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영 작가의 《책만 보는 바보》 에서는 조선 후기 정조시대 박지원의 사랑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백동수와 같은 계급에서 소외받았던 이들이 등장하면서 시대에 대해 고민하며,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며 세상이 변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 《갑신년의 세친구》에서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사랑에 그 시대의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어 세상의 변화를 꿈꾼다. 이들은 당시 유력한 가문의 자제들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 안팎의 정세는 혼란스러웠고, 기존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변혁의 시기였다. 조선은 서구 열강의 개화의 압력을 받았고, 청나라와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고 변혁의 물결 위에 있을 때 그 흐름에 편승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일본을 방문하면서 선진화된 문물에 빠져들고 조선에도 개혁을 이루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은 쉽게 그들의 뜻을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임오군란(1882년 7월 20일)으로 그동안 참아왔던 백성들은 일어나고 흥선대원군은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 하지만 또 다시 청군에 의해 납치되고 다시 왕비와 외척인 민씨 집안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당시 중전과 외척들은 청나라를 뒷받침으로 해서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김옥균을 비롯한 젊은 이들은 일본의 지원에 힘입어 개혁을 원했던 급진개화파들이었다.
1884년(고종21년) 12월 4일 김옥균과 급진개화파들은 당시 홍영식이 총판로 있던 우정국 청사 완공 기념 연회를 거사의 날짜로 정하고, 청사 옆에서 피어오르는 불을 신호로 해서 집권세력들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에게는 난리가 일어났다며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보호를 위해서 일본군에게 요청한 지원군으로 개혁을 완성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개혁은 불과 3일 동안에 불과했고, 그들의 개혁인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버렸다. 갑신정변의 개혁주도세력은 개혁의 젊은 혈기는 좋았으나, 일본을 바라본 순진한 생각과 청나라 군사들이 오지 않을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 경운궁에서 군권을 장악하기 전에 왕과 왕비의 거처를 다시 옮기게 하는 등 부족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당시 김옥균은 백성의 힘을 업은 채 시도한 개혁이 아니고, 일본의 군대에 의존한 개혁이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또한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만을 믿고 있었던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본은 단지 장기적인 조선 침략 시나리오의 일환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 안남(베트남) 지역을 두고 프랑스와 청나라의 갈등으로 조선에 있던 청군이 안남 지역으로 이동해서 청군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개혁세력의 안일함을 드러낸다. 또한 개혁의 주축 세력이 당시 고위 집권 세력의 자제들이었다는 점에서 아래로 부터의 개혁에 대한 뿌리와 힘을 갖지 못한 부르주아적 개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홍영식은 전하 곁에 끝까지 남아서 성공하지 못한 개혁이지만 그들의 뜻을 전하겠다며 남게 되며, 관군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건너가고 후에 청의 리홍장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로 갔을 때 자객의 총에 의해 생을 마감한다. 정변당시 민씨 집안에 원한을 사서 그들이 보낸 자객에 의한 마지막이었다. 1894년 3월 28일이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고, 1894년 8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갑오년 개혁이 일어나면서 다시 조선으로 와서 그의 뜻을 펼쳐 보기도 한다. 1910년, 조선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고 협력한 조선인들에게 일본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이 지급되었는데, 박영효는 후작 지위와 수십만 엔의 상금을 받았다. 또한 산업과 언론, 경제계에서 실속있고 명망있는 지위를 누리며 삶을 보냈다.
갑신정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후하지 않다. 일본을 우리의 개혁을 위해 먼저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이는 후에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고, 개혁의 주요인물이었던 박영효가 그 병합에 일조를 하면서 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근대적인 개혁의 시발점이라는 측면에서는 의의가 있다. 김옥균이 만든 갑신정변 14개조에는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고, 정령의결과 반포를 기존의 왕이 아닌 대신들의 의결체에서 진행하는 등의 근대적 개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후에 갑오개혁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은 역사의 연장선의 가장 끝부분에 서 있으며 그것 역시 이렇게 글을 쓰는 사이에 지나가버린다. 필연이던 우연이던 여러 사건들이 모여서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있음을 한 권 한 권 역사책을 읽어갈수록 깨닫는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개혁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며, 위기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는지 배울 수 있으며, 역사 속의 시대적 상황이 고스란히 상황만 다를 뿐 현재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점을 다시금 느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쩌면 훗날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급변하는 시대의 중심이며, 패러다임이 변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분명 개인적인 삶을 온전히 살아가려면 시대의 흐름을 체감하며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시기를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앞으로의 내 역사적 삶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때 의미있을까 생각해본다.
p20
"여기를 보시지요. 우리 조선은 이리 환하지만, 반대편에 있는 나라들은 지금 밤이랍니다. 이 나라들이 낮이 되면 우리가 밤이 되지요. 실감할 수 없지만 이 세상은 어마어마하게 넓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청에 들어와 있는 영길리(영국) 왕은 여자입니다. 여기서 보면 대륙 저 끝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부처의 고향 인도까지도 제 나라로 삼고 저들이 만든 큰 배로 못 가는 데가 없다고 합니다." "미리견(미국)은 왕도 백성들이 뽑는다고 합니다. 목숨이 다하지 않아 번히 살아 있는데도 몇 년 만에 내려오게 하고 다른 사람을 새로 뽑는다는 군요."
p22
젋은 자네들이 할 일이 많네. 특히 그간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다른 세상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이네. 우리 조선도 이처럼 둥근 지표면 위에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나
p27
서양 문물을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양인의 것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이 점점 활발해지는 것 같습니다. 양인의 말을 배우는 학당도 생기고, 양인의 기계를 본떠 만드는 공장도 생기고 있습니다. 양인 기술자가 와서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합니다.
p31
조선의 시간은 종류의 북소리처럼 천천히 흘렀다. 그러나 조선 바깥의 시각은 째깍째깍, 사람의 들숨 날숨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p33
"그것 참 계산 빠른 왜인들답군. 미국 함대가 쏘아 대는 포에 우왕좌왕하던 게 불과 십 년 전 아닌가. 저희 세가 약하면 얼른 화친 조약을 맺고, 이왕 굽힌 바에 더욱 엎드려 상대방의 것을 샅샅이 배우고...... 그 모든 일을 전쟁터 군인처럼 일사불란하게 하고 있네그려. 아마 속으로는 장차 상대의 무기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왜인들다운 생각도 하고 있을 게야."
p67
이윽고 왕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네가 일본에 다녀오너라. 공식 사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은밀히 다녀와야 한다. 가서 일본의 의중을 알아보아라. 과연 조선이 문을 열고 개혁하는 것을 일본이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렇다면 조선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김옥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를 수 없었다. 언젠가 조선 바깥 세상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신을 믿고 큰일을 맡겨 준 왕의 마음 씀에 가슴이 벅찼다. 당황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왕의 말이 이어졌다.
"정식 수신사로 가는 것이 아니니,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을 게다. 때로는 네가 그 자리에서 판단하고 직접 해결해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허나 너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맡기니, 가서 한 번 부딪쳐 보아라."
p70
기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뒷걸음질치며 멀어져 가는 것은 낯선 나라의 산과 들이 아니라, 이렇듯 놀라운 세상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조선의 모습인 것만 같았다.
p75
김옥균과 조선 젊은이들에게도 인상 깊었던 것은 [학문을 권함]이라는 책이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라는 첫머리부터 놀라웠다. 사람은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문을 하려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갈라진다고도 했다. 후쿠자와는 신분에 관계없이 배우려 한다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학교도 만들었다. 바로 유길준이 다니고 있는 게이오기주쿠였다.
p83
"예전에는 몰랐는데 ...... 여기 있다 가 보니 조선은 숨죽인 듯 고즈넉하기만 하더군요. 도쿄는 사람들과 마차며 인력거들이 바삐 오가고 모습이 날마다 달라지는데, 조선의 초가와 흙담, 고관들이 행차할 때마다 길에 엎드린 백성들의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다들 조선 생각에 가슴이 무거운데, 윤치호는 다부지게 말을 이었다.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안경알 너머로 두 눈이 빛났다.
p84
지난번처럼 꾸지람을 듣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오히려 큰 격려를 받고 보니 윤치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젊은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앞선 문물에 놀라고 감탄만 했을 뿐, 그 문물이 온 서양의 언어를 직접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열여덟 살 난 소년이 그런 결심을 한 것이 놀라웠다. 어쩌면 윤치호도 그의 아버지처럼, 가문이나 체면같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있지 않아 자유로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거운 겨울 솜옷처럼 자신들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거대한 관습의 무게에, 명문 양반가 청년들은 저도 모르게 한 숨을 내쉬었다.
p87
김옥균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도쿄에 온 지도 어느새 두 달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간 일본 각계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긴 했지만,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사교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뚜렷한 소임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개혁을 일본이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렇다면 철도와 도로를 놓을 수 있게 도와주고, 편리한 새 문물로 조정과 백성을 설득할 수 있게 자금을 지원할 의사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본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p97
1882년 7월 30일
p98
"조선에 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군사들이 난리를 일으켜 여러 사람이 죽고, 대원군이 다시 대궐로 돌아왔다 합니다. 전하께서는 대원군에게 나랏일을 모두 맡기고 뒤로 물러나셨답니다!"
p105 홍순목 대감 "나라 형편이 이러한데 나랏일 한다는 젊은 것들은 눈을 밖으로만 돌리고 새로운 것을 들여온다. 신식 군대를 만든다. 조정을 뜯어 고친다. 공연히 수선이 피우고 있으니..... 도대체 시찰이다 뭐다 해서 들인 비용만 해도 얼마나 되느냐? 제 백성 굶주리는 것은 모르고 나랏돈을 그렇게 허튼 데다 쓰고 있단 말이냐?"
p109
왕은 직접 나라를 다스리면서 군대도 장악하기 위해 대원군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는 훈련도감과 옛 군영 병사들은 새로 생긴 군영에 편입되긴 했지만, 즉위 초부터 왕의 호위를 맡아 왔던 무위소 출신 병사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나라 살림이 넉넉지 않으니 군영도 궁핍했는데, 왕의 친위군 출신들은 군복과 무기를 제대로 갖추었고 급료도 먼저 받았다. 왕과 대신들 앞에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시범을 보이고 갈채를 받으며 생기는 군인다운 자부심도 그들 몫이었다. 게다가 별기군까지 만들어 높은 보수를 주고 데려온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게 하니, 옛 군영 출신 장수와 군졸 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자신들에게 지급된 요미에만 모래와 겨가 섞여 있기도 했지만, 그 일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p113
"지금 네가 가는길은 살러 가는 길이 아닐 게다. 허나 말리지는 않으마. 그저 그 길을 같이 가겠다는 게야. 가서, 네 앞에 오는 칼을, 할 수 있으면 내가 받겠다는 것뿐이야. 너 간 꼴을 남아 보는 것도 싫은데, 너 죽은 뒤 저놈들이 짓밟는 꼴까지 보고 싶지는 않구나. 어미한테는 삼돌이 데리고 외가로 가 있으라 일렀다. 우리 부자 목숨 값을 어린 삼돌이라도 누렸으면 좋겠구나."
p114
그들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홍영식은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밀린 요미나 제대로 받게 되면 그뿐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는 늙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제까지 조정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의 녹봉이 밀린 적은 없었다. 아버지도 그러했고, 기무아문 동료들도 그러했다. 그런데 저 많은 군졸들에게는 왜 그 당연한 일이 무시되고 미뤄져야 했단 말인가. 밀린 급료를 지불하라는 요구가 틀린 일 아니던가? 잘못된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 행렬 속에 나와 동료들은 왜 없는 걸까? 대궐에서 밤을 지새우며 수없이 이야기해온 백성은 저들과 다른 존재였던가. 지금 분노하고 고함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저들이 바로 이 나라의 백성 아니던가. 뜨거운 피가 도는 청년 홍영식의 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군중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p121
대궐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주저하던 사람들도 막상 문이 열리자 알 수 없는 힘데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몰려갔다. 번뜩이는 눈빛들이 행렬을 이끌었다. 군졸 옷으로 갈아입은 운형궁 사람들이었다. 대궐 지리를 잘 아는 그들은 전각 곳곳으로, 심지어는 내전까지 군중들을 끌고 갔다.
"민겸호가 대궐에 숨어있다. 우리 곡식 빼돌린 민겸호를 찾아라!"
"중전을 끌어내라! 중전이 민씨네를 감싸고 돌아 나라가 이리되었다!"
더 이상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휩쓸었다. 감히 대궐까지 침범했으니 이제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내관들과 궁인들이 여럿 목숨을 잃었고, 관복을 입고 있다 봉변당한 관리들도 많았다. 궐 사람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않는 내전에 궁인들의 비명이 가득 찼고, 그들이 흘린 피로 중궁전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하늘에는 뜨거운 해가 이글거리고 대궐 곳곳에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임진년(1592) 왜란 이후 궐이 침범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외적도 아닌 제 나라 백성들이 쳐들어온 것이다. 더구나 외적도 아닌 제 나라 백성들이 쳐들어온 것이다. 더욱 서늘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p123
홀로 남은 왕의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든 일을 대원군과 의논하라는 명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 관직을 내릴 사람들의 명단이 올라왔다.
p124
"전하, 중전마마의 승하를 반포하고, 한시바삐 국상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p126
"전하,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복구해야 하옵니다."
"으음......"
통리기무아문은 왕이 각별한 애착을 기울여 만든 기구였다. 이제까지 생각하고 준비해 온 것, 나라의 정치와 외교에 대한 왕의 모든 구상, 아끼는 신하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심장이 부서지는 듯했다. 승지는 왕의 눈길을 피했고 왕도 승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리하라, 짧게 일렀다.
p129
사랑 윗목에는 관복이 가지런히 개켜진 채 놓여 있었다. 언제 입궐할지 몰라 내당에서 준비해 둔 것이다. 국상이 선포되었기에 관복도, 관모도, 띠도 모두 흰색이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왕비의 상이 아니라 십여 년간 젊은 그들이 해 온 모든 일에 대한 초상인 듯 해 이를 볼 때마다 속이 쓰렸다.
p130
"두고 보게. 대원군이 권력을 다시 잡긴 했으나 오래가지 못할 것이네. 십 년 세월에 사람도 세상도 얼마나 바뀌었는가? 지금 아래대는 이런 헛 초상이 아니라 줄초상이 나서 난리더군. 상인들이 쌀이며 옷감을 잔뜩 사재기해 나라와 백성이 궁핍해졌다며, 시전 상인들을 수없이 잡아가 베어 버렸다고 하네. 대원군도 이젠 나이가 드셨는지 너무 조급해지셨어. 하긴 같이할 만한 사람은 다 수염 허연 노인들이고 일은 더디기만 하니, 그 성미에 갑갑하실 테지. 그렇다고 십 년 세월도 그처럼 다 베어 버릴 수 있겠는가? 서슬 푸른 그 칼날에 당신이 다치실 것이네."
p131
저희 사람이 여럿 죽고 공사관까지 불탔으니, 일본은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 조선의 사죄를 받고 배상도 단단히 얻어내리라 하더군. 제물포항에는 청나라 배도 들어와 있던데 그쪽 분위기도 심상찮아. 이번 일을 트집 잡아 일본이 자칫 조선을 유구처럼 손아귀에 넣으려 하지 안흥ㄹ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데... 청나라는 군대를 데리고 직접 조선에 들어올 생각도 있는 모양이야. 게다가 영국 배와 미국 배도 제물포 근처를 어슬렁거리더군. 이 같은 난국에 빗장 지르는 것밖에 모르는 대원군이 권세를 잡았으니......
p132
그 뒤 조선에서 벌어진 일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하나부사 일본 공사는, 외국인은 허락 없이 도성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조선의 법을 무시하고 병사들을 거느린 채 대궐에까지 들어왔다. 그리고는 군란으로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해 배상금을 지급하라며 무엄하게도 왕 앞에서 으르딱딱거렸다. 게다가 앞으로는 도성 안에 일본 병사들을 주둔시키겠다고 제멋대로 선언했다.
청의 사신 마젠충과 함대 제독 우장칭도 삼천여 명의 병사와 함께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많은 병력의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병자년(1636) 호란 이후 처음이었다. 찾아오는 사신의 문안과 조공을 받으며 점잖게 앉아 있기에는 조선을 둘러싼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던 것이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고 다른 나라에 자꾸 눈을 돌리는 젊은 조선 왕도 탐탁지 않았지만,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고집불통 대원군은 더욱 미덥지 않고 위험해 보였다. 조선에 눈독 들이는 일본과 서양에게도, 조선의 청의 속방임을 분명히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청나라는 조선에 고문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인사차 우장칭의 막사에 찾아간 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청나라 톄진으로 납치당하다시피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다시 권력을 잡은지 불과 33일 만의 일이었다.
이어 청나라 군인들은 소란을 일으킨 난병들을 징계한다며, 군졸들이 모여 사는 왕십리와 이태원을 무참하게 공격했다. 청나라의 신식 해양 함대 군사들은 바다 위에서 오래 삭여야만 했던 갑갑증을, 조선 땅에 상륙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마음껏 풀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고을 사람 모두가 그 총칼 아래 쓰러져 갔다. 그때 떨쳐나선 길이 살러 가는 길이 아닌 것 같다던 삼돌이의 할아버지도, 차마 다른 나라 군대에 짓밟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해씅ㄹ 것이다. 도봉소에서 항의하던 김춘영과 그의 늙은 아비도, 대원군을 찾아갔던 가족들도 모두 군란을 주동했다는 죄명으로 붙잡혀 처형당했다. 짓밟히긴 조선 조정도 마찬기지였다.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구대는 그간 조선이 공손이 받들어 모시던 인자한 천자의 군대가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서양 여러 나라들과 똑같이 속국을 통치하는 제국의 침략군으로서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p136
수선스러운 궁인들뿐 아니라 점잖게 꾸지람을 내리는 상궁과 내관들도 내심 기다리는 사람은, 청국인과 함께 온다는 서양인이었다. 대궐에서 양인을 보는 것도 처음인데, 더구나 왕께서 친히 그를 뵈옵고 큰 벼슬을 내려 나랏일 맡길 것이라 했다. 긴장하고 있기는 편전에 먼저 들어 있는 조선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양인에게 조선 정치를 맡기겠다는 청나라의 조치도 뜻밖이었고, 아무리 청국의 뜻이라 해도 양인이 조정까지 들어오게 된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심하는 대신들도 많았다. 젊은 관리들은 청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오는 양인이 못마땅하면서도, 그가 먼 바다 건너 서양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에 은근한 호기심이 일었다.
p137
양인의 제 나라 이름은 묄렌도르프였고 목인덕이라는 중국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중국 개항장에서 주로 세관 업무를 맡아 하던 독일의 젊은 외교관이었다. 청나라 외교를 담당하는 북양 대신 리홍장은, 영사 승진에서 번번이 탈락해 실의에 젖어 있던 묄렌도르프를 눈여겨보았다. 자신의 참모가 되지 않겠느냐는 리홍장의 제의에, 묄렌도르프는 망설이지 않고 독일 공관에서 나와 톈진의 리홍장 관저로 들어갔다. 그 뒤 중국을 대신해 조선 정부의 자문관이 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속국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오랜 관례라, 중국인보다는 중국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외국인을 보내는 게 더 나았던 것이다. 그 역할에 이미 리홍장의 관저에 들어와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만큼 적당한 사람은 없었다.
p139
난리가 일어난 것을 빌미로 군대를 앞세우고 들어온 청나라는, 조선과도 다시 관계 맺기로 마음 먹었다. 그간 중국과 조선은 조선이라는 왕조가 서기 훨씬 전부터도 아비와 아들, 왕과 신하의 나라였다. 굳이 말로 표현하거나 문서를 만들어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새롭게 나타난 서양은 물었다. 조선이 누구의 것이냐고, 청의 것이라면 증명해 보여 달라 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마구 횡포를 부릴 때마다, 서양인들은 무슨 무슨 조약을 들먹이며 문서를 쓰자고 졸랐다. 수 천년 이어져 온 지엄하신 천자의 권위도 문서 한 장만 못했고, 그 어떤 군대나 무기보다도 종이쪽지 한 장의 위력이 더 대단했다. 저들 세계의 '국제법'이라 했다. 그들의 조름에 못 이겨 화압하고 나면 모든 것이 달려졌다. 함포 소리가 그치고 병사들이 물러나도 종이는 그대로 남아, 군대나 무기보다 더한 힘을 과시했다. 종잇장 하나에 남쪽 항구 샹강(홍콩)을 내어주고, 종잇장 하나에 다시 광저우와 푸저우를 열어 줄 수 밖에 없었다.
p141
금릉위 박영효는 군란으로 입은 피해를 위로하고 사죄하는 수신사로 석 달간 일본에 다녀왔다. 수신사로 가기에는 정일품 부마의 신분이 지나치게 높았으나 기꺼이 응했고, 사절단 대표가 되기에는 스물두 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어렸으나 왕은 특별히 명을 내렸다. 종사관으로 서광범이 수행했고 김옥균도 비공식 수행원으로 함께 갔다. 수신사 일행이 귀국한 뒤에도 김옥균은 조선의 개혁 자금 마련을 위해 일본에 남아 있었다. 박영효가 왕에게 다녀온 보고를 한 것이 엊그제였는데, 피로를 풀 새도 없이 사람들을 집으로 청한 것이다.
p152
허나 대궐로 돌아온 뒤 달라진 왕비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스물서너 살 된 청의 장수 위안스카이가, 왕을 쏘아보며 대놓고 거만하게 구는 것을 왕비도 보았을 것이다. 감히 조선 왕을 청나라의 신하쯤으로 여기고, 황제를 대신해 왔노라 거들먹거리는 청의 관리들에게 어째서 함께 분노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자고, 청이나 일본은 물론 온 세상에 당당한 자주국으로 만들자고 함께 다짐했던 왕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p153
청나라 관리들은,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만 있다면 조선 왕과 조선의 개방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다. 왕비 역시 조선 왕과 조선의 개방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다. 왕비 역시 청나라 장수들의 오만한 태도는 불쾌했고, 왕이 겪고 있는 굴욕에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나랏일을 감정만으로 해 나갈 수는 없었다.
p159
그 무렵 조선의 재정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조정이 지방 수령들을 통제할 능력이 잃은 지는 오래되었고, 지방 관리들의 농간으로 세금이 제대로 들어지 않아 국고는 텅 비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 써야 할 돈은 점점 늘어나니, 결국 상평통보의 다섯 배의 가치를 지니는 당오전을 새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당오전 발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세력은 '목 참판'으로 불리는 묄렌도르프와 민씨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대원군 시절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만든 당백전으로 큰 혼란을 겪었기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막 돌아온 김옥균의 반대가 심했다. 자신은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느라 애쓰고 있는데 조정에서 내놓은 방안이 고작 화폐를 새로 찍겠다는 것이냐며 김옥균의 실망과 분노는 대단했다.
p175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점점 말이 없고 침울해지더니, 영식이 먼저 귀국할 즈음에는 크게 다툰 적도 있습니다. 무작정 나라의 문을 여는 것만이 옳은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하더군요."
미국에서 조선 보빙사 일행은 환영받았지만, 십여 년 전 일본 사절단처럼 진기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황제와 마찬가지인 미국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조선 사신들은 당연히 예를 갖추어 큰 절을 올렸다. 엉거주춤 서 있는 대통령 앞에서, 머리를 바닥에 댄 채 엉덩이를 들고 엎드린 조선 사신들의 그림이 미국 신문에 크게 실렸다. 그림 속의 미국 대통령은 당황하면서도 웃고 있었고, 신문을 보는 사람들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선에서 민영익은 양반에다 귀인이었지만, 그곳에서는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p176
어차피 조선이 문을 열고 변화해 한다면, 무례한 서양보다는 그래도 전통을 알고 사대부 양반을 아는 청나라와 손을 잡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79
왕은 푸트 공사의 부임을 열렬히 환영했다.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었지만, 정식으로 조선에 공사를 파견한 것은 미국이 처음이었고 유일했다. 다른 나라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파견한 공사나 영사로 하여금 조선에 관한 업무도 맡게 했던 것이다. 화려한 말에 비해 아무런 지원이 없는 일본에 지쳐 갈 즈음, 조선에 나타난 미국 공사는 단비처럼 반가운 존재였다. 영국과 전쟁에서 이기고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였다는 미국 역사도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왕은 미국인 군사 교관과 정치 고문을 조선에 파견해 달라고 푸트 공사에게 요청했다.
p187
손에는 이번 호 [한성 순보]를 들고 있었다.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신문의 필요성은 다른 관리들도 공감하고 있었기에 지난가을부터 발행된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김옥균에게 순보를 내밀며 서광범이 말했다.
베트남에서 청나라와 프랑스의 갈등이 심각해진 것은 봄부터였다. 권력 다툼에서 쫓겨난 안남 왕이 도움을 청하자, 프랑스는 그를 지지하면서 베트남을 자기 보호령으로 삼으려 했다. 조선에서처럼 베트남에서도 종주국 행세를 하던 청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두 나라는 베트남 곳곳에서 충동했고, 청은 전쟁이 확대될 것에 대비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의 절반을 빼 이동시켰다.
p188
김옥균과 벗들이 간절히 원하는 조선 독립 자주는 청나라에 기대기로 한 조정 대신들과 민씨 관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p190
김옥균이 한마디 한마디, 벗들을 둘러보며 힘주어 말했다.
"청에 기운 대신들과 각 군의 영사 들을 단번에 없애고 ,조정과 군대를 우리가 장악해야 하네. 그런 뒤 조정을 우리 사람들로 새로 꾸리고, 일대 개혁을 실시해야지."
p193
"군주께서 근래 우편국을 개설하고 군사 제도를 개편하여 조선의 개명 진보에 열중하는 것을 아시고, 우리 황제께서는 대단히 만족하셨습니다. 특별히 40만 엔을 조선에 되돌리니 부디 그 용도에 쓰기 바란다는 말씀을 본 공사에게 전하라 이르셨습니다."
p194
다케조에 공사는 고서나 뒤적이며 본국에서 한가로이 휴가를 보내던 중 일본 외무성의 긴급한 부름을 받았다. 외무성은 그에게 즉시 조선으로 돌아가, 나머지 배상금 40만 엔을 되돌려 준다는 일본의 뜻을 조선 왕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청나라에게서 벗어나려는 조선 내 움직임을 적극 지원하라는 은밀한 지령도 내렸다. 다케조에 공사에게조차 뜻밖이었던 이러한 이러한 지시는, 일본 정치를 이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에 나가 있는 정보원들에게서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조선 젊은이들이 조정을 뒤집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p198
"일본의 뜻이 진정 그러하다면 시대의 운이 우리를 따르는 것 아니겠나? 청나라 군사들은 안남에 발이 묶여 꼼짝 못 하고, 훼방만 놓던 일본은 마음을 바꾸어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니, 이보다 더 절묘할 수가 있겠는가? 한 목숨 버려서라도 조선의 개혁을 이루겠다는 뜻을 간절히 품었더니, 하늘도 우리를 가상히 여기시나 보네."
홍영식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p201
이 사랑에는 저잣거리 같은 떠들썩함과, 그러면서도 무언가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함이 흘렀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뜻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함께 하고 있었다. 지위나 가진 것에 상관없이, 고귀한 금릉위에게나 천한 종 운이에게나 똑같이 하나뿐인 목숨, 그것을 하늘에 맡기고 미련도 집착도 놓아 버리기로 한 데서 오는 홀가분함인지도 모른다.
p209
"네 마음은 내가 잘 알겠다. 앞으로의 일에 관해 너를 깊이 믿는 바이니, 기어이 품은 뜻을 한 번 펼쳐 보라."
왕의 말은 은근하면서도 단호했다. 김옥균은 감읍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신, 모든 것을 바쳐 기필고 이 나라의 독립 자주를 이루겠사옵니다."
정변 날짜는 사흘 뒤인 12월 4일로 정했다.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청사가 완공되었기에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각 군 영사들과 대신들을 초대해 일을 벌일 작정이었다. 이인종과 행동대원들이 청사 옆 별궁에 불을 질러 소란이 일어나면, 그 틈에 조선군 영사들과 대신들을 베기로 했다. 그런 뒤 왕을 행궁으로 모시고 가, 새로 꾸린 조정애서 정령을 반포하고 대개혁을 실시할 것이었다.
p217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알렌이 나가 보니 푸트 공사의 비서 스커더가 피 묻은 옷을 입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사람이 칼레 찔리는 변이 났으니 급히 우정국으로 와 달라는 전갈을 가져온 것이었다. 변을 당한 사람은 알렌도 잘 알고 있는, 왕비의 조카이자 조선군 우영사 민영익이라 했다.
비서와 함께 급히 가 보니 민영익은 몹시 위급한 상태였다. 예리한 일본도에 귀가 거의 잘려 나간 데다 동맥까지 상했다. 어깨와 등도 길게 베었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이 없었다. 연회에 참석했던 외국인들이 민영익의 주위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웅성되었고, 잔뜩 화가 난 묄렌도르프는 무어라 끊임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우정국 총판 홍영식과 연회에 참석한 김옥균, 서광범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재동 민 독판 댁에서 급히 모셔왔다는 이름난 의원들을 모두 물러나게 한 뒤, 알렌은 민영익을 치려했다. 삼십여 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이었다.
p224
그 말에 윤태준이 발끈해 정전 문 쪽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알겠소. 내 당장 나가 후영 군사들을 데리고 오리라."
그러나 윤태준은 다시는 자신의 군사들을 볼 수 없었다. 정전에서 나와 소중문을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윤경순과 이규완이 입을 틀어막았다. 조선군 후영사 윤태준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들의 칼에 숨이 끊어졌다. 우정국 연회장 밖에서 하짐 못한 일을 경우궁 정전 밖에서 거행한 것이다.
p225
그러나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윤태준도, 그들의 병사도 아닌 정변 행동대원들의 칼날이었다. 소중문 밖에는 조선군의 세 영사가 흘린 검붉은 피가 흥건했다. 하늘에서 차갑게 내려다 보고 있는 달에도 핏빛이 스며들었는지 붉은 기욱이 어려 있었다.
밖에서 경우궁으로 들어오는 대신들은 먼저 명패를 들여보내게 했다. 거절당한 사람들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허락된 대신들은 왕이 계신 정전 근처에 오기도 전에 피 묻은 칼을 먼저 대해야만 했다. 수염이 허연 노대신 민영목은 부릅뜬 눈을 차마 감지 못했다. 이어 중문 안에 들어선 조영하는, 눈 뜬 채 죽어간 민영목을 보고 한마디 외쳐 보기도 전에 같은 운명을 당했다. 뒤늦게 민태호가 굳은 표정으로 명패를 내밀었다. 아들 민영익이 중상을 입은 우정국 연회와 왕의 경우궁 파천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민태호는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왕과 왕비는 물론 궁 안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하고, 그 역시 젊은 행동대원들의 칼에 쓰러져야만 했다.
p228
더욱 놀랍고 두려운 것은, 죽이지 말라는 왕의 명령이 똑똑히 들려오는데도 끝내 유재현을 베게 한 김옥균의 눈짓이었다.
p229
간밤의 혼란과 여러 사람의 죽음을 뒤로하고, 다시 해가 떠오르고 이썽ㅆ다. 찌푸려지는 게 사람의 눈살인지 햇살인지 알 수 없었다. 12월 5일 정변 이틀째다. 여전히 날은 맑았고 내내 얼었던 눈이 이제는 조금씩 녹을 모양이었다.
p230
김옥균이 벌이는 일 자체에도 왕비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각료 명단을 보건대 김옥균의 세력은 크지 않았다. 새파란 젊은이들이 요직을 맡은 것도 그러했지만, 과연 이들이 꾸린 조정에 나올까 싶은 이름들도 보였다. 오죽하면 한가한 종친까지 들어 있었다. 세력이 크지 않기에 드넓은 궁궐에서 일을 벌일 수 없었고,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로 왕실을 기망하면서 이 작은 별궁으로 끌고 온 것이리라 짐작했다.
'대궐로 돌아가야 한다!'
왕비의 결심은 확고했다. 어느 세력에도 휘둘리지 않을 왕의 권력이 세워질 수만 있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들로는 어림도 없었다. 정변 병력조차 일본군에 의지했고, 조선군을 새로이 장악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수가 적을수록 성급해지는 법이고, 성급해질수록 과격해지는 법이었다. 장차 수세에 몰리면 무슨 일을 더 벌일지 알 수 없었다. 공연히 어정쩡하게 있다가 왕실도 동조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 그나마 지금 왕의 권력도 더 위태로워질지 몰랐다.
왕의 불안감도 피어올랐다. 김옥균과 젊은이들의 충심을 모르지 않았지만,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니 뭔가 허술했다. 큰소리치던 것과 달리 일본군 병력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청나라 진영의 움직임이 궁금했는데 이들도 자세히 알지 못했고,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리라 막연히 낙관하는 듯 했다. 감히 왕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유재현을 벤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일개 내관의 입놀림이 두려워 죽이기까지 한 자들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김옥균이라면 준비를 단단히 해 두었으리라 기대했고 암묵적으로나마 허락해 주었는데 실망스러운 면이 자꾸만 보였다. 대궐을 떠나 다른 신하들을 전혀 만나지 못한 채 오로지 이들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왕으로서는 꺼림칙한 노릇이었다.
p233
"그대들 말처럼 청나라 군사가 공격해 온다면, 대궐과 이곳이 무슨 차이가 있겠소? 변을 당하더라도 과인은 차라리 대궐에서 당하겠소."
왕의 뜻은 단호했다. 잠시 생각하다 공사는 선선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궐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김옥균은 화가 나 다케조에 공사와 다투었다. 다케조는 큰소리쳤다.
"걱정마시오. 우리 병사만으로도 능히대궐을 방비할 수 있소. 우리가 있는 한 청나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왕의 뜻이 그러하고 다케조에가 확답까지 했으니 대궐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며칠만이라도 이곳에서 새 정부의 기틀을 닦고 조선군을 장악할 시간을 벌었으면 좋으련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김옥균은 박영효에게 대궐의 정황을 살펴보고 오라 일렀다.
p236
칼을 맞고 쓰러진 민영익의 창백한 모습도 잊히지 않았다. 조선독립에 대한 의지가 없고 냉정한 민영익에게 실망도 많이 했지만 이렇게 되길 바란 건 아니었다. 정변을 벌인 젊은이들과 민영익은 이삼 년 전만 해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 벗들끼리 목숨을 노리고 칼을 겨우어야만 하는 조선의 현실이 서글펐다.
난리는 난리인 모양이었다. 문병을 마치고 공사관을 돌아올 때 보니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흉흉한 소문도 거리를 휩쓸었다. 김옥균이 왕을 볼모로 잡고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기려 한다. 왕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왕은 곧 폐위될 것이다. 조선에서는 왜가 득세할 것이다. 화염보다 더 빠른 소문이 도성 안을 온통 활활 태우고 있었다. 백성들은 아예 대궐 안 젊은이들을 일본과 내통하여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역적 무리로 취급했다. 조선을 당당한 독립 자주 국가로 만들겠다는 김옥균과 젊은이들의 진심은 어디에도 다가갈 곳이 없었다.
p237
청나라에 분노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정변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왜 가닿지 않았을까. 끼리끼리 찾아다니는 걸음은 분주했지만 정작 백성들에게 진심을 알리고 설득하는 데는 소홀했던 게 아닐까. 도성 안 골목마다 괘서라도 붙여 자신들의 뜻을 알렸더라면 대궐 안 젊은이들이 백성들에게 알린것이라고는 조정 각료들이 바뀌었다는 방문 뿐이었다. 벼슬을 탐하는 젊은이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p239
자신들의 포부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 여겨서인지 벅찬 가슴만큼이나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정령의 항목은 수십 가지였다. 특별히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제도를 마련하고, 사람을 보아 벼슬을 택하되 벼슬을 내세워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위로는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같은 양반, 아래로는 유대치, 변수 등 중인, 또 박제경과 같은 서자, 사관생도들과 병사들을 포함한 다수 상민들, 또 봉균과 점돌 같은 천한 종들의 바람까지 담긴 것이었다. 그 밖의 백성을 수탈하는 수많은 종목의 조세를 줄이고 환곡 부담도 줄이기로 했다.
p249
홍영식은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자네들 이야기가 맞네. 훗날을 위해 다들 떠나야 하네......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은 남아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어났으며 무엇을 하려 했는가를 알려야 하네. 비록 우리들의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뜻 만큼은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네. 전하를 두고 다 떠나 버린다면 우리의 진심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나는 끝까지 전하를 따르겠네."
p257
무엇이 잘못되었던가. 김옥균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일본의 병력을 무턱대고 믿은 것도, 청나라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리라 낙관한 것도 가슴을 칠 만큼 어리석은 일이었다. 정변을 준비하면서 모든 정황을 엄격하게 헤아리고 대처하려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강렬한 소망이 이성을 압도해 버렸다. 벗어나고 싶은 현실의 어려움도 한몫했을 것이나 핑계였다. 소망이 이성을 휘어잡고 결과를 낙관하게만 만든다면 환상에 불과하거능, 십 년 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수많은 목숨들과 바꾼 뒤에애 다가온 깨달음은 비통했고,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조선에서는 정변 전보다 청의 세력이 강해졌고, 특히 오만한 젊은 장수 위안스카이의 독주는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나라의 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왕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김옥균과 젊은이들이 일본에서 지낸 생활도 치욕적이었다. 갑신년 조선 정변으로 일본이 잃은 것은 없었다. 또다시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냈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권리를 청나라와 동등하게 갖게 되었다.
p258
견디다 못한 서재필과 서광범, 박영효는 이듬해 일본에서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보아 주는 사람도 없는 데다가 차마 막일을 할 수 없었던 금릉위 박영효는 결국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p263
그즈음 김옥균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장사를 크게 하고 있다는 이일직이었다. 본디 학문하던 양반이나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 일본과 청나라를 왕래하며 약재와 쌀을 판다고 했다. 조선의 젊은 망명객들에게 자주 밥과 술을 사 주고 넌지시 용돈을 쥐여 준 적도 많았다.고루하고 꽉 막힌 조선 조정을 함께 욕하고 갑신년 정변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얇은 입술에 눈웃음이 헤픈 데다 상대방의 말에 지나치게 맞장구를 치는 것이 어딘가 미덥지 않은 면도 있었다. 김옥균이 도쿄로 돌아오자 그를 암살하려는 움직임도 다시 시작되었는데, 특히 정변 때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은 민씨 집안의 원한이 대단했다. 이일직은 그들이 보낸 자였다.
p266
탕! 탕! 탕!
상하이 항구 부근의 여관 뚱허 양행에서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관 손님도 드물어 한적한 데다 나른한 오후라,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가 무시무시한 총소리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창인 봄날, 꽃이 터지듯 공원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로만 여겼다. 그러나 얼굴과 가슴과 어깨에 총을 맞고 2층 객실에서 피 흘리며 숨을 거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김옥균이었다. 리홍장과 만날 준비를 하며 보던 [자치통감]을 손에 든 채였다. 열린 객실 문밖에는 김옥균을 향해 겨눈 총을 채 내리지 않은 홍종우가 서 있었다. 리볼버 권총 총구에서 나는 화약 연기가 매캐했다. 1894년 3월 28일, 함께 고베 항을 출발하여 상하이에 도착한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p275
1894년 8월, 박영효와 조선 망명객들은 그리던 고국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김옥균이 홍종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다섯 달 뒤였다.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김옥균은 목숨까지 걸었지만, 이들의 귀국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힘으로 거저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듬해 갑오년에는, 먼저 쓰러져 간 벗들 대신 살아남은 자로서 개혁에 관한 포부를 한번 펴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1910년, 조선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협력한 조선인들에게는 일본 귀족의 작위가 내려졌고 은사금도 지급되었다. 선왕의 부마이자 일본 통치의 협조해 온 박영효에게도 후작 지위와 수십만 엔의 상금이 내려졌다. 그 뒤로 박영효는 산업과 언론, 경제계의 실속 있고 명망 있는 지위를 두루 거치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p277
[민족개조론]을 실은 잡지사 [개벽]은 성난 조선 청년들의 습격을 받았고, 이광수도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 뒤로 이광수에게는 뛰어난 문필가라는 칭송과 민족의 배신자라는 원망이 함께 따라다녔다. 모든 일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이고ㄴㅇ수의 생각은 지금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지만, 박영효가 자신을 한동아리로 생각하고 은근하게 구는 것은 왠지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