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7
"가슴에 묻어? 못 묻어. 콘크리트를 콸콸 쏟아붓고, 그 위에 철물을 부어 굳혀도 안 묻혀. 묻어도, 묻어도, 바락바락 기어 나오는 게 자식이야. 미안해서 못 묻고, 불쌍해서 못 묻고, 원통해서 못 묻어."

p110
"천지야, 속에 담고 살지 마. 너는 항상 그랬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은 잘해도 싫어요, 소리는 못했어. 만약에 지금 싫은데도 계속하고 있는 일 있으면, 당장 멈춰. 너 아주 귀한 애야. 알았지?"

p114
"괜히 애써 무겁게 살지마. 산다는 거 자체가 이미 무거운 거야. 똥폼 잡고 인생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들, 아직 인생 맛 제대로 못봐서 그래. 제대로 봐봐. 웃음밖에 안 나와 ......"

p148
"그러게 말이다. 너, 죽지 마라. 언젠가는 죽기 싫어도 죽어. 일부러 앞당기지 마.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사람들,  더 아프게 하는 거야. 죽어서 해결될 일 아무것도 없어. 묻어둘수는 있겠지.근데 그거, 해결되는 거 아냐. 냄새가 진동하거든. 진짜 복수는 살아남는 거야. 생명 다할 때까지 살아."

p160
"어찌된 게 요즘 애들은 단체전은 없고 개인전만 있는 거 같아요. 그렇게 혼자 다 하려니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겠어요."

p195
"...... 그리고 미라야, 분명히 말하지만 천지는 멍청한 게 아니라 착한 거야. 착한 애는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꼭 가지고 놀려는 것들이 생겨서 문제지. 자기 맘에 들면 착한거고, 안들면 멍청한 건가? ......"





"잘못했어요."

"알아."
"저는요, 천지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럼 그냥 '나 너랑 안 놀아.'하면 됐잖아."
"불쌍해서 어떻게 그래요....."
"너 말 참 우아하게 한다. 불쌍해서 못 했다고? 말은 못 하면서 행동은 어떻게 했니? 천지가 떠날 정도로 지독하게? 그냥 조금 더 가지고 놀고 싶었어요. 그게 네 진심 아냐?"

나는 과연 지금껏 살아오면서 우아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가? 잠시 생각해본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책 속의 등장인물 중 미라는 과연 미라의 그런 방관자적인 모습이 천지를 아프게 할지 알았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사람은 무쇠처럼 강한 존재인 동시에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이다.

어떤 이에게는 단지 스쳐지나가는 말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정말 아릴 정도의 고통을 줄 수 도 있다.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제목 만으로 선택한 책이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천지가 죽는다. 무언가 가벼운 주제가 아니구나 바로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 도가니를 읽을 때 안개가 배경으로 나왔을 때 느꼈던 기분이랑 비슷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인 천지의 자살은 지금 세대를 살고 있는 어떤 이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과 얼마 전에도 한 학생이 왕따로 인해 자살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발생하고 있으며,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으면서 고통 속에서 여전히 아파하는 이들은 너무나 많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왕따의 대상은 정말 무언가 크게 잘못하거나 그래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미소처럼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조건에 처해있고, 거기에는 분명한 가해자 대상이 있으며 이들과 함께 주변의 동조자와 방관자가 주변을 채운다.

나는 과거에 가해자, 동조자, 방관자 였던 적이 없었을까? 자신있게 없었다. 라고는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살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고통의 결과로 결정한 것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내가 한 말이 타인의 가슴에 꽂히는 화살이 되지 않는지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고, 그 화살은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창비의 청소년문학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정말 지금 학교생활을 하는 이들이 한 번 읽어보고, 자신은 어떤 대상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고,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말 무엇보다도 아프게 하는 입으로 나오는 그 말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항상 다시 되새겨보아야 한다.

그래야 내 앞에 있는 당신이 아프지 않고, 내가 아프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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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VS 알라는위대하시다.

어쩌면 아직도 위의 대결은 현재 진행형이다. 언제 이 대결이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바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두 거대 종교 집단간의 대결이었다.
이 두 종교는 모두 유일신만을 섬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과연 완전히 별개의 종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 맥은 서로 이어지고 서로가 믿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마도 비슷한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그 차이가 모든 것을 갈라놓았고 지금도 역시 그 차이로 대결 국면에 있다.
얼마전까지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다가, 최근 들어 아내의 권유로 기독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래도 항상 이 의문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 모든 종교는 항상 자비와 사랑 등 보편적 가치를 매개로 그 신도들을 이끈다. 하지만 그러한 종교들이 십자군전쟁과 같은 종교전쟁을 통해 서로 학살하고 죽이는 일을 반복한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들간에도 종교라는 차이를 빌미로 실질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종교는 완벽하지 않으며 모순으로 가득차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개개인의 신앙으로서 그들의 사후세계나 하루하루의 고통의 하루에 대한 위로와 격려로서는 충분한 기능을 하겠으나, 이러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서로 다른 집단과의 갈등에서는 철저하게 이해배타적이고 종교적인 덕목과는 상관없는 일상적인 세속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권력과 기타 등등.. 그 여러가지 力 들에 의해 바뀌어진다.

그래서 너무나 아쉽다. 짧게는 수 백년 길게는 수 천년을 이어온 이러한 종교들간에도 무언가 서로를 이해하는 관용과 그들의 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일반적인 내 종교에 대한 생각이었다.

십자군이야기의 책을 읽다보면 이 때 등장하던 여러 깃발들, 기사단, 성지 등이 지금도 여전히 문화산업적인 측면으로 그리고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십자군 이야기에서도 주요 등장인물이었으며 여러 영화 및 문화산업에도 자주 등장하는 기사단에 대해서 잠깐 보도록 하자.



(위의 그림은 순서대로 튜턴기사단, 병원기사단(요한기사단), 템플기사단이다.
튜턴 기사단은 후에 등장했으며 템플기사단과 병원기사단은 전 십자군 전쟁에 주연으로 등장한다.)

◆ 병원기사단(요한기사단) - 빨간색 바탕에 하얀 십자가, 일종의 병원 단체로 활동, 전쟁시 기사 역할
◆ 템플기사단 - 흰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 순례보호 목적, 성 베르나르두스의 후원으로 교황의 공인 받음
◆ 튜턴기사단 - 흰색바탕에 검은색 십자가, 신성 로마 제국의 휘로 독일인으로 구성

우리가 영화나 미술작품에 본 십자군들의 서로 다른 의상은 기사들의 소속 및 기원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들은 때로는 독립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8차 십자군 원정 동안에 큰 활약을 보인다.

십자군이야기에서 8차로 진행된 십자군전쟁에서 가장 흥미가 있었던 부분은 바로 십자군의 리처드와 이슬람의 살라딘의 대결이 이루어진 제3차 십자군이었다. 여기서는 십자군 전쟁 기간동안 양 진영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가 참여함으로써 때로는 치열한 전투를, 때로는 서로 타협을 하면서 전개된다. 그리고 영국의 왕인 리처드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가 월드컵에서 흔히 보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의 상징이 삼사자인데 이 삼사자는 바로 리처드를 상징했던 문양이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을 전후로 해서 우리가 세계사 공부를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카노사의 굴옥, 아비뇽유수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십자군이야기에서도 흐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황과 황제들 간의 관계는 서로 간의 힘 싸움으로 그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소설의 형식으로 십자군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단순히 세계사 책에서 십자군전쟁, 이 다섯 글자로 배우고 말았던 주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들이 현재에도 이렇게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이건 아마도 단지 과거의 십자군 전쟁 관련 소설로만 읽고 지나치기에는 생각할 게 너무나 많이 있는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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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왕
녀를 위한 파반느>

책을 읽는 도중에 인터넷에 '박민규'를 검색해 보았다. 도대체 이런 작품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
작년부터 책 속에 빠져들면서, 여러 작가들과 간접적으로 만나왔는데 이런 이야기 전개는 처음 보는 것이었으며 영화식스센스를 넘어서는 반전이 숨어있고 책을 덮으면서 우와~! 라는 탄성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숨을 들이 쉴 수 밖에 없었다.


피아노 연주곡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들 중 못생긴 한 시녀를 주목하여 만든 표지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바로 이 표지는 이 책의 내용을 맗해준다. 우리는 항상 [시녀들]속에서 금발의 귀여운 하얀 드레스를 입은 가운데 아이를 본다. 그림에도 주변은 대개 어두운 계통인데 비해 그 아이만 밝은 옷을 입고 있다. 우리의 사회의 모습이다. 아름답고 부유한 것만 바라보고 부러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그 옆의 못생긴 시녀에 대해서는 무관심함을 넘어서서 가혹하게 대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한쪽이 밝아질수록 점점 그 주변은 어둠속에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떠날 때 남긴 편지에는 그녀의 외모때문에 겪은 억울하면서도 비참하기까지 한 그녀의 과거 경험이 드러난다. 그녀는 남보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변방으로 몰리고 또 그 주변으로 떨어지게 되는 모습을 보며 단지 외모로 비유하고 있으나 여러 요소들이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을 중심에서 소외하게 만드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여자는 철저하리만큼, 마치 자기가 입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그녀의 모든 것을 뱉어내듯이 그녀의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모든 걸 뱉어내어 그녀 자신을 드러내는 그 장면이 너무나도 강하게 뇌리에 기억에 남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그리고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명예의 유무를 떠나서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에서 부터 새로운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 또한 알게 되었고,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내 가슴의 폐부를 찌르고 말았다. 그것은 나에게는 어쩌면 작은 충격이기도 했다.

어쩌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이기도 하면서도, 이 사회를 향해 내뱉는 포효일 수도 있는 이중적인 작품이었다.
정말 책을 덮으면서 심장이 뛰고 깊은 숨을 들이 쉴 수 밖에 없는 올해 내가 접한 소중한 책이며, 작가였다.

(39p)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p58)
시간이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 느낌이야. 나... 예전의 엄마가 너무 좋았어.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 달라고는 말 못하겠어. 그런 일을 당하고 어느 누가 예전처럼 살 수 있겠어. 그래도 죽지는 마. 그것만 빼곤 나 다 괜찮아. 설령 어떻게 변한다 해도 달라진 엄마를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있어주기만 하면 돼.

(p102)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놀라운 걸요. 놀랍지. 여자들에겐 네트웍을 위한 장기 하나가 따로 몸속에 있지 않으까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 혀를 차며 요한도 얘기했었다.

(p144)
공부 공부... 그러다 죽는 거잖아. 1등 1등... 그러다 죽어야 하고... 돈 돈 그러다 죽는 거잖아.

(p149)
어머니께선 너무 많은 말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단 한 줄도 쓰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건... 제가 소설을 써봐서 알아요.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땐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게 인간이거든요

(p156)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p175)
그런 생각도...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형, 저는 한 가지는 알아요. 그 어떤 인간도 실은 나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거... 이러쿵저러쿵 말들은 해도 실은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뿐이란 거. 그건 정답이야, 하고 요한은 얘기했다. 하지만 명심해, 앞으로의 길에는 정답이 없어. 뭐, 이러쿵저러쿵 말은 하지만 나 역시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p193)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p270)
이름으로 저를 부르는 아이들은 없었습니다. 저에겐 늘 지독한 별명이 따라다녔고, 별명이 늘어날 때마다 어둠의 영역도 커져만 갔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놀림을 받아야 했는지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어떤 피해를 준 건지... 타인의 얼굴을 공격하는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이었는지 저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지독한 몇몇 앙치들과는 싸움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싸움을 할 때마다 또 새로운, 더 지독한 별명 하나가 추가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메주였던 별명이 미친 메주가 된다거나... 호박이나 돼지에서 괴물이나 산돼지로 변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p281)
화장을 시작한 여자에겐 두 개의 얼굴이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여자에겐 두 개의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꺄아~ 선생님이 직접 완성한 아이의 변화 앞에서 모두가 탄성을 질렀던 순간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하거나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p287)
바라는 모든 걸 얻는 것이 인생의 가치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겨우, 가까스로 얻은 것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인생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포기하고 포기하면 세상을 살아온 저 같은 여자에게... 인생의 '가치'는 그런 것입니다.

(p292)
얼마나 먼 길을 걸어가야만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먼 바다를 건너가야만 갈매기는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포탄이 날아다녀야 우리에겐 평화가 올까

오 친구여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p296)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지식을 왜 배우는 걸까. 이를테면 f(x+y) = f(x) + 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줄줄이 외게 하면서도 왜, 이별을 겪거나 극복한 개인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가. 지층의 구조를 놓고 수십 조항의 문제를 제출하면서도 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교육은 시키지 않는 것인가.  아메바와 플라크톤의 세포 구조를 떠들면서도 왜, 고통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는가. 남을 이기라고 말하기 전에 왜, 자신을 이기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

(p315)
미녀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에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그것은 부자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과도 일맥상통한 것이란 기분이 들어서였다.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나 역시 무작정 그들에게 관대했던 인간이었고,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의 조건을 갖추어야 할 인간이었다.

(p329)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세상의 풍경들을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다워지는여자들... 아름다워 <져야만>하는 여자들과 ... 학력을, 차를, 또 집을... 말하자면 힘을 <가져야만>하는 남자들... 서로에 의해, 서로에 비해, 올라선 서로를 위해 구축하던 프리미엄과... 올라서지 못한 서로에게 요구되던 또 그만큼의 스펙에 대해... 그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삶의 성질에 대해... 오로지 스펙과... 프리미엄만 늘어날 뿐인 이 삶에 대해... 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p361)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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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 필요성과 절실함도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힘든게 바로 중국 고전을 읽는 것이다. 논어, 맹자, 중용 등에 대해서 읽으려 했으나 항상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서 버렸다.

이 책은 그 고전들을 읽기 위한 준비 운동이라고 해야 하나. 무언가 흥미와 감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상도를 통해 최인호 작가의 매력을 알고 있어 <소설 공자>를 선택하는 망설임은 없었다.

소설 형식으로 풀어주는 공자의 이야기가 흥미로우며, 4대 성인(예수, 부처, 공자, 마호메트 또는 소크라테스 의견분분) 중의 한 명이지만, 그의 삶은 다른 성인들에 비해서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며 개인적인 정치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 또한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와 함께, 중국 아니 세계의 역사상 흥미로운 만남이라 할 수 있는 공자와 노자의 만남 또한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들이 어찌 보면 서로 다른 사상을 추구하는 두 현인이 만났기에 그 만남이 너무나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논어를 읽기위한 준비운동으로는 너무 좋은 책이었다. 역시 최인호 작가님~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여도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은 부모님을 부양하려 하나 부모님이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임각굴정(臨渴掘井) - 목이 말라서야 우물을 판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소공은 노나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현군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물에 빠진 후에야 물에 빠진 원인을 알고자 하고, 길을 잃은 다음에야 길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위급함에 처해서 부랴부랴 무기를 주조하고, 목구멍이 막히고 목이 마르고서야 비로소 우물을 파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빠르게 무기를 만들고 우물을 파더라도 이미 늦은 것입니다."

의기양양(意氣揚揚) - 우쭐거리며 뽐낸다.
- 재상의 마부가 마치 자기가 재상인양 우쭐거리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양두구육(羊頭狗肉) - 양머리를걸어두고 실제로는 개고기를 팔고 있다.
-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차도살인(借刀殺人) -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제거한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께서는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물은 만물을 도와서 생육시켜주지만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물은 무언가 한다는 자의식 없이 자연을 돕고 만물을 소생시킨다. 따라서 무엇인가 작위하려는 자기욕망을 끊고 물처럼 무위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도이며, 이것이 바로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최상의 도인 것이다.

외교의 목적은 단 한 가지뿐, 상대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확고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보다 큰 실리를 얻기 위해서는 작은 손실을 감수해야 하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외교술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외교에 더욱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재물과 색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마치 칼날에 묻은 꿀을 핥는 것과 같다. 한 번 입에 대는 것도 못할 일인데 어린아이들처럼 그것을 핥다가 혀를 상한다. 모든 욕망 가운데 성욕만큼 더한 것은 없다. 성욕의 크기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다행히 그것이 하나뿐이었기에 망정이지 둘만 되었어도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애욕을 지닌 사람은 마치 횃불을 들고 거슬러가는 것과 같아 반드시 횃불에 화를 입게 될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 -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

군자는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못하다. 우러나는 마음과 믿음 있는 말을 주로 하며, 나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며, 잘못을 깨달았을 때에는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

순임금
"그대들과 같은 신하는 짐의 팔과 다리요, 눈과 귀로 내가 백성을 위해 돕고자 하니 그대들이 대신해 달라."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하였다.
"지금 이 순간을 현재의 눈으로 보지 말고 먼 영원의 눈에서 현재를 보라."

진항은 말하였다.
"내가 왕을 죽인 것은 썩은 사직을 바로잡고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일념이었소. 그러니 나를 지지하여주시오."
이에 자연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나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가.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은 지지하지 않는다. 또 당신은 나를 어질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그 임금을 배반하는 것을 어진 사람은 싫어한다. 당신은 내가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무력으로 나를 위협하고 겁주어서 내가 두려워 당신에게 굴복한다면 나는 용감한 자가 아니다. 나에게 지인용(智仁勇)의 세 가지 덕목이 없다면 내가 당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반면에 내가 이 세 가지의 덕목을 가졌다면 내가 어찌 당신을 따를 수가 있겠는가."

자하가 말하였다.
"널리 배우되 독실하게 뜻을 가지고, 간절히 묻고 가까운 것으로부터 생각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자하가 말하였다.
"모든 장인은 공장에 있으면서 자기 일을 완성하고, 군자는 학문을 통해 자기의 도에 이른다."

자하가 말하였다.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댄다."

자하가 말하였다.
"군자는 신뢰를 얻은 뒤에 백성을 부릴 수가 있다. 신뢰가 없으면 자기들을 학대한다고 여긴다. 또한 신뢰를 얻은 뒤에 임금에게 간해야 한다. 신뢰가 없으면 자기를 비방한다고 여긴다."

자하가 말하였다.
"큰 덕은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되지만 작은 덕은 약간의 한계를 넘어도 괜찮다."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 이를 어진 이로 대하되 낯빛을 좋게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다하며, 친구를 사귀되 말함에 신의가 있으면 누가 아직 학문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필히 그가 학문하는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매일 내 자신에 대해서 세 가지를반성한다. 남과 일을 꽤함에 있어 불충실하지는 않았는가. 친구들과 사귐에 있어 신의를 잃지 않았는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바가 없었는가"

우리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며, 출세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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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으로 본 위선에 찬 어름들의 세계에 대한 예민한 성찰과 젊은이가 겪는 성장의 아픔!

샐린저를 현대 미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작품, 경박한 수업 내용, 거직과 허위로 가득 찬 학교 생활에 식상하여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은 주인공 홀든이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뉴욕 거리를 배회하며 목격한 것들을 회상 형식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천사 같은 어린이들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동경하여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의 도피를 결정하기 직전, 여동생의 순진무구한 마음씨에 동화되어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인정하는 마음의 눈을 뜨게 되는 홀든의 내적 변화에 대한 추적도 독자로 하여금 순화된 의식을 간접 체험하게 해준다.

이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위선에 찬 세상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그리고 있다. 현대 사회의 경박함과 저속함을 상징하는 듯 재즈의 음률을 담은 수많은 속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샐린저의 표현력이 돋보인다.

                                                                                                         - 책의 뒤에 표현되어 있는 글 -


<호밀밭의 파수꾼> 너무나 많이 들어본 책의 제목이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아마 제목은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내용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항상 "○○에서 선정한 책 몇 권" 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의로 한 번쯤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 읽고 나서 어떻게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을 읽고 위와 같은 평을 적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동시에 나도 언제쯤 저런 내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내공이 부족한 나에게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려면 '너무나 방황하는 십대의 마지막' 이다. 이건 내가 양호하게 순화해서 쓴 글이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홀든은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술, 담배, 섹스에 관심있어 하는 한 마디로 학교부적응 및 불량학생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바라본 어른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분노와 부조리를 홀든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걸 표현하는 구나. 라는 것은 읽으면서는 몰랐다.

그냥, "이놈 어린 놈이 ~!" 라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책의 뒷 부분에 [작품 해설] 부분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미국의 교과서에 실릴려고 할 때, 많은 학부모들이 반대를 하고 일어났다고 한다. 아마 이 학부모들이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은 아마 나와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홀든이 고등학교 3학년 정도이니 아마도 술, 담배, 섹스에 대해서는 아마도 이미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각 개인들과 친구들간에 공유를 할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이 서로 간접경험하기는 부모들이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내려가면서 분명히 빠져드는 매력이 있는 듯하다. 처음에는 제목의 뭔가 지루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는데, 이야기 전개 방식과 등장인물 그리고 퇴학 후, 몇일이라는 그런 설정 등 여러가지 면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분명 여기저기에서 선정되는 이유는 있는 법이라고 혼자 생각을 해본다.

이 작품이 1952년 미국에서 쓰여진 작품인데, 그 배경과 컨텐츠들은 지금 2012년 한국을 살고 있는 시대라고 느껴질 정도로 시대적 괴리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1952년이면 한참 한국전쟁을 하고 있을 때, J.D. 샐린저는 세상의 분노와 부조리를 하나의 성장소설로 그리고 있다.

어찌보면 당시 그러한 자유로운 성장소설이 부럽기도 하고, 1960~70년대에 국내에 번역되었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공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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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한강, 80년대 태어난 나에게 아버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엿보게 하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전세계적으로 유래없는 급성장으로 경제화를 이루어냈으며, 일제식민-일인독재-군부정권을 거쳐서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가이다. 이렇게 빠르게 경제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낸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며, 이 속에는 우리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어머니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고 할 수 있다.

외화를 벌기 위해 떠난 베트남전쟁, 독일 내에서 천대받고 힘든 직업인 광부와 간호사로서의 일, 뜨거운 땡볕아래서 이루어진 중동건설 파견 등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를 밖에서 이끌어온 이들은 바로 우리나라의 일반 국민이자 아버지, 어머니들이었다. 당시 이들이 국외에서 벌어들인 돈은 국내로 의무적으로 송금되고, 그 외화는 나라의 경제의 밑바탕이 되었으며 그 돈들은 그들의 부의 축적이 아닌 가족, 형제들의 생활, 교육에 필요한 돈으로 쓰여졌다. 

농업중심 사회에서 수출위주의 경공업, 중공업으로 국내 산업의 중추가 변화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논밭에서 공장으로 사람들이 집중되고 서울은 기회의 땅이자 고난의 땅이었다. 이는 도시의 기회인 동시에 농촌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이들은 방직공장, 가발공장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에 집중 투입되고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이 있어도 무시되고 그야 말로 노동력착취에 이를 정도의 일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경제성장이라는 빛 아래에서 철저하게 짓눌려온 인권이었다. 많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나라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일하며 동시에 끊임없는 경제적 차별과 착취를 받아오며 살아온 것이다.

근로기준법을 무시한 채, 근로자들은 점 점 그 속이 곪아갔고, 전태일이라는 청년은 어린 나이에 몸에 기름을 부어 희생함으로써 그 당시의 우리의 처지를 대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기본적인 생활, 아니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그러한 일을 해왔던 것이다. 경제성장이라는 명목아래 희생된게 너무 많아서 안타깝고 그 기반으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게 감사하고 죄송할 뿐이다.

 

우리의 정치현실은 과연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대학교 때 4월 19일이 되면 [4.19 마구마구 마라톤]이 있었다. 이때는 왜 4.19를 기념해서 마라톤을 할까? 라는 막연한 궁금증만 있었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하다 싶다.
4.19는 이승만의 독재에 대학생을 비롯해서 고등학생 그리고 대학교수 심지어 일반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잘못된 정치에 대해 민중이 힘을 모은 그야 말로 혁명이었다. 

시민혁명이 대단한 이유는 그들의 무기는 상식이라는 무기와 그들의 몸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공권력은 무력, 총, 칼이라는 것으로 그들을 위협한다.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라는 것은 해결했지만, 이후 5.16 쿠데타(얼마 전,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5.16 혁명이라는 말을 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겠지. 그게 그녀의 정치생명이기에~. 하지만 혁명과 쿠데타는 정말 다르다. 그녀에게는 혁명이겠지.)로 박정희는 군부독재를 해 나간다.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 경제발전이라는 성과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주화의 방향에서는 그야 말로 역사적 후퇴였으며 양극화의 시작이며 재벌 편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79년 10월 26일 부하 김재규의 총으로 운명을 다한 박정희의 뒤는 전두환이 전시 다음 체제인 계엄체제로 전국을 공포로 만들고 자국민을 상대로 생각하기도 끔찍한 광주학살을 자행한다.

 그리고 노태우 전 대통령 , 문민정부 김영삼 전 대통령,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전 대통령, 참여정부 노무현 전 대통령, 이제 역사의 판단을 기다리는 이명박 현 대통령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역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과연 지금 정치현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현 대통령 친인척의 각종 비리, 이것은 정말 역대 대통령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BBK 관련 문제, 쌍용자동차 진압문제, 언론에 대한 통제문제 등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인으로서 과연 지금의 길이 맞는지 다시 묻고 싶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역량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국민을 이끌고 그들의 대표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사람들의 집단은 왜 이렇게 우리들을 실망시킬까?

 무엇이 답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인가 잘못된 거 같은 생각은 든다. 조금 더 이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제 역할을 하는 일인이 되고자 한다. 작은 일부터 찾아보자. 아직은 잘 모르지만 시민의 작은 힘이 모여 역사가 바뀌는 법이기에~

 

한강 속, 등장인물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다.

작가 조정래의 작품 속에는 주인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등장인물이 주인공인 셈이다. 이 사회는 이 사회를 구성해가는 각 개인들이 주연인 것 처럼 그의 책도 이를 반영한다.

어렸을 때 읽은 많은 동화책이나 여러 작품들 속에는 그야말로 권선징악을 모토로 하고 그 마무리는 항상 헤피엔딩으로 귀결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않고 너무나 다양한 삶으로 귀결된다.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는데 결국 삶을 비관하여 자살하고 고생끝에 낙이 아닌 병으로 인해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특징은 보통 끊임없이 일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이런 저런 선택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이 사회에서 외면되곤 한다.

이러한 서민들과의 삶에 반하여 기업가들은 끊임없이 노동자들을 압박하여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막기위해 끊임없이 결탁하고 싸운다. 부유한 이들은 그들의 인맥(고위 공무원, 정치인 등)을 통해서 서울 강남의 개발계획을 미리 알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정치인들에게는 뇌물과 청탁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정치권력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물타기를 하고 부를 이어나간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수성가를 하는 경우도 존재하고,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죄가 아닌 죄로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개개인이 모두 하나의 다른 삶들을 살아가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과연, 옳은 것을 추구하면서 굶주리고 가족들이 피해를 입고 자신은 떳떳하게 사는게 맞는 삶인가? 조금은 이 사회의 권력에 고개를 숙이고 조금은 편한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나은 삶을 사는 게 맞는 것일까? 모든 것은 개개인이 선택하는 삶이지만 서른이 넘은 시점에 아내와 아이들을 둔 가장으로서 무엇이 맞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이들의 삶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모두 느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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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또 다시 대하소설에 손을 대고 말았다. 작년에 시작해 올해 완독한 태백산맥을 계기로 대하소설에 매력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대하소설은 역시 조정래 작가의 <한강>과 황석영의 <장길산> 이다. 이것만 해도 22권이다.
그런데 <소설 프랑스 혁명>의 발간 소식을 듣고 작가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관심이 자연스럽게 가기 시작했다.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12권짜리 대하소설에 다시 빠져들어가 버렸다.
올해 몇 권이 출간될 줄 모르겠으나 이미 시작해버렸다.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봉건적인 질서가 붕괴되고 시민, 인민,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부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사건은 바로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위의 다른 대하소설도 그렇고 많은 이야기의 주요 흐름은 바로 가진자와 갖지 못한 자의 대립과 갈등이다.
여기서 유산과 무산이라는 것은 과거의 신분 제도에서 부터, 남성에 의한 여성 차별, 인종 간의 우월성 논란 등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에 정해져버린 사항을 근거로 그 사람들을 틀 속에 규정 속에 묶어버린다.
그 역사는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그 프레임을 과감히 깬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과거의 프레임을 벗어난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었다.
바로 모순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서로 생각하는 이상은 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한 자유와 평등을 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였으나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아무리 얇게 잘라내도 앞, 뒤가 존재하듯이 어떠한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해도 앞, 뒤는 있을 것이고 명, 암이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나은 명(明)을 위해서 그 중심적인 사상과 근본 정신을 알려고 한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그래서 프랑스 혁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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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이 집에 도착했을 때, 비교적 얇은 책에 겉표지도 위의 모습처럼 살짝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 제목 또한 그런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책머리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오호! 이책 괜찮은데, 이번에 괜찮은 책 하나 건졌네.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탁 쳤다. 역시 읽어내려가면서 오~~ 하는 작은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첫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이다. 우선 현재 교육시스템과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학교등에 대한 일침으로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은 학교와 학년, 학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비슷한 나이대가 아닌 같은 나이의 일정한 집단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의 일종의 벽을 만든 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을 잠깐 살펴보면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 동기들, 회사 동기들 이렇게 같은 나이 대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지낸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제도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예전 18~19세기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 박지원, 이덕무 등 이들은 나이 차이는 비록 10살을 넘나들었지만 이들은 앎과 지식이라는 토대를 통해서 우정을 쌓고 진정한 벗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제도는 이런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 나도 아~! 내가 이런 것에 얽매여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실은 나도 선배, 후배 이런 것들에 대해 나름 중시할 때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내가 보기좋게 이 사회의 정책에 순응하고 동화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들에게 조금 더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벽을 만들어 사전에 차단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이다.

두번째는 예전의 배움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배우고 싶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명문대, 지방대, 전문대 할 것 없이 실제적으로 교수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다. 이것은 학생은 학교를 단순히 취업을 위한 하나의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뿐이고, 교수 또한 학생들과 함께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연구와 대학내 시스템내에서의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대학, 말그대로 (大學) 큰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단지 일정한 나이가 되고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음의 길을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큰 학문이란 과연 무엇일까? 취업에 필요한 스텍을 만드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관찰하고, 앎과 철학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성찰과 사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앎, 지식을 가지고 서로 가르치고 배움을 받는 과정에서 '질문'이 없다는 것은 바로 제대로 된 앎과 지식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소크라테스의 많은 일화와 말들은 바로 제자들과의 문답법을 통해서 사유되고 만들어진 것 들이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단지 암기식, 주입식 시험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시험에 나오는 것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고 답이 있어야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질문의 여지가 많지 않다.

이게 어떻게 제대로된 교육이고 소통을 통한 지식의 향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떤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거나 스승, 멘토로 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의 깊은 사유와 사색을 이끌어낼 질문을 하고 그곳에서 그의 앎과 생각을 내 몸 속으로 체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모쿵푸스]는 이렇게 총체적으로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공부를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 공부에는 시기도 없을 뿐더러, 무엇을 배우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알기를 원해서 배우는 것이고 그 시기는 죽기전까지 아니 어쩌면 그 후에도 계속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았다. 공부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 고전과 인적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을 중시하는 내용 마음에 들었다.
고미숙 작가의 다른 책을 한 번 읽어봐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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