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렵다. 인문학이라고 흔히들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한다. 문학은 그 중에서도 소설은 읽을 수록 빠져들게 만들고 작가들마다 개성이 넘쳐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아직 시(詩) 에 대해서는 나 역시 문외한이어서 아직 그 매력을 잘 알지 못한다. 역사의 경우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이 역시 흥미를 끄는 요소가 다분하다. 하지만 언제나 벽이 있다. 바로 철학이다. 예전부터 책꽂이에 꽂아둔 버드런트 러셀의《서양철학사》는 항상 앞장만 조금 읽고 그 이상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올해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서양철학사》의 완독이다. 하지만 이전에 먼저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 기초적인 철학을 배우기 위해 몇 가지 책들을 찾아보았다. 요슈타인 가이더의 《소설로 읽는 철학 소피의 세계》, 양운덕의 《피노키오 철학》시리즈를 읽기로 했다. 하지만 이 책들도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나에게 철학의 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철학자 탁석산의 《자기만의 철학》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창비청소년문고 시리즈인데 철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철학을 과학과 종교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나간다. 그리고 철학을 기하학의 발전단계에 빗대어 잠재적 철학, 경험적 철학, 전문 철학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이 중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경험적 철학을 해 나갈 것을 권한다. 철학 그 심오한 세계로 빠져 보자. 심오하지만 어차피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니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우선 철학 공부를 시작했으니 한 가지를 명심하고 들어가자. 이게 어쩌면 철학하는 근본 정신일 것이다.

p13

"지금은 바로 이해가 안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철학은 언제나 상식에 도전한다는 것, 그것만은 잊지 마세요."



과학, 철학과 얼마나 다른 거야?


과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통째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통째로 이해한다'는 말은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며 자연에 실제로 있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형이상학적인 것도 알고자 하는 범위에 포함한다. 이렇게 둘의 목적은 동일하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이 과학과 철학의 분류 기준이 된다. 과학은 그 이해를 표현하는 방식이 수식에 의해 나타난다. 반면에 철학은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철학은 수식 대신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가 지녀야 할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이 실험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 역시 언어를 사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사고 실험'을 통해서 이론을 전개하며 막연하고 애매한 주장이 아닌 논리적인 글이 되어야 한다.


종교, 철학과 무엇이 다르지?


종교와 철학의 가장 큰 차이는 종교는 철학과 달리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종교는 철학과 달리 경전, 제의, 예배, 교단 등과 같이 정해진 형식이 존재한다. 종교는 왜 사는지에 대해 확고하고 분명한 답을 준다. 반면에 철학은 어떤 의미든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종교는 인생의 의미를 일일이 알려주지만, 철학처럼 스스로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느다.

 

종교에서는 절도를 왜 나쁘다고 할까요? 그것은 신이 나쁘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전에 도둑질하지 말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절도 자체가 본성상 나쁘거나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에 해가 되기 때문에 나쁜 게 아닙니다. 신이 나브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종교는 일단 우리의 행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해야겠지요.

 

종교는 왜 사는지에 대해 확고하고 분명한 답을 줍니다. 반면에 철학은 어떤 의미든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인생의 의미도 에외가 아닙니다. 과연 인생에 의미가 있는지조차 물음의 대상이 됩니다. 종교는 인생의 의미를 일일이 다 알려 주지만, 철학처럼 스스로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종교는 창시자의 삶과 주장 전부가 모두 대상이 되지만, 철학은 단지 주장이 주요할 
뿐이다. 철학자는 여기서 배제된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종종 자신의 사상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철학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철학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어쩌면 종교처럼 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고를 풍부하게 하고 스스로 생각하게하는 철학만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의 세 단계


기하학의 발전 과정은 철학의 세 단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기하학의 단계를 셋으로 나눠보면,

첫 번째는 잠재적 기하학으로, 기하학에 대해 모호하게 알고 있는 단계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원통, 구, 삼각형 이런 것을 인식은 하지만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단계를 말한다.
두 번째는 과학적 또는 실험적 기하학으로 실제로 해 본 것을 바탕으로 정리한 기하학이다.

세 번째는 연역적 기하학으로 경험이 아닌 논리적 증명에 의한 기하학이다.


이 세 단계를 철학과 연결시켜본다.

잠재적 기하학은 잠재적 철학으로 연결되어 진다. 우리가 흔히 '개똥 철학'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만의 주장을 가치관을 강요하면 사람들은 흔히 '개똥철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철학은 분명 개인의 인식에는 무엇인가가 자리잡혀 있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에는 무언가 2%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다. 아마도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력의 부재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철학의 시발점으로 보면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과학적 또는 실험적 기하학은 경험적 철학으로 이어진다. 경험적 철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경험, 둘째는 한계치까지 생각을 밀어붙이는 치열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상의 능력이다. 경험적 철학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들이다. 경험적 철학자가 되려면 단순히 낱낱에 대한 설명이 아닌 분야 전반적으로 일반화하는 추상적 능력이 요구되어 진다. 그래서 작가는 일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경험적 철학자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연역적 기하학은 전문 철학과 통한다.

전문 철학이 경험적 철학과 다른 점은 경험 철학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다루는 반면 전문 철학은 전문 분야가 아닌 영역에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전문 철학자가 경험적 철학자와 다른 점은 두 가지인 듯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전문 분야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행복, 신, 죽음 등과 같은 것들로도 영역이 넓어진다. 이미 많은 선지자들이 이런 여러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논리력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철학을 펼쳐냈다. 그래서 전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앞선 사람들이 고민했던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자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에 대한 답이 이미 있을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생각으로 철학의 탑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금까지 철학을 과학과 종교와 비교해 보고, 철학을 단계별로 풀어놓아 보았다. 

이 책의 제목처럼 자기만의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내 문제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부터 철학은 시작된다. 그리고 문제의식은 처음부터 언급했듯이 상식으로 부터 도전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를 벗어나서 공동체, 생명, 지구와 같은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토대도 바로 문제의식으로 부터 발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철학은 쉽지 않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생각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풀어내야 한다는 점, 상식에 과감히 질문을 던지는 점, 고정관념과 아집에 빠지지 않고 지식과 논리를 바탕으로 내 생각을 풀어내야 한다는 점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분명 개인적으로 전문 철학자는 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치열하게 파고 들고 논리력을 바탕으로 추상화할 수 있는 경험적 철학자로 거듭날 필요는 있을 듯 하다. 

이 책이 나에게는 철학에 대한 입문서이자 짧은 개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부터 차곡 차곡 내실을 다져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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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 그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모자를 삼킨 보아뱀' 인가요.

<어린왕자>에서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이 역시 쉽사리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저 그림을 보면 자연스레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어린왕자> 속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각자 만의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어떤 질문에는 분명히 답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치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갈등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획일적인 사고가 굳어집니다.


하나의 답만 있는 경우, 만약 그 답이 틀리면 그 답을 섬기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모두 오류의 낭떠러지에 설 수도 있습니다. 이때 단 한 사람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함께 망하는 길은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림에 대한 각자 만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이 그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듯이 우리는 질문을 이어가야 합니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탈레스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습니다.

그때까지는 "이 세계를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물었죠. 그런데 탈레스는 "이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하고 묻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세계를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답을 제우스나 하느님이라고 했죠. 그런데 '누가'가 아니라 '무엇'이라고 물으면 답이 달라지죠. 답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는 생각하는 방향과 대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발걸음들이 모여서 결국 '원자론'을 제안하는 것에 이릅니다.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가설이기도 한 원자론이 바로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질문에서 나왔다는 점이 신기하지 않나요?


플라톤은 이러저러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를 물었고, 근대 철학을 정초한 데카르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죠. 칸트는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알 수 있는가?'를 물었고, 니체는 '선과 악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가 만들었는가?'를 물었죠. 이런 질문들이 철학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 놓은 질문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까?


철학에 대해서 관심이 조금 생겼는데,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대학 때 교양으로 <서양사상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 당시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계몽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수업을 잘 못 신청했구나.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여전히 어떤 사상가로 시작해보려는 시도는 하지만 앞에 몇 장 읽다 보면 '아직 힘들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아직은 철학책이 저에게는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입니다. 연습이 필요합니다. 근처의 낮은 산을 한 번 올라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철학에 입문하기 좋은 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찾은 것이 피노키오의 철학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 입니다. 전체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철학자 위주로 설명하기 보다는 특정한 주제를 설명하면서 여러 철학자들의 이론을 등장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살짝 개괄하면서 다리 근육이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생기듯이 그렇게 책력이 조금씩 쌓이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지 한 번 해보자. '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쉽게 어떤 분야로 관심을 쏟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동시켜주는 책을 만나면 정말 행운입니다. 저는 그런 책을 'Trigger Book' 이라고 부릅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달과 6펜스>는 화가 고갱에 대한 소설인데, 책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고갱에 대해서 관심이 생기고 그의 그림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는 <달과 6펜스> 처럼 다른 분야로의 Trigger는 아니지만 질문 속에서 철학으로 확장시켜주는 그런 책입니다.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하고, 프로이트의 의식, 무의식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이 됩니다. 과학적 명제로서 귀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플라톤의 이데아에 의문점을 남깁니다.


아직은 철학에 대해서는 감이 제대로 잡히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접근하고 알아갈지는 그저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렵게 얻은 것일 수록 더 오래 남고 소중하게 간직된다는 점을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했으니 저 역시 그 방법으로 시작해야 겠네요.
'어떻게 하면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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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은 작년 말에 읽은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이후로 두 번째다.

보통은 이야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서사를 좋아한다. 보통 소설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빠져버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정말 나에게 맞는 짝을 만났을 때이다. 그런 책들은 내일로 넘기기가 힘들다. 시간이 늦어도 읽어서 끝장을 봐야 한다. 


산문에서는 그런 종류의 감동은 덜하다. 그런데 산문집을 접하면서 산문 만의 매력을 새롭게 느껴가는 중이다. 서사와는 다른 간결하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산문은 글쓰기 연습에도 훌륭한 선생님이 된다. 길지 않은 글에서 어떻게 도입부분을 표현했는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떤 식으로 전개했는지, 글을 어떻게 마무리지었는지 살펴보기 좋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은 지금껏 거의 책을 내놓지 않은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문화운동가이자 우리 시대 대표적 인문학자인 도정일의 글이다. 지금껏 신문 칼럼이나 대담 형식의 책에서만 잠깐 만날 수 있었던 분이기에 이 책은 더 반갑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이제는 좀 더 늦기 전에 그동안 미루어왔던 글을 정리해보려고 한다고 들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는 2006년 대학에서 퇴임했으나 2010년 다시 대학으로 복귀해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으로 학부 교양교육을 쇄신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궁금했다.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무엇인지.


네이버의 기획물에 우리 시대의 멘토 '도정일'편에 소개된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인가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인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사랍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것에 따른 응답을 하고자 하는 사람, 인간성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사람이 후마니타스죠.


둘째로는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어가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어떤 문명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문명은 기술이나 과학만으로 만들 수 없거든요. 종교도 필요하고 예술도 필요한 거죠. 인간이 무엇을 위해 문명을 만들었을까? 현대문명은 무엇을 위해서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문명의 목적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문명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잘못된 것을 반성하며 문명의 방향이 옳게 갈 수 있도록 애쓰는 사람이 바로 후마니타스입니다. 요약하자면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문명을 만들고 성찰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죠.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은 크게 4부에 걸쳐서 91개의 산문이 실려있다. 91개의 산문에는 정말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밑줄지고 단락을 지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별도로 정리한 것만 해도 20장이 넘게 된다.

특히,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은 인문학에 관련된 주제, 독서와 도서관에 대한 생각, 민주주의에 대한 의견 부분이었다.


인간의 삶이 우연성의 개입을 완벽하게 차단할 방법은 없다. 엉뚱한 때에 엉뚱한 곳에 잘못 배달된 소포처럼 시대를 잘못 만나고 장소를 잘못 만나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지 모른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사항도, 선택한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삶에 대한 나의 책임, 당신의 책임,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바 없고 선택한 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탄생 이후의 우리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게 인문학적 사유의 첫번째 과제라는 말의 의미다. 물론 그 과제에 포함되는 것이 어찌 운의 문제뿐이겠는가마는             -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


아무도 정답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인문학적 기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다른 사람 아닌 '내'가 내 손으로 찾아야 한다. 그 질문들에 '나만이' 응답할 수 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지고 조선 팔도에 아무리 문자를 날려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고 찾을 수 없다. 기성의 해답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질문의 위대한 중요성이다. 왜 응답해야 하는가? 인간에 대한 기본 질문에 내가 어떤 식으로건 나의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당당히 말할 수 없고 내 존재의 정당성("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과 내 삶의 문법("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동물이며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물이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이다.       -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이런 글들이 산문 곳곳에 흩어져 있다. 같은 글이더라도 소설처럼 배경을 묘사하고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많은 부분을 소요하는 것 대신에 이런 농축되고 함축적인 표현들이 산문에는 가득하다. 책을 읽을 때는 생각보다는 읽는 거 위주였던 거 같다. 읽은 것을 정리할 때는 생각이 많이 뒤따랐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은 산문 한 편을 읽고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서 그 주제에 대해서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 위의 내용처럼 쉽사리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삶을 살면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냥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일지도 모른다.

위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에서도 표현했듯이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간다. 어떤 이는 평생 건강하고 넉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어떤 이는 평생 불행에 불행이 겹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선하게 살아오던 사람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태어날때 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자연재해로 사람들이 무차별하게 죽는다.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선악의 심판이 없는 듯 하다. 궁금하다. 과연 운명이란 것이 존재한가? 라는 생각도 해보기도 하고,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대답없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인문학을, 철학을 더 공부해볼 시기인 듯도 하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지만 결코 쓰잘데없지 않다. 그저 너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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