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의 책으로 1956년에 발표되어 60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 온 책이며,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아무리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더라도 나에게는 생소한 책이었다. 제목부터 낯설고 아이러니 했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이 오가는 대로 느끼고 교감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랑에 기술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궁금했다. 최근에는 메신저를 분석해서 대화 상대 간의 일종의 '썸'을 타는지 알아보는 어플리케이션도 있다고 하니 그런 종류일까? 60년 전이니 그럴리는 만무하다. 아니면 여전히 연애의 기술에 많이 쓰이는 밀당의 기술을 말하려고 하나, 아니면 제대로 사랑 한 번 못해본 이들에게 권하는 글로 배우는 사랑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책을 펼쳐드는 순간 나의 모든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철학을 논하는 책이었으며, 사랑은 우리의 삶과 긴밀히 닿아있는 끈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인상적인 구절에 줄을 그어가며 읽다가 어느 순간 그만 두었다. 줄을 친 부분이 더 많은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읽어볼 방법 밖에 없다. 그만큼 인상적인 책이었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1)사랑은 기술인가? 2)사랑의 이론 3)사랑의 붕괴 4)사랑의 실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랑을 논하는 지금의 내가 하는 사랑은 어떠한가? 라는 자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1) 사랑의 기술
『사랑의 기술』에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학, 공학기술 혹은 음악, 미술과 같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론적인 측면과 실천(실습)적인 측면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를 더하면 그러한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왜 사랑이 필요한가? 에서 부터 시작해본다. 사람들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자신의 분리되어 있는 실존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그 불안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p24)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2) 사랑의 이론
하지만 그렇게 갈구하는 사랑이 모두 사랑은 아니다. 사랑에도 만족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다는 수동적인 개념이 아닌 먼저 준다는 능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기본적 요소가 있는데 바로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 필요하다. (보호)는 기본적으로 모성애를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된 부분은 '존경'이다.
(p44)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은 존경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공허할 뿐이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 따른다. 기본적인 조건조차 갖추지 못한다면 단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여러 관점의 사랑을 소개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인 '모성애(母性愛)'와 '부성애(父性愛)',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형제애(兄弟愛)',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성애(性愛)',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自己愛)'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의 사랑을 논하고 있다. 이중에서 잠깐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자기애'이다.
(p88)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3) 사랑의 붕괴
'사랑의 붕괴'는 원래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라는 소제목이다.
에리히 프롬은 근대자본주의가 사랑의 붕괴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 하다.
(p119)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 되고 목적 없이 -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붕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버이상에서 애착을 느끼고 어른이 되서도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느꼈던 감정, 기대, 공포를 그대로 애인에게 전가하는 모습, 어떤 이에 대한 우상숭배적 사랑, 영화나 잡지 등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사랑에서 느끼는 감상적 사랑,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회상으로 이어가는 사랑의 추상화, 이러한 신경증적인 사랑의 다른 형태인 자기 자신의 결함을 감추고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이나 결함에 관여하려는 투사적 매커니즘을 가진 사랑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랑의 붕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안타까움, 두려움으로, 심하게는 공포로 바꾸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의 붕괴를 겪는 이는 아마 모를 듯 하다. 그래서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는지 모르겠다.
4) 사랑의 실천
마지막으로 사랑의 실천편이다. 사실 이 부분이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좀더 참신하거나 사랑에 대한 것이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사랑을 삶으로 바꾼다면 '사랑의 실천' 부분도 그지없이 좋을 뿐이다.
우선 사랑의 실천에서 필요한 세가지를 먼저 언급하고 들어가보자. 바로 훈련, 정신집중, 인내이다. (훈련) 현대인의 경우 일을 떠나서는 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일을 떠나서는 일에 대한 훈련에 대한 보상을 얻으려는 듯 최대한 긴장을 풀고 게을러지거나 빈둥거리기를 원한다. 사랑에도 훈련을 할 시간을 내어줄 필요가 있다. (정신집중) 사람들은 한 번에 여러가지를 하려 하고 명상이나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든 사람도 많이 존재한다. (p152)정신 집중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인내) 현대인들은 시간에 대한 조바심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되지 않는다. 이를 알지 못한다면 사실상 정신집중도 또한 사랑의 기술도 배우지 못한다. (p150)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말고는.
수 없이 줄을 치며 읽다가 줄을 치기를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조금의 시간을 보내놓고 다시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나면 다시 기뻐하고, 문장의 단락을 만들고 별표를 치고 모서리를 접었다. 그렇게 이 책을 읽었다. 오랜 만에 개인적으로 너무 좋은 책을 만나서 정리하다보니 평소보다 문장이 길어지고 호흡이 길어졌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게 개인적인 사랑의 표현일텐데. 이 책은 살면서 몇 번이고 읽어볼 책이다. 항상 이런 책을 만나면 조금만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래도 만나긴 했네하는 안도감이 겹쳐흐른다. 고마운 책을 만났다. 에리히 프롬의 글의 배경에 흐르는 듯한 두 단어, '실존'과 '사랑'은 살면서 절대 놓치지 않겠음을 스스로 기약하며 그의 다른 저작들을 탐해본다.
p24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사랑의 이론>
p38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 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p40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p44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사랑에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자식에 대한 모성애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은 책임이 흔히 의무, 곧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일 망의 어원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일 것이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공허할 것이다. 지식에는 여러 층이 있다. 사랑의 한 측면인 지식은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p52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p60
나는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아름답고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어머니에게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나는 현재의 나로서 사랑받는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리라.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이러한 경험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사랑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현재의 상태', 곧 어머니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지복이고 평화이며, 획득할 필요도, 보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은 보답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획득할 수도, 만들어낼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없다면 그것은 마치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벼버린 것과 같다. 어머니의 사랑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p61
아동발달이 이 단계에서 아동의 심상에는 새로운 요인, 곧 자신의 행위로써 사랑을 만들어내려는 새로운 감정적 요인이 생긴다. 처음으로 어린이는 어머니(아버지)에게 무엇인가 '주려는', 무엇이든 - 시나 그림 그밖의 것들- 만들어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이의 생활에서 처음으로 사랑의 관념은 사랑받는 것으로부터 사랑하는, 창조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변한다.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p119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 되고 목적 없이 -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p128
상호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과,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로서의 사랑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표준적 형태다. 사랑의 병리학에는 여러 가지 개별적 형태가 있지만 이것은 의식적인 괴로움에서 생기는 것이고 정신과 의사에 의해, 또한 점점 그 수효가 늘어나고 있는 비전문가들에 의해서도 신경증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경증적 사랑의 기본적 조건은 '애인' 가운데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모두 어버이 상에 애착을 느끼고 있고, 어른이면서도 일찍이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 대해 품고 있던 감정, 기대, 공포를 애인에게 전이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유아적 관계 유형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고, 어른으로서의 애정적 욕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유형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 이 사람은 지능적, 사회적으로는 자신의 생활 연령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애정에 있어서는 두 살 또는 다섯 살, 또는 열두 살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 더 심각한 경우에 이러한 감정적 미숙성은 사회적 유능성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보다 덜 심각한 경우에 갈등은 친밀한 개인적 인간 관계 분야에 국한된다.
p134
흔하지는 않으나 가끔 '위대한 사랑'으로서 경험되는 사이비 사랑의 형태는 '우상 숭배적 사랑'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의 생산적 전개에 바탕을 둔 동일성, 곧 자아를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기 쉽다. 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부터 소외되고 이 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최고 선, 곧 온갖 사랑, 온갖 빛, 온갖 지복을 간직하고 있는 자로서 숭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힘에 대한 모든 감각을 박탈하고, 자기 자신을 찾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p135
사이비 사랑의 다른 형태는 '감상적 사랑'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경험될 뿐, 실재하는 다른 사람과 여기서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러한 사랑의 본질이 있다. 가장 광범하게 퍼져 있는 이러한 사랑의 형태는 영화와 잡지의 사랑이야기나 사랑 노래의 소비자들에 의해 경험되는 사랑의 대상적 만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랑, 합일, 친밀감을 바라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이러한 생산품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을 찾는다.
p136
감상적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은 시간에 의한 사랑의 추상화다. 부부는 그들의 지난날의 사랑 - 비록 이 과거가 현재였을 때에는 사랑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 의 기억이나 미래의 사랑의 환상에 의해 깊은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미 서로 싫증을 느끼면서도 얼마나 많은 약혼자, 또는 신혼부부들이 미래에 있을 사랑의 축복을 꿈꾸는가? 이러한 경향은 현대인의 일반적 태도와 일치한다.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오늘을 살지 못한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어린시절이나 어머니를 회상하고, 또는 미래에 대해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다른 사람들의 가공적인 경험에 참여함으로써 대상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든, 또는 사랑의 경험이 현재에서 과거 또는 미래로 옮겨지든, 이와 같이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고독과 분리감을 완화해주는 마취제로 작용한다.
신경증적 사랑의 또 하나의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결함이나 결점에 관여하려고 '투사적 매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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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천역덕스럽게 무시해버린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개조하기에 바쁜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하면 사랑의 관계는 상호 투사의 관계로 변한다. 만일 내가 오만하거나 우유부단하거나 탐욕스럽다면, 나는 상대방의 이러한 점을 비난하고 나의 성격에 따라 그를 고치거나 처벌하려고 한다. 상대방도 이와 같이 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의 문제를 무시하는 데 성공하고 따라서 그들 자신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 조치를 하는데 실패한다.
p138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환상이다. 어떠한 환경 밑에서든 고통과 슬픔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습관인 것처럼, 그들은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투쟁은 어느쪽 당사자에게도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못하고 오직 서로 파괴해버리는 것 같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이러한 생각에 대한 좋은 이유를 찾아낸다.
그러나 이와 같이 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갈등'이 사실은 '진짜' 갈등을 회피하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갈등은 사소한 또는 피상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고, 이러한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명료해지거나 해결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진짜 갈등, 곧 은폐하거나 투사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그들이 속해 있는 내면적 현실의 같은 차원에서 경험되는 갈등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갈등은 명료해지고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며, 이러한 카타르시스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위에서 말한 바를 강조한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이와 같이 경험되는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거기에 조화, 갈등, 기쁨, 슬픔 중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에센스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요,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되는 것이다. 사랑의 현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곧 관계의 깊이 관련된 각자의 생기와 힘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