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는 모천 회귀성 물고기다. 태어나자마자 모천을 떠난 치어들은 저 먼 알래스카까지 헤엄쳐 간다. 그리고 다시 떠났던 길을 거슬러와 모천으로 돌아와 알을 산란하고 죽는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명을 낳고 죽는다는 것, 누군들 이 연어의 일생에 마음이 사무치지 않겠는가. 나 또한 연어라는 말만 들어도 연민이 솟았다. 이 글은 은빛연어 한 마리가 동료들과 함께 머나먼 모천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누나연어를 여의고 눈맑은연어와 사랑에 빠지고 폭포를 거슬러오르며 성장해가는 내용이다. 언어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이 보인다. 은빛연어는 말한다. 연어에게는 연어의 길이 있다고 쉬운 길을 마다하고 폭포를 거슬러오르는 한 마리의 은빛연어를 따라 헤엄치다보니 나도 연어가 되고 싶었다. - 신경숙
p43 "그건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았기 때문일 거야. 마음의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이 아름답거든." 마음의 눈!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말인가. 마음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친구를, 눈맑은연어를 은빛연어는 오래도록 바라보며 해야 할 말을 잊고 있었다.
p50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른이 된다는 게 두렵기도 하다. 책임, 이라는 말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죽은 누나가 전에 말했었다. 어른이 되면 책임져야 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진다고
p55 "은빛연어야, 너는 너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거슬러오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그럼요?" "혼자라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연어 무리는 특히 그렇지. 연어가 아름다운 것은 떼를 지어 거슬러 오를 줄 알기 때문이야." "왜 거슬러오르는 거지요?" "거슬러오른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같은 거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
p62 "연어들이 편한 길로 가는 것을 좋아할수록 연어들은 해가 갈수록 차츰 도태되고 만다는 거야. 인간들에게 서서히, 조금씩 길들여지다 보면 먼 훗날 폭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연어는 한 마리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게 네 아버지의 생각이었지"
p65 자신의 외모 때문에 고민하던 시절이 생각날 때마다 은빛연어는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는 동무들에게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음을 볼 줄 모르는 동무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마음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세상은 위선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오만으로 가득 찬 생각이었음을 은빛연어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남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가?' 라고 은빛연어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마음 속의 또다른 연어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위기돌파 능력 유성룡은 흔히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로, 임진왜란 와중에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비전제시 능력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 경제, 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 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능수능란한 외교력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유연한 사고방식유성룡은 표면적으로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책의 내용을 이루는 큰 줄기가 있다면,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받치고 사대부의 특권보다는 나라의 존립과 백성들의 안정을 꾀하는 유성룡의 모습과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을 떠나 난을 피하고 싶어하고 난이 끝난 후에는 진정한 공신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 처단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사대부라는 자신들의 특권을 버리지 않고 권력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그 알량한 사대부들의 모습과 조선조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지금도 항상 볼 수 있는 당파싸움이 그 병풍을 만들어 주고 있다.
너무 안타까웠다. 중간 중간 징비록에 나와있는 그 당시의 처참한 상황속에서도 그저 세치 혀로 당파싸움이나 하려 했던 것들이 너무나 화가 나게 했다.
약 520년 전의 임진왜란(1592)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유성룡> 결코 5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되고 과거로 부터 배워나가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 서로 상이한 의견을 내어 놓은 대신들, 명나라에 의존하려는 조선의 왕 선조, 외교력의 부재로 인한 국가적 손실, 서로 다른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 등이 과연 500년 전만의 일인가? 라고 물어본다.
과연 2012년 대한민국을 사는 내가 접하는 현실의 모습은 과연 위의 상황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딱히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러한 리더 바로 유성룡이 다시 한 번 나타나주길 바랄 뿐이다.
p131 개국 이래 최초의 파천은 이처럼 무질서했다. 선조 일행이 도성을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궁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평소에 백성들 위에 군림하다가 막상 왜적이 침입하니까 도성을 버리고 도주한 작태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불태운 기관이 형조와 장예원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장예원은 노비 문서를 관할하는 곳이고, 형조는 백성들을 형벌로 다스리는 곳이다.
p135 선조의 요동내부책은 유성룡이 강력하게 만류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로 인해 더욱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파천을 반대하고, 세자 책봉을 계청한 데다가, 요동내부책까지 반대한 유성룡을 선조는 제거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p159 "당초에 일찍이 요동으로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왜적이 앞에서 나타난 뒤에는 피해 가기 어렵다고 말하곤 하였다." - 선조실록 25년 6월 13일
p267 유성룡의 천인 충군론은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유성룡이 임란을 극복한 가장 큰 공신인데도 훗날 반대 당파의 집요한 공격으로 쫓겨난 배경에는 바로 노비 충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유성룡이 노비 충군론으로 사대부들의 계급적 이익에 정면도전했기 때문이다.
p303 대동법이 유성룡 실각과 함께 폐지되지 않고 계속 시행되었다면 조선 후기사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을 것이다. 대동법은 비단 세제개혁에 머문 것이 아니라 공업과 상업의 발전도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한 배경에는 상업에 대한 남다른 견해가 있었다.
p337 신영은 <제조번방지>에서, "당시 서인은 원균 편을 들고 동인은 이순신 편을 들어 서로 공격하느라 다른 국사는 치외도지했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p341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무군지죄(역적죄)이며,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부국지죄(국가 반역죄)이며,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은 함인지죄(남을 함정에 빠트린 죄)이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지죄(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어서 마땅히 율에 따라 죽여야 할 것이다. 신하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선조실록 30년 3월 13일>
p359 9월15일 "맑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 명량해협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고, 또 한 사내가 오솔길의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를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말했다. (......)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이다.
책의 마지막 표지를 보고, 작품설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카뮈가 29세 때, 지금 나보다 젊은 시절에 발표한 <이방인> 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라 하고 실존주의 문학이라 평한다. 그런데 부조리라는 말도 실존주의라는 의미도 나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존주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인 것일까? 존재의 이러한 불가사의를 끝까지 질문하는 철학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실존주의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간의 존재, 그것도 단독적인 개체인 나 자신의 존재에 계속 관심을 갖는 방법적 태도이다.
이방인은 한 번 읽어보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카뮈를 한 번 접해보고 싶어서였다. 이방인을 읽는 내내, 나는 그냥 무표정인 듯 했다. 왠지 주인공 뫼르소는 작가 카뮈를 닮고 항상 무표정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고,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을 받고, 그리고 사형대에도 그 무표정으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가 있는 그대로 <이방인> 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사건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다루어진 셈이었다. 나를 참여시키지도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문득 나는 귀를 기울였다. "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하며, 나에 관해서 말할 때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 나로서는 그것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놓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이를테면 그가 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 의 내용의 진행과정을 보면 어머니의 죽음에서 부터 뫼르소 자신의 사형 구형이 있기까지 철저하게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에 자고 싶어하는 뫼르소, 장례식 다음날 여자와 관계를 갖고, 재판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 속에서 철저히 뫼르소 자신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존재만을 집중하는 것이 실존주의인가? 그렇다고 이러한 것이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카뮈는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던 것일까? 아직도 내 머리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세월은 기껏해야 몇십 년밖에 되지 않는다. 생명은 두 번의 기회가 없는 일회적인 것이다. 그 기회는 한 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생명은 짧고 가역성이 없고 일회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소중하고 진귀하며 신기하고 아름답다. 생명을 의미 없이 보내고 생명에 빚을 진다면, 이것은 너무도 우둔한 짓이며 죄가 된다. 돈 백원을 잃어도 마음 아파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를 잃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작가 왕멍, 어린 나이부터 중국 혁명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중국의 살아있는 현대사라고 일컬이지는 분이다. 그런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정의한 것이 '나는 학생이다' 이다. 바로 배움을 자신으로 규정한 것이다. 배움은 바로 삶이며 모든 것이다. 우리의 짧은 인생을 어떻게 상실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작가는 지나온 생활을 돌이키며 한마디씩 우리에게 조언을 해준다.
읽는 내내 무엇인가를 계속 수련하고 정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작가의 오랜 삶의 철학과 사유가 담겨있는 글들이었다. 때로는 아직 내 나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문맥을 잘 못 잡는 내용도 있었다. 그래서 아마 책의 내용을 절반을 내가 이해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읽은 책 중에 장회익의 [공부도둑]이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출생을 보니 왕멍은 1934년 출생, 장회익은 1938년 출생이다. 장회익 선생도 자신을 표현하는 말로 '공부도둑'이라 했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은 [나는 학생이다]와는 다른 내용이지만, 어찌보면 70세 라는 나이에 오랜 철학과 사유를 통해 뿜어나오는 그들의 말과 글은 아마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몇 년 후에, 다시 읽어보려 한다. 내가 조금 성숙했다고 생각될 때, 지금보다 조금 더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책을 다시 잡으면 아마 새롭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P 113 작은 집단을 묶지 말아야 함을 명심하라. 즉, 동맹을 맺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차례의 경험으로 어느 한 사람에게 자기를 의탁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도자를 존중하지만,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않는다. 나는 벗들을 잘 대해주지만, 그들과 나를 묶지는 않는다.
P131 무위(無爲), 소극적인 뜻으로 이 두 글자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무위라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위는 무효하고 무익하고 무의미하고 무료하며, 해롭고 상처를 손해를 주거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P134 사람이 한 평생 가장 쉽게 범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착오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표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표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자기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남을 너무 낮게 평가한다. 뒤의 경우는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남들도 선호한다고 오판하여 자기의 표준이 바로 우리 모두의 표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P136 현실 속에서 처음 누구를 만났을 때는 인상이 아주 좋았는데, 사귀고 보니 그저 그렇고, 지내고 보니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요구와 기대를 높이 둘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그만큼 요구하고 희망하는 것이 더 낫다. 타인에 대하여 실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우리 모두는 다 평범한 사람이다. 때문에 너무 높이 평가할 것도 없고, 또 어떤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고 해서 너무 상심할 것도 없다.
P138 많은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귓등으로 흘린다고 하지만, 이런 현상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를 평상심으로 대하는 수밖에 없다. 곁눈을 팔지 말고,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가 추진하던 '일'을 진행하면 된다. 당신이 나를 질투한다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일만 할 것이다. 당신이 뒤에서 나를 비방한다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일만 밀고 나갈 것이다. 당신이 갑자기 나를 하늘처럼 떠받든다고? 나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내 일에 정진할 것이다. 당신이 사람들을 끌고 와서 나를 공격한다고? 그래도 나는 내 일을 진행시킬 것이다. 나는 내가 이룬 것으로 모든 공격에 대답할 것이다. 바른 마음으로 모든 중상에 회답할 것이다. 나는 무료하고 쓸데없는 분쟁에 눈길을 돌리지 않으며, 자기에 대한 반성을 앞세워 부단히 나를 갈고 닦아 새롭게 완성할 것이다.
P150 무위의 목적은 적당하게 무엇을 하는 것이지, 마냥 잠을 자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펴볼 때 망신을 당하는 사람은 소극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 경거망동하는 사람이다. 망신을 당하는 것은 무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조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헛소리를 치면서 이 세상을 속이려는 사람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 그들은 적어도 잘난 체하거나 제멋대로 날뛰지는 않는다.
P153 온갖 정성을 들여 꽃씨를 뿌렸는데 꽃은 피지 않고, 무심히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물질이 발전해가는 우연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어떤 일을 성사하려고 너무 애를 쓰면 오히려 그 노력이 적당하지 않을 수 있어 구해도 구하지 못한다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P155 일에서 성취를 이루고, 도덕적인 이미지를 확립하고, 능력을 기르고, 늘 배우려고 하는 사람의 인간관계는 양호하다. 그러나 산봉우리 하나를 세우려고, 사욕을 채우려고, 공명과 출세만을 위해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은 그 인간관계는 양호하다. 그러나 산봉우리 하나를 세우려고, 사욕을 채우려고, 공명과 출세만을 위해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은 그 인간관계가 엉망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절대 일방적인 이익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일방적인 지출도 거의 없다. 남들과 사귈 때 한 가지 도움이라도 받았다면, 자기는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P157 이렇게 어느 한 방면에 큰 업적을 이루어낸 사람은 다른 어느 방면에서는 전혀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즉, 어느 한 방면에서는 대가이지만 다른 한 방면에서는 백지 상태일 수가 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기에 장점은 더욱 뚜렷하게 도드라진다. 누구든 정력과 시간을 집중해 한두 가지 일에 정진한다면 반드시 선인의 재능과 지혜를 실현할 수 있고, 천재의 대문을 노크할 수 있다.
P160 사람은 일생동안 정정당당하게 일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것과 옳지 않은 것의 한계를 분명히 정해, 해서는 안 되는 일과 반드시 벗어나야 할 일을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더욱 명랑하게 될 것이며, 명석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더 많은 광명과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암흑과 어리석음의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P165 사람의 일생에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희망하고, 아끼고 그리워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려고 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 나는 이것을 '가치'라고 한다.
P187 얼음이 석 자 깊이로 얼게 되는 것은 하루아침의 추위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 출발선에 있을 때는 사람들의 차이가 아주 근소하거나 거의 없으며, 때로는 강한 것이 약하게 보이고 약한 것이 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20미터를 달린 다음에는 이미 빠르고 늦은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다시 100미터를 달렸을 때는 이미 결과가 보인다. 이 모든 것은 한 발자국 달리는데서 나타난 차이이다. 근본은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있다. 의의는 바로 여기에 위치한다.
P197 동물을 도살하는 순간, 동물의 심정이 아주 나빠지는데, 그때 내뿜은 기체를 수집하여 만든 액체는 아주 독기가 있는 물질이란다. 그렇다면 한없는 적의로 세계를 보는 사람과 모든 것을 적대시하는 사람의 몸에서 생성되는 독즙과 독성분을 띤 분자는 얼마나 나쁠까! 타인을 선하게 대하면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잘 대하는 것이다. 타인의 장점을 많이 생각하고, 자기의 단점을 많이 생각하며 자기를 돌아보면 흐뭇하고 유쾌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이를 마다하겠는가?
P204 우리는 제한된 인생의 그 한 시간 한 시간을 아껴야 한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걸핏하면 소송을 걸고, 걸핏하면 당신에게 200만원을 빚진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눈살을 찌푸려야 하는가?
사는 데 아무런 취미가 없으면, 교류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다. 나는 "악인이 될지언정 아무런 취미도 없는 남자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져 본 적도 있다. 아무런 취미도 없는 배우자와 산다면, 한평생 이런 사람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상상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진다.
P209 어느 사람이 방벽을 쌓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를 솔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며 신임할 마나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보여주더라도 방벽을 쌓지 않은 사람과 사귀면 사귀었지, 자기 약점을 꽁꽁 숨기고 언제나 남을 경계하며 폼이나 잡는 사람과는 사귀려 들지 않는다. 자기의 진실한 감정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심은 신임을 얻을 수 없다. 방벽을 쌓지 않는 것은 자기의 품성과 기본적인 관점, 그리고 뜻과 태도에 자신감이 있으며, 경계, 심계, 학문과 품격, 장기적인 효과 등이 그 어떤 타격이나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군자의 흉금은 넓고 또 넓으며 소인의 속은 언제나 근심하고 두려워 한다" 라는 말이 정말 하나도 틀린 데가 없다.
P211 영문도 모를 재난이 다가왔을 때 당신을 명곡을 감상하고, 꽃과 나무를 가꾸고, 애완견을 기르고, 시 한두 수를 쓰는 것이 좋다. 자기의 특기가 쓸모 없을 때, 당신은 다른 특기를 개발하는 것이 좋다. 내가 신장에서 살 때 나는 창작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나는 위구르어와 한어를 번역하는 일을 했다.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아가는 지역에서 번역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또 관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자신의 특기를 살려 심취하는 것을 보았다. 관직에서는 무러났지만 특기가 자신의 본업이 된 경우이다. 얼마나 멋있는가! 이는 마치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온 것과 같으며, 새가 하늘을 다시 나는 것과 같다. 새로운 생활은 이렇게 시작된다. 회의나 소집하고 공문서나 전달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직장에서 물러나면 정말 말 그대로 공허하고 적막해진다.
P212 정말 아무런 특기도 없다면, 하다못해 한두 가지 취미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꽃을 키우고, 개나 고양이를 기르고, 우표 앨범을 만들고, 마작이나 트럼프를 하거나 요리를 하라. 이 모든 것은 다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한느 것이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취미다. 이러한 자기의 세계가 몇 개쯤 있게 되면, 당신은 영원히 즐거운 왕자가 될 것이며, 불패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와 반대라면 당신은 편협한 사람, 자신만 위한 사람, 식견이 좁은 사람이 될 것이며, 갈길이 없어 한숨을 내쉬며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가련하고 가소롭고 한심한 일인가?
지난주 코엑스 국제도서전에 갔다가 창비의 [창작과 비평]을 정기구독하게 되었다. 정기구독을 하면 창작과 비평 뿐 아니라 창비에서 출판된 책을 한 권 준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분좋은 것은 구독 기간 중에 창비에서 간행된 책이 무조건 50% 라는 사실이다. 그 때, 한 권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런 책을 만날 때면 나는 항상 감사한다. 지금까지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글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것을 보고 읽어도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우리가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험의 차이는 바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한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위의 그림처럼 겉표지는 다들 웃는 모습의 일러스트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면 이 그림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저렇게 다들 웃고 있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표지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들은 책 내용 속에 등장하는 소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반대인 다수에 의해서 침혜되는 소수의 권리에 대해서 인권에 대해서 책의 이야기는 진행되어 진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의 내용을 기반으로 내용이 전개되다 보니 조금 더 흥미롭게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고 읽는 내내 이상하게 내 자신이 부끄럽고 그동안 내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 역시 인권침해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침해되는 소수의 사례는 어떠한 경우가 있는가? 나 역시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대상들을 잠깐 소개하려 한다.
[ 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여성과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검열과 표현의 자유, 인종차별의 문제, 차별의 종착역 제노싸이드 ] 표지 처럼 밝지만은 않은 주제들이다. 각각의 소주제들 안에서도 여러가지 생각할 것들은 너무나 많다. 그중에서 그냥 읽어내려가면서 무언가 나를 건드린 내용에 대해 잠깐 정리해보려 한다.
사람잡는 우생학 히틀러는 영화[300]의 스파르타인들이 꿈꾸었던 '우월하고 건강한 인종의 지배'를 과학적으로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건강한 아이들에게 제3제국의 미래가 있다고 믿었던 히틀러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아이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만이 아리아인의 승리를 위한 필수적 요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찌 의사들에게 치료 불가능한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모두 안락사시키도록 지시했고, 1939년부터 이들에 대한 등록이 시작되었다. 1940년에서 1941년까지 약 5천~ 2만 5천명의 독일인 장애아들이 살해되었고, 최소한 27만 5천명의 성인이 같은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말이 안락사지 대부분은 가스에 의해 살해되었고, 더 효율적인 살해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박스 안에 집어넣고 폭탄을 터뜨리는 참혹한 학살이 자행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27만 5천명이라는 엄청난 숫자도 점령지구 내에서 훨씬 잔혹하게 살해된 비독일인 장애인들을 제외한 순수 독일인만의 수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적장애인만 살해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차 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은 장애인들도 희생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전쟁 수행에 비생산적인 사람은 모두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장애에 대한 각종 편견에 맞서 켐프가 쟁취하려고 했던 것은,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정상이라는 인식이었습니다. 장애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은 언제나 장애인이 정상인에 비해 뭔가 '비정상적'이며 '불완전'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정상적이고 완전한 상태를 먼저 정의한 후,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모두 비정상으로 정의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장애인을 드는 것이지요. 에범 켐프를 비롯한 장애인 운동가들은 장애인도 정상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도 최대한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정상 또는 비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결국 그 대상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개입된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불타오르는 나무 위에 흑인젊은이가 목매달려 있고, 그 주변에 백인 군중들이 모여 있는 사진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1930년대의 린치 장면입니다. 죽어가는 흑인남성은 불에 타서 옷이 그슬리고 온몸은 상처투성이며 얼굴은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백인 남성, 여성, 어린아이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넘쳐흐릅니다 .플래시가 터진 사진 프레임 안에는 기껏 수십명이 있을 뿐이지만, 어둠 속에 보이는 보자들의 그림자로 미루어 볼 때 훨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르완다 제노싸이드에 대해 흔히 90만명이 사망한 하나의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오해합니다. 하지만 제노싸이드는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르완다 제노싸이드는 한 명이 죽은 살인사건이 90만개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피해자와 가해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고, 죽음을 맞이한 상황도 모두 다르며, 지역에 따라 학살의 모습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위에 제시한 것은 위의 여러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 중 장애인과 인종갈등에 관련된 몇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 책의 표지가 너무나도 잔인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이다.
사람은 한 명, 한 명 모두 하나의 우주이다. 세상의 어떤 일 보다 내 생각이 존재하고 사유할 수 있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나의 상실은 바로 모든 것의 끝이요. 우주의 소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감히 누가 그러한 우주를 마음대로 건드린단 말인가! 정말 무섭다. 이런 일을 바로 다수라고 불리우는 평범한 나같은 사람들이 저지른 것이다. 소름끼친다.
우리 인간들은 DNA가 99.95%가 동일하고 단, 0.05% 만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이 0.05% 라는 이 사소함이 99.95%를 과감히 배척하고 차별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 단 말인가! 얼마 전, 신문에 'SKIN'이라는 책 소개를 보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역사가 바뀌었고 인종간의 살육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 피부색은 단지 햇빛에 노출될 경우 피부를 보호하기위해 멜라닌 양이 서로 다르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틀리다' 라고 생각하고, 서로 공존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한 사람이 모두 하나의 우주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아직도 인권은 이 시간에도 유린되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정답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우선 사람은 살고 보아야 할 것 아닌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과연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어떤 이유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정말 삶에서 중요한 질문이다. 사람들은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이러한 중요한 질문 앞을 피해간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바쁘단 말인가? 이런 중요한 질문에 대한 생각없는 바쁨이란 과연 필요한 걸까? 라는 계속적인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많은 책들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바로 진정안 나를 찾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정말 이것이 이상적인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많은 것을 읽어보았는데 아직도 그것을 찾지는 못한 것 같다. 이렇게 계속해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 듯 하다. 이제 서른 한 살의 나이가 되었고 아주 조금씩 나를 찾아가는 것 같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좀 더 깊이 나와 대화해보고, 세상과 부딪히면서 넓게 경험해보고자 한다. 이 순간이 바로 내가 찾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남들이 가르쳐주거나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의미 있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라. 부모님도 선생님도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남의 뜻'에 이끌려 살지, '내 뜻'으로 이끌고 살지, 그걸 결정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나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고, 또 무엇을 하면서 의미를 느끼는지 스스로 찾아서 그것을 해라.
이제 더 이상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아니면 친구들이 많이들 하니까 피라미처럼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고 하지 말아요. 내 주관을 세우고 스스로 독창적인 트렌드세터가 되세요. 기존의 패러다임을 당신이 뒤집으세요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삶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떤 업무적인 성과나 목표했던 것을 달성했을 때도 느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행복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는 가족과 함께할 때, 오랜 친구들과 이런 저런 농담을 하면서 이야기할 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처럼 바로 누군가와 함께할 때이다.
이렇듯,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를 찾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다. 바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를 찾는 것이 자아를 찾는 것 이상으로 힘들 수도 있고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너무나도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불문율이 있다. 바로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대접해주라' 이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조금 손해보더라도 이해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관계의 정립에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관계라는 것은 또한 둘 이상의 인격체가 있고 그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와 소통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바로 상대방이 나와 다르더라도 이해하며, 서로 진심으로 소통을 하고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말은 이렇게 쉽게 한다.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하루하루 노력하는 것이 수양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작년에 읽은 책인데, 오늘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났다. 책을 보니 여기저기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내용은 바로 아래의 내용들이었다.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되새겨보고자 이렇게 적어본다. 책의 첫번째 안 표지에 그 당시 읽고 난 다음에 적은 듯한 글이 있다. "공부도둑이라는 책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할까! 그 이유 중 하나는 70세의 나이에 쓴 책, 책 내용에 그 깊이를 느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항상 '앎'을 추구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 그 당시 읽고 나름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 책이었던 것 같다. 책 읽는 스타일이 기존에 읽은 것을 잘 보지 않기는 한데 이렇게 갑자기 끌리는 경우가 있다. 장회익 선생님의 공부도둑 오늘 자기 전에 내 머리를 맴돌게 한다.
남에게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우리는 심오한 이론을 접하게 될 때 마치 단순한 용어나 수식에 걸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모두 좋은 칭찬과 격려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공적 자체에 아주 적절한 것이 아니라면 효과가 별로 없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아무리 칭찬해 주어야 칭찬받는 사람은 이미 그것이 과장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기분은 북돋울지 몰라도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배움을 위해서라면 나이 어린 자식에게 배우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학구적 자세가 그것이다. 남 앞에 머리 숙이고 배운다는 것은 말로는 쉽지만 자신이 직접 수행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물리학 전체에 대해, 그리고 이와 연결해 개별과목에 대해 그것이 담고 있는 핵심적 내용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잠정적 결론을 자기 언어로 서술하라. 그리고 학습이 진행되는 대로 이것에 대한 수정, 보완을 수행해 나가되 그 핵심은 반드시 유지하라. 이렇게 할 경우 설혹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더라도 핵심은 항상 파악할 수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학점 관리를 해나갈 수 있다.
책 한 권만 잘 읽으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을 120퍼센터 이해하고 했다. 여기서 120퍼센트라는 것은 저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20퍼센트까지 더 얹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학습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후 내 학습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더 이상 역사는 열정만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성만으로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목숨을 아끼지 않을 열정과 함께 역사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그 일을 감당할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지성을 함양시켜 왔는가? 그리고 이것을 통해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가? 아직도 그는 내 속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도 그의 얼굴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외치고 있다. 나를 부활시키라.
학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나는 무슨 학문을 하겠다. 어떠한 문제를 풀어보겠다 하고 생각한 뒤 학문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연한 흥미에 따라 학문을 시작하고 보니 자기가 하고 있는 학문의 내용이 점점 명확해지고 또 자기가 추구하고 싶은 문제도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계획을 미리 하고 싶어도 학문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으면 계획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학문을 해나가면서 물음을 던지는 일 자체가 이미 학문에 크게 한 걸음 들어선 것이다.
현재 2012년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과연 어느 나라일까?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나라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이다. 궁금하다. 이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 (신대륙 이주와 독립전쟁)은 그동안 막연히 알고 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조금의 이해를 도와주는 책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탄생은 나는 몇 가지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콜럼버스, 영국, 청교도, 노예무역, 흑인, 인디언이런 단어로 미국의 시작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인들의 인도를 찾기 위한 신대륙 탐험을 시작으로 서인도제도가 발견이 되고, 아메리카가 유럽인들에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당시 삼각무역 즉,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아메리카로 데려간다. 당시,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의 바람으로 카톨릭과는 다른 교리로 개신교가 등장한다. 그리고 카톨릭의 탄압으로 그들은 아메리카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메리카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곳은 이미 토착민인 인디언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인도에 도착한 줄 알고 그들을 Indian이라고 부른 것도 우스운 일이다. 유럽인들은 장티푸스, 홍역등의 전염병과 잔인한 학살로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같은 방식으로 점령한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아메리카로 데려와 개척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본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통해 미국이라는 신생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개별적인 책들을 통해 역사에 관해 이해하게 되면, 그 많은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진다. 바로 미국의 역사를 통해서 아프리카의 역사를 들여다보게 되고 이를 통해 당시의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포괄적인 세계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게 된다. 미국사 산책은 10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유럽에 대한 역사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듯이, 유럽의 연장선상에 있는 미국의 역사 역시 미국사 산책을 통해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 17세기 말 경 존 바봇은 황금해안 (Gold Coast)에서의 노예우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노예들이 내륙 지방에서 피다(Fida)로 끌려오면 해변 근처의 칸막이방이나 감옥 같은 곳에 수용된다. 유럽인들이 그들을 인수하려고 하면 그들은 넓은 평지로 끌려나와 노예선 의사들에 의해 남자든 여자든 모두 발가벗겨져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몸을 샅샅이 검사당한다. 우량하고 건장하다고 인정되면 한쪽으로 분리되어 빨갛게 달구어진 인두로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회사 마크를 가슴에 찍힌다. 그런 다음 낙인찍힌 노예들이 다시 칸막이 방에 수용되어 배에 실려갈 때까지 대개 10일 내지 15일 정도 기다리게 된다."
노예선의 공간은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노예들은 캄캄한 곳에서 서로 사슬로 엮이고, 배 밑바닥의 습기에 젖고, 배설물의 악취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당시의 문서들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높이가 어깨보다도 낮았기 때문에 그 불행한 인간들은 주위를 돌수도 없고 돌아누울 수 조차 없었다. 더구나 목과 다리가 갑판에 사슬로 묶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절망감과 질식해 죽을 것 같은 공포감 때문에 흑인들은 광포해진다."
▶ 1760년 식민지의 흑인 인구는 약 25만 명이었느데, 노예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급증하기 시작했다. 1795년까지 영국 리버풀 항구에는 노예를 운반하는 배가 100척이 넘었고 그것은 전 유럽 노예무역의 절반에 달하는 것이었다. 1800년까지 1000만명 내지 1500만명의 흑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붙잡혀 왔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잡힌 노예들의 3분의 1에 해당된다. 근대 서구문명이 시작된 시기에 아프리카는 5000만명을 죽음과 노예매매로 잃었으며, 이게 바로 아프리카의 저발전의 이유가 되었다.
▶ 아메리카 대륙에서 독립전쟁이 터졌을 때 조선에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이렇다 할 큰 사건은 없었는데, 1776년 9월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립해 '혁신정치의 중추'로 삼았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규장은 '군주가 지은 글'을 뜻하는 바, 규장각은 본래 왕들의 친필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왕실 도서관이다. 그러나 정조의 혁신의지에 따라 서얼 출신의 실학자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해 신분과 당파를 초월해 선발된 규장각관료들은 탕평책을 추진하는 주요세력이 되었다. 이런 혁신이 좀더 오래 추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새삼스럽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