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과 영화/□ etc.

김훈

2016. 2. 26. 23:44





반응형

'■ 책과 영화 >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범신  (0) 2016.02.26
다자이 오사무  (0) 2016.02.26
김진명  (0) 2016.02.26
김중혁  (0) 2016.02.26
김연수  (0) 2016.02.26




예전에 KBS의 개그콘서트에는 '감수성'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감수성'의 나래이션을 보면 '동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평양성,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이제 남은 성은 감~수성' 이렇게 나온다. 노래가 마치면 신하들의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나온다. 그리고 청나라 병사가 등장한다.

그때는 그저 생각없이 들었던 나래이션이었다.  그런데 이제와보니 그저 웃고 넘길게 아니었다.


◆ 병자호란(1636)


병자호란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광해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해군 때, 후금이 세워진다. 후금의 세력은 점점 더 강성해지고 조선과 명나라는 임진왜란(1592)으로 너무 지쳐서 쉽게 견제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후금은 세력이 커지고 비옥한 땅을 위해 명에 진출을 한다. 이에 명나라는 후금과 전쟁을 시작하고 조선에게 도움을 청한다.

당시 조선의 국왕인 광해군은 명에 대한 적극적 지원이 아닌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정책을 취합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강대국 사이에서의 중립을 지키려는 정책이었으나, 재조지은이라 하여 '명이 임진왜란 당시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세워주었다'를 강조하며 명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은 광해구네 대해 반기를 드는 세력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왕위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명나라에 군을 지원해준다. 이를 계기로 청은 정묘호란(1627)을 일으킨다.


청은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로 지내겠다는 약조를 받고 물러난다. 하지만 세력이 커진 청은 형제가 아닌 신하의 예를 지키라고 했고 조선은 평소 야만족이라고 여기던 청이 신하의 예를 지키라는 요구를 해오자 그 요구를 무시한다. 그리고 병자호란(1636)이 발생하게 된다.

◆ 병자호란(1636)은 질 수 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은 당시 청나라의 강성한 힘과는 별도로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당시 조정은 청군이 언젠가는 침략할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북부 지역에 산성을 정비한다던가 병사를 늘린다는가 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이 피해갔던 강화도에는 군사를 늘리고 산성 정비를 하였다. 당시 국왕인 인조는 전쟁이 일어나자 두려운 나머지 그저 강화도로 피하기만을 생각한다. 


인조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세력에 의해 집권한 왕으로 척화파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척화파는 변화하는 청에 대한 정보 수집은 하지 않고 단순히 배척하기 바빴다. 

전쟁과 동시에 그리고 그 후에 겪은 역사적 치욕과 백성들의 끔찍한 삶을 생각하면 전쟁 초기 대응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P85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의주 건너편 용골산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청군이 침략을 개시하면 봉화 두 개를 올리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12월 6일부터 봉화가 올랐으나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그것을 무시했다. 김자점은 청군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봉화가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9일 적군이 이미 순안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고 있던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무사안일과 무책임의 극치였다.


◆ 잊지말아야 할 치욕의 역사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후 소현세자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 후, 강화도에서 끌려온 강빈을 비롯한 왕실과 신료들의 처자들이 홍타이지에게 삼배고두례를 행하였다. 곧이어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선물이라며 짐승가죽으로 만든 방한복을 가지고 와 인조 이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인조는 그것을 입고 홍타이 앞에 나가 다시 두 번 무릎을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렸다. 병자호란 후 인질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조정의 고위관료의 아들 혹은 조카들이 청나라로 향하게 된다.


국왕은 머리를 조아리지만 결국 무고한 백성만 죽고 또 죽는다.

항상 조정의 큰 실책은 그것을 결정한 관리들보다는 무고한 백성들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백성들에게는 그때부터가 다시 시작인 셈이었다.


P236

청이 물러난 도성의 관아와 인가들은 불타고 여기저기서 참혹한 형상의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널려있는 시신들을 모다 못한 한성부가 인조에게 건의했다. '백골을 묻어주는 것이아말로 오아정의 급선무입니다. 길가에 버려진 시신들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남정들을 징발하여 매장토록 하소서.'

도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살 미만의 어린애들과 70살이 넘은 노인들 뿐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나마 그들도 굶어 죽거나 얼어죽기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려 있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7년 1월, 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다음과 같은 피로인(전쟁포로) 관련 조건을 제시했었다.


P283

'우리가 끌고 가는 피로인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밝은 다음에 조선으로 도망쳐오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당시 자료를 보면 청군이 철수할 때 끌고간 피로인의 수는 50만 명정도 된다고 한다.  피로인들은 결국 조선에 발을 밟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으로 도망쳐온 사람들의 경우는 발뒷꿈치를 자르는 끔찍한 짓이 자행되었다. 수많은 여자들은 능욕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결을 하였다.  청은 조선의 백성을 그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포로들을 조선에 돌려줄 때는 시장이 형성되어서 어느 금액 이상일 경우에만 조선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목숨을 걸고 탈출에 성공해서 조선으로 왔을지라도 항목 관련 조건에 의해 조선에 의해 다시 청에 돌려보내지게 되었다. 결국 조선을 향해 걸어왔는데 조선의 의해 다시 청에 돌려보내지게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여자들의 경우는 조선에 정상적으로 조선에 왔다고 하더라고 이중의 고통을 당한다. 청군에서 돌아온 여자들에게는 

'오랑캐에게 실절한 여자'라는 띠가 붙는다. 결국 고향에 돌아와서 쫓겨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고, 사대부의 경우에는 조정에 이혼을 요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고 한다.


◆ 답답하고 알고 싶은 것들


1. 조선의 많은 관리들은 재조지은 ('명이 임진왜란 당시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세워주었다') 이라 하여 명을 '어버이의 나라'로 받들었다. 당시 청나라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존망보다는 명분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자결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2. 강대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중립외교가 인정받을 때는 평화로운 시절이다. 결국 위기의 순간에는 한 쪽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병자호란 당시가 청, 명, 왜로 사이에서의 조선의 위치라면, 지금은 미국, 중국, 일본, 북한 사이에서의 한국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더 복잡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몇 명 사이에서도 중재하는 게 어려운데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는 외교에서 과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3.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 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렸다.' 라는 말이 있다. 삶을 국가로 바꾼다면 조선은 과연 전쟁 후 포로들에 대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 왕실사람들과 산성을 지키던 병사의 가족을 우선으로 하여 데리고 왔다. 그리고 특별한 노력이 있었는가 알고 싶다. 심지어 20~30년 만에 돌아온 백성들도 다시 내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약자가 충분히 보호받고 있는가?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김훈의 <남한산성>


예전에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블로그에 남긴 글을 조금 적어본다.


'김훈, 그의 책은 내용 하나하나가 너무 사실적이다. 마치 스크린에 그 배경이 펼쳐지듯이 책을 읽어내려가면 내 머리속에 이미 그 배경이 자리를 잡고 시간이 흘러간다.

책을 읽을 때는 나 역시 남한산성에 있게 된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방책이 없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나 역시 초조해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 이유는 이미 내가 이 책의 끝을 역사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읽을수록 아프지만 그래도 읽으서 그 아픔을 아로 새기고 기억해야 함을 나는 알고 있다.





반응형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다보면, 독서할 때 느꼈던 감정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던 순간에 대해서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다.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사랑해." 라는 세 글자로는 서로의 애틋하고 충만한 느낌을 표현하기가 부족해 새로운 한 마디를 원하듯이 글을 읽고 느끼는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싶다.

 

길을 가다가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을 때, 사람들마다 표현하는 것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라고 표현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나와 엇갈려 지나가던 그녀의 키는 내 어깨를 살짝 넘어가니 165cm 정도가 되어 보인다. 서로 스쳐지나가면서 보았던 쌍거풀 속에 감춰진 그녀의 짙은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 깊었다. 작고 붉은 입술은 하얀 피부에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라고 표현할 수 도 있다.

실제 일어난 현상과 생활 속에 존재하는 것은 동일한데 사람들마다 보고 받아들이는 방법은 너무나도 다르다. 점점 이렇게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긴다던지, 자기 전에 간단히 일기를 쓸 때마다 평소에 보는 일상의 사물과 생활을 조금 다르게 느껴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충만한 일상 생활을 보내야한다는 느낌이다. 아침 출근 시간에 쫓기지 말고, 아침의 차가운 공기도 한 번 피부로 느껴보고 그냥 무심히 타던 통근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어떤 간판들이 있는지 한 번쯤 눈여겨 보자. 매일 먹는 회사 아침이 질리더라도 이 찌개는 어떻게 만들었지. 여기에는 어떤 재료가 들어갔을까 한 번 쯤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하루 동안 내 감정의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비록 하루하루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더라도 그 속에서 내 감정을 한 번 쯤은 예민하게 감지해보자. 아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느낌을 받는구나! 이런 상황이 나를 웃게 하는 구나. 이럴 때 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구나 하는 사소한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것을 느껴보는 감수성으로 책을 읽었을 때의 내 감정을 충분히 글로 표현하고 싶다. 글이라는 것은 다분히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성찰인 동시에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보여주기 위한 매개체이다. 내면을 바라보고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수단인데 어떻게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직 글쓰기가 너무 어렵다. 어렵지만 무엇보다 글을 써서 한 번쯤은 쾌감을 얻고 싶은 생각도 있다. 거의 모든 문제들이 그러하듯이 정답은 없다. 그저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보는 수밖에......

 

<글쓰기의 최소원칙>은 이런 글쓰기에 대한 생각에 다시 하나의 짐과 보물을 올려주었다.
도정일, 김훈, 박원순, 최재천, 김동식, 김광일, 배병삼, 김수이, 민승기, 이문재, 이필렬, 차병직, 최태욱, 김영하 이렇게 14명의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글쓰기라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다양한 목소리를 보여준다.

 

한 분 한 분의 글을 읽을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글쓰기 뿐만 아니라 글과 자연스레 연결되어지는 독서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앞으로 인상이 깊었던 부분에 대해서 나누어서 한 번쯤 생각해보려 한다.
오늘은 일단 현재 나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문재 시인이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전해주는 글쓰기의 기초체력 기르기와 세부지침에 대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 글쓰기를 위한 기초 체력 기르기 

1. '나쁜 버릇'부터 찾는다.
사람마다 특유의 말투나 몸짓이 있듯이 글에도 특유의 '버릇'이 나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것이다'라는 종결어미를 자주 씁니다. '~것이다'는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글 버릇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식어 많은 문장, 접속사가 많은 문장, 나열이 많은 문장이 나쁜 문장입니다. 자기 글에서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글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문제점만 제거해도 글쓰기는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됩니다.


2.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찾아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기자나 작가의 글을 집중적으로 읽으십시오. 소설가 지망생은 필사하고 싶은 선배 소설가가 한둘은 꼭 있습니다. 좋은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그대로 베껴 쓰십시오(필사). 외우면 더 좋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적극 모방해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글쓰기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됩니다.

추천하고 싶은 필자 '모델'은 문인 이외에, 혹은 문인이면서 매체에 자주 기고하는 분들입니다. 도정일(문학평론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고종석(소설가 겸 언론인), 김훈(소설가 겸 언론인), 배병삼(정치학 및 동양학), 한형조(동양철학), 송호근(사회학), 고미숙(문학평론가),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등입니다.


3. 새롭지 않으면 쓰지 말라.
모든 글쓰기는 새로워야 합니다. 사실이나 의견에서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표현이라도 새로워야 합니다. 새롭지 않다면 신기하거나(의외성) 흥미로워야 합니다. 새로움, 의외성, 흥미, 이 세가지 중 한 가지도 만족시키기 못한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4. 자세히 관찰하라.
관찰은 모든 글쓰기의 스타트 라인입니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물이든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글쓰기가 불가능합니다. 관찰이 부정확하면 사실 관계가 흔들립니다. 정확히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 가운데, 시각이 특히 부정확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착시 현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상기해보십시오.

관찰 훈련의 첫 단계는 자기가 본 것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이 인물이라면, 머리 모양과 색깔, 길이에서부터 이목구비를 거쳐 구두까지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말해보십시오. 컴퓨터나 텔레비전, 화분, 식탁, 자동차 실내 등 늘 마주치는 대상을 하나 정해서, 소리 내어 하나하나 관찰해 보십시오.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발견입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재료입니다.
 

5. 메모하고, 메모하고 또 메모하라.
간이 하루에 접하는 새로운 정보(자극)는 수십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십시오. '오늘 내가 새로 느낀 것, 새로 발견한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머니 혹은 핸드백에 작은 수첩과 필구를 챙기십시오.

참신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좋은 글은 메모지에서 나옵니다. 메모지가 '상상력 발전소'입니다.

 

 

▼ 글쓰기를 위한 세부 지침

1. 나로 부터 시작하라.
 '
'로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서전을 써 보거나, 자기가 자기를 인터뷰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소개하는 글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을 취재해, 사진과 곁들여 기사를 써보는 것도 훌륭한 저널리즘적 글짓기입니다.

시나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의 이야기를 쓰십시오. 문학적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십시오.

''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삶을 성찰하는 진지한 계기를 제공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같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글스기 말고 거의 없습니다.

 

2. 반복하지 말라.
반복은 강조할 때 말고는 피해야 합니다.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현의 반복과 내용의 반복이 그것입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의어를 쓰십시오.

글쓰기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내용의 반복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마십시오. 같은 내용이 반복되면 독자는 냉정하게 즉각 눈을 돌립니다. 

 

3.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만 담아라.
이것은 문장을 짧게 쓰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 한 문단에도 하나의 정보군을 담는 것입니다.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정보를 담는 순간, 문장은 길어집니다. 한 문단에 두 개 이상의 정보군을
으면
, 복잡하지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4. 접속사를 쓰지 말라.
최근 읽은 소설 가운데 접속사가 거의 없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훈의 장편소설<남한산성>인데, 접속사에 유의하며 읽어보십시오. 매우 흥미로운 글읽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접속사는 글 쓰는 이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연결형, 나열형 접속사를 피하십시오. 

 

5. 나누고 묶어주어라.
기사를 쓸 경우,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유사한 것끼리 묶어줘야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음식 종류를 소개한다면, 국적별 혹은 재료별, 계절별 등으로 나누어 묶어 줍니다.

 

 6. 병치할 때 조심하라.
같은 기능을 가진 단어, , 절 등이 나란히 놓일 때 자주 오류가 나타납니다. '사과와 큰 배',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공부를 잘한다.' 와 같은 문장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과'라는 단어와 '큰 배'라는 구는 병치하면 안 됩니다. 단어는 단어끼리, 구는 구끼리 병치하십시오. '사과와 배' '작은 사과와 큰 배'가 적확한 표현입니다. 앞의 문장은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초등학생이다'로 써야 합니다.

 

 

 

 

반응형

 

 

 얼마전에 아내가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새벽2시경 산부인과에서 아내는 첫째 때와는 다르게 거친 숨소리와 비명 소리 가 들려왔다. 그런 아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오만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병원의 창문 밖으로 붉은 십자가가 보였다. 일부러 그곳에 세웠냐는 듯이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문에 바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 홀로 기도드렸다. 아내가 건강하기를, 아이가 건강하기를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기도드렸다.
 
 솔직히 결혼을 하고 기독교를 믿는 처가의 영향으로 몇 번 교회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성적인 생각과 습관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나는 여전히 기독교의 신앙을 믿지 못하고 있고, 교회도 잘 다니지 않는다. 그런 내가 그때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나 보다. 그만큼 천주교, 기독교는 지금 현재 보편적으로 우리 사회에 스며들었고, 많은 이들의 신앙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사회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고 있다.
 
 150년 전, 조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면 과히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주교가 처음에 조선에 들어왔을 때는 종교의 개념이 아닌 학문의 하나였다. 바로 서학, 서쪽에서 온 학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서학과 함께 천주교가 종교로서 사회에 퍼지면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태워버리는 일들이 발생한다. 부모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인의예지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에게는 바로 그 정치이념, 왕권과 사대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수백년을 이어온 기득권 세력의 위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이러한 사상,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에 따르는 고통과 핍박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의 천주교 도입 초반을 보여주는 '흑산'은 이 시대의 천주교인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약용의 가족들이 있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황사영이 바로 그 박해의 폭풍 속에 있었다. 정약용은 이들 중에서는 천주교와는 그나마 가장 밀접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들의 말로는 편치 않았다. 황사영은 여섯 토막으로 정약종은 두 토막으로 처형되었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정약종과 황사영은 후에 성인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천주학에 깊이 빠져있었으며, 그 당시 기득권, 주류에서 소외되었던
 많은 백성들은 그들 개개인을 인정해주는 이 학문, 종교에 점점 더 관심이 높아져 갔으며, 그것은 신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 반대에는 조정에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
 김훈의 역사소설은 칼의노래, 현의노래, 남한산성, 흑산처럼 당시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인간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준다. 역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묘사할 때도,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의 묘사는 화려하고 다양한 형용사와 부사는 들어가지 않는다. 단지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듯하는 문체는 그 어떤 꾸밈을 능가하고 눈 앞에 그대로 펼쳐지는 듯 해서 읽는 내내 감탄하고, 글에 빠져들곤 한다.
 
포스트잇을 들고 책을 읽어가다 보니 어느덧 책의 옆에는 수십장의 포스트잇이 옆으로 드러났다. 이글들도 몇일 뒤에 기억 속에 사라질거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쉽다.
 
< "울음은 질겼다. 몸의 깊은 곳이 흔들리면서 울음이 퍼져 나왔다. 앞선 울음이 아직 울어지지 않은 울음을 이끌어냈고
잦아드는 울음이 한 굽이 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울음은 추슬러지지 않았다.">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하늘색과 물색이 같아서 배는 허공으로 뜬 듯했다.">

이런 글을 쓰는 그의 감성과 섬세함이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정약용의 가족들의 고향인 마재의 두물머리를 나타내는 글은 몇 번을 곱씹어서 읽었다.
  
황사영의 처가 동네 마재는 강들이 만나는 두물머리였다. 강원도 산협을 돌아나온 북한강과 충주,여주,이천의 넓은 
들을 지나온 남한강이 마재에서 만났다. 강들은 서로 스미듯이 합쳐져서 물이 날뛰지 않았다.  물은 넓고 깊었으나 사람의 마음을 어려워하듯이 조용히 흘렀고 들에 넘치지 않았다. 마재의 농경지는 물가에 바싹 닿아 있었다. 수면과 농경지가 턱이 지지않아서 아이들도 동이로 밭에 강물을 퍼 나를 수 있었다.  북한강 물은 차갑고 남한강 물은 따스해서 두물머리 마재에는 아침마다 물안개가 피었다.  해가 떠올라 안개가 걷히면 강은 돌연 빛났고 젖은 산봉우리에 윤기가 흘렀다.  하남 쪽 검단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산협을 굽이치며 다가오는 두 줄기 물길이 푸른 띠처럼 보였다.  서울 도성 쪽으로 향하는 큰 물은 산을 돌아나가면서 보이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저쪽 물길에 도성은 펼쳐져 있었다

특별한 미사여구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떤 묘사보다 뛰어나고 힘있게 다가온다.
이렇게 역사에 대해서 그동안 보편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다르게 접근하는 것에 마음에 들었고 오랜만에 김훈의 그 필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 잘 다려진 한 첩의 보약을 먹은 듯이 든든하다.
  
이제 내가 보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신중하려고 한다. 아침 출근길의 싸늘함을 몸으로 기꺼이 맞으려 한다. 피곤해서 시려워 붉게  충혈된 눈을 느껴보려 한다. 이렇게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조금 더 느끼고 기꺼이 글로 뱉어보고 싶다.


p10
정약전은 육신으로 태어난 생명을 저주했지만 고통은 맹렬히도 생명을 증거하고 있었다.

p15
정약종은 위관의 심문에 이끌리지 않았다. 정약종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스스로 진술했고, 그 이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매를 불렀고 다시 침묵으로 매에 대답했다.

p18
그 캄캄한 단절은 신의 부재 증명이었지만, 다시 캄캄하게 뒤집히는 고통이 생명을 증거하는 사태는 신의 존재 증명인 듯도 했다.

p43
길은 늘 앞으로 뻗어 있어서 지나온 길들은 쉽게 잊혔지만, 돌아올 때는 지나온 길이 앞으로 뻗었고, 갈 때 앞으로 뻗어 있던 길이 다시 잊혔다. 길은 늘 그 위를 걸음으로 디뎌서 가는 사람의 것이었고 가는 동안만의 것이어서 가고 나면 길의 기억은 가물거려서 돌이켜 생각하기 어려웠다.

p49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하늘색과 물색이 같아서 배는 허공으로 뜬 듯했다.

p60
마음이 세상의 근본이며, 세상의 동력이어서, 시간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세상이 저절로 바뀌지 못하며, 마음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p62
황사영의 처가 동네 마재는 강들이 만나는 두물머리였다. 강원도 산협을 돌아나온 북한강과 충주,여주,이천의 넓은 들을 지나온 남한강이 마재에서 만났다. 강들은 서로 스미듯이 합쳐져서 물이 날뛰지 않았다. 물은 넓고 깊었으나 사람의 마음을 어려워하듯이 조용히 흘렀고 들에 넘치지 않았다. 마재의 농경지는 물가에 바싹 닿아 있었다. 수면과 농경지가 턱이 지지않아서 아이들도 동이로 밭에 강물을 퍼 나를 수 있었다. 북한강 물은 차갑고 남한강 물은 따스해서 두물머리 마재에는 아침마다 물안개가 피었다. 해가 떠올라 안개가 걷히면 강은 돌연 빛났고 젖은 산봉우리에 윤기가 흘렀다. 하남 쪽 검단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산협을 굽이치며 다가오는 두 줄기 물길이 푸른 띠처럼 보였다. 서울 도성 쪽으로 향하는 큰 물은 산을 돌아나가면서 보이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저쪽 물길에 도성은 펼쳐져 있었다.

p68
정약현은 책을 읽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고, 붓을 들어서 글을 쓰는 일을 되도록 삼갔다. 정약현은 말을 많이 해서 남을 가르치지 않았고, 스스로 알게 되는 자득의 길을 인도했고, 인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후학들은 거두지 않았다.

p73
박차돌의 아비는 솔가해서 강원도 인제 아침가리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었다. 마을은 오목하고 잘록했다. 산비탈로 둘러싸여서 마을 이름이 소쿠리마을이었다. 해가 일찍 저물었고 밤은 새카매서 눈이 멀 지경이었다.

p117
세상을 직접 대하라고 [소학]에서 배웠습니다.

p127
가마우지는 절벽 끝에서 물 위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수면 위로 내리꽂혔다. 가마우지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먹이를 쫓았다. 물가에서 바라보던 창대는 숨을 헤아렸다. 창대가 깊은 숨을 열 번 들이쉬고 내쉬자, 가마우지는 물속에서 날아올랐다. 가마우지 주둥이에서 물고기가 퍼덕거렸다. 가마우지는 절벽 꼭대기에 내려앉아서 발로 물고기를 누르고 대가리부터 쪼아 먹었다. 물고기가 온몸을 뒤틀며 진저리를 쳤다.

p133
뼈는 돋아나지 않았다. 뼈는 붙지 않았고 움트지 않았다. 부러진 뼈는 너덜거리다가 떨어져나갔다. 떨어져나간 자리에서 피고름이 흘러서 감옥 바닥의 멍석을 적셨다. 피고름에 구더기가 슬었고 빈대가 꼬였다. 구더기가 파리가 되어서 상처의 진물을 빨았다.

p141
약종이 사학의 죄를 끌어안고 먼저 죽어서 약용은 풀려나기가 수월한 것이었다. 약용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약용은 자신이 약종의 죽음에 기대고 있음을 알았다.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되었다. 정약전은 약용의 배교에 힘입어서 함께 풀려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약전도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되었다. 정약전은 약종과 약용으로부터 비켜 서 있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죽은 약종과 황사영의 일을 평생 입에 담지 않았다. 그들은 형틀에서 헤어졌다. 정약종은 참수되었고 황사영은 능지처참이었다. 집행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정약종의 사체는 두 토막이었고 황사영은 여섯 토막이었다.

p143
강가 고을들의 수령과 찰방, 진장들은 관노들끼리 짝을 붙여서 노비의 자식을 생산해냈다. 대체로 임진강을 사이에 놓고 씨가 좋은 남종과 자리가 좋은 여종을 주고받거나 강남 쪽에서 길쌈 잘하는 여종은 강 북쪽 마을에서 참게 잘 잡는 남종과 바꾸는 방식이었다. 흥정이 쉽게 풀리지 않을 때는 나이 든 남종 한 명에 말 한 마리나 염소 두 마리를 얹어서 젊은 여종 한 명과 바꾸기도 했는데, 젊은 여종은 팔려오면 바로 교접을 붙여서 새끼를 베게 했다. 자식을 낳고 나서 젖이 잘 도는 여종이나 미색이 뛰어난 계집종은 늙은 남종 서넛과 맞바꾸었다. 젖 잘 나오는 여종은 팔려간 상전집 아이가 두 돌이 지나 젖을 때면 몸값이 반으로 떨어져서 전의 상전한테로 다시 팔려왔다.

p166
억지로 키우려고 공들이지 말고 스스로 되도록 공들여야 한다. 키워서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 됨만 못하다.

p185
창대는 섬에서 태어나서, 서너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고요히 들여다보아서 사물의 속을 아는 자였다.

p196
바람이 불어서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날, 장팔수는 집 근처 야산을 돌면서 딸을 뚫고 나오기 시작하는 어린 소나무를 뽑아버렸다. 소나무가 자라면 무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장팔수뿐 아니라, 다른 어부들도 뱃일이 없는 날에는 어린 소나무를 뿌리째 캐내서 아궁이에 던졌다. 사람들은 그 일을 서로 말하지 않으면서 다들 알고 있었다.

p200
목마른 자가 저절로 물을 찾듯이 정약종에게 새날은 저절로 스며들었다. 정약전이 멈칫거리면서 배교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때도 정약종은 애초에 정약전에게서 인도받은 그 길을 끝까지 걸어서 서소문 사형장으로 갔다.

p208
백성을 꾸짖을 때는 앓는 아이에게 약을 먹이듯 해야 하며 백성을 교화할 때는 가는비에 옷이 젖듯이 해야 하며 꾸짖거나 가르치거나 간에 콩을 볶듯이 해서는 안된다.

p245
어미의 몸 밖으로 나온 가니는 누워서 팔다리를 버둥거리다가 반년이 가까우면 뒤집고, 뒤집어서 배를 밀고, 밀다가 기고, 기다가 앉고, 앉았다가 일어서고, 일어서다가 넘어지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서 한 걸음씩 걸어갈 것이었다.

p281
흑산을 버리겠다는 장팔수 앞에서 흘린 것과 똑같은 눈물을, 창대는 흑산에 남겠다는 정약전 앞에서 흘렸다. 울음은 억눌려서 울어지지 않았다. 어깨고 고요히 흔들렸다.

p297
순매는 그 내장들을 들여다보면서 물고기 세상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낯선 곳이겠거니 여겼다. 한 줌의 내장과 한 뼘의 지느러미를 작동시켜서 바다를 건너가고, 잡아먹고 달아나고, 알을 낳고 정액을 뿌려서 번식하는 물고기들의 사는 짓거리가 순매는 눈물겨웠다.

p310
모든 간절한 것들은 몸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 때 황사영은 알았다.

p311
울은은 질겼다. 몸의 깊은 곳이 흔들리면서 울음이 퍼져 나왔다. 앞선 울음이 아직 울어지지 않은 울음을 이끌어냈고 잦아드는 울음이 한 굽이 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울음은 추슬러지지 않았다.

p339
-창대야, 숭어 피부는 무늬는 왜 저러하냐?
-숭어가 헤엄쳐가면서 부딪친 물살의 무늬일 것입니다. 그 피부 밑의 살의 무늬와 결도 그와 같습니다.

p341
갈치는 큰 칼과 같다. 큰 놈의 길이는 아홉 자에 이른다. 아가리를 벌리면 날카로운 이빨이 줄지어 있다. 갈치는 서서 헤엄치고 서서 잔다. 갈치는 꼬리지느러미가 가늘어서 물을 휘젖지 못한다. 갈치의 등지느러미는 대가리에서부터 꼬리까지 이어져 있다. 갈치는 이 등지느러미와 몸통 전체를 물결처럼 움직여서 서서 이동하낟. 갈치는 아래턱이 위턱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이빨이 드러난다. 어부들이 물리기 쉽다. 물리면 독이 있다. 갈치는 온몸이 칼처럼 번쩍거리고 만지면 은빛 가루가 묻는다.

물고기는 아가미로 숨을 쉰다. 물고기 아가미는 빳빳한 참빛과 같다. 물고기는 입으로 들이마신 물을 아가미로 걸러내며 숨을 쉰다. 그래서 물고기는 물속에 잠겨서도 바다를 건너간다.

p381
물고기들은 작은 내장을 작동시켜서 원양을 건너갔고 섬으로 다가왔다. 물고기들은 몸으로 파도를 헤쳐나간 무늬를 푸른 등 위에 새기고 있었다.



 

 

반응형

'■ 책과 영화 > □ 소설,수필,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나 카레니나  (4) 2012.12.20
데미안 - 헤르만헤세  (0) 2012.12.13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0) 2012.10.07
장길산3  (0) 2012.09.22
안네의 일기  (0) 2012.09.11

 

▶ 역사적 배경

아마 지금쯤이면 집에 김훈의 '남한산성' 이 도착해 있을 것이다.
책을 읽기 전에 잠시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에 관련된 내용이다.
병자호란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광해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해군 때, 후금이 세워진다. 후금의 세력은 점점 더 강성해지고 조선과 명나라는 임진왜란(1592)으로 너무 지쳐서 쉽게 견제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후금은 세력이 커지다가 명나라의 비옥한 땅을 위해 명에 진출을 한다. 이에 화가 난 명은 전쟁을 시작하고 조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광해군은 고민을 하다가 후금(청)의 세력이 큰 것을 알고 후금에게 항목을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나라는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도와주지 않아서 광해군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왕위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를 이용하여 청은 정묘호란(1627)을 일으켰다.

조선은 후금에게 형제의 나라로 지내겠다는 약조를 받고 청은 물러난다. 하지만 후금의 세력은 더욱 커지고 이름을 청으로 바꾸면서 형제가 아닌 신하의 예를 지키라고 했다. 평소 야만족이라고 여기던 청이 신하의 예를 지키라는 요구를 해오자 조선은 그 요구를 무시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병자호란(1636)이다.

그리고 병자호란으로 왕실 사람들은 강화도로 가고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 군에 대항한다. 얼마 후, 청은 성을 완전히 에워싸고 성안에서는 식량부족과 추위로 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국,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세번 절을 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면서 전쟁은 마무리된다.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의 굴욕이라 하기에는 충분했다.

삼전도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린 것을 청나라의 강요로 비를 세웠다.
이를 쉽게 말한 것이 삼전도비 그리고 정식 명칭은 청태종공덕비이다.
인조의 항복 사실과 청태종의 공을 칭찬한 비로 한자와 만주어 그리고 몽골어로 써져있다.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불명예를 가져온 역사적 사실이지만 또한 절대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가 되었다. 지금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고 역사에서 반성하고 배우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끌어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 책의 절 반쯤을 읽고 나서

김훈의 소설 중 '칼의 노래' , '현의 노래' 다음으로 읽는 책이다.
그의 책은 내용 하나하나가 너무나 사실적이다. 마치 스크린에 그 배경이 펼쳐지듯이 책을 읽어내려가면 내 머리속에 이미 그 배경이 자리를 잡고 시간이 흘러간다.

책을 읽을 때는 나 역시 남한산성 안에 있게 된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방책이 없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나 역시 초조해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 이유는 이미 내가 이 책의 끝을 역사적으로 이미 알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읽을 수록 아프지만 그래도 읽어서 그 아픔을 아로 새기고 기억해야 함을 나는 알고 있다.


▶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고 나서 와이프에게 다음 주말에 남한산성을 한 번 가보자고 했다.
집에서 한 시간의 거리에 있는 남한산성을 이정표로만 보고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리고 무지해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남한산성에 그런 역사가 깃들여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주말에 KBS의 개그콘서트의 코너인 '감수성'의 나래이션
'동쪽의 오랑캐가 처들어와 평양성,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이제 남은 성은 감~수성' 그리고 등장하는 청나라 병사들.. 이렇게 개그의 소재도 새롭게 나에게 다가왔으니 이 책은 나에게 새로움과 경험을 안겨주었다.

이 책의 내용은 비록 비참하고 살육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약간은 억누르고 표현한 글들에서 느껴지는 참아야 하는 설움과 버려야만 하는 자존심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오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침묵과 고요가 나에게 좀 더 강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조만간 더 추워지기 전에 가보려 한다. 그곳 남한산성으로~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