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영 작가의 《책만 보는 바보》 에서는 조선 후기 정조시대 박지원의 사랑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백동수와 같은 계급에서 소외받았던 이들이 등장하면서 시대에 대해 고민하며,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며 세상이 변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 《갑신년의 세친구》에서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사랑에 그 시대의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어 세상의 변화를 꿈꾼다. 이들은 당시 유력한 가문의 자제들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 안팎의 정세는 혼란스러웠고, 기존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변혁의 시기였다. 조선은 서구 열강의 개화의 압력을 받았고, 청나라와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고 변혁의 물결 위에 있을 때 그 흐름에 편승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일본을 방문하면서 선진화된 문물에 빠져들고 조선에도 개혁을 이루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은 쉽게 그들의 뜻을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임오군란(1882년 7월 20일)으로 그동안 참아왔던 백성들은 일어나고 흥선대원군은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 하지만 또 다시 청군에 의해 납치되고 다시 왕비와 외척인 민씨 집안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당시 중전과 외척들은 청나라를 뒷받침으로 해서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김옥균을 비롯한 젊은 이들은 일본의 지원에 힘입어 개혁을 원했던 급진개화파들이었다.


1884년(고종21년) 12월 4일 김옥균과 급진개화파들은 당시 홍영식이 총판로 있던 우정국 청사 완공 기념 연회를 거사의 날짜로 정하고, 청사 옆에서 피어오르는 불을 신호로 해서 집권세력들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에게는 난리가 일어났다며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보호를 위해서 일본군에게 요청한 지원군으로 개혁을 완성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개혁은 불과 3일 동안에 불과했고, 그들의 개혁인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버렸다. 갑신정변의 개혁주도세력은 개혁의 젊은 혈기는 좋았으나, 일본을 바라본 순진한 생각과 청나라 군사들이 오지 않을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 경운궁에서 군권을 장악하기 전에 왕과 왕비의 거처를 다시 옮기게 하는 등 부족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당시 김옥균은 백성의 힘을 업은 채 시도한 개혁이 아니고, 일본의 군대에 의존한 개혁이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또한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만을 믿고 있었던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본은 단지 장기적인 조선 침략 시나리오의 일환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 안남(베트남) 지역을 두고 프랑스와 청나라의 갈등으로 조선에 있던 청군이 안남 지역으로 이동해서 청군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개혁세력의 안일함을 드러낸다. 또한 개혁의 주축 세력이 당시 고위 집권 세력의 자제들이었다는 점에서 아래로 부터의 개혁에 대한 뿌리와 힘을 갖지 못한 부르주아적 개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홍영식은 전하 곁에 끝까지 남아서 성공하지 못한 개혁이지만 그들의 뜻을 전하겠다며 남게 되며, 관군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건너가고 후에 청의 리홍장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로 갔을 때 자객의 총에 의해 생을 마감한다. 정변당시 민씨 집안에 원한을 사서 그들이 보낸 자객에 의한 마지막이었다. 1894년 3월 28일이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고, 1894년 8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갑오년 개혁이 일어나면서 다시 조선으로 와서 그의 뜻을 펼쳐 보기도 한다. 1910년, 조선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고 협력한 조선인들에게 일본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이 지급되었는데, 박영효는 후작 지위와 수십만 엔의 상금을 받았다. 또한 산업과 언론, 경제계에서 실속있고 명망있는 지위를 누리며 삶을 보냈다.


갑신정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후하지 않다. 일본을 우리의 개혁을 위해 먼저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이는 후에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고, 개혁의 주요인물이었던 박영효가 그 병합에 일조를 하면서 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근대적인 개혁의 시발점이라는 측면에서는 의의가 있다. 김옥균이 만든 갑신정변 14개조에는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고, 정령의결과 반포를 기존의 왕이 아닌 대신들의 의결체에서 진행하는 등의 근대적 개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후에 갑오개혁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은 역사의 연장선의 가장 끝부분에 서 있으며 그것 역시 이렇게 글을 쓰는 사이에 지나가버린다. 필연이던 우연이던 여러 사건들이 모여서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있음을 한 권 한 권 역사책을 읽어갈수록 깨닫는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개혁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며, 위기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는지 배울 수 있으며, 역사 속의 시대적 상황이 고스란히 상황만 다를 뿐 현재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점을 다시금 느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쩌면 훗날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급변하는 시대의 중심이며, 패러다임이 변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분명 개인적인 삶을 온전히 살아가려면 시대의 흐름을 체감하며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시기를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앞으로의 내 역사적 삶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때 의미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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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떤 성과나 경쟁에서는 반드시 승리자를 가려내려 하는 이 시대가 만들어 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레 승리자가 생기면 패배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생겨난 패배자들은 결코 승리자들보다 부족한 사람들은 아니다. 단지 세상이 만들어낸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그렇게 만들어 졌을 뿐이다.


<위대한 패배자>의 작가인 볼프 슈나이더 이 책의 나가는 말에서 승리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사를 가만히 지켜보면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일수록, 혹독하고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일수록 정상에 좀더 쉽게 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백과사전에 이름이 실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거칠고 비정하고 역겨운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작가는 정치,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인물들 속에서 각기 다른 패배의 모습을 찾아내어 그 사례를 아주 흥미롭게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안타까우면서도 위대한 실패자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주며 실패에 대한 새로운 가치인식을 심어주는 지도 모른다.


또한, 각기 다른 시대와 국가들 속의 인물들을 통해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만들며 인물들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책 속에는 흥미로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 두 인물 체 게바라와 앨런 튜링을 소개한다.



◇ 열대 우림의 피투성이 구세주 체 게바라 (1928~1967)


체 게바라는 자유주의적 좌파 성향의 건축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크 독재 체제를 피해 망명한 정치인들을 집에 받아들였는데 어린 체 게바라에게는 인상적인 기억이었다.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24살의 나이에 일상에서 떠나기로 마음 먹고 의사 보조, 웨이터, 부두 노동자, 말 사육사, 사진사 등으로 입에 풀칠을 하며 떠돌아 다닌다.


1955년 체 게바라는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로 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유격대원을 모집하던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고, 80명의 유격대원으로 1956년 12월 2일 쿠바 해안에 상륙한다. 하지만 쿠바 병사에 발각되어 쫓겨다니고 18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죽게 된다. 18명은 산으로 들어가 2년 동안 끈질기게 정부군에 대항하고 이후 카스트로는 야당세력을 모으는 데 성공하고 농민들로 부터 신뢰를 받게 되었으며 혁명군의 신병 모집도 늘어났다.


'혁명에서는 모든 것이 용납된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노선이탈자, 밀고자, 탈영 계획자의 머리에 총을 직접 쏘며 사형을 집행을 할 정도로 엄격하고 가혹했다. 1951년 1월 1일 마침내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망가고 3일 뒤 카스트로가 유격대원을 이끌고 쿠바의 아바나에 입성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게바라는 쿠바 시민으로 선포되고 혁명 후 중앙은행장, 그리고 산업부장관에 임명된다.


체 게바라는 권력층이 되었지만 철저한 금육과 절제의 생활태도를 견지하고 상류층의 특권은 포기했다. 1965년 안주하는 삶과 관료주의적 강압에 염증을 느낀 그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도 쿠바의 혁명을 수출하겠다는 마음으로 콩고와 볼리비아로 향한다.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에서 혁명군으로 활동하다 라이게라 마을 근처에서 적의 매복에 걸린다. 그에게 총을 겨눈 병사에게 말한다.

"쏘지 마라! 나는 체 게바라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는 전 세계 인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미제국주의에 대한 진실과 쿠바에서 벌어진 혁명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그러한 사실을 안 볼리비아 정부는 미국의 정치고문단과 CIA와 협의 한 후에 대외적으로는 전투 중에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고 비밀리에 처형한다.


사후에 그는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인기가 치솟았다. 1969년에 그의 삶을 담은 오마 샤리프 주연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수많은 전기가 쏟아져나왔다. 1997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는 체 게바라학 과목이 개설되었으며, 같은 해 볼리비아의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견된 그의 유골은 쿠바로 보내져 산타클라라에 사원이 만들어졌다.


그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만 간직했던 일들을 그가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으며 이 세계에 비해 선한 모든 사람은 너무나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떤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고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무모할 정도로 돌진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서는 철저히 패배했지만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고 죽어서는 승자가 되었던 패배자였다.


◇ 영국의 승리를 도운 무명인 앨런 튜링 (1912~1954)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그 누구보다 영국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은 바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었다.하지만 이 사실은 그가 영국 법정과 정부의 수모에 못 이겨 자살한 지 20년 만인 1974년까지 묻혀있었다.


전쟁 중 연합군은 수수께끼라는 뜻을 지닌 독일 암호기 에니그마의 암호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니그마는 타자기처럼 사용되는 암호기로 타자기 안에 미리 설치해둔 회전체 덕분에 입력한 철자 대신 다른 철자가 타이핑되어 나오는 방식이었다. 후에는 회전체가 여덟개나 되었고 회전체의 위치도 날마다 바뀌면서 24시간 안에 풀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다.

당시 영국 암호해독반에 참여한 앨런 튜링은 1940년 '폭탄'이라 불리는 암호 해독 기계를 처음 고안하고 점점 조합의 수를 줄여가며 해독작업을 진행해나갔다. 1943년 3월 1일부터 20일 사이에는 수학자들에 대한 영국정보의 압력이 점점 커져갔다. 독일잠수함들은 2~3주 사이에 무려 108척의 선박을 침몰시켰고 전함들도 21척을 파괴시켰다. 반면에 적의 잠수함은 불과 1척 밖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1943년 3월 21일부터 전세가 역전되었다. 튜링의 암호해독반은 독일의 암호를 한 시간안에 해독했으며 나중에는 단 몇 분으로 줄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튜링과 그의 동료들은 암호학교를 나서기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튜링은 1948년까지 국립물리학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로 일했다 당시 에니악보다 뛰어난 컴퓨터를 만들겠다고 자청하고 실제 1948년 에니악보다 연산 속도가 훨씬 능가하는 '파일럿 모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맨체스터 대학의 컴퓨터 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고 인공지능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는 인간의 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관점에서 실험을 제안했고 이것은 지금도 전문가 그룹에서 유명한 '튜링테스트'였다.


그러나 1951년 이후 그는 급격히 추락하게 된다. 동성애자 였던 튜링은 열아홉 살 청년과 우연히 만나 동거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밝혀졌다. 그것은 당시에 처벌 대상이었다. 이에 영국정부는 그를 컴퓨터 연구소 부소장에서 해임시키고 1년 동안 강제 치료를 받게 한다. 그리고 불과 얼마 후 1954년 6월 7일 마흔 둘도 채 되지 않은 그는 사과에 독약을 주사한 뒤 동화 속 백설공주처럼 사과를 깨물고 삶을 마무리한다.


후에 영국 정부에 허가를 받은 프레더릭 윌리엄 윈터보섬이 1974년 <울트라의 비밀>을 통해 당시 암호해독반의 이야기를 했고 앨런 튜링이 세상에 다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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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림에 동화가 되어 버린다. 서양화와는 다르게 먹으로 표현되는 색의 풍미와 시, 글, 그림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타나는 시서화의 묘미는 그림을 읽는 이로 하여금 색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2>에서는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마상청앵도>, 정선의 <금강전도>,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민영익의 <노근묵란도>, 작자 미상의 <이채 초상>을 소개한다. 작가 오주석이 읽어주는 그림은 그림에 당시의 시대상과 이야기까지 가미하면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아쉬운 부분을 빠짐없이 채워준다. 특히 이번 2편에서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한 <송하맹호도>, <이채 초상>이 강하게 다가왔다. 
이 그림에는 과연 어떠한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 <송하맹호도>, 김홍도, 비단에 채색, 90.4x43.8cm, 호암미술관 소장

 

<송하맹호도>를 보면 감탄만 나올 뿐이다. 어떻게 호랑이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작가의 말대로 아마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훌륭하게 호랑이를 표현해낼 그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호랑이 털의 하나하나 가는 붓 터치는 사싨감을 극에 다르게 하고 전체의 구도와 여백과의 균형은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호랑이의 앞 뒤 발은 자연스럽게 전체를 1/3씩 나누어준다. 여백은 앞발을 중심으로 뒷발 쪽으로 점점 크게 여백이 드러난다. 이와 비슷한 구조로 호랑이 위의 소나무 가지를 보자. 오른쪽 나무 가지사이의 여백도 세 군데로 나뉘어져서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크게 여백이 드러난다. 꼬리를 중심으로 S자 형태의 여백은 호랑이를 더욱 동적으로 표현시켜준다. 처음에는 훌륭한 사생 능력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전체적인 균형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하맹호도>는 말그대로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다. 바로 소나무와 호랑이가 주요 소재다. 여기서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렸다. 그리고 소나무는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2~1791)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오주석은 이 소나무는 당시 김홍도와 절친했던 이인문이라 한다. 이인문은 당시 소나무 그림의 명수였으며 표암이라는 글씨 자리가 찢겨져 보이고 표암답지 않은 졸필이라는 이유로 강세황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호랑이를 단순한 동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여겼다. 건국신화에서 결국 곰처럼 사람은 되지 못했으나 건국신화때 부터 등장하기 시작하고 우리나라 지도 모양을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있는 거라 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 역시 호랑이였다. 지금은 아쉽게 북한을 포함한 우리나라에 호랑이는 멸종되었다고 하지만 호랑이는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는 신화같은 동물이다.
우리가 동물원에서 볼 수 밖에 없는 호랑이는 과연 어떤 동물일까?호랑이는 전체 길이 3m에 무게 250kg에 가까운 덩치로 평지에선 5m를 펄쩍 뛰어오르고, 가파른 절벽은 10m나 뛰어내리며, 한 번 내달으면 하룻밤에 100km 이상을 주파한다고 한다. 힘 또한 엄청나서 큰 송아지를 한입에 덥석 물고 담장을 훌쩍 뛰는다고 한다.
우리 나라 지도 모양을 호랑이라고 하는데 언제 부터일까? 일제 때 어떤 용렬한 일본인이 우리 민족을 모욕하려고 한반도를 힘이 약한 토끼 모양으로 그렸다. 그러자 최남선은 이를 바꾸어 오히려 만주를 향해 펄쩍 뛰며 포효하는 씩씩한 호랑이의 형상으로 고쳐 그렸다. 당시 일본은 자기네 나라에는 없는 호랑이를 1917년에서 1920년 까지 전국적으로 조직적인 박멸 작전에 나서면서 그 개체수가 현저하게 줄게 만들었다. 안타까울 수 없다. 당시 일본인들은 모든 분야에 깊숙히 우리의 혼을 빼내려고 했었다.

 

 

▲ <이채 초상>, 작가 미상, 1802년, 비단에 채색, 99.2x5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채 초상>을 바라보면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나조차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초상화에는 사실적인 묘사의 훌륭함 뿐만 아니라 선비의 생각과 인품까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같이 보인다. 이게 바로 우리 나라 초상화의 깊은 매력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옛 그림 가운데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제작한 작품이 바로 초상화라 한다. 왕조 국가를 기반으로 하기에 왕의 초상화는 당연히 중요시여기며 유교국가로서 스승과 조상들의 초상도 정성으로 제작해서 극진히 모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왕의 초상은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전하는 말로는 많은 어진을 일제 강점기까지도 잘 보관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당시 부산 피난처에서 뜻밖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 절도범들이 고의로 낸 소문일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기에 왕의 초상은 더 안타까울 뿐이다.
저자 오주석은 말한다. <이채 초상>은 한 인물을 핍진하게 묘사한 초상화지만, 동시에 조선시대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영원함을 보여준다. 초상 작가의 묘사 능력은 너무나 탁월해서 정면상을 그린다는 작업상의 어려움에 대한 고민을 조금도 느낄 수 없게 한다. 더구나 그는 세련된 기법의 차원을 넘어서서 대상의 본질을 향해 은은한 관조의 빛을 던짐으로써 초상 인물의 고매하고 반듯한 정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다.

 

저자 오주석은 안타깝게 2005년도에 고인이 되어 그의 새로운 책은 만날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책들은 모두 찾아서 읽어볼 예정이다. 우리나라의 옛 그림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이렇게 관심의 장을 열어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미술작품들은 실제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아직은 그럴 기회가 많지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그림에 담겨있는 이야기와 역사들을 알아가며 우리의 옛 그림을 볼 때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닌 홀로 깊은 감동을 온전히 느껴보고 싶다.

 

 

우리 문화재와 미학에 대해 한 발자국 더~


■ 우리 문화재 그리고 미학 - http://zorbanoverman.tistory.com/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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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의 책표지를 열고 보면 작가 소개 아래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

 

"옛 그림 속에는 역사가 있다. 다치지 않은 옛 그대로의 자연이 있고, 그것을 보는 옛사람들의 눈길과 그들의 어진마음자리가 담겨 있다.  한마디로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이다. 또한 옛 그림은 아련한 지난 세월의 향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아꼈던 많은 이들의 고상한 입김과 정성스런 손때가 묻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작품을 그린 화가라는 한 인격체의 독특한 빛깔로 물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발품을 팔지 않으면 우리의 옛 그림을 볼 기회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많은 것들이 그렇지만 우리가 모르기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어떻게 인연이 되고 기회가 되어서 접하게 되는 것들에서 발화되어 개인과 연결이 되어야 관심사가 이어지는 법이다. 최근에 우리 문화 관련 책들에 관심이 생기면서 이런 저런 책을 읽다가 이 책을 만났다.

 

책에 소개되는 김홍도의 <주상관매도>를 보고 한 동안 넋 없이 바라보았다. 작품의 실제 크기를 보니 직접 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다. 넓은 공간에 한 벽면에 아무런 장식 없이 이 그림 하나만 있는 모습을 홀로 상상해보았다.

그림에서 조금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린다. 왠지 그 때 내 모습도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은 모습일 것 같다. 그림 위의 매화와 아래 배 사이에 펼쳐진 여백은 내 가슴 속에는 무언가를 가득 메우는 듯 했다. 너무 좋았다.

 

저자인 오주석은 작품에 대한 감동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신이 직접 따라서 그려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실망을 금치 못할 것 같으니 차선책도 가르쳐 준다. 바로 그림을 읽으면서 기술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어떤 작품의 인물을 보거나 실제 사람을 보았을 때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그저 단순하게 예쁜 여자라고 표현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목구비의 각각의 특색을 잘 설명하고 어우러지는 느낌과 향내까지 표현해낼 것이다. 

 

그림을 따라 그리면 그만큼 자세히 작가가 표현해내는 것을 하나하나 다 찾아가 보는 것이다. 그만큼의 감동을 느끼기 위한 기술을 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하나하나를 찾아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고 전체적인 느낌까지 아울러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언어는 때로는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에는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마치 향기가 나듯이 시냇물 소리가 들리듯이 표현할 수 있다. 그런 세심한 관찰과 관심과 그리고 언어적인 훈련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알수록 매력있고, 다가오는 감정이 남다르다. 

화려한 색채와 원근감을 살린 서양화들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과 김명국의 <달마도>처럼 순식간에 그어낼 것 같은 붓터치가 나에게는 더 다가온다. 혼자 잠깐 생각해본다. 강희안이 고사관수도에 등장하는 인물의 눈에 붓으로 툭툭 던지는 듯 그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 <고사관수도> 강희안(1417~1464), 종이에 수묵, 23.4 x 1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상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기다란 덩굴 몇 가닥을 흔들흔들 그네 태운다. 그러자 잔잔하던 물 위에도 결이 고운 파문이 인다. 바위에 기대 편안히 엎드린 선비는 볼에 와 닿는 바람결이 흐뭇했는가, 아니면 마음속을 스쳐가는 상념 속에서 혼자만의 뿌듯함을 느꼈는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머리가 벗어진 넓적한 얼굴의 선비는 이제 세상살이를 꽤 이해할 만한 지긋한 연배의 노인이다. 눈과 눈썹은 짙은 먹선으로 대충 쳐서 그렸으되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넉넉한 빛을 띠었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 납작한 코와 인자해 보이는 입가와 수염, 그리고 넓은 소맷자락에는 인간사를 초탈한 듯한 여유로움이 번져 있다.

 

선비를 둘러싼 주위 배경은 간촐하다. 뒤편으로 절벽이 있고 그 위에 뿌리박고 자라난 나무를 휘감아 내려온 덩굴 몇 가닥과 큰 이파리 몇 개가 보일 뿐이다. 앞편으로는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물가에 자라난 갈대 같은 거친 물풀, 그리고 물 위로 솟아난 작은 바윗돌 셋이 전부다. 선비가 기댄 듬직한 바위는 툭툭 끊어지는 호쾌하고 대범한 먹선으로 윤곽선을 둘렀으며, 아래쪽으로는 시커멓게 거친 바림을 베풀었다. 그 선의 성질은 선비 옷의 윤곽선과 아주 닮았다. 즉 굵었다 가늘었다 변화가 많고 꺾여 나가는가 싶다가는 곧 끊어진다. 특히 선비의 다리 오른편의 바위 모양은 다리 모양과 거의 같아 보여, 화가는 마치 선비가 바위이고, 바위가 곧 선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의자처럼 편편한 작은 바위가 하나 더 있다. 누구든지 와서 함께해도 좋을 공간이다.

 

▲ <주상관매도>, 김홍도 164 x 76cm, 개인소장

 

<주상관매도>에는 느긋하고 한가로운 기운이 감돈다. 마치 여유롭고 유장한 평시조 가락이 허공 중에 여운을 날리며 떠도는 듯하다. 화폭은 어른의 키만큼이나 커다란데 거기에 그려진 경물은 화면의 오분의 일도 되지가 않는다. 뿌옇게 떠오르는 끝없는 빈 공간, 그 한중간에 가파른 절벽 위로 몇 그루 꽃나무가 안개 속에 슬쩍 얼비친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는 이편 산자락의 끄트머리가 꼬리를 드리웠는데 그 뒤로 잠시 멈춘 조각배 안에는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하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치켜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보인다.

 

여백이 하도 넓다 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을 할 수 없다. 그렇다. 김홍도가 시조에서 읊었듯이 "물 아래가 하늘이고 하늘 위가 물인가" 보다. 또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잎새 같은 조각배는 둥실둥실 흔들리며 기운 없는 노인에게 가벼운 어지럼증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늙은 눈에 보이는 저 꽃나무는 아슴푸레하니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듯 하다" 그림은 시조 그대로이고 시조는 그림을 꼭 빼닮았다. <주상관매도>에서는 그려진 경물보다 에워싼 여백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 보일 듯 말 듯한 느낌은 마치 지금은 들리지 않는 노년의 단원 김홍도, 그 분이 소리하는 가녀린 시조창인 듯 하다.

 

▲ <자화상> 윤두서(1668~1715), 종이에 수묵담 담채, 38.5 x 20.5cm, 국보204호, 개인 소장

 

이 사람은 누구인가? 무인인가? 그는 어려서부터 용력이 남달랐으며 일찍이 출중한 무예를 갖추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떠한 극한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던 냉엄한 성품의 장군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첫인상은 이렇게 보는 이의 기억 속에 강렬한 에너지의 낙인을 찍어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천만 가지 상념의 뿌리가 된다. 그러나 첫인상은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경우도 많다.

인상이 반드시 그 인물로부터 나오고 또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입은 옷이며 그를 둘러싼 주위 배경이라든가 그 장소에 독특했던 빛의 흐름 등등 여러 가지 외적 요소가 거기에 더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자화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런 선입관이나 편견을 갖지 않고서 말이다. 인물은 정면상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얼굴은 단순한 타원형이며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다. 좌우대칭의 정면상은 입체감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더하여 새까만 탕건 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위어져 있어 머리 전체의 볼륨을 요령 있게 시사한다. 그런데 극사실로 그려진 이 작품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목과 상체도 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옥에 갇혀 칼을 쓴 인물처럼 머리만 따로 허공에 들려 있는 듯하다. 머리는 화면의 상반부로 치켜 올라갔다. 덩달아 탕건의 윗부분이 잘려져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초성이 무섭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 <진단타려도> 윤두서, 비단에 채색, 111.0 x 68.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물 뿌리고 비질한 마당처럼 그지없이 깨끗한 길, 맑고 투명한 대기 속에 나뭇잎 하나 풀잎 하나까지 정갈해 보이는 아침, 뒤편 숨에는 상서로운 안개마저 서려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복건을 쓴 점잖은 선비가 갑자기 나귀 위에서 미끄러져 그만 고꾸라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옆에서 따르던 동자 아이가 기겁을 하여 책 봇짐을 내던진 채 주인을 붙들려고 내닫고, 반대편 길을 행해 가던 젊은 나그네는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동자만 혼자 허겁지겁할 뿐 정작 낙상을 코앞에 둔 당사자 얼굴에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함박웃음이 만발해 있고, 또 이네들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표정에도 아직 얼굴 가득 흐뭇함이 어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 문화재와 미학에 대해 한 발자국 더~


■ 우리 문화재 그리고 미학 - http://zorbanoverman.tistory.com/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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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고사관수도>는 고요한 그림이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니 고요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이 물의 흐름처럼 잔잔하지 않은가? 시선이 고요하고 그윽하므로 그림의 공간은 화면 바깥으로 안온하게 확장된다. 정작 화폭 속에 보이는 공간 자체는 아주 작은데도 느껴지는 것은 제한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화면의 대부분은 돌이다. 세상에 돌만큼 천성적으로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없다. 돌은 태초에 놓여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거센 비바람과 매서운 눈서리에도 꿈쩍이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저 바위를 닮은 노인의 시선을 보면 그 역시 성품이 바위처럼 듬직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돌은 흙의 정기가 뭉친 것이라 한다. 그러니 선비 또한 오랜 공부와 수양을 통해서 사람의 정기인 올바른 도를 한 몸에 모두고 있음 직하다.

 

p35

조지훈 선생은 [돌의 미학]이라는 아름다운 글에서 "동양미의 가치 기준은 언제나 '살아 있다'는 말 한마디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뜻밖에도 " 그 생명력의 무한한 파동은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시인은 또 돌에서 형태가 아니라 그 마음을 보며, 그 마음은 추상이라고 보태었다. 이제 우리가 확인한 바위에 보이는 저 힘찬 붓질은 바로 조지훈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위의 생명, 바위의 마음, 바위의 추상이 아닐까. 시인은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돌에서 생명을 발견한다. 돌들이 맹령하게 살아서 들끓어오르는 것을 느낀 것이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 속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나온 이 바위는 결코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엔 아직도 변함없이 사나운 의욕을 꿈틀되고 있다. " 바위가 그토록 오랜 세월 꼭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 내면에 숨겨진 크나큰 의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p39

관념은 [관자]의 <수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의 본원이며,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며, 아름다움과 추함, 어짊과 못남, 우둔함과 현명함을 낳는 장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을 다스려 교화시킬 때 그 해답은 물에 있다. 물이 한결같으면 사람들 마음이 바르게 되고, 물이 맑으면 민심이 편안해진다. 한결같으니 더러운 욕심을 내지 않고, 민심이 편안하니 행실이 삿됨이 없다." [관자]는 이어서 물이 가지는 주된 미덕과 갖가지 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인 인간의 삶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물은 얼핏 겉으로 보면 여러 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손으로 떠서 보면 한결같이 투명하다. 그 투명한 무색은 온갖 빛깔의 바탕이다. 그 깨끗함은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린다. 물질적인 때를 씻어낼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더러움까지 씻어내린다. 그래서 옛 여인네들은 장독가에 정한수 한 사발을 떠놓고 일월성신께 각자 마음에 품은 간절한 소망을 빌었다. 물은 큰 절과 대성당에서 그대로 성수가 되고 지극히 고귀한 종교적 정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수가 되는 이치는 어염집 아낙네의 정한수와 똑같다. 물은 또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흐르지만 일단 수평을 이루면 멈춘다. 지극한 의로움이다. 그리고 물의 맛은 담담하니, 그것은 온갖 맛의 중용을 얻은 것이며 그 담담함은 바로 군자의 마음이다.

 

p40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고루 이롭게 하고서도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기꺼이 처하나니, 그런 까닭에 거의 도에 가깝다."

 

p40

맹자도 말했다. "흐르는 물이라는 것은 앞에 놓인 구덩이를 하나하나 모두 채우지 않고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이 이렇게 큰 바다까지 이르는 과정은 마치 "군자가 도에 뜻을 두고서 덕을 하나씩 이루어나가 결국 원대한 목표에 이르는 것과 같다.

 

p44

다음은 강희안이 연꽃을 설명한 말미에 덧붙인 글이다.

 

사람이 한세상 태어나 명예와 이들에 골몰해서 분주히 힘쓰다 지쳤어도 늙어 죽도록 그치지 않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함인가? 비록 벼슬을 떠나 속세의 때를 벗어버리고 아주 자연 속에서 지낼 수는 없다고 해도, 공무를 마친 겨를에나마 맑은 바람 밝은 달 아래 그윽한 연꽃향 속에서 ...... 옷깃을 열어 오가면서 시를 읊고 배회할 것이니, 몸은 비록 명리의 굴레 매였어도 정신만은 족히 물질의 바깥에 노닐어 마음의 회포를 펼 수 있으리라.

 

p48

공자는 또 일찍이 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은 움직이면서 즐거워하며, 어진 사람은 고요하게 지내어 장수하는 것이다." [논어]의 <용야편>의 이 말씀은 물론 물과 산의 성정을 사람의 성품에 비유한 상징일 뿐 본래 물과 산이 서로 대치된다는 뜻이 아니다. <고사관수도> 속의 선비만 보아도 지금 이렇게 인적 없는 산속에 들어앉아 잔잔하게 흐르는 물을 벗 삼아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지 아니한가? 일반적으로 옛 선인들은 오늘날과는 달리 움직임을 줄이고 고요하게 지내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생각을 지녔다.
p176작품을 '읽는' 동서양의 방식 차이는 아주 작은 듯하나,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이처럼 에상 밖으로 엄청나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옛 그림은 애초 가로쓰기식으로 보면 그림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옛 화가들에게는 세로로 읽고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으므로, 보는 이도 당연히 우상에서 좌하 쪽으로 감상해나갈 것이라 생각하면서 구도를 잡고 세부를 조정하고 또 필획의 강약까지도 조절했기 때문이다. 

 

p211

옛 그림 감상 요령의 첫째는 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자주 보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접근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감상자 개개인의 체험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서로 많이 다른데, 그것은 대체로 우리가 경험한 삶의 내용이 서로 다른 데서 온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이 훌륭하고 고상하다고 학교에서 배웠어도, 또는 애국심의 발로로 우리 전통 음악을 사랑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해보아도,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을 들을 기회가 적으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기란 힘들어진다.
반면에 유명한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인 음악은 실제로 감사하기 어려운 난곡인 경우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한다.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대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그널 음악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하여 경계심을 풀고 친근함을 느끼며 결국은 좋아하게 된다. 누구라도 그리워하게 마련인 고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친근하게 느끼니까 그 내용까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오랜 진리이다.
p214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은 눈만 감으면 그 모습이 절로 선하게 떠오를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즉 떠오르는 것은 대상을 향한 넘쳐나는 마음일 뿐이고, 그 모습 자체를 재현하는 능력이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고서 "계란형 얼굴에 이마가 시원하고 결 고운 가는 눈썹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을 고르게 덮었다. 쪽 곧은 콧등은 단정하고 콧방울도 반듯하다. " 고 했을 때, 또 거기에 "인중은 약간 긴 편이고 입은 코보다도 작은데 입술가가 약간 들려 보일 듯 말듯한 표정이 살포시 담겨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미인도>를 떠올릴 수 있다.
조형을 언어로 바꿀 때 그것은 마음속에 간직하기 쉬운 그 무엇으로 바뀐다. 그림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그런 작업을 기술이라고 부른다. 기술은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모든 조형물을 파악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기술을 통해서 확보된 기억은 한참 뒤에까지 살아 남아 이와 유사한 작품을 보았을 때 즉각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산 지식으로 활용된다. 처음 발견된 김홍도의 작품을 보고 "아, 김홍도로군"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훈련의 덕택이다. 물론 이런 기억은 역시 작품을 손수 베껴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형에 관한 한 언어는 손보다 성능이 더 열등한 '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기술은 모사에 버금가게 '작품 내용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뜯어보는' 행위이다.
p264바위는 예 분들이 가장 즐겨 그렸던 소재로 괴석도처럼 따로 그려진 예가 많다. 돌은 너무나도 흔히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특별하고 강력한 존재감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돌은 억겁의 긴 세월 동안 형성된 것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이다. 돌은 겉보기에 거칠고 추할지 모르나 그 외양 안쪽 깊은 곳에 사람들조차 본받기 어렵다고 탄복해 마지 않는 굳센 정신을 간직한다. 사실 인간은 아득한 석기 시대 아래로 거대한 바위 속에서 지고한 가치를 발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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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spirit)

독주를 뜻하는 '스피릿'은 알코올 도수 35도 이상에 설탕을 첨가하지 않은 증류주를 말한다. 최근엔 알코올 도수 20도 이상의 증류주를 스피릿으로 부르기도 한다. 곡류 및 과일 등을 발효시킨 뒤 다시 증류해 순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위스키, 브랜디, 럼, 진, 보드카, 테킬라, 고량주 등이 이에 속한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증류 후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키는데, 숙성 기간에 따라 품질이 달라진다. 스트레이트로 마시거나 얼음이나 물을 타 희석해 마신다. 각종 칵테일과 폭탄주의 베이스로 활용되기도 한다.

 

당밀에 물과 효모를 넣고 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든다. 당밀은 사탕수수를 짜낸 즙에서 설탕을 추출하고 남은 것으로 설탕과 칼로리가 같고 비타민과 칼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을 다량 포함하고 있어 영양식품으로도 쓰인다.색이 짙고 향이 강한 다크럼과, 무색에 향도 약한 라이트럼, 둘의 중간인 골드럼으로 구분된다. 통상 다크럼은 발효를 천천히 시키고 단식증류기를 쓰며, 라이트럼은 발효를 빨리 시키고 연식증류기를 사용한다. 라이트럼은 칵테일의 베이스로 많이 쓰이는 반면 다크럼, 골드럼은 주로 스트레이트로 마시거나 얼음 넣어 마신다.
위스키나 브랜디처럼 러도 증류한 뒤 통상 1년 이상의 숙성 기간을 거치는데, 위스키나 브랜디에 비해 훨씬 짧다. 대개는 미국 버번 위스키를 숙성시킨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며 이 경우 색이 진해진다. 무색투명한 라이트럼의 경우는 스테인리스 탱크 안에 저장한다.사탕수수 즙을 발효해 술로 만들어 마신 건 고대 인도와 중국이었지만, 이걸 증류해서 마시기 시작한 건 17세기 중반 카리브 해 연안 섬들에서였다.설탕용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설탕을 만들고 난 부산물인 당밀이 알코올로 발효되는 걸 발견했고, 여기에 증류기술이 보태지면서 럼이 만들어졌다.
럼이 탄생하자마자 곧 북아메리카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기 시작해 스테이튼 섬과 보스턴, 메사추세츠 등지에 1660년대에 럼 증류소가 들어섰다. 마침 유럽에서 설탕, 수요가 늘고 있는 마당에 럼의 수요까지 급증하자 카리브해 연안섬의 사탕수수 경작을 늘리기 위해, 북미의 럼주를 주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서 카리브 해로 데려가 사탕수수를 경작하게 되고, 여기서 생긴 당밀을 미국의 증류소로 가져다주고 다시 거기서 럼을 받아 노예를 사오는 삼각무역이 번성했다.
럼을 두고 '킬 데블', '해적의 술' 등의 별칭 외에 '넬슨 제독의 피'라고도 부른다. 이는 영국의 넬슨 제독이 트라팔카 해전에서 전사하자 그 시체를 썩지 않게 하려고 럼 통에 넣어 본국으로 이송했는데, 선원들이 술통에 구멍을 내 술을 빼먹는 바람에 본국에 와서 술통을 열어보니 술이 하나도 없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러나 그 통엔 럼 아닌 브랜디가 들어 있었다는 설이 있는 등, 신빙성이 그리 높지는 않다.

보드카위스키, 럼 등의 다른 스피릿과 달리 보드카는 증류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알코올 농도를 95% 이상으로 만든 다음에 그걸 다시 물에 섞어 원하는 도수로 만든다. 위스키나 럼은 원하는 도수에 맞춰서 거기까지만 증류시킨다. 이 때문에 보드카엔 메탄올 찌꺼기 같은 불순물이 거의 없는 대신, 위스키나 럼과 같은 특유의 향도 없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보드카는 소련과 유럽 밖에선 시들했는데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버번 위스키를 앞서기 시작하더니 21세기 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스피릿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위크>에 따르면 2007년 전 세계에서 183억 리터의 스피릿을 마셨는데, 그 중 보드카가 37억 리터로 1위이며 위스키가 21억 리터로 2위였다.
단일 브랜드로 보면, 럼주인 '바카디'가 오랫동안 1위였는데 2006년에 보드카인 '스미노프'가 이를 앞질렀다고 한다. 이 두 브랜드에 이은 3위도 최근 수년 동안 '앱솔루트 보드카'가 지키고 있다.
보드카 칵테일무색 무취의 보드카는 칵테일의 베이스로 가장 인기가 좋다. 대체로 당도가 높다면 어떤 과일이든 주스를 짜고 보드카를 타면 (경우에 따라 소다수를 첨가해도 좋다) 먹기가 좋다. 오렌지주스에 보드카를 탄 '스크루드라이버', 오렌지, 복숭아, 크랜베리 주스에 보드카를 탄 '섹스 온 더 비치'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내가 개발한 보드카 칵테일 하나, 레몬주스에 보드카를 넣는 건데, 레몬이 당도가 높지 않은 만큼 사이다를 보드카의 1~1.3배 섞는다. 레몬주스는 미리 만들어 파는 레몬즙이 아니라 레몬을 짜서 쓰는데, 중요한 것은 레몬을 껍질째 힘껏 짜서 주스 색이 뽀얗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율은 보드카 750ml에 레몬 6~8개, 사이다 1리터와 얼음을 넣는다. 
여러 명이서 파티를 할 때, 큰 그릇에 레몬을 함께 짜 넣고 보드카와 사이다를 붓고 얼음을 넣고 저어서 잔에 떠 마시면 된다. 내 경험으로 이 칵테일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테킬라테킬라는 위험하다. 모든 술이 많이 마시면 안 좋고 더 않좋으면 사고치게도 만들지만, 테킬라가 주는 취기는 꼬장이나 객기와 조금 달리 뭔가를 능동적으로 하고 싶게 만든다. 누군가 그랬다. 창조에 수반되는게 기쁨이고, 쾌락은 소비할 때 생기며, 이 둘이 섞인 게 관능이라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테킬라는 관능적이다. 시한부 삶의 운명에 좌절한 젊은 이들로 하여금 바다의 석양을 찾아 나서게 만들 술로, 테킬라만한 게 또 있을까
테킬라의 이런 관능은 어디서 오는 걸까. 위스키나 브랜디에 비해 테ㅣㄹ라는 증류한 뒤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 기간이 길지 않다. '엑스트라 아네호'라는,2006년에 새로 추가된 딱지가 붙은 최상품의 숙성기간이 3년이다. 대부분은 증류 뒤 바로 마시거나(블랑코), 두 달 숙성시키거나(레포사도), 1년 숙성시킨다(아네호). 그러나 위스키나 브랜디의 원료인 곡물이나 과일이 1년마다 열리는 것과 달리, 테킬라는 원료가 되는 식물 아가베(용설란)를 8~12년 동안 땅에서 키운 뒤 만든다. 아즈텍 문명을 낳은 멕시코 중앙고원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 원료 자체가 긴 세월 동안 숙성되는 셈이다.
테킬라는 또 아즈텍과 서구, 두 문명의 결합으로 탄생한 400년 역사의 유서 깊은 술이기도 하다. 충분히 키운 용설란, 아가베의 잎을 잘라내고 남은 지름 70~90cm의 파인애플 같이 생긴 몸통을 찌고 그 과정에서 생긴 당분으로 발효시킨 뒤 증류한 게 테키라인데, 증류하기 전 상태의 막걸리처럼 걸쭉한 술을 '풀케'라고 부른다. 이걸 16세기 이전에 아즈텍인들이 마셨다고 한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이곳을 점령한 뒤 그들의 증류 기술을 동원해 풀케를 증류하기 시작했고, 1600년을 전후해 테킬라를 만드는 공장이 생겼다고 한다.
테킬라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한 가지, 바로 벌레다. 아가베 뿌리에 사는 구사노라는 벌레를 훈연해서 넣는데, 수년 전부터 테킬라 제조에 관한 규정은 테킬라에 이 벌레를 넣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벌레가 들어가는 술이 있다. '메즈칼'이라는 멕시코 술이다. 메지칼은 현지 말로 아가베를 뜻한다. 아가베, 즉 용설란으로 만든 술을 통칭해서 메즈칼이라고 부르며, 그 가운데 테킬라라는 마을이 속해 있는 멕시코 할리스코주에서 아가베의 여러 종류 가운데 '블루 아가베'로 만든 메즈칼을 테킬라라고 부른다. 브랜디 가운데 꼬냑 지방에서 나는 것만 꼬냑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더 유명해져서 꼬냑이라는 말이 브랜디를 대체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최근의 기사들을 보면, 테킬라는 대량생산되면서 첨가물도 많이 들어가는 데 비해, 메즈칼은 전통에 따라 수공업으로 소량씩 제조돼 테킬라보다 더 품질도 낫다고 한다. 메즈칼에 벌레를 넣으면 향기가 풍부해진다는 설도 있고, 그냥 상술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다.
압생트미국의 금주령처럼 술의 역사에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19세기 중후반 포도나무 해충의 만연이었다. '필록세라'라는 이 조그만 벌레는 1860년대에 북미에서 유럽으로 들어와선 이후 20~30년 동안 유럽 곳곳의 포도 농장을 황폐화시켰다. 와인은 물론, 와인을 증류해 만든 브랜디까지 생산량이 급감했다. 자생력이 더 강한 새로운 품종으로 포도 농장이 바뀌기까지 그 몇십 년 동안에 술의 판도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세계적으로 영국의 스카치 위스키가 브랜디를 누르고 '스피릿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됐다. 다음으로 유럽 안, 특히 와인의 종주국 프랑스에서 '압생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압생트는 한 번 증류한 알코올에, 쑥의 한 종류인 웜우드와 아니스, 페넬 등의 허브를 담근 뒤 한 번 더 증류해 만든 스피릿이다. 알코올 도수가 50~75도로 독한 탓에 통상 압생트를 따른 잔 위에 압생트용 스푼을 놓고 설탕을 얹은 뒤, 그 위에 찬물을 따라 설탕 녹인 물로 희석시켜 마신다.
칼바도스칼바도스는 과일주를 증류한 술, 브랜디 가운데서도 사과술을 증류한 것이다. 노르망디 해안 지방에서 재배되는 사과로 만드는데, (제품에 따라 배를 30% 가량 섞기도 한다) 칼바도스는 이 지역의 명칭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사과술을 증류한 건 16세기 중반이며, 17세기에 이미 이 지방의 사과 증류주, '오드비 드 시더(cider, 사과술)'를 '칼바도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칼바도스가 지역의 명칭으로 공인된 건 프랑스 혁명 뒤이다.) '칼바도스'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1588년에 '살바도르'라는 스페인 함선이 노르망디 해안 근처에서 침몰해 이 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해안 근처에 솟은 두 개의 바위 형상이 사람의 '벌거벗은 뒷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생겼다는 설을 전한다. 아무튼 관능적인 이름이다.
칼바도스는 19세기에 생산량이 증가하다가 '필록세라'라는 해충이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시켜 꼬냑을 비롯한 포도 브랜디 생산량이 급감한 19세기 후반에 포도 브랜디의 대체재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1942년부터 프랑스 특산물을 관리하는 AOC의 관리 대상에 포함돼, 칼바도스라는 명칭 아래 생산되는 모든 술이 AOC의 품질 규제를 받는다. AOC의 규정은 모든 칼바도스는 이 지역 사과(와 배)로 만들고, 증류 뒤 2년 이상 숙성시키도록 하고 있다. 칼바도스 가운데서도 '칼바도스 페이도쥬'라고 표기된 것은, 그냥 칼바도스가 한 번 증류하는 데 비해 두 번 증류한 술로 맛이 훨씬 풍부하다. '페이도쥬'라는 명칭의 표기 여부 역시 AOC가 관리한다.
AOC의 등급 분류기준은 이렇다. 'Fine', 'Trois etoile', 혹은 별 셋이나 사과 모양의 무늬가 셋잇 경우는 2년 이상 숙성시킨 것이다. 'Vieux', 혹은 'Reserve'는 3년 이상, 'V.O.', 'Vielle Reserve', 'V.S.O.P.'는 4년 이상, 'Extra', 'X.O.', 'Napoleon', 'Hors d'Age' 등은 6년 이상 숙성시킨 것이다.
꼬냑꼬냑은 과일주 증류주인 브랜디 가운데서도 프랑스 꼬냑 지방에서 나오는 브랜디를 일컫는다. 꼬냑이 술의 역사에서 한동안 '술의 제왕' 노릇을 하게 된 걸 두고 크게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원래 꼬냑 지방에서 나오는 포도는 신맛이 강해 와인으로 만들면 맛이 없었는데, 이걸 증류하니까 다른 지방 포도주를 증류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탁월한 맛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 17세기 중반 프랑스 재무상 콜베르가 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 배를 만들 목재를 비축하기 위해 꼬냑 동부 리무쟁 지방에 오크나무 숲을 조성했고, 이 숲이 술 저장용 오크통의 보고가 되면서 꼬냑의 대량 생산에 기여했다.
꼬냑은 300년 동안 프랑스 정부가 나름의 요건을 정해놓고 명칭 사용을 통제해왔다. 그 요건은 우선 90% 이상을 Ugni Blanc, Folle Blanche, Colombard 세 종류의 포도로 만들어야 하며(품종 기준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두 번 증류해야 하고, 오크통에서 2년 이상 숙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충족하는 꼬냑에 대한 더 자세한 등급 구분 기준은 다음과 같다.
위스키

위스키는 곡물 발효주를 증류한 것으로, 원료에 따라 크게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 그리고 둘을 섰은 블렌디드 위스키로 나뉜다. 몰트 위스키 중에서 한 증류소에서 나온 술만으로 담은 것을 싱글몰트, 여러 증류소에서 나온 술을 모다 담은 걸 퓨어몰트 위스키라고 부른다.

 

위스키는 아일랜드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스코틀랜드로 넘어가 1820년대에 스코틀랜드 정부가 공인한 1호 위스키 '글렌 리벳'이 나온다. 하지만 몰트 위스키는 맛이 거칠다는 이유로 영국 상류 사회에서조차 환영을 받지 못했다. 영국 상류층은 여전히 프랑스의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스피릿의 지도를 그리면 아일랜드엔 몰트 위스키, 영국과 유럽엔 브랜디였다. 변화를 불러온 건 블랜디드 위스키였다. 몰트 위스키에 귀리, 옥수수 등으로 만든 그레인 위스케를 섞은 블랜디드 위스키는 맛이 부드러워 상류층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조니워커, 발렌타인 등의 블렌디드 위스키들이 이때 탄생해 영국 시장을 장악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마침 19세기 후반 유럽엔 포도 해충이 들어와서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브랜디 생산량도 급감했고 그 틈새를 블랜디드 위스키가 파고 들었다.

 

그러는 동안 속이 상한 건 아이리시 위스키였다. 아ㄹ이리시 위스키는 대다수가 몰트이고, 발효한 몰트액에 그냥 몰트를 더 넣어서 증류하기 때문이 맛이 더 달고 거칠다. 영국의 블랜디드 위스키가 위스키 시장을 석권하자 아일랜드 위스키 업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위스키(whisky)의 철자에 'e'를 넣어 'whiskey'로 표기하면서 영국 위스키와 차별화를 시도하는 한 편, 영국의 블랜디드 위스키에 위스키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송을 냈으나 패소하고 말한다.

 

아일랜드나 영국과는 달리 미국 위스키는 옥수수가 주원료다. 켄터키주 버번 지방에서 생산되는 버번 위스키는 원료인 곡물 가운데 70%이상(법으로는 51%이상)을 옥수수로 하여 만든 주정을 증류한다. 잭 다니엘스로 대표되는 테네시 위스키는 옥수수를 주원료로 사용하지만, 오크통에 담기 전에 단풍나무 숯에 여과하는 과정을 거친다.

 

조니 워커

조니 워커라는 이름의 기원인 존 워커(1805~1857)는 아버지가 스코틀랜드 킬마넉에 잡하상 하나를 남겨놓고 죽자, 열다섯 살부터 가게를 운영하면서 그곳에서 팔던 위스키들을 섞어 보기 시작했다. 죽을 때쯤, 그가 만들어 팔던 블렌디드 위스키는 주변에서 인기 있는 술이 돼 있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 워커는 위스키 블렌딩을 보다 전문화해 1865년 '워커스 올드 하이랜드'를 내놓았고, 마케팅도 본격화해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 술에 '조니 워커'라는 이름이 붙은 건, 1909년 조니 워커의 손자 알렉산더 워커 2세 때의 일이다. 이때부터 저 유명한 '활보하는 남자'의 로고와 함께, 숙성연도가 낮은 위스키 35가지를 섞은 '조니 워커 레드 라벨'과 숙성연도 12년 이상의 위스키 40종을 섞은 '블랙 라벨' (블렌디드 위스키의 숙성 연도는 , 배합한 위스키 가운데 가장 숙성기간이 짧은 위스키의 연도를 표기하도록 돼 있다.) 이 나왔다.

 

조니 워커는 스코틀랜드의 '디스틸러스 컴퍼니'라는 지주회사에 속해 있다가 1986년 이 회사가 기네스에 팔리고 기네스가 합병해 디아지오를 만들면서 디아지오에 속하게 됐다.

 

발렌타인

발렌타인은 조니 워커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15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블렌디드 위스키이다. 한국에서 워낙 인기가 좋아, 한국인들을 위해 따로 블렌딩을 한다고 할 정도이다. 싱글몰트 위스키와 달리, 블렌디드 위스키의 브랜드 창시자들은 양조장을 갖지 않은 채, 주류 판매상을 하던 이들이 많다.

 

발렌타인의 창시자인 조지 발렌타인(1808~1891) 역시 열아홉 살부터 에딘버러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며 여러 가지 위스키를 팔았다. 가게가 번성하자 1865년 큰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글래스고에 더 큰 가게를 열어 와인과 스피릿 판매에 전념하고, 이 가게에서 영국 왕실에도 납품을 했다. 그러면서 1869년 자신의 블렌디드 위스키를 개발해 팔았고, 이게 수요가 늘자 둘째아들이 사업에 동참해 '조지 발렌타인 앤 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 뒤 창고를 갖춰놓고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위스키를 팔면서 사업이 번창했고, 아버지 조지는 1881년 은퇴한 뒤 1891년에 사망했다. 1895년 빅토리아 여왕이 이 회사에 훈장을 수여했으며 1910년에 유서 깊은 '발렌타인 파인스트'(최하 3년 이상 숙성시킨 수십 종의 위스키를 블렌딩한 것)을 내놓게 된다.

 

조지의 아들은 1919년 비싼 가격에 회사를 '바클리 앤 맥킨리'에 팔았고, 새 주인은 '발렌타인' 이름으로 신제품 개발에 몰두해 1930년 '발렌타인 17년'과 '발렌타인 30년'을 선보였다. 1937년 주인이 한 차례 더 바뀌면서 이 회사는 유럽에서 가장 큰 곡물증류소를 갖게 됐고, 1960년대에 유럽 공략에 전념해 1980년대에는 유럽의 넘버원 브랜드로 꼽히게 됐다.

이 회사는 1988년 '어라이드 도맥'을 거쳐 2005년, 디아지오와 함께 1,2위를 다투는 다국적 주류 기업 페르노리카에 넘어갔다.

 

맥켈란

스카치 위스키 생산이 합법화된 직후인 1824년에 나온 유서깊은 싱글몰트 위스키이다. 글렌피딕, 글렌리벳 등과 더불어 스카치 위스키 5대 생산지 중 하나인 스페이강 유역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스페이사이드 위스키'이다. 증류소 인근 지역 주민들이 경작한 보리로 술을 담갔고, 1960년대 상장한 뒤 한동안 주식의 상당 부분을 지역 주민들이 소유해 '몰트 오브 피플'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오롤로소 셰리주(포도주에 브랜디를 섞어 알코올을 강화한 스페인의 셰리주 가운데 가장 오래 묵히는 것)를 담았던 통에서 숙성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며, 1926년산 빈티지 맥켈란이 200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5400달러에 팔려 사상 최고가의 위스키로 기록되기도 했다.

 

글렌피딕

글렌피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싱글몰트 위스키로, 싱글몰트 위스키 안에서의 시장점유율이 35%에 이른다. 대다수 위스키 회사들이 다국적 주류 기업에 합병된 것과 달리, 글렌피딕의 제조사인 '윌리엄 그랜트 앤선즈'는 창립자의 가문이 대를 이어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창립자인 윌리엄 그랜트(1839~1923)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이런 저런 잡일들을 하다가 스물일곱 살인 1866년에 양조장의 장부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거기서 20년간 일하면서 위스키 제조의 노하우를 배운 뒤, 1886년 그동안 번 돈으로 땅과 장비를 사서 9명의 자녀와 함께 글렌피딕 증류소를 차렸다. 그리고 1887년에 글렌피딕이 첫 선을 보였다.

 

블렌디드 위스키 일색이다시피 하던 당시에 싱글몰트 위스키를 판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윌리엄 그랜트는 증류소를 하나 더 사들이면서 저돌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갔고, 그의 사위인 찰스 고든은 이 위스키의 해외 판매에 나서, 1914년에 글렌피딕은 세계30개국으로 수출됐다.

 

2차대전 뒤의 경영난을 벗어나기 위해,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는 제품 수를 늘림과 동시에 1957년 삼각형 모양의 독특한 병에 글렌피딕을 담아 팔기 시작했다. 아울러 면세점을 주요 공략대상으로 삼아 마케팅해온 것에 힘입어 싱글몰트 위스키 판매량 1위를 고수하면서 180여개국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대다수 몰트 위스키 증류소에서 생산량의 90%를 블렌디드 위스키용으로 보내고, 나머지 10%를 싱글몰트 위스키로 담는 것과 반대로, 이 회사의 증류소들은 90%를 싱글몰트 위스키로 담고, 나머지 10%를 블렌디드 위스키용으로 사용한다.

 

버번 위스키

버번 위스키는 원료인 곡물 가운데 통상 70% 이상(미국 정부 법으로는 51% 이상)을 옥수수로 하여 만든 주정을 증류한 위스키다. 미국 법은 증류한 술을 오크통에서 2년 이상 숙성시켜야 '버번'이라는 말을 쓸 수 있도록 한다. (스카치 위스키에 대해 영국법이 요구하는 숙성기간은 3년 이상이다.) 스카치 위스키에 비해 싸구려로 술로 통해오다가, 이후 6년 이상 숙성된 버번이 대량생산되면서 통념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 버번은 18세기 후반 미국에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사에서부터 미국과 영국의 갈등이 얽혀 있다. 미국 서부 개척기 초기, 넓디 넓은 땅에 옥수수가 무척 잘 자라 사람 먹고, 소와 말 먹이고도 남았다. 이걸 미국 동부에 가져다 팔자니 운송비도 안 나오고, 그래서 술로 담가서 마시기도 하고 다른 물자와 교환하는 화폐 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마침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 1812년 전쟁 등을 벌이는 동안 설탕과 당밀 등의 수입이 힘들어졌다. 그때까지 미국에서 주로 마시던 독주는 럼주였는데, 당밀이 원료인 럼 역시 원활히 생산되지 못했다. 그래서 옥수수술을 증류한 버번 위스키가 그 대체제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버번의 역사에 영국이 등장하는 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부터 그렇다. 버번 위스키는 켄터키주에 있는 버번 지방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버번'이라는 지명은 프랑스 푸르봉 왕조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미국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위스키의 표기도 미국과 영구이 다르다. 스카치는 'whisky'이고 버번은 'whiskey'이다. 위스키 스펠링은 아이리시 위스키 편에서 다시 다뤄진다.) 또 하나, 독립전쟁으로 빚체 쪼들리게 된 미국 연방 정부가 1791년 '위스키 세금'을 매기자, 주류제조업자들이 '위스키 반란' 까지 일으켰다가 결국 연방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켄터키주로 옮겨 갔고 마침내 그곳에서 훗날(1964년) 미국 의회가 'America's native Spirit'으로 공인한 버번 위스키가 탄생했다. 

 

짐 빔

술 당기는 김에 여기서 술 얘기, 1795년부터 만들어져 2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짐 빔은 '와일드 터키' 등과 함께, '미국 고유의 독주'로 미국 의회가 공인한 버번 위스키를 대표하는 상표이다. 한국에선 얼마 전부터 '잭 다니엘스'를 많이 마시는데, 잭 다니엘스는 엄밀히 말해 버번 위스키가 아니다. 옥수수가 주원료인 건 맞지만, 증류한 원액을 오크통에 담기 전에 단풍나무 숯으로 여과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테네시 위스키'라고 분류한다. 실제로 술도 버번이라는 곳에 속헤 있는 켄터키주가 아닌 테네시주에서 만든다.

 

그럼에도 짐 빔과 잭 다니엘스는, 우리로 치면 '참이슬'과 '처음처럼'의 관계처럼 미국에서 가장 라이벌을 이루고 있는 술이다. 

 

잭 다니엘

미국 영화에 단일 브랜드로 가장 많이 출연한 술은? '잭 다니엘스' 아닐까. 버번 위스키처럼 옥수수를 주재료로 함에도 제조 과정이 조금 달라 테네시 위스키로 분류되는, 그럼에도 대다수가 버번 위스키의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로 알고 있는 그 술.

 

1975년에 태어난 이 술은 역사도 짧고 테네시주 무어카운티라는 촌 동네 출신이지만, 그곳의 천연광천수를 이용하고, 증류 이전의 발효 단계에서 원료들을 묵혀 단맛을 줄인 뒤, 증류액을 단풍나무 숯으로 여과하는 특유의 제조 과정을 꾸준히 지키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1904년에 열린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의 위스키 경연대회에서 스코틀랜드의 명주들을 제치고 금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미국 너머로까지 알리기 시작했다.

 

잭 다니엘스의 창업자인 잭 다니엘이 살았던 미국은 훨씬 더 타락했다. 남북전쟁이 있었고, 극심한 인종차별 속에 KKK단이 만들어졌고, 주세가 높은 데 비례해 밀주와 뇌물이 횡행했고,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그 모든 죄를 술에 돌려 금주운동을 열렬히 펼쳤다. 아일랜드 출신 이민 3세인 잭 다니엘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가 죽고, 남북전쟁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아버지도 죽고 새엄마가 떠나자 십대 중반에 이웃 농가에 들어가 농사일을 도와주며 자랐다.

 

운명처럼 그 농가의 주인이 증류소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맡은 옥수수 증류주의 냄새 속에서 잭은 장래의 희망을 보게 된다. 스물다섯 살에 아버지 소유의 농장이 팔리면서 유산을 상속받게 되자 증류소를 세웠다. 서른 즈음에 이미 부자가 된 잭이 그 뒤에 한 일 가운데 눈에 띄는 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술 제조 상한을 하루 300갤런으로 정해놓고 이걸 지키면서 술의 품질을 유지했고,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냄으로써 봉사활동도 하면서 금주운동의 표적에서 비켜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전국적인 금주령이 시행됐고, 회사를 이어받은 그의 조카는 다른 사업으로 자산을 지켜오다가 금주령이 해제된 뒤 공장을 다시 세웠다. 그 조카가 죽고, 자식들이 회사를 이어받았다가 1956년 브라운-포맨이라는 거대 주류, 음료 기업에 팔아 브라운-포맨이 잭 다니엘스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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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나 와인을 오크통에 숙성시킬 때 증발돼 줄어드는 미세한 양을 두고, 서양인들이 '천사의 몫'이라고 부르는 건 유머도 있고 광고 효과도 있다. '얼마나 맛있으면 천사가 돈 안 내고 훔쳐 마실까......' 그런데 천사도 서로 주량이 다른 모양이다. 스카치 위스키의 본산지인 스코틀랜드 지방은 저기압이어서 증발량이 매년 2% 남짓이라는 데, 그보다 기압이 높은 한국에선 증발량이 더 많을 것 간다. 한 주류회사 관계자에게 "스카치 위스키 수입량이 세계 5위에 이르는 한국이 위스키 원액을 못 만드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 원인으로 수질, 피트(토탄) 매장량의 차이 등과 함께 기압에 따른 '천사의 주량 차이'를 꼽앗다.

 

선토리 위스키

선토리 위스키사가 만든 '히비키 30년산'은 <위스키 매거진> 주최로 런던에서 열린 '월드 위스키 어워드 2008'에서 '최우수 블렌디드 위스키'로 꼽혔다. 또 헌토리와 함께 일본 위스키의 양대 주자인 닛카 위스키가 만든 '요이치 20년산'이 같은 대회에서 '최우수 싱글 몰트 위스키'로 선정됐다.

 

선토리와 닛카, 두 회사는 1980년대 말부터 스코틀랜드의 양조장을 사들이고, 2000년대 이후 권위있는 위스키 경연 대회에서 주요상을 여러 차례 석권했다. 이에 따라 스카치 위스키의 모국인 영국의 언론이나 위스키 관련 사이트에는 수년 전부터 일본 위스키를 다룬 기사들이 실린다. 기사들은 중국, 인도, 러시아에서의 위스키 소비량 증가로 급팽창하고 있는 위스키 시장에서 일본 위스키가 큰 활약을 할 것으로 예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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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고가에 팔리는 미술작품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비싼 가격으로 팔릴까?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고 추상화같은 것을 보면 도대체 뭐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하나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 놓치고 싶지 않다. 조금씩 알아가면서 배워가면서 그 감동을 하나씩 찾아가려 한다.

 

처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폴 고갱의 삶을 다룬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부터이다. 문학을 통해서 미술을 접하는 귀하고 묘한 경험이었다. <달과 6펜스>를 읽고 폴 고갱의 작품들을 찾아봤다. 그냥 작품만 보아서는 잘 몰랐는데 그의 삶을 알고 난 후에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 이 사람이 이런 것을 추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폴 고갱을 만나고 나서 그와 인연이 깊은 반 고흐에 관심이 생겨서 반 고흐가 미술상인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반 고흐가 살아서는 부와 명예를 이루지 못하고 작품도 제대로 팔린 적이 없지만 지금 이렇게 이름과 작품을 남긴 큰 고은 어쩌면 그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흐와는 단지 악연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이 함께 살았던 짧은 기간 속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위대한 두 화가의 인연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지 아쉬울뿐이다.

 

반 고흐(1853.3.30~1890.7.29)와 폴 고갱(1848.6.7~1903.5.8)은 고갱이 고흐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다. 고흐는 한 때 화가 공동체를 꿈꿨다. 화가 공동체는 "화가들이 협동하여 자기들 그림을 조합에 넘겨주고, 조합에서는 회원들의 생활을 보장해 계속 그림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 대금을 배분하는 것" 이라는 제안이었다. 당시에 이런 화가공동체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고흐의 끊임없는 제안과 관심은 둘이 잠깐 동안 같이 생활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당시 고갱이 생계 해결과 미술상인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라고도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당사자들만 알 뿐이다. 그렇게 둘은 같이 생활을 하게 된다.

 

폴 고갱은 고흐와 1888년 10월에 같이 살기 시작해서 두 달 정도 고흐가 그린 노란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 당시 고흐는 자신이 구상한 공동체가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으면서 희망이 가득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낭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고갱과 다소 합리주의적인 고흐는 갈등도 적지 않았다. 

 

<반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것도 나온다. 둘이 살았으면 요리는 누가 했을까? 정답은 아마도 고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고갱은 "요리는 고결한 영혼과 재빠른 손, 그리고 대담한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라는 지론이 있을 정도로 요리에 능숙했다. 아마 미술사에서 고갱만큼 요리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한다.

 

▲ 빈센트 반 고흐, <노란집> 1888, 72 x 91.5 cm, 반 고흐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의 의자> 1888, 72.5 Ⅹ 90.5 cm, 반 고흐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의 의자> 1888, 73 Ⅹ 91.8 cm, 반 고흐 미술관

그들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서로의 관계는 파탄에 빠져버린다. 반 고흐가 자연에 있는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에 고갱은 현실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들로 비슷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사이가 벌어진다. 

 

고갱의 잘린 귀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고갱이 고흐와의 갈등이 깊어지고 고흐가 고갱을 떠나려하자 고갱의 뒤를 밟기도 하고, 결국은 자신의 귀를 짤랐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 남다른 동생 테오가 결혼을 한다고 하자 우울증에 빠지면서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고 다양하다. 분명 사실은 하나일 텐데 궁금하다. 고흐는 귀를 자른 후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을 몇 점 그리기도 했다. 이후 고흐와 고갱은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빈센트 반 고흐,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1889, 51 Ⅹ 45 cm, 개인소장

 

둘 사이는 결국 파탄으로 끝났지만 둘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만약 고흐가 없었다면 노란 집이 있는 아를에서 고흐는 그의 훌륭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를에서 부터 자신의 원시성을 깨닫기 시작한 고갱은 아를을 떠난 후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의 걸작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들의 역사적인 만남은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그쳤지만, 그 의미는 미술사에 깊게 베었다.

 

 

▲ 폴 고갱, <설교 뒤의 환상>, 1888, 72.2 x 91cm, 국립 스코틀랜드 미술관

 

▲ 폴 고갱, <황색의 그리스도>, 1889, 73.3 x 92.1cm,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두 화가를 통해서 이렇게 조금씩 미술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나에게는 미술작품만으로는 흥미가 생기기는 쉽지않을 것 같다. 작품 속에 숨어있는 이런 이야기를 알아갈수록 작품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듯 하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미술작가가 고갱, 고흐와 세잔이라고 하는데 세잔에 관련된 것도 조금씩 찾아가야 겠다.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를 전 후로한 미술사조도 조금씩 알아볼까 한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고흐와 고갱의 작품을 하나씩 소개한다. 

 

▲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73.7 x 92.1cm, 뉴욕 현대미술관

 

▲ 폴 고갱,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1897, 141 x 376cm, 미국 보스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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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반 고흐가 제안한 화가 공동체에 고갱이 솔깃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생계만 해결된다면, 프랑스에 계속 머물면서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고갱에게도 있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 고흐와 고갱의 만남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목사가 되려했던 화가와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에서 잘나가는 주식중개인의 경력을 버리고 그림을 시작한 화가가 서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이 조우의 순간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반 고흐와 고갱. 결국 파탄날 수 밖에 없었던 두 화가들의 관계를 이들이 남겨놓은 그림들을 통해 돌아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p27

반 고흐는 어떻게든 고갱과 함께 있고 싶어했다. 고갱이 동료와 다투고 파리를 떠나자 반 고흐도 아를로 거처를 옮겼다. 아를은 반 고흐에게 약인 동시에 독이었다. 파리 생활이 반 고흐에게 남긴 것은 피폐해진 건강 상태뿐이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요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반 고흐는 풍광 좋은 아를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를에 도착한 그는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서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당분간 둘이 함께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런 반 고흐의 호의는 후일 엄청난 재앙으로 바뀌어 그에게 돌아오고 만다. 그러나 처음 아를에 도착해서 방을 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무렵, 반 고흐는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의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고갱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p32

이런 반 고흐의 모습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사회개혁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화가들의 협동조합에 대해 말하면서 "화가들이 협동하여 자기들 그림을 조합에 넘겨주고, 조합에서는 회원들의 생활을 보장해 계속 그림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판매 대금을 배분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반 고흐의 생각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반 고흐가 협동조합 구성에 솔선수범해주면 좋겠다고 지목한 인상파 화가들조차도 각자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 일에 고심했을 뿐, 반 고흐 같은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35

아를로 떠나기 전부터 반 고흐는 일본 그림에 심취해 있었는데, 아를에서 제작한 그림은 이런 관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존의 화풍과 이론을 완전히 무시한 그의 그림은 지금까지 볼 수 없던 기법과 스타일의 실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만큼 이 당시의 반 고흐는 화가들의 협동조합 같은 제도적 개혁뿐만 아니라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88년 봄에 반 고흐는 과수원 연작을 열네 점이나 그린다. 이 그림에서 파리를 떠날 무렵에 그려진 그의 자화상과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상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분명히 다른 징조들이 이 연작에 꿈틀거리고 있다. 이 징조들은 다분히 일본 그림의 영향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p36인상주의를 통해 일본 그림의 의미를 알았지만,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그림으로 인해 반 고흐는 인상주의의 그늘을 벗어난다. 반 고흐에 이르면 인상주의의 원칙이기도 했던 자연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의미를 상실한다. 반 고흐의 그림은 인상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격렬한 색조의 대비와 충돌을 보여주는 것에서 전혀 다른 특징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에게 그림은 더 이상 자연의 묘사라고 볼 수 없었다. 아를에 처음 정착했을 때, 반 고흐의 그림에서 고통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p41주식중개인으로서 경력을 더 쌓기 위해 고갱은 가족과 함께 덴마크로 갔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는 가족을 버리고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1885년에 파리로 돌아온다. 부인과 다섯 아이들을 덴마크에 남겨둔 채 말이다. 고갱이 주식중개인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은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에 잘 그려져 있다.
p43인상주의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고갱은 상징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은 일본 그림에 감화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림에 가득한 상징적 깊이 때문이었다. 고갱의 불만은 자연의 모방에 치중한 당대의 화풍이었고, 이런 까닭에 인상주의와 그 화가들을 벗어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1888년에 고갱이 그린 [설교를 들은 뒤에 본 환상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그의 예술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887년 고갱은 몇 달 동안 남미의 파나마를 방문했는데, 거기에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몇 달 머물렀다. 이 그림은 마르티니크 섬에서의 체류 경험이 고갱에게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 그림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은 여인들에게 나타난 환상을 보여주는데, 고갱은 이 작업을 통해 마침내 자신만의 생채와 화풍을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브르타뉴의 돼지치기]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48반 고흐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믿음도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의 정도로 치자면 피사로 같은 인상파 화가들도 순위권에 들 만 하다. 당시에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줄 마음씨 좋은 후원자들은 파리에 없었다. 말하자면 가난은 당시 파리에 모여 있던 예술가들의 만성 질병이었지, 딱히 반 고흐만을 위해 준비된 천형은 아니었던 셈이다. 반 고흐의 불행은 세잔처럼 불안한 마음에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반 고흐는 세잔과 달리 피사로 같은 인생의 조언자가 없었다는 것. 어쩌면 이 사실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른다.
p56반 고흐의 문제는 마음에 있었는데, 고갱처럼 그도 문명의 압박을 참지 못하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고갱이 파리를 떠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반 고흐는 어떻게든 현실에 남아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같은 차이점이 고갱과 반 고흐에게 잇었다. 게다가 고갱이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했다면, 반 고흐는 이타적이면서 헌신적이었다. 반 고흐가 일본 그림에 빠져 있었던 것과 달리 고갱에게 일본은 출발점이었지 종착점이 아니었다. 고갱은 일본 그림처럼 섬세한 표현을 선호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그는 '원시성'을 찾아서 타이티로 떠날 수 밖에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이렇게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었지만, 둘을 묶어주는 공통점도 없지 않았다. 둘은 모두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아틀리에에 들어가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오직 독학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고갱과 반 고흐이다. 이들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초창기처럼 미술제도로부터 떨어져서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는 것이 이들을 다른 화가들과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특징인 것이다.
p59고갱이나 반 고흐, 그리고 이들보다 앞선 세잔 모두 요동치는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점묘파 화가들이 인간성의 소멸을 도모하기 위해 화가의 눈을 '카메라 렌즈'로 간주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인간의 내면을 색채와 형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들은 예술이야말로 '마음의 문제'를 표현한다는 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p113반 고흐의 [붉은 포도밭]은 [씨 뿌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성서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세계관이 물씬 풍기는 이 상징을 반 고흐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고갱은 비슷한 주제를 '인간성 자체의 비극'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치환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반 고흐의 유토피아주의가 고갱에게 오면 실존적인 비극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고갱은 [인간 비극]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여성을 일컬어 "공허한 존재"라고 언급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는 않다. 반 고흐는 이 그림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종교적 주제를 전혀 종교적이지 않게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두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상파의 리얼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마음을 그리는 것이었다.
p135고갱은 오만했고, 자만심에 들떠 이썽ㅆ다. 필요 이상으로 으스대기도 해서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생각도 그렇게 진취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고갱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를에서 반 고흐가 그린 걸작들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확실히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아를에서 고갱과 반 고흐는 한동안 미술사에 남을 만한 우정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 고흐 역시 중요한 미학적 도약을 이룩할 수 있었다.
p139이런 고갱의 노력이 왜 중요한 것일까. 바로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라는 측면에 머물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로 생각한다면, 예술은 자연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갱처럼 그림이 자연을 묘사하지 않고 마음의 풍경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림은 자연과 경쟁하는 '또 다른 자연'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고갱은 반 고흐보다 위대한 화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반 고흐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이렇게 관계의 사슬로 얽혀 있는 것이다.
p150여하튼 아를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기 힘들었던 '고귀한 야만인' 고갱에게 언젠가는 떠나야 할 장소였던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갱과 함께 살기를 희망했던 반 고흐의 소망은 항상 위태위태했다고 할 수 있다. 고갱의 그림은 원시적인 여성에게 마법적인 분위기를 부여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서인도제도를 방문했을 때 그린 그림들에서 이런 특징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p159고갱은 품위 없는 여성은 결코 요리를 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요리는 고결한 영혼과 재빠른 손, 그리고 대담한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라는 것이 고갱의 지론이었다. 시인 못지않게 멋진 말이다. 요리에 대해 이렇게 능숙한 남성화가가 과연 미술사에 얼마나 될까. 고갱 말고도 요리를 잘했던 화가가 바로 툴루즈 로트레크였다. 로트레크는 아마추어급이었지만, 최고의 요리사로 각광을 받았다. 로트레크에 비하면 좀 떨어지지만 고갱은 요리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가진 화가로 정평을 얻었다.
p176고갱은 구획주의를 정립함으로써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오히려 그를 번잡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퐁타방을 방문했을 때, 거처를 옮겨서 르푸르뒤에 일 년 정도 머물기도 했다. 고갱이 주도한 퐁타방파의 미학은 인상파의 감각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인상파의 감각주의를 대체한 퐁타방파의 화제는 바로 사상적 내용이었다. 사상적 내용이라는 추상성을 회화라는 이차원성에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 바로 고갱의 구획주의에 담겨 있는 미학적 원리였다. 이차원적 표현으로 조형하는 회화의 이미지들은 이후 현대 회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모티프들을 선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181물론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에서 아를의 밤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의 비밀은 바로 음악에 있다. 반 고흐는 음악과 미술을 동일하게 생각했던 화가이기도 했다. 특히 바그너에 심취한 반 고흐는 고갱과 함께 음악과 미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자주 토론을 벌였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반 고흐의 논의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말라르메는 음악을 꿈에 비유하면서 색체, 주제, 인물 성격 같은 복잡한 법칙을 동시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예술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런 그림을 작곡과 동일시했던 드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색채의 조합과 음조의 화합을 같은 성질의 예술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나중에 등장할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미리 예견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p181음색을 색조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칸딘스키의 예술관은 서로 다른 예술의 기호가 절대적인 차원에서 통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더니즘의 이상을 구현한 것이다. 절대적인 소통에 대한 갈구야말로 오직 화폐가치로 교환 가능한 것만을 소통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자본주의 근대 사회에 대한 모더니즘 예술의 저항이었다고 하겠다. 자본주의 사회는 화폐가치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는 똑같아진다. 예술가의 퍼포먼스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나 화폐가치를 통해 '동일한 노동'으로 간주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근대 예술가의 불만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예술의 절대성을 인정해야 예술가의 존재 가치가 증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예술은 평준화되고 교환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했다. 이 절대성을 구성하는 것은 감각이었다.
p183사실 모더니즘의 핵심은 '공감각'이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례를 들자면,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는 표현이 바로 공감각적인 느낌을 담아낸 것이다. 공감각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의 감각을 통해 다른 감각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결코 하나의 통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별 감각이 모두 살아 있으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반 고흐가 그린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은 이런 예술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그림에서 사이프러스는 나무라는 형태적 측면을 벗어난다. 마치 추상화처럼 나무라는 개체성은 무의미해지고 색채와 선이 음조처럼 화음을 맞추어서 너울 거린다.
p193반 고흐가 귓불을 자르기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증언자는 고갱뿐이다. 그러나 고갱의 진술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의견은 분분하다. 심지어 어떤 미술사학자는 반 고흐의 귀를 다치게 한 장본인이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내놓아서 파란을 일으켰다. 서로 싸우던 중에 위협을 느낀 고갱이 펜싱용 칼을 던져서 반 고흐의 귀에 맞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는 없다. 그만큼 이 사건은 증인도 없고 진술도 허술한 상태로 미술사에서 해명되기 어려운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아를의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이 사건은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p192반 고흐가 자연에 있는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고갱은 현실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날씨 때문에 부득이하게 실내에서 작업을 해야 했기에 고갱의 설득이 반 고흐에게 먹혀 들어갔다. 물론 마지못해 동의는 했지만 반 고흐가 행복했을 리는 없었다.
p215비록 반 고흐와 비극적으로 결별하긴 했지만, 아를을 떠나서 다시 퐁타방으로 가면서 고갱은 자신의 길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를에 그가 갈망했던 원시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찾을 수 없는 대상을 찾아서 그가 타이티로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상징의 세계에서 그가 찾아 헤매었던 예술의 광경이 비로소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p217생 레미에서 일 년을 머문 뒤에 반 고흐는 오베르로 거처를 옮겼다. 생 레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피사로에게 가고 싶었다. 세잔과 고갱을 키워낸 '아버지'가 피사로였으니, 아마 반 고흐도 피사로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동생 테오는 빈센트의 의향을 피사로에게 전했고, 피사로는 가셰를 만나서 상의해보라고 제의했다.피사로는 반 고흐 못지않게 마음이 불안했던 세잔에게도 의사 가셰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당시의 아방가르드 예술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셰의 모습에서 반 고흐는 "형제와 같은 완벽한 우정"을 발견한 것 같다고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밝혔다. 심지어 가셰와 자신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사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아를의 여인들]을 보고 흥미를 느낀 가셰의 요청으로 반 고흐는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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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를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루에 딱 두 잔 정도를 마신다. 이제는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린 듯이 그렇게 커피를 마신다. 어디를 가도 그렇게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하는 다른 음료를 내가 과연 하루에 한,두잔이라도 마시는가? 아니다. 어쩌다가 한 번 정도 마실 뿐이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커피는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고, 다시 말해서 중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커피가 처음 발견되게 된 계기는 인류가 술을 처음 접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술이 어떤 동물이 과일이 웅덩이에 떨어져서 자연발효되면서 만들어진 것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듯이 커피도 염소가 나무에 달린 어떤 열매를 먹고 씹었더니 몸에서 열이 나면서 기운이 솟아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이 그것을 먹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커피는 원래 쓰다>를 읽게 된 이유는 내가 매일 마시는 커피에 대해서 정작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없다는 것이다. 그냥 남들이 마시고 습관이 되어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내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가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 호기심과 궁금증이 나를 이끌었다.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그동안 너무나 무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항상 Green Bean을 볶아서 커피를 만든다고 해서 나는 커피는 콩의 한 종류로서 맛이 독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커피나무의 빨간열매의 씨앗, 바로 Green Bean을 볶아서 만들었다. 커피는 씨앗이다. 이것만으로도 읽은 보람이 있다.

 

커피는 세계교역량 중에 Oil 다음으로 많이 거래되는 물품이다. 과연 커피의 어떤 매력때문에 이렇게 전세계인이 커피를 수없이 마셔되는 것일까?

 

커피는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의 음료였다. 처음에 이슬람 수도사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음용되던 커피는 15세기 말 부터 일반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커피는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문학, 예술, 정치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했고 토론이 일상화되었고 집권 세력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게 되었다. 때문에 이슬람의 집권층은 마냥 커피의 확산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예컨데 커피하우스는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술탄 왕조에 의해 금지되기도 하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커피가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파되게 되는데, 당시 유럽의 맥주제조업체들의 큰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유는 사람들이 맥주를 대신해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마시는 물이 좋지 않아서 맥주를 대신하기도 했던 유럽은 술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커피는 훌륭한 대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마치 커피의 초기 발생지처럼 커피의 문화를 유럽이 주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종 황제가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꾸준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에스프레소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 IMF 이후 스타벅스가 처음 등장하면서 이런 문화들이 자리를 잡아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동안에 우리는 그저 '커피 한 잔 주세요' 로 통했다. 메뉴는 단지 커피였고, 프림과 설탕의 조합이 중요할 뿐 커피가 어떤 것이었느냐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우리가 흔히 믹스커피라 부르는 인스턴트 커피의 인기도 대단하다. 아마 그 이유는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뜨거운 물만 있으면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예전의 믹스커피 일변도의 커피는 이제는 에스프레소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 시점에서 커피의 종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커피의 종은 크게 에티오피아 원산지인 아라비카(Arabica)와 콩고가 원산지인 로부스타(Robusta)가 있다. 두 종류는 이름 만큼이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아라비카 종은 재배되는 지역의 환경 즉, 온도, 강수량, 일조량, 토양의 특성, 해발 고도등이 충분히 갖춰졌을 때 생산될 수 있는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고 있는 반면, 로부스타 종은 그렇게 까다롭지 않게 재배가 되고 있다. 그래서 아라비카는 재배되는 곳에 따라 독특한 향과 맛을 가지고 있다. 로부스타는 그 말이 '쓰다'라는 뜻을 내포했다는 듯이 맛이 쓰고 품질은 다소 떨어진다.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한 커피는 아라비카 종을 사용하고 있고, 믹스커피는 로부스타 종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 커피를 구매할 때 보면 아라비카 종을 강조하는 문구가 많이 보인다.

 

커피에 대해서 조금 알고 나니 재미있고,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커피를 한 잔 타서 옆에 두고 책을 읽었다. 커피를 마시고 입 안 전체에 퍼지게 하면서 나름의 향도 느껴보기도 했다. 알면 더 맛있게 마실 수 있고 더 잘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아직 커피의 맛은 잘 모르고, 커피의 쓴 맛을 그다지 즐기지 않아 연하게 타서 먹지만 알수록 매력있는 커피가 아닌가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웠던 코피루왁, 자바커피, 커피보관법에 대해 소개한다.

 

p54

코피루왁 

인도네시아는 원래 커피나무가 자라지 않던 땅이다. 커피가 막대한 수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에 커피재배를 시도, 수확에 성공한다. 루왁은 인도네시아에 서식하는 사향고향이를 말하는데, 그렇다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야생에서 서시하는 사향고향이는 숲속을 어슬렁거리다 빨갛게 익은 커피열매를 발견한다. 그리고 커피열매를 따먹는다. 그런데 커피열매는 과육 부분이 적고 씨가 과도하게 발달한 열매라 과육은 소화가 되지만 씨앗은 배설물과 함께 그대로 배출된다. 아마 인도네시아의 옛날 사람들은 자신들의 커피를 따먹는 사향고양이를 싫어했을 것이다. 마치 들판의 곡식을 탐내는 참새를 우리네 농부들이 싫어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중, 농부들은 사향고양이가 커피농장 주변에 배설을 한 똥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안에 커피콩이 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에 지인의 과수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지인은 까치를 제일 싫어했다. 왜냐하면 까치가 한 번이라도 쪼아 먹은 배는 상품가치가 떨어져서 헐값에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루왁의 배설물에 박혀있는 커피콩들을 바라보보던 인도네시아의 커피 농부들의 심정도 비슷했으리라. 상품으로 팔지 못하겠지만 아까운 마음에 더럽다고 놀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커피콩이 섞인 배설물을 집으로 가져갔다. 역사적인 발견의 순간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집으로 돌아간 농부는 집에서 고양이 똥으로 범벅이 된 커피콩을 볶아서 커피를 내린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향고양이의 뱃속에서 발효된 커피콩은 사향고양이 특유의 향과 소화액이 독특한 향과 풍미가 더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p166

자바커피

예멘의 모카항을 통해 커피를 들여와 유럽에 팔기 시작한 네덜란드는 커피가 돈이 되자 직접 커피생두의 수급에 나선다. 당시 네덜란드는 해외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결국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데에 성공한다. 물론 모카커피를 이식한 것이었는데,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토양이나 기후에 의해서 아라비아의 모카커피와는 다르게 변종이 되었다.

 

 

p176

커피보관법

밀폐용기에 보관하고 빨리 마셔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밀폐용기라 해서 가정에서 많이 쓰는 플라스틱 재질은 피하는 것이 좋다. 플라스틱 고유의 냄새가 커피에 섞여 커피 향을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유리로 된 만든 용기를 사용하고 햇빛에 닿지 않은 곳에 실온 보관한다.

 

커피는 자체 향도 강하지만 다른 냄새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냉장고나 냉동고에 있는 각종 다른 음식 냄새들이 커피에 빨려 들어간다. 절대 냉장고 보관은 안된다.

 

커피의 보관은 커피의 맛과 직결되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다. 아무리 최고의 생두로 최고의 로스터가 볶은 커피라 할지라도 보관이 허술하면 그 커피는 생명을 잃는다. 매우 당연한 이치다. 왜냐하면 커피는 음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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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

커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지역과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은 다음의 두 가지 이야기다.

 

먼저 아비시니아의 목동 칼디의 전설이다. 6세기경 아프리카의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고원에서 염소를 치던 목동 칼디는 어느날 수풀 속에서 흥분해서 날뛰는 염소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염소 울음소리를 쫓아간 칼디는 염소가 처음 보는 나무에 달린 빨간 열매를 따먹은 것을 알게 된다. 궁금하게 여긴 칼디가 열매를 따서 입에 넣고 씹었더니 몸에서 열이 나면서 기운이 솟는 것이 아닌가. 소년 칼디는 그 열매를 마을의 수도사에게 가져갔고, 열매를 달여 먹은 수도사는 기운이 나고 졸음이 없어져 밤새 기도를 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다른 하나는 예멘에서 내려오는 오마르의 전설이다. 오마르는 모카 왕국의 수도사였는데, 모카의 공주와 사랑에 빠졌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쫓겨나고 말았다. 산속에서 헤매던 오마르가 거의 지쳐갈 무렵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고 새소리에 이끌려 도착한 곳엔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가 이썽ㅆ다. 오마르는 그 열매를 따먹고 피로를 회복했음은 물론 목숨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 그 후 모카의 공주가 아프다는 소문을 듣게 된 오마르는 빨간 열매의 효험을 알고 있기에 이를 갖고 다시 모카로 돌아갔다. 결국 그 열매로 공주를 치료했고 왕은 오마르와 공주의  사랑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다.

 

오마르의 이 커피 전설은 13기경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연표로만 따진다면 오마르가 커피를 발견한 것은 칼디보다 무려 700년이나 뒤의 일이다.

 

p20

커피는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의 음료였다는 점이다. 이슬람 수도사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음용되던 커피는 15세기 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이슬람 사회는 커피가 가져온 변혁과 도전으로 찬란한 문명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커피가 이슬람 사회에 퍼지게 된 중심에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지금의 카페라고 할 수 있는 커피하우스에서 이슬람의 대중들은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단지 커피만 마신 것은 아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함께 문학이나 철학,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치에 대한 토론을 즐겼다. 토론은 때로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조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커피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의 비밀 음료에서 대중을 깨우는 각성의 음료로 퍼져나갔다. 때문에 이슬람의 집권층은 커피가 보급되는 것을 마냥 환영할 수는 없었다. 예컨데 커피하우스가 성황을 이루었던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술탄 왕조에 의해 커피하우스가 금지되었으며, 커피를 마시다 걸리면 가혹한 형벌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커피에 대한 억압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한편, 당시의 유럽은 전쟁과 마녀사냥으로 얼룩진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대중들은 항상 맥주에 취해있었다. 이러한 유럽을 깨운 것도 커피였다. 커피가 유럽으로 전파된 경로에 대해서는 터키의 오스트리아 침공 실패가 계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전에 이미 베니스 상인들을 통해 터키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탈리아로 들어갔으며, 베네치아에는 커피하우스까ㅡ지 생겨났다. 이스탄불에 카페가 생기고 거의 100년 후의 일이다. 베네치아에 생긴 커피하우스는 금새 유명해졌다. 이슬람 사회와 마찬가지로 유럽인들도 카페에 모여 정치를 얘기하고 문학과 철학, 예술 등의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가속화 시키는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훗날 유럽 근대화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된다.

 

p42

기독교 문명이 이슬람의 커피를 받아들이면서 커피를 아라비아의 와인이라고 불렀던 것이 그 반증이다. 반면, 술을 금하는 이슬람 사회에서는 술을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바로 이러한 요구에 딱 맞아 떨어졌고 커피하우스를 통해 퍼져나갔다. 커피하우스는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했고 결국 커피하우스를 통해 이슬람 사회도 변화와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 마치 훗날 교황이 커피를 허하면서 유럽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던 것처럼 커피는 이슬람과 유럽 양쪽 모두에게 변혁의 음료였다.

 

p48

에스프레소 전문점이 들어오기 전까지 흔히 카페라고 하면 커피뿐 아니라 술도 함께 취급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2층에 위치하였으며 흡연이 가능했다. 커피 메뉴는 그냥 커피였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커피의 산지를 따지기는 커녕 어떤 커피 회사의 제품인지도 묻지 않았고, 커피를 내리는 방식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커피보다는 수다를 떨 수 있는 좌석을 판매한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가격이 비쌌다. 90년대에 이미 5천원에서 만원을 넘나들었으니까. 그러나 스타벅스는 달랐다. 1층에서 바로 진입이 가능했고, 무언보다 다양한 커피 메뉴가 시선을 끌었으며, 가격 선택을 비롯해 공간을 활용하는 동선도 달랐다. 소비자들에게 스타벅스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p50

이제 서울의 거리는 에스프레소 커피전문점들로 넘쳐난다. 과장하면 한집 걸러 커피집이다. 대로변 목이 좋은 곳엔 어김없이 다국적 기업의 커피브랜드나 국내 대기업의 커피전문점이 차지하고 있고, 그 이면도로 역시 중소 커피점들이 커피 향을 풍기고 있다. 그런데 이런 빠른 커피가 대세인 한국 커피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런 바람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시작했다. 이른바 웰빙 신드롬, 이어서 슬로우 푸드라는 개념이 소개되면서 사람들은 먹거리의 안전과 건강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의 불씨가 커피로 옮겨 붙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소비자들은 해외에서 경험했던 커피 맛과 인터넷으로 습득한 커피 지식으로 무장하고 보다 까다롭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커피 어디에서 누가 볶은 거죠?' 라며

 

p51

커피라는 농작물이 어떤 곳에서 어떻게 재배되고, 어디에서 누가 볶는 것인지 꼼꼼하게 따질수록 커피 생태계는 더욱 균형을 찾게 될 것이다.

 

p53

아라비카라는 말에는 아라비아의 커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선 아라비카의 원조격인 타이피카 종이 있으며, 버본 종을 비롯하여 카투라, 몬도노보, 카투아이, 켄트, 카티모르 등이 대표적인 아라비카 종자다.

 

 

p54

 코피루왁

 

인도네시아는 원래 커피나무가 자라지 않던 땅이다. 커피가 막대한 수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에 커피재배를 시도, 수확에 성공한다. 루왁은 인도네시아에 서식하는 사향고향이를 말하는데, 그렇다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야생에서 서시하는 사향고향이는 숲속을 어슬렁거리다 빨갛게 익은 커피열매를 발견한다. 그리고 커피열매를 따먹는다. 그런데 커피열매는 과육 부분이 적고 씨가 과도하게 발달한 열매라 과육은 소화가 되지만 씨앗은 배설물과 함께 그대로 배출된다. 아마 인도네시아의 옛날 사람들은 자신들의 커피를 따먹는 사향고양이를 싫어했을 것이다. 마치 들판의 곡식을 탐내는 참새를 우리네 농부들이 싫어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중, 농부들은 사향고양이가 커피농장 주변에 배설을 한 똥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안에 커피콩이 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에 지인의 과수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지인은 까치를 제일 싫어했다. 왜냐하면 까치가 한 번이라도 쪼아 먹은 배는 상품가치가 떨어져서 헐값에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루왁의 배설물에 박혀있는 커피콩들을 바라보보던 인도네시아의 커피 농부들의 심정도 비슷했으리라. 상품으로 팔지 못하겠지만 아까운 마음에 더럽다고 놀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커피콩이 섞인 배설물을 집으로 가져갔다. 역사적인 발견의 순간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집으로 돌아간 농부는 집에서 고양이 똥으로 범벅이 된 커피콩을 볶아서 커피를 내린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향고양이의 뱃속에서 발효된 커피콩은 사향고양이 특유의 향과 소화액이 독특한 향과 풍미가 더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p60

커피업계에서 종사할 수 있는 대표적 일자리는 크게 커퍼(cupper), 로스터(roaster), 그리고 커피추출(brewing)영역에 속하는 바리스타로 나눌 수 있다. 커피 로스팅 분야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미지의 영역이며 이른바 블루오션에 속한다. 특히 그린빈(green bean)을 다루는 커퍼는 커핑(cupping)을 통해 생두의 등급을 결정하는 일종의 커피 테이스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커퍼는 커피의 최고수들이 모이는 전문 영역이다. 로스터가 현업 종사자가라고 한다는 커퍼는 연구직에 가깝다. 또한, 로스터에 비해 예술적 자유로움은 없지만 권위가 주어진다.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커피도 바로 커퍼의 평가과정을 통과한 것이다. 참고로 이 분야에 종사하는 한국인은 아직 많지 않다. 얼마나 무궁한 가능성을 간직한 영역인가! 남들이 미국으로 연수가고 유학갈 때 같이 따라 가겠는가? 아니면 무한한 꿈을 갖고 브라질로 날아가겠는가? 과감하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당신에게 건투를 빈다.

 

p63

커피는 볶아야 한다. 호박씨를 볶아 먹고 땅콩을 볶듯이 커피씨도 볶아야 커피원두가 된다. 커피는 볶기 전에 절대로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달달 볶아야 깊이 감춰 놓았던 속내를 드러내 놓는다. 커피를 볶는 것을 로스팅이라고 부른다.

 

p65

커피를 볶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로스팅 과정에서 커피는 향, 색깔, 그리고 소리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커피 로스터는 이 세 가지 변화에 온몸의 감각을 집중해야 한다. 로스터기 안의 생두는 일정한 화력을 받으면 크랙(crack 또는 ㅔpopping)을 한다. 크랙은 우리가 동네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뻥튀기와 비슷한 원리다. 보통 커피콩의 크랙은 두 번에 걸쳐서 이뤄지는데, 이때 나는 소리를 기준점으로 화력 노출시간을 조절한다. 로스터는 첫 번째 소리를 듣고 바로 로스팅을 끝낼 것인지, 아니면 두 번째 소리 전에 멈출 것인지, 혹은 두 번째 크랙까지 기다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커피 '볶음도'의 차이를 만든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크랙 과정을 거치면서 커피는 색깔의 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향이 표출된다. 커피 로스터들은 같은 산지의 커피라도 볶음도의 차이로 자신이 추구하는 커피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p70

내가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는 핸드드립이 산지별로 다른 다양한 맛과 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추출방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핸드드립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속도와 자연성에 있다.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대신 어떤 인위적인 에너지도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자신의 힘과 지구의 중력에 의지한다. 말하자면 아날로그 방식이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를 내리면 그 순간만큼은 의식이 명료해지고 이때 풍기는 커피 향은 세상살이에 지친 나의 영혼을 치유하고 편안함을 가져다 준다. 때문에 나는 커피원두 분쇄조차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내 손으로 그라인더를 돌린다. 누군가는 귀찮은 일이라고 하지만 그 귀찮은 일 또한 커피를 즐기는 일의 중요한 부분이다.

 

p76

최초에는 빈곤으로 인한 생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이른바 제3세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의 원조와는 돕는 방법이 달랐다. 그동안의 물질적인 원조가 이들의 삶을 전혀 개선하지 못한 것을 목격한 유럽의 지식인들은 원조 대신에 공정한 거래를 선택했다. 그들에게 학교와 병원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힘과 돈으로 학교를 지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그들보다 우리가 우월하다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과 우리는 똑같다는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거래를 진행하다보니 그들의 사회 문화적 환경개선과 더불어 생태적 환경보호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추가로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삶이 개선되는 일이 결국 나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연결성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p80

네덜란드 출신의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는 1973년부터 멕시코 인디오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아주 고된 커피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프란스 신부는 라틴아메리타 민중의 가난이 왜 해결되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 끝에 커피재배 농가들과 연대하여 커피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이것이 오늘날 공정무역 커피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프란스 신부는 유럽의 여러 NGO와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종교간 개발기구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니코 로전과의 만남을 통해 공정무역커피 브랜드 '막스 하벌라르'의 개발에 합의한다. 간단히 말하면 막스 하벌라르 프로젝트는 프란스 신부가 커피를 생산하면, 니크 로전이 그 커피를 유럽시장에 팔기로 한 것이다. 막스 하벌라르는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도왔던 소설 속 인물로 네덜란드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기 때문에 공정무역 커피의 이름으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을 까발린 이 커피가 기존의 커피시작에서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1988년 네덜란드에서 세계 최초로 공정무역 커피를 슈퍼마켓 매대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P87

실제로 유럽과 미국의 공정무역 단체와 시민단체들은 개발과 경쟁 등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지속적으로 경고를 보내왔다. 때로는 과격함을 띠기도 했다. WTO를 향해 공정무역을 도입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신자유주의를 공고히 하는 정부와 기업들의 행위에 대해서 규탄을 보내기도 한다.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비영리단체 글로벌 익스체인지가 2000년에 스타벅스에 공정무역 커피의 도입을 요구하는 메일과 팩스 보내기 운동인 '커피 캠페인'을 벌였던 것은 유명한 사례다. 결국 스타벅스는 주주총회를 통해 공정무역 커피의 도입을 공식 천명한다.

 

 

P88한국에서 공정무역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최저임금을 겨우 벗어난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시민단체 간사들의 헌신과 선한 자본으로 무장한 착한 시민들이 만나는 순간뿐이다. 가난한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이 모순, 이것이 현재 한국 공정무역계의 현실이다.

 

P90최근 이러한 웰빙에서 한층 더 진화한 로하스(LOHAS: Lifestyp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라는 개념이 부상

 

p91커피열매는 과육은 먹고 씨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과육은 벗겨내고 씨만 볶아서 먹기 때문에 굳이 유기농 커피가 아니어도 잔류 농약의 농도가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로스팅 과정에서 대부분의 농약 성분들이 휘발되기 때문에 커피에 유기농을 내세우는 것이 무색해진다. 이런 이유로 굳이 비싼 값을 치르면서 유기농 커피를 사용하는 회사는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농 커피는 주로 공정무역 커피 단체를 중심으로 개발되어 왔다.

 

공정무역은 일찍이 웰빙이나 로하스란 말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내걸었다. 따라서 공정무역으로 거래되는 먹거리, 대표적으로 커피와 바나나는 대부분 유기농법으로 재배되어 왔다. 공정무역을 통해 가난한 생산자들의 경제적 상황이 개선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일터이자 삶이 기반이 되는 토양이 농약이나 화학비료의 사용으로 죽어간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생태환경도 망가지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이 위협받는 것은 큰 문제가 된다. 이렇게 안전한 먹거리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생태환경의 보존과 생산자들의 건강까지 생각한다면 유기농 커피는 더욱 많아져야 하고 생태적 연결성의 맥락에서 소비되어야 한다.

 

p98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인스턴트커피에 사용되는 커피는 공정무역 커피는 물론 원두커피에 사용하는 커피와 전혀 다른 종자였다. 로부스타(Robusta)종을 사용하는 인스턴트커피와는 달리 공정무역 커피 원두커피 제품은 90퍼센트 이상을 아라비카(Arabica)종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로부스타 종과 아라비카 종은 어떤 차이가 있어서 공정무역 인스턴트커피의 사례가 적었던 것일까.

 

에티오피아 소년 칼디가 발견한 커피는 아라비아에 전해져 이른바 아라비카 원종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커피는 그 아라비카 원종에서 분화한 것이다. 원래 커피라고 하면 아라비카 종의 의미하는 것이었고, 아라비카라는 이름은 커피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퍼진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콩고가 원산지인 로부스타 종자가 발견된 것은 아라비카가 세상에 나오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게다가 로부스타는 쓴맛이 강하고 향이 약해 커피로서 상품성이 없었기에 발견된 뒤에도 자생식물처럼 방치됐다. 한편, 아라비카 종 커피는 재배조건이 까다롭고 고산지대에서 경작되기 때문에 가격이 비쌌다. 덕분에 커피농사를 짓던 농부들은 그런대로 먹고 사는 것이 가능했고,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브라질에 전례없는 서리가 내려 커피 생산량이 줄어들자 아라비카 커피의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커피회사들은 아라비카 커피를 대신할 로부스타 커피에 관심을 갖게 된다. 로부스타는 아라비카 종보다 맛과 향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제외하고는 장점이 더 많았다. 병충해에도 강하고 플랜테이션 대량재배가 가능했기에 조금만 연구하면 아라비카 자리를 값싼 로부스타로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부스타 커피의 개발로 판로가 줄어든 아라비카 커피가격은 곤두박질치게 되었고, 아라비카 종 커피를 재배하던 농부들의 생계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공정무역 커피는 이런 아라비카 커피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정무역 커피를 개발하려던 당시 한국은 로부스타 커피 소비량 세계1위의 인스턴트커피 공화국이었으니

 

p109전일본커피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커피점은 약 80,000개(2006년 기준)로 약 30만 명의 바리스타가 일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인 한사람이 1년간 마시는 커피는 3.3kg(2006년 기준)이다. 한국은 같은 시기 약 2kg이 조금 안 되는 양을 소비했는데, 일본의 경우 수년간 3kg 대를 유지해온 반면 한국은 무서운 속도로 소비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일본의 인구와 시장규모로 미루어 볼 때 한국도 30,000곳 까지는 증가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p113한국 땅에서 커피가 일약 최고의 흥행 키워드로 부상하면서 인스턴트커피도 새롭게 조명되어 아라비카 원두를 사용하는 인스턴트커피까지 등장했다.

 

로스터리카페란, 직접 커피생두를 볶아 내린 커피를 판매하는 곳을 말하는데 원산지별로 다양한 커피 고유의 맛과 향을 살리기 위해 주로 핸드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추출한다.

 

p129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본질적으로 로스팅이라는 불의 여역과 추출이라는 물의 여역이 만나서 완성된다. 불과 물은 상극이라 서로를 소멸시킬 수 있지만 커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p145커피의 종자는 크게 아라비카(Arabica)종과 로부스타(Robusta)종으로 나눌 수 있다. 리베리카(Liberica)종을 추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현재 리베리카 종은 생산량이 적어 거의 존재감이 없다. 그렇다면 커피의 전설에 등장하는 커피는 어떤 종자였을까? 힌트는 이름에 담겨있다. 커피의 전파 경로가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듯이 칼디나 오마르가 먹었던 전설 속의 커피열매는 아라비카 종으로 보인다. 한편, 로부스타는 라틴어로 '강하다'는 뜻이라 고 한다. 왜 로부스타는 강하다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ㅇ라비카보다 늦게 발견된 로부스타는 아라비카에 비해 병충해에 강했다. 즉 병충해에 강한 커피라는 뜻에서 로부스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아라비카 종은 원산지가 에티오피아였던 반면 로부스타는 콩고가 원산지다. 또한 아라비카와 로부스타를 유전적인 측면에서 비교하면 아라비카 종은 자가수정이 가능한 반면 로부스타 종은 곤충에 의해서만 수정이 일어난다고 한다. 수확량으로 보면 세계 커피 수확량의 약 75퍼센트 정도가 아라비카 종이며, 나머지 약 25퍼센트 정도를 로부스타 종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엔 대형 커피회사들이 원가절감 차원에서 가격이 싼 로부스타의 종자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보니 나날이 로부스타 종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흔히 적도를 기준으로 북위, 남위 25도 사이의 아열대 기후 지역에선 커피재배가 가능하다고 해서 이 지역을 커피벨트라 통칭한다. 그러나 커피벨트 범위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 커피가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아라비카 종은 재배조건이 까다롭다. 병충해에 약하고 섭씨 5도 이하 지역이나 30도 이상의 고온지역에서는 경작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온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또한 강수량과 조사량이 적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재배지의 해발고도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와 같이 아라비카 종은 재배조건에 제약이 많지만 그만큼 원산지별 커피 고유의 맛과 향이 살아있기 때문에 상품가치가 높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은 세계11번째의 커피 소비 대국이지만 이러한 아라비카 종 커피시장은 그동안 불모지와 다름없었고 대부분 로부스타 종 커피를 소비해 왔다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 약 10년 사이에 에스프레소 전문점이 대중화되고 원두커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금씩 아라비카 종 커피의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로부스타 종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름 자체가 강하다는 뜻인 만큼 병충해에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온에서도 비교적 잘 견디며 토양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비교적 높은 해발고도(900~2000m)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아라비카 종과 달리 이들 로부스타는 해달 500m 이내 지역에서도 잘 자란다. 그러니까 로부스타 종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잘 자라는 커피인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식물인가. 그러나 로부스타 종은 쓴맛이 강하고 향이 거의 없어 커피로서의 상품적 가치는 크게 떨어진다. 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보니 로부스타 종은 가격이 싸다. 때문에 원가절감이 목적인 거대 다국적 커피회사들에 의해 대량 구매된 후 주로 인스턴트커피로 만들어진다. 인스턴트 커피의 생산과 소비 대국인 한국은 로부스타 소비가 압도적으로 많다.

 

p149커피나무의 열매에 들어있는 씨를 파치먼트라고 한다. 도정하지 않은 쌀을 생각하면 된다. 도정을 통해 쌀겨를 분리하듯이 파치먼트도 가공을 하면 생두가 된다. 보통 생두를 그린빈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생두가 초록빛을 띠기 때문이다. 최근에ㅐ 순우리 말을 사용해서 날콩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생두를 볶은 것이 바로 커피원두다. 우리는 흔히 원두커피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인스턴트커피와 구분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인스턴트커피도 커피원두로 만들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자면 원두커피의 일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스턴트커피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원두커피라는 용어보다 '레귤러 커피'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국 커피시장에서는 레귤러라는 용어는 커피 컵의 사이즈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p150최근 증가 일로에 있는 갓 볶은 원두를 사용한다는 로스터리 카페에 가보면 메뉴에 단종커피라는 단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종? 조선의 임금도 아니요, 품절된 커피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단종은 동일한 커피종자란 의미로 원산지가 동일한 커피를 의미한다. 가령 에티오피아 이가체프나 과테말라 안티구아 또는 브라질 세하도 등으로 표기하는 커피 메뉴가 단종커피다. 요즘엔 스트레이트 커피라고도 한다. 핸드드립 커피전문점과 로스터리 카페가 많아지고 다양한 산지별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면서 단종 커피는 이제 대중의 입맛을 파고들고 있다.

 

블렌드 커피란, 각기 다른 원산지에서 재배된 두 가지 이상의 커피를 혼합한 커피를 말한다.

 

p151커피산지는 매우 다양하며 생산량도 제각각이라 커피 회사의 입장에서는 종류별로 값을 다르게 치르고 생두를 구입한다. 따라서 적절한 배합을 통해 재고량을 조절할 목적으로 블렌딩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생두는 수확한 지 1년 이내에 소비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블렌딩의 목적을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는 로스터 마음이지만, 최고의 한 잔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고량을 조절하는 수단보다는 자신만의 커피 철학이나 개성을 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블레딩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블렌딩이라고 해서 아무거나 막 섞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블렌딩을 위해서는 뛰어난 커피 지식과 오랜 경험이 필요하다. 다양한 종류의 생두별 특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오랜 기간 동안 현장에서 쌓은 로스팅 경험을 통해 확보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블랜딩 배합 노하우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탈리아에서는 커피 로스터와 별도로 블렌딩만을 전문으로 하는 커리 블랜더가 다로 있을 정도다. 블렌딩의 목적은 단종커피에 부족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함인데 오히려 잘못된 블렌딩은 단종커피보다 맛과 향이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p155흔히 커피의 재배조건 가운데 따뜻한 기온과 적당한 강우량이 가장 중요하며, 강우량은 연중 1,200~2,000mm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풍부한 강우량을 받쳐 줄 수 있는 토양이다. 즉, 커피나무에게 필욯란 수분을 적절히 공급할 수 있도록 땅은 빗물이 넘치면 걸러내고 모자라면 머금고 있어야 한다. 이런 땅이 없다면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커피를 재배할 수 없다. 열매가 맷히기 시작하면 비보다는 태양이 필요한데 필요한 가우량이 있듯이 햇살도 적당한 조사량이 존재한다. 따라서 조사량을 조절할 수 있는 주변의 음영수(커피재패에 필요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식물을 말하는데 대표적으로 바나나와 야자나무)나 구름이 있어야 하다. 음영수야 심으면 된다고 쳐도 도대체 구름은 무슨 수로 조절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끝은 아니다. 해발고도 조건이 맞아야 한다. 해발고도가 높아야 하는 이유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가운 기온이 교차되면서 커피열매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조밀도가 높아지면서 맛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커피나무에 빨간 커피열매가 엉글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고루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연의 혜택으로 앞서 언급한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서리가 내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기후조건을 갖췄다 하더라도 서리가 내리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냉해를 입는 것 자체도 치명적이지만 앞으로도 서리가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더 큰 문제다 커피는 파종을 해서 첫 수확을 할 때까지 최소한 2~3년, 보통 5년 전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서리피해는 커피농장을 옮겨야 할 정도의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실제로 브라질은 서리로 인한 냉해로 커피 흉작을 겪었고 농작 지역을 옮겨야 했다. 세계 커피 시장은 요동쳤고 결국 기존의 커피 수급구조 자체를 변화세켰다.

 

아라비아로부터 커피를 받아들이고 커피 거래의 주도권을 손에 넣은 유럽인들이 제일 처음 한 일은 바로 커피산지를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만약 유럽에서 커피를 재배할 수 있었다면 세계 역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영구이 인도에서 커피재배에 성공했다면 지금처럼 홍차를 즐겼을까? 이런 측면에서 커피 천국 라틴아메리카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대박이었겠지만 원주민 인디오들에게는 암울한 예고편이 되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장 축복받은 자연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공정무역 커피 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은 커피의 재배조건에 있었다.

 

p165당시 커피 수출이 가장 활발하던 항구가 예멘의 모카 항이었다. 커피 향이 퍼지는 항구의 이름이었던 모카는 그 후 커피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지만 에스프레소 머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모두 모카포트로 커피를 추출해서 마셨다. 물론 지금도 모카포트는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추출 기구를 카페포트가 아니라 모카포트라고 불렀다는 저체가 모카가 커피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모카커피의 범주에 속하는 커피는 예멘의 마타리, 에피오피아의 하리, 이가체프, 시다모 등이 있다. 그러나 최고의 모카커피라하면 하타리와 하라를 뽑는다.

 

p166카페모카란 에스프레소에 스팀 우유를 넣은 후 초콜릿을 넣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앞서 언급한 모카커피와는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다.

 

모카자바는 모카커피와 인도네시아 자바커피를 블렌딩한 커피를 말한다.

 

예멘의 모카항을 통해 커피를 들여와 유럽에 팔기 시작한 네덜란드는 커피가 돈이 되자 직접 커피생두의 수급에 나선다. 당시 네덜란드는 해외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결국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데에 성공한다. 물론 모카커피를 이식한 것이었는데,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토양이나 기후에 의해서 아라비아의 모카커피와는 다르게 변종이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자바커피를 원래의 모카커피와 블렌디한 것이 바로 모카자바다.

 

p174사실 갓 볶은 커피, 그러니까 로스팅 기기에서 막 볶아 나온 커피는 생각만큼 커피 향이 많이 나지 않는다. 로스팅 직후의 커피 향이 약한 이유는 볶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가 커피 향의 발산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 원두는 아주 미세한 구멍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작은 구멍 안에 이산화탄소가 가득 차있다.  이런 이산화탄소가 다량으로 남아있으면 카피를 추출했을 때 커피 맛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갓 볶은 커피는 이산화탄소가 날아갈 신간이 필요한데, 이것을 숙성기간이라고 한다. 로스팅을 얼마나 강하게 했는지 에 따라 이 숙성기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개 로스팅 후 3~5일 사이가 정점으로 이때의 커피가 가장 풍부한 커피 향을 자랑한다. 그리고 적정한 방법으로 보관했을 시 이내 소진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원두를 구매할 때에는 자신의 커피 소비량을 가늠해서 주문하는 것이 좋다.

 

또한 원두를 구매할 때는 분쇄한 커피보다는 갈지 않은 홀빈 상태의 커피를 구입하기를 권한다. 왜나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커피는 작은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커피를 갈면 커피를 머금고 있는 구멍들이 없어지는 셈, 따라서 커피 향이 날아가 버릴 뿐아니라 공기 중의 산소와 접하는 면적이 증가해서 커피의 산패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진다. 보통 분쇄 후 5일이 지나면 커피 향은 없어지기 시작하고 산화가 지속될수록 맛은 그만큼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가끔 홀빈으로 구입하고 싶어도 분쇄기가 없어서 어쩔 수없이 분쇄한 커피를 선택하는 경우를 보는데, 앞으로 지속적으로 커피를 즐길 계획이라면 커피 분쇄기 정도는 장만하는 것이 좋다.

 

전동식, 수동식이 있는데 수동식 추천

 

p176밀폐용기에 보관하고 빨리 마셔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밀폐용기라 해서 가정에서 많이 쓰는 플라스틱 재질은 피하는 것이 좋다. 플라스틱 고유의 냄새가 커피에 섞여 커피 향을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유리로 된 만든 용기를 사용하고 햇빛에 닿지 않은 곳에 실온 보관한다.

 

커피는 자체 향도 강하지만 다른 냄새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냉장고나 냉동고에 있는 각종 다른 음식 냄새들이 커피에 빨려 들어간다. 절대 냉장고 보관은 안된다.

 

커피의 보관은 커피의 맛과 직결되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다. 아무리 최고의 생두로 최고의 로스터가 볶은 커피라 할지라도 보관이 허술하면 그 커피는 생명을 잃는다. 매우 당연한 이치다. 왜냐하면 커피는 음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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