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작가에게 빠져버린다. 어떤 작품 속에서 깊은 감동과 가슴을
뒤흔드는 울림을 경험하게 되면 작가를 흠모하게 된다. 거기에는 하나의 작품이 존재하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작가의 전작을 탐한다. 《소금》을 읽고 나서 박범신 작가의
전작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소년이 온다》를 읽고 단어 하나 하나
소중히 다루는 듯 한 한강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올 해 초에도 한 작가를 만났다.
바로 중국 작가 위화다. 그의 작품은 이전에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인 《허삼관 매혈기》, 사람이 죽은 후 7일 동안의 일을 보여주는 《제7일》을 통해서 먼저 접했다. 풍자와 해학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그 속에서 중국 사회의 단상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독특한 문체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이번에 접한 《인생》 을 통해서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늦은 저녁이었고 내일 출근을 해야 했지만 이야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굵은 눈물을 떨구었는지
모른다.
작가 위화는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이지만, 최근에 배우 하정우가 감독으로 연출한 <허삼관>개봉과 함께 다시 조명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어서 기쁜 마음도 있지만, 나만 알고 싶은데 다른 사람도 알아버렸다는 안타까움과
소소한 이기심도 감출 수 없다.
《인생》은 푸구이라는 한 노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화자인 나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푸구이는 어떤 삶을 살았나 궁금하다.
부유한 지주의 외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젊을 때 주색과 도박에 빠져 집안의 재산을 모두 잃게 되고 아내 자전도 장인이 데려간다. 후에 자전은 돌아오고 푸구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옛 땅에서 소작인이 된다. 어느 날 어머니 건강이 안 좋아져서 약을 구하러 가던중 이유도 모른채 국민당 군인으로 끌려가서 내전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병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푸구이는 다시 삶을 살아간다. 당시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겪으면서 가난에 허덕이며 쌀이 생기면 문을 걸어잠그고 끓여먹었다. 예전 지주로 남아있었으면 위험했을 뻔한 순간도 있었고, 자신의 집이 풍수적으로 좋아서 집을 빼앗길 뻔하는 순간도 오지만 위기는 잘 넘어갔다. 이제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아들 유칭은 어느날 학교 교장이 출산 중 급한 수혈이 필요해서 헌혈을 하다가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죽게 된다. 딸인 펑샤는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다가 유칭은 그곳에서 똑같이 숨을 거둔다. 두 자식을 먼저 땅에 묻고, 구루병에 심해진 아내 자전도 푸구이에게 마지막을 부탁한다. 아직 그치지 않았다. 후에 사위와 손자도 푸구이를 남겨두고 먼저 떠나게 된다. 푸구이는 이렇게 가족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하나하나 직접 마지막을 정리해준다.
홀로 남은 푸구이는 어느 날, 늙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한 마리 보게 되고, 자꾸 마음에 걸려 그의 남을 털어서 소를 사게 된다. 그리고 그 소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남은 삶을 살아간다.
위화의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는 그만의 풍자와 해학, 독특한 문체가 읽는 재미를 북돋아 주었는데, 푸구이의 아픔과 쓰라림을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 식으로 담담하게 풀어내니 읽는 내내 묵직한 슬픔이 몰려왔다. 마치 한 번 가슴 속 슬픔을 터뜨려
버리면 더 이상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느끼듯이 깊이 울음을 감춘 푸구이의 모습이 눈에 아련했다.
시대적 배경이 중국의1900년대 초반부터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시기를 관통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경제개발계획, 민주화운동을 겪어낸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도 비슷한 격변의 세월을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푸구이의 개인적인 삶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끌려가게 되고, 자신의 손으로 먼저 떠난 아내, 딸, 아들, 사위, 손자를 묻는다. 땅 속에 묻고 아물지 않은 찢어진 가슴을 더 깊게 파낸다. 푸구이는 생각했을 것이다. 아프지만 자신이 가족들을 거둘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면 마지막 남은 푸구이 할아버지는 어떡하지. 푸구이는 동네 사람들이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게 너무 아팠다.
세월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짊어지고 갈 짐이 생긴다. 짐이라는 말보다는 책임이라는 게 좋겠다. 자신이 선택했든 그렇지 않았든 우리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현실을 살아나가야 한다. 그 현실이 참담할 수도 있고 힘에 부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고 살아가야 한다’ 고 말한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참을 수 없는 아픔을 겪게 되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한다.
푸구이는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냈지만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한 소를 한 마리 사서 함께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낸다.
p282
소가 우리 집에 온 이상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니 이름을 지어줘야 했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푸구이라고 하는 게 좋겠더구먼. 그렇게 정하고 푸구이라 부르다 보니,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나를 쏙 빼닮아 기분이 정말 째지더군. 나중엔 마을 사람들까지도 우리 둘이 꼭 닮았다고 했다네. 나는 허허 웃으며 속으로 '요보게들, 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네' 라고 말했지.
단순히 한 권이 책이었다.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내 삶을 보고,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버린다. 문학을 소설을 평생 손에 놓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문학에 대한 글을 하나 소개하면서 마무리할까 한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을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 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중략)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전체에 대한 통찰 중 中,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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