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의 책을 한 권 한 권 찾으면서 제목과 간단한 소개글을 읽어보았다. 《고산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을 '대동여지도'를 남긴 김정호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와 소설을 좋아하기에 망설임없이 손에 잡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글을 남기면서 알게 되었다. '고산자'는 바로 김정호의 호였다.
김정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잠시 찾아보았는데, 그의 생애와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며, 생몰년도 또한 알 수 없었다. 다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지도 판각을 도왔다고 한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삶이 작가 박범신의 눈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기록되지 않은 그의 삶은 이렇게 역으로 이야기를 통해서 찾아가게 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는 1864년(고종1)인 것으로 보아 그는 순조, 헌종, 철종 대에 거친 사람으로 추정된다.
작가는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어 냈을까. 소설 속으로 들어가본다.
고산자의 아버지는 홍경래의 난 때 지원대에 들어오면 전정, 군정, 환곡과 같은 세금을 면해준다는 현감의 거짓약속에 산속으로 들어간다. 후에 아버지와 함께 떠난 사람들은 추위와 식량이 없고, 산을 빠져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서 산속에서 죽게 된다. 그 때 그의 아버지의 손에는 관에서 준 잘못된 지도 한 장이 있었다. 당시 지도는 관에서만 소유하고 있었는데 고산자는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지도가 아닌 자기네와 같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지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구니가 된 묘허와의 인연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야기는 역시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지면서, 그 배경은 홍경래의 난, 조선후기의 세도정치, 천주교와 서학의 배척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사건들이 서로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영토문제를 빼놓지 않는다.
우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보통 지도를 만들 때는 지지를 함께 만든다는 것이다.
p14
지지는 지도에 다 토달 수 없는, 이를테면 각 고을의 연혁 관원 고읍 풍속 호구 봉산 진보 영진 등 수많은 정보들을 편목별로 구분해 기록한 책이다. 지도가 있으면 그에 따른 지지가 있어야 산하와 사람살이가 입체성을 갖추는 것이니, 지도와 지지는 언제나 한통속으로 맺어져야만 피차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번 대동여지도의 판각이 끝나고 나면 당연지사 대동지지 편찬에 곧 착수할 터이다.
책 속에서 소개되는 영토문제는 독도, 대마도, 간도 지역이다.
특히, 독도에 관련된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대동여지도에는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독도에 관한 소식을 듣다 보면, 일본의 고지도에서 독도가 조선의 땅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말을 듣곤 한다. 반대로 일본은 조선의 대표적인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는 독도(우산도)가 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p202
대동여지도는 아래위와 좌우로 접는 분첩절첩식이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스물두 첩으로 나누고 한첩을 다시 동서 팔십 리 간격으로 나누어, 접으면 하나의 서책이 되도록 고안하고, 때에 따라선 그 서책에서도 필요한 첩과 절을 빼내어 간편히 휴대할 수 있게 한 것은, 지도의 효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울릉도는 열다서번째 첩의 가장 오른쪽 절로 배치된바, 만약 우산도를 새기려면 울릉도에서 우산도가 이백 리는 안 된다고 쳐도 최소한 팔십리 간격의 절이 두 세 개가 더 필요해진다. 그중에서도 두 절은 바다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축척을 무시하고 다른 지도들이 그렇듯 울릉도에 바짝붙여서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새기는 것도 불편하거니와, 아무것도 없는 빈 목판을 끼워맞춰 지도를 찍어내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더구나 우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대동여지도를 그릴 때 그의 뜻은 지도로써 사람살이를 이롭게 하자는 것에 두었으니 목판본으로 제작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모든 작은 섬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새겨놓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럴 필요성도 없다. 필사본과는 사정이 이렇게 다르다. 대동여지도도는 펼쳐놓으면 동서로 대략 스물두 척이 넘는다. 판각 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 그가 스스로 그렸던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을 대동여지도에서 오히려 오천여 곳이나 뺀 것도 그렇거니와, 그러저러한 제작과정의 어려움이나 효용성 때문에 우산도를 뺀 것이다.
고지도를 보면 정말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로 정확하지 않고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자기들이 사는 곳이 비대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금처럼 위성이나 하늘에서 바라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유사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실제 김정호는 벗들을 통해서 관의 지도를 볼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지도가 나올 수 있었음은 아마도 평생을 오로지 우리 강토와 산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의 구도적인 삶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마포나루에서 고산자가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떠난 후,
"어떤 이는 그가 일찍이 남몰래 보아둔 옛산에 들어가 푸른 정기에 기대 살아 백 살이 넘고도 젊은이처럼 먹고, 일하고, 자주 환하게 웃었다 한다."
그의 마지막 삶이 정말 이랬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그의 혼이 망가져가는 산하, 강토를 지켜주기를 바랄뿐이다.
지지는 지도에 다 토달 수 없는, 이를테면 각 고을의 연혁 관원 고읍 풍속 호구 봉산 진보 영진 등 수많은 정보들을 편목별로 구분해 기록한 책이다. 지도가 있으면 그에 따른 지지가 있어야 산하와 사람살이가 입체성을 갖추는 것이니, 지도와 지지는 언제나 한통속으로 맺어져야만 피차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번 대동여지도의 판각이 끝나고 나면 당연지사 대동지지 편찬에 곧 착수할 터이다.
p50
지원대에 들어오면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한 전정과 군정과 환곡도 본래대로 거두어 제 배를 불리겠다는 수작이었다. 전정이란 토지세로서, 본래 지주가 물어야 하도록 돼 있는 걸 소작인들에게 물렸는데, 1결당 4두나 6두로 정해져 있는 전세에다 근거 없는 부가세를 보태어 매겨서 배가 넘게 거둬들이는 게 다반사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무렵 토산현이 유독 가렴주구가 심해서 부가세 종류만 해도 무려 마흔 가지가 넘었다고 했다. 군대에 가는 대신 내야 하는 군역도 근거대로 거두어들여서는 양이 안 차니까 어린아이나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황구첨정이 다반사였으며, 무이자로 빌려주게 돼 있는 환곡 또한 고리를 붙여 거둬들이는 게 상례였다.
p61
지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양면성으로 작용한다. 지도가 없으면 사람의 오감이 부풀어오를 대로 올라 스스로 지도가 되지만, 지도가 있으면 지도를 믿기 때문에 오감은 만삭의 돼지처럼 그 운행이 느려진다. 엉터리 지도가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 넣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p63
개구리가 물을 건너가는데, 다 건너간 뒤에도 파문으로 물 위에 개구리의 길이 남아 있는 걸 보고 감동한 적도 있고, 다람쥐가 오르내리는 나무에도 다람쥐의 길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놀란 적도 있었다. 산과 물과 바람이 모두 이어져 서로서로 등대고 어깨 기대어 있는데, 그 자신만이 오로지 혼자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길이 시작되고 물이 시작되고 산이 시작되는 곳에 가면 부용꽃같이 이뻤다는 어머니를 만날 것도 같았다. 놀이 비낀 길이라는 뜻을 가진 석양사로라는 글귀에서는 눈물이 났고, 훈장댁 대청에 걸린 편액에서 붕정만리의 뜻을 알았을 때는 가슴속이 불을 지핀 것처럼 뜨거웠다.
p84
임금과 재상이 강토의 형세를 알아 치국의 저울로 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백성이 땅을 알아 이롭게 가꾸고 넉넉히 거두며, 물과 바람을 알아 살림과 식솔을 보호하고, 험난한 곳과 평탄한 곳, 급한 곳과 완만한 곳을 알아 풍속을 바르게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마땅히 지도는 나라의 것이기에 앞서 백성의 것이라야 한다.
그가 굳이 대동여지도를 목판본으로 새기고 절첩식으로 고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도는 당연히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던가. 목판본 대동여지도로써, 온 백성이 이를 지녀 더이상, 아버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 게 그의 오랜 꿈이다.
p123
도성에서 갖고 내려온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토산과 곡산이 나타나 있는 두 장의 목판본 지도였다. 곡산이 들어 있는 것은 대동여지도 22첩 중에서 열번째 첩의 네번째 판이고, 토산이 자리잡은 것은 열한번째 첩의 세번째 판이었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22첩이 되게 분할하고 동서는 팔십 리 간격에 따라 여러 절로 쪼갠 것은, 이처럼 온 백성이 필요한 판만 분리해 가볍게 소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테면 도성에서 강릉을 가려면 제 13첩의 네 절만 지니면 될 테니까, 구태여 번거롭게 전도를 품고 다닐 필요가 없는 셈이다. 여지껏 모든 지도가 이렇게 고안되지 않은 것은, 지도는 오로지 나라의 것일 뿐이라는 관리와 사대부들의 유아독존적인 생각때문이었다.
어찌하여 지도가 나라의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온 백성이 무릇 서로 통하고 뜻을 나누면서, 내가 가진 걸 네게 팔고 네가 가진 걸 내가 얻어 더불어 잘살고, 땅과 물의 근원을 알면, 밖으로 방비를 든든히 할 뿐 아니라 안으로 실용을 통한 유익함이 많을 것은 정한 이치였다. 무릇 지도란, 나라에서 감춰둘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나눠, 쓰임을 널리 구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p171
길은 끝나는 법이 없다. 앞서 걷는 자가 지도를 만든다. 그는 새삼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먼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p178
나라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도를 비변사 비밀곳간에 한사코 감춰두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스스로 지도를 그려 동행자와 기꺼이 나눠 갖는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고 방대한 지지를 편찬하는 데 있어 제일의 조력자는 그러므로 그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일찍이 그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비옥한 땅을 찾아내기도 하고, 잡초에 묻혀 유실된 의미 깊은 성지나 진보를 드러내어 끊어질 뻔한 역사를 올곧게 되살리기도 하며, 그곳으로 가는 길과 다리를 만들어 기꺼이 국토를 시간과 공간사이로 넓혀놓기도 한다. 상단의 유명한 접주나, 패랭이 쓰고 물미장 짚고 다니는 늙은 행상들 사이에서, 그가 지도에 미친 사람으로 소문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게다가 관아에서 돈을 주고 그에 따라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백성의 안위와 생업을 위해 지도에 미쳤다고 알려진바, 골수 보부상이나 상단 행수들과 그가 호형호제할 수 있는 것은, 떠도는 그로선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p192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엔 ........ 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대마도는 예부터 경상도 계림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고려사]에서부터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기술돼 있는 것은 위당이나 혜강도 알고 있을 터이다.
실록의 기록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건국 초기엔 태조가 우정승 김사형을 시켜 대마도를 징벌한 바 있고, 세종 때 역시 징벌군을 대마도 두지포에 상륙시켜 도주의 항복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대마도가 확실히 조선 영토로 귀속된 것을 세상에 천명했으며, 더 나아가 대마도 도주의 정무보고를 경상도 관찰사가 받도록 문서로써 예시하기에 이른다. 대마도 도주에게 종일품 판중추부사 겸 대마도 주도절제라는 벼슬을 내리고 이에 합당한 녹을 책정해 신하의 도리를 다하도록 한 것은 세조 때의 일이다. 역사적 근거가 그처럼 깊을진대, 웬만한 지도에서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그려넣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국팔도여지도나 흔한 조선 전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조선팔도총람도 그러하고, 체계적인 축척지도로 칭송받는 농포자의 동국지도도 그러하다. 농포자의 동국지도엔 대마도 표식과 함께 대마도 경계에 ... 라고 씌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일본과의 경계를 대마도 끝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p196
"저는 ...... 감히 말씀드리지만,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한 지도를 그리고자 합니다. 이용후생입지요. 제 선친께서 일찍이 실제와 다른 지도로 억울하게 작고하셨습니다. 관에서 내준 지도였어요. 지도란 사람살이의 흥망은 물론이고 목숨줄이 달려있는 겁니다.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강토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으로는 나도 대마도, 우리 땅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적 이상이나 정치적인 목적, 판단은 제 소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시 말해 대마도를 우리 강토로 그려내도록 하는 일은, 여기 계신 대감 같은 분의 소임이지요."
"더구나 고산자로 말할 것 같으면,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아닙니다. 비변사나 규장각 관리라면 당대의 정치적 이념이나 전략에 따라 국토를 달리 정해 그릴 수도 있겠으나, 그에 비해 고산자는 객관성을 엄격히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겠지요. 고산자는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거나 그 근본이 유동적이거나 한 곳은 일단 뒷일로 미루어둔 것이고, 그것은 실학에 바탕을 둔 과학자로서 금도를 지킨 것이라 봅니다. 어떤 당대의 위정자가 여기저기를 그리라고 해서 그린다면, 다음에 다른 권세자가 빼라고 하면 또 빼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사구시의 과학이란 차가운 머리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고산자가 정치적 판단이 뚜렷하지 않은 곳을 지도에서 우선 제외한 것은 올바른 처사라 봅니다."
p202
대동여지도는 아래위와 좌우로 접는 분첩절첩식이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스물두 첩으로 나누고 한첩을 다시 동서 팔십 리 간격으로 나누어, 접으면 하나의 서책이 되도록 고안하고, 때에 따라선 그 서책에서도 필요한 첩과 절을 빼내어 간편히 휴대할 수 있게 한 것은, 지도의 효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울릉도는 열다서번째 첩의 가장 오른쪽 절로 배치된바, 만약 우산도를 새기려면 울릉도에서 우산도가 이백 리는 안 된다고 쳐도 최소한 팔십리 간격의 절이 두 세 개가 더 필요해진다. 그중에서도 두 절은 바다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축척을 무시하고 다른 지도들이 그렇듯 울릉도에 바짝붙여서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새기는 것도 불편하거니와, 아무것도 없는 빈 목판을 끼워맞춰 지도를 찍어내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더구나 우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대동여지도를 그릴 때 그의 뜻은 지도로써 사람살이를 이롭게 하자는 것에 두었으니 목판본으로 제작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모든 작은 섬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새겨놓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럴 필요성도 없다. 필사본과는 사정이 이렇게 다르다. 대동여지도도는 펼쳐놓으면 동서로 대략 스물두 척이 넘는다. 판각 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 그가 스스로 그렸던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을 대동여지도에서 오히려 오천여 곳이나 뺀 것도 그렇거니와, 그러저러한 제작과정의 어려움이나 효용성 때문에 우산도를 뺀 것이다.
p229
압록강 건너편을 서간도라고 부르고 두만강 건너, 송화강 상류와 백두산 동쪽 지역을 북간도라고 이르기도 한다. 간도는 두만강, 압록강과 천산산맥 흑산산맥 등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땅으로, 함경도나 평안도 북부에 비해 비옥한 토질을 갖고 있다. 처음엔 강을 건너가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차츰 탐관오리들의 압제와 가렴주구에 못 이겨 식솔을 이끌고 아예 간도 깊숙이 들어가 터를 잡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땅이 비옷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 일대가 주인 없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에 시달릴 일도 없었고 관아의 노역에 시달릴 일도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일어나고 백두산과 간도 일대에 크게 관심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조상이 세웄던 고구려나 발해의 터전이었다는 것도 심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그러나 최근엔 사뭇 분위기가 다른 모양이다.
청이 제 민족의 발생지라 하여 간도 내륙은 물론 백두산 일대와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걸핏하면 국경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 경비를 강화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자칫하면 백두산이 통째로 저희 땅이라고 우기면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도 얼마 전 간도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도 세금을 물리고, 그 경계를 당당히 청나라에 선포해야 한다는 공론이 한 차례 있었다고 한다. 무릇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경계가 두만강입네 압록강입네 하는 명코ㅔ한 실선으로만 나뉠 수는 없다.
p230
숙종조에 이르러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서쪽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고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삼는다 했으나, 그 토문이 과연 어떤 물줄기를 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p233
그는 여름에야 오래 전 홍경래의 반란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정주성에 닿는다. 관군이 열여드레 동안 땅굴을 파고 들어가 성 밑에 화약을 쟁여놓고 폭발한 다음에야 비로소 무너뜨릴 수 있던 단단한 정주성이다. 성을 폭발하기 위해 관군이 쟁여넣은 화약이 무려 천팔백 근이나 됐다고 한다. 그 최후의 전투에서 죽은 반란군이 홍경래를 비롯해 수백이요 체포돼 참수된 백성이 수천여 명이나 된다고 들은 일이 있다.
p240
청이 들어서면서 백두산을 자기들 조상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성역화하면서 한동안 사람의 접근을 막아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p260
흥선대원군은 무서운 사람이다.
주색에 빠져 지내면서 안동 김씨 일문에게 권력을 맡기다시피 했던 철종 임금이 승하한 것은 삼 년여 전인 계해년(1863) 겨울의 일이고, 뒤이어 흥선대원군의 어린 둘째아들 명복이 고종 임금으로 등극했다. 말인즉, 궁중의 제일 웃어른인 풍양 조씨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하나, 모든 권세가 임금님의 아버지인 흥성대원군 수중에 떨어진 건 자명하다. 때맞추어 동학 교주였던 최제우와 그 일당이 처형됐고, 개혁이 앞세워 서원 철폐를 단행한 것도 그해 겨울의 일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철종 임금의 장인인 김문근이 죽은 뒤로 안동 김씨 일문의 권세도 반 이상 흥선대원군 품 안에 들어가 있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고종 임금으로 낙점한 신정왕후가 누구인가. 기해년(1839) 천주교 박해를 일으켜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처단한 장본인이라 해도 좋은 돈령부영사 조만영의 딸이다. 기해년 박해 때 죽은 이가 수백이라 들은 일이 있거니와, 이번엔 아마 그 열 배, 백 배를 넘을 터이다. 살얼음판 같은 세상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게 많았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하나씩 생겼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작품에 놀라고 매료되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나온 그의 책들을 모두 읽어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작가의 전작을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게 무라카미 하루키와 박범신 두 명이 지금까지의 전부인 듯 하다.
지금까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작품들의 작가를 열거해 보면 김진명, 황석영, 정유정, 천명관, 황정은, 김민규, 조정래, 박범신 정도였다. 물론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아직은 만날 계기가 되지 않아서 접하지 못한 것은 너무 많아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박범신 작가의 작품이 너무 진하게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본성의 미세한 지점까지 파고드는 부분은 너무 예리해서 아프기도 하다. 사람들이 누구나 알지만 표현할 수 없는 그것들을 어쩌면 그는 과감히 표현할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금》을 읽으면서는 몇 번이나 혼자 책을 읽으며 눈물을 떨구었는지 모른다. 그냥 많이 아프고 쓰렸다.
그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며 그들의 내면 속에 떨어진 작은 나뭇잎 하나의 자그마한 움직임도 민감하게 잡아낸다.
p198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에서
이런 박범신 작가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제목은 《산다는 것은》 이다.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부제를 담고 있는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서 박범신이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다소는 풀리는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삶, 산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를 사랑하는 삶, 항상 젊은 낙지, 문어(?) 한마리를 가슴 속에 안고 사는 삶, 봄꽃에 홀로 기뻐하며 소주 한 잔을 하는 그의 삶이 글을 통해 다가왔다.
p68
그러나 젊은 날, 자기 지향을 오지게 쫓아갈 수 있는 동력은 안정감보다 필연적으로 불균형하게 드러나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나는 아직 수정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매사 상대적인 관계로써 안정감을 확보한 '젊은 그들' 보다 여전히 내부적 불균형 때문에 불편하게 살고 있는 '늙은' 내가 오히려 덜 권태롭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p172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평생 남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앉아 원고지와 한사코 마주앉아 있겠는가. 밤새워 원고를 쓰고 난 아침에 아내는 곧잘 '당신 일하는 데 혼자 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미안하네. 왜냐하면 당신 재워놓고 밤새 내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하고 있었거든."
그는 무엇보다도 뼛 속까지 작가이다. 그가 절필선언을 하고 글을 쓰지 않았던 시절이 그는 편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밤새워 원고를 쓰며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를 한다는 그는 분명 이별의 슬픔에 만나지 못하는 아픔에 많이 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이제는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사회의 어른에게 깊은 조언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
노새를 보며 슬퍼하고 봄꽃을 보고 너무 기뻐하던 그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날 선 예리함을 드러내며 사람들이 말하기 망설여하는 것에서도 작가답게 글로써 담아낸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글은 아마도 우리들의 진심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너무 드러내버리니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p210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편차가 심한 민족이다.
심장엔 노무현의 '지향'을 두고 머리로는 이명박의 실용적인 '보따리'를 넘보면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 누구인가. 자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자심의 손이 알아듣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를 버린 것이 누군인가. 그는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남아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미워하는 것으로 양다리를 걸쳤던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명목적인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을 각각 딴 주머니에 넣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마는 우리의 부정직한 이중성, 혹은 과실을 핑계로 한 비겁한 삶의 전략에 그 연유가 있다. 혹시 나는, 우리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할 '짐
꾼'을 잃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아직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네 편의 작품 《소금》,《은교》, 《촐라체》,《산다는 것은》을 만나면서 이미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마다 가슴 아픈 사연이 등장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기꺼이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 온다. 나 역시 삶이라는 것은 기쁘건, 아프건, 한 번쯤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산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인 동시에,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p174
사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예컨대,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쓰고, 가정생활에 30퍼센트를 쓰고, 취미 활동에 20퍼센트를 쓴다. 그는 직장에서도 쉬엄쉬엄 좀 심심하게 일하고 가정에서도 대충대충 오직 습관에 의존해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는 100퍼세트의 에너지를 쓰고 100이라는 인생을 산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100퍼센트를 쓰고 가정 생활에서 100퍼센트, 또 취미 활동에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 이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따라서 삶의 정체성을 뜨겁게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300퍼센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놀라운 산술로 보면 결국 그도 100퍼센트의 에너지로 100의 인생을 살 뿐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연애다. 전자의 인생엔 연애가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혹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다 해도 권태롭지만, 후자의 스타일은 일상에 늘 연애의 본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연애를 동반한 삶은 최소한 쓸쓸하지 않다. 그는 불황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환경을 핑계로 도덕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는 희망이고 도덕이고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꽃이 제 목숨을 바쳐 그것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미물도 마찬가지고 새들도 마찬가지고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지 꽃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다. 그게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는 그 직위나 빈부나 학벌에 관계없이 똑같이 아름답고 고귀하다. 너무도 뻔하고 쉬운 이것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올봄엔 숲이나 뜰로 나가 대지의 굳은 땅을 뚫고 나오는 어린 싹이 부르짖고 있는 도덕상의 선과 악에 대해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람을 보든 자연을 보든 오로지 그 결과만을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동반하기 쉽다. 당신이 지금 보는 아름다운 꽃은 하나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결과 너머의 생명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p26
산악인들이 고산에 오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는, 이른바 극지법 등반.
히말라야 같은 큰 산을 등반하기 위해 본거지를 설치하고 차례로 캠프를 세우면서 정상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흔히 등정주의 등반이라고 한다. 극지법 등반은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므로 그 목표를 위해 방대한 장비와 물자, 그리고 많은 전문 인력들이 동원된다. 이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등반 과정에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높이 오르는가 하는 최종 목표의 높이 서열에 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곳을 정복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등반법으로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이후 세계 산악계에서 거의 사라져가는 전근대적 등반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알파인 스타일
등로주의 등반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최종 높이가 아니라 등반 과정에 있다. 일반적인 코스보다 더 위험한 새로운 코스를 선택하여 타인이나 장비의 도움을 최소화해서, 오로지 오르는 사람의 고유한 판단과 감각에 의존해 정상에 오르는 실존주의적 등반법이다. 오늘날 세계 클라이밍 추세는 단연 알파인 스타일에 방점이 찍혀 있다.
p29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가는 언제나 자신의 '봉우리'를 찾아 오른다.
p34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지는 숲을 보면서 봄과 여름의 숲을 가리켜 '무섭다'고 말한 이상의 통찰력 넘치는 잠언을 생각해본다. 세상도 숲과 같다. 다만 자연의 숲은 홀홀히 옷을 벗는 가을과 겨울이 있지만 인간 세상의 숲은 절대로 가을과 겨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섭고 숨이 막힌다. 무엇을 쫓아 세상의 숲은 저리도 무섭고 울울창창 뻗어가고 달려가는가? 행복을 좇아서? 어떤 행복? 누구의?
p35
내 후각을 후려치고 달아나는 그것은 분명히 방귀 냄새다.
p56
내부 공사를 하면서 오래되어 상판이 휘어 주저앉은 책상을 바꿀 수 밖에 없어 그걸 버리라고 했더니, 버리기 쉽게 한다고 대뜸 망치질이다. 휘어진 책상의 상판이 망치질에 두 조각나는 순간 마치 내 허리가 조각나는 것 처럼 아프다. 오래 쓴 책상이다. 내가 쓴 소설의 3분의 2는 아마 그 책상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원고를 쓰다 말고 지쳐 거기에 엎드려 잠든 적도 많다. 그 책상으로 작가의 외길을 멈추지 않고 갔고, 그 책상으로 아이들 셋을 먹이고 가르쳣으며, 그 책상으로 지금 고치고 있는 이 집도 지었는데, 망치질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끝장나고 만다. 내 삶의 정체성과 내 삶의 가장 뜨거웠던 추억들도 '책상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쓴 소설 중에 <더러운 책상>이 있다.
글쓰기를 지향하는 한 청년의 내적 분열을 다룬 소설인데, 그 소설에서 가리키는 '더러운 책상'은 오래 쓴 낡은 책상이 아니다. '더러운 책상'은 그 책상에서 공부하고 배운 것을 오직 개인의 영달과 소비적인 자본주의 안락에 매진하고자 사용하는 경우의 책상이다. 어떤 이의 책상은 낡았어도 깨끗하고 어떤 이의 책상은 비록 새것일지라도 더럽다. 내 책상은 더러운 책상이었을따. 깨끗한 책상이었을까.
p57
부서진 소쿠리를 마른 그릇으로 재사용하려고 비료포대 종이로 예쁘게 바르던, 또 몽당연필을 못 쓰는 붓 뚜껑에 박아주던 어머니가 그립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머니는 진실로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구분할 줄 알고 있었으나, 대학까지 보낸 내 아이들에게 나는 그것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첵에 가슴을 치는 '불황'의 봄이다.
p66
사랑은 합리성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감정과 다름없어서, 한번 연애에 돌입하면, 무슨 일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내부에서 끊임없이 추락과 상승이 반복되고, 주관과 객관이 전도되고, 이성적 판단과 감성적 선택의 경계가 무화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내부의 열망으로 모든 감각체계가 풍뎅이처럼 부풀어 올라 매사에 균형과 안정감을 잃게 되는 것이다. 공부라고 뭐 다르겠는가. 특히 창작이란 비정상적인 감정의 반응을 포착하여 그 씨앗으로 얻어내는 과실 같은 것이라서, 심리적 균형은 경우에 따라 언제든 독이 될 수 도 있다.
p68
그러나 젊은 날, 자기 지향을 오지게 쫓아갈 수 있는 동력은 안정감보다 필연적으로 불균형하게 드러나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나는 아직 수정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매사 상대적인 관계로써 안정감을 확보한 '젊은 그들' 보다 여전히 내부적 불균형 때문에 불편하게 살고 있는 '늙은' 내가 오히려 덜 권태롭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p77
인간은 피부 색깔로 줄 세워질 수 없고, 문화엔 서열이 없다는 게 세계화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상식이다. 그러나 개발 이데올리기가 만든 경제제일주의는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강력한 습관을 만들어 우리에게 주입시켰다. 제3세계 사람들에게 유난히 야박하게 구는 심리의 밑바닥엔 분명히 모든 생명 값이나 문화 값조차 재빨리 수직으로 서열화하고 마는 천박한 후천적 습관이 작용하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의 콤플렉스, 혹은 가진 자의 우쭐함에 계속 사로잡혀 산다면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 될 게 뻔하다. 얼마 전, 십팔 년이나 우리 땅에 머물렀던 네팔인 '미누'가 내 생각으로는 이미 한국인이 되고만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추방될 때 남긴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내가 한국에서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사람입니까..... 한국이 너무 슬퍼요."
p86
사람의 영혼은 짐승이 사는 시궁창으로부터 신이 사는 하늘까지 걸쳐져 있을 진대, 어떤 층위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겉으로 보아선 그게 그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지 않다. 깊이 들여다보면 지금 이 순간도 누구는 시궁창 가까이 살고, 누구는 하늘 가까이에서 살고, 또 누구는 지상과 하늘로 추락과 상승을 밥먹듯 하면서 산다. 그것이 모여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p87
필요한 건 그리움이고 그리움이 깊어지는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보는 일이다. 혹은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서' 떠나온 것들 때문에, 혹은 이룰 수 없는 허다한 꿈 때문에 깊은 밤 홀로 앉아 그리운 많은 것들이 내 몸 안에 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때로 들여다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목표는 꿈이 아니다. 목표 너머를 보는 마음이 꿈의 시작이고,그로써 그리움이 깊어지면 우리의 삶은 더욱 향기롭게 깊어질 것이다.
p100
올 설엔 늙어가는 아버지도 보자.
뒷전에 물러앉아 헛기침이나 날리고 있는 아버지가 권위를 부리려고 그렇다고만 단정해선 안 된다. 어쩌면 민망해할지 모를 그들을 따뜻이 불러 함께 차례상 제수를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회가 그들에게 역할을 분배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한때 권세를 누렸지만 그들이 애당초 원해서 누렸던 권세는 아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이로부터 권력자로 '길러졌기'때문에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잘모소딘 가부장제의 일차적 희생자인지 모른다.
p103
누가 새삼 훈계를 해서 변화한 것은 더욱더 아니고, 경험의 축적에 의한 변화도 아니다. 저절로 예까지 오고 만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시간이 나를 태워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비와 불심이라는 게 뭐 따로 있겠는가. 시간은 쫓아 발에 물집이 생길 만큼 걷고 걸었더니, 어떤 날 자비심 같은 것이, 사물에 대한 애달픈 연민 같은 것이 내 안에 들어와 세상만물이 다 예쁘다고, 이를테면 마음의 눈을 띄어준 셈이다.
p104
사람처럼 추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독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불쌍한 것이 없고, 그리고 사람처럼 예쁜 것이 없다. 사람 속엔 무엇보다 사랑의 감정이 깃들어 있으니 그럴 터이고, 사람만이 삶의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이다. 모든 게 영원하다면 무엇이 예쁘고 무엇이 또 눈물겹겠는가
p113
힌두교도들에겐 일반적으로 삶을 운영하는 네 개의 사이클이 있다.
어릴 때는 배우고 익히는 학생기로 살고, 철들면 일, 결혼, 부모 노릇하며 가주기로 살고, 늙으면 모든 걸 자식에게 물려준 뒤 숲으로 들어가 유유자적 임주기로 살고,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순례길로 나서 흘러 다니는 유행기로 사는 게 그것이다. 이 사이클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자연으로 보고 그것에 순응해 보편적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p147
"대지는 우리 자신에게 온갖 책보다도 많은 걸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니까. 인간은 장애물과 더불어 겨룰 때 비로소 제자신을 발견하는 법이다."
p149
책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의 얼굴은 착하고 유익한 것으로서 우리들 영혼을 깊이 발효시켜 향기롭게 하지만, 또 하나의 얼굴은 파괴적이어서 우리들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서는 그런 점에서 유익하면서 동시에 위태롭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위태롭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끝없는 일상의 권태와 무위를 책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뻔하고 뻔한 습관적인 삶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경제적이고 빠른 길은 독서 밖에 없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이미 세계가 너무 섬세하고 조직적으로 짜여 있어 어떤 모험도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152
우리는 매 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적 경쟁심이 부추기는 욕망과 알량한 수준의 안락을 추구할 뿐인 '습관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한마디로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이고, 그래서 거의 평생 우리는 관행과 습관에 의지해 삶을 상투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혹하게 말해서 '나의 삶'이 아니다.
p166
바람이 불었고, 감나무 잎에 머물렀던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나서 다시 보니, 그가 거기 없었다.
p167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한 부분이며,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된 존재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사유와 감정이 주변의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여 일종의 의식이 빚어낸 착시현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미혹이 바로 우리 자신을 가두고, 우리를 개인적인 욕망과 가까운 몇몇 사람에 대한 애정에 집착하게 만든다. 살아 있는 우리의 임무는 모든 살아 있는 목숨들과 자연 전체를 포용하기 위해 자비심의 테두리를 좀더 넓힘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러한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p172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평생 남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앉아 원고지와 한사코 마주앉아 있겠는가. 밤새워 원고를 쓰고 난 아침에 아내는 곧잘 '당신 일하는 데 혼자 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미안하네. 왜냐하면 당신 재워놓고 밤새 내 주인공과 뻐근하게 연애하고 있었거든."
p174
사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예컨대,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쓰고, 가정생활에 30퍼센트를 쓰고, 취미 활동에 20퍼센트를 쓴다. 그는 직장에서도 쉬엄쉬엄 좀 심심하게 일하고 가정에서도 대충대충 오직 습관에 의존해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는 100퍼세트의 에너지를 쓰고 100이라는 인생을 산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이는 직장 일에 에너지의 100퍼센트를 쓰고 가정 생활에서 100퍼센트, 또 취미 활동에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 이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따라서 삶의 정체성을 뜨겁게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300퍼센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놀라운 산술로 보면 결국 그도 100퍼센트의 에너지로 100의 인생을 살 뿐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연애다. 전자의 인생엔 연애가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혹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다 해도 권태롭지만, 후자의 스타일은 일상에 늘 연애의 본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연애를 동반한 삶은 최소한 쓸쓸하지 않다. 그는 불황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환경을 핑계로 도덕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는 희망이고 도덕이고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p182
"나는 사랑을 찾아 헤맸다. 첫째는, 그것이 황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황홀은 너무나 찬란해서 몇 시간의 이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남은 생애 전부를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가끔 있었다. 둘째는, 그것이 고독감은, 하나의 떨리는 의식이 차디찬, 불모의 끝없는 심연을 바라보는 무서운 고독감을 덜어주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다녔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랑의 결합 속에서 성자와 시인들이 상상한 천국의 신비로운 축도를 미리 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헤맸다.
p185
나는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 사랑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상기했고, '내게 있어 연애란 유일한 사업이었다'는 스탕달의 고백도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가파른 세계화에 따른 과도한 경쟁 때문에 사랑의 감정조차 재빨리 일상화되고 만다는 식의 보편적 발언들은 너무 일반적인 속단이 아닐까. 삶이 사막처럼 느껴진다면 오히려 사랑에의 갈망이 더 깊어진다는 고전적인 생각은 과연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p185
자본주의적 경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끝없이 이간질해 황폐화시킨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의 갈망이 더 타오르는 것이 인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필요한 것은 타오르는 사랑의 갈망을 자학적으로 억누르거나 일반화하지 않는 정직성의 회복이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랑으로써 존재의 진정한 품위를 높이지 않는 한 행복은 나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p186
나는 "사랑의 결합 속에서 성자와 시인들이 상상한 천국의 신비로운 축도를 미리 보았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아직도 굳세게 믿고 있다.
p187
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 속에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나서 또한 이렇게 썼다.
"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이다.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었다. 황폐한 벌판에서 코스모스를 만나면 나는 또 그것과 똑같은 고독을 느낀다."
p188
"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계절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버려야겠다.
p189
가을이 깊어지면 그러하니, '혼자'가 되자.
p191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하는 모든 것은 어떻게든 곁에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고 이미지뿐이다. 사랑은 영원한 추상명사에 불과하다. 증명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사랑에 의한 헌신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헌신의 주체자에겐 어저며 '자학의 남모르는 축적'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이것은 심한 비유인가.
p198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에서
p210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편차가 심한 민족이다.
심장엔 노무현의 '지향'을 두고 머리로는 이명박의 실용적인 '보따리'를 넘보면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 누구인가. 자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자심의 손이 알아듣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를 버린 것이 누군인가. 그는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남아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미워하는 것으로 양다리를 걸쳤던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명목적인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을 각각 딴 주머니에 넣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마는 우리의 부정직한 이중성, 혹은 과실을 핑계로 한 비겁한 삶의 전략에 그 연유가 있다. 혹시 나는, 우리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할 '짐
꾼'을 잃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p225
<행복론>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알랭은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성공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라고 설파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족하는 지점'
p269
"신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가 한 말이다. 애당초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으므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한 표현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제도적 필요에도, 또는 그 어떤 운명적 우연에도 예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의 지도를 따라 사는 일은 그런 점에서 행복의 지름길이고 존재의 빛나는 증명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이 있는데, 지금까지 원작만큼의 감동을 받은 경우는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책을 왜 읽느냐? 는 질문에 사람들이 의례하는 대답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문제에 대한 답을 툭 뱉어내듯이 하는 말이다. 그 대답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대충 대답하는 '간접경험' 이라고 나 역시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때로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 소설 속 등장인물과 같이 호흡하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눈가에 엷게 빛나는 막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감정을 그저 한 마디 '간접경험'이라고 말해버리기가 싫다.
최근에 깊이 빠져든 작가가 있다. 그 분의 책들을 읽을 때는 정말 무언가 찌릿찌릿하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의 감정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때로는 헛웃음으로 그리고 깊은 한숨으로 나오기도 한다. 바로 박범신 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소금》, 《은교》을 먼저 접하고 나서 이번에 《촐라체》를 만났다. 그리고 나서 앞으로의 그의 전작을 읽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 히말라야 촐라체 등정 후 조난 사고를 당한 주인공들의 삶을 향한 지독한 여정을 그린《촐라체》를 읽으면서는 나도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 개개인 모두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p216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클라이머에겐 적어도 세 가지 용기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김선배의 말도 이제 떠오른다. 가정과 사회를 과감히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가 그 첫 번째이고, 죽음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만한 배짱이 그 두 번째이고, 산에서 돌아오고 나서 세상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의지와 열망이 그 세 번째 용기다.
비록 가정과 사회생활과 제 목숨까지 걸고 산을 오르지만, 산을 오를 때조차, 돌아와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에게로의 복귀를 꿈꾸는 것이 진정한 알피니즘의 정신이라는 뜻이다.
《촐라체》는 산악인 박정헌과 최강식이 악명 높은 히말라야 촐라체에 오르고 나서 하강하던 중 최강식이 박정헌과 안자일렌(함께 등반하는 사람끼리 줄로 몸과 몸을 연결하여 안전을 확보하는 것) 상태에서 크레바스에 빠지고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실화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럼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같은 어머니에 아버지가 서로 다른 두 형제 박상민과 하영교는 히말라야 촐라체에 등반을 하려 한다. 이들이 촐라체에 함께 오르게 되기까지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한채 마음 속 깊이 쌓여 있는 오해가 둘 간의 사랑과 증오로 쌓이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가 그들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작중 화자인 나는 아들 현우가 '외로워서요'라는 말을 남긴채 절로 떠나면서 히말라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두 형제의 캠프지기가 되었다.
상민과 영교는 우여곡절 끝에 촐라체 정상에 오르고 나서 내려오던 중 동생 영교가 상민과 안자일렌 상태에서 크레바스에 빠지게 되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상민은 연결되어 있는 줄을 끊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결국 함께 하기를 마음 먹지만 줄은 바위에 오랫동안 쓸려 잘리고 영교는 크레바스 속에 빠진다. 영교는 크레바스 속에서 이전에 이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 한 산악인을 보게 되고, 그의 피켈을 얻어서 나가게 된다. 상민 또한 후에 크레바스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 그 산악인의 머리카락을 수습하고 나온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둘은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발목이 돌아가며 동상이 걸리면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작중 화자인 나는 베이스캠프로 복귀할 날이 지난 그들을 찾아나선다.
그 속에서 둘 사이의 맺혀진 한이 풀리고, 나는 아들 현우를 이해하게 되고 그동안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소설을 읽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보다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점이다. 영교와 상민이 얼음 위에 피켈로 내리 칠 때, 나 역시 얼굴에 튀는 그 얼음 조각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아이스스크루에 매달려 자는 대목에서는 나 역시 히말라야의 바람을 가슴 속으로 맞아보기도 했다. 안자일렌 상태에서 영교가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 상민의 몸이 줄에 감겨버리고, 갈비뼈가 부러질 때도 내가 그가 되어 그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입김을 호~ 불어가면서 추위도 상상해본다. 영상으로 본다면 그저 시각적으로 어떤 생각과 필터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촐라체》에서는 산악등반 관련된 장비 이름이라던가 전문 용어가 그대로 설명없이 나온다. 일부 용어는 읽으면서 그 모양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문맥 상으로 어떤 것일거라는 짐작은 간다. 그 만큼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점이 무엇보다 좋았으며, 이야기 속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준다.
생사를 오가는 극한 속에서 심적 갈등과 꺼져가는 의지를 잡아가며 결국은 돌아오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히말라야라는 상징을 바탕으로 같이 떠나는 여정이지만 아마도 개개인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아가면서......
"농담이 아니라 망상이겠지. 산소가 부족한 곳에선 그런다더라. 머리가 혼란을 일으켜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고. 권투 선수도 머리를 많이 맞으면 황홀감을 느낀다는 거야. 유도 선수나 레슬링 선수가 목을 졸릴 때도 그렇대. 어떤 권투 선수는 자신도 모르게 더 때려달라고 머리를 들이밀기도 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 다 뽕 맞은 것처럼 되는 거지. 미친 짓이야. 너도 그렇지. 왜 하필 겨울에, 왜 하필 북벽이냐."
p33
라이홀트 메스너는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가려면 어떤 '모럴'이 필요하다고 썼다. '무덤과 정상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뚫고 나갈 때 '오히려 지각이 맑아지고 민감해지며' 마침내는 '전혀 새로운 생의 비전을 연다' 는 것이다.
p48
나의 대답이 그랬었지.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그처럼 고요한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암벽 등반을 다녀봤지만 우리나라에선 어디에 있든 소리가 쫓아온다. 사람소리 찻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라도 들린다. 완전한 정적이란 없다. 그러나 촐라체 베이스캠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맞닥뜨린 것은 숨 막힐 듯한 정적. 정적이 무섭진 않냐. 형이 또 묻고, 뭐 별로...... 내가 대답했다. 형은 그러자 으흐흐흐, 하고 기분 나쁘게 웃고,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이 정적이...... 말하자면 고독의 맨얼굴이야. 이제부터 베이스캠프에서 너도 이놈 맨얼굴을 질릴 정도로 보게 될걸
p100
들쥐
해발 5천여 미터의 눈밭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p101
가만히 있으면 말을 모조리 잊어버릴 것 같았다. 진공 지대의 적막이 아마 그럴 터였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나는 와락 정적이 무서워 짐짓 서성거리면서, 소리 내어, 대답 엇는 그 무엇엔가 말을 걸곤 했다. 내 말을 듣는 것이 들쥐든, 새든, 아니면 히말라야의 죽음의 지대에 산다는 비행거미든, 상관없었다. 평생 동안 이런 정적을, 그것도 하루 종일 만나본 일은 처음이었다. 밤이 되면 그 정적의 공포감은 배가 되었다. 뼛골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p103
떨어져 있을지라도 로프로 연결한 안자일렌 상태일 테니 한 줄에 두 목숨을 매달고 있는 셈이다. 망원경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하나의 판타지로 보였다.
p105
"오늘은 정월 초하루, 설날이야."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헤드랜턴은 여러 개 남아 있었다. 나는 후룩후룩 일부러 소리 내며 라면을 먹고 나서, 텐트 지붕 위에 세 개의 헤드랜턴을 건 다음 불을 켰다. 이제 산 위의 저들은 '특급호텔'을 만난 행복감과 더불어 상민의 불빛과 영교의 불빛과 나의 불빛을 보게 될 터였다. 내가 그들과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세레머니가 아닐 수 없었다.
p111
모든 정상은 허공을 이길 수 없다던 형의 말이 머릿속을 가로지른다. 무엇이 있든 상관없다
p114
임종까지, 생애의 마지막 구간에서 소주병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멍청한, 이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밉거나 원망스럽진 않다. 한번 기울어지고 나자 아버지 인생은 내리닫이 가파른 하강길로 이어졌다. 자살한 건 아니지만 점진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소주는 맑아서 좋아, 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버지 영혼은 소주와 달랐다. 소주는 독을 품고 맑은데, 아버지는 물처럼 맑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약하다는 뜻이었고, 약한 것은 명백히 유죄였다. 나 같았으면 소주에 의지한 굴욕적인 자살보다 차라리 의지적인 확고한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다.
p120
가파른 빙벽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해서 밤을 보낸 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휙휙 눈앞을 스친다. 버너를 떨어뜨린 것은 75도 가까운 경사의 빙벽을 깎아 겨우 엉덩이만 걸친 채 아이스스크루에 매달려 잠들어야 했던 두 번째 밤이고, 마지막 식량으로 남은 파워바와 파워젤이 너무 단단히 얼어서 먹지 못하고 버린 것은 정상의 턱밑에서 비박한 세 번째 밤이다.
p121
온몸에 전율이 지나간다. 로프가 빠져나간다는 것은 함께 이어 묶여 있는 그가 나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이다. 바람을 거슬러 그가 뒷걸음질할 이유는 전혀 없다. 로프가 당겨지는 건 오직 하나의 이유, 그의 추락뿐이다.
p126
나는 여러 번 피켈 샤프트로 표면을 찔러본다. 시멘트 다리처럼 단단한 바닥층이 샤프트 끝에 찍힌다. 이 정도면 안심하고 건너도 될 듯하다. 나는 뒤를 돌아다보며 영교에게 눈짓을 보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내가 추락해도 제동을 걸 수 있게 확보 준비를 해달라는 눈짓이다. 영교가 피켈을 깊이 박고 엎드려 확보 자세를 취하는 걸 확인하고서야 걸음 너비를 최대한 벌려 아이젠의 앞발톱을 사면에 박아 넣는다.
p127
죽음의 아가리를 넘나드는 그 고통을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 녀석은 한사코 내게 고통을 감추고 제 힘을 과시하려 한다. 고통을 감추려니 고통은 당연히 배가된다. 녀석의 힘은 지금 단 하나, 내게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 또는 맹목적인 증오심으로부터 나온다.
p132
그러난 나는 곧 숨을 흐흡, 하고 멈춘다.
형광등의 스타트 전구처럼 깜박이다가 한순간 불이 확 켜지고 만 어떤 결론에 내 자신이 먼저 놀랐기 때문이다. 나는 진저리를 치듯 전신을 부르르 떤다. 자기 파멸의 달콤한 이끌림을 제치고, 돌연 강렬하게 솟구쳐 나와 몸속에서 터져 나오는 또 다른 비명 소리를 나는 그 순간 듣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라는, 목소리가 내 속에서 우주적인 빅뱅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살려면...... 로프를 끊어야 한다......
p137
살려줘. 형. 제발...... 로프를 끊지 마. 그런 말이 입속에서 미끄럼을 탄다. 그러나 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는다. 조금만 기다려봐. 어떻게든 올라갈 거고, 어떻게든 내려갈 거야. 여기서 올라갈 땎까지만 기다려주면...... 형이 혼자 먼저 떠나도 원망하지 않을게. 울음 밑이 터지려고 한다. 나는 공포에 질려서 등강기 손잡이를 잡은 손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고 몸을 흔든다. 형을 믿을 수 없다. 일단 벽에 붙어줘야 한다.
p155
그의 무릎 위에 올려진 피켈이 비로소 눈에 띈다.
목젖이 일시적으로 다시 뜨거워진다. 피켈이다. 살길을 찾은 느낌이다. 습기의 막이 드리워 눈앞이 뽀얐다. 나는 죽은 자의 피켈을 잡는다. 보고에 따르면 추락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떨어지면서 암벽에 부딪혀 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통이 깨질 때에도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추락자는 추락하면서 고통은커녕 오히려 황홀감을 느꼈다는 보고도 있다. 내가 추락할 때도 그랬었다고, 나는 회상한다. 지나온 기억의 편린들이 한순간 수없이 스쳐 지났을 뿐이다. 마치 내 평생을 기록한 필름을 고속으로 리와인드해 보는 것처럼
p174
프랑스 원정팀에 의해 히말라야 14좌 중 최초로 정복된 안나푸르나는 신의 땅에 감히 발을 들여놓은 원정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징벌을 내린다. 정상을 밟고 내려온 에르조그와 라슈날은 심한 동상에 걸리고, ㅅ=테리이와 레뷔파는 설맹에 걸린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테레이와 레뷔파는, 동상에 걸려 나중에 손발을 잘라내야 했던 에르조그, 라슈날에 의지해 간신히 산을 내려오지만 영원히 실명자가 된다. 초월적인 안나푸르나가 그들이 눈으로 본 마지막 풍경이 된 셈이다.
p182
"정신 차렷!"
나는 영교의 헬멧을 피켈로 친다.
"환상이야. 거긴...... 우리가 함께 내려온 곳이란 말이야!"
잠시 거칠게 밀고 닫고 하다 말고, 영교가 이윽고 털썩 다시 주저앉는다. 눈바람에 밀려 내 무릎에 쓰러져 엎드려 있다가 환상으로 마을을 보았던 모양이다. 따뜻한 집의 아랫목, 굴뚝에서 솟아나는 연기, 데운 우유에 녹차를 듬뿍 탄 밀크티, 평화롭게 건초들을 핥고 있는 야크들을 보았을까. 나마스테, 하고 두 손 합장하여 인사를 건네오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만났을지 모른다. 어디 환각뿐인가. 설산의 협곡에선 환각을 만나지 않더라도 한번 눈바람이 휩쓸고 가면 지형지물의 인상 자체가 전혀 달라 보인다. 골짜기는 솟아나고 길없는 길은 가라앉아 숨기 마련이다. 게다가 환각까지 보태지면 지척에 목표 지점이 있더라도 길을 찾을 수가 없다.
p216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클라이머에겐 적어도 세 가지 용기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김선배의 말도 이제 떠오른다. 가정과 사회를 과감히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가 그 첫 번째이고, 죽음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만한 배짱이 그 두 번째이고, 산에서 돌아오고 나서 세상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의지와 열망이 그 세 번째 용기다.
비록 가정과 사회생활과 제 목숨까지 걸고 산을 오르지만, 산을 오를 때조차, 돌아와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에게로의 복귀를 꿈꾸는 것이 진정한 알피니즘의 정신이라는 뜻이다.
p234
5천 미터가 넘는 곳에까지 방목하는 야크들은 주인이 찾기 쉽도록 커다란 방울을 목에 달고 있다. 큰 덩치와 달리 야크들은 여름철에도 풀을 뿌리째 뽑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양들이 풀을 뿌리까지 뽑아 먹어 대지를 황폐화시키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p247
모든 것이 우연해 보여도 고산에서 겪는 모든 인연은 하나도 우연한 게 없다고 탄식하던 김형주 선배의 말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p250
살고 싶은 욕망 이상으로 죽음의 욕망도 강렬할 수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두 개의 욕망은 같은 숙주로부터 갈라져 나온 쌍생아일까
p292
나는 죽은 다음에 보는 것처럼, 그 초월적인 풍경들을 보았다. 히말라야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죽음과 탄생 사이의 과도기적 시간을 '다르마타(Dharmata)' 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잠과 꿈 사이의 밝은 틈새라고 했다. 목숨 값에 억눌려 온갖 욕망으로 이지러져 있던 이른바 불멸의 본성이, 하나가 통째로 끝나고 다른 하나가 통째로 시작되는 그 틈새에서, 금강석보다 견고한 제 본체를 보이고, 보여주는,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바로 다르마타였다. 나는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면서, 이를테면 그때 다르마타의 빛 사이를 날렵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사랑에의 목 타는 갈망이었고, 또한 정수의 기다림이었다.
p299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모인 것은 흩어지고
축적한 것은 소모되고
쌓아 올린 것은 무너지고
높이 올라간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
p308
과연,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우면서 지구의 중심까지 꿰뚫는 듯, 오래 울리는 소리였다. 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 소리의 잔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촐라체를 보았고. 한 점 놀빛까지 이미 사라져서 촐라체 북벽은, 검은 전사의 눈빛처럼 여전히 가파르고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