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생명들이 그러하듯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거북이의 여정은 신비롭기만 하다. 수십 마리의 조그만 생명체들이 모래 속에서 꿈틀거리며 위대한 생명의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새끼 거북이들은 태어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벌써 바다를 향해간다. 그들은 저 멀리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태양에 반사된 빛의 파장에 따라 단호하고 힘차게 나아간다. 새끼 거북이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일까.


새끼 거북이들의 여정은 어미 거북이로부터 시작된다. 어미 거북이가 바다를 횡단해 자신들의 고향인 해안까지 체험쳐 오는 과정은 매순간이 죽음과의 사투다. 바닷속에서는 상어와 고래가 어미 거북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인간이라는 동물 역시 막강한 무기로 그들을 포획하려 한다. 바다의 파도가 가장 높은 날, 그리고 여름 중 가장 뜨거운 날, 어미 거북이는 기나길 여정을 시작한다. 거칠고 드높은 파도를 가르며 2300킬로미터를 헤엄쳐 자신이 태어난 해안으로 돌아온다. 5주에서 6주 전 몸속에 품기 시작한 알을 낳기 위해서다.

해안에 도착한 이 순간이야말로 거북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어미 거북이는 미세한 기척도 없는 한밤중에 도착해 해안으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후미진 모래사장에 둥지를 튼다. 이곳은 바닷물이 닿지 않아 알들을 위한 둥지로 안성맞춤이다.


어미 거북이는 자신의 몸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도록 모래를 파내 30센티미터 정도 깊이의 구덩이를 만든다. 그런 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모래사장 위로 삐죽 내놓고는 사방을 둘러본다.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해변의 모래사장 밑은 어미 거북이들의 발길질로 분주하다. 뒷지느러미로 더 깊은 구덩이를 파는 것이다. 알이 안주할 만큼의 공간이 마련되면 어미 거북이는 50에서 200개의 알을 낳는다. 알을 낳은 뒤엔 곧바로 모래로 둥지를 덮어놓는다. 맹금류로부터 알을 보호하는 동시에 알의 점액이 마르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주기 위해서다. 세 시간여 동안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어미 거북이는 미련 없이 바다를 향해 떠나간다.


2개월쯤 지나면 모래 속에 있던 알들이 깨지기 시작한다. 알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깨고 나와야 할 경계다. 신비롭게도 새끼 거북이는 알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무기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카벙클(carbuncle)'이라고 불리는 임시 치아가 그것이다. 새끼는 무작정 알 안에 안주하고 있다가는 금방 썩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새끼 거북이들은 '카벙클'로 알의 내벽을 깨기 시작한다. 내가 안주하고 있는 환경이 나의 멋진 미래와 자유를 억제한다면, 자신만의 카벙클을 만들어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알의 내벽을 깨지 못한다면 새끼 거북이는 자신을 억누르고 규정하며 정의하는 환경을 세상의 전부라 여긴 채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시작은 이제부터다. 단단한 알을 깨느라 카벙클이 온통 부서지고 피가 난 새끼 거북이를 맞이하는 것은 아빠 거북이도 엄마 거북이도 아니다. 바로 어미 거북이가 알을 낳고 덮어 놓은 30센티미터 두께의 모래다. 이 모래 덮개는 얼마나 단단하게 다져져 있는지 웬만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새끼 거북들이 이 견고한 모래성을 뚫고 나오는 데는 자그마치 3일에서 7일의 시간이 걸린다. 이때 새끼 거북이의 몸무게는 알을 깨고 나왔을 때에 비해 약 30퍼센트 정도 줄어 있다.


견고한 모래성을 뚫은 뒤에도 새끼 거북이들은 섣불리 모래 표면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모래 위에는 바다 갈매기와 독수리 같은 포식자들이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괴물들 역시 이들의 연약한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다. 새끼 거북이들은 숨을 죽인 채 때를 기다렸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운명의 질주를 시작한다. 한순간에 쏟아져 나온 새끼들은 '자석 컴퍼스' 라는 본능적인 감지 장치에 따라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향해 일제히 몸을 움직인다. 어쩌면 바다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새끼 거북이들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질주를 감행한다. 바다라는 새로운 생명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 순간 갈매기와 독수리들이 쏜살같이 하강을 시작한다. 아직 촉촉한 새끼 거북이들은 이들의 간식으로 제격이다. 이 무시무시한 돌진을 감지한 새끼 거북이들은 순간적으로 자신들의 딱딱한 껍질 속으로 사지를 집어넣는다. 갈매기와 독수리가 백사장에서 발견한 것은 딱딱한 껍데기뿐이다. 생존을 위한 이 자발적이고 순간적인 행동이 없다면 새끼 거북이들은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새끼 거북이들은 바다에 도착한다. 바다는 이들에게 천국인 동시에 지옥이다. 새끼 거북이들은 바다로 뛰어든 뒤 48시간 동안 미친 듯이 수영을 한다. 그들이 향해 가는 곳은 바다의 가장 밑바닥인 심연이다. 이곳은 그들이 가야 하는 본연의 장소다. 그곳에는 이들을 위협하는 큰 물고기들이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수압이 높아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등딱지와 배딱지를 단단하게 만드는 수련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새끼 거북이들은 자신들만의 인생 여정을 시작한다.


바다거북이의 생후 1년간의 바다 생활을 관찰한 이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기간은 '실종의 기간' 으로 불린다. 이 1년을 홀로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비로소 '바다거북이'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 1년이 지나면 떠다니는 미역에 몸을 실어 영양을 보충한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면 짝짓기를 한다. 짝짓기에 성공한 암거북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알을 낳는다. 새끼 거북이가 어른 거북이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될 확률은 고작 0.1퍼센트에 불과하다.  1000마리 중 한 마리만 생존할 뿐, 대부분은 이 기나길 여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 경계에 서 있다면, 새끼 거북이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경직된 세계관을 깨야 한다. 나를 보호하고 감싸주었던 알이 나를 감금한 채 죽게 하는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알로 인식하는 순간, 입 안에서 카벙클이 돋아난다 .카벙클은 내가 갇혀 있는 이 세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도구다. 이 카벙클로 우리는 편견과 상식, 전통과 관습, 흉내와 부러움이라는 알을 깨고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 <심연> 中, 배철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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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한 편의 시, 한 편의 노래, 한 편의 문학 또는 한 편의 성찰문이 그의 마음에 들게 되는 그곳에서 비로소 인연은 시작된다. 

- 헤르만 헤세, ‘세계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中 –


인연은 한 편의 소설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의 소설로 자연스럽게 인연의 끈이 놓여졌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들판이 생각나는 배경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평범하지 않은 사랑이야기까지 서로 비슷한 듯 다른 두 소설은 그렇게 인연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독자에게 각자의 손을 내밀어 본다. 어느 손을 잡든 우리는 새로운 인연과 마주하게 된다.


1846년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이 영국에서 출간된다. 마치 삼형제의 시를 모아놓은 듯한 제목이다. 그 이듬해 커러 벨(Currer Bell), 엘리스 벨(Ellis Bell), 액턴 벨(Acton Bell) 이라는 필명으로 각각 작품을 발표한다. 낯선 이름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제 이름과 발표된 작품을 알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앤 브론테’의 『애그니스 그레이』 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브론테 자매로 불리며, 작품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 이 중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로 변주되고 있다.


▲ 1834년 브론테 자매의 남동생 브란웰이 그린 초상, 왼쪽부터 앤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샬롯 브론테, 가운데는 브란웰인데 그가 지운 것으로 보임

처음에 브론테 자매들은 왜 남자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을까? 당시는 여성이 성별만으로도 차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남성중심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문학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실례로 당시 한 평론가는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대해서 극찬하다가, 작가가 여자임이 밝혀지자 익명으로 혹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이 발표된 지 1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고 있으니, 그것으로 이미 평가는 이루어진 셈이다. 그 중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은 배경적 분위기는 비슷한 듯 하지만 서로 다른 사랑이야기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 당당하며 독립적인 여성의 사랑, 『제인 에어』


() 영화 <제인 에어>, 2011,   () <제인 에어> 책 표지


고아인 제인 에어는 외숙모와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외숙모에게 학대를 받고 로우드 자선학교로 보내진다. 그곳은 엄한 기독교 학교였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졸업한 제인 에어는 손필드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저택의 주인인 괴팍한 성격의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미 결혼한 미친 아내가 있으며 또한 그녀가 그 저택에 살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를 떠난다. 후에 뜻하지 않은 유산 상속을 받고, 다른 이에게 청혼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로체스터가 뜻밖의 사고로 몸이 불편해진 것을 알게 되자 제인 에어는 다시 로체스터에게 돌아간다.

『제인 에어』를 지금 시대의 눈으로 읽는다면, ‘신데렐라 이야기’가 살짝 변형된 구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선을 170년 전 영국으로 돌려보자.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로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녀를 선택한 남자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존재였다. 그런 시대에 『제인 에어』가 등장한 것이다.

제인 에어는 어릴 적 학대하는 외숙모와의 삶과 억압적인 기숙학교에서의 생활에서도 자기만의 생각을 뚜렷이 밝힌다. 그리고 언제나 간절히 자유를 갈구한다.

나는 자유를 원했다. 자유를 갈망했다. 나는 자유를 위해서 기도를 올렸다. 기도 소리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흩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기도를 그치고 좀 더 겸손한 탄원을 했다. 변화와 자극을 달라고 기원했다. 그 간절한 애원마저 막연한 공간 속에 휩쓸려 들어가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게 새로운 고생살이를 하도록 해주소서’   - 『제인 에어』 中 -

로체스터와의 사랑에서도 제인 에어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불평등한 관계가 아닌 서로 같은 인격체로서 마주하는 사랑이기를 원한다.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지니고 있어요. (중략) 지금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사실상 우리는 현재도 동등하지만 말이에요.” - 『제인 에어』 中 -

『제인 에어』는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문학이라는 수단으로 당시 사회를 매섭게 꼬집고, 여성들에게 감추어졌던 목소리를 찾아준 매개였을지도 모른다.

■ 광기 어린 비극적 사랑 그리고 복수, 『폭풍의 언덕』

() 영화 <폭풍의 언덕>, 2011,   () <폭풍의 언덕> 책 표지


폭풍의 언덕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존재하는 액자 구조의 소설이다. 히스클리프에게 세를 얻어서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사는 록우드라는 인물이 넬리 딘이라는 하인에게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 크로스라는 두 공간적 배경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복수라는 진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언쇼 어른은 어느 날 리버풀에 다녀오면서 부모 없이 떠돌던 한 남자 아이를 데리고 온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히스클리프라고 이름을 지어준다. 언쇼의 아들인 힌들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하게 되고, 반면에 딸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언쇼가 죽으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하인 취급을 하며 학대하고, 캐서린은 린튼 집안의 에드거와 결혼을 약속한다. 이에 히스클리프는 워더링하이츠를 떠난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한 히스클리프가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캐서린을 향한 사랑이 시작되며, 동시에 광기 어린 복수가 시작된다.


▲ 『폭풍의 언덕』의 등장인물 관계도


『폭풍의 언덕』에서는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린 복수와 거친 사랑이 모두 보여진다. 그는 오직 복수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이와 결혼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 마저 그 수단으로 이용하고 아이들에게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그의 복수는 사랑하는 캐서린이 죽음으로 더욱 격렬해 진다. 


내 눈에 그녀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뭐가 있겠어? 무엇 하나 그녀 생각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어야 말이지! 이 바닥을 내려다 보기만 해도 그녀의 모습이, 깔린 돌마다 떠오른단 말이야! 흘러가는 구름송이마다, 나무마다, 밤이면 온 하늘에, 눈이면 눈에 띄는 온갖 것들 속에, 나는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둘러싸여 있단 말이야! 흔해 빠진 남자와 여자 얼굴들, 심지어 나 자신의 모습마저 그녀의 얼굴을 닮아서 나를 비웃거든. 온 세상이 그녀가 전에 살아 있었다는 것과 내가 그녀를 잃었다는 무서운 기억의 진열장이라고! - 『폭풍의 언덕』 中 


『폭풍의 언덕』의 흡인력은 대단하다. 히스클리프의 치밀하고 광기 어린 복수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두 입술은 굳게 다물었고 깊이 숨죽이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도 했다. 압도적인 흡인력만큼 이 작품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모비딕』, 『리어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히며, ‘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 브론테 자매, 너무나 빠른 이별


▲ 브론테 자매 동상


브론테 자매들은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을 작품을 남겨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 땅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브론테 자매의 아버지인 패트릭 브론테는 영국 국교회의 사제였다. 그는 1 5녀의 아이들을 두고 아내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등지자, 아이들을 기숙학교로 보낸다. 그곳에서 샬롯 브론테의 두 언니는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렸고, 결국 결핵으로 11, 1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이 때의 기억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오롯이 담긴다.

아들이었던 넷째 브란웰은 알코올,아편 중독으로 31살의 나이에 사망한다. 뒤를 이어 『폭풍의 언덕』이라는 역작을 남긴 에밀리 브론테가 30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막내인 앤 브론테 역시 29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셋째인 샬롯 브론테 역시 38살의 이른 나이에 임신 중 사망하게 된다.

어떻게 한 자매에게서 이런 훌륭한 작품들이 나왔는지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관심을 갖는다. 또한, 모두 너무나 이른 나이에 수많은 꿈을 접어야 했기에 그들의 삶이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른 삶을 살았지만 언제나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겼던 샬롯 브론테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새로운 인연을 기대해본다.





인생 (Life) – 샬롯 브론테

인생은 정말 현자의 말처럼 어두운 꿈만은 아니랍니다.
때론 아침에 살짝 내린 비가 화창한 날을 예고하거든요.
어떤 땐 어두운 먹구름도 끼지만 다 금방 지나간답니다.
소나기가 와서 장미가 핀다면 소나기 내리는 걸 왜 슬퍼하죠?
빠르게, 그리고 즐겁게 인생의 즐거움은 가버리죠.
고마운 마음으로 즐거이 그 시간들을 즐기세요.
가끔 죽음이 끼어들어 소중한 이를 데려간들 어때요.
슬픔이 승리하여 희망을 누른들 또 어때요
그래도 희망은, 쓰러져도 꺾이지 않고
다시 탄력있게 일어서거든요.
그 금빛 날개는 여전히 활기차고
힘차기 우릴 버텨주죠
씩씩하고 그리고 두려움 없이 시련의 날을 견뎌내 줘요.
용기는 절망을 이겨낼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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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

그리고 또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中 -


불안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매몰되어 버릴까봐 

답답하다. 내가 하는 일이 '밥벌이의 지겨움'으로만 남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초조하다. 언젠가 나도 교체되어 버릴 부속품으로 전락되어 버릴 수도 있을 테니

간절하다. 이 생각들에서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무언과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어쩌면 '왜?' 가 솟아오르는 지점이 아닐까.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 이게 부조리를 인식하는 접점이다.

이것에 매달리자. 이게 삶을 바꾸게 만들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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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


'성공한 이들은 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착각에 빠진 대중은 벌거벗은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인구의 2퍼센트에 불과한 지배계급인 영사(영국 사회주의) 내부 당원들이 13퍼센트의 실무자 중간계급을 동원하여 85퍼센트의 노동자 계급을 사육하는 동물처럼 지성적인 사고의 싹을 잘라내며 온갖 선전선동과 공포의 조작으로 통치하듯 말이다.`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中



우리는 어쩌면 지금도 문제는 '노력'이 부족해서 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노력' 부족이면 당연히 답은 '노력'을 더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노력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도 부족하답니다. 결국 또 다시'노력' 부족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나이를 먹어보니까, 사회에 찌들어 보니까 그런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분명 나보다 노력하는 것 같지 않은데 누군가는 잘 되는 거 같습니다. 태어날 때 부터 부의 차이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평등하다고 하지만, 결국 기회는 평등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자식들은 추운 겨울 휴전선을 앞에 두고 손발을 비벼가며 근무를 서고, 누군가는 코너링이 좋다는 이유로 경찰 고위직의 운전병이 됩니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그런 걸 가져다 붙이니 더 화가 납니다. 멍청한 놈이 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복 받쳐 오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성적표는 말 그대로 양가집안입니다. 양과 가가 수두룩 합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시 입학을 맡았던 이들은 청문회 자리에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국정청문회 대답이 서로 다릅니다.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대학을 이끌고 있습니다. 화가 납니다. 너무나 화가 나네요.


2016년 사람들이 스스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사람들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나름 힘을 발휘해서 서로 이권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은 해왔으니까요. 그런데 하나씩 들어나는 전황들을 살펴보니 지금 당신들이 하루하루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나름 의미있게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에 너무나 큰 회의감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힘든 하루를 보내도 그래도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만으로 하루하루 더 노력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너무나 크게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아니 분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래도 저 같은 사람이 하루하루 노력하는 삶을 살게 하는 동력마저 잃게 만들지 않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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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1931년 발표된 헬렌 켈러의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을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했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저는

단지 감촉을 통해서도 나를 흥미롭게 해주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저는 잎사귀 하나에서도 정교한 대칭미를 느낍니다.

저는손으로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표피를

사랑스러운 듯 어루만지기도 하고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을 쓰다듬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긴 겨울잠을 깨고 나오는 자연의 첫 번째 몸짓인 

새싹과 새순을 찾아보려는 희망으로 

저는 나무줄기들을 더듬어봅니다.


(......)


제게 있어서 계절이라는 꽃수레는

너무나 떨리는 끝이 없는 드라마이며

그 활기찬 흐름은 저의 손가락 끝을 스치며 지나갑니다.


때때로 이런 모든 것들을 너무나도 보고 싶은 열망에

제 가슴은 터질 것만 같습니다.


단지 감촉을 통해서만도 이처럼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만약에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 『감성의 끝에 서라』 中 -


헬렌 켈러는 내가 만약 대학교의 총장이 된다면, "전공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필수 과목을 하나 만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눈을 잘 쓰는 법 How to use your eyes' 입니다. 헬렌 그녀는 생후 19개월 무렵 병으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만지는 것, 바로 촉각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감촉만으로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보는 것이 허락되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지금 저에게 허락된 시각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복과 축복을 너무나 쉽게 일상화 시켜 버립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이제는 당연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수많은 책들에서 '익숙한 것에서 낯설음을 경험하라' 고 합니다. 어쩌면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자신의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고 삶의 문 안쪽으로 들이는 순간이 바로 세상과 자신의 삶이 변하게 만듭니다.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를, 그것이 지금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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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력의 사다리 ▶ 



퍼트리샤와 캐런의 사다리에서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지식이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것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죽으면, 나한테 전화해서 어떤지 알려 주세요." 라고 말한다. 대학생은 "내 눈으로 본 게 진실이야. 토 달지 마"라고 절대적인 확신에 차서 말한다.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추상 개념 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로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알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마땅한 사람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문제를 충분히 생각하기보다는 권위자의 지식에 의존한다. 그 권위자들이 어떻게, 어디서 그런 지식을 얻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음식이 슈퍼마켓에서 생산된다고 말하는 도시 아이들처럼, 그들은 어떤 사실이나 개념 뒤에 숨어 있는 힘을 보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봤으니까 사실이야"라고 우리가 흔히 하는 말도 이런 방식의 사고를 보여 준다.


세 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역시 권위자에게 의지하지만 그 권위자의 한계를 인지한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문제는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채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 학생은 퍼트리샤와 캐런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그건 지식이 되겠죠. 그 전까지는 그냥 추측에 불과해요."


지금까지의 세 단계에는 공통점이 있다. 퍼트리샤와 캐런은 그것은 '전(前) 반성적 사고'라고 부른다. 이들 단계에서 사람들은 지식이 권위자에게서 나온다고 믿는다. 선생님이나 할머니가 진실이라고 말해주는 것, 또는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만이 진실인 것이다. 그것만 기억하면 학습은 끝난다. 거기에 어떤 의문도 의혹도 품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다.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은 어젯밤에 내가 만났던 택시 기사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모퉁이를 돌면서 이렇게 말을 꺼냈다. "자기가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죠. 똑같은 증거 하나를 두고도 사람마다 보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퍼트리샤와 캐런에게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진화론이 확실히 증명된다면 더 믿음이 갈 거예요. 피라미드처럼, 그 진실이 영원히 밝혀지지 못할 것 같아요.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요. 그때 살았던 사람이 없으니까요." 택시 기사나 학생은 지식이란 불확실하고 사람마다 자신만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증거와 타당한 이유를 대면 무엇이든 정당화할 수 있지만, 어떤 증거를 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 단계의 학생들은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뒷받침해 줄 이유와 증거만 찾을 것이다. 비판적 사고에 대해 연구한 철학자 리처드 폴은 이런 종류의 추론을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라고 부른다.


다섯 번째 단계에 올라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거기까지 다다른 이들은 모든 것을 증거에 대한 해석으로 본다. 우리는 그 해석들을 알 수는 있어도 판단할 수는 없다. 철학자마다 다른 식으로 풀이할 것이다. 한 학생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해석을 읽어봤어요. 교수님은 제게 그것들을 평가하라고 하시지만, 어느 게 더 낫고 더 못한지 어떻게 알겠어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퍼트리샤와 캐런은 한 학생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그래서 문제를 공략하는 방법도 서로 달라요.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내 의견이 똑같이 진실일 수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증거에 근거하고 있죠." 인 단계의 학생들은 수많은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지만, 쉽게 어떤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단계 역시 공통점이 있다. 퍼트리샤와 캐런이 명명한 '유사 반성적 사고' 단계에서는 증거가 중요하지만, 그 증거를 어떻게 사용해 결론을 이끌어 내느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 단계의 학생들은 뒤죽박죽 섞여 있는 해석들을 볼 줄 알고 그 각각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지는 못한다. 퍼트리샤와 캐런은 이렇게 썼다. "그들은 증거를 이용하지만, 증거가 결론을 도출해 내는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판단을 개인 특유의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더더욱 오르기 힘든 것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단계, 즉 퍼트리샤와 캐런이 말한 '반성적 사고' 단계다. 이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지독히도 복잡하고 성가신 문제를 만났을 때 여러 시각에서 증거를 평가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해석들과 아이디어들을 찾는다. 여러 관점과 다양한 맥락에서 증거와 의견들을 서로 비교한다. 복잡한 문제에 대한 잠정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증거의 타당성을 재면서 동시에 이렇게 묻는다. "이 시점에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이 증거는 얼마나 유용할까? 꼭 결론을 내야 할까, 아니면 불확실한 이 상황을 그냥 감내해야 할까? 잠정적 해결책이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 줄까, 아니면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킬까?" 한 학생은 두 연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확신하긴 아주 어려운 일이죠. 확신에도 그 정도가 있잖아요. 어떤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은 어느 시점에 가면 확신이 서겠죠."


여기서 잠깐 멈추고, 여섯 번째와 마지막 단계를 구분해서 이야기해보자. 여섯 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살피고, 증거를 찬찬히 숙고한 다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증거와 의견들을 여러 관점에서 비교해 그 상대적인 무게를 고려하고 해결책의 유용성을 판단한 뒤, 이 시점에 결론을 도출해야 할 실리적인 이유가 있는지 결정한다.


일곱 번째 단계의 사람들은 비구조화된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퍼트리샤와 캐런이 말하는 '합리적 탐구'를 통해 지식을 구축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지한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증거를 통해 합리적이고 개연성있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새로운 증거나 참신한 시각 또는 새로운 연구 수단이 나타나면 재평가에 들어간다. 증거를 검토할 때는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은 무엇인지 자문해 본다. 퍼트리샤와 캐런의 연구에 참여한 학생은 말했다. "어떤 주장을 평가하려면 그 명제가 얼마나 면밀한지, 어떤 추론과 증거를 사용했는지, 그 사람이 다른 주제에 대해 펼쳤던 주장에 비해 얼마나 일관성 있는지 보면 돼요."


이런 높은 차원의 사고력은 깊이 있는 학습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최고 단계의 합리적 탐구는 지식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반영하며, 인생에서 어려운 선택을 할 때 바로 그러한 이해가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떤 방식으로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학생,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된다.

(중략)

최고의 수준의 학생들은 한 조각이 더 큰 그림에 맞춰지는 원리를 이해한다. 그들은 어떤 문제나 주장을 분해해서 분석하고, 그 해결책에 일반 원칙을 적용한다. 아이디어를 서로 비교, 대조하고, 원인을 설명하며, 아이디어들을 통합시킬 줄 안다. 뿐만아니라,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나 주장을 완전히 다른 영역에 적용할 줄 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새로운 이론을 도출해 낸 다음 그 가설을 시험하는 이런저런 방법들을 생각한다.


<출처 : BOOK - 최고의 공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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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심오한 목적을 가지고 독서를 한다. 책을 펴기 전에 여러가지 의문을 머릿속에 담아 둔다. 무슨 내용일까? 요점은 뭐지? 다른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될까? 내 생각을 어떻게 자극할까? 그들은 글 속에 담긴 의미를 찾고, 그것을 다른 문제에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추리 소설의 탐정처럼 글의 내용을 깊이 파고들면서, 거기서 생겨나는 의문들로 더 많은 것을 탐구한다. 문자와 낱말은 개념, 사건, 사상 같은 책 바깥의 현실을 상징하는 기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글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모색하고, 인쇄된 글자를 창문 삼아 다른 뭔가를 보기 위해 애쓴다.


2.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 책 속에서 발견할 것들을 추측하고, 책을 읽어 나가면서 그 예측들을 확증하거나 떨쳐 낸다. 훌륭한 독자는 책의 내용을 미리 상상한다. 의문점들과 가능한 해결책을 짐작한 다음, 그 추축들을 책의 실제 내용과 비교한다. 이런 습관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답'을 찾기 전에 추측하고 짐작하는 습관을 기른 사람들은 흔치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난 융통성 있는 전문가가 될 확률이 높다. 그들은 상투적인 방식이 통하지 않는 미지의 문제에 도전하는 것을 즐긴다. '배우기' 전에 추측하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아주 명백해 보여 쉽게 떠오르는 답이 나중에 전문가의 답과 비교해 보면 한참 모자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다음 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에서 허점을 찾을 것이다. 학습 과학자 존 브랜스퍼드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면 이전에 고수하던 개념과 행동을 버려야" 한다면서, 권위자의 글을 읽기 전에 가능한 답들을 먼저 추측하는 습관을 기르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3. 그들은 책(특히 논픽션)을 읽기 전에 이런저런 식으로 검토부터 한다. 차례를 보면서 그 목적과 구조에 대한 단서를 찾고, 책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개요를 읽고, 제목들을 쭉 훑어보고, 논거와 결론을 인지한다. 이 책은 귀납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연역적인 구조인가? 언제 출간되었는가? 내가 저자에 대해 아는 사실은? 저자는 왜 이 책을 썼는가? 그가 답하고자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30~60분 동안 그 책에 대한 질문들을 생각합니다." 목록이나 도표가 있는가?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이 책은 시리즈 중 한 권인가? 그렇다면 그 시리지의 목적은 무엇이고, 이 책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나는 어떤 의문에 답하려고 하는가? 이 책은 그 의문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아니면 내 주된 관심사에서 조금 벗어난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가? 나는 학술 논문의 초록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초록을 읽어야 할까?


4. 우리 최고의 학생들은 책을 읽으면서 더 큰 문제와의 연결 고리를 찾고, 잠시 멈춰 깊은 생각에 빠진다. 책의 여백에 메모를 하거나 공책에 자신의 견해를 적어 둔다. 가끔 자신이 묻고 싶은 의문들로 고심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들 독서 과정의 일부가 된다. 

특히 과학, 수학, 공학 분야에서 연결성을 찾는 일이란, 개념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아이디어들의 속뜻과 그 응용 방법을 생각하고, 어떤 주장이나 실험의 논거에 대해 묻고, 각 단계 뒤에 숨어 있는 아이디어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새로운 이해를 더 큰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다.


5. 허구 문학을 읽을 때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과 교감한다. 이 소설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내 인생과 앞으로 내가 창조하고픈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는 데 도움이 될까? 그들은 시의 아름다움과 리듬을 감상할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문학은 문화의 번영으로서, 시간과 장소의 거울로서 탐구할 줄도 안다. 문학에 담긴 도전적인 가치관과 시각을 깊이 생각하고,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징과 은유를 분석할 줄 안다. 이 소설은 목표 추구의 이야기인가? 더 넓은 세상의 축소판? 하나의 긴 여정보다는 동물원이나 박물관 같은 소설인가? 특정 감정을 뽑아 내기 위해 언어는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가? 나는 왜 울거나 웃는가? 이 소설은 내 연민을 자아내는가? 다른 세상을 간접 체험하며 작가의 가치관과 시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시간과 공간, 리듬과 움직임, 실루엣과 소리를 어떻게 다루는가? 다른 분야, 예를 들면 물리학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는가? 내가 속한 문화는 어떤 식으로 그 주제를 다루는가? 이 작품은 정의와 도덕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이 희곡이나 소설에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 내 배경과 출신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사용하는 문학적 관습에 나는 왜 이런 식으로 반응할까?


6. 논픽션을 읽을 때는 먼저 논점들을 찾고, 모든 주장이 하나의 논점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논점은 결론과 그 전제를 담고 있음을 깨닫는다. 가끔은 명확하게 표현되기보다는 암시되는 결론이나 전제들이 있다는 사실도 있다는 걸 인지한다. 

한 논점을 적극적으로 풀어 헤쳐 분석하면, 각 부분들에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제들이 결론을 뒷받침해 주는가? 같은 정보로부터 어떤 대안을 뽑을 수 있을까? 이 책이 놓치는 부분은? 전제를 받아들이면 결론도 받아들여야 할까? 논거가 개연성이 있는가? 이 논점은 어떤 주된 개념을 사용하며, 어떤 가졍을 하고 있는가? 내가 다른 수업에서 또는 인생에서 배운 것과 연결되는 지점은 없는가?


7. 그들은 논거의 질과 성격을 평가한다. 추론에서 비롯된 논거라면, 그 추론은 무엇으로부터 이끌어 낸 것인가? 같은 논거를 다른 방법으로 볼 수는 없을까? 관찰에서 비롯된 논거라면 누가, 어떤 시각으로 관찰한 사실인지 알아야 할까?


8. 그들은 지금 읽는 책과 전에 읽었던 다른 글들이 서로 일치하고 불일치하는 점들을 인지한다. 두 저자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또는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입장에서는 일치하거나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린 원인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가진 두 역사학자가 그때 미국이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그 이견이 순전히 가치에 대한 것이라면, 논거는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믿음의 차이라면, 그때는 논거가 중요해진다. 상충되는 입장은 가끔 믿음의 차이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가. 이런 점을 깊이 생각하며 책을 읽으면 정신이 더욱 예리하고 체계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9. 우리의 연구 대상들은 책을 읽으면서 개요를 작성하고, 나중에 메모를 거듭해 그것을 점점 줄여 나간다. 그 과정에서 논거와 결론을 평가하고, 사용된 개념과 가정을 인지하고, 그 함축적 의미와 적용법을 생각한다. 사전을 항상 옆에 끼고 있으면서 생소한 단어들을 찾아보거나 문맥으로 의미를 짐작한 다음 사전을 확인해 자신의 추측을 시험해 본다.


10. 그들은 모든 인지 활동을 동시에 한다. 기억하고, 이해하고, 응용하고, 종합하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 활동을 통합적인 형태가 아니라 차례대로 공략하도록 강요하는 대학 강의들이 많다. (중략) 벤자민 블룸과 그의 동료들이 인간의 두뇌가 할 수 있는 활동들(기억,이해,응용,분석,종합,평가)의 목록을 내놓았을 때, 그것들이 차례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많은 교수가 그런 식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11.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책을 읽는다. 심리학자인 존 바그와 그의 동료들은 학생들이 마치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공부하면 암기력과 이해력이 더 올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는 고전이 된 한 실험에서, 존 바그는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 낱말을 주면서 스스로 공부하게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드 번째 그룹은 실제로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훨씬 더 많은 단어들을 기억했다. 우리 최고의 학생들은 이러한 원리를 단순히 암기뿐만 아니라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와 응용법을 이해하는 데도 적용했다. (중략) 세인트올라프 칼리지의 한 학부생은 이렇게 전했다. "아주 복잡한 과학 개념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면 개념을 속속들이 이해해야 하고, 가르치는 방법을 설계할 때는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공들여 공부하게 된다.


우리가 만나서 인터뷰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나는 사실 공부를 그리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책은 많이 읽었지만요"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즉, 벼락치기나 기게적인 암기에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품으며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책을 읽을 때는 개념과 논증들을 분석했다. 이 개념이나 정보의 어떤 점이 내 흥미를 끌고 있는가? 그것은 내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은 이치에 맞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수업에서 토론했던 주제나 중요한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렇듯 의문을 제기하면서 깊이 탐구하면, 이해와 응용은 물론 암기까지 용이해 진다.


- [Book ] 최고의 공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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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오늘날의 학문불류로는 나누기 곤란한 일종의 통합교과적 텍스트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읽으려면 말 그대로 통합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고전읽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힘들더라도 고전을 열심히 읽으면 '통합적 지식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고전은 이러한 지식인을 훈련시키는 데에도 아주 좋은 교재라 하겠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 한 권의 고전 전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고전읽기를 하는 독자의 기본적인 물음이다. 아래는 몇 가지 대답이다.


첫째, 저자와 그의 시대를 철저히 이해하기, 저자가 그 책을 쓰던 순간을 상상하기, 이로써 읽는 이는 텍스트의 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도 저자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둘째, 전체를 통독하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해보기, 한 권의 책이 많은 주장을 담고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딱 집어서 이것 하나라고 할 만한 것은 반드시 있다. 책 한 권을 읽고 '이 책의 주장은 한마디로 이것'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고도의 추상적 사유를 할 줄 안다는 증거이다. 자주 해보면 늘어난다.


이상 두 가지는 일종의 몸풀기에 해당할 것이다. 책을 읽기 전에 그 책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책은 살아 숨쉬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읽으면서 일종의 대화를 하려면 이런 종류의 몸풀기가 많이 요구된다. 읽고자 하는 책과 정말 가까워지고 싶으면 읽든 읽지 않든 늘 책을 끼고 다니면서 자꾸 쓰다듬어 보고, 들춰 보고 하면서 표지의 질감, 활자 자체의 물질성에도 익숙해지는 노력을 할 필요도 있다.


셋째, 구조를 파악하기.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질서를 상상해 보고,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고전의 저자는 분명히 책을 쓰면서 구조를 세우고 작업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자연과학자들이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자연 현상 안에 숨어있는 질서를 찾아내고 아주 간단명료한 법칙으로 추상화하는 활동과 마찬가지의 것이다.


넷째, 독특한 표현과 비유들을 찾아내기. 어떠한 저자든지 손가락의 지문과 같은 고유한 표현 습관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책읽기의 흥미를 더해주며, 동시에 자신의 글쓰기 훈련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고전의 저자가 자연과학의 언어들을 자주 사용한다면 그가 관심있는 지식의 영역 또는 그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지식이 자연과학임을 짐작할 수도 있다.


이상 두 가지는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나가면서 내용을 파악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구조가 뼈에 해당한다면 표현과 비유는 살에 해당한다. 이것들이 책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치밀하게 읽다가 건성건성 읽다가 하는 과정을 되풀이 해보는 것도 책에 질리지 않는 방법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책과 아주 친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소리내어 읽기. 어떤 책을 완전히 내것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다 읽을 수 없으니 자신이 맘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저자가 독자에게 읽어준다는 기분으로 한 번 낭독해보자. 이렇게 함으로써 책을 몸으로써 느끼게 된다. 자신이 쓴 글도 소리내어 읽어보면 말이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여 문장을 다듬을 때도 도움이 된다.


여섯째, 문장 다시 써보기, 고전의 문장들 중에는 멋진 것이 많다. 흉내내어 베껴보는 것도 좋고, 그와 똑같은 취지로 자신이 다시 써보는 것도 좋다. 이것은 아주 좋은 문장 훈련이다.


이상 두 가지는 한마디로 책을 내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 정도면 책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책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되어 다음 책을 읽을 수 있는 준비가 된다.


일곱째, 핵심만 추려내어 써보기. 자연과학자들이 법칙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버리고 핵심만 골라내는 행위이다. 고전을 한 권 읽고서 모든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리하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파악한 핵심을 A4 한 장 정도로 쓸 줄 아는 것, 이것은 진정한 추상화 능력이다.


- 강유원, 『서구 정치사상 고전 읽기』 서문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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