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릿(spirit)

독주를 뜻하는 '스피릿'은 알코올 도수 35도 이상에 설탕을 첨가하지 않은 증류주를 말한다. 최근엔 알코올 도수 20도 이상의 증류주를 스피릿으로 부르기도 한다. 곡류 및 과일 등을 발효시킨 뒤 다시 증류해 순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위스키, 브랜디, 럼, 진, 보드카, 테킬라, 고량주 등이 이에 속한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증류 후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키는데, 숙성 기간에 따라 품질이 달라진다. 스트레이트로 마시거나 얼음이나 물을 타 희석해 마신다. 각종 칵테일과 폭탄주의 베이스로 활용되기도 한다.

 

당밀에 물과 효모를 넣고 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든다. 당밀은 사탕수수를 짜낸 즙에서 설탕을 추출하고 남은 것으로 설탕과 칼로리가 같고 비타민과 칼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을 다량 포함하고 있어 영양식품으로도 쓰인다.색이 짙고 향이 강한 다크럼과, 무색에 향도 약한 라이트럼, 둘의 중간인 골드럼으로 구분된다. 통상 다크럼은 발효를 천천히 시키고 단식증류기를 쓰며, 라이트럼은 발효를 빨리 시키고 연식증류기를 사용한다. 라이트럼은 칵테일의 베이스로 많이 쓰이는 반면 다크럼, 골드럼은 주로 스트레이트로 마시거나 얼음 넣어 마신다.
위스키나 브랜디처럼 러도 증류한 뒤 통상 1년 이상의 숙성 기간을 거치는데, 위스키나 브랜디에 비해 훨씬 짧다. 대개는 미국 버번 위스키를 숙성시킨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며 이 경우 색이 진해진다. 무색투명한 라이트럼의 경우는 스테인리스 탱크 안에 저장한다.사탕수수 즙을 발효해 술로 만들어 마신 건 고대 인도와 중국이었지만, 이걸 증류해서 마시기 시작한 건 17세기 중반 카리브 해 연안 섬들에서였다.설탕용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설탕을 만들고 난 부산물인 당밀이 알코올로 발효되는 걸 발견했고, 여기에 증류기술이 보태지면서 럼이 만들어졌다.
럼이 탄생하자마자 곧 북아메리카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기 시작해 스테이튼 섬과 보스턴, 메사추세츠 등지에 1660년대에 럼 증류소가 들어섰다. 마침 유럽에서 설탕, 수요가 늘고 있는 마당에 럼의 수요까지 급증하자 카리브해 연안섬의 사탕수수 경작을 늘리기 위해, 북미의 럼주를 주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서 카리브 해로 데려가 사탕수수를 경작하게 되고, 여기서 생긴 당밀을 미국의 증류소로 가져다주고 다시 거기서 럼을 받아 노예를 사오는 삼각무역이 번성했다.
럼을 두고 '킬 데블', '해적의 술' 등의 별칭 외에 '넬슨 제독의 피'라고도 부른다. 이는 영국의 넬슨 제독이 트라팔카 해전에서 전사하자 그 시체를 썩지 않게 하려고 럼 통에 넣어 본국으로 이송했는데, 선원들이 술통에 구멍을 내 술을 빼먹는 바람에 본국에 와서 술통을 열어보니 술이 하나도 없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러나 그 통엔 럼 아닌 브랜디가 들어 있었다는 설이 있는 등, 신빙성이 그리 높지는 않다.

보드카위스키, 럼 등의 다른 스피릿과 달리 보드카는 증류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알코올 농도를 95% 이상으로 만든 다음에 그걸 다시 물에 섞어 원하는 도수로 만든다. 위스키나 럼은 원하는 도수에 맞춰서 거기까지만 증류시킨다. 이 때문에 보드카엔 메탄올 찌꺼기 같은 불순물이 거의 없는 대신, 위스키나 럼과 같은 특유의 향도 없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보드카는 소련과 유럽 밖에선 시들했는데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버번 위스키를 앞서기 시작하더니 21세기 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스피릿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위크>에 따르면 2007년 전 세계에서 183억 리터의 스피릿을 마셨는데, 그 중 보드카가 37억 리터로 1위이며 위스키가 21억 리터로 2위였다.
단일 브랜드로 보면, 럼주인 '바카디'가 오랫동안 1위였는데 2006년에 보드카인 '스미노프'가 이를 앞질렀다고 한다. 이 두 브랜드에 이은 3위도 최근 수년 동안 '앱솔루트 보드카'가 지키고 있다.
보드카 칵테일무색 무취의 보드카는 칵테일의 베이스로 가장 인기가 좋다. 대체로 당도가 높다면 어떤 과일이든 주스를 짜고 보드카를 타면 (경우에 따라 소다수를 첨가해도 좋다) 먹기가 좋다. 오렌지주스에 보드카를 탄 '스크루드라이버', 오렌지, 복숭아, 크랜베리 주스에 보드카를 탄 '섹스 온 더 비치'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내가 개발한 보드카 칵테일 하나, 레몬주스에 보드카를 넣는 건데, 레몬이 당도가 높지 않은 만큼 사이다를 보드카의 1~1.3배 섞는다. 레몬주스는 미리 만들어 파는 레몬즙이 아니라 레몬을 짜서 쓰는데, 중요한 것은 레몬을 껍질째 힘껏 짜서 주스 색이 뽀얗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율은 보드카 750ml에 레몬 6~8개, 사이다 1리터와 얼음을 넣는다. 
여러 명이서 파티를 할 때, 큰 그릇에 레몬을 함께 짜 넣고 보드카와 사이다를 붓고 얼음을 넣고 저어서 잔에 떠 마시면 된다. 내 경험으로 이 칵테일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테킬라테킬라는 위험하다. 모든 술이 많이 마시면 안 좋고 더 않좋으면 사고치게도 만들지만, 테킬라가 주는 취기는 꼬장이나 객기와 조금 달리 뭔가를 능동적으로 하고 싶게 만든다. 누군가 그랬다. 창조에 수반되는게 기쁨이고, 쾌락은 소비할 때 생기며, 이 둘이 섞인 게 관능이라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테킬라는 관능적이다. 시한부 삶의 운명에 좌절한 젊은 이들로 하여금 바다의 석양을 찾아 나서게 만들 술로, 테킬라만한 게 또 있을까
테킬라의 이런 관능은 어디서 오는 걸까. 위스키나 브랜디에 비해 테ㅣㄹ라는 증류한 뒤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 기간이 길지 않다. '엑스트라 아네호'라는,2006년에 새로 추가된 딱지가 붙은 최상품의 숙성기간이 3년이다. 대부분은 증류 뒤 바로 마시거나(블랑코), 두 달 숙성시키거나(레포사도), 1년 숙성시킨다(아네호). 그러나 위스키나 브랜디의 원료인 곡물이나 과일이 1년마다 열리는 것과 달리, 테킬라는 원료가 되는 식물 아가베(용설란)를 8~12년 동안 땅에서 키운 뒤 만든다. 아즈텍 문명을 낳은 멕시코 중앙고원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 원료 자체가 긴 세월 동안 숙성되는 셈이다.
테킬라는 또 아즈텍과 서구, 두 문명의 결합으로 탄생한 400년 역사의 유서 깊은 술이기도 하다. 충분히 키운 용설란, 아가베의 잎을 잘라내고 남은 지름 70~90cm의 파인애플 같이 생긴 몸통을 찌고 그 과정에서 생긴 당분으로 발효시킨 뒤 증류한 게 테키라인데, 증류하기 전 상태의 막걸리처럼 걸쭉한 술을 '풀케'라고 부른다. 이걸 16세기 이전에 아즈텍인들이 마셨다고 한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이곳을 점령한 뒤 그들의 증류 기술을 동원해 풀케를 증류하기 시작했고, 1600년을 전후해 테킬라를 만드는 공장이 생겼다고 한다.
테킬라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한 가지, 바로 벌레다. 아가베 뿌리에 사는 구사노라는 벌레를 훈연해서 넣는데, 수년 전부터 테킬라 제조에 관한 규정은 테킬라에 이 벌레를 넣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벌레가 들어가는 술이 있다. '메즈칼'이라는 멕시코 술이다. 메지칼은 현지 말로 아가베를 뜻한다. 아가베, 즉 용설란으로 만든 술을 통칭해서 메즈칼이라고 부르며, 그 가운데 테킬라라는 마을이 속해 있는 멕시코 할리스코주에서 아가베의 여러 종류 가운데 '블루 아가베'로 만든 메즈칼을 테킬라라고 부른다. 브랜디 가운데 꼬냑 지방에서 나는 것만 꼬냑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더 유명해져서 꼬냑이라는 말이 브랜디를 대체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최근의 기사들을 보면, 테킬라는 대량생산되면서 첨가물도 많이 들어가는 데 비해, 메즈칼은 전통에 따라 수공업으로 소량씩 제조돼 테킬라보다 더 품질도 낫다고 한다. 메즈칼에 벌레를 넣으면 향기가 풍부해진다는 설도 있고, 그냥 상술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다.
압생트미국의 금주령처럼 술의 역사에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19세기 중후반 포도나무 해충의 만연이었다. '필록세라'라는 이 조그만 벌레는 1860년대에 북미에서 유럽으로 들어와선 이후 20~30년 동안 유럽 곳곳의 포도 농장을 황폐화시켰다. 와인은 물론, 와인을 증류해 만든 브랜디까지 생산량이 급감했다. 자생력이 더 강한 새로운 품종으로 포도 농장이 바뀌기까지 그 몇십 년 동안에 술의 판도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세계적으로 영국의 스카치 위스키가 브랜디를 누르고 '스피릿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됐다. 다음으로 유럽 안, 특히 와인의 종주국 프랑스에서 '압생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압생트는 한 번 증류한 알코올에, 쑥의 한 종류인 웜우드와 아니스, 페넬 등의 허브를 담근 뒤 한 번 더 증류해 만든 스피릿이다. 알코올 도수가 50~75도로 독한 탓에 통상 압생트를 따른 잔 위에 압생트용 스푼을 놓고 설탕을 얹은 뒤, 그 위에 찬물을 따라 설탕 녹인 물로 희석시켜 마신다.
칼바도스칼바도스는 과일주를 증류한 술, 브랜디 가운데서도 사과술을 증류한 것이다. 노르망디 해안 지방에서 재배되는 사과로 만드는데, (제품에 따라 배를 30% 가량 섞기도 한다) 칼바도스는 이 지역의 명칭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사과술을 증류한 건 16세기 중반이며, 17세기에 이미 이 지방의 사과 증류주, '오드비 드 시더(cider, 사과술)'를 '칼바도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칼바도스가 지역의 명칭으로 공인된 건 프랑스 혁명 뒤이다.) '칼바도스'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1588년에 '살바도르'라는 스페인 함선이 노르망디 해안 근처에서 침몰해 이 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해안 근처에 솟은 두 개의 바위 형상이 사람의 '벌거벗은 뒷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생겼다는 설을 전한다. 아무튼 관능적인 이름이다.
칼바도스는 19세기에 생산량이 증가하다가 '필록세라'라는 해충이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시켜 꼬냑을 비롯한 포도 브랜디 생산량이 급감한 19세기 후반에 포도 브랜디의 대체재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1942년부터 프랑스 특산물을 관리하는 AOC의 관리 대상에 포함돼, 칼바도스라는 명칭 아래 생산되는 모든 술이 AOC의 품질 규제를 받는다. AOC의 규정은 모든 칼바도스는 이 지역 사과(와 배)로 만들고, 증류 뒤 2년 이상 숙성시키도록 하고 있다. 칼바도스 가운데서도 '칼바도스 페이도쥬'라고 표기된 것은, 그냥 칼바도스가 한 번 증류하는 데 비해 두 번 증류한 술로 맛이 훨씬 풍부하다. '페이도쥬'라는 명칭의 표기 여부 역시 AOC가 관리한다.
AOC의 등급 분류기준은 이렇다. 'Fine', 'Trois etoile', 혹은 별 셋이나 사과 모양의 무늬가 셋잇 경우는 2년 이상 숙성시킨 것이다. 'Vieux', 혹은 'Reserve'는 3년 이상, 'V.O.', 'Vielle Reserve', 'V.S.O.P.'는 4년 이상, 'Extra', 'X.O.', 'Napoleon', 'Hors d'Age' 등은 6년 이상 숙성시킨 것이다.
꼬냑꼬냑은 과일주 증류주인 브랜디 가운데서도 프랑스 꼬냑 지방에서 나오는 브랜디를 일컫는다. 꼬냑이 술의 역사에서 한동안 '술의 제왕' 노릇을 하게 된 걸 두고 크게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원래 꼬냑 지방에서 나오는 포도는 신맛이 강해 와인으로 만들면 맛이 없었는데, 이걸 증류하니까 다른 지방 포도주를 증류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탁월한 맛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 17세기 중반 프랑스 재무상 콜베르가 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 배를 만들 목재를 비축하기 위해 꼬냑 동부 리무쟁 지방에 오크나무 숲을 조성했고, 이 숲이 술 저장용 오크통의 보고가 되면서 꼬냑의 대량 생산에 기여했다.
꼬냑은 300년 동안 프랑스 정부가 나름의 요건을 정해놓고 명칭 사용을 통제해왔다. 그 요건은 우선 90% 이상을 Ugni Blanc, Folle Blanche, Colombard 세 종류의 포도로 만들어야 하며(품종 기준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두 번 증류해야 하고, 오크통에서 2년 이상 숙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충족하는 꼬냑에 대한 더 자세한 등급 구분 기준은 다음과 같다.
위스키

위스키는 곡물 발효주를 증류한 것으로, 원료에 따라 크게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 그리고 둘을 섰은 블렌디드 위스키로 나뉜다. 몰트 위스키 중에서 한 증류소에서 나온 술만으로 담은 것을 싱글몰트, 여러 증류소에서 나온 술을 모다 담은 걸 퓨어몰트 위스키라고 부른다.

 

위스키는 아일랜드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스코틀랜드로 넘어가 1820년대에 스코틀랜드 정부가 공인한 1호 위스키 '글렌 리벳'이 나온다. 하지만 몰트 위스키는 맛이 거칠다는 이유로 영국 상류 사회에서조차 환영을 받지 못했다. 영국 상류층은 여전히 프랑스의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스피릿의 지도를 그리면 아일랜드엔 몰트 위스키, 영국과 유럽엔 브랜디였다. 변화를 불러온 건 블랜디드 위스키였다. 몰트 위스키에 귀리, 옥수수 등으로 만든 그레인 위스케를 섞은 블랜디드 위스키는 맛이 부드러워 상류층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조니워커, 발렌타인 등의 블렌디드 위스키들이 이때 탄생해 영국 시장을 장악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마침 19세기 후반 유럽엔 포도 해충이 들어와서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브랜디 생산량도 급감했고 그 틈새를 블랜디드 위스키가 파고 들었다.

 

그러는 동안 속이 상한 건 아이리시 위스키였다. 아ㄹ이리시 위스키는 대다수가 몰트이고, 발효한 몰트액에 그냥 몰트를 더 넣어서 증류하기 때문이 맛이 더 달고 거칠다. 영국의 블랜디드 위스키가 위스키 시장을 석권하자 아일랜드 위스키 업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위스키(whisky)의 철자에 'e'를 넣어 'whiskey'로 표기하면서 영국 위스키와 차별화를 시도하는 한 편, 영국의 블랜디드 위스키에 위스키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송을 냈으나 패소하고 말한다.

 

아일랜드나 영국과는 달리 미국 위스키는 옥수수가 주원료다. 켄터키주 버번 지방에서 생산되는 버번 위스키는 원료인 곡물 가운데 70%이상(법으로는 51%이상)을 옥수수로 하여 만든 주정을 증류한다. 잭 다니엘스로 대표되는 테네시 위스키는 옥수수를 주원료로 사용하지만, 오크통에 담기 전에 단풍나무 숯에 여과하는 과정을 거친다.

 

조니 워커

조니 워커라는 이름의 기원인 존 워커(1805~1857)는 아버지가 스코틀랜드 킬마넉에 잡하상 하나를 남겨놓고 죽자, 열다섯 살부터 가게를 운영하면서 그곳에서 팔던 위스키들을 섞어 보기 시작했다. 죽을 때쯤, 그가 만들어 팔던 블렌디드 위스키는 주변에서 인기 있는 술이 돼 있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 워커는 위스키 블렌딩을 보다 전문화해 1865년 '워커스 올드 하이랜드'를 내놓았고, 마케팅도 본격화해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 술에 '조니 워커'라는 이름이 붙은 건, 1909년 조니 워커의 손자 알렉산더 워커 2세 때의 일이다. 이때부터 저 유명한 '활보하는 남자'의 로고와 함께, 숙성연도가 낮은 위스키 35가지를 섞은 '조니 워커 레드 라벨'과 숙성연도 12년 이상의 위스키 40종을 섞은 '블랙 라벨' (블렌디드 위스키의 숙성 연도는 , 배합한 위스키 가운데 가장 숙성기간이 짧은 위스키의 연도를 표기하도록 돼 있다.) 이 나왔다.

 

조니 워커는 스코틀랜드의 '디스틸러스 컴퍼니'라는 지주회사에 속해 있다가 1986년 이 회사가 기네스에 팔리고 기네스가 합병해 디아지오를 만들면서 디아지오에 속하게 됐다.

 

발렌타인

발렌타인은 조니 워커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15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블렌디드 위스키이다. 한국에서 워낙 인기가 좋아, 한국인들을 위해 따로 블렌딩을 한다고 할 정도이다. 싱글몰트 위스키와 달리, 블렌디드 위스키의 브랜드 창시자들은 양조장을 갖지 않은 채, 주류 판매상을 하던 이들이 많다.

 

발렌타인의 창시자인 조지 발렌타인(1808~1891) 역시 열아홉 살부터 에딘버러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며 여러 가지 위스키를 팔았다. 가게가 번성하자 1865년 큰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글래스고에 더 큰 가게를 열어 와인과 스피릿 판매에 전념하고, 이 가게에서 영국 왕실에도 납품을 했다. 그러면서 1869년 자신의 블렌디드 위스키를 개발해 팔았고, 이게 수요가 늘자 둘째아들이 사업에 동참해 '조지 발렌타인 앤 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 뒤 창고를 갖춰놓고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위스키를 팔면서 사업이 번창했고, 아버지 조지는 1881년 은퇴한 뒤 1891년에 사망했다. 1895년 빅토리아 여왕이 이 회사에 훈장을 수여했으며 1910년에 유서 깊은 '발렌타인 파인스트'(최하 3년 이상 숙성시킨 수십 종의 위스키를 블렌딩한 것)을 내놓게 된다.

 

조지의 아들은 1919년 비싼 가격에 회사를 '바클리 앤 맥킨리'에 팔았고, 새 주인은 '발렌타인' 이름으로 신제품 개발에 몰두해 1930년 '발렌타인 17년'과 '발렌타인 30년'을 선보였다. 1937년 주인이 한 차례 더 바뀌면서 이 회사는 유럽에서 가장 큰 곡물증류소를 갖게 됐고, 1960년대에 유럽 공략에 전념해 1980년대에는 유럽의 넘버원 브랜드로 꼽히게 됐다.

이 회사는 1988년 '어라이드 도맥'을 거쳐 2005년, 디아지오와 함께 1,2위를 다투는 다국적 주류 기업 페르노리카에 넘어갔다.

 

맥켈란

스카치 위스키 생산이 합법화된 직후인 1824년에 나온 유서깊은 싱글몰트 위스키이다. 글렌피딕, 글렌리벳 등과 더불어 스카치 위스키 5대 생산지 중 하나인 스페이강 유역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스페이사이드 위스키'이다. 증류소 인근 지역 주민들이 경작한 보리로 술을 담갔고, 1960년대 상장한 뒤 한동안 주식의 상당 부분을 지역 주민들이 소유해 '몰트 오브 피플'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오롤로소 셰리주(포도주에 브랜디를 섞어 알코올을 강화한 스페인의 셰리주 가운데 가장 오래 묵히는 것)를 담았던 통에서 숙성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며, 1926년산 빈티지 맥켈란이 200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5400달러에 팔려 사상 최고가의 위스키로 기록되기도 했다.

 

글렌피딕

글렌피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싱글몰트 위스키로, 싱글몰트 위스키 안에서의 시장점유율이 35%에 이른다. 대다수 위스키 회사들이 다국적 주류 기업에 합병된 것과 달리, 글렌피딕의 제조사인 '윌리엄 그랜트 앤선즈'는 창립자의 가문이 대를 이어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창립자인 윌리엄 그랜트(1839~1923)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이런 저런 잡일들을 하다가 스물일곱 살인 1866년에 양조장의 장부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거기서 20년간 일하면서 위스키 제조의 노하우를 배운 뒤, 1886년 그동안 번 돈으로 땅과 장비를 사서 9명의 자녀와 함께 글렌피딕 증류소를 차렸다. 그리고 1887년에 글렌피딕이 첫 선을 보였다.

 

블렌디드 위스키 일색이다시피 하던 당시에 싱글몰트 위스키를 판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윌리엄 그랜트는 증류소를 하나 더 사들이면서 저돌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갔고, 그의 사위인 찰스 고든은 이 위스키의 해외 판매에 나서, 1914년에 글렌피딕은 세계30개국으로 수출됐다.

 

2차대전 뒤의 경영난을 벗어나기 위해,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는 제품 수를 늘림과 동시에 1957년 삼각형 모양의 독특한 병에 글렌피딕을 담아 팔기 시작했다. 아울러 면세점을 주요 공략대상으로 삼아 마케팅해온 것에 힘입어 싱글몰트 위스키 판매량 1위를 고수하면서 180여개국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대다수 몰트 위스키 증류소에서 생산량의 90%를 블렌디드 위스키용으로 보내고, 나머지 10%를 싱글몰트 위스키로 담는 것과 반대로, 이 회사의 증류소들은 90%를 싱글몰트 위스키로 담고, 나머지 10%를 블렌디드 위스키용으로 사용한다.

 

버번 위스키

버번 위스키는 원료인 곡물 가운데 통상 70% 이상(미국 정부 법으로는 51% 이상)을 옥수수로 하여 만든 주정을 증류한 위스키다. 미국 법은 증류한 술을 오크통에서 2년 이상 숙성시켜야 '버번'이라는 말을 쓸 수 있도록 한다. (스카치 위스키에 대해 영국법이 요구하는 숙성기간은 3년 이상이다.) 스카치 위스키에 비해 싸구려로 술로 통해오다가, 이후 6년 이상 숙성된 버번이 대량생산되면서 통념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 버번은 18세기 후반 미국에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사에서부터 미국과 영국의 갈등이 얽혀 있다. 미국 서부 개척기 초기, 넓디 넓은 땅에 옥수수가 무척 잘 자라 사람 먹고, 소와 말 먹이고도 남았다. 이걸 미국 동부에 가져다 팔자니 운송비도 안 나오고, 그래서 술로 담가서 마시기도 하고 다른 물자와 교환하는 화폐 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마침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 1812년 전쟁 등을 벌이는 동안 설탕과 당밀 등의 수입이 힘들어졌다. 그때까지 미국에서 주로 마시던 독주는 럼주였는데, 당밀이 원료인 럼 역시 원활히 생산되지 못했다. 그래서 옥수수술을 증류한 버번 위스키가 그 대체제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버번의 역사에 영국이 등장하는 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부터 그렇다. 버번 위스키는 켄터키주에 있는 버번 지방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버번'이라는 지명은 프랑스 푸르봉 왕조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미국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위스키의 표기도 미국과 영구이 다르다. 스카치는 'whisky'이고 버번은 'whiskey'이다. 위스키 스펠링은 아이리시 위스키 편에서 다시 다뤄진다.) 또 하나, 독립전쟁으로 빚체 쪼들리게 된 미국 연방 정부가 1791년 '위스키 세금'을 매기자, 주류제조업자들이 '위스키 반란' 까지 일으켰다가 결국 연방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켄터키주로 옮겨 갔고 마침내 그곳에서 훗날(1964년) 미국 의회가 'America's native Spirit'으로 공인한 버번 위스키가 탄생했다. 

 

짐 빔

술 당기는 김에 여기서 술 얘기, 1795년부터 만들어져 2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짐 빔은 '와일드 터키' 등과 함께, '미국 고유의 독주'로 미국 의회가 공인한 버번 위스키를 대표하는 상표이다. 한국에선 얼마 전부터 '잭 다니엘스'를 많이 마시는데, 잭 다니엘스는 엄밀히 말해 버번 위스키가 아니다. 옥수수가 주원료인 건 맞지만, 증류한 원액을 오크통에 담기 전에 단풍나무 숯으로 여과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테네시 위스키'라고 분류한다. 실제로 술도 버번이라는 곳에 속헤 있는 켄터키주가 아닌 테네시주에서 만든다.

 

그럼에도 짐 빔과 잭 다니엘스는, 우리로 치면 '참이슬'과 '처음처럼'의 관계처럼 미국에서 가장 라이벌을 이루고 있는 술이다. 

 

잭 다니엘

미국 영화에 단일 브랜드로 가장 많이 출연한 술은? '잭 다니엘스' 아닐까. 버번 위스키처럼 옥수수를 주재료로 함에도 제조 과정이 조금 달라 테네시 위스키로 분류되는, 그럼에도 대다수가 버번 위스키의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로 알고 있는 그 술.

 

1975년에 태어난 이 술은 역사도 짧고 테네시주 무어카운티라는 촌 동네 출신이지만, 그곳의 천연광천수를 이용하고, 증류 이전의 발효 단계에서 원료들을 묵혀 단맛을 줄인 뒤, 증류액을 단풍나무 숯으로 여과하는 특유의 제조 과정을 꾸준히 지키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1904년에 열린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의 위스키 경연대회에서 스코틀랜드의 명주들을 제치고 금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미국 너머로까지 알리기 시작했다.

 

잭 다니엘스의 창업자인 잭 다니엘이 살았던 미국은 훨씬 더 타락했다. 남북전쟁이 있었고, 극심한 인종차별 속에 KKK단이 만들어졌고, 주세가 높은 데 비례해 밀주와 뇌물이 횡행했고,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그 모든 죄를 술에 돌려 금주운동을 열렬히 펼쳤다. 아일랜드 출신 이민 3세인 잭 다니엘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가 죽고, 남북전쟁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아버지도 죽고 새엄마가 떠나자 십대 중반에 이웃 농가에 들어가 농사일을 도와주며 자랐다.

 

운명처럼 그 농가의 주인이 증류소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맡은 옥수수 증류주의 냄새 속에서 잭은 장래의 희망을 보게 된다. 스물다섯 살에 아버지 소유의 농장이 팔리면서 유산을 상속받게 되자 증류소를 세웠다. 서른 즈음에 이미 부자가 된 잭이 그 뒤에 한 일 가운데 눈에 띄는 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술 제조 상한을 하루 300갤런으로 정해놓고 이걸 지키면서 술의 품질을 유지했고,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냄으로써 봉사활동도 하면서 금주운동의 표적에서 비켜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전국적인 금주령이 시행됐고, 회사를 이어받은 그의 조카는 다른 사업으로 자산을 지켜오다가 금주령이 해제된 뒤 공장을 다시 세웠다. 그 조카가 죽고, 자식들이 회사를 이어받았다가 1956년 브라운-포맨이라는 거대 주류, 음료 기업에 팔아 브라운-포맨이 잭 다니엘스를 만들고 있다.

 

##

위스키나 와인을 오크통에 숙성시킬 때 증발돼 줄어드는 미세한 양을 두고, 서양인들이 '천사의 몫'이라고 부르는 건 유머도 있고 광고 효과도 있다. '얼마나 맛있으면 천사가 돈 안 내고 훔쳐 마실까......' 그런데 천사도 서로 주량이 다른 모양이다. 스카치 위스키의 본산지인 스코틀랜드 지방은 저기압이어서 증발량이 매년 2% 남짓이라는 데, 그보다 기압이 높은 한국에선 증발량이 더 많을 것 간다. 한 주류회사 관계자에게 "스카치 위스키 수입량이 세계 5위에 이르는 한국이 위스키 원액을 못 만드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 원인으로 수질, 피트(토탄) 매장량의 차이 등과 함께 기압에 따른 '천사의 주량 차이'를 꼽앗다.

 

선토리 위스키

선토리 위스키사가 만든 '히비키 30년산'은 <위스키 매거진> 주최로 런던에서 열린 '월드 위스키 어워드 2008'에서 '최우수 블렌디드 위스키'로 꼽혔다. 또 헌토리와 함께 일본 위스키의 양대 주자인 닛카 위스키가 만든 '요이치 20년산'이 같은 대회에서 '최우수 싱글 몰트 위스키'로 선정됐다.

 

선토리와 닛카, 두 회사는 1980년대 말부터 스코틀랜드의 양조장을 사들이고, 2000년대 이후 권위있는 위스키 경연 대회에서 주요상을 여러 차례 석권했다. 이에 따라 스카치 위스키의 모국인 영국의 언론이나 위스키 관련 사이트에는 수년 전부터 일본 위스키를 다룬 기사들이 실린다. 기사들은 중국, 인도, 러시아에서의 위스키 소비량 증가로 급팽창하고 있는 위스키 시장에서 일본 위스키가 큰 활약을 할 것으로 예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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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고가에 팔리는 미술작품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비싼 가격으로 팔릴까?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고 추상화같은 것을 보면 도대체 뭐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하나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 놓치고 싶지 않다. 조금씩 알아가면서 배워가면서 그 감동을 하나씩 찾아가려 한다.

 

처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폴 고갱의 삶을 다룬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부터이다. 문학을 통해서 미술을 접하는 귀하고 묘한 경험이었다. <달과 6펜스>를 읽고 폴 고갱의 작품들을 찾아봤다. 그냥 작품만 보아서는 잘 몰랐는데 그의 삶을 알고 난 후에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 이 사람이 이런 것을 추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폴 고갱을 만나고 나서 그와 인연이 깊은 반 고흐에 관심이 생겨서 반 고흐가 미술상인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반 고흐가 살아서는 부와 명예를 이루지 못하고 작품도 제대로 팔린 적이 없지만 지금 이렇게 이름과 작품을 남긴 큰 고은 어쩌면 그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흐와는 단지 악연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이 함께 살았던 짧은 기간 속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위대한 두 화가의 인연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지 아쉬울뿐이다.

 

반 고흐(1853.3.30~1890.7.29)와 폴 고갱(1848.6.7~1903.5.8)은 고갱이 고흐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다. 고흐는 한 때 화가 공동체를 꿈꿨다. 화가 공동체는 "화가들이 협동하여 자기들 그림을 조합에 넘겨주고, 조합에서는 회원들의 생활을 보장해 계속 그림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 대금을 배분하는 것" 이라는 제안이었다. 당시에 이런 화가공동체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고흐의 끊임없는 제안과 관심은 둘이 잠깐 동안 같이 생활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당시 고갱이 생계 해결과 미술상인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라고도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당사자들만 알 뿐이다. 그렇게 둘은 같이 생활을 하게 된다.

 

폴 고갱은 고흐와 1888년 10월에 같이 살기 시작해서 두 달 정도 고흐가 그린 노란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 당시 고흐는 자신이 구상한 공동체가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으면서 희망이 가득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낭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고갱과 다소 합리주의적인 고흐는 갈등도 적지 않았다. 

 

<반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것도 나온다. 둘이 살았으면 요리는 누가 했을까? 정답은 아마도 고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고갱은 "요리는 고결한 영혼과 재빠른 손, 그리고 대담한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라는 지론이 있을 정도로 요리에 능숙했다. 아마 미술사에서 고갱만큼 요리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한다.

 

▲ 빈센트 반 고흐, <노란집> 1888, 72 x 91.5 cm, 반 고흐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의 의자> 1888, 72.5 Ⅹ 90.5 cm, 반 고흐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의 의자> 1888, 73 Ⅹ 91.8 cm, 반 고흐 미술관

그들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서로의 관계는 파탄에 빠져버린다. 반 고흐가 자연에 있는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에 고갱은 현실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들로 비슷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사이가 벌어진다. 

 

고갱의 잘린 귀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고갱이 고흐와의 갈등이 깊어지고 고흐가 고갱을 떠나려하자 고갱의 뒤를 밟기도 하고, 결국은 자신의 귀를 짤랐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 남다른 동생 테오가 결혼을 한다고 하자 우울증에 빠지면서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고 다양하다. 분명 사실은 하나일 텐데 궁금하다. 고흐는 귀를 자른 후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을 몇 점 그리기도 했다. 이후 고흐와 고갱은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빈센트 반 고흐,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1889, 51 Ⅹ 45 cm, 개인소장

 

둘 사이는 결국 파탄으로 끝났지만 둘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만약 고흐가 없었다면 노란 집이 있는 아를에서 고흐는 그의 훌륭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를에서 부터 자신의 원시성을 깨닫기 시작한 고갱은 아를을 떠난 후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의 걸작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들의 역사적인 만남은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그쳤지만, 그 의미는 미술사에 깊게 베었다.

 

 

▲ 폴 고갱, <설교 뒤의 환상>, 1888, 72.2 x 91cm, 국립 스코틀랜드 미술관

 

▲ 폴 고갱, <황색의 그리스도>, 1889, 73.3 x 92.1cm,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두 화가를 통해서 이렇게 조금씩 미술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나에게는 미술작품만으로는 흥미가 생기기는 쉽지않을 것 같다. 작품 속에 숨어있는 이런 이야기를 알아갈수록 작품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듯 하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미술작가가 고갱, 고흐와 세잔이라고 하는데 세잔에 관련된 것도 조금씩 찾아가야 겠다.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를 전 후로한 미술사조도 조금씩 알아볼까 한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고흐와 고갱의 작품을 하나씩 소개한다. 

 

▲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73.7 x 92.1cm, 뉴욕 현대미술관

 

▲ 폴 고갱,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1897, 141 x 376cm, 미국 보스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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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반 고흐가 제안한 화가 공동체에 고갱이 솔깃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생계만 해결된다면, 프랑스에 계속 머물면서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고갱에게도 있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 고흐와 고갱의 만남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목사가 되려했던 화가와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에서 잘나가는 주식중개인의 경력을 버리고 그림을 시작한 화가가 서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이 조우의 순간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반 고흐와 고갱. 결국 파탄날 수 밖에 없었던 두 화가들의 관계를 이들이 남겨놓은 그림들을 통해 돌아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p27

반 고흐는 어떻게든 고갱과 함께 있고 싶어했다. 고갱이 동료와 다투고 파리를 떠나자 반 고흐도 아를로 거처를 옮겼다. 아를은 반 고흐에게 약인 동시에 독이었다. 파리 생활이 반 고흐에게 남긴 것은 피폐해진 건강 상태뿐이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요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반 고흐는 풍광 좋은 아를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를에 도착한 그는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서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당분간 둘이 함께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런 반 고흐의 호의는 후일 엄청난 재앙으로 바뀌어 그에게 돌아오고 만다. 그러나 처음 아를에 도착해서 방을 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무렵, 반 고흐는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의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고갱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p32

이런 반 고흐의 모습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사회개혁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화가들의 협동조합에 대해 말하면서 "화가들이 협동하여 자기들 그림을 조합에 넘겨주고, 조합에서는 회원들의 생활을 보장해 계속 그림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 대금을 배분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반 고흐의 생각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반 고흐가 협동조합 구성에 솔선수범해주면 좋겠다고 지목한 인상파 화가들조차도 각자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 일에 고심했을 뿐, 반 고흐 같은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35

아를로 떠나기 전부터 반 고흐는 일본 그림에 심취해 있었는데, 아를에서 제작한 그림은 이런 관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존의 화풍과 이론을 완전히 무시한 그의 그림은 지금까지 볼 수 없던 기법과 스타일의 실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만큼 이 당시의 반 고흐는 화가들의 협동조합 같은 제도적 개혁뿐만 아니라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88년 봄에 반 고흐는 과수원 연작을 열네 점이나 그린다. 이 그림에서 파리를 떠날 무렵에 그려진 그의 자화상과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상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분명히 다른 징조들이 이 연작에 꿈틀거리고 있다. 이 징조들은 다분히 일본 그림의 영향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p36인상주의를 통해 일본 그림의 의미를 알았지만,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그림으로 인해 반 고흐는 인상주의의 그늘을 벗어난다. 반 고흐에 이르면 인상주의의 원칙이기도 했던 자연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의미를 상실한다. 반 고흐의 그림은 인상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격렬한 색조의 대비와 충돌을 보여주는 것에서 전혀 다른 특징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에게 그림은 더 이상 자연의 묘사라고 볼 수 없었다. 아를에 처음 정착했을 때, 반 고흐의 그림에서 고통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p41주식중개인으로서 경력을 더 쌓기 위해 고갱은 가족과 함께 덴마크로 갔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는 가족을 버리고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1885년에 파리로 돌아온다. 부인과 다섯 아이들을 덴마크에 남겨둔 채 말이다. 고갱이 주식중개인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은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에 잘 그려져 있다.
p43인상주의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고갱은 상징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은 일본 그림에 감화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림에 가득한 상징적 깊이 때문이었다. 고갱의 불만은 자연의 모방에 치중한 당대의 화풍이었고, 이런 까닭에 인상주의와 그 화가들을 벗어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1888년에 고갱이 그린 [설교를 들은 뒤에 본 환상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그의 예술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887년 고갱은 몇 달 동안 남미의 파나마를 방문했는데, 거기에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몇 달 머물렀다. 이 그림은 마르티니크 섬에서의 체류 경험이 고갱에게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 그림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은 여인들에게 나타난 환상을 보여주는데, 고갱은 이 작업을 통해 마침내 자신만의 생채와 화풍을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브르타뉴의 돼지치기]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48반 고흐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믿음도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의 정도로 치자면 피사로 같은 인상파 화가들도 순위권에 들 만 하다. 당시에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줄 마음씨 좋은 후원자들은 파리에 없었다. 말하자면 가난은 당시 파리에 모여 있던 예술가들의 만성 질병이었지, 딱히 반 고흐만을 위해 준비된 천형은 아니었던 셈이다. 반 고흐의 불행은 세잔처럼 불안한 마음에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반 고흐는 세잔과 달리 피사로 같은 인생의 조언자가 없었다는 것. 어쩌면 이 사실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른다.
p56반 고흐의 문제는 마음에 있었는데, 고갱처럼 그도 문명의 압박을 참지 못하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고갱이 파리를 떠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반 고흐는 어떻게든 현실에 남아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같은 차이점이 고갱과 반 고흐에게 잇었다. 게다가 고갱이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했다면, 반 고흐는 이타적이면서 헌신적이었다. 반 고흐가 일본 그림에 빠져 있었던 것과 달리 고갱에게 일본은 출발점이었지 종착점이 아니었다. 고갱은 일본 그림처럼 섬세한 표현을 선호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그는 '원시성'을 찾아서 타이티로 떠날 수 밖에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이렇게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었지만, 둘을 묶어주는 공통점도 없지 않았다. 둘은 모두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아틀리에에 들어가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오직 독학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고갱과 반 고흐이다. 이들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초창기처럼 미술제도로부터 떨어져서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는 것이 이들을 다른 화가들과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특징인 것이다.
p59고갱이나 반 고흐, 그리고 이들보다 앞선 세잔 모두 요동치는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점묘파 화가들이 인간성의 소멸을 도모하기 위해 화가의 눈을 '카메라 렌즈'로 간주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인간의 내면을 색채와 형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들은 예술이야말로 '마음의 문제'를 표현한다는 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p113반 고흐의 [붉은 포도밭]은 [씨 뿌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성서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세계관이 물씬 풍기는 이 상징을 반 고흐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고갱은 비슷한 주제를 '인간성 자체의 비극'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치환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반 고흐의 유토피아주의가 고갱에게 오면 실존적인 비극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고갱은 [인간 비극]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여성을 일컬어 "공허한 존재"라고 언급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는 않다. 반 고흐는 이 그림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종교적 주제를 전혀 종교적이지 않게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두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상파의 리얼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마음을 그리는 것이었다.
p135고갱은 오만했고, 자만심에 들떠 이썽ㅆ다. 필요 이상으로 으스대기도 해서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생각도 그렇게 진취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고갱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를에서 반 고흐가 그린 걸작들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확실히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아를에서 고갱과 반 고흐는 한동안 미술사에 남을 만한 우정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 고흐 역시 중요한 미학적 도약을 이룩할 수 있었다.
p139이런 고갱의 노력이 왜 중요한 것일까. 바로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라는 측면에 머물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로 생각한다면, 예술은 자연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갱처럼 그림이 자연을 묘사하지 않고 마음의 풍경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림은 자연과 경쟁하는 '또 다른 자연'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고갱은 반 고흐보다 위대한 화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반 고흐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이렇게 관계의 사슬로 얽혀 있는 것이다.
p150여하튼 아를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기 힘들었던 '고귀한 야만인' 고갱에게 언젠가는 떠나야 할 장소였던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갱과 함께 살기를 희망했던 반 고흐의 소망은 항상 위태위태했다고 할 수 있다. 고갱의 그림은 원시적인 여성에게 마법적인 분위기를 부여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서인도제도를 방문했을 때 그린 그림들에서 이런 특징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p159고갱은 품위 없는 여성은 결코 요리를 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요리는 고결한 영혼과 재빠른 손, 그리고 대담한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라는 것이 고갱의 지론이었다. 시인 못지않게 멋진 말이다. 요리에 대해 이렇게 능숙한 남성화가가 과연 미술사에 얼마나 될까. 고갱 말고도 요리를 잘했던 화가가 바로 툴루즈 로트레크였다. 로트레크는 아마추어급이었지만, 최고의 요리사로 각광을 받았다. 로트레크에 비하면 좀 떨어지지만 고갱은 요리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가진 화가로 정평을 얻었다.
p176고갱은 구획주의를 정립함으로써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오히려 그를 번잡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퐁타방을 방문했을 때, 거처를 옮겨서 르푸르뒤에 일 년 정도 머물기도 했다. 고갱이 주도한 퐁타방파의 미학은 인상파의 감각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인상파의 감각주의를 대체한 퐁타방파의 화제는 바로 사상적 내용이었다. 사상적 내용이라는 추상성을 회화라는 이차원성에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 바로 고갱의 구획주의에 담겨 있는 미학적 원리였다. 이차원적 표현으로 조형하는 회화의 이미지들은 이후 현대 회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모티프들을 선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181물론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에서 아를의 밤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의 비밀은 바로 음악에 있다. 반 고흐는 음악과 미술을 동일하게 생각했던 화가이기도 했다. 특히 바그너에 심취한 반 고흐는 고갱과 함께 음악과 미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자주 토론을 벌였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반 고흐의 논의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말라르메는 음악을 꿈에 비유하면서 색체, 주제, 인물 성격 같은 복잡한 법칙을 동시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예술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런 그림을 작곡과 동일시했던 드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색채의 조합과 음조의 화합을 같은 성질의 예술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나중에 등장할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미리 예견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p181음색을 색조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칸딘스키의 예술관은 서로 다른 예술의 기호가 절대적인 차원에서 통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더니즘의 이상을 구현한 것이다. 절대적인 소통에 대한 갈구야말로 오직 화폐가치로 교환 가능한 것만을 소통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자본주의 근대 사회에 대한 모더니즘 예술의 저항이었다고 하겠다. 자본주의 사회는 화폐가치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는 똑같아진다. 예술가의 퍼포먼스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나 화폐가치를 통해 '동일한 노동'으로 간주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근대 예술가의 불만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예술의 절대성을 인정해야 예술가의 존재 가치가 증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예술은 평준화되고 교환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했다. 이 절대성을 구성하는 것은 감각이었다.
p183사실 모더니즘의 핵심은 '공감각'이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례를 들자면,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는 표현이 바로 공감각적인 느낌을 담아낸 것이다. 공감각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의 감각을 통해 다른 감각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결코 하나의 통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별 감각이 모두 살아 있으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반 고흐가 그린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은 이런 예술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그림에서 사이프러스는 나무라는 형태적 측면을 벗어난다. 마치 추상화처럼 나무라는 개체성은 무의미해지고 색채와 선이 음조처럼 화음을 맞추어서 너울 거린다.
p193반 고흐가 귓불을 자르기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증언자는 고갱뿐이다. 그러나 고갱의 진술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의견은 분분하다. 심지어 어떤 미술사학자는 반 고흐의 귀를 다치게 한 장본인이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내놓아서 파란을 일으켰다. 서로 싸우던 중에 위협을 느낀 고갱이 펜싱용 칼을 던져서 반 고흐의 귀에 맞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는 없다. 그만큼 이 사건은 증인도 없고 진술도 허술한 상태로 미술사에서 해명되기 어려운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아를의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이 사건은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p192반 고흐가 자연에 있는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고갱은 현실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날씨 때문에 부득이하게 실내에서 작업을 해야 했기에 고갱의 설득이 반 고흐에게 먹혀 들어갔다. 물론 마지못해 동의는 했지만 반 고흐가 행복했을 리는 없었다.
p215비록 반 고흐와 비극적으로 결별하긴 했지만, 아를을 떠나서 다시 퐁타방으로 가면서 고갱은 자신의 길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를에 그가 갈망했던 원시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찾을 수 없는 대상을 찾아서 그가 타이티로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상징의 세계에서 그가 찾아 헤매었던 예술의 광경이 비로소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p217생 레미에서 일 년을 머문 뒤에 반 고흐는 오베르로 거처를 옮겼다. 생 레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피사로에게 가고 싶었다. 세잔과 고갱을 키워낸 '아버지'가 피사로였으니, 아마 반 고흐도 피사로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동생 테오는 빈센트의 의향을 피사로에게 전했고, 피사로는 가셰를 만나서 상의해보라고 제의했다.피사로는 반 고흐 못지않게 마음이 불안했던 세잔에게도 의사 가셰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당시의 아방가르드 예술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셰의 모습에서 반 고흐는 "형제와 같은 완벽한 우정"을 발견한 것 같다고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밝혔다. 심지어 가셰와 자신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사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아를의 여인들]을 보고 흥미를 느낀 가셰의 요청으로 반 고흐는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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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공상과학 소설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사회상을 철저하게 풍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약 80여 전에 쓰인 작품이라기 하기엔 너무나 현실성이 있어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과 지금의 현실에도 반영시킬 수 있는 공상과학소설이자 풍자소설이라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던 소설과 영화가 있다. 소설은 얼마 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1984>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이다. 두 소설과 영화는 맥락을 같이 한다. 하나의 체제, 사회가 있고, 이것은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철저한 규칙과 통제하에 운영되어 진다. 처음에 그런 사회와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힘이 들고 많은 갈등이 있었겠지만 어느덧 정착이 되고 세대가 거듭될 수록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집에서 채집용 큰 통에 달팽이를 키운다. 큰 달팽이들은 다른 곳에 있다가 왔으니 변화에 대해 감지를 했을 것이다. 얼마 후 달팽이들의 알에서 새끼 달팽이가 태어났다. 아마도 그 새끼 달팽이에게는 그 좁은 공간이 하나의 세계로 인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끔 나타는 어떤 물체(사람의 손)은 하나의 신이 되어 먹이를 주고 물을 뿌려주는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누군가에 의해 사람들의 삶은 통제되어 진다. 어쩌면 태어날때부터...

<멋진 신세계>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계급이 정해집니다. 마치 음식을 만들 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듯이 각 계급에 따라 투여되는 것이 다르고 이에 따라 몸집의 크기에서 부터 지적역량에 이르기까지 다르게 태어납니다. 엡실론 계급, 감마 계급, 델타 계급, 알파 계급이 이렇게 다른 계급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조건반사적 교육이 진행되어 집니다. 뜨거운 곳에서 일하게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뜨거움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받는다. 이는 나치 시대의 우생학과 어린 아이에게 세뇌교육을 시키는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1984>에서는 곳곳에 붙어 있는 텔레스크린과 곳곳에 숨겨지 있는 사상경찰관에 의해 사람들이 철저하게 감시 당한다. <설국열차>에서도 열차의 뒷칸으로 갈수록 계급이 낮아집니다. 그리고 바퀴벌레로 만든 묵을 식량으로 삼고 있다.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철저하게 나뉘어진 모습, 그들만의 규칙과 통제로  나뉘어진 계급대로 영원히 그 사회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강자, 지배자들의 논리가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베어난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문화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를 통제하고 개인의 주체성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얼마 전에 읽은 <커피는 원래 쓰다>에서 아랍에서 처음 유행한 커피하우스는 술탄 왕조에 의해 금지되었었다고 한다. 이유는 사람들이 그곳에 보여서 사회, 정치이야기를 하고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정치개혁에 대한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커피가 사람들을 생각하게 각성하게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 강자와 지배자들에게 가장 큰 적은 약자와 피지배자들이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그것을 바꾸어보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처음 들어온 계기 중에 하나가 전두환 시절에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정치계에서 큰 이슈를 덮기 위해서 연예인 관련 대형 스캔들을 터뜨린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려고 할 때, 자극적이고 생각하지 않고 관심을 확 끌 수 있는 일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대로 그곳에 매몰되어 버리는 법이다. TV같은 경우도 어쩔 때는 멍하니 보고 있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아무런 개인의 노력없이 시선을 고정해서 생각을 없게 만들기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 사이사이에 흘러나오는 광고는 나도 모르게 세뇌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지만, 절대로 획일성에 빠져버려서는 안된다. 한 예로 명품 가방을 만드는 나라가 아닌 소비하는 나라인 우리나라는 수십, 수백만원에 이르는 가방이 국민 가방이라는 말이 돌기도 한다. 예전에 배낭 여행할 때 프랑스의 루이비통 매장을 가본 적이 있다. 그런데 공사를 한다는 안내가 한국말로 씌어져있고 직원 중 상당 수가 한국인이거나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명품 가방 소비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이들이 걸어 놓은 덫에 생각하지도 않고 빠지지를 않기를 바란다. 여러 이유를 고려해서 선택은 할 수 있지만, 항상 '생각'이라는 필터는 항상 한 번쯤은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멋진 신세계>로 돌아가 본다. 작품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시험관에서 태어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이들의 세계로 온 야만인이 '멋진 신세계'의 총통이 나눈 대화가 등장한다.


p305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스타파 몬드는 어깨를 추슬렀다.

"마음대로 하게"하고 그가 말했다.


작중 야만인은 불편함을 원한다. 유토피아를 가장하는 이들이 사는 디스토피아에서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있을 경우에는 '소마'라는 알 약을 먹는다. 어렸을 때 드래곤볼 만화를 보면 선두콩 한 알만 먹어도 일주일이 배고프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과연 정말 이런 세상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음식이라는 것은 힘든 노동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해줄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과 정성을 담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약속을 잡을 때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한다. 여기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저 허기를 달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유대를 확인해고 함께 살아가는 힘을 서로에게 불어넣어주는 것들이다.


건축가 승효상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전원주택을 원하면서 불편함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전원주택의 경우 잠깐 밖에 나와 신발을 신고 걸을 수도 있는 법이고, 겨울에 따뜻하게 하고 반팔을 입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내복을 입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원 주택에 살면서 아파트의 혜택도 원한다. 


우리는 어쩌면 사회와 체제가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도 모른다. 그저 아무런 노력없이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매체가 아닌 자신이 직접 노력을 기울이는 창작활동과 독서활동 거기에 이은 사람들과의 대화와 토론이 필요한 듯 하다. 어떤 갈등을 겪게 될 경우에는 불편하더라도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잘못됐다고 판단될때까지는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 두 아들을 키운다. '뭐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한 번 말하고 나서 아이들이 정말 항상 다 고치고 내 말을 따른 다면 어쩌면 그게 더 나에게 걱정일지 모른다. 내 아이들이 후에 커서 자신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하듯이 나 역시 이 사회에 매몰되어 있지 않으면서 나만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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