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보통 혼자 읽는다. 누군가의 추천도서를 읽을 수도 있고, 베스트셀러를 선택해서 읽을 수도 있고, 이미 유명한 고전에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가고 그렇게 조금씩 책의 힘이 나도 모르게 쌓여 간다. 하지만 이 힘이 반드시 긍정적인 힘만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처럼 책을 통해 좋지않은 힘에 눌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지금 내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모르는데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흔이 될 때 까지는 다독(多讀)을 할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정독(精讀, 뜻을 새겨 가며 자세히 읽음), 숙독(熟讀, 글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차분차분하게 하나하나 읽음) 강조하지만 우선 내용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재료를 가질 수 있도록 마흔이 될 때까지는 차곡차곡 구석구석 쌓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분야를 이어줄 수 있고 한 분야에 대해 깊이 파고 들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항상 고민하는 것들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정량적인 측면에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만약 제대로 된 독서를 하지 않고 그저 활자를 훑는 독서라면 그 소중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거나 다름이 없다는 점이다. 책을 읽다보면 보통 흐름을 타게 된다. 일종의 Chain Reading을 하게 된다. 하나의 책은 자연스럽게 다른 책으로 연결되어 진다. 그리고 이런 것은 보통 비슷한 분야이기가 쉽다. 나는 유독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을 좋아한다. 그래서 읽다보면 너무 소설에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작년에도 연간 읽은 책의 절반 이상이 소설이었다. 이것이 두번째 고민이다. 하나의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다방면의 분야를 두루 살펴보는 것이 좋은가?
어떻 책에서 읽기로는 자신의 분야에 대한 책을 100권 이상 읽으면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에는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한다. 비록 실천은 하지 못했지만 대학에서 어떤 학과를 전공한 것 보다 관련 분야의 양서를 찾아서 100권 아니 30권 정도만 신경써서 읽는다면 어느 정도 개인적인 논리를 세울 정도의 지식은 쌓아질 것이라 생각된다. 분명 그 뒤에는 관련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논리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함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깊어지면 탁석산의 <자기만의 철학>에서 말하는 경험적 철학자의 범주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이젠, 함께 읽기다> 로 돌아가보자.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이 책에서는 제목에서 언급하다시피 혼자 보다는 함께 읽자고 권하고 있다. 나 역시 이 말에는 공감한다. 어쩔 수 없이 핑계일 수밖에 없지만 항상 시간 탓으로 돌리면서 실천은 잘하고 있지는 못하다. 작년에 처음으로 짧은 기간이지만 독서모임을 가졌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우선 사람들마다 선호하는 분야가 서로 다르다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양서를 추천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똑같은 책을 가지고 독서모임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서로 의견을 교환하다 보면 인상깊었던 부분이라던가 책을 통해서 느꼈던 부분이 거의 대부분 상이하다.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촉수를 가지고 책에 접근하다보니 책에서 빨아들이는 부분도 역시 달랐다. '아! 이런 부분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내가 그저 스쳐지나간 문장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장이었구나.' 이렇게 혼자 읽을 때는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모임 또한 공통의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모임을 찾아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다 보니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익숙해진다. 이 또한 놀라운 경험이다. 분명 책을 똑같이 읽었으나 그것을 글과 말로써 표현해내는 것 또한 중요한 데 이런 면에서도 독서토론은 분명히 효과적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독서 토론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다름을 인정하면서 접근해가는 방식과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서 배려하는 점도 그것을 통해서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과 핑계로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지만, 추후에 모임의 구성원으로 혹은 모임을 만들어서 진행을 하게 된다면 이 책을 한 번쯤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소개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이 책에서는 다른 양서들의 소개도 잊지 않으며 책에 대한 책으로도 또한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에 줄을 그어가면서 읽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에 줄이 그어졌다. 늦지 않은 시일에 함께 읽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봐야 겠다.
언제부터, 어떻게 자기 생각을 뺏겼는지조차 모르고 매일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에게 어떤 책을 권하고 어떤 영활르 추천해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다.
p17
문제도 답도 자기 안에 있다. 주체적 사고와 선택에 이르기 위해 우린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한다. 매일 밀려드는 풍랑에도 의연히 노를 젓기 위해, 주체적으로 책과 관계 맺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나만의 책 읽기를 시작해보자. 내 수준에 맞는 책을 스스로 고르고 다음 책으로 걸어갈 힘만 있다면, 어떤 책이든 오롯이 남을 테며 오래 머무르리라.
p19
책을 읽은 뒤 최악의 독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최악의 독자라는 것은 약탈을 일삼는 도적과 같다. 결국 그들은 무엇인가 값나가는 것은 없는지 혈안이 되어 책의 이곳저곳을 적당히 훑다가 이윽고 책 속에서 자기 상황에 맞는 것, 지금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것, 도움이 될 법한 도구를 끄집어내어 훔친다. 그리고 그들이 훔친 것만을 마치 책의 모든 내용인 양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삼가지 않는다. 결국 그 책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물론, 그 책 전체와 저자를 더럽힌다.
- 니체의 말
p23
돌아오는 길, 독서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누군가의 서가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떠오른 질문.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책, 자기를 위로하고 지지하는 책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책들로 하나의 성을 쌓아가는 것은 '지적 영주'가 되는 쾌감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성에 갇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독재자가 될 수도 있으니 언제든지 서재 문을 열어둘 일이다. 골방독서가 아닌 광장독서로 나아가야 한다.
p26
골방독서에서 광장독서 나오고 싶은 이라면 누구나 환영이다. 읽고, 사유하고, 토론하라!
p28
김연수 작가는 말했다.
"작품을 쓰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한 명이라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쩔 수 없이 창조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독자의 입장인 것 같다."
p33 지금부터라도 답 없는 책 읽기, 저자 비판하기, 엉뚱한 질문하기를 즐겨보자. 책은 책장을 넘기는 오직 당신의 것이므로.
p35
왜 싫은지에 대한 이유는 밝히기 어렵지만 그냥 싫다는 배타적 태도, 그 냉소가 교실을 죽이고, 토론을 죽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한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라고
p36
전반적으로 책을 너무 안 읽고 단지 쓰는 기술만 배우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이 많은데 그것이야말로 소설이 뭔지 모르고 덤비는 어리석음이다. 독서가 반드시 소설책만 읽는 걸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을 쓴느 데에는 전방위적인 분야가 필요하다. 그러니 학실과 견문은 넓을수록 좋다. 독서를 무시하고 오직 감성만으로 소설을 쓰고자 하는 지망생을 간혹 만나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는 좀처럼 작품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가에게 필요한 인식이 넓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자기가 만든 벽에 갇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니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작가의 의식은 궁긍적으로 우주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벽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무경계의 경계, 그것이 곧 자유로운 창작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인식의 확대'를 위해, '작품의 진화'를 위해 균형 잡힌 독서가 필요하다.
p41 프랑스 교육철학자 콩도르세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라고,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니?"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p42
좋아하는 책을 넘어서기란 분명 힘든 일이다. 학문의 기초체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여러 영역을 오가기란 뼈를 깎는 고통일 터,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즐겁게' 소화할 수 있을까. 바로 다른 사람이 고른 책을 '함께'읽는 독서토론이 답이 될 수 있다.
평소 관심조차 없던 책을 의무적으로 읽어보는 것이다. "저도 참석할게요." 라는 한마디를 책임지기 위해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책으로 나아가는 숙제와도 같은 책 읽기,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책을 힘겹게 들고 나가서,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잘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청의 독서'. 이런 시간을 조금씩 경험하다 보면, 어느새 책장 한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낯선 책들의 목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언제, 어떻게 나았는지조차 모르게 편독이라는 고질병 또한 사라질 것이다.
p43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 감각으로 받아들인 것을 경계하라던 데카르트를 곱씹다 보면 홀로 읽은 책 또한 경계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이론을 읽기로 가져오면, 책이 주는 간접경험이 독자의 인식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성적 활동이 필요하다. 독자 스스로 생각하며 자기 존재성을 의식하는 과정이다.
유시민은 "독서란 저자와의 대화"라고 했다.
독서에는 비판의식과 능동성이 요구된다.
p45
문제는 공감력이 부족한 독자, 어떤 책을 보든 자기 문제가 아니면 몰입을 하지 못하는 경우다.
p46
인식의 한계, 공감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은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다 말한다.
p47
앞만 보며 달려온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귀도, 이야기에 공감할 심장도 고장난 지 오래였다.
p50
왕멍, <나는 학생이다.>
나는 배우는 것을 시종일관 멈춘 적이 없었고, 그 가치나 의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배움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의탁처이자 암흑 속의 횃불과 같았고 나의 양식이자 병을 막아주는 백신과 같았다. 배움이 있었기에 비관하지 않을 수 있었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미치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배움을 지속함으로써 나는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무위도식하며 세월을 허송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에게 배움은 타인에 의해 결코 박탈당하지 않는 유일한 권리였다.
p51
다른 생각을 접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경험적 독서로 가는 길, 바로 공독이다.
p59 개인주의는 여러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매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한국에서는 그런 의미의 개인주의가 뿌리 내리지 못했다. 남에 대해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다.
p71
독서토론의 가장 큰 목적은 책을 잘 읽는 것이다. 여기서 잘 읽는다는 의미는 '넓고 깊게'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두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반드시 함께 읽기, 즉 공독이 이뤄져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시야의 한계 때문이다.
프랑스의 수도사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는 <공부하는 삶>(은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학한 사람이 수많은 약점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혼자 힘으로 공부해서는 처음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일정한 단계에 도달한 집단에 합류할 경우, 독학한 사람은 그 집단의 다른 이들이 이미 지나온 단계들 중 하나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것과 그 집단의 현재 단계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각자 자신의 발달 단계를 냉정히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라도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역량을 판단해야 한다.
p80
배움의 공동체 숭례문학당은 '100권 읽고 토론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최소한 좋은 책 100권을 읽으면, 새로운 경지에 올라서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말을 꺼낸 내가 더 놀라곤 한다. 매년 신문의 한쪽을 장식하는 '대한민국 성인,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 30%'라는 기사에 실망하지만 재야에 묻힌 독서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다
p82 삶을 위한 철학수업 中 늙는다는 것은 입력 장치는 고장나고 출력장치만 작동하는 상태이다. '늙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동물행동학적 현상이다. 입력은 정지되고 출력만 되는 상태. 그러니 머리도 쓸 일이 없다.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출력하니까. 그래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듣지 않고 하던 말만 계속한다. 몸도 그렇다. 새로 입력된 게 없으니, 하던 것만을 한다. 누군가가 이런 상태에 있다면, 그는 나이 마흔이 안되었어도 이미 충분히 늙은 것이다. 반면 나이가 일흔이 넘어도 계속 무언가 입력하여 몸과 마음을 바꾸어간다면 아직 늙었다고 할 수 없다. '젊다'는 것은 무언가가 끊임없이 입력되고 입력된 것을 처리하기 위해 뉴런들이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고, 그에 따라 새로운 패턴의 출력이 언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프로세스를 '공부'라 하고, 이런 상태 있는 사람을 '학인'이라 부른다. 젊다는 것은 공부하며 살고 있음을 뜻한다.
p90
희정 씨에게 서평 쓰기란 치유의 시간이다. 글을 쓰며 몰랐던 내면의 자아를 발견하고, 화해하는 여정이다. 희정 씨는 꾸준히 읽고 쓰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길 원한다. 이밖에도 대기업 홍보실, 번역가, 교사 등 다양한 직업군이 모인다. 한 달에 한 번, 자기 글을 발표하고 다른 생각을 들으며 성장의 기쁨을 누린다.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 무슨 회사의 대리, 팀장으로 살아온 이들은 이제 제 이름으로 글을 쓴다. 익명의 삶이 아닌, 유명의 삶을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p92
책 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재능과 강점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확인하는 시간이다. 글로 정리해내지 못한다면, 진짜 실력 아니다.
p111 러시아 시인 네끄라소프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사는 사람은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p124
새로운 시대에는 주어진 문제를 푸는 문제해결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화두제시 능력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독서토론의 논제다.
p125
독서토론에는 치유와 성찰, 통찰과 혜안이 있다. 주관과 객관, 가치와 재미, 그리고 삶에서 배어 나오는 감동이 있다.
p127 동아리기업은 일과 놀이가 함께 이루어지는 공동체 기업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 취미를 일로 만드는 사람들.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래서 동아리기업과 사회적기업 사이의 지점을 고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일이 돈만 버는 일보다 더 보람있고 행복한 법이니까
p133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선택 기준에 답해야 한다. 1) 머리 쓸래, 몸 쓸래? 2) 같이 할래, 혼자 할래? 3) 돈 볼래, 흥미(보람) 볼래?
p138
독서의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간접경험을 쌓는 일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평소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강화시키기 위한 아전인수식 독서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p140
독서조차 빈익빈 부익부다. 읽는 사람만 읽고, 읽지 않는 사람은 읽지 않는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재미'를 먼저 든다. 독서 세계로의 입문을 권하기 위해서겠지만, 재미만을 위해 읽어서는 곤란하다. 우리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독서를 해야 한다. 혼자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잘 살기 위해 읽어야 한다.
p145 베이컨 曰 독서는 풍부한 사람을, 대화는 재치있는 사람을, 글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p147 존 로크가 "독서는 다만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며,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의 힘"이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독후활동, 독서를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만 읽는 사람보다 독후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편협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독후감이 책에 대해 주관적인 감상을 위주로 쓰는 독후활동이라면, 서평은 책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담은 독후활동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후감까지는 어찌 써보겠다고 하는데, 서평은 어려워한다. 감히 저자의 책을 평가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를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말하자면 경서가다.
p148 시골의 박경철의 자기 혁명 中 독서를 통해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언어와 말하는 언어를 배우고, 내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은 고정되어 있고, 언어는 맥락이 있어야만 뜻이 형성된다. 언어, 즉 어휘가 부족하면, 생각이 풍부할 수 없고 언어를 맥락화할 수 없다면 체계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
p149 그가 말하는 '편집공학'이란 뇌, 미디어, 말, 몸짓, 이미지, 음악, 오락, 광고 등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정보 편집이 어떻게 일어나는 가를 형식적인 정보 처리가 아니라 '의미적인 정보편집 과정'을 통해 연구하고,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어가는지를 전망하는 학문이다. 그의 편집공학을 독후활동에 적용해보면, 하나의 주제에 따라 여러 권의 책을 서평으로 직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복합독서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독서 토론이다.
p153 인간이 그리는 무늬 中 왜 토론이 되지 않을까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할 말이 없을까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의식이 없을까요?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이나 관심이 없기 대문입니다. 왜 호기심이 없을까요?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움직이기만 하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의성도 바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질문도 없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동선에 대한 질문이 없이 어떻게 그 동선이 나아가는 방향을 앞설 수 있겠습니까?
p158 인문학 서적과 소설을 읽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지만, 과정을 마친 뒤에는 "가장 좋았던 점은 몇쾌한 답이 아니라 모호한 그 느낌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그 모호함을 견디는 힘인 것 같다" 고 말했다.
p168 하류지향 中 진정 '자기 찾기'를 하고자 한다면 타인과 무관한 존재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이 네트워크는 어떤 구조이고, 이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p178 독서토론은 토론을 잘 이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토론자로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좋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되도록 이끄는 것도 중요하다. 화기애애함은 성찰과 탐색을 넘어 치유와 상담, 감동, 행복으로 나아가게 한다.
진행자는 사회자의 역할도 함께 한다. 독서토론이 너무 사담으로만 흐르지 않도록, 즉 토론이 늘어지지 않도록 하고, 탄탄하고 팽팽한 의견들이 교환될 수 있도록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경직된 토론진행으로 토론의 재미와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하면서 유머와 재치있는 진행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p191 논제 발제를 맡은 진행자는 책을 꼼꼼하게 읽는 '현미경 독서'도 중요하지만, 책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는 '망원경 독서'도 필요하다.
P193 토론 논제를 준비할 때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참여그룹을 분석하는 것이다. 참여자들의 연령층은 어떤지,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지, 어떤 직종에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p196 니체의 말 中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를 이용해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가지고 있는 언어가 빈약하면 표현도 빈약해지고, 실제로 사고와 감정이 충분히 표현된다고 할 수 없다. 동시에 그 언어의 질과 양이 자신의 사고와 마음을 결정하기도 한다. 어휘가 적은 사람은 사고도 마음가짐도 거칠고 난폭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나 독서, 공부에 의해 언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것은 자연히 자신의 사고와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p199 책 읽기는 1차적으로 저자와의 대화다. 저자와의 대화를 나눈 다음에는 자신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내 생각을 정립하는 과정이다. 책 읽기는 가급적 비판적으로 해야 한다. 비판적 책 읽기란 저자의 생각과 주장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독서법이다.
저자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주장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못하는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져 저자의 주장을 파악했다면 이제 나만의 관점을 세워야 한다.
p202 다른 토론자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자리,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열린 광장이다. 세상의 많은 독서가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을 읽었으면 광장에 나와 토론하라!"
p217 인문(학)적인 사람이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이 총체적으로 집적된 문사철을 읽으며 지혜를 얻고 통찰에 이르는 사람이 아닐까. 철학자 강유원은 인문적인 교양인을 '세상의 어려움을 겪는 소년'에 비유했다. 어려움을 겪어봤으니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고 성장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p219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삶은 가변적이다. 정해진 답이 없으므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탐구해야 한다. 불안한 미래에서 내가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공부는 바로 인문학이다.
p221 책을 '보는'데만 그친다면 웅숭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기 힘들다. 읽은 책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소가 되새김질하듯 곱십어보는, 사유하는 독서로 나아가야 한다.
p222 통찰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예민한 인문적 사유가 없다면 불가능한 능력이다. 무모함과 용기, 가혹함과 정의, 소심함과 신중함, 유약함과 유연함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문적 독서의 진가는 책을 읽고 능독적으로 사유할 때 발휘된다. 바로 독서의 시원은 인문적 독서이다.
p223 교육철학자 존 듀이는 "사고는 보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가정"이라고 했다. 저자의 생각에 대해 '과연 그럴까'를 끊임없이 묻고 의심하는 독서는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준다. 하지만 독서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감히 저자에게 반기를 들 수 가 있느냐"고 묻는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라"하면 "궁금한 것 없는데요"라는 힘 빠지는 답변만 돌아오기 일쑤다
p226 전체에 대한 통찰 中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을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중략)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p230 세계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헤르만 헤세 명작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며, 힘들여 얻지 않으면 안된다. 명작이란 우리에게 읽힘으로써 그 진가를 증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어떤 명작을 읽는 것인가로 우리 자신들의 진가를 입증해야만 할 것이다.
p233 시인 이성복 문학의 실제 자리는 훨씬 낮은 곳이어야 해요. 문학이라는 것이 일정한 자리에서 어떤 권리와 자격을 가진다면 그것은 관계 가운데서 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위 문학을 한다면 '거룩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중략) 세상의 모든 거룩한 것은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합니다. 문학도 그렇습니다. 또, 그것이 문학의 힘이기도 해요. 글을 예쁘게 쓰고 싶다면, 그건 높은 자리에서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죠. 내가 말하는 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문학을 제외한 모든 것보다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문학은 삶을 받아내는 그릇이에요.
p235 한 민족이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역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잘 안다'라는 것은 그냥 '안다'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훌륭한 역사이건 추악한 역사이건 간에 있는 그대로 역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문제는 때로 권력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역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는 있는 그대로 모습일 수가 없다.
p246 프랑스 사회운동가 故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고 경고한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인 그는 체념의 내재화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p258 다윈의 영향은 종교나 생물학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설가 도스토엡스키는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죄와 벌>을 썼다. 주인공 라스콜리코프의 모습은 니체의 초인에서도 발견된다. 니체 역시 철저하게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니체 철학은 전쟁광 히틀러에 차용되어 인종청소라는 반인륜적 범죄로 이어졌다. 나치 사상의 중심 강령 중 하나가 진화론이었다. 이처럼 과학자는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의 전위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p266 움직임, 조경란 불행은 우성이고 행복은 열성이다. 그래서 불행은 유전되지만 행복은 유전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불행해지는데, 노력해야만 행복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 어떤 움직임도 정지보단 나은 거야.
p267 복싱에서 상대가 자기를 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쉬지 않고 상대 주위를 돌며 움직이는 거라 한다. 힘들다고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우리에게 여지없이 펀치를 날릴 것이다. 고통을 피하지 않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텝을 밟아야 한다.
어떤 책인지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이 올려 놓은 서평을 하나씩 찾아 읽어보고, 내가 주로 이용하는 '요술램프'에 들어가서 목차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 중 눈에 띄는 세 가지가 있었다.
<박혜란의 세 아들 이야기>라는 부제, 세 아들이 모두 서울대학교를 나왔고, 그 아들 중 한 명이 40대의 <꽃보다 청춘>의 한 멤버이자 우리에게는 '달팽이'로 유명한 이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양가 부모님들이 유난스럽다고 하는 다섯 살, 세 살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딸을 낳으려고 셋째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의 기대는 없지 않았다. 이게 확률상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추석을 지낸 다음 날에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나 역시 궁금해서 아침부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자 마자 울먹인다. "아들이래~ 엉". 나는 괜찮다고 아기만 건강하면 된다고 했다. 자기도 아는데 자꾸 눈물이 난단다.
다음 날 아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신은 아들 셋을 키울 수 있는 사람에게만 준대. 신에게 선택받은 거야."
"딸들은 툭하면 삐지고 말 안하고 아들들이 차라리 나아~!"
"지금 둘도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셋째는 또 어떨지 너무 궁금하네."
<박혜란의 세 아들 이야기>라는 부제를 담은《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 이렇게 우리 손에 왔다.
이 책은 사람들이 수식어로 많이 사용하는 '아들 셋을 서울대학교에 보낸 육아법', '이적처럼 아이를 창의력있게 가르치는 법' 에 대한 책은 아니다. 저자인 박혜란이 세 아들들을 키워오면서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먼저 경험을 한 선배의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는 형식이며, 세상 부모들이 다 그렇듯이 은근히 아니 대놓고 자식자랑을 하는 그런 책이다.
엄마가 하루 종일 붙어서 아이를 키운다고 아이들이 모두 문제 없이 크는 건 아니다.
엄마가 취업을 했건 안 했건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안정되어야 한다.
이제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르지 말아야 돼!
이 명령처럼 아이와 엄마를
다 구속하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이 명령이 지켜진다면 곧 아이들의 자유를 빼앗는 꼴이고
만약 안 지켜진다면
엄마의 짜증이 촉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명령이다.
비싼 새 옷을 사 입혀 놀이터에 내보내고서는
절대로 더럽히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화는 반드시 말로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부모 자식 간의 대화에서 말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바로 스킨십인 것 같다.
스킨십처럼 친밀한 대화가 또 어디 있으랴.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놀 수 있는 기간은 대단히 짧다.
막내까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사실 아이들과의 놀이는 끝나고 만다.
그 후에 아이들이 뭘 하며 보내는지 나도 잘 모른다.
아이는 자기가 흥미를 가지면 저절로 배우게 되어 있다.
그걸 엄마의 흥미나 욕심에 맞추어 억지로 가르치려 든다면
역효과만 나게 마련이다.
문제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중심을 잃는 것이다.
아이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아낼 때까지
무엇보다 부모의 '참을성'이 필요하다.
아이의 작은 몸짓,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너희들이 공부를 잘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반복하는 엄마보다
아무 말 없이 틈만 나면 책을 펼치는 엄마에게서
아이들은 지적 자극을 받는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늘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이 문제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웬일인지 상당히 생각이 깊은 것 같은 어른들도
부지불식간에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엄마가 없으면 라면 한 끼도 못 끓여 먹는다거나, 엄마가 올 때까지 고스란히
굶는 아이들 때문에 꼼짝달싹 못한다고 넋두리하는 주부가 있다면,
자신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무능력자로 만든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 뒤에
소유욕과 명예욕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을까.
세상에 답이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다.
부모들이 각자 생각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양육에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분명 어떤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부모들은 여러 모로 아이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얼마전에 첫째가 둘째가 다투는데, 형(5살)이 동생(3살)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혼을 낸다.
순간 깜짝 놀랐다. 내가 첫째에게 했던 그대로 동생에게 하는 것이다. "동생한테 그러면 안돼!" 라고 말하니 "아빠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라고 한다. "아빠도 다음부터는 그렇게 안 할게, 동생한테 그러면 안돼"라는 말로 마무리 했다. 그런데 이게 나한테는 좀 크게 다가왔다. 정말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고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과 표정과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다. 아직 가치판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그 기준은 부모인 듯 하다. 내가 기준을 잘 잡아야 한다. 아직까지도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많이 부족하고 여전히 많이 미숙한데 아이들은 그런 나를 따라온다. 실로 책임이 막중하다.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할까? 라는 고민을 많이 해본다. 너무 잘해주기만 하면 버릇이 나빠지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너무 틀에 얽매이게 하면 표현을 잘 하지 못할까봐 걱정도 된다.
하지만 몇 가지는 항상 염두해 둘 생각이다.
아이들과 이렇게 교감하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기에 그 시간 동안 많은 대화와 스킨십을 통해서 서로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점과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닌 그들이 타고난 성향을 이해하면서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 너무 힘들 때는 아빠에게 다가올 수 있게 그 배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글이 쉽고 말은 쉽다.
글쓰기는 매력있는 작업이다. 종이에 연필로 쓰던, 이렇게 블로그에 자판을 통해서 적든 쓰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름의 쾌감이 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만 신기하지 않은가? 어떤 이들이 글을 쓴다면 그들이 직접 그어내린 글자 획의 수가 같을지라도 자판으로 두드린 횟수가 비슷할지라도 각기 내뱉는 글은 천차만별로 존재하게 된다. 어떤 글은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의 생명을 이어준다. 반면에 어떤 글은 불편하고 기분나쁘고 조악하기까지 하다. 글은 바로 글쓴이의 생각과 사상 삶이 담기게 된다.
<대통령의 글쓰기>에서도 글과 말이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글은 곧 사람이다. 때로는 내가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괜히 한 번 아는 체 해본다. 관심을 받고 싶어서 나 자신에 집중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경우도 있다. 결국은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듯이 그런 글 또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게 된다.
비록 글을 많이 써보지는 못했으나, 분명히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글로 표현해내는 것과 단순히 꾸며내거나 생각해서 쓰는 글은 많은 차이가 있다. 경험한 일은 그때의 기억과 추억이 남아있고, 뇌리에 남아있는 오감이 있다. 그래서 당시의 이성적인 판단과 감성적인 자극이 고스란히 글에 담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글에는 한계가 있다. <라이어>에서 처럼 한 번 거짓말을 하다보면 그것이 진짜인 척 하기 위해 거짓말이 계속 덧붙여지듯이 어느 순간에는 글에도 군더더기가 계속 붙어버리게 된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 책의 제목처럼 자신의 직간접적인 경험과 내면을 깊숙히 찾아보는 것이 진실하고 진정한 글이 나오는 길이다. 이런 글이 결국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감동이 전해진다.
글쓰기의 기본은 자신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이것이 준비되어 있으면 된다고 생각된다.
항상 기본이 있으면 그 토대 위에 차곡차곡 쌓여져서 일정한 선에 도달하게 된다.
글쓰기에는 어떤 것을 차곡차곡 쌓아올릴까?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언급된 내용 중에 살짝 체크해 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글쓰기재료 수집
P78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말한다. "글쓰기는 집을 짓는 것과 같으며,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연장통을 잘 갖춰놓아야 한다." 내게 포털사이트는 훌륭한 연장통이다. 연장통을 쓰는 요령은 이렇다. 포털사이트의 '뉴스'를 클릭한다. 우측 상단에 '검색'을 클릭한다. '뉴스 상세검색'을 클릭한다. 검색어를 입력하고 하단에 '칼럼'을 클릭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도서관'을 검색하면 이에 관한 통계나 사례등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해당 칼럼이 너무 많은 경우에는 '제목에서만'을 클릭하면 된다. 지금도 글을 쓸 때 이 방법을 쓴다. 거의 모든 주제에 관해 쓸 말이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자주 이 방법을 추천하기도 한다. 자료를 완벽하게 찾아놓고 글을 쓰기보다는 쓰면서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P221
관심있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한다고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2년 동안 관찰한 결과, 소설 <개미>를 썼다. 주변 사람과 사물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관찰하면 된다.
P216
글을 잘 쓰기는 잘 듣기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스스로 중심만 잡을 수 있으면 많이 들을수록 좋다. 잘 들어야 말을 잘할 수 있고, 말을 잘해야 잘 쓸 수 있다.
글쓰기재료는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한 주제에 대해서 표현한다고 꼭 그것과 관련된 어휘 혹은 글귀만 사용되는게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글쓰기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런 재료들을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에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간접경험을 꾸준히 해야 한다. 어떤 매체라도 좋지만 글로 된 매체를 끊임없이 살펴보는게 효과적일 것 같다.
쉽게 읽히는 글
P178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오는 이 대목은 새겨들을 만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엄숙히 맹세하기 바란다. '생리현상을 해결했다'고 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똥을 싸다'는 말이 독자들에게 불쾌감이나 혐오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대변을 보았다'고 써도 좋다.
P178
"쉽게 읽히는 글이 쓰기는 어렵다."고 한 헤밍웨이의 말은 확실히 맞다.
글쓰기를 조금씩 하다보니 정말 어려운게 쉽게 읽히는 글을 쓰기다. 글쓰기의 목적은 글쓴이의 욕구일 수도 있으나 읽는이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글은 정말 쉬운 단어와 글귀로 이루졌으나 다루는 내용의 무게를 결코 낮추지는 않는다. 어떤 글들은 화려한 미사여구가 붙지만, 단순하게 특별한 수식어 없이 내용만을 담백하게 전하는데도 감춰진 수식어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짧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글들도 있다. 아직은 쉽게 쓰는 법을 나 역시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가장 염두해두고 생각해볼 부분이다.
요약
P158
2005년 10월 <한겨레>에 이런 기사가 났다. 독일 동방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르와의 대담이었다. "독일은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전에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대해 면밀히 검토했는데, 그것을 정리한 것만도 2,000쪽에 달했고, 이것을 요약하여 27쪽으로 만들고, 다시 1쪽 반으로 요약한 문서로 만들었으며, 이것이 1989년 동구권 변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2005년 10월 3일 한겨레>
예전에 어떤 글쓰기 책을 보았는데 긴 글을 적어두고 1,000자 내로 줄이기, 다시 500자로 줄이기, 100자로 줄이기, 글의 제목 만들기 식으로 요약하는게 있었다. 정말 글자수가 적어질 수록 힘들다. 어느 순간부터 형용사와 부사를 빼야 한다. 그게 쉽지 않다. 주어와 서술어로 줄이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똑같은 표현을 나타내는 단어도 많이 있는데 아는 단어도 한정되어 있다보니 결국은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어버린다. 항상 생각해보자. 글에 군더더기가 없는지, 핵심이 무엇인지, 내가 분명히 말하려는게 무엇인지, 글을 읽는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지 분명히 알아가면서 그 중심을 찾아내자. <THE ONE PAGE PROPOSAL>도 이런 연습하기에 효과적일 듯 하다.
퇴고
보통 글을 다 쓰면 '아 다 썼다.' 하고 끝내버린다. 이건 다 쓴게 아니다. 글을 다 쓰고 나서 퇴고를 하고 살펴보고 수정하고 다시 읽어보고 이런 일을 여러 번 반복해본 후에 글을 다썼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게 힘들다. 글을 마무리했다는 끝마침의 기분때문인지 결국 마지막이 소홀해진다. 오타도 생기기도 하고 나중에 읽어보면 단락간에 이어지지도 않고, 전체 흐름과 상관없는 내용이 들어가있기도 하다.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하는지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나온 퇴고의 방법을 보고 항상 염두해두어야 겠다.
<시작보다 중요한 퇴고>
1.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하는 게 맞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주제의 적절성 여부다.
2. 두 번째 주안점은 주제가 명확하게 전달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주제가 잘 부각됐나? 즉 청중이나 독자가 어느 게 주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책을 빌리고 나서, 집에 와보니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가 아니었다. 그 뒤에 붉은 색으로 2.0 이 붙어 있었다. 출판사는 그린비니까 무언가 잘못된 거 같지 않았다. 책을 펼쳐보니 호모부커스의 다음 편이라고 한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이 책 역시 그린비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의 한 권이니 특별하게 다가온 인연이라 생각하고 다른 호모부커스들은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야 겠다.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 걸까? 이 두 가지 물음표 마크에 최근에 생각이 많아졌다. 책을 읽는 방법은 각자 마다의 개성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책 읽기에도 기본이라는 것이 있고 호모부커스 처럼 책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남과 다른 비법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가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법' 같은 지름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 고 있다. 어쩌면 단지 남들은 어떻게 하나 보고 싶은 나만의 책에 관한 관음증 생각하면서 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읽어 나갔다.
이권우 작가외 25명이 각자의 독서관에 대해서 쓴 글이기에 짧게 짧게 그들의 생각들을 풀어내는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방법도 다르지만 결국은 이것들은 모두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서로 모두 이어지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어느새 그 끈의 한 쪽을 잡고 있는 듯 했다. 어떤 이는 나와 책을 읽는 스타일이 많이 비슷해서 공감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이는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풀어내어 어느새 내 눈이 커지기도 했다.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라는 내 질문에도 조금은 이 책이 방향성과 방법은 귀띔해주기도 하였다. 책의 서문에 보면 이권우 작가가 "읽고 성찰하기, 그리고 변화하여 성장하기, 그리고 다시 글쓰는 사람이 되라." 라는 글이 있다. 누군가는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에 달라진 점이 없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라고 까지 하였다. 그만큼 내가 읽은 책에 대하여 느끼고 무언가에 대해서 사유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 속에 이런 글귀가 있다. "읽는 책이 그저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도움이 되고 실용적이면 소용이 없다. 은밀히, 그러나 거대하게 변화하는 세계를 뚫어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귀띔해 주는 책을 읽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또 다른 대답이기도 하다.
아직은 책읽기를 통해서 인생에 대해서 성찰하려고 하는 시작점이다. 모든 시작점에는 이런 저런 경험을 통해서 몸으로 어떤 것이 나에게 맞는지 부딪혀 보는 수 밖에 없다. 지금은 그런 과정이다. 조금 더 부딪혀보고, 항상 열린 시선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2.0] 의 26인 필자 중의 한 사람인 안민용씨는 자신의 관심분야를 확인하고 조금씩 넓혀가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도서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국십진분류표(FDC)를 사용한다고 한다.
000 총류 100 철학 200 종교 300 사회과학 400 순수과학 500 기술과학 600 예술 700 언어 800 문학 900 역사
이런 분류로 보니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은 너무 일부 분야에 치우쳐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내 관심사를 확장하고 새로운 분야를 찾아서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아마 몇 년 뒤에는 모든 분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관심과 지식으로 조금더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