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한 문장을 처음 발견했을 때 홀로 탄성을 질렀다. 그 이후로 머리 속에 각인되어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어떤 행동을 하기 앞서 다시 한 번 되뇌이는 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머리 속에 각인된 문장 속을 채워주는 새로운 물음을 만났다.

바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생각하는 대로 살려고 하는데, 그 때 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가? 

혹시나 믿고 있던 내 생각이 주체적인 내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가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똘레랑스에 대해서 인상깊게 읽은 다음에 만난 그의 두번째 책이도 하다. 


과연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p24

네 경로(독서, 토론, 직접견문, 성찰)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인 반면,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이지 않다. 독서와 토론, 직접견문과 성찰은 내가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제도교육과 미디어에서 나는 주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객체이며 대상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 중 책을 읽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소수다. 문제는 과거에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날엔 책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제도교육이 보편화되었고 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들의 의식세계는 빈 채로 남아 있지 않고 채워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법의 차이가 아니고 주체적이냐의 잣대가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혹여나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통해서 바람직하고 주체적인 자의식을 만들어 낸다면 그 역시 좋다고 생각된다. 매체와 방법은 분명 위에 제시한 것 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위에 언급된 구분은 어느 정도 개인적으로 공감이 된다.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접했을 때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생각해본다면 한 마디로 '노력없이 그저 받아들인다' 라고 설명하고 싶다.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분명 미디어와 제도교육도 긍정적인 효과는 있겠지만 노력없이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수용하고 뇌리에 박히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익숙해진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할 줄 모른다.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는 것에 서툴기에 누군가 문제를 만들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해답만을 쫓는다. 


P192

20대에 반나치 투쟁에 참여했다고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일흔 살을 앞두고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이 말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내가 어쩌면 가장 위험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떠한지,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모른채 세상에 무심함을 가지고 산다는 게 얼마나 나를 위험한 존재로 만드는지 모른다. 의문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을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우리가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의 생각의 결과물이다. 그 생각의 결과물에 우리도 과감히 우리의 생각을, 의문을, 질문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 언급된 주체적으로 얻게 된 생각의 경로인 독서, 토론, 직접 견문, 성찰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이중 독서는 어느 정도 실천에 옮기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조금 더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토론은 최근에 기회가 되어서 몇 번 할 수 있었는데 내 생각이 얼마나 고정되어 있었고,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들마다 의견이 얼마나 다른지 이렇게 글로는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 경험에서 오는 자극과 충격은 상당하다. 나머지는 직접 견문과 성찰인데 예전부터 고민해오던 부분이다. 하지만 시간의 부족이라는 핑계로 모면해버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한 고민의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읊게 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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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저자 홍세화가 이 당시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아는 것이 주요합니다. 저자 홍세화는 1972년 대학교 재학 시 '민주수호선언문'사건으로 제적당했다가 1977-1979년 '민주투위' '남민전' 조직에 가담했습니다.. 1979년 다니던 무역지사의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으로 갔다가 남민전 사건이 터져 귀국하지 못하고 빠리에 정착합니다. 이후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2002년에 귀국하게 됩니다.


이 책은 저자 홍세화가 당시 택시운전을 하게 된 계기와 택시운전을 하면서 겪은 경험과 생각 등을 엮어낸 수필입니다.  망명 생활 동안의 그의 내면적인 고뇌가 드러나며 그 속에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똘레랑스] 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똘레랑스]란 무엇일까요? 저자 홍세화가 왜 그토록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를 부러워했을까요?


p349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입니다. 흔히 말하듯 한국 사회가 '정(情)'이 흐르는 사회라면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정'의 뜻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기기 쉽지 않듯이,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를 한마디의 우리말로 옮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의 사회적 의미는 애매한 반면, 똘레랑스의 사회적 의미는 명확하답니다. 우리의 '정'은 감성의 표현인 것에 비하여 똘레랑스는 이성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똘레랑스란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입니다.' 프랑스 사전에는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 라는 뜻으로 나옵니다.


그가 부러워하고 원했던 사회는 바로 차이를 인정하는 똘레랑스의 프랑스 문화였습니다. 차이를 '틀리다'의 개념이 아닌 서로 '다르다'라고 인정해 주는 사회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마 그 당시 우리나라가 군사정권의 시대였기에 그 갈증은 목이 타들어가도록 심했을 것입니다. 


20~30년이 지난 우리 사회는 그 차이를 여전히 '틀리다'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틀리다'라는 것은 사람들이 없애거나 고쳐야할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갈등은 이렇게 시작하는 법입니다. 의견과 사상의 차이가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인식이 되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결국 의견과 사상이 문제의 대상에서 벗어나 그 사람을 '틀림'의 대상으로 올려놓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그 '틀림'이라는 이식으로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장과 사상의 논쟁의 시시비비는 따질지 몰라도 그것으로 사람을 미워하거나 증오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쩌면 똘레랑스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p138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또 서로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일단 그의 것으로 존중하여 받아들인 다음, 논쟁을 하여 설득하려고 노력하는데 비하여 우리는 나의 잣대로 상대를 보고 그 잣대에 어긋나면 바로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 글을 끝까지 읽는 독자는 곧 이해하게 되겠지만 그 같은 독선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져리게 느끼고 있던 나조차 그 함정에 빠져 베르트랑을 미워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설득이란 단어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설득하는 사회가 아니다. 강요하는 사회다.' 베르트랑과 나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이 차이를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인지, 없는 사회인지의 차이로 구분한다.

이렇게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에선, 즉 설득하는 사회에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축출하지 않으며 깔보지 않는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 않고 대신 까페에서 열심히 떠들었다. 말이 많고 말의 수사법이 중요시 했다."


우리는 정(情)이 통하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은 어쩌면 우리들이 속한 집단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정이 타인과 타집단에 관통한다면 그것이 감성의 똘레랑스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근현대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차이라는 것은 '틀림'으로 강하게 인식되어 왔고 어쩌면 내면 깊숙히 무의식 속에 아로 새겨져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잃거나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이런 역사는 자연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나와 우리를 위해 타인과 타집단을 인정하지 않게된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그런 아로 새겨진 가슴 아픈 인식을 조금씩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에서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우리 사회로 똘레랑스가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가슴의 생채기가 조금씩 치료되고 사회의 상처가 아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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