가르침이 필요했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노동의 목적인 사회에서 교회는 폭리를 취하는 자들을 비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윤을 얻는 것이 노동의 일차적인 목적이 된 사회에서 교회는 곡조를 바꿔야 했다.

- 청교도의 경우는

"만약 하느님이 어떤 방법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이방법을 거부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이 요구하 실 때 하느님을 위해 그 은총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 감리교는.

"사람들이 근면하고 검소해지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을 얻고 저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축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상 부자가 된느 것이다.

- 칼뱅파(장로교)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부지런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 초기의 상업에서 시작된 자본 축적과 무산 노동 계급의 존재가 결합함으로써 공업 자본주의가 시작됐다. 공장 제도 자체가 더 많은 부의 축적에 이바지 했다. 저축하고 저축을 재투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고 믿으면서 자란 이 새로운 부의 소유자들은 자본을 공장에 재투자했다. 근대 체제는 그런 식으로 탄생했다.

 

 

15. 공업, 농업, 수송의 혁명

- 1776년 3월 11일자 <버밍엄 가젯>은 와트씨가 새로운 원리에 따라 제작된 증기기관을 가동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1800년에는 30개 탄갱, 22개 동광, 28개 제철소, 17개 양조장, 84개 면방적 공장에서 증기관을 사용했을 정도로 영국인들에게 와트씨의 "발명품의 중요성과 유용성"은 너무나 분명했다.

- 순무 작물이 도입되면서 그동안 휴경지로 묵혀두던 땅에 사용 

- 농업 기술과 과학과 도구의 이 모든 주목할 만한 개선을 대규모로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엔클로저 운동 덕분이었다. 그것은 구래의 개방 경지 제도, 즉 모든 사람을 위한 공유지 제도에서는 불가능했다.

- 18세기에는 도로 건설 기술이 개선되고, 운하 건설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초에는 머캐덤 도로(밤자갈을 펴고 다져 만든 길)가 출현했고 철도와 증기선도 등장했다.

 

 

16. 그대들이 뿌린 씨를 다른 사람이 거둔다네

-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일손'과 기계를 구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점에서는 구별했다. 기계는 경비 지출을 뜻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인간의 안녕보다 기계의 안녕에 더 관심을 가졌다.

자본가들은 최소한의 임금만 지급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되도록 많은 노동력을 사려고 했다. 여성과 어린이가 고용됐고 흔히 남자는 집에서 놀았다. 처음에 공장주들은 빈민구제위원회에서 구호 대상 아동들을 노동자로 데려다 썼다. 그러나 나중에는 노동자인 부모의 벌이가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생활하는 어린이들도 공장과 광산에 들어가야 했다.

- 산업은 탄광 지역 근처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전혀 중요하지 않은 고장이 하룻밤 사이에 소도시가 됐고, 좀더 오래된 소도시들은 대도시가 됐다. 1770년에 영국의 농촌 인구는 총인구의 40퍼센트였다. 1841년에 농촌인구는 26퍼센트로 줄었다.

- 오늘날 미국과 영국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것이 언제나 존재했던 것처럼 믿기 쉽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에서나 유럽 나라들에서나 보통 선거권은 순조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투쟁의 결과였다. 영국 노동자 계급은 차티스트 운동에 참여했다.

- 노동조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래의 직인 조합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노동자 조직의 가장 초기 형태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산업에서 자본의 중요성이 엄청나게 커지자 노동자들의 단체는 길드 형태에서 노동조합으로, 즉 스스로의 힘에 의존해 더 나은 조건을 얻고 노동자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한 업종에서 조직되는 노동자 조직체인 오늘날의 노동조합으로 발전했다.

- 영국에서 처음 일어난 산업혁명은 다른 나라로 확산됐다. 그것은 지금도 일부 나라들로 확산되는 중이다. 그리고 조건이나 부자들의 태도, 또는 통치 집단이 제정한 개혁 법안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영국식 모델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나 노동조합에 맞서는 전쟁이 벌어졌다.

 

17. 누구의 '자연 법칙'인가?

- 이미 여러분은 고전학파의 창시자라고 부를 수 있는 애덤 스미스의 몇 가지 교의를 알고 있다. 그 밖에 리카도, 맬서스, 제임스 밀, 매컬록, 시니어, 존 스튜어트 밀이 저명한 고정 경제학자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애덤 스미스와 같은 의견을 가졌던 것도, 그들끼리 서로 같은 의견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몇 가지 근본적인 일반 원리에 관해서는 모두 일치했다.

- 예컨대, 성가신 양심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룰지도 모르는 욕심 많은 돈벌레의 주문에 부합하는 완벽한 처방전이 여기 있다. "개인은 누구나 자기가 지배하는 자본을 가장 유리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 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진정 자기 자신의 이익이지 사회의 이익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익에 관해 연구하면 자연히, 더 정확히 말해 필연적으로, 사회에 가장 유리한 방법을 택하게 된다.

- 맬서스에 따르면 노동자 계급이 가난한 이유는 이윤이 너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인구가 식ㄹ퍙보다 더 빨리 증가하기 때문이다. 재난과 질병 말고도 인간 증가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자제라고 했다. 즉 빨리 결혼해서 애를 많이 낳지 말라는 것이었다.

- 애덤 스미스 이후 가장 중요한 고전 경제학자는 데이빗 리카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1817년에 출판한 책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가 경제학을 과학으로 다룬 최초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 리카도는 노동자가 단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만큼의 임금만 받는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동의 자연 가격은 ...... 노동자와 노동자의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식료품과 필수품과 편의의 가격에 달려 있다. 반면, 식료품과 필수품의 가격이 오르면 노동의 자연 가격도 오른다. 그것들의 가격이 내리면 노동의 자연 가격도 내린다.

애덤 스미스와 그 추종자들의 자유 무역 교의에 맞서 보호무역을 강력히 옹호한 리스트는 고전학파의 무오류성을 믿지 않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런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19세기 초반에 그토록 인기 있었고, 그토록 강력했던 고전 경제학은 19세기 후반에는 조금씩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 무렵, 고전 학파가 설명한 원리를 일부 받아들들였으며넛도, 전혀 다른 길을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낸 사람이 등장해 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칼 맑스 였다.

 

 

18.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칼 맑스도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처지를 개선하고 싶어했다. 그도 계획되는 사회를 원했다. 그도 모든 사람이 생산수단을 공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맑스는 어떠한 이상향도 계획하지 않았다. 실제로 맑스는 미래 사회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맑스는 과거 사회에 굉장한 관심이 있었다. 현재 사회가 도래하기 전의 과거 사회는 어떻게 생겨났고 발전했고 쇠퇴했는가? 맑스는 현재 사회에도 굉장한 관심이 있었다. 맑스는 미래 사회를 위한 변화를 일으키는 힘을 현재 사회 속에서 찾아 내려 했다. 그러나 맑스는 미래 경제 체제를 연구하는 데는 시간을 거의 소비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는 현재의 경제 체제를 연구하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쳤다. 그는 무엇이 당시 자신이 살고있던 자본주의 사회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게 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저작은 <자본-자본주의 생산에 관한 비판적 분석>이었다.

- 맑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에서 노동자가 착취당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노동자가 착취당한다고 말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는 숨겨져 있고 은폐돼 있다고 맑스는 말했다. 그는 잉여가치설로 착취를 들춰 냄으로써 착취를 은폐하고 있는 장막을 찢어 버렸다.

- 모든 상품은 노동 생산물이다. 따라서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양이 가치, 즉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노동량은 노동이 지속되는 정도인 노동시간으로 측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물건의 가치 크기를 경정하는 것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 또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과 그 밖의 다른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의 비율에 따라 한 상품의 가치와 그 다른 상품의 가치의 비율이 정해진다.

-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동자는 자유인이다. 임금 노동자는 노예제에서 처럼 주인에게 속해 있지도 않고 농노제에서처럼 토지에 얽매여있지도 않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고용하는 사람에게 고용됨으로써만 먹고 살 수 있다. 물론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자본가에 파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상품인 일할 능력, 즉 노동력을 판매한다.

- 맑스의 잉여가치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어떻게 착취되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해결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팔기위한 재화의 생산, 즉 상품 생산과 관계가 있다.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된다. 노동자는 생산수단(토지,도구, 공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노동자는 살기 위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상품, 즉 노동을 팔아야 한다. 노동자가 지니고 있는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액이다. 노동력의 경우에 그 가치는 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재화의 총액이다. 따라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오직 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재화의 총액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 총액을 하루 중 일부 노동 시간만을 생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는 일부 시간 동안만 자신을 위해 일한다. 노동자가 임금으로 받는 것과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 사이의 차이가 잉여가치다.

잉여가치는 사용자, 즉 생산수단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잉여가치는 이윤, 이자, 지대 즉 유산 계급의 수입 원천이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 착취의 척도다.

- 맑스와 엥겔스에게 특히 거슬린 것은 "부르주아의 동정과 지갑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는 지배 계급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1879년 11월에 베벨과 립크네히트 등 독일의 다른 급진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점을 분명히 밝혔다. "거의 40년간 우리는 계급 투쟁이 역사의 직접적인 추진력이라고 강조했으며, 특히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재이 근대 사회 혁명의 위대한 지렛대임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운동에서 이러한 계급 투쟁을 제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협력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터내셔널이 결성됐을 때 우리는 전투 구호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정식화했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계급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들은 너무 무지해서 자신들을 해방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인도적인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가 위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협력할 수 없습니다.

- 일찍이 1848년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고, 그것의 파멸을 부르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 자체 내의 특징을 지적했다.

부는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된다.

소수의 대생산자가 다수의 소생산자를 눌러 부순다.

기계 사용이 확대하면서 더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산업 예비군"이 창조된다. 

대중의 빈곤이 심화한다.

갈수록 파괴적인 시스템 고장 - 공황이 주기적으로 되풀이해 일어난다.

- 무엇을 위해 스스로 훈련할까?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 물론 그렇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투쟁을 위해서도 훈련한다. 사유 재산을 폐지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을 완전히 해방하는 투쟁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해악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의 핵심적인 강력적 목표는 착취의 토대인 사유재산의 폐지였다.

 

 

19. 할 수만 있다면 행성도 합병할 텐데...

- 영국의 제조업자들은 산업혁명을 제일 먼저 시작한 데서 득을 봤다.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의 고민은 제조한 상품을 어디에 판매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알려진 모든 세계에서 들어오는 주문을 충족할 만큼 빨리 생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이 주창한 자유 무역 정책을 미국은 결코 '채택하지'않았는데, 알다시피 미국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보호무역이 실시됐다. 미국의 관세 장벽은 남북전쟁 후에 더욱 높아졌다. 러시아에서는 1877년에 일반적인 보호 관세가 시행됐다. 이제 영국 제조업자들은 더 이상 마음껏 활약할 수 없었다. 그들은 관세 장벽을 뛰어넘느라고 애를 먹었다. 이제 영국의 최대 고객들은 더는 영국 상품을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상품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었다. 관세 장벽 뒤에서 '유아기'의 산업은 급속하게 '거대'산업으로 변하고 있었다.

- 1870년 이후 시기는 미국에서는 '트러스트'의 시대였고 독일에서는 '카르텔'의 시대였다. 경쟁은 독점으로 대체됐다. 거물들은 조무래기들을 사업에서 몰아냈다. 대기업은 소기업을 찌그러뜨리거나 합병함으로써 거대해졌다. 어디서나 성장, 합병, 집중이 있었다. 거대 산업이 형성되고 있었고, 독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트러스트의 첫 "아메리칸 뷰티"는 석유에서 피어났다. 1904년에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내 정제 등유의 86퍼센트 이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석유 부문에서 일어났던 일은 강철, 설탕, 위스키, 석탄 등의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경쟁의 혼돈을 독점의 질서로 바꾸려 했던 곳 어디에서나 트러스트가 형성됐다.

- 트러스트는 "가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수정"할 수 있었다. 다른 대규모 조직도 그랬다. 트러스트는 미국적인 것이었다. 기업 연합, 기업 합동, 제휴, 카르텔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했던 다른 형태의 독점체였다. 카르텔은 독일에서 가장 흔했다. "카르텔이라는 용어는 같은 사업 분야의  기업가 들 사에 맺은 협약을 바탕을 둔 제휴를 말하는데, 기업가들이 법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시장에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서로 연합하는 것이다.

- 자본주의 생산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힘, 즉 신용 제도가 무대에 등장한다. 이것 자체가 경쟁이란느 전투에서 새롭고 강력한 무기일 뿐 아니라, 많든 적든 사회의 표면에 흩어져 있는 가처분 화폐를 끌여들여 개별적이거나 연합한 자본가들의 손안에 쥐어 주는 보이지 않는 실이다. 신용은 자본의 집중을 돕는 특수한 도구다.

- 산업은 주로 신용 대출로 운영됐고, 그래서 신용 제도를 지배한 금융업자들은 권좌에 앉아 있었다. 대기업가든 소기업가든, 독점 자본가든, 기업가는 자기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화폐가 필요하면 공손하게 은행가를 찾아야 했다.

화폐는 어디에서나 필요했고 국가의 화폐는 은행가의 그고 안에 있었다.

- 1911년 뉴저지 주지 우드로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에서 거대한 독점은 금융 독점이다. 그것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오랜 다양성과 자유와 개인의 발전하는 에너지는 생존할 수 없다. 산업 대국을 지배하는 것은 그 나라의 신용 제도다. 우리의 신용제도는 집중돼 있다. 따라서 국민의 성장과 우리의 모든 활동은 소수의 사람들이 좌우하고 있따.

- 이 소수의 사람들, 즉 금융가들은 흔히 산업 독점체의 우두머리들이기도 했다. '임원 겸직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금융계의 중요 인물들이 'ㅣ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즉 그들의 은행이 거액을 투자해 큰 트러스트나 거대 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 우리 금융 과두제에서 지배적인 인물은 투자은행가다. 연합은행, 신탁회사, 생명보험회사는 투자은행가의 도구다. 투자은행가가 지배하는 철도 회사, 공기업, 산업 기업은 그 부하들이다. 이 은행가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중개인일 뿐인데도 주인처럼 산업계를 주무른다. 그래서 그들의 참여나 승인이 없다면 실제로 어떠한 큰 사업도 성공적으로 착수할 수 없다. 물론 이 은행가들은 유능하고 재산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사업을 지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초인적인 력이나 거대한 재산이다. 아니다. 그들이 가진 힘의 열쇠는 결합, 즉 철저하고 폭넓은 집중이다.

- 과잉 상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던 산업가들에게 스텐리는 해결책을 암시하고 있었다. 식민지가 해답이었다. 

다른 산업국가의 산업가들도 같은 시기에 같은 문제에 대해 같은 답을 발견했다.  1870년 이후 영국,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은 과잉 상품을 위한 시장, 즉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차례는 1898년에 왔다. 식민지는 과잉 상품을 위한 시장에 돼 준다는 점 말고도 또 다른 쓸모가 있었다. 대량 생산에는 막대한 원자재가 필요했다. 어디서나 독점 자본가들은 고무, 석유, 기름, 질산염, 설탕, 면화, 광물 등의 원자재가 필요했다. 산업가들은 필수적인 원자재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필수적인 원자재 산지를 소유하거나 지배하고 싶었다.

- 원자재 산지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제국주의를 성립시킨 둘째 요인이다. 제국주의를 초래한 셋째 요인이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적당한 시장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또 하나의 잉여였다. 그것은 과잉자본이었다.

- 직접 투자로 얻는 이윤 외에도, 차관의 대부분을 종주국에서 소비하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영국은 아르헨티나에 철도 건설 차관을 제공했을 때, 대부분의 철도 레일이나 차량 등을 영국에서 구입하게 함으로써 제조업자들에게 이익을 안겨 주었다. 이처럼 과잉 자본의 수출은 결국 과잉 상품의 수출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투자가와 제조업자는 모두 식민지를 지배하거나 조종하는 정책에 협력하는 것이 공동의 이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근대를 금융자본의 시대라고 할 정도다. 막대한 자본을 지배하는 금융과 이윤을 얻기 위해 그 자본을 활용하는 산업이 결합해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한다.

- 거의 모든 경우에 무역업자나 자본가 회사들은 대리인을 보내거나 탐험가들과 협동하면서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 영토를 분할하고 합병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를 취했다. 탐험가나 대리인이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내륙에 침투해 추장이나 왕에게 천이나 알코올을 선물하면서 소위 합작 회사의 조약에 서명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 통상적인 절차였다. 서명을 마친 아프리카의 통치자들은 그 조약에 따라 몇 야드의 천이나 몇 병의 술을 받고 모든 영토를 주식회사에 양도했다. 유럽 국가들의 중앙 아프리카 속령은 거의 모두 그러한 권리 증서에 의거하고 잇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포르투갈, 이탈리아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은 20년이 채 못 돼 중앙 아프리카 전체를 분할하고 합병햇다.

 

20. 가장 약한 고리

- 경제학자들은 무엇이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게 만드는지에 의견을 일치하지만, 무엇이 그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지에 관해서는 결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 약 90년 전에 토머스 칼라일은 자본주의 체제가 직면한 공황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묘사했다. "방적 셔츠는 어떤 쓸모가 있는가? 한편에는 팔리지 않는 셔츠가 수백만 벌 씩이나 걸려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그것을 살 능력이 전혀 없는 근면하고 헐벗은 사람이 수백만이나 있다. 셔츠는 사람의 몸을 감쌀 때 쓸모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쓸모가 없고 참을 수 없는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21. 그들은 단물을 포기할 것인가?

- 정부가 국민 경제를 계획하면 소수의 손에 결정권을 집중함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추구한다. 수많으 개인의 판단과 결정이 기업을 이끌면서 국민 전체의 기술, 정보, 지식을 활용할 때 경제와사회는 최고로 발전한다. 소수 집단은 결코 모든 국민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계획하고 지도하고 촉진하는 데 필요한 지혜, 선견지명, 통찰력을 지닐 수 없다.

- 이탈리아와 독일이 특히 그랬다. 이런 나라의 자본가들은 자기네 권력을 위협하는 혁명적인 노동자 계급의 저항에 직면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과 히틀러의 갈색 셔츠단이 장차 자신들을 지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 보답으로 돈과 원조를 제공했다. 그 지원이란 조직 노동자 계급 운동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나라의 지도자들은 약속을 이행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은 이렇듯 반혁명적인 운동이었다. 기존 질서 - 자본가의 권력과 특권-는 안전했다.

 

 

 

 

 

 

 

반응형


삼십대의 마지막에 생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서 '경제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보자.' 라는 다짐이었죠. 

'어떻게 경제공부를 해야할까요?' 여기저기 질문들을 해왔습니다. 누군가는 팟캐스트를 추천해주고, 누군가는 유튜브 다큐멘터리를 알려주고, 금리에 대한 책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신과 함께>라는 팟캐스트를 하루 하루 듣는게 어쩌면 제 경제공부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3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경제공부를 한다고 조금씩 투자를 했었던 것들은 비자발적 장기투자가 되기도 했고, 적은 금액이기는 하지만 '동학개미운동'의 일원으로 참여를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처음 경제공부를 할 때 부터 생각은 있었습니다. 1년 정도는 무엇보다도 공부를 해보자.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경제 분야의 필독서들을 한 권 한 권 독파해나가고 정리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경제상황에 단순히 돈을 벌고 싶다는 치기로 무작정 달려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선 태도에서 부터 앞으로의 나의 방향성을 정하는 일부터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만난 책 중 하나가 투자자이자 사업가인 천영록의 <부의 확장> 이라는 책입니다.


책을 접하게 된 계기는 팟캐스트 <신과 함께>에서 게스트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인상적인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연결고리 속에서 <부의 확장>을 접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부를 늘릴 수 있는가' 라는 방법적인 측면의 내용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막상 책의 표지를 넘겨보니 전혀 다른 내용들이 펼쳐집니다. 경제를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자기개발서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으나, 유난히 나의 가슴을 두근 거리게 하는 문장들이 눈에 많이 들었습니다.


(p39) 부자와 보통 사람이 가장 다른 점은, 내일의 나와 오늘의 자신을 연결해서 사고할 줄 안다는 것에 있다.


(p45) 부의 연결을 준비하는 최소한의 시작은 자기 미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하는 것은 돈 만이 아니다. 무엇이든 좋다.


(p206) 성공의 원천이 압도적인 노력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실상은 끝없는 전술을 펼쳤고, 끝없이 전략을 고민했으며, 남보다 큰 통찰을 얻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새벽까지 책을 읽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다방면의 노력이 있을 때에만 몸의 고생이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통찰과 전략, 전술의 결과는 오직 실행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앞서 말한 세 가지가 갖춰졌다는 가정하에 실행은 중요하다.


(p220) 1초만 결심하라. 유혹이 당신에게 손을 뻗을 때마다 1초만 다르게 생각하라. 그 순간부터 당신의 운명이 달라진다. 당신이 만든 1초가 모여 3년 후의 당신을 바꾸고, 10년 후의 미래를 바꾸고, 20년 후에 당신이 서 있는 위치를 바꾼다. 당신 인생에 나비효과를 믿어라.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날씨 변화를 일으키듯, 1초의 결심이 당신의 인생을 뒤바꿈을 명심하라.

1초의 결심으로 기회를 잡고, 1초의 결심으로 협상을 하고, 1초의 결심으로 기꺼이 리스크를 감내해보겠다고 생각하라. 그리하여 당신이 가진 무형자산을 세상과 연결시키겠다고, 그것을 통해 부의 연결고리를 당신의 손으로 움켜쥐겠다고 결심하라.


(p264) 기억하지 못하고 흘러간 과거는 유물이 되지만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는 과거의 보물이 될 수 있다. 오늘 당신이 했던 실전에 대한 기록은 미래의 여러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당신에게 보내는 정답이다. 미래의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으로도 기록을 게을리 하지 마라.


이 중에서 '1초만 결심하라'는 말이 뇌리에 박혔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죠. 사람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실 사람들의 인생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정말 극적인 상황일 수 있지만, 아마도 많은 부분이 순간순간 사람들의 결심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는 '1년, 3년, 5년 뒤에 하고 싶은 계획에 대해서 당장 6개월 안에 해보라. 6개월 만에 못할 이유가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시작은 '1초의 결심이다' 그 찰나의 힘으로 당신도, 그리고 나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자신만의 무형자산을 유형자산으로 연결하는 법'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내가 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우선 나 자신이 어떤 무형자산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그 무형자산을 늘려나갈지 고민해봅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고민해오던 유형자산으로의 연결점을 찾으려고 다시 고민해 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이렇게 책을 읽어가며 생각을 정리해가며 나름의 전략을 세워가며 조금씩 얼개를 만들어 나가려고 합니다. 어느 순간 그 임계점이 넘어 경제적 자유를 위한 큰 걸음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합니다다. 그 어려움과 그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찰나의 시간이 기대됩니다.





반응형
■ 네이밍 표현 전략

조합의 형태적인 측면에서 비타민하우스, 딱풀, 바디샵 같은 브랜드 네임들은 다연어를 그대로 활용하거나 단순하게 결합해 그 브랜드 네임의 속성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 브랜드들로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마케팅을 비용이 상대적으로 절감될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TTL, 8Second, ZIC, ZEC 같은 브랜드 네임들은 단어들이 새롭게 분리 조합돼 만들어진 신조어이거나 숫자+단어, 이니셜만의 조합 형태로 기호적인 성격과 상징성이 강하기 때문에 시각적인 임팩트는 강하나 브랜드의 의미를 인지시키기에는 마케팅 자원이 상대적으로 많이 필요할 수 있다.

화장품 카테고리는 파열음, 파차음, 마찰음 중에 된소리나 거센소리 즉 ㅃ, ㄸ, ㄲ ㅌ, ㅋ, ㅉ, ㅊ, ㅋ 등은 잘 활용하지 않는다.
카테고리의 특성상 여성스럽고 화려하거나 중성적이면서도 도시적인 모던함을 전달할 수 있는 음을 나타내주는 유음, 비음 등을 더 많이 활용하게 된다.

그러나 식품 카테고리 중에 아이들이 주로 먹는 제품들은 된소리나 유음 등을 활용해서 네임에서 작고 귀여운 청감을 전달하는데 예를 들면 짜요짜요, 뽀또, 초롱이, 뽀로로 같은 네임들이 그런 속성을 지닌 브랜드 네임으로 타깃 적합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카테고리 사운드의 적합도가 높을수록 소비자들은 제품 구매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나에게 어울리는 브랜드, 즉 타깃 브랜드로 생각할 가능성이 커지고 브랜드 심리적 수용도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1000개 이상의 네임 후보안에서 약 80%는 상표 등록이 불가능해서 탈락되고 나머지 20% 정도만이 상표 등록에서 살아남는데 
그래도 수백 개, 혹은 수십 개의 대안에서 한 개를 고르기가 쉽지 않다. 네임 스크리닝 포인트에 후보안을 대입해서 차별성, 적합성, 발음 용이성, 배타성 등을 점검해야 한다.

하기 그림은 메타 브랜딩의 브랜드 네임 스크리닝 모델이다. 이 모델을 적용함으로써 브랜드의 기획 콘셉트, 타깃 적합성(소비자 조사를 통해서 알아냄), 발음용이성, 차별성 등을 다시 한번 환기, 재검토하고 그에 맞는 전략적으로 크리에이티브한 후보안을 선택할 수 있다.




■ 네이밍 트렌드

브랜드 네임의 트랜드는 Rebranding, Retro branding, 직관과 상징의 합 등 세 가지의 키워드로 설명하고자 한다.

1> 리브랜딩(Rebranding)
ㄴ 리브랜딩은 새로운 브랜드를 기획하고 출시하는 데 따르는 비용과 시간적인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 전략
리브랜딩의 이유로는 New Image, More attractive & Successful, Consumer loyalty, Pace with new market, Re-energize a brand and company

2> 레트로 브랜딩(Retro Branding)
ㄴ 레트로 브랜딩은 과거로 회귀하는 네이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응답하라1997'이라는 드라마의 히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복고 열풍은 산업 전반에 강한 트랜드로 자리잡았다. 이에 많은 기업들이 레트로 트렌드를 활용하고 있다.
최근 맥도날드의 TV 광고는 레트로 브랜딩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3> 직관과 상징의 합
ㄴ 브랜드의 홍수 속에서 갓 출시된 브랜드 네임을 차별성을 가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강한 임팩트로 차별성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에 출시된 브랜드들은 대부분 하기 세 부분에 포함된다.
그 안에서 좀 더 의미가 직관적인지 , 아니면 좀 더 상징성이 강한지에 따라 위치를 점하게 되는데 요즘 출시되는 브랜드들은 
점점 더 그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직관성과 상징성이 혼합되고 있다.



출처: 동아비즈니스리뷰(DBR2013 No.134) - 주목도, 청각적 매력, 직관성... 브랜드에 강렬한 매력을 입혀라.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