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는 모천 회귀성 물고기다. 태어나자마자 모천을 떠난 치어들은 저 먼 알래스카까지 헤엄쳐 간다. 그리고 다시 떠났던 길을 거슬러와 모천으로 돌아와 알을 산란하고 죽는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명을 낳고 죽는다는 것, 누군들 이 연어의 일생에 마음이 사무치지 않겠는가. 나 또한 연어라는 말만 들어도 연민이 솟았다.  이 글은 은빛연어 한 마리가 동료들과 함께 머나먼 모천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누나연어를 여의고 눈맑은연어와 사랑에 빠지고 폭포를 거슬러오르며 성장해가는 내용이다. 언어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이 보인다. 은빛연어는 말한다. 연어에게는 연어의 길이 있다고 쉬운 길을 마다하고 폭포를 거슬러오르는 한 마리의 은빛연어를 따라 헤엄치다보니 나도 연어가 되고 싶었다.  -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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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이다.

책의 마지막 표지를 보고, 작품설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카뮈가 29세 때, 지금 나보다 젊은 시절에 발표한 <이방인> 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라 하고 실존주의 문학이라 평한다. 그런데 부조리라는 말도 실존주의라는 의미도 나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존주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인 것일까?
존재의 이러한 불가사의를 끝까지 질문하는 철학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실존주의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간의 존재, 그것도 단독적인 개체인 나 자신의 존재에 계속 관심을 갖는 방법적 태도이다.

이방인은 한 번 읽어보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카뮈를 한 번 접해보고 싶어서였다.
이방인을 읽는 내내, 나는 그냥 무표정인 듯 했다. 왠지 주인공 뫼르소는 작가 카뮈를 닮고 항상 무표정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고,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을 받고, 그리고 사형대에도 그 무표정으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가 있는 그대로 <이방인> 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사건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다루어진 셈이었다.
나를 참여시키지도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문득 나는 귀를 기울였다. "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하며, 나에 관해서 말할 때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 나로서는 그것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놓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이를테면 그가 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 의 내용의 진행과정을 보면 어머니의 죽음에서 부터 뫼르소 자신의 사형 구형이 있기까지 철저하게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에 자고 싶어하는 뫼르소, 장례식 다음날 여자와 관계를 갖고, 재판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 속에서 철저히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존재만을 집중하는 것이 실존주의인가? 그렇다고 이러한 것이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카뮈는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던 것일까? 아직도 내 머리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누가 설명해줄 수 있는 분 얘기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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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세월은 기껏해야 몇십 년밖에 되지 않는다. 생명은 두 번의 기회가 없는 일회적인 것이다. 그 기회는 한 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생명은 짧고 가역성이 없고 일회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소중하고 진귀하며 신기하고 아름답다. 생명을 의미 없이 보내고 생명에 빚을 진다면, 이것은 너무도 우둔한 짓이며 죄가 된다. 돈 백원을 잃어도 마음 아파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를 잃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작가 왕멍, 어린 나이부터 중국 혁명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중국의 살아있는 현대사라고 일컬이지는 분이다.
그런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정의한 것이 '나는 학생이다' 이다. 바로 배움을 자신으로 규정한 것이다.
배움은 바로 삶이며 모든 것이다. 우리의 짧은 인생을 어떻게 상실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작가는 지나온 생활을 돌이키며 한마디씩 우리에게 조언을 해준다.

읽는 내내 무엇인가를 계속 수련하고 정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작가의 오랜 삶의 철학과 사유가 담겨있는 글들이었다. 때로는 아직 내 나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문맥을 잘 못 잡는 내용도 있었다.
그래서 아마 책의 내용을 절반을 내가 이해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읽은 책 중에 장회익의 [공부도둑]이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출생을 보니 왕멍은 1934년 출생, 장회익은 1938년 출생이다. 장회익 선생도 자신을 표현하는 말로 '공부도둑'이라 했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은 [나는 학생이다]와는 다른 내용이지만, 어찌보면 70세 라는 나이에 오랜 철학과 사유를 통해 뿜어나오는 그들의 말과 글은 아마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몇 년 후에, 다시 읽어보려 한다. 내가 조금 성숙했다고 생각될 때, 지금보다 조금 더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책을 다시 잡으면 아마 새롭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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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아닌 나를 위한 삶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과연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어떤 이유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정말 삶에서 중요한 질문이다. 사람들은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이러한 중요한 질문 앞을 피해간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바쁘단 말인가? 이런 중요한 질문에 대한 생각없는 바쁨이란 과연 필요한 걸까? 라는 계속적인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많은 책들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바로 진정안 나를 찾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정말 이것이 이상적인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많은 것을 읽어보았는데 아직도 그것을 찾지는 못한 것 같다. 이렇게 계속해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 듯 하다.
이제 서른 한 살의 나이가 되었고 아주 조금씩 나를 찾아가는 것 같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좀 더 깊이 나와 대화해보고, 세상과 부딪히면서 넓게 경험해보고자 한다. 이 순간이 바로 내가 찾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남들이 가르쳐주거나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의미 있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라. 부모님도 선생님도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남의 뜻'에 이끌려 살지, '내 뜻'으로 이끌고 살지, 그걸 결정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나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고, 또 무엇을 하면서 의미를 느끼는지 스스로 찾아서 그것을 해라.


 이제 더 이상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아니면 친구들이 많이들 하니까
 피라미처럼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고 하지 말아요.
 내 주관을 세우고
 스스로 독창적인 트렌드세터가 되세요.
 기존의 패러다임을 당신이 뒤집으세요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떤 업무적인 성과나 목표했던 것을 달성했을 때도 느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행복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는 가족과 함께할 때, 오랜 친구들과 이런 저런 농담을 하면서 이야기할 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처럼 바로 누군가와 함께할 때이다.

이렇듯,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를 찾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다.
바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를 찾는 것이 자아를 찾는 것 이상으로 힘들 수도 있고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너무나도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불문율이 있다. 바로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대접해주라' 이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조금 손해보더라도 이해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관계의 정립에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관계라는 것은 또한 둘 이상의 인격체가 있고 그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와 소통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바로 상대방이 나와 다르더라도 이해하며, 서로 진심으로 소통을 하고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말은 이렇게 쉽게 한다.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하루하루 노력하는 것이 수양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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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은 책인데, 오늘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났다. 책을 보니 여기저기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내용은 바로 아래의 내용들이었다.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되새겨보고자 이렇게 적어본다. 책의 첫번째 안 표지에 그 당시 읽고 난 다음에 적은 듯한 글이 있다.
 "공부도둑이라는 책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할까! 그 이유 중 하나는 70세의 나이에 쓴 책, 책 내용에 그 깊이를 느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항상 '앎'을 추구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
 그 당시 읽고 나름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 책이었던 것 같다. 책 읽는 스타일이 기존에 읽은 것을 잘 보지 않기는 한데 이렇게 갑자기 끌리는 경우가 있다. 장회익 선생님의 공부도둑 오늘 자기 전에 내 머리를 맴돌게 한다.

남에게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우리는 심오한 이론을 접하게 될 때 마치 단순한 용어나 수식에 걸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모두 좋은 칭찬과 격려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공적 자체에 아주 적절한 것이 아니라면 효과가 별로 없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아무리 칭찬해 주어야 칭찬받는 사람은 이미 그것이 과장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기분은 북돋울지 몰라도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배움을 위해서라면 나이 어린 자식에게 배우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학구적 자세가 그것이다. 남 앞에 머리 숙이고 배운다는 것은 말로는 쉽지만 자신이 직접 수행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물리학 전체에 대해, 그리고 이와 연결해 개별과목에 대해 그것이 담고 있는 핵심적 내용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잠정적 결론을 자기 언어로 서술하라. 그리고 학습이 진행되는 대로 이것에 대한 수정, 보완을 수행해 나가되 그 핵심은 반드시 유지하라. 이렇게 할 경우 설혹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더라도 핵심은 항상 파악할 수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학점 관리를 해나갈 수 있다.

책 한 권만 잘 읽으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을 120퍼센터 이해하고 했다. 여기서 120퍼센트라는 것은 저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20퍼센트까지 더 얹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학습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후 내 학습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더 이상 역사는 열정만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성만으로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목숨을 아끼지 않을 열정과 함께 역사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그 일을 감당할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지성을 함양시켜 왔는가? 그리고 이것을 통해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가?
아직도 그는 내 속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도 그의 얼굴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외치고 있다. 나를 부활시키라.

학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나는 무슨 학문을 하겠다. 어떠한 문제를 풀어보겠다 하고 생각한 뒤 학문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연한 흥미에 따라 학문을 시작하고 보니 자기가 하고 있는 학문의 내용이 점점 명확해지고 또 자기가 추구하고 싶은 문제도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계획을 미리 하고 싶어도 학문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으면 계획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학문을 해나가면서 물음을 던지는 일 자체가 이미 학문에 크게 한 걸음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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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를 낳겠다고 결정했다면 직장을 그만두거나, 아니면 3년은 휴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면 아기를 업고 직장에 나가세요. 무엇보다 아이를 우선해야 합니다. 아이를 최우선으로 할 수 있을 때 아이를 낳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안 낳아야 합니다. 3년까지만 아이를 잘 키우면 과외 안 시켜도 괜찮고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애를 낳아서 잘못 키워 놓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가정에서 이것이 첫째입니다. 

둘째, 애 때문에 남편을 떼어 놓고 서울로 이사 가는 사람, 애를 데리고 미국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가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애기는 늘 두 번째로 생각하세요.

대학에 떨어져도 신경 쓰지 마세요.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 가면 무조건 따라가세요. 돈도 필요 없습니다. 아기가 학교 몇 번 옮겨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살편 아이들은 전학은 열 번 다녀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자랍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에 놓고, 오냐 오냐 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아무리 잘해 줘도 아이를 망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오늘부터 정신 차리고 제 얘기를 선물로 받아 가십시오.

이렇게 해야 가정이 중심이 서고 화목해집니다. 가정을 화목하게 한 다음에는 내가 사는 세상에도 기여를 해야 합니다. 나만 잘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자식만 귀엽게 생각 말고 이웃집 아이도 귀하게 생각하세요. 또 내 부모만 공양하지 말고 이웃집 노인도 공경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만 정성을 쏟으면 반드시 자식이 어긋나고 불효합니다. 매를 들고 애를 가르칠 필요 없이 내가 늘 부모를 먼저 생각하면 자식이 저절로 효자가 됩니다. 애를 키우다 나중에 '저게 누굴 닮아 저러나' 하지 마세요. 누굴 닮겠습니까? 제 부모를 닮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 좋은 인연을 지으세요. 처음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중에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러면 돈이 없어도 행복하고, 비가 새는 집에 살아도 재미가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인생이 즐거워 집니다. 즐겁자고 사는 거지 괴롭자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부부는 이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 스님의 주례사 (법륜스님) 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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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의 청년 싯다르타는 부귀한 가정을 버리고 오직 진리를 찾아 고행의 길을 떠나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이 책의 겉표지에 써 있는 글이다.

나 역시 싯다르타의 고행의 길을 마치 같이 걸어간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어내려가며 나 역시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과연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나, 자아를 위한 삶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나에게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 자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아직까지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듯 하다. 아마 1년 후, 2년 후, 그리고 세월이 지나갈 때 마다 다시 읽어도 새롭게 다가올 것 같다. 싯다르타가 사문의 길과 속세의 길을 모두 경험하고 깨달음을 얻었듯이 나 역시 세월의 경험이 쌓아지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아마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매년 한 번씩 읽어 내려가며 나를 찾아보자.라는 말을 홀로 해본다.

책을 읽고 메모장에 몇 자 적어 논 것이 있다. 그냥 단어의 나열이지만 더이상 단순한 단어가 아니었다.

자아, 경청, 만물, 관심, 사랑
본래 모든 것에는 해결책과 답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냥 그것을 찾을 뿐이다. 그리고 비판적 시각을 가져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피에타의 성모 처럼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찾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p55
 '대체 가르침에서, 스승이게서, 네가 배우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냐? 너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가르쳐준 그들이 지금까지 네게 가르쳐줄 수 없었던 것이란 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그는 찾아내었다.
 '그것은 자아(自我)였다. 그 의미와 본질을 나는 알고자 했다. 그곳에서 내가 빠져나오려 했던 것, 극복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자아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는 없었고 다만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다. 다만 그것에서 도망쳐서 그 앞에서 숨을 수 있었을 뿐이다. 실로 세상에서 이 자아만큼 내가 생각에 몰두하게 만든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이 수수께끼, 나는 싯다르타라는 수수께끼처럼 나의 생각을 사로잡는 물건은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 싯다르타에 대하여서만큼 나 자신이 거의 알지 못한 물건도 없다!'

p186
 '그의 행위와 삶이 그의 말씀보다 가치있으며, 그의 손의 움직임이 그의 의견보다 가치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나는 말씀이나 사상 속에서 그의 위대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행위 속에서, 삶 속에서 그의 위대함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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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잡게 되다.

오랜만에 교육때문에 서울에 오게 되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교보문고로 향했다. 
최근에는 어떤 트렌드의 책이 있나 살펴보고 서점의 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느낀 것은 가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책의 종류가 상당히 많이 나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본래 책을 생각하고 온라인에서 구입을 하는데 서점을 온 기념에 이런 저런 것을 살펴보다 고른 책이 바로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 춤이다. 

솔직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도 조정래 작가에 한 표와 작년 인터파크 조사에서 2010년 올해의 책으로 뽑힌 책이어서 다시 한 표, 이렇게 해서 지금 내 손에 잡혀져 있다.
아직 책을 잡은지 얼마 안되었지만 조정래 작가의 문체와 필력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부끄럽게도 아직 그의 책을 읽지 못해서이다. 한강, 태백산맥을 잡았다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는 조정래 라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의 하나인 셈이다. 좋은 만남이기를 바라며~

▶ 작가의 말에서

책을 펼쳐 들다가 초반에 나를 끌리게 하는 구절이 있어서 잠깐 적어보려 한다.

진정한 작가이길 원하거든 민중보다 반발만 앞서 가라. 한 발은 민중 속에 딛고. 톨스토이의 말이다.
진실과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문학의 길이다. 타골이 말했다.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한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고,
노신은 이렇게 말했다. 불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글(시)이 아니요,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옳은 것을 찬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의 말이다.


▶ 세계일보와의 인터뷰 (2010/11/16) 중에서

Q> 지난달 ‘허수아비춤’이 나오자마자 공교롭게도 검찰에서 책 선전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떠들썩한 비자금 수사에 돌입했습니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조정래> “극히 일부만 드러난 겁니다. 개선 방법은 딱 한 가지, 법적 제재뿐입니다. 그러려면 기업들을 감시하는 국가 권력이 청렴해야 합니다. 국세청부터 제대로 기업들을 세무감사해서 투명하게 관리해야 하고, 관련된 모든 기관이 제 역할을 분명하게 해야죠. 그게 제대로 안 되니까 적발된 기업들이 ‘나만 그랬느냐’식인 거죠. 이게 비극입니다. 국가의 감시 권력이 제 역할을 못하니까 시민들이 다시 한 번 제도를 만들어서 감시 감독하는 게 선진국들입니다. 그 제도라는 게 다름 아닌 시민단체인데,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 시민단체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스웨덴에서는 한 사람이 시민단체 20개씩 지원하는데 그 돈 다 합해봤자 한 달에 10만원도 안 됩니다.”

Q)권력을 쥔 쪽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반성할 리는 만무하다는 말씀인가요?

조정래)“그건 이미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긴 선진국들이 증명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증류수처럼 맑은 사회는 안 와요. 부정부패가 권력과 야합할 수밖에 없는 건 정도 차이일 뿐 이른바 선진국이나 우리나 다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천억대 비자금으로 문제가 된다면,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몇 만원만 드러나도 날아간다는 사실이지요. 그만큼 우리 현실이 심각한 겁니다.”

Q)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단지 현실에 대한 날 선 경각심뿐 아니라 해학적인 표현들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를테면 ‘돈은 귀신도 부린다’ 혹은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 ‘돈이면 지옥문도 여닫는다’ ‘돈만 있으면 의붓자식도 효도한다’ ‘돈 있어 못난 놈 없고, 돈 없어 잘난 놈 없다’ 같은 속담들이 오가는 대목에서는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대화를 나누던 일방이 이런 속담들을 요즘 말로 하자면 ‘돈은 살아 있는 신’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과연 돈을 극복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조정래)“돈은 생존을 바로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거지요.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가 돼버리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한 지옥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돈에 영혼을 팔아버린 형국입니다. 그 돈이 내 삶을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 족해야 되는데, 우리는 돈을 절대 신으로 모셔버리는 물신주의 속에 살고 있어요. 사회주의 몰락 상황에서 러시아나 중국을 가보니 20세기 최대 실험이었던 사회주의의 미덕은 자본주의를 강화시켜주었다는 것, 딱 한 가지더군요. 모든 인간들이 자기 능력에 따라 경쟁해서 부를 축적하는 자본주의에는 복지제도가 없었어요. 그렇게 가다보면 사회주의에 치여서 반드시 망하게 돼 있기 때문에 단합해서 복지를 생각했고, 많이 번 자가 세금을 많이 내서 스웨덴처럼 엄청난 복지세를 거두는 사회민주주의로까지 나아간 거지요. 카네기나 록펠러처럼 돈이 많은 자들은 사회에 환원하기 시작했고, 또 다른 인간의 길이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이후 그 관행을 상식으로 받아들여서 빌게이츠나 워런버핏 같은 이들처럼 막대한 재산을 환원하기에 이른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당연히 생각해야 하는 ‘분배’라는 단어마저 굉장히 싫어합니다. 기업인들이 세금 다 내고는 못해먹는다고 흔히 하는 말은 그 자체로 특정 기업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들이 다 탈세하고 있다는 걸 실토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이성을 찾고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면 개선이 돼요.”

Q)그래도 점진적으로 많이 개선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조정래) “아니요. 이대로 두면 점점 더 악화됩니다. 방치해두면 망합니다. 그래서 시민단체가 필요한 건데, 일부에서는 너무 안일한 대안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시민단체에 국민의 99%가 한 번도 후원금을 내지 않고 방관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몇 개 기업의 범죄가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난 것도 시민단체가 고발했기 때문이에요. 검찰도 국회의원도 계속 고발하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길이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시민단체가 우리나라에 갑자기 늘어난 건 1980년대 운동권 사람들 때문인데, 시민들이 관심을 안 가지니 점점 몰락하다가 노무현 정권 때 국가에서 지원을 했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 돈을 받아버리면 비판을 못합니다. 모든 정권은 권력을 쥐면 오류를 범하게 돼 있어요. 다만 크냐 작으냐의 문제인데, 그나마 지금은 그 지원마저 끊어버리니 전부 몰락하는 거죠. 그걸 키우는 게 시민의 역할인데,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푸념만 하는 건 참새가 짹짹거리는 거나 같은 겁니다.”

Q) 우리나라에서는 선진국들과 달리 반기업적 정서가 강하다는 볼멘소리를 하는 기업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격려해줄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나는 기업인들을 흠잡거나 욕하거나 망하게 하려고 이 소설을 쓴 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한 불신이 믿음으로, 사회적 존경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기업 없이 어떻게 자본주의가 가능하겠습니까? 정당하게, 함께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거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금 낼 것 다 내고는 못해먹는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헌법이 기업의 이윤 추구를 보장하고 있어요. 압축성장을 하다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대기업들이 생겨나고, 그런 기업만 바라보면서 일확천금을 노려 떼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빨리’ 편법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비양심적인 태도들이 만연하는 겁니다.”

조정래씨의 말은 그대로 받아 적으면 모두 훌륭한 연설 문장이 될 정도로 막힘이 없고 논리적이다. 말의 속도 또한 빨라서 한 시간을 넘기면서부터는 그가 토해내는 말들을 어떻게 짧은 지면에 다 담아내야 할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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