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교수의 책으로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을 읽고 나서, 이번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읽게 되었다.
서로 다른 세 책은 저자의 하나의 생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사실 중복이 되는 내용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또한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강조하고 싶은 것을 제시하고 나서,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살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번 책은 제목 그대로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 대해서 논하는 책인데 주제 자체가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이기에 실제로 어떻게 하면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갈증이 쉽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일상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번 쯤 지금 사는 삶을 관심있게 살펴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나 역시 그동안 내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이 내가 걷고 있는 방향이 맞는 것인지 확인해보고,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기 위한 생각과 결정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수 없이 다짐하고, 아침마다 앞으로의 길을 상기시키고,
이렇게 틈이 날때 마다 글을 반복적으로 남기면서 그 전환점에 다가가기를 희망한다.
#1.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
장자의 제물론 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승 남백자기에게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성자유가 어느 날 자기 스승을 보니 앉은뱅이 책상에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선생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르냐고 스승이 물으니, 제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실연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어깨가 축 쳐지죠. 짝을 잃은 사람은 불 꺼진 재나 마른 나무처럼 풀기가 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다 타고난 재는 불이 꺼진 후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가 손만 대면 으스러지지요. 안성자유가 봤을 때 예전의 스승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실연당한 살마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에 스승 남백자기가 제자를 칭찬하면서 말합니다.
"안성자유야, 너 참 똑똑해졌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고는 분명한 어조로 결론을 맺듯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 라고 합니다.
스승은 그 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장례 지냅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육체를 포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바로,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 삶의 자세, 정신적인 측면에서 과거와 단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잘못된 삶의 자세를 조금씩 고쳐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새로 태어나듯이, 마치 빅뱅이 일어나듯이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조금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조금씩 개선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간절함의 부족 때문인지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장자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 역시 스스로 장례를 지내야 했습니다.
어쩌면 스승 백남자기 처럼 완전하게 스스로를 죽이지는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분명한 느낌은 받았습니다. 분명 이전과는 달라질 겁니다.
서른 여섯 살의 이 날은 분명 제 삶의 중요한 한 지점이 될 것입니다.
#2.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나'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확인하면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입니다.
일상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일상에 매몰되는 순간, 생각이 멈춰버립니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생각에 대한 생각이 중요한 지점입니다. '생각에 대한 생각'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왜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조금 더 효율적일 수 있는지? 내가 하는 행동으로 인해 내 삶과 내 가족과 타인들의 삶에 영향이 어떻게 미치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생각을 할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입니다.
그 생각 중에서 몇 가지 질문을 우선 순위로 두고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될 거 같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이 두 질문을 글로 적고 있는데 가슴이 너무나도 두근거립니다.
평범한 두 질문일지 모르지만, 분명 이 질문을 매일매일 곱씹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제 조금 더 저와의 대화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이 변환점의 시기라는 게 계속해서 느껴집니다.
이 가슴 뛰는 시기를 절대 아깝게 놓치지는 않겠습니다.
P242
장자의 제물론 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노옵니다.
스승 남백자기에게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성자유가 어느 날 자기 스승을 보니 앚은뱅이 책상에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선생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르냐고 스승이 물으니, 제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실연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어깨가 축 처지죠. 짝을 잃은 사람은 불 꺼진 재나 마른 나무처럼 풀기가 없이 무너져내립니다. 다 타고난 재는 불이 꺼진 후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가 손만 대면 으스러지지요. 안성자유가 봤을 때 예전의 스승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실연당한 살마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에 스승 남백자기가 제자를 칭찬하면서 말합니다.
"안성자유야, 너 참 똑똑해졌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고는 분명한 어조로 결론을 맺듯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P67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 구레함 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결정하고 지배할 더 높고 큰 단계에서의 결정을 감행할 수 있는 높이가 바로 철학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P73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만들어진 판 안에서 다른 것들에 대응하는 형태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죠.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인 사고입니다. 전략적으로 형성된 판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종속적인 변수들을 다루면서 하는 행동들을 전솔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킬 것이냐 말 것이냐, 전쟁을 일으켜서 국제 질서나 주변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로운 구도로 끌고 갈것이냐를 생각한다면 전략적인 사고일 테고, 전쟁이 벌어진 상황 안에서 상대방에 어떻게 대응하며 어떻게 공격할 것이냐, 어떻게 방어할 것이냐 혹은 병력을 어떻게 전개시킬 것이냐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전술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술은 전략의 제약 속에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전술이 전략 보다 높거나 넓을 수는 없습니다. 전술가가 전략가를 이길 수는 없죠. 대개의 전술가들은 전략가들이 펼쳐놓은 판 위에서 놀 뿐 입니다. 따라서 전술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신이 전략가의 손바닥 안에서 있을 뿐이라는 사실조차도 알아채기 힘들어져버립니다.
P76
철학적인 높이로 상승한 단계의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바로 전면적인 부정을 이야기합니다. 전면적인 부정은 새로운 생성을 기약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생성이라는 것은 바로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결정하지 못하는 한 항상 종속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종속적인 삶을 사는 한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의 삶을 꾸리거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효과적으로 관리해나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P93
"[장자]를 감명 깊게 읽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장자]에 감명을 받고 나서 기껏 한다는 생각이 장자처럼 살아보는 일인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장자는 절대 누구처럼 산 사람이 아니네."
P92
문제는 그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겪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특히 철학 수입국인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예민한 경각심을 가지고 숙고해야할 주제입니다.
P121
무엇인가 새로 만들면서 이루는 일정한 범위를 '장르'라고 합니다. 선진국은 바로 이 '장르'를 만듭니다. 저는 어떤 나라가 문화적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바로 장르를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한다고 봅니다. 장르를 만드는 나라는 문화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장르를 만들지 못하고 수입하는 나라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습니다. 장르를 만들면 그 장르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고, 경제적인 성취가 힘을 형성하여 앞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르-선도력-선진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장르를 개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꿈' 입니다. 고유한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회의 선진성 여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각자 개인들은 꿈이 있느냐 없느냐로 독립적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유한 자신으로 고품격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고 싶다면 바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꿈이 있는 사람은 선도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살마은 종속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또 물어보십시오. "나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가?"
ㅇㄹ
P125
대답에서는 지식이나 이론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뱉어내는지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원래 모습'은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입니다. 그래서 대답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주로 과거를 따지는 일에 더 몰두합니다. 또 '원래 모습'을 중시하다 보니 그것을 강력한 기준으로 사용하여, 그 '원래 모습'에 맞으면 참으로 분류하고 맞지 않으면 거짓으로 분류합니다. 당연히 진위가 가장 중요해지지요. 그래서 질문보다 대답을 위주로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주로 과거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버리거나 진위 논쟁으로 빠져버립니다.
하지만 질문은 이와 다릅니다. 질문이 일어나려면 우선 궁금증과 호기심이 작동해야만 합니다.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지요. 자신에게만 있는 이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 이것을 질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고유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발휘하는 형태가 바로 질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하고, 질문은 미래로 열리게 합니다.
P153
철학은 이미 있는 철학적 지식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철학적 이론이 생산될 때 사용되었던 그 높이의 시선에 함께 서보는 일입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고도의 지성적 시선으로 사유 활동을 한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놓은 철학적 사유 활동의 결과들을 단순히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해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배우는 이유는 단지 그 과정을 통해서 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철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철학으로 아른 것은 마치 박물고나에 가서 유물들 하나하나를 보고 감탄하는 것에 멈추는 일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성적 수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물들 하나하나를 보고 감탄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넘어서서 그 유물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인간의 동선, 문화적 흐름 등을 읽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죠.
P159
철학을 공부하는 일은 누군가의 전도사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탈레스나 베이컨의 예에서 보았듯이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정해진 것들과 결별하는 독립적인 자세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고, 문명의 깃발이 되는 일이고, 인간에게 새 빛을 끌어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앞선 것을 숙지하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구체적 현실로서의 시대라는 터전에서 독립적인 사유를 발동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해버리고 제한해버리는 확정적인 이론보다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시대의 구체성에 집중할 때, 시선은 비로소 앞을 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앞선 철학자들은 모두 다 이렇게 했습니다.
P171
사실상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분석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분석을 할 때 사용되는 논리나 근거는 어디서 온 것인가요? 지금 이미 있는 것들입니까? 아니면 지금은 없지만 다가올 것들입니까? 분명히 이미 있는 것들을 사용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미 있는 논리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따지거나 분석하면 결과가 정확하게 나올까요? 현재의 틀로 미래를 재단하면 미래가 제대로 열릴까요? 그래서 꿈을 꾸는 사람이 현재의 문법에 갇혀 있으면 꿈은 항상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꿈꾸는 일을 차라리 멈춰버리는 얌전한 사람이 되어버리죠. 안전을 추구하기만 하고, 낙오되지 않으려고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꿈은 불가능의 냄새가 더 강하게 나야 진정한 꿈일 가능성이 큽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꿈입니다. 가능해 보인느 것은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괜찮은 계획일 뿐입니다.
P173
어느 조직이든지 그 조직이 붕괴하기 전에는 공통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바로 그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등의 비평만 하는 일이 점점 일상화 되는 것입니다. 바로 구성원들의 이탈 현상입니다. 구성원들이 참여자나 행위자로 혹은 책임자로 존재하지 않고 제3자처럼 존재합니다. 구성원들이 구경꾼으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구성원들 가운데 점점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진다면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조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에서든지 일류 비평가들과 일류 분석가들이 넘쳐납니다. 제3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꿈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책임성 있는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비평이나 분석에 빠지는 제3자적 태도로만 존재하는 삶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데에는 취약하기 마련입니다.
P174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나'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확인하면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입니다.
P187
소피아라는 것은 로고스적인 지적 훈련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생각의 힘,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지요.
P191
'독립'은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불편해지면서 거기로부터 벗어나려고 용기를 발휘하여 얻은 선물입니다. 여기서 불편해진다는 것은 이미 있는 기존의 생각들이 더 이상 나의 삶이나 새로운 문명을 책임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신과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적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고독을 자초하는 시도를 해야만 합니다.
P196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일들은 이렇게 등장합니다. 이는 독립적 의사 결정이기도 합니다. 창조란 새로운 흐름을 포착한 상태에서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하여 극한으로 몰입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기존 체제에 갇혀서 그 구조를 계속 반복하거나 재생하는 역할만 하기 때문에 기존 체제 안에 새로움이 나타나도 그것을 새로움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죠.
P212
관찰을 유지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집요함이고 몰입입니다. 인생의 다양한 방면에서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휘하여 진실하게 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집요한 관찰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몰입한다는 것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아주 높은 단계에 도달해 있음을 증명합니다.
P215
독립적 주체로 선다고 했을 때 그 독립은 강제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고독도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즉 기존의 지식과 이론에 근거해서 대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것들과 결별하고 낯설어지는 실험을 감행한다는 뜻입니다. 철학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P221
버드런트 러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적 모험심은 어른보다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훨씬 흔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고, 가상 놀이와 공상의 시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희귀해지는 까닭은 모든 교육 과정이 그것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고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것, 파괴적이고 가공할 만한 것이다. 사고는 특권과 기성제도와 편안한 습관을 무자비하게 다룬다. 사고는 무정부적이고 법률로 제어할 수 없으며 권위를 중시하지 않고 여러 세계를 거치면서 정교화된 지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고는 지옥을 들여다보고 지옥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사고는 인간을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에 둘러싸여 있는 희미한 알갱이로 본다. 그러나 사고는 마치 자신이 만물의 영장인 듯이 확고하고 당당하게 처신한다. 사고는 거대하고 재빠르고 자유로우며, 세계를 비추는 빛이며, 인간의 가장 큰 자랑 거리다.
P224
나의 생각이 합리적인가 아닌가를 따진다고 할 때, 그 합리성을 증명하는 근거들은 이미 있는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의 합리성을 검증하려는 태도가 이미 있는 체제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게도 합니다. 왜 생각이 꼭 합리적이어야만 하나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 기존에 있는 모든 합리성으로부터 이탈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입니다. 왜 우리가 하는 생각들이 항상 합리성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나요? 완전히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가 날 수도 있고 거칠 수도 있습니다. 모가 나고 거친 그 길을 왜 가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그 길이 내 길이면 안 되는 것인가요?
합리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꿈을 꾸십시오. 꿈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있는 관점들로 명료하게 해석되어 합리적으로 보이거나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꿈이 아닙니다. 착실한 계획일 뿐이지요. 꿈은 생래적으로 거칠고 비합리적이며 돌출적입니다.
P225
탁월함을 추구하고 소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적 인간은 자신을 기존에 있는 것으로부터 격리시켜 고독하게 놓아둡니다. 그러면 그는 어느 순간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단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기존의 해석 방식을 수요하기보다 새로운 방식을 만들려는 용기를 발휘한다면 합리성 여부를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없겠죠. 그보다는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훨씬 더 많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과하게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비합리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한테 등장하는 새로운 생각을 기존에 있는 합리적 조건 속에서 해석하려고만 하는 것은 너무 점잖 떠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제가 러셀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철학적 사고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것, 파괴적이고 가공할 만한 것이라는 그의 웅변을 말입니다. 철학적 사고는 특권과 기성제도와 편안한 습관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차분한 균형 상태를 즐기기보다는 아주 불안한 불균형을 과감하게 맞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불균형을 생산해야 합니다.
P238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일은 이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야만 가능해집니다. 이것을 저는 '지적인 부지런함'이라고 표현합니다.
계속 강조하듯이 대답에만 빠지는 일도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품고 있는 지식과 이론을 요구에 따라 그냥 뱉어내기만 하는 일은 편하지요. 이에 비해 질문은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새로 등장하는 조짐이나 신호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로 즉각 반응하는 일도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좋다' 거나 '나쁘다'라는 판단은 이미 내면화된 가치관을 근거로 해서 거기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만 따지는 일입니다. 이때는 숙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미 있는 가치관이 등장하여 즉각적인 판단을 해주지 않습니까? 편리하지요. 하지만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편한 길을 애써 피하고, 그 조짐이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 부단히 숙고합니다. 힘들고 불안하지요. 이 힘들고 불안한 내면을 극복하고 계속 질문을 해대는 일은 지적으로 부지런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합니다.
P242
장자의 제물론 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노옵니다.
스승 남백자기에게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성자유가 어느 날 자기 스승을 보니 앚은뱅이 책상에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선생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르냐고 스승이 물으니, 제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실연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어깨가 축 처지죠. 짝을 잃은 사람은 불 꺼진 재나 마른 나무처럼 풀기가 없이 무너져내립니다. 다 타고난 재는 불이 꺼진 후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가 손만 대면 으스러지지요. 안성자유가 봤을 때 예전의 스승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실연당한 살마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에 스승 남백자기가 제자를 칭찬하면서 말합니다.
"안성자유야, 너 참 똑똑해졌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고는 분명한 어조로 결론을 맺듯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P248
'종속적 주체'와 '능동적 주체'를 말한 서양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떠오릅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근대 사회는 주로 종속적 주체들로 구성되었지만,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능동적 주체들로 구성된 삶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푸코는 근대적인 인간을 왜 종속적인 주체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먼저 '주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활동을 하거나 판단을 한 때 자기 자신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자기가 주도적인 결정과 행동을 한다고 여기는 자의식이 있는 상태의 사람을 주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보통은 자기로부터 생산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보편적인 생각을 각자 내면화해서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자신이 활동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판단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주체이지만, 그 주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 자신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고 외부에 존재하는 보편적 의식을 내면화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종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속적 주체는 비록 주체는 주체이지만 아직 피지배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갖춘 주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종속적 주체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나 이념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이지,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독립적으로 건설하고 실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푸코는 이러한 종속적 주체성을 벗어나서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능동적 주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기만이 자신의 주인이 된 주체를 말합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판단과 행위가 모두 자기의 결정으로부터 나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주체, 이 사람이 능동적 주체입니다. 종속적 주체는 내면화된 이념이나 가치가 주인이 되어 있기에 그것들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해져서 대답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능동적 주체는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근본적인 토대인 궁금증과 호기심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능동적 주체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로 등장합니다.
P261
태연자약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태연자약에서 자약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만 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태연은 아주 크고 넓고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태연한 사람은 자약하고, 자약한 사람은 아주 태연하지요. 태연자약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자신만의 흐름이나 결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모습입니다. 태연자약한 후타바야마의 '기세 없는 기세'에 눌려서 상대가 자멸하는 것이나, 나무 닭의 '온전한 덕'에 눌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버리는 것은 매우 닮아 있습니다.
P271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선례'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이 큰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선례가 없거나 지시 내용이 없으면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하는 힘이 약해져버렸습니다. 저도 직장에서 무슨 일을 시도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선례'와 '형평성' 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이놈의 '선례'와 '형평성'만 찾다가 모두 함께 말라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선례를 찾기만 하지 선례를 세우려는 도전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자기는 기존 논리를 넘어서서 창조하고 기존 논리를 압도하는 사람으로 서지 못하고, 계속 분석하고 비판하고 해석하는 사람으로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술 영역에서도 비판과 해석만이 넘치고 창의적 도전이 취약한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합니다.
P298
행위 다음의 절차를 궁금해하기보다는 직접 무엇인가를 하십시오. 실행하지 않고 궁리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저 멀리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P302
혁명이 완수되지 못하는 이유는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즉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성숙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입니다.
P309
순자 - 권학 편에 나오는 글을 보겠습니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거기에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
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물고기들이 생겨나고
선을 쌓고 덕을 이루면, 신명이 저절로 얻어져서 성인의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바람과 비는 거기에서 저절로 생겨납니다. 우리는 그져 흙을 쌓아 산을 이루기만 하면 됩니다. 많이 쌓으면 큰 산을 이루고, 적게 쌓으면 작은 산을 이룹니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는 일은 하지 않고 비와 바람을 얻기만 기대하면 안 되지요.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마치 행운이나 선물처럼 비와 바람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람과 비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저 흙을 쌓고 산을 이루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선물이나 행운처럼 물고기들이 생겨납니다. 이렇듯 탁월함을 추구하고 덕을 이루면 마치 행운이나 선물처럼 신명한 통찰력이 생기고 성인의 마음이 따라서 갖춰지게 되지요. 우리가 학문을 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일을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해나가면 통찰력이나 성인 수준의 마음을 갖는 행운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생각의 결과이다. 종이, 컴퓨터, 법, 자동차, 철학 이 모든 것은 생각의 결과이다. 누군가가 생각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것은 생각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공부/학습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가 이전에 만들어놓은 생각의 결과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습득하는 과정이다. 바로 훈고학적인 방법이다. 이미 누군가가 생각/사유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낸 결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의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결과만을 이해-분석-습득하려고만 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진전이 없다. 나는 그저 우리 속에 하나일 뿐이다. 독립적인 나는 없다.
수백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저 읽었으면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을 읽은 것에 불과하고, 많은 교육을 받았어도 그저 누군가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책을 읽는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써야 하는 욕망이 있고, 강연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남들 앞에서 강연을 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다. 언제까지 읽기만,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 속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독립적인 것이 없다. 그런데 임계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 남들한테 배우는 것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낸 자신만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유, 자약, 독립할 수 있는가?
선진국이란 선진(先進) 즉 먼저 나아가는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철학적으로 먼저 나아감을 의미한다.
선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선도력이 필요하다.
선도력은 새로운 장르와 컨셉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장르는 무엇으로 만들 수 있을까? 상상력과 창의력을 통해서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 질 수 있다.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발휘되는 것이다. 이제 발휘하자! 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조건이 만족이 될 때 스스로 발휘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창의력이 발휘가 되는가? 독립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독립(獨立)이란 다른 것에 예속되거나 의존하지 아니하는 상태이며 독자적으로 존재함을 뜻한다.
독립적인 주체가 되기 위한 원천은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집요함이 있어야 한다. 그 집요함을 통해서 관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관찰이라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예를 들어 물병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물병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시선이 물병에 대해서 자세히 다가가지 않고 그 전에 머리로 판단(기존의 지식)하고 물통을 인식한다. 즉 시선이 물병까지 닿지 않고 시선이 닿기 전에 이성이 먼저 판단함으로써 보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시선을 물병에 닿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으로도 들어가 보고 아주 세세히 집요하게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관찰이다.
선진 ← 선도력 ← 장르/컨셉 ← 상상력/창의력 ← 독립적 인간 ← 호기심, 궁금증 → 집요함 → 관찰 → 독립적 인간
세계를 봐야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닌 보여지는 대로 봐야 한다.
세상을 봐야하는 대로 보아야 하는가? 보여지는 대로 봐야 하는가?
봐야하는 대로 본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대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이 기존에 가진 지식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 바로 봐야하는 대로 본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앞으로 발생하는 어떤 것은 조짐은 보이지만 그 방향과 결과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 기존의 지식과 방식을 적용하면 분명 잘못되고 이상하고 어긋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세상을 현재 그대로 보여지는 대로 보아야 한다. 기존의 신념과 공부한 내용에 갇혀서는 안 된다.
타조를 발견하면, 일단 타조를 쫓기 시작합니다. 근데 쫓는 방법이 있다고 해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계속 쫓아간다고 합니다. 타조 이 녀석이 지겨울 정도로 말이죠. 그렇게 계속해서 쫓다 보면 어느 순간에 타조가 자기를 쫓아오는 사냥꾼과 자기 사이에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대가 자기 머리를 처박는답니다. 그러면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타조를 그냥 주워 오면 되는 거예요. 이게 타조 사냥이예요. (p242)
이 부분을 처음 읽을 때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조가 바로 나라면? 라는 생각을 하니 정말 섬뜩했습니다. 스스로 머리를 처박을 때까지의 수많은 고민과 공포 그리고 결국 땅에 쳐 박아버리는 절망이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나 사이에도 이렇게 일정한 긴장이 존재합니다. 이 긴장을 어떻게 관리하는가가 삶의 실질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죠. 어떻게 해야 타조처럼 안타까운 일을 피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따라오는 이를 향해 뒤돌아 당당히 응시할 수 있을까요?
■ 온전한 '나'로 거듭나기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생각을 하거나 결정을 내릴 때 이념이나 가치관 혹은 신념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이념, 신념, 가치관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어쩌면 대부분은 살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일 겁니다. 그럼 그런 사회와 문화 속에서 갈등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요?
저는 이럴 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콩도르세의 말을 떠올려 보곤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 계속 고집할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것이 되었을까?"
우리는 처음에 모두가 이렇게 일정한 틀에 얽매여 있지 않는 원시성을 지녔습니다. 이념과 신념과 가치관으로 얽매여 있는 틀을 과감히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온전한 '나'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로 존재한다는 말은 내가 '우리'가 되기 이전의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충동, 힘, 의지 활동성, 비정형성의 감각 등이 주도권을 가지고 행위 과정에서 최초의 동기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성적이기 이전에 내적 충동성에서 출발한다는 뜻이지요. 나의 내적인 충동성에서 출발한다는 뜻이지요. 나의 내적인 충동성이 외적이고 이성적인 계산법으로 제어되기 이전의 감각에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p81)
■ 앎을 넘어서는 실천할 수 있는 주체력
왜 우리는 자유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자유롭지 못할까?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나는데도 왜 우리는 더 유연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더 행복하지 않을까? 이제 질문에 답을 해 봅시다. 우리한테는 지식을 지혜로 숙성시키거나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유연함, 행복, 창의성 등과 같은 인격적 단계로 밀어 올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지식이 지혜로 넘어가고, 이미 있는 경험의 기억이나 지적 체계들이 삶의 동심원을 더 활발하게 펼쳐 줄 수 있는 활동의 힘이 갖춰져야 합니다.체계가 아니라 힘입니다! 그 힘을 저는 '주체력'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인문력'이라고 하면 너무 억지일까요? (p163)
독서를 하는 것은 일종의 간접경험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단순한 앎의 단계죠. 독서의 진정한 의미는 읽은 후에야 나타납니다. 책을 읽고 답사를 하고, 미술 전시를 보고, 관련된 체험도 해보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매개로도 이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바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타자를 이해하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결국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서 앞을 먼저 내다 볼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 육체성의 확인
몸을 움직여서 한계를 경험할 때라야, 자기를 극한의 경계선에 서 보게 할 때라야, 자기의 의식 속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성큼 드러납니다. 자기가 자기를 꽉 채우는 이 경험,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자신으로만 남는 일입니다. 자기를 몸으로 느낄 때 자신에게는 가장 현실적입니다. 운동은 단순히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대면하는 가장 극적인 장치입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자기 몸에서 분비되어 자기 코로 다시 돌아오는 땀 냄새, 심장을 터지게 할 것 같은 박동, 모두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자기에게 보여주는 극적인 증거들입니다. 운동하면서 보이는 자기보다 더 극적인 자기가 있을까요? (p267)
어떤 이들은 정신적인 활동을 육체적인 활동의 우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육체는 정신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독립적 주체가 되는 일은 육체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은 타인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구별이 됩니다. 이렇게 육체성을 근간으로 한 독립적주체로서의 온전한 '나'로 거듭나는 사람이 스스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Question) 이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봅니다. 타조가 잡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스스로 온전한 '나'로 거듭나라, 앎을 넘어서 실천할 수 있는 주체력으로 통찰력을 가져라, 자신의 육체성 회복을 통해 독립적 주체로 거듭나자. 어떻게 보면 다 뻔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문학을 주제로 책을 내놓는 많은 이들의 책 속에서 등장하는 주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시 확인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이렇게 하지 못하는 제가 너무나 아쉬울 뿐입니다. 하지만 작심삼일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도달할 거라 생각합니다. 특별한 방법은 없는 거 같습니다. 묵묵히 뻔한 이야기를 제 이야기로 만드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