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현상학이라는 단어가 계속 들려왔다. 도대체 현상학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간단하게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에서 '현상학'이라는 세 글자를 입력하고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을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되어진 책이 바로『후설&하이데거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이다.
이 책은 스승과 제자 사이인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각각 설명하며 어떻게 서로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책은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았지만, 책을 덮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그래서 도대체 현상학이 뭔데?'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들었다. 현상학은 무엇일까? 아직 한 권의 책으로는 정의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번에는 단순히 물꼬를 튼 것으로 생각하고,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위주로 글을 정리하려 한다.
우리가 보통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동일한 현상과 사건에 대해서 서로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태도가 객관적인 태도인가? 어떤 방식이 올바른 방식인가?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현상의 의미는 늘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 즉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현상'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설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참된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말한다. 어떤 현상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고, 문제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객관적인 태도라는 것이다.(p72)
'사태 자체'란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보는 것이 가능할까? 비록 우리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말은 하지만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후설 역시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후설 스스로도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포함해서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태가 왜 다른 의미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은 바로 그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 즉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의 의식이 해답의 열쇠를 쥐고 있다.(p73)
어떤 현상을 과연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가?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바라 볼 수 있는가?
분명 쉽지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주관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겠지만 주관적인 시선에 더불어서 다른 이들의 시선에 대해서 항상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자신과 충돌되는 지점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해가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사태가 벌어졌다는 현실은 단지 모든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 현실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문제의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사태가 현실적으로 벌어졌다는 제약에서 우리의 의식을 풀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p84)
현재 내 앞에서 벌어진 상황이라던가 눈 앞에 있는 사물들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동일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실제 일어난 현실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몫이 더 큰 법이다. 사건이 벌어졌다는 현실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여러 가능성의 하나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 세계 속으로 던져진, 혹은 상황에 내맡겨진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단지 혼자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언제나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는 존재자다. 이 '더불어 있음'은 현존재, 즉 실존의 또 다른 존재방식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더불어 있다고 할 때, 그 '더불어 있음'의 주체가 누구인지 물어보자.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나와 타인이 함께'일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만약 우리가 그 점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더불어 있음'의 주체는 제3자를 뜻하는 '그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그들'이라는 익명의 주체를 참된 의미의 실존이 아닌, 일종의 타락한 실존이라고 본다. '타락한 실존'이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한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욱 민감해진다. 그것이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민감해질수록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로써 나는 내 행동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 삶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고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 속에 숨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p109)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박제화된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철학적 사색, 혹은 사유다. 오직 철학적 사색만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삼은 그의 단조로운 삶이 보여주듯 사유함이야말로 철학의 주제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물음을 통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전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문제의식이기도 한 물음은 무엇보다 은폐된 것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한다. 은폐된 것이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것, 즉 '탈은폐'가 바로 하이데거에게는 진리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이른바 '이성'을 통해 세계를 규격화된 틀 속에 집어넣어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일, 즉 은폐를 걷어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론은 존재를 존재자처럼 다룸으로써 은폐해온 종래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역할을 떠맞게 된다.(p122)
하이데거 부분에서 인상적인 두 부분이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는 방법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내면에 집중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물음'이다.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에 부족하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숨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열어젖혀서 탈은폐를 시켜야 한다. 닫힌 부분을 치료하려면 우선 살이 째는 고통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스스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감히 탈은폐 시켜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해야 한다.
이 책만으로는 현상학의 정의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언급한 부분 중에 어떤 부분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고 어떤 부분이 의견의 차이가 있는 부분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똑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가오는 부분이 많았다.
1) 어떤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은 수많은 가능성과 의미를 내포한 현실 중 그 가능성, 의미 하나가 나에게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
2)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주관을 전제로 타자의 주관을 인정하는 태도이며 서로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는 태도라는 점.
3)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삶이라는 것은 스스로 성찰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이 내린 판단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4) 사유의 방식은 감춰두었던 의문, 문제 등을 과감히 탈은폐 시킴으로써 은폐를 시켰던 이유들을 하나씩 벗겨내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점, 이것이 곧 사색이라는 점
특히 하이데거의 관점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아서 그의 저작들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저작 중에 <존재와 시간>, <사유란 무엇인가>이 있는데 과연 내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유란 무엇인가>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니 일단 이건 다음에 미뤄야 겠다. 예전에 니체의 그 책을 읽다가 도무지 이해가 안가서 아직도 먼지가 쌓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하이데거 책을 바탕으로 국내 저자들이 다시 풀어낸 2차 도서를 중심으로 읽어야겠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책이 출판사 김영사의 <지식인마을> 시리즈인데 하나의 주제 대해서 두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체가 40권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이 책 한 권을 보더라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이 책을 통해서 우연히 알게 된 시리즈인데 관심가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권 한 권 책을 채워가는 재미도 기대된다.
p72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현상의 의미는 늘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 즉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 현상'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설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참된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말한다. 어떤 현상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고, 문제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객관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p72
흔히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똑같은 사태를 두고 사람들이 저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라거나, '아니, 넌 나랑 똑같이 보고 왜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거니?'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일상적인 대화에 현상학적 통찰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서로 다름 속에서 어떤 동일성을 전제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서로 다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잠깐만! 한 걸음씩 물러서서 생각해봐! 너희들이 그렇게 다르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걸 다 들추어낸 다음에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해보잔 말이야.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하지 말고" 라며 중재할 때 이 일상적인 대화에 등장하는 객관적인 관점이 바로 현상학적 관점의 중요한 핵심을 뚫고 있다.
p73
'사태 자체'란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비록 우리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말은 하지만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후설 역시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후설 스스로도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포함해서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태가 왜 다른 의미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은 바로 그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 즉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의 의식이 해답의 열쇠를 쥐고 있다.
p79
우리의 의식은 일련의 감각정보를 그저 조각난 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정보가 어떤 통일적인 관점 아래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재구성한다. 의식의 이러한 능동적인 활동이 바로 우리가 이 세계가 '이러저러하다' 고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후설은 이러한 의식의 느동적인 활동성이 바로 의식의 지향적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p80
동일한 꽃이지만 생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예술적 작품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어릴 적 기억을 되살리는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잇다. 이것은 곧 하나의 대상이 동시에 여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각각의 대상적 의미들은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한 송이 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꽃과 관련을 맺고 있는 세 사람의 지향적 의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상응해서 꽃의 대상적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p84
현상학이 개별 학문들의 토대를 제공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고자 한다면, 바꾸어 말해서 '학문들에 관한 학문'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의 대상이 어떻게 서로 다른 대상적 의미를 갖게 되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p90
현상학적 방법의 특징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기술(記述)이고 다른 하나는 환원(還元)이다.
기술은 말 그대로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것이다.
일상적인 의식이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그저 기술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대개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그래서 '환원'이라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환원'은 일종의 거름종이처럼 대상을 순수하게 만드는 장치와 같다. 환원이라는 말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인데 이는 우리가 대상을 순수하게 보는 것은 오염시킨 여러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때문에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기위해서는 '현상학적 환원'을 거쳐야 한다.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을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그 설명의 핵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문제가 되는 우리 의식과 대상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p92
우리의 시선을 자꾸 변경해가는 태도를 후설은 '자유 변경'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변경의 과정 속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일단 여기서 기억해둘 것은 우리가 의자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까닭은 의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현실적인 구속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 즉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여러 종류의 제약들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시선을 변경시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환원의 또 다른 축인 판단 중지는 그야말로 주어진 사태를 중립적인 태도에서 보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태도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그 사태는 이러저러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때의 판단은 대개 주어진 현실에 제약을 받는다. 이를테면, 나의 현재 상황이나 문제가 되는 사태의 이러저러한 조건 따위에 제약되어 있기 마련인 것이다. 판단 중지는 우리의 판단을 이러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약에서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현실적인 제약들로부터 우리의 판단을 풀어내면 무엇이 드러날까? 바로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두 나라 간의 전쟁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그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의 객관적인 상황을 제대로 기술해야 하고, 전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정리해보아야 한다. 이때 조심할 것은 관련 사건들을 조사하는 '나'의 상황이다. 사건을 기술하는 '나'가 특정 이해관계 속에서 그 사건들을 봄으로써 사건의 해석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 달리 말해서 문제가 되는 사건들이 '꼭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다. 이렇게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 바로 판단 중지의 효과다.
p93
실제로 그 사태가 벌어졌다는 현실은 단지 모든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 현실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문제의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사태가 현실적으로 벌어졌다는 제약에서 우리의 의식을 풀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p94
내가 믿는 이런 사태들은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특별한 우선권을 가진 현상이 아니라 그저 의식에 마주해 있는 '의미 현상'중 하나일 뿐이다.
p96
이런 질문들을 일반화시키면 이렇다. '도대체 우리는 이 세계를 어떻게 해서 경험할 수 있는가?' 이 세계를 경험하려면 생각해봐야 할 조건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 모두가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들이다. 분명한 것은 사정이야 어떻든 우리가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선험적 관점이란 그런 경험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지 그 가능 근거들을 밝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가능 근거들을 밝혀내려면 내가 경험하고 있는 그 사실에 매여 있어서는 곤란하다. 창밖의 나비에 집착하기만 하면, 어떻게 내가 나비를 경험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업삳. 달리 말하자면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대상 모두를 볼 수 있는 이른바 제 3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실'의 문제가 아닌 '가능성'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p101
후설은 철학을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이성'의 힘을 믿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앗다. 하이데거에게 근대적 의미의 이성은 모든 것을 규격화시켜 버림으로써 인간을 비인간적이게 만드는 시스템과 같았다. 이는 특히 그가 전통 형이상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p105
실존주의의 사상적 경향은 인간을 오직 이성적 존재자로만 규정하는 전통 철학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 초의 험난한 시대를 산 사람들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는 사실이 우리의 실제 삶에서 얼마나 공허한 이야기인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발현될수록 인간의 도덕성 또한 고양될 것이라는 믿음을 낳았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을 좌절시킨 대공황과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과연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면, 어떻게 세상이 이 모양인가?'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자라고 규정한 채 모든 논의를 시작한 근대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인간 존재의 규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아야 하는 인간이었다. 실존주의는 이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아야 하는 인간이었다. 실존주의는 이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파악되는 인간에게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실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실존주의는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해진 사람들ㅇ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우스갯소리로 전혀 책을 읽지 않던 사람들 조차 지성인처럼 보이기 위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끼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비록 하이데거가 존재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인간, 즉 실존을 문제시했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자신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존재론자라고 했지만 말이다.
p109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 세계 속으로 던져진, 혹은 상황에 내맡겨진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단지 혼자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언제나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는 존재자다. 이 '더불어 있음'은 현존재, 즉 실존의 또 다른 존재방식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더불어 있다고 할 때, 그 '더불어 있음'의 주체가 누굴인지 물어보자.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나와 타인이 함께'일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만약 우리가 그 점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더불어 있음'의 주체는 제3자를 뜻하는 '그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그는 '그들'이라는 익명의 주체를 참된 의미의 실존이 아닌, 일종의 타락한 실존이라고 본다. '타락한 실존'이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함께 있을 때, 나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욱 민감해진다. 그것이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민감해질수록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로써 나는 내 행동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 삶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고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 속에 숨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p112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자. 우리의 삶이 미래를 향해 있을 때, 그 끝은 무엇일까? 바로 죽음이다. 흔히 하는 말처럼 우리의 삶이 시작하는 순간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늘 죽음을 향해 달려가도록 해 놓았다. 더욱이 그 죽음은 약속된 순간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 실존이 처해있는 이러한 상황이 바로 그의 삶을 더욱 소중하고 진지하게 만들어준다.
가령 아주 낯선 어느 곳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 낯섦은 친숙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대가인 동시에 나 자신의 존재를 묻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 낯섦은 내게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킬까? 불안이다. 그 어느 것도 친숙하지 않기에 생기는 기분, 달리 말하면 친숙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부터 유래하는 기분, 하이데거는 이 '불안'을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말한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불안, 두려움, 공포 같은 말들을 함께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들을 곰곰이 따져 보면, 어떤 때는 특정한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을 두고 어떤 기분이 들 때가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대상 없이 막연하게 생기는 기분도 있다. 가령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내 눈앞에 나타나서 눈동자를 번득이며 으르렁댄다고 하자. 왠지 불안할까? 아니다. 이 경우에는 두려움과 공포다. 반면 어느 날 밖에 나가려고 집을 나설 때,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왠지 불안을 느낄 때도 있다. 무언인가 빠진 느낌, 바꾸어 말하면 무엇인가가 없는 느낌, 그 무엇은 호랑이처럼 특별한 대상이 아닌,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그저 '그 무엇'일 뿐이다. 이는 마치 친숙한 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불안을 느끼는 것과 같다. 불안은 '있음'을 통해 느껴지는 기분이 아니라 '없음'을 통해 느껴지는 기분이다. 앞서 책상 위의 인형의 예를 생각해보자. '없음'은 존재가 드러나게 해주는 상황이다. 불안을 통해 인간 실존은 존재를 만난다.
p114
사람들이 흔히 추락에 추락을 거듭해서 바닥에 이르면, 오히려 담대해진다는 말을 하곤 한다. 절망과 희망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오늘이 얼마나 소중해질까? 매 순간 죽음에 직면한 듯한 태도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다. 앞서 이야기했던 '그들'의 목소리에 빠져, 내 실존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한 채, 권태 속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진지함으로 오늘을 사는 태도, 그것은 결코 비관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 실존이 미래를 향한 가능성의 존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인간 실존의 진지함은 매 순간 미래를 햐해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거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도박판에서 모두를 거는 올인과 마찬가지다. 그런 순간순간이 모여 오늘을 살고, 그 오늘이 모여 삶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실존의 삶은 고단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늘 '그들' 속에 숨어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포기하는 무책임한 처사일 것이다.
p115
오이디푸스가 이런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난 것은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 당당하게 맞서 나갔다. 자신이 선택했던 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그저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자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그 한계는 인간을 그저 좌절하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그 도전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 말로 가장 솔직하게 자신의 삶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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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박제화된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철학적 사색, 혹은 사유다. 오직 철학적 사색만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삼은 그의 단조로운 삶이 보여주듯 사유함이야말로 철학의 주제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는 물음을 통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전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문제의식이기도 한 물음은 무엇보다 은폐된 것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한다. 은폐된 것이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것, 즉 '탈은폐'가 바로 하이데거에게는 진리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이른바 '이성'을 통해 세계를 규격화된 틀 속에 집어넣어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일, 즉 은폐를 걷어내는 일' 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론은 존재를 존재자처럼 다룸으로써 은폐해온 종래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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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게 철학은 실제적인 삶 자체 안에서 작동하는 인식의 방식이다. 그때그때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 있는 현존재의 실존은 언제나 이미 세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언제나 자신의 '시대'의 철학일 뿐이다.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인류와 그 문화를 염려하고 그에 합당한 대답을 마련해주는 일은 하이데거가 보기에 철학의 임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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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에게는 실제 '사실'에 매여있는 세속적인 주관성이 아니라, 그런 상황적 조건을 넘어 '사실'이 인간 앞에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해명하는 선험적 주관성이 중요한 문제였다.
후설과 하이데거도 그렇다. 서로 다른 두 모습의 두 철학에는 공교롭게도 두 개의 교차점이 있다. 그 하나는 두 사람의 철학이 모두 '현상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추적해 들어가는 문제의식은 상이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근대 유럽 문명을 철저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후설은 '학문'이라는 문제를 통해 근대 유럽의 문화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직면한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고, 하이데거는 '존재' 문제를 통해 기술 문명이 가진 한계와 위기를 들추어내고자 했다. 결국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철학자는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비판했든지 간에, 그들이 살아간 시대의 문제와 대결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