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내가 바라는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이다.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이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이다. 나는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소로가 말한 것처럼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런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또 그런 나라에서 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 아래에 적혀있는 문구다. 이렇게 국가에 대한 글귀가 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우선 나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자. 국가란 지금까지 나에게 무엇이었는가? 지금까지 국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국가는 나에게 '공기' 같은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공기라는 것에 감사하면서 살지 않았다. 공기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니 어떤 생각을 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국가도 그랬나 보다. 삽십 여 년을 살아오면서 내가 직접적으로 국가의 공권력에 피해를 입거나 반대로 무언가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살아왔다.
노자의 도덕경 中 훌륭한 지도자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제17장)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신의가 모자라면
불신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는]말을 삼가고 아낍니다.
[지도자가] 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 잘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 고.
내가 국가를 공기로 생각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국가의 지도자들이 가장 훌륭한 지도자여서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라서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정치에 대한 외면과 나와 직접적이지 않은 부분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장 좋지 못한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는 아니였나 보다. 그런데 작년부터 불거져서 결국은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를 접하고 나서는 도덕경에 언급된 가장 좋지 못한 지도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나라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에 다시 한 번 분노했다. 정치에 별 다른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현장에 한 번은 몸을 담고 싶어 홀로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었다. 그리고 이후 벌어지는 어이없는 말 바꾸기와 지도자의 품격은 겉 모습 꾸미기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한 모습에 부끄러웠다. 저런 사람이 나라의 수장으로 국민들을 이끈다고?
그리고 다시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를 접했다. 2년 전에 읽고 고이 간직하고 있던 책인데, 세태에 걸맞게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유시민 작가에게 그저 고마웠다. 한 권의 책으로 이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다. 분명 이 책은 쉬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유시민 작가 만의 독자를 생각하는 글쓰기가 다시 한 번 돋보인다.
지금까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순간 순간의 분노와 잘 모르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면,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무언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특히 일곱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막연했던 국가에 대한 개념이 내 머릿 속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 국가가 지금에 이르게 된 과정은 수 많은 역사의 연속선 상에 서 있는 것이었다.
1. 국가를 보는 세가지 입장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2. 국가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플라톤, 맹자, 칼 포퍼)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피히테, 르낭, 톨스토이)
4. 국가 변혁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마르크스, 톨스토이, 칼 포퍼, 하이에크)
5. 진정한 진보 정치란 무엇인가? (베블런, 김상봉, 이남곡, 아리스토텔레스)
6. 국가가 이상으로 삼아야 할 가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니버, 마르크스)
7. 정치인에게 필요한 윤리는 무엇인가? (칸트, 베버, 베른슈타인)
특히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과연 어떤 방법이 맞는 것일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들어서였기 때문이다. 기각을 했다면 헙법재판소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고 다음 대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민주시민으로서 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폭력행사를 동원해서라도 무너진 자존심과 국가를 다시 일으켜야 하는지 지금도 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46
혁명의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어떨 때 민중은 폭력으로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사회혁명에 나서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라스키의 대답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복종하는 데 너무나 잘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다수 대중이 정상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질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첫 번째 조건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그 사실을 민중이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데 특정한 사람들이 반칙으로 부를 축적하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믿을 때, 정의가 짓밟히고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이 확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 혁명의 첫 번째 조건이 갖추어진다.
혁명이 일어나는 두 번째 조건은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비록 사회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 있을 경우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혁명의 역사에서 거듭 확인된 바 있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연구한 학자들은 민중이 폭력행사에 들어가기 전에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주목한다. 사람들이 지배자의 성의를 더는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폭력사태가 찾아온다.
혁명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조건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다른 모든 수단을 남김없이 행사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는 것이다. 이 조건은 특히 입헌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국가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 사회의 기본 질서와 국가운영 방식에 대해서 정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시민을 설득하여 지지를 얻음으로써 국가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정부의 임기가 제한되어 있ㄷ으며 정부를 합법적으로 교체하는 데 적용하는 상세한 법규가 마련되어 있다. 마지막 수단인 폭력행사가 대중의 승인을 받으려면, 폭력에 기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행동방안이 다 사용되었으며, 다른 방법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면 조만간 사회혁명이라는 열병이 국가를 엄습한다.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도 생각해볼 만 하다. 나에게는 부자들은 '보수' 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주변의 어른들은 부유하지 않음에도 압도적으로 '보수' 성향인 분들이 많이 있다는 부분이 언제나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젊은 시절 진보의 기수였던 사람들의 보수로의 선회 또한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p193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보수적이다.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변화된 환경이 무엇인지, 나의 정신적 태도는 어떠한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데 대한 본능적 저항감을 극복하려면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 지배적 생활 양식에 순종하면서 일상적 생존투쟁을 견뎌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에서 주로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이 형성되고 표출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고령층이 청년들보다 더 보수적인 현상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유습성에 노출된 기간이 짧으며 지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왕성하다. 기존의 사유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하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기존의 사유습성은 더욱 강력한 지속성을 지니며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필연이다. 역사의 중대한 고비마다 청년층이 낡은 제도와 지배적 사유습성, 전통적 생활양식에 반기를 드는 주체로 나선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모든 사회에서 청년은 진보적이며 노인은 보수적이다. 고령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앞으로 선거가 열 흘 정도가 남아 있다. 선거 전에 이 책을 만난 것은 나 자신에게는 행운이다. 이제는 자랑할 만한 대통령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칼 포퍼의 말 처럼 '최선의 선택보다 최악의 회피가 더 중요하다' 라는 말을 따르기에는 너무 아쉽다. 이제는 조금씩 세상과 정치라는 것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그래도 국가라는 것이 공기처럼 그저 곁에 머무른다는 것만을 알아 챌 수 있을 정도 였으면 한다. 그러면 노자가 말한 훌륭한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생기게 될 테니...
<국가란 무엇인가 - 합법적 폭력, 고공재 공급자, 계급지배의 도구>
p24
1651년 영국 철학자 토마스 홉스(1588~1679)는 정치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책 가운데 하나인 <리바이어던>을 출간했다. 홉스는 여기에서 '사회계약'을 국가의 기원으로 보는 이론을 세웠다. 홉스의 국가론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인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세속의 신'이다.국가는 숭배하고 찬양해야 마땅한 그 무엇이다. 국가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그로부터 무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국가의 본질에 대한 홉스의 통찰력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현대적 국가이론의 출발점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홉스의 대답은 명확하다. 국가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이다. 그는 국가의 합법적 폭력에 무제한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p27
홉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자기의 자연법적 권리를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함으로써 하나의 인격으로 통일되는 것이 곧 국가라고 하는 위대한 리바이어던의 탄생이다.
이 인격을 가지는 가지는 자는 주권자가 된다. 다른 모슨 사람은 그의 신민, 즉 군주의 백성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주권자가 되는가? 정복을 통해 복종을 강요하거나 합의에 의해 자발적 복종을 끌어내는 사람, 그가 주권자가 된다. 현실에서 주권자는 곧 왕, 그것도 그냥 왕이 아니라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전제군주를 말한다.
p31
'아프리카의 뿔'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대륙 북동쪽의 뾰족 나온 반도에 있다. 소말리아 무장반군은 1991년 포악한 독재를 자행하던 군사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반군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투쟁 때문에 혁명은 곧장 내전으로 번졌다. 크고 작은 파벌과 부족들이 벌인 무력투쟁과 집단학살, 강간, 약탈행위가 난무하는 가운데 소말리아 국민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인구 1,000만 정도인 이 나라에서 내전 발생 이후 20년 동안 40만 명이 목숨을 읽었다. 70만 명이 소말리아를 탈출해 국제난민이 되었다. 나라 안에서 떠도는 난민도 140만 명이나 된다. 유엔과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군이 투입되어 질서유지에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국적군은 결국 성과 없이 철수했고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p35
전제군주가 국가권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통치술 매뉴얼'도 홉스의 이론보다 먼저 나와있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 피렌체의 정치가였던 마키아벨리(1469~1527)의 대표적 <군주론>이 그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스페인의 침략으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의 왕정이 복원된 직후였던 1513년, 이 책을 메디치 가문의 군주 로렌초에게 헌정했다.
p36
홉스의 국가론과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은 잘 어울리는 이론서와 매뉴얼이다. 홉스의 국가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의 통치기술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p37
국가주의 국가론은 국가의 목적을 오직 하나로 규정한다.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그리고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인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국가를 절대화하고 개인을 국가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 체제는 언제나 현실적 또는 가상적 위협에 대한 대중의 공포감을 토대로 성립한다.
p39
그들은 사회 내부의 혼란을 방지하고 '북괴의 침략'을 막는 것을 국가의 절대적인 목표로 설정했고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국민이 아니라 자기가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반대하지만 해놓고 나면 좋아할 것"이라며 국민이 압도적으로 반대하는 사업을 밀어붙인 어느 대통령의 말에 깔린 철학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 평등권과 노동권은 법질서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통치권을 위협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 공산집단의 침략 위협과 북괴의 지령을 받는 친북용공세력이 야기하는 내부적 혼란'에 대한 실제적인 또는 조작된 대중의 공포감을 이용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했다. 이런 공포감은 21세기 첫 10년이 다 지나간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들의 의식 저변에 짙게 베어 있다.
p40
국가주의 국가론은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위험한 '전체주의 국가론'으로 간주된다.
p41
국가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사람과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이념형 보수'가 적당할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나 마르쿠스주의 국가론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념형 보수'를 무식하다고 경멸하거나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현실과 희망사항을 잘 구별하지 못한 소치일 가능성이 높다.
p48
전제군주제 국가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던 국가주의 국가론이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국가를 꿈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한 것을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사태였다. 이 사상적 도전을 현실의 승리로 전환하는 데 기여한 철학자와 정치가는 숱하게 많지만, 대표적인 철학자로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이다.
로크는 시민들의 동의에 의거하여 법에 따르는 통치를 주창했다. 스미스는 사회의 부를 증진한다는 목표 아래 국가가 시행한 자의적 간섭과 특권의 철폐를 제안했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어떤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기본권을 내세웠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선을 행하려 하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핵심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산업사회와 문명국가에서는 자유주의 국가론이 지배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도 모두 자유주의 국가론에 입각해 만들어졌다.
p49
로크는 사회계약을 어느 한 사람이나 추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다수파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다수파의 대표로서 최고 권력인 국가의 입법권을 장악한 사람은 즉흥적이고 임의적인 명령이 아니라 국민에게 공포되어 널리 알려지고 항구적으로 확립된 법률에 의거하여 통치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공평하고 정직한 재판관들이 법률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 국가의 힘은 나라 안에서 이러한 법률의 집행을 위해서만 행사해야 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략에서 공동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국가권력은 국민의 평화와 안전, 공공의 복지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로크의 주장이었다.
p50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원칙이다. 법치주의는 통치받는 자가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한다. 권력자가 주관적으로 아무리 선한 의도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헌법과 법률이 그에게 위임한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 헌법과 법률이 정한 방법의 한계를 넘어서 그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권력행사를 하지 말라는 것, 이것이 바로 법치주의이다.
p53
스미스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이끈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 수입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신이 진실로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즟진시킨다." 국민을 부자로 만들고 싶으면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자의적인 간섭과 규제를 철폐하라고 한 것이다.
p55
국가는 세속의 신이 아니라 공공재 공급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국가가 공공선을 진작한다는 명분으로 가하고 있던 강제와 규제, 특권을 폐지하는 것이 공공선을 이루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 이론이 옳다면 국가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통치권자가 판단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국가론은 존재근거를 통째로 상실하게 된다.
p58
루소에 따르면 공동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의 자격을 유지하려면 자유를 지켜야 하며, 자유로운 개인 없이는 국가주권도 성립하지 못한다.
p59
루소는 법치주의에서 이탈한 독재정권과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쿠데타의 정치적 정당성을 모두 부정한 것이다. 루소의 이론에 따르면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은 모두 법치주의를 위반하고 법 위에 군림한 정부에 대한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보아야 한다.
군주가 폭군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입헌군주제의 군주여야 한다. 이것이 루소가 말하고자 한 결론이다.
p60
루소는 불평등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헤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썼다.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의 근원이 경제적 불평등에 있으며 수천 년에 걸쳐 고착화된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펼친 급진적 정치이론의 배후에는 이런 근본주의적 사회인식이 놓여있었다.
p61
정부에는 주권이 없다. 주권은 국가에 잇다. 정부가 권력을 남용할 경우 관련 규정이 있으면 문책당할 수 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초월하는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진다는 사상은 정치행위의 기초로서 법치주의가 자의적 재량을 대체한 모든 나라의 핵심이념이다.
p62
자유주의 국가론에 가장 넓고 깊은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었다. <자유론>을 통해서 밀은 자유주의 국가이론을 철학적으로 완성했다.
p63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밀은 자유의 기본 영역을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다. 우리는 실제적이거나 사변적인 것, 과학. 도덕.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의견과 주장의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둘째는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이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에 맞는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한다.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거나 잘못되거나 틀린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이유를 내세워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셋째는 결사의 자유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그리고 강제로 또는 속아서 억지로 끌려온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은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정부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 가지 자유가 원칙적을고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자유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완벅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64
밀은 그중에서도 특히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침묵을 강요하면 인간과 사회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옳지 않은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될 것이다.
p65
밀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었다. 개인은 공동체의 부속물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이다. 개인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설혹 그것이 그 사회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나 사회도 그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제약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p69
소로는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글에서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는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라는 말을 믿었다.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정부가 바로 그런 정부이지만 대부분의 정부가 거의 언제나 불편한 정부이고 모든 정부가 때로는 불편한 정부라고 생각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다음 고향에 돌아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글을 쓰며 살았던 소로는 미국 연방군이 멕시코를 침략해 영토를 빼앗고, 자기가 살던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노예제도를 수호하는 조처에 예산을 쓰는 것을 보고 세금납부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친척이 세금을 대납한 덕분에 하룻밤만 지내고 감옥을 나왔지만, 그는 악을 저지르는 매사추세츠 주와 미합중국에 대한 귀속과 복종을 거부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p70
'시민의 부록종'은 자유주의자가 악을 저지르는 국가에 저항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소로의 생각과 행동은 단기간에 국가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긴 세월 지속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켜 국가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레프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킹, 넬슨 만델라가 소로의 길을 따라갔다. 자유주의 국가를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국가에 대한 소로의 생각은 단순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평화주의와 생태주의 등 더 넓고 다양한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것이 무엇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정부였다는 점에서, 그의 국가론은 분명한 자유주의적 색조를 띠고 있었다.
p77
국가권력도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조직한 힘일 뿐, 인민이 사회계약을 통해 세운 공동의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지배계급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국가론은 '도구적 국가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예전의 철학자들은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 바탕 위에서 국가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 목적을 잘 실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p80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토대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임금노동을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이다. 국가는 이 생산관계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형성된 법률적, 정치적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p81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그 자체가 소멸의 길로 들어선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자본가 개인에게서 '연합된 개인'인 사회로 이전하면, 계급의 차이가 사라지고 국가권력도 정치적 성격을 상실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운데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배계급이 되며,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폐지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 대립의 존립조건과 계급 그 자체를 폐지하고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급지배도 폐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계급과 계급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예언 또는 전망이었다.
p85
포퍼의 해석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의 방법론이 아니라 순수한 역사이론일 뿌 ㄴ이다.
마르크스는 어떻게 하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지, 국가권력을 탈취한 이후 어떻게 사회를 재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킨 직후 레닌이 깨달은 바와 같이, 마르크스 주의는 실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레닌이 "이런 문제를 취급하는 사회주의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레닌이 실시한 소위 신경제정책과 5개년 계획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아무 관계가 없다. 마르크스의 저술에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배분되는 사회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되는 사회로"라는, 아무 소용없는 슬로건말고는 사회주의 경제에 관한 말이 한마디도 없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심각한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정치 무용론과 정치적 냉소주의다.
p90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 위력은 거의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의 생명력만은 다 타버린 것처럼 보이는 화로 밑바닥에 작은 불씨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p96
어떤 능력을 가져야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인민들에게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가질 수 있는가? 적절한 답변을 가장 쉽게 제시한 인물은 미래학자로 유명한 앨빈 토플러였다.
무엇이 사람들과 전체 사회로 하여금 '강자'의 뜻에 순종하도록 만드는가? 완력, 돈, 정신의 삼위일체다. 최대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이 세 가지 수단 모두를 현명하게 연결하여, 고통스러운 처벌의 위협과 달콤한 보상의 약속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애초 권력의 원천은 주로 완력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돈이, 그다음에는 지식이 점차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미래에 인류의 모든 조직체에서 전개될 권력투쟁의 핵심문제는 지식이다 .지식 그 자체는 최고 품질 권력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물리력과 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지식은 과거 금권과 완력의 부속물이었으나 이제는 그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 완력에서 돈으로, 그리고 돈에서 지식으로. 토플러는 이것을 인류 문명을 관통하는 보편적 권력이동 현상으로 규정했다.
p97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목적론'이라는 철학의 기초 위에 서 있다.
p97
플라톤은 만물에는 모두 그 고유의 텔로스 (목적) 가 있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국가의 텔로스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정의였다. 국가는 정의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는 무엇인가? 플라톤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국가에서 찾은 다음 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했다. 만약 국가가 건강하고 강하고 통합되고 안정되어 있다면, 그 국가는 정의롭다. 국가가 정의롭게 되려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텔로스를 충실하게 실현해야 한다. 지배자는 지배하고, 전사는 싸우고, 노예는 일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정의를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계급관계에 근거를 둔 완성된 국가의 한 성질로 간주했다. 이것은 정의에 관한 우리의 관념과 크게 다르다. 우리는 계급특권이 없는 것을 정의라고 하지만, 플라톤은 계급특권을 정의라고 했다.
p98
플라톤은 국가가 자기의 텔로스를 실현하려면 국가의 주권을 철학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철학자는 단순히 철학을 탐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아는 사람이다. 플라톤의 철학자는 겸허하게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은 다 안다는 거만한 진리의 소유자이다. 그는 영원한 천국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보고 그것과 교류할 수 있다. 지혜로나 능력으로나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는 신과 같다. 신은 아니더라도 신성한 존재이다 .전지전능한 자에 가깝다. 그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라 철인왕이다. 결국 플라톤이 요구한 것은 학식의 지배 또는 현자의 지배였던 것이다.
p100
맹자가 말하는 덕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측은지심, 나와 타인의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수오지심, 사랑과 정을 다른 사람에게 적절히 표현하는 사양지심, 그리고 그런 마음을 때와 장소에 따라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시비지심이다.
p101
백성들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인의로 사람을 대하는 덕치만이 군주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이것이 이른바 왕도정치론이다.
통치하는 자의 개인적 능력만이 아니라 그의 지도력에 대한 대중의 승인이 국가권력의 정통성과 안정성을 좌우한다고 보았다. 맹자는 군주를 민심의 바다에 뜬 배와 같다고 보았다. 물을 거스르면 배는 뒤집어진다.
p102
목적론은 철학 발전의 초기단계에서 널리 통용되던 관념론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학의 법칙을 적용하면, 목적론은 지성이 아직 제대로 발달하기 전인 어린아이들이 애용하는 사고방식이다.
p104
플라톤이 <국가>에서 소개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요약해보자.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이다. 모든 정권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삼아서 법률을 제정한다. 민주정체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주정체는 참주체제의 법률을, 그 밖의 정치체제도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한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자기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에게 올바른 것으로 공표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나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자로 처벌한다. 그래서 정의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권의 편익이 정의로운 것이다. 정치 권력이 힘을 행사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올바른 추론이다.
p106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정치철학이 다루어야 할 올바른 질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 을 잘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범위 안에서 합법적 수단으로만 통치하도록하는 법치주의, 언론.출판.사상.표현.집회.시위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은 법률로도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도록 한 헌법, 입법부와 사법부를 행정부와 분리하여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도록 하는 삼권분립, 감사원과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예방하고 시정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는 독립적 국가기관 설치, 복수정당제와 같은 제도화된 권력분산과 상호견제 장치가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핵심이 된 것은 모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p109
우리는 플라톤이나 맹자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라는 것이 정치철학의 핵심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실시하면 때로는 선하고 훌륭한 인물이 권력을 잡기도 하고, 때로는 위선적이고 사악한 인물이 권력을 잡기도 한다. 그러나 주권재민 사상과 법치주의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잘 가꾸기만 한다면, 위선적이고 사악한 인물과 정치세력을 국민이 언제든 합법적으로 징계하거나 해고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인간이 발명한 가장 부작용이 적은 정치제도라는 점을 알고 주권자로 참여하여 그것을 발전시켜나가는 일이다.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p116
애국심은 다른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다. 사랑의 대상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이다. 국가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물리적 폭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행사한다. 다른 어떤 사랑의 대상도 국가와 같지 않다. 그래서 애국심도 다른 사랑의 감정과 다르다. 폭력조직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폭력에는 정당성과 합법성이 없다. 국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동창회, 향우회, 종친회, 가수나 프로축구팀 팬클럽, 정당들 사이에도 은근한 또는 치열한 경쟁이 있다. 하지만 어떤 경쟁도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다. 오로지 국가만이 국민에 대해서, 다른 국가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간주될 수 있는 폭력을 행사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일 수 있는 애국심 뒤에는 결코 사랑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야비한 얼굴이 숨어 있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또는 혐오감이 그것이다. 애국심은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감정이다. 국가는 때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과 학살이라는 끔찍한 참화 속으로 몰아 간다. 다른 어떤 사랑의 감정도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르도록 사람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애국심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애국심을 발현하는 최고의 형식은 국가를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거나 실제로 죽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한 사람들을 애국자 또는 국가유공자라고 부른다. 모든 국가는 이런 애국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추앙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는 악을 저지른 인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예컨대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의 대표 애국지사이지만 많은 일본 국민들은 그분들을 테러리스트나 암살범으로 간주한다. 안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국민에게는 애국자이지만 우리 국민은 범죄자로 여긴다. 이 모두가 애국심이 지닌 두 얼굴 때문에 생기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군인들에 대해서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각각 자기 쪽의 군인들만을 애국자로 받는다.
p118
폭력을 독점한 하나의 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이 바로 영토이다. 하나의 영토는 둘 이상의 권력에 동시에 귀속될 수 없다. 권력의 배타성이 그 자체가 배타적인 국경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영토는 국경의 기능에 의해 주권의 필수적 구성요소이다.
애국심이 성립하려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외부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p119
다른 국민국가들도 다르지 않다. 예컨데 프랑스는 잔 다르크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프랑스'라는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계기는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엿던 백년전쟁이었다. 열일곱 살 소녀 잔 다르크가 이 전쟁의 막바지에 벌어진 오를레앙 전투에서 절대적 열세에 있던 프랑스군을 이끌고 잉글랜드 군을 격파함으로써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포로로 잡힌 후 잉글랜드가 지배하던 노르망디 지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겨우 열아홉 나이로 화형에 처해졌던 문맹 소녀 잔 다르크는 프랑스 애국주의의 화신이 되었다. 프랑스라는 단어는 그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영국의 침략과 지배가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민족적 자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자아는 항상 다른 자아와 대비되어 창조된다.
p125
피히테는 모든 어린이에 대해 강제적이고 보편적인 국가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독일 사회를 완전하게 재구성하고 싶었다. 그에게 국가는 단순한 국가가 아니다. 국가는 영원성을 보증하는 세속의 시닝다. 이 세속의 신이 인간의 아들딸을 부모에게서 일시적으로 빼앗아 집단 생활과 대중교육의 축복 속으로 집어넣는다. 어린이들은 여기서 살아 있는 언어로 애국심을 교육받아 국가의 목표와 자기 자신의 삶의 목표를 동일시하는 애국적 독일 국민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정신의 혁명을 경험한 국민들은 자유를 되찾은 후에도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조국을 위해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간다. 이러한 교육제도가 영속되면 개인은 죽어 없어질지라도 민족과 조국은 영속한다. 태양 아래 영원한 것이 없다는, 모든 헛되고 또 헛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영원성은 오로지 민족과 조국뿐인 것이다. 따라서 애국심은 단연, 인간이 지녀야 할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고귀하다.
p126
피히테의 보편적 국가교육은 나치 시절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청소년 세뇌 교육 조직을 통해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권력자들이 국가가 국민을 교육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믿었던 유신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실현되었다. 국가가 만들어 교실마다 붙여두고 학생들로 하여금 강제로 전문을 외게 했던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국가가 국민을 훈육해야 한다는 발상의 산물인 이 '발칙한 헌장'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가탇.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내가 세상에 나온 목적을 친절하게도 대통령이 정해준 것이다. '민족중흥'이라는 국가의 목표는 곧 나의 개인적 인생목표가 되었다. 피히테는 단순한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는 교육 또는 세뇌를 통해 온 국민의 삶을 획일적 국가목표에 종속시키려 했던 전체주의자였다. 애국심과 국가주의, 애국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는 쉽게 오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있다. 피히테는 그 길을 주저 없이 걸어갔다.
p128
애국심에 대해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다. 자기 마음의 평정과 재산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면서 적의 침략과 학살에서 국민을 보호한다는 신조이다. 애국심은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침략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던 시절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미 2,000년 전에 인류는 인류의 지혜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승들을 통해 형제애라는 높은 차원의 개념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인간의 의식 속에 더욱더 깊숙이 침투해 오늘날 매우 다양한 형태로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산업이나 무역, 예술, 과학의 연계성이 커지면서 사람들은 서로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이웃 국가의 침략이나 정복, 학살이라는 위협은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국민들이 함께 평화 속에서 상호 협력의 원칙에 따라 상업적, 산업적, 예술적, 과학적 우호 관계를 이루며 살고 있다. 따라서 애국심이라는 낡은 감정은 점차 수그러들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인류에게 해만 되는 이 감정이 계속 존재할 뿐만 아니라 더욱더 격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p129
톨스토이는 비뚤어진 애국심이 아니라 애국심 그 자체를 악으로 보고 있다.
p130
일본 총리와 각료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 한국과 중국의 정부와 언론은 화를 내고 비판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쟁범죄자들의 위폐가 있다. 그들은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영토를 강점하고 압제와 학살을 저질렀던 침략전쟁의 주역이다. 총리와 각료가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곧 그들의 범죄를 애국적 행위로 받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그들을 애국자로 추앙한다면, 그것은 언젠가 기회가 올 경우 또 다시 침략전쟁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웃 나라 정부와 국민들이 비판하는 것이다. 그와 달리 독일은 수도 베를린에 홀로코스느 기록관을 만들어 나치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매 순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침략전쟁을 벌인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죽은 독일 군인들을 애국자로 추모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들의 행위와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구분하지 ㅇ낳고 국가의 명령을 따르다가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들을 애국자로 예우한다. 호전적이고 맹목적인 애국심과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p132
우리 겨레가 한반도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다시 국가적 통일을 이룬다면 한국전쟁의 처절한 악몽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 기억이 계속해서 힘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
p134
이렇게 보면 독일어를 쓰는 주민이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들어 주민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알자스와 로렌 지역을 독일에 편입시킨 프로이센의 행위는 부당한 것이다. 르낭이 그 지역을 반드시 프랑스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는 영토와 국경선을 설정할 때는 주민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주민들에게 어디에 귀속되기를 원하는지 물어보라는 것이다. 주민들은 그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한 민족은 결코 그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병합되거나 압류될 수 없다. 르낭은, 이런 주장을 가리켜 단순하고 유치한 방법으로 외교와 전쟁을 대체하라는 보잘것없는 이념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지나갈 것이며, 아무 결실 없는 노력을 많이 한 후에야, 사람들은 경험으로 검증한 겸허한 해결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미래에 옳은 편에 서기 위해서 시류에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참고 받아들였다.
p135
피히테와 르낭, 톨스토이는 애국심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했다. 피히테에게는 '살아 있는 언어'가, 르낭에게는 '함께 귀속되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했다. 톨스토이에게 민족애, 조국애 또는 애국심은 이성으로 근절해야 하는 유해하고 근거 없는 허위의 감정이었다.
<혁명이냐 개량이냐>
p142
사회혁명론부터 시작해보자. 모든 국가는 인민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복종을 거부하는 자는 폭력으로 응징하며 순종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약속한다. 그런데 때로 인민은 복종을 거부하고 힘으로 대항하여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질서를 변혁한다. 이것이 혁명이다. 혁명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폭력행사를 포기하지 안흔ㄴ 한 반드시 폭력을 동반한다. 평화적 선거를 통해 넬슨 만델라에게 권력을 양도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부와 스스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열였던 동독 정부의 사례는 희귀한 예외에 속한다. 이 두 국가는 사회 질서의 혁명적 변화를 겪었지만 권력자와 민중 어느 쪽도 결정적인 국면에서 폭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폭력 중에서 낡은 국가권력이 발 딛고 있던 사회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혁명이 사회혁명이다.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프랑스대혁명, 레닌이 지도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혁명이 사회혁명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사회혁명은 엄청난 폭력과 내전, 학살을 동반했고, 국가와 사회의 기본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엇다. 이것은 좋은 길인가? 좋든 싫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인가? 그렇다면 사회혁명은 언제,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p143
자본주의를 타도한 사회주의 혁명은 고도로 발전한 산업국가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같이 뒤떨어진 농업국가에서 일어났다. 동유럽 사회주의 혁명은 사회 내부에서 발생했다기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연 속에서 동유럽을 점령한 소련 군대의 물리적 지배력에 의해 이식 된 것이었다.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 또는 인민민주주의 혁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만 돌았을 뿐 정작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로 발전한 영국, 프랑스, 미국과 같은 산업국가에서는 사회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가 단순한 계급지배의 도구가 아니며, 물질적 이해관계의 대립이 사함의 정치적 행위를 결정짓는 유일한 변수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국가에 대해서, 국가를 바라보는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 너무나 낙관적이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p146
혁명의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어떨 때 민중은 폭력으로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사회혁명에 나서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라스키의 대답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복종하는 데 너무나 잘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다수 대중이 정상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질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첫 번째 조건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그 사실을 민중이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데 특정한 사람들이 반칙으로 부를 축적하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믿을 때, 정의가 짓밟히고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이 확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 혁명의 첫 번째 조건이 갖추어진다.
혁명이 일어나는 두 번째 조건은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비록 사회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 있을 경우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혁명의 역사에서 거듭 확인된 바 있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연구한 학자들은 민중이 폭력행사에 들어가기 전에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주목한다. 사람들이 지배자의 성의를 더는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폭력사태가 찾아온다.
혁명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조건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다른 모든 수단을 남김없이 행사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는 것이다. 이 조건은 특히 입헌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국가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 사회의 기본 질서와 국가운영 방식에 대해서 정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시민을 설득하여 지지를 얻음으로써 국가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정부의 임기가 제한되어 있ㄷ으며 정부를 합법적으로 교체하는 데 적용하는 상세한 법규가 마련되어 있다. 마지막 수단인 폭력행사가 대중의 승인을 받으려면, 폭력에 기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행동방안이 다 사용되었으며, 다른 방법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면 조만간 사회혁명이라는 열병이 국가를 엄습한다.
성공한 사회혁명이 일어난 모든 곳에서 국가는 썩은 문짝처럼 부패하고 허약하다.
p150
프랑스대혁명은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전쟁과 황제 등극, 반혁명과 왕정복고로 귀결되었다. 러시아혁명은 스탈린의 참혹한 독재와 동서 이데올로기 전쟁을 낳았다. 중국혁명은 대약진운동을 거쳐 문화대혁명이라는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졌지만, 지금 중국 사회는 공산당 일당독재 하나를 제외하면 혁명이 지향했던 이상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 혁명들에 대해서 독자들은 각자가 나름의 규범적 판단을 할 것이다.
p151
권력기관이 존재하는 한, 모든 부는 계속해서 권력자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톨스토이는 혁명이 권력기관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p152
아무리 생각해도 세속의 해법을 찾을 수 없었던 톨스토이는 결국 종교적 해결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각자가 욕망을 줄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의 계시하고, 부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속적 욕망의 구멍을 막는 것 말고는 집 안 골고루 열을 보낼 방법이 없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얻은 결론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훌륭하게 사는 세상을 원했다. 사람들 사이에 훌륭한 삶이 존재하려면 먼저 사람들이 훌륭해져야 한다. 사람들을 훌륭한 삶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스스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삶을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수양하면서 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실천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p154
포퍼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는 혁명에 '플라톤식 접근법에 입각한 유토피아적 공학' 이라는 독창적인 이름을 붙였다. 플라톤적 접근법이란 '정치문제에 대한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의미한다. 플라톤식 접근법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합리적 행위는 어떤 목적을 가진다.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면 먼저 목적을 설정해야 한다. 정치활동의 영역에 이것을 적용하면, 어떤 실제적 정치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궁긍적인 정치적 목적이나 이상국가의 모습을 정해야 한다. 원하는 사회의 청사진을 손에 쥐어야,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과 수단을 고려하고 행동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것이 합리적 정치운동의 필수적 예비행위이며 사회공학의 준비작업이다. 설득력있고 매력적인 접근법이다.
p155
탐미주의적 열광은 이성과 책임감, 남을 도우려는 인도주의적 충동에 의해서 억제될 때만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경증이나 병적 흥분상태로 발전하기 쉬운 위험한 열광이 된다.
그가 점진적 공학이라고 이름 붙인 사회개량의 길이다. 점진적 공학을 채택하는 정치가는 이상적 사회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최대의 궁극적 선을 추구하고 그 선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최대의 악과 긴급한 악에 대항해서 투쟁한다. 그런데 사회생활은 너무 복잡하다.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유토피아적 공학의 청사진이 정말 좋은 것인지, 만인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 어떤 실현방법이 있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반면 점진적 공학의 청사진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건강보험, 고용보험, 불경기대책, 교육개혁과 같은 단일제도에 대한 청사진이다. 이것은 악용 위험이 적고 잘못될 경우 조정하기도 쉽다. 게다가 이상적 선과 선을 실현하는 수단에 대한 합의보다 현존하는 악과 악을 퇴치하는 방법에 대한 합의가 더 수월하다. 합리적인 타협안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고 민주적 방법으로 문제를 개선할 수도 있다. 이것이 점진적 공학의 장점이다. 유토피아적 공학은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 중앙집권을 요구하며 독재로 흐르기 쉽다.
p156
사회혁명이라는 유토피아적 공학이 논리적 비판을 이겨내려면 두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첫째, 최고의 선 또는 이상적인 사회가 어떤 것인지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결정하는 합리적인 방법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수단이 무엇인지 절대적이고 확실하게 결정하는 합리적 방법이 있어야 한다. 유토피아적 공학 신봉자들 사이의 건해 차이를 해소할 합리적 방법이 없다면, 이성이 아니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이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거나 언제까지나 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회 전체를 재구성하는 일은 경험과 지식의 제약 때문에 그 셀제적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 너무나 전폭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포퍼는 그런 야심만만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제적 지식이 인간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p157
포퍼는 마르크스와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자멸한다."
포퍼는 경제력 권력을 가진 사람, 다시 말해 자본가와 부자들이 경제적 약자의 자유를 강탈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강요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팽개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간섭해야 한다.
그러면 국가는 어떻게 간섭해야 하는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보호제도의 '법률적 틀'을 설계하는 제도적 간섭이다. 단결권을 비롯한 노동3권 보장, 해고 보호, 유아노동 금지와 모성 보호, 산업안전과 산업보건을 위한 규제, 법정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제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시장에 대한 국가 규제가 모두 이 제도적 간섭에 포함된다. 둘째는 통치자가 설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어떤 범위 내에서 조처를 취하는 '대인적, 직접적 방법' 이다. 이것은 국가권력이 구조가 아니라 과정에 개입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부당하게 경제적 약자의 자유를 침해하고 착취하는데도 이를 시정할 법률과 제도가 마땅치 않을 때, 국가는 정치적 권고와 협조 요청이나 국세청,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을 활용한 압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적 간섭주의는 언제나 제도적 방법을 우선적으로 택하며, 이것이 부적합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직접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p159
포퍼는 피지배자가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지배자로 하여금 경제권력을 통제하게 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나서서 막강한 경제권력을 가진 재벌이 그 힘으로 노동자와 국민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경제적 강자가 노동자와 거래업체와 소비자를 부당하게 착취하는 일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모조리 '반시장정책' 이라고 비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임원들은 포퍼의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p160
포퍼가 모든 폭력혁명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폭력혁명도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물론 그 혁명은 사회혁명이 아니다. 독재를 타도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혁명이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이나 '다수의 지배'와 같은 모호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통치자에 대한 공적 통제를 허용하고, 피통치자가 통치자를 해고할 수 있게 하며, 통치자의 의사에 반하는 개혁을 폭력행사 없이 피통치자들이 할 수 있게 하는 일련의 제도적 틀을 의미한다. 폭력의 사용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폭군 치하에서만 정당하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오로지 하나, 폭력 없이 개혁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폭력적 수단으로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할 수 없다.
p161
개량과 혁명에 대한 포퍼의 견해를 요약해 보자. 유토피아적 공학인 사회혁명은 사회 전체의 근본적 재구성을 추구하지만, 인간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의 제약 때문에 더 큰 악을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최고의 추상적인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긴급하고 구체적인 악과 싸우는 점진적 공학이다. 점진적 공학의 필수조건은 피통치자가 통치자를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제도이며, 독재가 이 가능성을 차단할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폭력혁명도 정당하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통해서 어떤 선을 어디까지 실현할 수 있을지는 선험적으로 예단할 수 없다. 그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점진적 공학으로는 문제가 되는 불평등과 사회악을 전혀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비로소 사회혁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점진적 개량의 길이 넓게 열려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그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이 널리 인식되고 확인될 때 비로소 사회혁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는 둘 모두가 공존했다. 그리고 거대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은 점진적 개량이 아닌 사회혁명이었다.
'점진적 공학'은 사회혁명의 불벼락이 국가권력을 덮치기 전에 이미 권력 내부에 들어와 있었던 사람들의 몫일 뿐이다. '최악의 긴급한 악'으로 인해 숨이 넘어가기 직전 상황에 몰려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사회혁명의 길 하나만 남아 있었다.
p165
포퍼는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를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은 단일가치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전체주의 체제였다. 따라서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이상주의를 매몰차게 비판한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전체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철학의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플라톤과 헤겔을 지목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과 헤겔에 대해 논리적 비판을 넘어서는 정서적 적대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국가의 소멸과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적 연합체로서의 사회를 소망했다는 점을 들어 시종일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p167
포퍼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의 부족을 이유로 들어 사회혁명에 반대했다. 그런데 하이에크는 혁명의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사회혁명의 열정을 광신으로 본 것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사회를 계획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일편단심의 이상주의자로부터 미치광이 광신자까지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p170
사상의 생명은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양한 개인들의 상호작용이다. 이성은 그와 같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다.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어떤 견해가 이성의 성장을 도울 것인지 우리는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지금 가진 어떤 견해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모두에게 강요하면 이성은 성장할 수 없다. 집단주의 사상의 비극은, 이성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성이 성장하는 과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이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종결된다는 것이다. 소련과 중동부 유럽, 중국, 루마니아, 북한 등의 사례를 살펴보면 하이에크의 견해를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지식을 토대로 사회의 최종목표를 설계한 다음, 그 설계에 따른 계획에 들어 있지 않거나 그것과 충동하는 다른 어떤 견해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성의 성장과 정신적 발전이 멈추어 서게 된다.
p175
사회혁명을 '유토피아적 공학'이라고 불렀던 카를 포퍼는 선을 실현하려는 원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사회혁명에 반대하면서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량하는 '점진적 공학'을 지지했다. 그런데 하이에크가 반대한 '사회계획'에는 사회혁명 뿐만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민주주의 기본 질서와 합법적 절차를 지키면서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량하는 포퍼의 '점진적 공학'까지 모두 포함된다. 인간이 사회를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를 비판한 것이다. 하나의 가치 또는 목표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그것을 만들기위해 폭력사용을 불사하는 사회혁명에 반대하는 하이에크의 견해는 폭넓ㅅ은 공감을 얻을 수 있다.그러나 하이에크는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는 정의나 평등이라는 단일 가치가 지배하는 다른 전체주의 사회와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다.
p180
하이에크는 더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답은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하이에크는 사람들이 개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원천이 되는 미덕을 존중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독립심, 자조,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 다수에 대항하여 자기의 소신을 지키는 각오, 이웃과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집단주의는 이런 미덕을 모두 파괴한다. 그 결과 개인에게 복종하고 집단적 결정을 실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이 남게 된다. 그리하여 전체주의 사회에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 기회가 점차 축소되어 결국 주기적인 대표자 선거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1980년대 대처 총리와 레이건 대통령 시절 영국과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는 이론적,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p181
사회혁명의 길과 점진적 개혁의 길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 만들어진 질문이다. 그것은 약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결과가 불확실하고 폭력을 동반하는 사회혁명과 위험이 적고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결과가 즉각적,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점진적 개혁의 길 가운데 사회혁명을 선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점진적 개혁의 길이 봉쇄된 곳에서만 사회혁명의 길이 길을 연다. 카를 마르크스가 폭력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논증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시대 유럽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 계급이 집잔적 궁핍과 소외,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의 길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p182
사회혁명의 문을 걸어 잠그고 싶다면 부지런히 점진적 개량을 시도해야 한다.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p185
우리는 대표적인 국가론 세 가지를 이미 살펴보았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진보의 국가론으로 분류했다. 그런데 자유주의 국가론은 단순하지 않다. 산업화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보수정치세력의 국가론으로 널리 인정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국가가 악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권력을 분산하고 견제하는 데 중점을 두는 쪽이 있는가 하면, 자유주의적 기본 질서를 튼튼히 하면서도 시장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바로잡고 선을 실현하는 데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보는 쪽도 있다. 자유주의 내부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는 것이다.
p186
진보는 보수와 어떻게 다르며, 진보정치란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이 국가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 다루는 다섯 번째 질문이다.
인간의 삶은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투쟁이자 선택적 적응의 과정이다. 사회환경도 인간의 사고방식도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한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인간 특성에서 일어나는 진보는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 선택되는 과정이다." 이 난해한 문장을 통해 베블런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한마디로 사회의 진보는 생물의 진화가 그런 것처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자연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제도의 교체는 낡은 사유습성이 지배적인 지위를 잃고 새로운 사유습성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 현실이 된다. 왕조국가 조선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판이한 제도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제도의 차이는 지배적 사유습성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는 모두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제도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신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주의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그에 따르는 제도의 조정 필요성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다. 보수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거부하고 변화에 저항하려는 정신적 태도를 가리킨다. 보수주의의 핵심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의 법칙을 인간의 제도에 적용하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틀렸다." 고 해야 마땅하다. 과거의 지배적 사유습성을 체현하는 현재의 제도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오늘의 생활환경이 요구하는 최적의 대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신적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왜 누구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누구는 진보주의자가 되는가? 베블런의 이론에 따르면 생활환경의 변화에 강하게 노출되는 사람이 먼저 새로운 사유습성을 받아들인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된다. 사회의 공인된 생활양식은 옳은 것, 선한 것, 합당한 것,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를 토대로 성립한다. 그런데 생활환경의 변화가 몰고온 충격이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어떤 환경의 변화를 긴급한 상황으로 인식한 사람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의 여집합이다. 보수주의자는 기존의 지배적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보수주의가 기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의 변화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모두 영원히 보수주의자로 살아갈 것이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확신에 찬 진보주의자에게는 우울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마, 베블런의 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편든 것은 아니었으니 그를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p190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이해타산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삶을 대하는 특정한 정신적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한계급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하위 소득계층 유권자들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선거를 할 때 주로 진보정당이 아니라 보수정당에 표를 준다. 어떻게 된 일인가?
p191 ###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보수적이다.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변화된 환경이 무엇인지, 나의 정신적 태도는 어떠한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데 대한 본능적 저항감을 극복하려면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 지배적 생활 양식에 순종하면서 일상적 생존투쟁을 견뎌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에서 주로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이 형성되고 표출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고령층이 청년들보다 더 보수적인 현상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유습성에 노출된 기간이 짧으며 지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왕성하다. 기존의 사유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하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기존의 사유습성은 더욱 강력한 지속성을 지니며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필연이다. 역사의 중대한 고비마다 청년층이 낡은 제도와 지배적 사유습성, 전통적 생활양식에 반기를 드는 주체로 나선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모든 사회에서 청년은 진보적이며 노인은 보수적이다. 고령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p192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도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혁명으로 번져나갈지 모른다.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회는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절멸되는 종이 될 것이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p193 ###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면 진보는 단결하는 능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다. 보수주의는 현존하는 지배적 사유습성을 지키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수용하고 낯선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에 부합한다. 쉽게 단결하며 잘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져도 단시간에 수월하게 복원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창조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열정과 신념이 무너지면 바람에 날리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p194
과연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진보는 무엇인가? 대표적인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p195
마르크스가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고 했던 국가가, 김상봉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가 아니라 그 최상층부인 재벌 기업 또는 재벌 가문의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가 되었다. 재벌 기업에 의해 국가기구가 포위되고 장악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가 기업처럼 변질돼버렸다. 우리가 목격하는 민주주의 퇴행은 국가 기업화의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다면 정부권력을 비판 할 것이 아니라, 국가를 모두를 위한 공화국이 아닌 사적 이익 추구의 도구로 만든 한국의 재벌 기업 체제를 해체할 궁리를 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 어디에도 노동자가 경영권을 가지면 기업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없다. 국가의 주권이 시민에게서 나오듯, 기업의 경영자를 노동자가 선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p197
진보는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을 의미한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간 능력의 발전에 대한 믿음이다.
사회의 진보는 현존하는 제도를 조금씩 개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하는 인간의 대담한 결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카는 진보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도전의 목표와 내용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p198
진보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서도 그 목표와 방법을 한결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는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이남곡 선생이 제시한 견해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것이 진보주의이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매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 그것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등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인간은 수맣은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통해 자유를 증진해왔다. 둘째는 물질의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다. 자유는 물질의 절대적 결핍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숨 쉬지 못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도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셋째는 인간의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남과 자연을 침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ㅗ가학, 종교, 영성운동도 진보의 중요한 영역이다.
p199
진보는 현재 자신의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것과 환경의 변화 사이의 불일치나 부조화를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베버는 정치를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폭넓게 규정했다.
p204
국가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종국적으로 시민 각자가 훌륭해짐으로써 인간으로서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것이 해답이다. 훌륭한 국가는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훌륭한 국가가 되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훌륭해야 한다. 따라서 시민 각자가 어떻게 해야 스스로가 훌륭해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시민 각자가 훌륭하지 않아도 시민 전체가 훌륭할 수 있겠지만, 시민 각자가 훌륭한 것이 바람직하다. 각자가 훌륭하면 전체도 훌륭할 것이기 때문이다.
p205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국가, 선을 행하는 국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요구했다. 홉스나 마르크스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적절하지 않거나 비현실적인 요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국가론은 이것과 훌륭하게 결합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위대한 개인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다. 소로는 때로 국가의 필요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의 주장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악을 저지르는 국가에 '시민의 불복종'으로 대항했디만 정부를 당장 폐지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가 절실히 원했던 것은 '더 나은 정부' 였다. "각자가 자신이 존경할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밝히는 것이 더 나은 정부를 얻을 수 있는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라며 국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소로가 원했던 국가는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국가" 였다. 그런 국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며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열매를 맺고 또 이 열매가 익는 대로 떨어지게 허락해주는 국가는, 그보다 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 상상만 했지 결코 보지는 못한 그런 국가가 탄생하도록 길을 열어줄 것이다.
p206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제 대답할 수 있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이다.
p208
스위스 로잔 대학의 메랭 교수에 따르면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하는 국가"이다. 출산, 육아, 교육, 취업, 보건, 노후 등 시민들이 혼자 힘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고 갖가지 사회적 위험에 대비하는 사회적 연대의 책임을,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복지국가이다.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한다는 뜻에서 완전한 복지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사회적 연대의 기능은 국가와 시민들이 함께 나누어 수행한다. 나라와 시대에 따라 국가와 시민이 담당하는 몫이 다를 뿐이다. 복지정책이 상당히 발달한 유럽 산업국가들도 점진적으로 국가의 몫을 늘림으로써 복지국가라는 이상에 접근해왔다.
복지국가의 주요 기능은 세 가지이다. 첫째, 국가의 규제를 통해 일정한 수준에서 시민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둘째, 조세징수와 보조금 지급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일이다. 셋째, 시장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와 공동장비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복지국가는 조직화된 권력으로 시장법칙을 세 방향에서 수정하는 것이다. 첫째 개인 또는 가족에게 노동의 시장가치나 재산 수준과 관계없이 최저소득을 보장하고, 둘째, 질병과 노령, 실업 등 개인과 가족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에 대한 불안을 감소시키며, 셋째 계급적 귀속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이다.
p212
사회는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서비스 둘 모두를 필요로 한다.
구체적인 제도를 보면 사회적 연대를 구현하는 복지정책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사회보험이다.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업재해보상보험, 이 다섯 가지 사회보험을 통해 질병, 고령, 실업, 산업재해와 같은 사회적 위험에서 국민을 보호한다. 국민연금은 장기 재정안정성에 문제가 있다. 국민건강보험은 보장율이 너무 낮다. 고용보험도 비정규직과 소규모 사업장에 사각지대가 있다. 장기요양보험은 아직 규모가 너무 작아서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크고 작은 보완이 필요하지만, 이 제도들은 수십 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발전해왔으며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다. 사회보험은 국가가 관리하면서 일부 재정지원을 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시민들이 가입하여 소득에 비례하여 책정되는 보험료를 납부하고 필요한 혜택응ㄹ 누린다는 면에서 시민들 사이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하는 소중한 제도이다.
둘째는 공적 부고이다. 이것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선언한 헌법34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어느 국민이든 소득과 재산이 적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할 경우, 그 원인이나 책임소재를 가리지 않고 공동체의 지원을 요청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공적 부조제도가 김대중 대통령이 도입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다. 스스로 최저생계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제도의 혜택을 요구할 수 있다.
셋째는 보편 서비스이다. 이것은 어떤 정책수요를 가진 국민 모두에게 국가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중학교까지 부모의 재산과 소득을 따지지 않고 모든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의무교육은 전형적인 보편 서비스이다.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를 나누는 견고한 울타리는 없다. 공적 부조 형태의 선별적 복지 서비스를 모든 국민에게 제공하면 보편적 서비스가 된다. 영유아 보육비를 중하위 소득계층 만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모든 가정에 제공하거나 기초노령연금을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면 선별적 복지정책이 보편적 복지정책으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저 소득층 자녀들에게 지급하던 학교 급식비를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모든 가정으로 확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p215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복지국가론은 하나으 독립된 이념체계 또는 첡학 차원의 국가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위험에서 시민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 채택하고 실현해야 할 '제도와 정책의 조합'이다. 복지국가론은 우리가 이 책에서 살펴본 네가지 주요한 국가론과 많든 적든 조화를 이룬다.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p220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독점한 유일한 인간공동체로서 국가가 지닌 힘에는 모든 폭력에 잠복한 악마성이 있다. 국가권력으로 선을 행할 수도 있지만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게다가 국가는 개인과 다르다. 개인이 행하는 선과 악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국가가 행하는 선과 악에는 한계가 없다. 특히 악에 관해서 말하자면, 개인이 저지르는 악은 국가가 어느 정도 방지하고 응징할 수 있지만 국가가 저지르는 악은 누구도 쉽게 저지하거나 응징핮 ㅣ못한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는 선 못지 않게 크고 많은 악을 저질러왔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고 더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집요하고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p221
니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보면서 개인과 국가의 행동은 상이한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판단을 내렸다. 개인으로서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봉사해야 할 것과 서로 간의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서의 개인들은 스스로 그들의 힘이 명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 따라서 개인과 국가를 선으로 이끄는 도덕적 이상도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p222
국가라는 가장 큰 공동체에 대해서는 개인과는 다른 도덕적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니버는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 라고 했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그러나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은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 예컨대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는 것도 아니다.
p223
개인에게는 이타성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반면 국가에게는 정의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이다.
국가가 실현해야 할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건강하고 안정되고 통합되어 있는 국가가 정의롭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었다. 권리, 소득, 기회, 부, 권력, 명예 등 사람들이 원하는 희소한 것들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정의이다.
p226
헌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재산, 지위, 성별, 연령, 능력, 외모 등 그 어떤 차이가 있든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열거한다. 그리고 특별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공직과 명예, 소득과 부담을 어떤 원리와 절차에 따라 배분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 모든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완벽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교정하고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 정의가 무엇인지, 국가로 하여금 어떻게 정의를 실현하게 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면 그 어떤 철학자의 위대한 저서보다 먼저 헌법을 읽는 것이 유익하다.
대한민국 국민,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인간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국가는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나를 잡아가거나 가두거나 처벌하지 못한다. 나는 고문할 수 없으며 나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도록 강요하지 못한다. 법률에 따라 체포하는 경우에도 나는 가족에게 연락할 수 있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범죄의 자백 말고 다른 증거가 없을 때 국가는 나를 처벌할 수 없다.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행위를 이유로 국가는 나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다.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살고 싶은 곳에 살아도 된다. 나는 내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사생활의 비밀을 보호받으며 남이 듣지 못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과 통신할 수 있다. 내 양심에 따라 살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종교는 어느 것이든 믿을 수 있고 믿기 싫으면 아무 종교도 믿지 않아도 된다. 국가는 내게 특정한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고 검열 없이 책을 낼 수 있으며,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다른 사람과 함께 단체를 만들거나 집회를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공부와 예술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p228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받아야 마땅한 것은 자유 말고도 더 있다. 나에게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일할 권리도 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 또한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노동권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을 묶어서 사회권적 기본권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자유권적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 속한다. 만인에게 이 권리를 실현해준다고 해서 정의가 전면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서는 정의를 수립할 수 없다.
p229
대통령의 권한은 국회보다 훨씬 강하다. 국가폭력의 요체인 군대와 경찰을 지휘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국가를 대표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과 영토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 대통령은 행정권을 가진 정부의 수반이다. 대통령은 국가가 중대하고 긴급한 위난에 직면했을 때 법률과 같은 효력을 내는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전쟁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계엄을 선포할 수 있으며,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는 국민의 기본권과 사법부의 권능을 정지시키는 특별조치를 할 수 있다.
p234
자유로운 시장은 반드시 사회정의를 위협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떻게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헌법은 그에 필요한 권능 몇 가지를 국가에 부여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국가는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누구도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가는 어떤 형태의 사회적 특수 계급제도도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의 재산권 행사가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해야 하되, 공공의 필요에 따라 누군가의 재산권을 수용하거나 사용하거나 제한할 때는 법률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제공하고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해야 하며 평생교육을 진흥해야 한다. 고용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해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최저임금제를 시행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근로조건의 기준을 법률로 정하고 여자와 연소자의 근로를 특별히 보호하며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가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한 근로자의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p240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를 직접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활동이다.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을 만인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각자가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저마다 받게 만드는 것이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야 할 정의이다. 국가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환경이 깨끗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p242
나는 분명 자유주의자이다. 나는 이 모든 가치들이 하나의 사회 안에서 똑같이 존중받으면서 공존해야 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의미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아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 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본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정의를 파괴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p247
정치인이 지켜야 할 윤리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어떤 도덕법이 요구되는가?
p248
칸트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법을 세웠다. 반면 막스 베버는 직업정치인에게 신념윤리와 아울러 투철한 책임윤리를 요구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맞닿아 있다. 직업정치인도 인간인 만큼 당연히 칸트의 도덕법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는 특수한 윤리가 요구된다. 베버는 이것을 책임윤리라고 불렀다. 정치인에게는 책임윤리가 특별히 필요하다.
p250
칸트의 '자유'는 강제나 구속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칸트의 '자유'는 인간이 '경향성을 만족' 시키는 욕구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욕구가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은 자율적 행동이 아니다.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율적 행동이다. 도덕법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자유를 사용하는 규칙이다.도덕법은 욕구의 만족이나 그 수단과 무관하다. 그리고 경험의 원리와도 무관하다. 도덕법은 순수이성의 직접적 명령이다. 인간은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다시 말해서 선험적으로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한 것을 그대로 옮기면, "순수이성은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이고 우리가 도덕법칙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인 법칙을 우리에게 준다."
칸트는 인간 행동의 도덕적 가치가 동기에 좌우된다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선하다고 인정받는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언제나 도덕적 가치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다른 동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옳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왔을 때만 도덕적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불량부품을 쓴 자동차를 출시한 회사의 경영자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공개 리콜하여 무상으로 수리해주고 필요한 보상을 했다고 하자. 이것은 정직한 행동으로 칭찬받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도덕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 이유가, 고객을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 회사의 신용도를 높여 장기적으로 회사에 더 큰 수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면, 여기에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 그러나 오로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의무감에서 리콜을 했다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자기의 이익, 바람, 욕구, 기호, 식욕 등 '경향성을 만족' 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행동에는 도덕적 가치가 없으며, 오로지 의무감에서 나온 옳은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p252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욕구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정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법칙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성의 도움으로 경험하지 않고서도 그 규칙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이성이 직접적으로 그것을 명령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정언명령' 이다. 너 자신의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정언명령1), 그리고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정언명령2)
p255
진보주의자들 중에는 칸트의 도덕법을 준수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카트의 저서를 읽지 않고서도 스스로 정언명령 형태의 도덕법을 발견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인간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착취하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스스로 정한 행동준칙을 따르면서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성찰한다. 오해와 박해를 받고, 모략과 비방을 당하고, 때로 투옥과 죽음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도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신이 정한 삶의 목표와 행동준칙을 견지한다.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끌려가도 굴복하지 않는다. 목표를 실현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벌이는 진보주의 활동의 동기는 어떤 이익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투철한 진보주의자는 모두 칸트의 칭찬을 받을 만 하다.
p256
칸트의 도덕철학에서는 오로지 동기만이 의미를 가지는 반면, 정치는 동기보다는 오히려 결과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정당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없는 행동준칙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정치에서는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동기 때문에 한 행위가 최악의 참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오로지 칸트의 도덕법에만 의지할 경우 정치인은 의도하지 않은 죄악을 저지를 수도 있다.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독일의 막스 베버
베버는 국가의 본질적 특성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국가는 특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접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공동체이다. 정치는 권력에 참여하려는 노력 또는 권력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p257
국가의 폭력도 틀림없는 폭력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의 운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활동하는 정치인에게는 특별한 자질과 윤리의식이 필요하다.
베버는 좋은 정치인이 되는 데는 세 가지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이다. 열정은 어떤 대의에 헌신하는 객관적 태도를 의미한다. 지적 흥미를 느끼는 것에 낭만적으로 몰두하는 '비창조적 흥분상태'와는 다르다. 대의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열정은 또한 대의에 대한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내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사람과 사물에 대해 거리를 두고 현실을 관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거리감의 상실 또는 균형감각의 실종은 그 자체가 커다란 죄과이며 반드시 정치인을 무능의 길로 오도한다.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을 소유한 정치인은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p260
진보주의는 신념윤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진보주의자는 스스로 부여한 도덕법칙을 준수하면서 자기가 정한 목표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하다. 설혹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이기적 욕망 추구가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는 삶이 아름답다고 믿는다. 이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가 의미를 가지는 칸트의 도덕법이다. 이러한 도덕법을 따르는 진보주의자가 지식인으로 활동할 대는 큰 문제가 없다. 오로지 다른 사람과 논쟁할 뿐이다. 사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런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 뛰어들어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으려 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동기가 중요할 뿐, 결과에 대해 책임지려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윤리의 부재가 빚어낸 정치적 비극은 무수히 많다. 나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비극도 여기에서 배태되었다고 판단한다.
p264
베른슈타인은 막스베버가 정치가에게 요구한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고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대했으며, 사회를 변혁하려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책임의식이 무엇인지 잘 인식하고 있었다.
p265
베른슈타인이 수정하려고 했던 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 붕괴론이었다.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는 같은 것이다. 이론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수정주의는 정치적 실천으로 가면 개량주의가 된다.
p266
베른슈타인은 사회민주당 당원이며 지도자였다. 그가 수정주의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단순한 이론적 모색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가 임박했으며 사민당은 임박한 사회적 대파국의 전망 아래서 전술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당의 활동을 왜곡하고 당의 입지를 축소시킨다고 판단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파국론 신봉자들이 의존하는 <공산당선언>의 서술이 실제적인 사회적 변화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곧 붕괴할 것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그가 '사회주의적 현재 활동'이라고 불렀던 사민당의 일상적 정치활동이 제대로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붕괴의 관념을 버려야 '사회주의적 현재 활동' 이 노동자의 전투력을 대위기 때까지 보존하기 위한 임시적 수단이 아니라 중요하고 근본적인 사회개량을 준비하는 작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단순한 선동이 아니라 법적, 경제적 입법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활동과 실제적 입법이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사회주의적 활동과 노동조합, 노동자소비조합 활동을 확장할 수 있다. 경제적 대붕괴에 근거를 둔 관념을 버리고 실제로 발전해온 그대로의 사회를 보면 이 모든 활동들이 이전과는 다른,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레닌을 중심으로 한 혁명주의자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치열한 내전을 걸쳐 탄생한 세계 역사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연방이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조국'으로 등장했다. 베른슈타인은 현실에서 처절하게 패배했다. '베른슈타인 같은 자'라는 표현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가장 지독한 욕설이 되었다.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는 정치적 파산의 운명을 선고받은 것처럼 보였다.
p268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세우려고 할 경우 "생산력의 엄청난 황폐화, 무의미한 실험들, 목적 없는 폭력행위 등과 같은 것만을 빚어낼 것이며,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배는 사실상 혁명가 클럽의 폭력적 독재에 의해 지탱되는 혁명적 중앙권력의 독재형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베른슈타인의 예측은 소비에트연방을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현실이 되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받아들이고 정치적 개량주의를 선택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활하여 여러 차례 집권하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베른슈타인이 말한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의 길을 걸었다. 그는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사 속에서 승리했다. 무엇이 베른슈타인으로 하여금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정치가로서의 책임의식, 자신의 이론과 자기가 하는 정치활동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성찰하게 한 균형감각이었다고 생각한다. 대의에 대한 열정은 컸으나 책임의식과 균형감각을 견지하지 못했던 많은 혁명가와 정치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각의 축복을 받았다. 오로지 신념윤리 하나만으로 국가권력을 휘둘렀던 정치가들 중 일부는 '인류에 대한 범죄자'로 역사에 남았다.
p270
정치인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와 근본적으로 엇갈렸던 지점은 국가를 보는 관점이었다. 마르크스에게 국가는 존재 그 자체가 악이었다. 민주주의 선거는 부르주아지들끼리 벌이는 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는 국가의 성격을 바꾸지 못하며 사회혁명을 일으키지도 막지도 못한다. 국가는 오로지 소멸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에게 국가는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는 도구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달리 베른슈타인은 자유를 부르주아지의 전유물로 보지 않았고 자유주의를 경멸하지도 않았따.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내포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차이였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론가로 남았지만, 베른슈타인은 정치가로 살았다.
p271
베른슈타인은 세계사적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가 시기적으로 자유주의를 뒤따라왔으며 정신적으로도 자유주의 사상의 적법한 상속자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회민주당이 시민적 자유의 보장을 어떤 경제적 요구를 달성하는 것보다 항상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운 인성의 형성과 보장이 모든 사회주의적 수단의 목적이며, 설사 그 수단이 외견상 강제성을 띠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자 베른슈타인에게서 존 스튜어트 밀과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의 그림자를 본다. 그는 자유주의 철학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개방적 성격에 주목했다. 완고한 신분제도 때문에 폭력이 아니고는 폐기할 방법이 없었던 봉건사회와 달리 자유주의 제도는 유연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제도는 폐기할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 조직을 만들어 정력적으로 활동해야 하며 혁명적 독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주주의 국민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그가 사회주의 운동에서 얻은 교훈이며 확신이었다. 이런 확신에 의거해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지성과 사상적 포용력을 요청했다. "노동운동이 필요로 하는 살마은 용감하고 조직적이며 총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밀알에서 겨를 가려낼 수 있을 만큼 높은 식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자기 묘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란 식물도 감싸 안을 수 잇을 만큼 생각이 넓어야 하며, 사회주의 사상의 여역에서 왕이기보다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공화주의자여야 할 것이다.
p272
이제 국가에 대한 일곱 번째 질문에 다시 한 번 대답해보자.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이다. 인간의 완전성과 선을 전제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대 얻게 될 "예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결과"를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껴안는, 그리고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결과로 책임지려는 태도이다. 이것이 반드시 칸트의 도덕법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제력을 가지고 일하는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때로 칸트의 도덕법을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세운 행위의 준칙이 아니라 단순한 '끌림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면서 '실용적 처세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대중의 요구와 그들이 요구하는 행위의 준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p274
국가의 도덕적 이상이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볼 경우,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연합할 수 있고 필요하면 언제든 연합해야 한다. 특히 국가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시민들이 항속적으로 이념형 보수 정당을 지지하고,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 가운데 어느 쪽도 혼자 힘으로 보수정당을 능가하지 못하는 우리 상황에서는, 연합하지 ㅇ낳고서는 보수주의 정당을 이길 방법이 없다. 더욱이 결선투표도 없이 최다득표자 한 사람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되는 선거제도를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들이 저마다 나름의 신념윤리에 따라 당락에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정당하고 옳은 주장'을 국미네에게 알리겠다며 후보를 ㅔㅅ울 경우, 보수정당의 승리는 비교적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의 결과"가 된다. 책임윤리에 대한 베버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이 결과는 '세상의 책임'이나 '어리석은 국민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정당과 정치인의 책임이다. 진보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국가를 운영할 기회를 얻을 수도 없다. 국가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것조차 어려워 진다.
p279
진보세력은 단지 진보적인 데 그치지 않고 유능해야 한다.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의 연합정치는, 막스베버의 말에 기대면 신념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에 따른 정치행위다.
p282
정치는 단순히 신념을 표출하기 위한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로크의 말을 기억하자. "사회계약은 어느 한 사람이나 추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다수파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다. 권력을 정당하게 양도받는 다수파가 오직 하나의 이념으로 뭉쳐진 집단이어야만 할 합당한 이유는 없다.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여러 이념의 절충을 통해 권력을 양도받을 다수파를 형성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볼 근거도 없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고 믿는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
지금처럼 블로그에 서평을 남기거나, 눈에 보였던 것들을 묘사하거나, 아니면 하루 동안 변해왔던 내 감정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글로 적어내려 갈 때가 있다. 그런데 왜 내가 메모지, 다이어리,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있을까?
항상 대답은 정해져 있다. 손이 가기 전에 먼저 마음이 먼저 앞선다. 무언가 하루 동안 겪었던 기억들이 휘발되어 날아가지 않게 담아두고 싶고, 책을 읽으면서 그 순간에 느꼈던 진한 감동과 감탄스러웠던 순간들을 그대로 아로 새겨서 간직하기를 원한다.
글을 쓸 때 느끼는 쾌감 중에 하나는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마지막을 마치는 순간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아~! 끝났다' 하는 시원함과 동시에 '어떻게 글을 써내려왔지?' 하는 궁금증이 겹친다. 그리고 글을 처음부터 혼자 읽어 본다. 문맥의 흐름은 맞는지, 어색한 표현은 없는지 살펴본다. 너무나 식상한 단어를 보면 어휘력의 한계에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평소에 잘하지 않았던 마음에 드는 표현이 나왔을 때는 스스로 대견해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기억을 하기 위해서다. 서평, 일기, 생각나는 무언가에 대한 기록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유산으로 남는다. 순간순간 남기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중요하거나 가치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한 때는 지금처럼 현재였던 그 순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 당시의 내 모습과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 순간에는 너무나도 중요했던 일들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니 그렇지 않았구나! 깨닫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평범한 순간이 정말 기회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게 개인적인 글들이 늘어나면 나만의 자서전, 역사책이 만들어진다. 가능하면 내가 느끼는 세세한 감정들,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자세히 적어두고 싶다. 그렇게 나를 한 번 더 깊이 관찰하고 싶다.
마지막은 생각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난 다음에 해야하는 것이 성찰과 사색이다. 성찰과 사색의 시간을 거쳐야만 배움과 지식이 그 사람의 몫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성찰과 사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자에 앉아서 '나 이제부터 생각할꺼야?' 라고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이다. 예전부터 이 방법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이제는 그 방법을 조금은 찾은 듯 하다.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은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무언가가 실체적인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글로 변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이루어져야 하고, 조금 더 나은 글을 풀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게 되고,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과연 맞는지,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서 곱씹어 보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자연스럽게 성찰과 사색이 된다.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책과 글쓰기에 관련된 책은 항상 내용은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언제나 나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공감하는 부분을 잠시 소개한다.
첫째. 취행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이 세 가지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에는 철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화려한 문장을 쓴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가서야 훌륭한 글이다.
무엇보다 뜻이 두루뭉수리 불분명해서 아무 곳에나 넣어도 되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단어를 자꾸 쓰면 어휘 구사 능력이 퇴화한다. 생각을 감추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곧바도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어휘가 너무 적어서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탓이라면 단기 해결책이 없다. 근본 대책은 독서량을 늘리는 것 뿐이어서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글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실용적인 면에서든 윤리적인 면에서든, 읽는 사람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주는 글은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 수 없다. 타인에게 텍스트를 내놓을 때는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글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려면 지식과 전문성을 내보이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작가 유시민은 본인이 읽었던 교양서(학자들이 보통 사람을 위해 쓴 책) 중에서 '글쓰기를 위한 전략적 독서' 목록을 만들어서 소개하고 있다. 이 책들은 앞으로의 내가 읽을 책에도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책 목록을 보니 분명 소화해내기 쉬운 책이 아님은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읽는 힘이 아직은 부족하기에 올해에는 차근 차근 한 권씩 곱씹어 읽어가면서 어느 정도의 책력은 키워야겠다. 분명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독서,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가능하게 될 거라 확신한다.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로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승산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다락원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우물이있는집
◎ 스티븐 핑거 외, 존 브록만 엮음, <마음의 과학>, 와이즈베리
◎ 스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바오
◎ 신영복, <강의>, 돌베개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한국경제신문
◎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은 아름답다>, 문예출판사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흥신문화사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문학사상
◎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어크로스
◎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갈라파고스
◎ 존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흥신문화사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책세상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 이후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서해문집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은행나무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 글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람이 변하면 글이 변한다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면 속이 후련할 때가 있다. 이와 비슷하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글로 뱉어내면 마음이 편안해질 때도 있다. 어떤 글을 쓸 때 잘 써진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보통 내가 진심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쓸 때다.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 아니고, 직접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풀어낼 때는 글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도가 높아진다. 평소에 갑자기 욱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속상하게 할 때가 있는데, 이런 모습을 내가 알고 글로 몇 번을 적다 보니 점점 그런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현실적이지 않은 소망과 이상적인 것을 계속 글로 남기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글로 남긴 것이 내 생각으로 자리가 잡혀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글로 적어두었던 것 중에 많은 부분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그렇게 내가 쓴 글이 어느 순간 내 모습이 되어 버리고, 변화된 내 모습에서 새로운 글이 나온다. 그렇게 글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소개하며 나를 변화시키는 글쓰기를 마친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김형수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장강화, 이태준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의 <한겨레>에 연재하는 칼럼 '현대를 만든 물건들'
http://www.hani.co.kr/arti/SERIES/606/home01.html
유시민, <항소이유서>
논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다면 무엇보다 생각을 바르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먼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 기준을 바꾸고 감정에 휘둘려 논리의 일관성을 깨뜨리면 산문을 멋지게 쓸 수 없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을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이 세 가지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
우리는 언어로 소통하고 교감해서 자신과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말이든 글이든 원리는 같다. 언어로 감정을 건드리거나 이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 능력에 기대어 소통하려면 논리적으로 말하고 논리적으로 써야 한다. 그러려면 논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효과적으로 논증하면 생각이 달라도 소통할 수 있고 남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내 생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미적 취향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타인의 미적 취향을 '미친 짓'이라고 욕하거나 '비정상'이라고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미적 취향을 표현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단순한 취향 고백과 논증해야 할 주장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이것이 논증의 미학을 구현하는 첫 번째 규칙이다.
논리학이나 수학에는 공리라는 것이 있다. 증명하지 않고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명제가 공리다. 유클리드기하학의 평행선 공리가 널리 알려진 사례다. 글을 쓸 때는 사실을 수학의 공리처럼 대해야 한다.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은 반드시 그 타당성을 논증해야 한다.
개혁이 '고친다'는 뜻을 가진 중립적 단어라면, 개선을 고쳐서 더 좋게 만드는 것이고, 개악은 고쳐서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논증의 미학이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사실과 주장을 구별하고 논증 없는 주장을 배척해야 하며 논리의 오류를 명학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미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논증의 미학을 애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엄격한 논증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논증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논증의 미학을 실현하기 위해 지켜야 할 세 번째 규칙이다. 말과 글로 논증하고 토론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 규칙을 지키면서 글을 쓰는 것은 훨씬 어렵다. 이해는 생각만 해도 할 수 있지만 실천은 삶으로 몸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더 많다 .글쓰기도 그런 것이다.
시나 소설을 쓰고 싶은 독자라면 앞에서 소개한 김형수 시인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 같은 책을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살아 있는 고전으로 인정받는 이태준 선생의 <문장강화>도 나쁘지 않다.
글쓰기에는 철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스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든느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무슨 주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논리적, 실증적 근거를 신속하게 탐색하는 습관이 생겼다.
연구 논문, 보도자료 같은 글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을 정할 수 있다. 나는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쉽게 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의할 근거가 있는 글이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다음 네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제가 분명해야 한다.
둘째,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꼭 필요한 사실과 중요한 정보를 담아야 한다.
셋째, 그 사실과 정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넷째, 주제와 정보와 논리를 적절한 어휘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잘 알려져 있다. 첫째는 텍스트 독해, 둘째는 텍스트 요약, 셋째는 사유와 토론이다.
논리 글쓰기의 첫걸음은 텍스트 요약이다. 그런데 이 첫걸음을 똑바로 내딛으려면 텍스트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싶으면 먼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텍스트를 읽지 않고 독해력을 키우는 방법은 없다. 글스기의 첫번째 철칙은 바로 이 단순한 사실에서 나온다.
많이 읽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읽을수록 더 잘 쓸 수 있다.
텍스트를 독해하고 요약하는데 능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그러면 글을 잘 쓸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그래서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독서광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 쓰는 기술만 공부해서 잘 쓰는 사람도 물론 없다.
논리적 글쓰기의 두 번째 철칙이 나온다.
쓰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화려한 문장을 쓴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가서야 훌륭한 글이다.
글을 썼으면 남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혹평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혹평도 반갑게 듣고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해야 글이 는다. 남몰래 쓴 글을 혼자 끌어안고만 있으면 글이 늘 수 없다.
독해는 단순히 문자를 알고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다. 독해는 어떤 텍스트가 담고 있는 정보를 파악하고 논리를 이해하며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정보와 논리와 감정을 특정한 맥락에서 분석하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작업이다 .독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같은 시간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텍스트를 읽고 더 넓고 깊게 이해하며 때로는 남들과 다르게 텍스트를 해석한다. 독해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텍스트를 더 정확하게 더 개성 있게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독해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훌륭한 글은 뚜렷한 주제 의식, 의미 있는 정보, 명료한 논리, 적절한 어휘와 문장이라는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이 네가지 미덕을 갖추는 데 각각 서로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면 글쓰기는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다행히 그렇지가 않다. 이 네 가지는 따로따로 배우고 익히는 게 아니다. 넷 모두 한꺼번에 얻거나, 하나도 얻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인간의 모든 지적,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활동을 총괄하는 신체 기관은 뇌다. 3층 구조로 된 이 1.4킬로그램짜리 살덩어리는 수십억 년에 걸친 생물의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언어 구사를 포함한 정신적, 지적활동은 대뇌피질이 관장한다. 글쓰기가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뉴런)가 있다. 뇌신경 세포는 저마다 수십 개에서 수천 개의 돌기(시냅스)를 만들어 다른 신경세포와 전기적, 화학적 신호를 교환한다. 뇌는 여러 신체 기관이 전해준 정보를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분석 처리하며 각각의 신체 기관이 상황에 맞는 운동을 하도록 명령한다. 우리가 자아를 인식하고 의식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뇌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나 '지성''의식'은 물질이 아니라 뇌신경세포가 주고받는 전기적, 화학적 신호의 집합일 뿐이다. 언어 구사는 뇌가 수행하는 여러 기능 중 하나다. 대뇌피질은 영역마다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언어를 관장하는 영역도 물론 따로 있다. 이 영역은 뇌가 성장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는 영역과 함께 형성된다. 뇌는 태내에서느 만들어지기 시작해 태어난 후 3년 정도 폭발적으로 자라며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성장기의 뇌에서는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부위 사이에 더 많은 신경세포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래서 이 시기에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어떤 자극과 과제를 받느냐에 따라 뇌의 구조와 기능이 적지 않게 달라진다. 형성기의 뇌는 만지기에 따라 모양이 잘라지는 점토와 비슷한 것이다.
뇌는 유전자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다. 환경도 뇌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의 뇌는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뇌는 평생 두 요인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 발전, 퇴화한다. 사람의 언어 구사 능력도 유전자와 환경이 어울려 결정한다. 사람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하드웨어를 지니고 태어나며,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모국어라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한다. 부모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풍부한 언어적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아이의 뇌가 이 과제를 순조롭게 완수하도록 도울 수 있다.
사람의 뇌도 같은 원리에 따라 형성된다. 뇌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에 적절한 언어적 자극에 노출된 아이들은, 언어를 담당하는 뇌 역역에 충분히 많은 신경세포를 확보하고 원활한 교신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말 못하는 아기한테도 자주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아기는 부모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부모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 때 아기의 뇌에서는 행복한 비상사사태가 일어난다. 청각신경이 포착한 음성 정보를 해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 아기의 뇌는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에 더 많은 뉴런을 배치하고 교신을 더욱 강화한다. 따라서 반쪽짜리 말을 하는 아이라도 완전한 문장을 대화해야 한다. 따라서 반쪽짜리 말을 하는 아이라도 완전한 문장으로 대화해야 한다. '찌찌', '때때', '응가' 같은 반쪽짜리 말을 가르치고,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부모도 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아이의 뇌는 쉬운 숙제를 받은 학생처럼 느긋해진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배치하고 더 많은 시냅스를 만들어 더 효율적으로 교신하려는 노력을 덜하게 된다.
아이가 언어 능력을 온전하게 발전시키도록 하려면 부모가 우리말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부모가 우리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말 공부를 새로 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말을 바르고 예쁘게 쓴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부모가 완전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책을 친숙한 목소리로 읽어줄 때, 아이의 뇌는 그 음성 정보를 해독하기 위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모든 아이가 동화책 듣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은 확실하다.
말을 시작한 뒤에는 무엇이든 본인 의사를 말할 기회를 주었다
어린이 독서는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독서를 생활 습관으로 만들고 자신이 읽은 것을 활용해 무엇이든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된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독서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재미를 붙이기만 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나름의 독서 이력을 만들어간다. 만화, 판타지소설, 무협소설, 추리소설, 역사소설, 잡지, 그 무엇이든 괜찮다.
독해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려운 글은 밑줄을 긋고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가면서 읽어야 한다. 독서량이 늘어 아는 게 많아지고 생각이 깊어져야 텍스트를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비판적, 창의적으로 독해할 능력이 생긴다. 글을 잘 쓰려면 먼저 높은 수준의 독해 능력을 길러야 한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고르는 기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 사회, 문화, 역사, 생명, 자연, 우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지식을 담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글을 쓰는 데 꼭 필요한 지식과 어휘를 배울 수 있으며 독해력을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둘째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을 구사한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자기의 생각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장 구사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인이 쓴 것이든 외국 도서를 번역한 것이든 다르지 않다.
셋째는 지적 긴장과 흥미를 일으키는 책이다. 이런 책이라야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논리의 힘과 멋을 느낄 수 있다. 좋은 문장에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으면 지식과 어휘와 문장과 논리 구사 능력을 한꺼번에 얻게 된다.
이런 책은 친구로 만드는 게 좋다. 친구는 오랜 세월 좋은 일은 함께 즐기고 아픔은 서로 나누며 자주 어울려야 친구다운 친구다. 어떤 책과 친구가 되려면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시간이 들지만 손으로 베껴 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런 책 목록을 제안하기에 앞서 우선 세 권을 소개한다. <토지>와 <자유론> 그리고 <코스모스>다. 이 책들은 두세 번이 아니라 열 번 정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자유론>에서 밀은 단 하나의 질문을 다루었다. 어떤 경우에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가? <자유론>은 놀라운 책이다. 우선 내용이 놀라울 만큼 훌륭하다. 개인의 자유와 관련한 중대한 쟁점을 철학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해명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그 훌륭한 내용을 사회에 대한 기초 지식과 평범한 수준의 독해력만 있으면 누구나 어려움 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섰다는 것이다. 밀은 아무리 심오한 철학이라도 지극히 평범한 어휘와 읽기 쉬운 문장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칼 세이건 박사는 <코스모스>에 1980년대까지 인간과 생명, 지구와 우주에 대해서 인류가 알아낸 거의 모든 것을 압축해서 담았다. 나는 밤하늘의 별과 내 몸이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위로를 받았다.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삶이 덜 외롭고 덜 허무해 보였다. 우주의 질서와 운행 법칙을 예전보다 더 명료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의식과 지성을 가진 생명체로 세상에 온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깨달았다. 나는 이 책에 이끌려 예전에는 관심도 없고 어렵게만 느꼈던 생물학과 뇌과학, 물리학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전략적 독서 목록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 모든 집단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가? 구성원들이 개별적으로는 이타적인데도 집단으로 뭉치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권계급의 집단적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불의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정의를 함께 실현할 수 있을까?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로
화학살충제와 제초제로 '해충'과 '잡초'를 박멸할 수 있는가? 만약 성공해서 곤충과 잡초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좋은 일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가? 생태계의 다양성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해충과 잡초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우주와 생명은 누가 만들었나, 스스로 태어났나?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종교의 도움 없이도 삶에 필요한 도덕을 세울 수 있는가? 신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다윈의 진화론은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을 주장한다. 자연선택과 생존경쟁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가? 집단인가, 개체인가, 유전자인가? 인간을 유전자가 창조한 생존기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이론인가? 인간의 자유의지로 유전자의 독재에 저항할 수 있는가?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기계인 인간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승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는 무엇이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원자에서 거대한 은하에 이르기까지 물질세계의 모든 운동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은 있는가?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은 인간의 세계관과 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 마이클 샌텍,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정의는 무엇이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철학적, 도덕적 원리에 의지해야 하는가? 사유재산제도와 징병제, 누진소득세, 낙태와 성매매 금지 같은 국가의 법과 제도가 정의의 원칙을 어떻게 또는 얼마나 잘 실현하거나 침해하고 있는가? 상이한 철학적, 도덕적 원리가 대립, 경쟁하는 상황에서 최대한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다락원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우물이있는집
■ 스티븐 핑거 외, 존 브록만 엮음, <마음의 과학>, 와이즈베리
■ 스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바오
■ 신영복, <강의>, 돌베개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한국경제신문
■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은 아름답다>, 문예출판사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흥신문화사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문학사상
■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어크로스
■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갈라파고스
■ 존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흥신문화사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책세상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 이후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서해문집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은행나무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어떻게 하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로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못 쓴 긋이다. 못나고 흉한 글이다. 이런 글을 읽기 쉽고 듣기 좋고 뜻이 분명해지도록 고치면 좋은 글이 된다.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소리 내어 읽어봄으로써 못난 글을 알아보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한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언어는 말과 글이다. 생각과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이 된다. 말과 글 중에는 말이 먼저다. 말로 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을 쓸 때는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 쓴 글을 알아보지 못하면 자기가 잘못 쓴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잘못 쓴 문장을 알아보는 진단법은 이미 소개했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귀로 듣고 뜻을 새겨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한 방법을 외면한다. 좋은 글, 훌륭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면서도 잘못 쓴 글, 못난 문장과 결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글쓰기도 면역력이 있어야 잘할 수 있다. 우리는 못난 말과 글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산다. 책, 신문, 방송을 보면 병든 말과 글이 널려 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을수록 문장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반면 면역력이 센 사람은 글이 엉망인 책을 읽어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좋은 문장을 쓴다.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못난 글과 나쁜 문장에 대한 면역력이 저절로 생긴다. 하지만 '백신' 예방접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효과가 좋은 백신이 이미 수십 년 전 서점에 나왔다. 앞에서 말한 이오덕 선생의 책 <우리말 바로쓰기>다.
'으로의' '에로의' '에서의' '으로부터의' '에 있어서의' 와 같아 '의'를 겹쳐 쓴 토씨도 모두 우리말법에 어긋난다. 이것은 일본말 조사를 옮긴 것이다. 우리말은 그런 식으로 토씨를 쓰지 않는다. 일본말처럼 토씨를 쓰면 글이 늘어지고 운율이 죽으며 문장의 힘이 빠진다. 읽기도 나쁘고 듣기도 좋지 않다.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이 '나는 나의 집의 뒤의 나의 집의 밭의 나의 집의 복숭아를 따 먹었습니다'와 다르지 않은 문장을 쓴다. 못난 글에 대한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피동형 문장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말에는 피동문이 드물다. 반드시 피동문을 써야 정확하게 뜻을 전달 할 수 있을 때만 예외로 쓴다.
'보여지다' '되어지다''키워지다''다뤄지다''모여지다''두어지다''보아지다' 같은 것은 글뿐만 아니라 방송에도 출몰한다. 타동사를 피동형으로 쓰는 것만으로 모자라는지 자동사까지 억지로 피동형으로 만들어 쓴 문장은 우리말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단문을 써야 인물의 행위와 사건 전개 상황을 속도감 있게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만 그런 게 아니라 에세이를 쓸 때도 단문이 좋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무엇보다 뜻이 두루뭉수리 불분명해서 아무 곳에나 넣어도 되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단어를 자꾸 쓰면 어휘 구사 능력이 퇴화한다. 생각을 감추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곧바로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어휘가 너무 적어서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탓이라면 단기 해결책이 없다. 근본 대책은 독서량을 늘리는 것뿐이어서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아무리 어려운 텍스트라도 문맥을 파악하면 그런 대로 독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에게 신묘한 독해력을 요구하는 글은 잘 쓴 글이 아니다. 맥락을 잘 모른 채 텍스트를 읽어도 뜻을 아는 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써야 한다.
생각은 자유롭고 상념은 스쳐간다. 생각하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 버스 안에서든 샤워 꼭지 아래서든, 아니면 횡단보도 위에서든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아, 이건 중요한 생각이네. 꼭 기억해놔야겠다. 그런 생각도 적어두지 않으면 금방 사라진다. 이건 중요하니까 잊지 말아야지! 그렇게 결심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도 정작 그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생각과 느낌은 붙잡아 두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우리 뇌는 엄청난 용량을 지녔지만 모든 정보를 다 저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자투리 시간 글쓰기의 주제와 내용은 정하기 나름이다. 출근길 버스나 지하철 풍경을 그려도 좋고 단골 카페 인테리어를 묘사해도 괜찮다. 거리에서 진한 스킨십을 하는 젊은 연인을 부러워해도 된다. '키도 큰' 친구에 대한 시기심을 토로해도 무방하다. 트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이론에 관한 생각, 70미터 굴뚝 위에서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 드라마 <미생> 시청 소감을 적어도 된다. 어제 읽은 책 독후감도 나쁘지 않다. 뭐가 되었든 많이 쓰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방법도 있다. 창조의 시작은 모방이다. 인간의 표현 행위는 자연을 모사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고구려 고분벽화 모두 자연과 인간의 겉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사람의 몸을 비틀고 찢고 조합한 <게르니카>로 유명한 화가 피카소가 세 살 때 처음 그린 것은 비둘기 발이었다. 그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연필로 그린 말은 금방 종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실감이 난다.
긴 글보다는 짧은 글쓰기가 어렵다. 짧은 글을 쓰려면 정보와 논리를 압축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압축 기술은 두 가지다.
첫째, 문장을 되도록 짧고 간단하게 쓴다.
둘째, 군더더기를 없앤다.
문장을 짧게 쓰려면 복문을 피하고 단문을 써야 한다. 여기서 복문은 주술 관계가 둘 이상 있는 모든 형태의 문장이다. 복수의 문장을 대등하게 연결하는 '중문',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의 성분이 되는 '좁은 의미의 복문', 중문과 복문을 모두 가진 '혼성문'을 한데 묶어 복문이라고 하자. 글을 압축하려면 단문을 기본으로 하고 특별한 경우에 복문을 쓴다느 ㄴ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뜻과 느낌을 강하고 확실하게 깊게 전하려면 복문을 써야 한다는 판단이 들 때만 복문을 쓰는 것이다. 간단한 원칙이지만 해보면 금방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다. 문장의 군더더기란 무엇이며 군더더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없애버려도 뜻을 전하는 데 큰 지장이 없으면 군더더기다. 문장의 군더더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접속사(문장부사), 둘째는 형용사와 부사, 셋째는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형용사나 부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문장 요소다.
굳이 없어도 좋은 접속사는 과감하게 삭제해야 한다. 단문으로 글을 이어나갈 때 문장 사이에 매번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그런데' '그렇지만' 같은 접속사를 넣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문장은 뜻을 담고 있다. 그 뜻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접속사가 없어도 된다. 단문을 기본으로 쓰고 불필요한 접속사를 생략하기만 해도 글을 조금은 압축할 수 있다.
다른 정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쓰려면 철저하게 독자를 존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문용어나 이론을 끌어올 때는 문맥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도록 적당한 방법으로 설명을 붙여야 한다.
글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실용적인 면에서든 윤리적인 면에서든, 읽는 사람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주는 글은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 수 없다. 타인에게 텍스트를 내놓을 때는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글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려면 지식과 전문성을 내보이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형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멋진 문장을 구사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다.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써야 잘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표현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을 내면에 쌓아야 하고, 그것을 실감 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문장을 멋지게 쓰면 '글재주'를 인정받을 수 있다. '글재주' 가 있으면 '써야 해서 쓰는 글'을 어느 정도 잘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글재주'만으로 공감을 일으키거나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