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의 사모뿔을 빌립시다."
수양대군이 해가 저물어 김종서의 집에 들려서 사모뿔을 빌리자 한다. 그리고 잠시 틈을 타 가동 임어을운이 감추었던 철퇴로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p319
향년 70세, 태종 5년 식년과에 합격해 진사로 벼슬에 나온지 48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태종, 세종, 문종, 단종 네 임금을 섬긴 '훈로'가 비참한 생을 마친 것이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며 북방을 개척한 대호, 아내의 장사도 다 치르지 못하고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평안도로 떠났던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김종서의 죽음은 그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종의 죽음이자 그가 섬겼던 세 임금, 즉 태종과 세종, 문종이 만들어놓은 정상적인 헌정질서의 죽음이었다.
김종서는 문관이었지만 '대호'라고 불리워졌으며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조선의 북방강역을 넓힌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역사편찬을 맡기도 한다. 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마치지 못했으나 <세종실록>의 편찬에 앞장선다. 김종서는 향년 70세까지 관직에는 48년동안 있으면서 그야말로 조선의 숨겨진 기둥이었다. 몽골군 침입이 예상되어 북방으로 출전할때 그의 나이는 67세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다.
김종서, 북방강역을 넓히다. 4군 6진의 개척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4군 6진은 위의 지도에서 표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4군 6진의 개척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지도 모양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세종 때 북방 개척의 영웅은 국왕 세종과 문신 김종서, 무신 최윤덕과 이징옥 이 네 사람이었다.
이 당시 북방 개척의 범위는 공형진이라는 부분까지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공험진은 고려시대 윤관이 여진족을 무찌르고 개척한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다. 윤관은 공험진의 선춘령에 '고려지경' 이라는 비를 세웠다. 고려의 땅이라는 경계비를 세운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땅이 공험진과 선춘령에 미친다고 생각해왔다. 문제는 공험진이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 그리고 중국은 동북공정의 근거로 길주 이남 함흥평야까지 축소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은 하륜에게, 세종은 김종서에게 이 비석을 찾아볼 것을 명했다. 이 비석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면 공험진의 위치를 갖고 논쟁할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인식의 시초는 조선 중·후기 한백겸(1552~1615)이 <동국지리지> 동계조에서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가 아니라 길주 남쪽에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한백겸 이전으로 돌아가면 조선의 강역은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까지가 된다.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남쪽 경계는 철령이며,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했는데, 높은 봉오리가 백두산에서부터 기복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뻗쳐 1,000여 리에 걸쳐 있다. 북쪽은 야인(여진족)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 철령으로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700여 리이다. -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이 문제는 현재도 대단히 예민한 문제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간도는 지금 사람들에게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당연히 우리의 인식에서 배제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민초들의 삶의 장이었다. 간도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북방개척, 김종서 개인에게는...
북방개척은 분명 조선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김종서의 삶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에게 조선의 일은 아마 그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는 잃은 게 너무 많지 않나 생각해본다.
당시 북방으로 나가는 장수들에게는 가족이 동행할 수 없었다. 만약 난이 일어날 경우 가족을 먼저 챙길 우려가 있어서 동행 자체를 금지한 것이었다. 김종서는 병약한 노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두고 오랜 시간 동안 조선의 북방을 위해서 살아갔다.
김종서가 북방에 있을때 그의 노모가 죽게된다. 당시 사대부의 장례법은 3년 동안 부모의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100일 후에 다시 임소로 돌아가라는 영을 내린다. 북방을 맡길 사람은 김종서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웠으나 조선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북방을 김종서 없이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4년 후, 김종서는 아내가 위독하여 그의 나이도 쉰여섯 살이 되어 세종20년(1438)에 사직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세종은 윤허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아내를 잠깐 위로하고 떠날 뿐이었다. 조선의 북방이 튼튼해질수록 아마 김종서의 마음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문인으로서의 김종서
아마 어떤 이는 김종서를 무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보통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때 김종서하면 4군 6진, 북방개척이다. 하지만 김종서는 본래부터 문관출신이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영성균관사로서 성균관을 총괄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마치지 못한 <세종실록> 편찬을 주도했다.
p139
김종서가 유학자라는 김돈의 평가는 김종서의 인격에 대한 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세종 또한 김종서를 유신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유신이란 표현은 학문과 수양이 갖추어진 문신들에게만 사용하는 칭호였다.
p186
성균관은 지방 향시에 급제한 진사, 생원들이 대과를 보기 위해 숙식하며 공부하는 곳이었다. 정3품 대사성이 관할했으나 정1품 대신 중에서 영성균관사가 총괄했는데, 김종서를 영성균관사로 임명해달라는 청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은 예나 지금이나 현실 비판적인 법이다. 특히 선비를 자처하는 조선의 젊은 선비들이 공동 상언에서 김종서를 '태산북두'로 표현하며 영성균관사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은 김종서가 당시 젊은 선비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p198
세종은 김종서에게 <고려사>를 편찬토록 명한 것이다. <고려사> 편찬을 명령받은 김종서는 기존에 사용되어 왔던 날짜별 기술인 편년체는 고려시대 전체를 조망하고 평가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 <사기>와 같이 기전체로 <고려사>를 편찬했다.
또한 고려사의 중요 사항만 연대별로 정리하는 편년체 사서인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여 뜻을 강조하는 기전체<고려사>와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를 보면서 많이 놀랐다. 첫번째는 문신이었지만 문무에서 모두 아주 탁월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세종은 김종서 이후의 북방관리자들에게 '북방에 관련된 일은 먼저 김종서와 논하라.' 고 할 정도로 북방의 전문가이자 대호라고 불리우는 무신이었다. 반면에 문신으로서도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역사편찬을 맡고 흔들리지 않는 소신으로 국정을 주도했다. 그래서 훗날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수양대군에게는 첫번째 제거대상이었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은 예전에 한 번 읽고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올해 한 번 조선시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고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한 번 읽은 책이지만 정리를 해두지 않으니 다시 읽는데도 마치 처음 읽는 듯 했다.
지금까지는 김종서가 편찬한 기전체인 <고려사>처럼 사건 중심 역사를 알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시야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일단은 개별적인 사건 중심으로 한 번쯤 개괄하고 나중에 이들을 편년체 형식인 <고려사절요>처럼 하나씩 이어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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