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의 『시대를 훔친 미술』 은 '미술'과 '세계사' 두 분야의 만남이다. 

한 동안 융합(Convergence)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심리학과 문학', '고전과 경영학'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퍼져 나오는 파동의 접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솔직히 이런 종류의 책이 인상적이었던 적은 드물다. 글쓴이들은 대개 어떤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정통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맥락을 이어주는 것으로 그친다. 융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 무언가의 새로움을 기대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미술'과 '세계사' 두 분야를 각각 떼어놓고 읽어보아도 이 책의 깊이와 재미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때 융합이라는 것이 힘을 발휘한다. '세계사'는 '미술'이 만들어지게 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뒷받침해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더 많은 감상의 지점들을 제공해준다. 반대로 '미술'은 어쩌면 살짝 건조할 것 같은 '세계사'의 흐름 속의 단면을 시각적으로 제공해주면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넘겨준다.

 

중세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주요 역사적 사건과 그와 연관된 미술작품을 소개시켜주는 이 책은 다른 책에서 아직 접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숨어있어서 읽고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몇 가지 역사적 사건과 미술 작품들을 소개한다.

 

1488년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판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빠르게 인쇄되어 확산되었다. 필사본으로 책을 만들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책은 이제 부유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게대가 활자본은 필사본과 구전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미덕까지 자랑하며 동일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빠르게 집결했다. 텍스트는 혁명을 가져온다는 논리의 첫 번째 예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르네상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신앙에 대해서도 기존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p107)

 

바티칸은 개신교가 퍼져 나가는 것을 구경만 하지 않았다. 가톨릭 내부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대응한 새로운 운동을 반종교개혁이라고 한다. 교황 식스투스 5세는 반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로마를 새롭게 꾸며줄 건축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예술가들을불러 모은다. 십팔년 간의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를 통해서 가톨릭교의 개혁과 혁신을 다짐하던 시점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 덕분이었다. 개신교가 문자를 선택했다면, 가톨릭은 미술의 강력한 힘을 다시 불러냈다.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은 17세기 바로크미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권위와 영광을 드높이는 화려한 바로크미술이 꽃피게 된 것이었다. (p127)

 

▲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성 베드로의 순교」 (1601)

 

▲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성 베드로 무덤의 덮개 장식(1624)

 

바로크 양식의 회화는 명암대비가 뚜렷하다. 보는 이의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 잡아서 그림 속의 인물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바로크의 예술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얻는 성 베드로의 덮개 장식은 높이가 29미터나 되며 기둥과 덮개는 역동성을 자아낸다. 예전에 배낭여행 중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 간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덮개 장식을 보았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서 부터 압도되었던 나는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는 넋을 잃었다.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티칸의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미술을 앞세운 것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나 보다. 이제는 300년을 뛰어넘어 스페인으로 가보자.

 

▲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1937)

 

피카소는 히틀러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바스크 지역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 습격 사건을 다뤘다. 프랑코의 요청으로 1937년 4월 26일 히틀러 콘도르 군단의 비행대들이 민간인 마을을 기습하면서 감행한 융단 폭격으로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고 마을은 초토화 되었다. 이로써 공화정부군의 퇴로 차단에 성공한 프랑코는 전쟁의 승세를 잡았다. 승리의 대가로 나치는 바스크 지역의 공장과 제강소 대부분을 차지했다. (중략) 나치는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최신 무기의 성능을 아낌없이 실험했고 전쟁의 자신감을 키우며 확대해갔다. 게르니카에서 자행된 참혹한 학살은 국제적인 반파시즘 국제 여론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폈다. 프랑코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여론에 대응하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말 뒤집기에 나선다. 그들은 방어자들이 퇴각하면서 고의로 게르니카 지역을 파괴했다고 거짓 주장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전 세계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스페인에서 자행된 파시트들의 반인륜적인 행위에 분노했다. (p513)

 

『게르니카』는 피카소 생전에는 스페인에 가지 못했다. 1968년 프랑코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가져오고자 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복구될 때 까지 스페인에 자기 작품이 전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었다. 피카소는 프랑코보다 2년 먼저인 1973년에 자기 염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81년 마침내 『게르니카』는 피카소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조국 스페인에 발을 디뎠다. 이후 스페인에 영구 소장되어 타협과 대화라는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지 못해 불행에 빠졌던 역사를 환기하고 있다. (p517)

 

스페인내전은 이념의 격전지였고, 여기에는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네루다, 생텍쥐페리 등 많은 지식인들이 '국제 여단'을 만들어서 파시즘 세력에 대항하기도 했다. 여기서 이들의 작품으로 확장해보면 스페인 내전과 파시즘에 대한 이해를 더 도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위의 두 가지 사례만으로도 '미술'과 '세계사'의 훌륭한 조화, 두 파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신하며 글을 맺는다. 융합은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융합될 요소 개별적인 것들의 성숙 그것이 뒷받침되어야 새로운 빛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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